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썩 미인은 아니었다. 적어도 사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칼날 같은 아름다움은 인정했으나, 그뿐. 길쭉하게 뻗은 몸은 지나치게 말랐으며 금빛 눈은 형형하게 빛났으나 생기가 없었다. 너무도 날카로워 다가오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마저 깨질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 굳이 따지자면 여자는 꽤 아름다운 편이었다. 다만 사내가 그녀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런 류의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필요한 사람이었으나, 그렇게나 아찔해서야. 위험부담이 큰 타입이었다.
물론 그는 여자를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위험한 행동을 막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인간을 다루는 법이란 실은 간단했다. 원하는 것을 주고 때로 달래고 때로 몰아세운다. 특히나 그녀처럼 목적에 충실한 인간이라면 더더욱 간단한 일이다. 협력관계라 해도 실은 계약관계에 가까운 그들이었다. 사내는 여자를 제멋대로 부리면서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도 그럴 것이다.
어차피 목적을 위해 뭉친 이들이니만큼 그들을 움직이는 건 목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목적을 위한 열쇠를 쥔 건 사내 쪽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일견 부당한 명령에도 날카로운 본성을 숨긴 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누가 그들을 협력자라고 했던가.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건 당연히 그였다. 협력자니 뭐니 해도 결국 보기 좋은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여자는 그의 목적을 위한 장기짝에 불과했다. 쓰기 좋은, 그러나 관리하기 까다로운. 그가 틀어쥔 다른 변수와 다를 바 없다.
─ 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군. 사내는 제 감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저 속으로 삼켰을 뿐이었다. 의자에 앉은 여자의 뒷모습은 낯설었으나 아름다웠다. 평소라면 냉랭한 감상을 내뱉었을 테지만 지금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고집스레 걸치던 낡은 코트는 벗어둔 모양이었다. 대신 그녀는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의 가는 몸에 묘하게 어울렸다. 창밖을 보는 얼굴엔 보기 드문 평화로운 웃음이 걸려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평화롭게 살았더라면 그녀는 이런 모습으로 지냈을까. 사내는 여자의 선을 몰래 손가락으로 따라 그려보았다. 결핍이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아깝군.”
그 역시 속으로 삼켜야 했던 말이었으나 무의식적으로 내뱉고 말았다. 여자가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지?”
“너는 이런 일을 하기엔…….”
“당신이 할 말인가.”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여자가 깔깔댔다. 제가 생각해도 우스운 말이라 사내는 얼마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를 전사로 부리는 장본인인 주제에, 아깝다고?
“자주 드는 감상이다.”
“말했을 텐데.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그것은 체념에서 나온 말이다. 사내는 생각한다. 여자는 병든 사람이라고. 오래도록 지속된 불행이, 그 극도의 절망이 그녀를 피폐하게 만들어 모든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리게 했다고. 여자를 살피는 그는 때로 환자의 병을 진단하는 의사와 같다. 증세를 분석하고 원인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는 처방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녀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혹은, 그녀가 치유불능으로 망가졌기 때문에.
불행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 그녀 역시 그 피해자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주 그런 말을 입에 올린다. 나는 아무래도 좋아. 그 앞에는 생략된 말이 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제 모든 것을 쏟는다. 그것만이 지금의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므로.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미련도, 분노도, 안타까움도. 사내는 텅 빈 여자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망령처럼 소름끼치는, 그러나 다분히 유혹적인.
언제 여자를 처음으로 안았던가. 기억을 더듬어도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그녀와 계약을 ─ 협력이라는 말에 그녀는 코웃음치고 계약이라고 정정해주었다 ─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여자는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좋아.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내는 여자가 더욱 불쾌했다. 여자는 그 따위의 말을 하며 그 따위의 생각을 하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런 유형의 인간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안다. 그것은 가장 비참하고 허망한 것이다.
여자에 대한 불쾌감이 치솟을 때마다 사내는 여자를 안으며 마디마디 상처를 입혔다. 무방비상태인 그녀를 참으로 깊게 찔렀다. 그녀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말들을 쏟아부었다. 여자는 당연히 그 저주에 분노해야 했다. 적에게 그렇듯 그를 물어뜯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웃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웃음이었다.
“아니면, 이 전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려고?”
여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제야 사내는 상념을 떨치고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온다.
“싫어도 곧 벗어날 거다.”
“꽤 자신 있는걸.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믿는 구석이라……너도 그 중 하나라고 한다면?”
“오합지졸 소년병들 따위를 믿는다고?”
“너를 포함한 랜서즈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 내가 직접 뽑은 정예병이다.”
“정예병?”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명백하게 비웃고 있었다. 여자는 무엇이건 신뢰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애초에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쿠로사키. 너는 우수한 전사다. 그들도 마찬가지지. 실력을 발휘할 때가 분명 온다.”
“그래, 어디 한 번 잘난 지휘관님을 믿어보도록 하지.”
여자는 건성으로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녹색을 띤 머리카락이 순간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혼자보다는 다수가 나을 테니까 말이야.”
혼자라. 드디어 그렇게 칭하게 되었는가. 여자는 언제나,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리’라는 말을 썼다. 단신으로 이곳에 들어온 주제에 이전까지 함께하던 이 때문인지 자꾸만 ‘우리’를 말했다. 함께 온 동료가 사라졌을 때도. 그러나 결국 여자는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는 ‘나’라는 단어로 대체된다. 그녀의 곁에는 이제 아무도 서지 못한다. 같은 목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있다 한들, 철저한 이방인인 그녀와 함께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사내는 만족스레 웃는다.
“어디 갈 작정이지?”
“그냥 바깥이다. 이곳의 밤은 평화로워서 좋군.”
“허락하지 않는다면?”
“내 몸의 자유까지 묶을 권한은 없어. 지휘관님.”
여자는 제 앞에 선 사내의 가슴팍을 밀치며 아무렇지도 않게 방을 빠져나갔다. 가냘픈 몸이 세찬 바람에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언제나 저렇듯 깨어질 듯한 모습으로 가장 위험한 것을 꾀하고.
그는 문득 속에서 치미는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증오와 닮아있었다.
*
그녀를 왜 증오하느냐 물으면 사내는 답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행동 중에 불쾌한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을 이유라고 하기엔 무언가 부족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녀를 증오하는 것인가. 사내는 고민했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사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는 채 덱을 조정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럴 때에야 여자는 제 나이로 보인다. 십대의, 아직은 어린 소녀로. 그렇다면 평소에는 어떠한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처럼, 미련도 없이.
그는 여자를 증오하는 이유 하나를 찾아냈다. 첫째, 쿠로사키 슌은 꼭 죽어가는 사람처럼 군다. 아직 살아갈 날이 창창하게 남은 주제에, 모든 불행을 떠안고 그에 짓눌려 노쇠하기라도 한 것처럼. 여자는 언제나 무기력함에 짓눌려 있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염시키는 것이다. 그녀의 곁에 있으면 자신마저 그 음울한 색채에 젖어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뭘 그렇게 보고 있지?”
중저음의 목소리에 사내는 안경을 고쳐 썼다. 그새 할 일을 끝낸 모양인지, 여자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놀란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내는 덤덤하게 답했다.
“피곤해 보이는군. 분석 작업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가.”
“곧 끝날 거다.”
이세계는 미지의 영역. 그곳으로 향하기로 결정한 이상, 모든 변수를 분석해볼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일을 다시 잡으려다 급작스러운 현기증에 휘청거렸다. 일순 흐릿해진 시야에 여자가 들어왔다. 일렁이는 형체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그의 상태를 점검하려는 듯 그를 훑었다.
“내내 숫자만 보고 있으니 그렇게 되는 거다. 바깥바람이라도 쐬지 그래?”
“걱정은 고맙지만 별로 필요한 것 같진 않은데.”
“그러다 몸도 정신도 망가져.”
“경험에서 나온 충고인가?”
심술궂게 받아쳤다.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를 몰아세워온 여자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사내의 기대와는 달리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없기는. 그는 설핏 얼굴을 찌푸렸다.
이세계에 온 이후 그는 여자를 증오하는 이유를 하나 더 찾아냈다. 둘째. 쿠로사키 슌은 지극히 본능적이다.
그것만이라면 나으련만, 그녀를 본능대로 움직이는 것이 그녀가 집착하는 목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목적에 충실하여 다루기 쉬운 그녀이지만 목적이 본능을 깨우면 폭약이 된다. 단독행동도 서슴없이 꾀하는 그녀를 제어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여자는 결코 보호받을 수 없는 곳에서 단독행동을 감행했다. 여자를 찾아낸 사내는 아무런 반성도 내비치지 않는 여자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여자는 팔짱을 끼고 눈을 내리깐 여유로운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는 있나.”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내는 겨우 물었다.
“성공했으니 된 것 아닌가.”
“다른 전사들은 어쩌려고 그런 짓을.”
“그래서 혼자 움직인 거다. 피해를 입더라도 내 선에서 끝나도록.”
“너를 잃었을 때 우리의 손실을 생각해본 적 있나?”
“손실?”
여자가 깔깔댔다. 그 웃음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아서 사내는 소름이 끼쳤다.
“나를 전력으로 생각하고 있긴 했던 모양이지?”
“겨우 그 정도의 감상밖에 없는 모양이군.”
“그럼, 그 이상을 바라?”
“최소한의 반성이라도 하는 게 어때. 너를 걱정한 이들을 비웃기라도 할 작정인가?”
“몰라. 그런 인간들 따위.”
“실패했을 경우는?”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 목적을 위해서라면 나는 아무래도 좋아.”
또다시, 그 말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사내는 이제 너무도 잘 알았다. 사내는 여자를 증오하는 이유를 더 찾아냈다. 셋째, 쿠로사키 슌은 자신조차 소중히 하지 않는다. 사내는 이것이 치명적으로 불쾌했다.
“아무래도 좋다고 했지.”
사내는 기묘한 감정에 들떠 여자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 가는 몸을 밀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자세를 낮추어 여자의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 양 손목을 붙들었다. 앙상한 손목은 사내의 억센 손에 쉽게 잡혔다. 여자는 사내에게서 손을 빼려고 버둥거렸지만 그 힘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그 얼굴에 분함이 떠올랐다. 보기 드문 표정에 사내는 희열마저 느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쿠로사키. 너를 시험해보는 거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지를.”
여자의 금빛 눈이 커다래졌다. 이럴 때 사내는 지극히 악랄하다. 여자를 뒤흔들만한 것을 쥐고는 마치 관대한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상냥하게 말한다.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말이야. 할 수 있을까?”
“반항하지 않는다면?”
“그야 네가 원하는 걸 줘야겠지. 아카데미아에 대한 고급 정보? 원군? 무엇이든 좋아.”
사내는 언제나 생기 없던 여자의 눈이 처음으로 저와 비슷한 열기를 띠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몹시 흥미롭다.
“자, 어때. 해볼 마음은 있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사내는 여자의 목을 휘감은 스카프를 벗겨냈다. 얇은 스카프가 풀어진 곳에는 여자가 타인 앞에 거의 드러낸 적 없는 희디흰 목덜미가 보였다. 여자의 손목을 놓아준 사내는 양손으로 여자의 목을 감쌌다.
그리고 바로 목을 졸랐다.
제아무리 미련이 없는 여자라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쏟아내는 여자라도 본능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내버리는 사람은 많지만 생존본능마저 거세된 인간이 있을 리 없다. 여자 또한 그래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저항하지 않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에도 텅 빈 눈은 허공을 향했으며 조금의 버둥거림조차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자가 속삭인 가능성 때문에, 겨우 목적 하나 때문에!
그때 사내는 깨달았다. 여자는 망령이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망령이었다. 목적이라는 사념 때문에 이승에 머물 뿐인 망령이었다. 그 무기력함에 질려 사내는 손을 뗐다. 유난히 흰 피부에 제가 남긴 검은 자국이 얼룩처럼 남아있었다.
*
그 날 이후, 사내는 차마 여자를 증오하지 못했다. 그녀라는 인간에 완전히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괴물 같은 인간이 존재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생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며, 그것을 뛰어넘는 목적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설마 그 간단한 법칙마저 뛰어넘는 인간이 존재할 줄은. 지금껏 그는 껍질만 남은 사람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는 망령과 함께했던 것이다.
죽음으로 걸어가면서도 여자의 얼굴에는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원망이나 저주도 없다. 그것이 사내를 미치게 했다. 여자를 놓아준 사내는 여자의 무기력에 전염된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이 기지로 돌아와, 사내가 그녀를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내려놓고 돌아설 때까지도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여자는 그 일에 대해서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타인에게 목에 남은 자국을 들켰을 때도 대충 얼버무렸을 뿐이었다. 사내 역시 그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렸다. 그렇게 그들은 침묵했다.
이후 사내는 여자를 죽은 자처럼 대했다. 그녀가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외면하고 필요할 때만 입을 열었다. 여자 역시 그 냉랭함에 동조하여 그들은 최대한 마주치는 것을 꺼렸다. 애초에 그들은 철저한 타인이었다. 목적을 위해 협력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 정도의 거리가 더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전투를 위한 것이었지 서로에 대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들이 함께하는 것도 그가 지휘관으로서 명령을 내릴 때뿐이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이따금 여자를 안았는데, 전처럼 여자를 매도하는 대신 그녀의 몸에 작은 상처를 입혔다.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조금씩. 흰 피부에 붉은색으로 새겨지는 상처는 느리게 아물었다. 그 행위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사내는 알지 못했다. 원망인가. 투정인가. 사내는 무언으로 상처를 새겼고 여자 역시 그를 등진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면 사내는 여자의 몸을, 뼈를 타고 손으로 쓸었다. 앙상하기 짝이 없는 몸. 텅 빈 그녀처럼 볼품없는 몸이었다.
어느 날 사내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는 과거에 살고 있다.”
사내는 탄식하듯 선언했다.
“네 시간은 이미 행복했던 과거에 멈춰있는 거야. 모두를 잃기 전의 그때 말이지. 그렇기에 너는 현재를 보지 않는다. 현재를 보지 않으니 당연히 미래를 볼 수도 없어. 그래서 너는 언제나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처럼 구는 것이다. 네 세상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리고 너 역시 세상과 함께 끝나버렸으니까.”
그것은 여자에 대한 그의 진단이었다. 그때까지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그는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를 파악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정곡을 찌른 것일까. 언제나 그에게 등을 보이던 여자가 돌아보았다. 그에 희망을 품고, 사내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현실을 보는 거다. 쿠로사키. 과거는 너를 구하지 못해. 현재를 보고, 현재의 사람과 함께하고, 나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알지도 못하면서, 사내는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나를…….”
여자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끝내 사내를 외면했다. 사내는 절망했다.
그 날이 그들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결국 목적을 이루어 온 세상을 삼키려는 계획을 저지했다. 그녀가 바라마지않는 결말이 찾아든 것이다. 사내는 여자를 살폈지만 그 얼굴에는 기쁨 대신 괴상한 것이 떠올라있을 뿐이었다. 그랬던가. 그녀는 감정조차 망각한 망령이었던가. 잠시 기대했던 저를 비웃으며 사내는 여자를 지나쳤다.
목적만이 남은 망령에게 목적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가. 말라죽는가. 새로운 목적으로 빈 곳을 채우는가. 사내는 알 길이 없다. 상황이 마무리되자마자 여자는 인사 없이 그의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 뒷모습을 보며 사내는 저주를 퍼부었다. 너는 살아있는 망령이기에, 끝내 말라죽을 것이라고.
결국 사내는 여자를 증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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