세상의 모든 것을 틀어쥐고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있는 사내에게는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그가 열망하는 신을 위한 제단. 무력도 신념도 틀어쥔 채 저 뒤편에서 왕처럼 군림하고 있는 그조차 어찌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 그가 청년이라 불렸을 때 그의 신념이 된 신. 인간으로서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경이 그 자체. 신은 그를 떠났지만, 그는 신의 재림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경애하며 원망하는 그만의 신.
사내는 자주 제단에 닿아 그 이름을 되뇌곤 했다. 그 사랑스럽고도 증오스러운 이름을 언젠가 그는 다시 부르게 되리라. 자신 앞에 현신한 신을 위하여.
*
청년은 유능한 인간이었다. 청년을 보는 이라면 누구든 나기 힘든 인재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말하자면 열정과 능력이 합쳐진 유형으로, 당연히 보통 사람보다 몇 걸음씩 앞서갈 수밖에 없었다. 유서 깊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시작점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으니, 그가 거둔 것은 오롯이 그가 일궈낸 것이었다. 그걸 아는 이들은 청년이 스스로 써내려간 성공에 더욱 감탄하곤 했다.
그가 일궈낸 것은 이른바 성공의 표본으로 많은 이들의 동경을 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는 무에서 시작하여 찬란한 성공을 거머쥔 신화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때문에 그는 젊은 나이에 주목받고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였다. 그가 거둔 것은 그를 동경하는 이들에게 낱낱이 해부되었다. 세간의 젊은이 중에선 그의 단편적인 행동 하나하나까지 모방하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청년은 영민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재능으로 사람을 모았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빠르게 세력을 불려갔다.
어느새 그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지위 역시 그에 합당한 수준이 되었다. 그가 단상에 오르면 모두가 환호했다. 모두가 그라는 열병에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이름을 외쳤다. 아래에서부터 느껴지는 열띤 시선. 쏟아지는 환호. 선망의 눈길. 그 모든 것이 그가 노리는 것이고, 또 움켜쥔 것이었다. 그는 이미 민중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청년이 ‘영웅’이 된 이후에도, 그의 모든 것이 신화가 되고도, 그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를 만들고 인도한, 그의 동지에 대한 것이었다.
연회장은 열기로 가득했다. 모두가 영웅의 성공을 축하하며 축배를 들었다. 청년이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한 걸음을 뗀 날이었던 것이다. 지지를 구하는 그의 연설은 완벽했으며 민중을 감복시키기 충분했다. 이 젊은 영웅에 민중이 믿음으로 화답한 것은 물론이다. 추종자들은 이 놀라운 성공에 도취된 것 같았다. 그들의 얼굴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연회의 주인공인 청년은 쏟아지는 칭찬에 웃으며 감사했으나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청년에게 이번의 성공은 단지 목표를 위한 한 걸음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저 먼 곳의 보다 큰 그림이었다.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할 것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 완성을 맞을 때까지 그는 만족하지도 방심하지도 못한 채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 각오를 다진 청년은 추종자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동지는 늦은 시간까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여자의 형체에게로 그는 다가섰다. 기척을 느낀 여자는 돌아보고 웃었다. 동지를 맞이하는 여자의 표정은 자식을 보는 어미처럼 자애롭다.
“어땠어?”
“성공이야.”
청년의 즉답에 여자는 만족스레 웃는다. 그녀는 흠결 없이 아름다웠지만, 너무도 완벽하여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당연한 결과야. 당신은 우수하니까.”
수많은 사람에게 수없이 찬사를 듣고 그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청년이지만 여자의 칭찬은 언제나 달콤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녀의 완전한 아름다움도 그를 뒷받침하는 완벽한 계책도 모두 그녀가 상위의 존재이기 때문에 허락되는 것이리라. 지금 그는 바로 그 신적인 존재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청년은 타고나기를 영민하여 제 길을 개척해왔지만 그 과정에서 계속 그녀의 도움을 받아왔다. 여자는 때로는 부모처럼 충고했고 때로는 친구처럼 다독였고 때로는 연인처럼 함께하며 그를 지탱해왔다. 그가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리며 단 한 번의 실패도 경험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든든한 아군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왜 자신을 돕는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동지이며 언제나 아군으로 남아있으리라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하지만 반대하는 목소리도 없진 않더군.”
“당신의 본심을 알아챘다고 생각해?”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냥 경계 정도일까. 연고도 없는 젊은 것이 갑자기 치고 들어오면 당연히 그렇겠지.”
청년은 여자의 곁에 앉아 피로한 몸을 누였다. 그 누가 반대한대도, 그 어떤 위험이 있어도 그는 실패를 생각지 않았다. 그에게는 성공만이 당연했기 때문에. 그것은 합당한 오만이었다.
“그럼 됐어. 지금은 모든 걸 드러내긴 일러.”
“물론. 확실한 기회가 올 때쯤에 공표할 거야. 굳이 의심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은 언제까지나 준비 단계일 뿐이지. 우리들이 바라는 세상을 위한.”
그는 제 본심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세상을 위한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 헤맸지만, 그의 최종적인 목표는 당장은 이룰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것이기에. 그는 치밀한 인간이었으므로 타인에게 꼬투리가 잡힐 일 따위 결코 만들지 않았다.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그의 원대한 꿈은 그와 동지만의 비밀로 남을 것이다.
“다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있어. 나를 추앙하거나 매도하거나. 둘 중 하나지.”
“인간은 어리석거든. 당신은 예외지만.”
“아아, 그래.”
여자가 인정하는 인간은 청년뿐이었고 청년이 인정하는 존재는 그녀뿐이었다. 우수하고 혹은 완전한 존재이기에 그랬다. 범속한 인간이 감히 꿈꾸지 못할 능력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평범한 이들은 하위의 존재일 뿐. 그들이 세상을 위해 노력함은 바로 그 우월감 때문이었다. 우수한 존재로서 마땅히 봉사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당신은 우수하니까. 여자의 말은 달콤하게 머리를 친다. 처음부터 그녀는 말했다. 우수한 존재는 그보다 못한 이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그것은 그들이 타고난 책무라고. 당신 또한 우수하기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하지만 놀랍네. 이번 일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리 끝냈어.”
“당신 덕분이야.”
“아니. 나는 돕는 것뿐이지. 이루는 건 당신인걸.”
“왜 당신은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거지?”
처음으로 청년은 의문을 던진다.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민중의 영웅이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완전함은 넘어설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와의 격차는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듯 완전한 존재가 왜 언제나 숨어 그를 돕고만 있는 것인가. 그녀의 능력이라면 분명 목적을 단숨에 이룰 수 있을 텐데.
“나는 주인공 역은 별로라서. 그 역할은 당신이 해줬으면 좋겠거든.”
그러나 여자는 여느 때처럼 그에게로 역할을 돌린다. 처음부터 그랬다. 공동의 목적을 이야기할 때부터, 계획을 논의할 때부터. 그녀는 언제나 타인에게 비밀로 남아있기를 고집했다.
마치, 그녀 자체가 알려져서는 안 될 존재인 것처럼.
“함께할 수는 없는 거야?”
“당신 혼자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
청년은 여전히 미진한 기색이었지만 여자에게 더 캐묻진 않았다. 여자는 그런 동지에게 상냥하게 말을 던진다.
“나는 당신을 믿으니까.”
“영광이네.”
영웅은 신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가 인정한 단 하나의 존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
청년은 계산에 능했다. 그 어떤 상황이건 분석하여 그 상황에서의 최선의 방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했고 그것이 불러올 결과에 대해서도 생각해야만 했다. 목적을 위해 나아가면서 그는 민중과 기존 세력, 그리고 제 추종자와 개혁을 갈망하는 이들까지 면밀히 분석했다. 그에게 그들은 하나의 변수에 불과했다. 다만 그들은 계획의 성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요한 변수였기에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을 뿐이었다.
나날이 성공을 쌓자 젊은 영웅을 시기하는 이들이 차츰 늘어갔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기회 삼아 민중에게 더욱 호소하기도 했다. 자신이 어떤 음모에 휩싸이는지, 어떤 음해를 당하는지를 민중 앞에 낱낱이 고한 것이다. 그들의 눈에 비친 청년은 마치 박해받는 성자 같았으리라. 동정 여론이 확산되었으며 지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당신, 연기도 제법 잘하는구나.”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잃을 순 없지.”
여자의 장난 섞인 빈정거림을 청년은 가볍게 받아쳤다. 어쨌든 민중은 그를 지탱하는 존재였으며 결코 버림받아서는 안 될 지지자이기도 했다. 그들 앞에서 행동을 조정하는 것은 그들이 가장 큰 변수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을 뒤엎고 완전한 세상을 만드는 것. 그걸 위해선 끝까지 그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그 외에도 통제할 수 있는 변수는 모두 통제하려 들었다. 이변 없이 계획대로 나아가려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자는 까다로운 변수를 그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게 했다. 그녀에게 인간의 감정과 행동 따위 예측 가능한 결과일 뿐이었기에. 권력을 쥐고 있던 기존 세력은 그들의 뜻대로 제거되었다. 그 수하는 그 시점에서 이미 청년에게로 흡수된 후였다. 개혁을 꿈꾸는 신세력에게는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고 그 실현을 약속했다. 그들을 포섭함으로써 청년은 든든한 동력과 명분을 동시에 얻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추종자들에게는 언제든 그를 위해 움직이도록 학습시켰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그가 원하는 대로 새 세상을 만드는 것만이 남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동지에게 물었다. 여자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둑한 풍경 속에 드문드문 인간의 형체가 비친다. 그의 추종자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웅이 나서서 자신들을 지휘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당신 백성들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야지.”
신은 완전하며 언제나 옳다. 그는 단 한 번도 동지의 말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그 어떤 무모한 것을 요구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그가 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망설임 없이 추종자에게로 향하는 청년의 뒷모습이 여자의 눈에 새겨졌다.
계획은 성공했다. 여자는 이번에도 옳았던 것이다. 청년은 모든 이들 앞에서 선언했다. 이제 새 세상을 만들겠다고. 지금까지의 모순적인 세상을 뜯어고치고 그 어떤 결함도 없는 완전한 세상을 만들겠노라고. 청년은 저를 올려다보는 이들의 눈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기대와 환호 속에서 그는 그들을 위해 봉사하길 다짐했다. 연설이 끝난 후 기쁨을 함께하기 위해 청년은 동지를 찾았다. 이것은 그의 성공이며 또한 동지의 성공이기도 하기에. 마침내 거머쥔 성공에 도취되어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축하해. 이제 끝이구나.”
“당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겠지. 정말로 감사하고 있어.”
“인사는 됐어.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니까 그쪽에 집중하도록 해.”
“그래. 이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가는 일만 남았지. 그 전에 모두의 앞에서 발표할 생각이야. 내 파트너를.”
여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으나 들뜬 청년은 그 사소한 변화를 미처 잡아내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나의 완벽한 동지로서, 그리고 머잖아 완성될 내 유토피아의 여왕으로서 말이야.”
“왜?”
순간 공간이 얼어붙었다. 여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지만, 그것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청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그야, 당신은 내 이상의 완성이니까.”
“그러니까 이제 네 유토피아에서 얌전히 여왕 노릇이나 하라는 거야?”
그때서야 청년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챘다. 자신의 계산은 전부 옳았지만, 마지막 수식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가 상상조차 하지 않은 결과가 닥쳤다. 당연히 제 뜻대로 움직여 주리라 생각했던 여주인공이 각본을 거부했다.
“인간이란 참 우습지. 부모처럼 보듬으며 키워주면 꼭 헛된 것을 꿈꾼단 말이야.”
여자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맞먹으려 한다거나, 뛰어넘으려 한다거나, 혹은 제 뜻대로 움직이려 든다거나.”
청년은 자신이 고려하지 않은 단 하나의 변수를 떠올렸다. 여자. 그의 동지. 그가 경애하고 믿었던 그의 신. 그녀가 당연히 자신과 함께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외의 결과는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언제나 그랬지.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어. 아이가 부모와 동급이길 바라고 혹은 부모를 뛰어넘길 바라는 것처럼. 철없는 아이의 생각이라고 치부하기엔 불쾌하지만.”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결과가 닥치리라고. 그것이 그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청년의 손이 여자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아 제게로 끌었다. 순간 그들의 거리가 확 좁혀졌으나, 그것뿐. 여자는 그의 손을 매정하게 떨쳐냈다. 그 싸늘한 반응에도, 그는 제게서 등을 돌리려는 동지에게 호소했다.
“나는 당신이 함께했으면 했어.”
“동지니까? 혹은 네가 구상한 세상을 완벽하게 움직이고 싶어서?”
“전부. 당신도 나와 같은 걸 바라지 않았나? 완전한 세상, 모순 없는 세상.”
“그랬지. 이건 ‘우리’의 합작이었던가? 내가 각본을 쓰고 네가 주인공으로서 훌륭하게 연기해주었으니. 솔직히 감탄했어. 너는 내가 바라던 그 이상을 거둬냈거든. 그 때문에 내가 너무 아꼈던 모양이구나. 감히 나를 극에 끌어들이려 하다니.”
인간 주제에.
여자의 입가에 익숙한 것이 걸렸다. 아이를 보는 어미처럼 자애로운 미소. 어리석고 서툰 인간을 굽어보는 신의 미소.
청년은 자신이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며,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도 그녀보다 열등한 한낱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쪽이었지. 어리석고 오만하지만, 그렇기에 열망을 품고 신념을 실현시키곤 한다고. 그렇다면 그 중에서 우수하고 열정적인 자를 골라 하나의 변수로 삼으면 어떨까 생각했었어. 타고난 우수함에 신념에 대한 열정, 그리고 우리의 도움이 합쳐진다면 그 자는 분명 세상에 변화를 이끌어낼 테니까.”
“그것이, 설마.”
“너를 포함한 다수지.”
여자는 공간을 맴돌았다.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유감이지만 너는 처음도 아니고 우리들이 선택한 유일한 인간도 아니야. 지금껏 수없이 많은 인간이 우리들의 손을 거쳤어. 하지만 네게 한 말은 진심이었어. 너는 특출하게 우수해. 인간치고는.”
차라리 어리석었으면 좋았을 것을. 선택받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여자의 말이 그를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오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가. 자신은 그녀가 고려한 하나의 패에 불과했었나. 동지라고 생각한 것은 자신뿐이었나. 그녀에게 저는 다른 인간들보다 조금 나을 뿐인 하등한 존재였던 것일까.
“내가 변수로서 너에게 기대한 역할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까지였어. 목표는 이뤘으니 내가 더 도울 필요는 없겠지. 세상에는 너보다 열등한 인간이 가득해. 그 세상을 통제하는 것은 인간으로 충분하단다.”
여자가 돌아섰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그때 청년은 직감했다. 그때껏 그를 지탱했던 동지는 이제 영영 떠나버릴 것이라고. 다시는 그를 찾지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완전한 세상으로 돌아가리라고. 의미 없는 저항이라도 해볼 법도 했으나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가 몰고 온 충격이 그를 관통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원망해야 하는 것일까. 그녀에게 애원해야 하는 것일까. 그조차 그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녀 자체가 거대한 혼돈이 된 것 같았다.
“여기까지네. 즐거웠어.”
손을 뻗을 새도 없이 여자의 형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흔적조차 없이. 마치 지금까지 함께했던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청년은 그녀가 사라진 쪽을 한동안 응시하다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을 붙들었던 감각만이 선명했다.
*
청년은 얼마간 칩거하다 나타났다. 그리고 슬픈 소식을 발표했다. 그때까지 그를 지탱하던 동지가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급작스러운 비보에 모두가 눈물짓고 애도를 표했다. 시신 없는 장례가 끝난 날, 청년은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제 곁에 없지만 그녀와 자신이 함께 꿈꾸던 세상을 반드시 만들어가겠다고. 그 유토피아의 완성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일 것이라고. 박수가 쏟아졌다. 청년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그 눈에는 차가운 비장함이 서려있었다.
청년은 제 말을 지켰다. 정말로 꿈꾸던 세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걸 위해 수많은 이들의 비탄과 희생이 필요했건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사소한 희생 따위 더 큰 목적을 위해선 감수해야 할 비용에 지나지 않으므로. 게다가 그는 자신의 백성에게는 결코 희생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바치는 것은 언제나 타인뿐. 그러면서 언제나 백성에게 희생자에 대해 주입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미개한 인간이며 우리 우수한 인간들이 짓밟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것은 숭고한 행위라고.
그녀는 옳았다. 민중은 우매했고 그는 우수했기에 결국 공동의 목표를 이뤄냈다. 그러나 그는 바라던 세상 앞에서도 온전히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유토피아는 미완으로 남았기 때문에. 그 완벽한 세상에는 그에 어울리는 지배자가 없었다. 그가 왕관을 바칠 이가 없었다. 여자는 그를 떠남으로써 그의 유토피아를 불완전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으니.
시간이 흘러 청년은 더 이상 청년이라고 불리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그동안 그의 유토피아는 착실히 커져왔다. 꼭두각시 지배자를 세운 채, 영웅이었던 사내는 그 뒤에서 비밀스레 군림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끝없이 불완전한 부분을 채우고픈 욕망에 휩싸였다.
완전한 지배자를,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존재를.
그때 저 아래 간직하고 있던 복수심이 꽃을 피웠다. 오래 전 저를 떠난 동지가 떠오른 것이다. 흠결 없이 완전한 존재. 감히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인 신. 그렇다면 이것은 어떨까. 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장 완전한 지배자를 만들어 유토피아에서 영원히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아, 이렇게 잔인하고 불손할 수가!
인간으로서 감히 신을 만들고 신을 영원의 굴레에 가둘 생각을 한 것이다. 이 끔찍한 계획은 그의 열망에 따라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그는 목표를 위한 조각을 하나씩 모았다. 그들은 그의 시스템을 통해 마침내 하나의 완성된 신이 되리라. 그 모델로 삼은 이는 당연하게도 그를 떠난 신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복수가 아닐까.
신은 조금씩 그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머잖아, 마지막 조각만 모으면 그가 바라는 신으로 탄생하리라. 그렇다면 신은 그 앞에 재림하는 것이다. 성공을 눈앞에 두었을 때 그는 신을 위한 제단을 찾았다. 그리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당신은 인간의 손에 다시 탄생하여 유이한 존재가 되고 인간의 유토피아에서 군림하리라고.
경애와 원망과 저주를 담아, 가여운 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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