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손가락이 허공을 갈랐다. 그에 응하듯 몇 마리의 새가 위태롭게 날았다. 윤곽조차 또렷하지 않은 새는 환상으로 빚어낸 듯하다. 다만 날카로운 울음과 희미하게 비치는 무시무시한 발톱은 분명 맹금의 것이었다. 지휘하듯 우아한 손길에 맹금은 서서히 형체가 또렷해지더니 사납게 먹잇감에게 달려들었다. 상대를 쉴 새 없이 노리는 청년의 공격을 전사를 내세워 방어하던 소년은 청년의 맹금에 빠르게 벽을 잃었다. 방어의 수단이 사라진 소년은 이내 날아든 타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전투가 종료되자 맹금은 주인의 곁을 맴돌다가 서서히 빛으로 변했다.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전투였지만 전사 양성학교인 이곳에선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학생들에게 실전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한 모의전. 물론 목숨이 걸린 진짜 전투는 아니기에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되며 상대에게 입힐 수 있는 타격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전투를 지켜보고 평가하는 자들도 있어 몇 발짝 물러서서 보면 세상에서 말하는 전투와는 무게가 달랐다. 그러나 전투는 전투여서, 지켜보는 학생들은 끝까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모의전은 승패가 갈렸을 때 비로소 ‘연습’ 전투로 남는다. 승자에게 환호가 돌아가는 것도 그때부터였다.
“역시 쿠로사키 선생님!”
자신에게 향한 경탄 섞인 목소리에도 청년은 무표정하다. 환호에 답하는 일도 없이 그저 쓰러진 소년이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공격에 휩쓸린 충격 때문인지 소년은 일어서면서도 조금 비틀거렸으나, 그 얼굴에 비친 것은 패배의 굴욕이 아니라 열기였다. 어마어마한 실력차를 뻔히 알면서도 질릴 정도로 청년에게 도전해온 소년이었다. 강사로서 자신을 가르친 청년의 전투에 단단히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선생님을 쓰러트릴 거예요.
수없이 패하면서도 좌절하기는커녕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소년이었다. 그렇게 의욕적으로 덤벼드는 학생을 차마 모른 체 할 수 없어 청년은 결말이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도전을 수없이 받아들였다. 모의전은 수업의 일환. 전사가 되기 위해 훈련받는 이곳의 학생에게는 모의전이 실전을 위한 소중한 경험이 될 터였다. 실제로 거듭 도전하며 소년의 실력은 꽤 늘었다. 처음에는 방어조차 변변찮았던 것이 이제 저돌적으로 공격해오기까지 했다. 도전한 상대가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청년이 아니었더라면 팽팽한 싸움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괜찮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의실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다만 청년이 몇 걸음 앞서 성큼성큼 걸었고, 소년은 그런 청년을 따라잡으려 분주하게 걸었다. 속도를 내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도전자로서 마주하는 청년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리 전략을 분석하고, 동기를 동원해 모의전을 위한 모의전을 해보아도 막상 청년에게 도전하면 무참하게 무너질 뿐.
[선생님을 따라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젠가 소년은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너무도 답답해 청년에게 직설적으로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청년은 금빛 눈을 내리깔며 천천히 답했다.
[경험이 쌓이면 될 거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
[선생님도 거기까지 다다르기 위해 엄청난 경험을 쌓으신 거군요.]
[그래, 바라지는 않았지만.]
‘엑시즈’라 불리는 코스를 가르치는 청년은 강사들 중에서 유독 앳된 얼굴이었다.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이 이미 십대 중반 즈음의 청소년임을 감안하면 학생들과 큰 차이는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실력은 압도적이다. 이곳에서 상위권에 드는 학생들은 현역으로 뛰는 자들과 싸워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의 실력자인데 그 중 누구도 청년을 이기지 못했다. 많지 않은 나이에 그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쌓아왔을지, 소년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바라지는 않았다고요?]
[살다보면, 바라지 않은 전장에 내몰리기도 하거든.]
전장이라는 단어에 소년은 움찔했다. 청년이 사용하는 언어는 전장을 포함해, 거칠고 무시무시했다. 젊은 나이에 이미 엄청난 풍파를 겪어 말조차 무거워진 것처럼.
[경험은 인간을 완성시킨다. 다행히도 너는 이곳 LDS에서 보통 학생들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쌓게 되겠지. 그 모든 것에 집중해라. 방법은 그것뿐이야.]
그 말을 마음에 새긴 소년은 그 후로 부지런하게 모의전에 참가했고 전에 비해 발전된 실력으로 청년에게 맞설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것은 청년이 쌓아온 것과 자신이 쌓은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기 때문이리라 생각하고서. 다만 하나, 언제나 아쉬운 게 있다면.
“그런데 선생님은 이번에도 완전개방을 하지 않으시더군요.”
청년은 학생들 앞에 단 한 번도 최대한의 실력을 보인 적이 없었다. 소년은 청년을 공략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데 청년은 적당히 도전자를 누를 뿐이다. 그 증거는 청년의 무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무기는 전투력을 얼마나 동원하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청년의 무기인 맹금이 환상처럼 흐린 것은 청년이 전투력의 일부만을 사용하기 때문. 대부분의 학생들이 승부를 내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의 힘을 매번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제 실력이 부족해서인가요?”
청년은 답을 피한다. 아직도 열기에 젖은 채인 학생은 청년의 회피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하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럼 승패도 더 빨리 결정되었을 테고.”
“거기까지 개방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나.”
“어려운 승부를 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말 그것 때문에?”
“물론 선생님의 완전개방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기도 해요. RR의 최종형태가 어떨지!”
한껏 들뜬 소년의 목소리를 청년은 냉정하게 잘라냈다.
“앞으로도 볼 일은 아마 없을 거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무의미한 힘자랑을 하지 않을 뿐이야. 실전에서 그런 건 낭비니까.”
끈덕지게 따라붙는 학생을 적당히 떨쳐내고, 청년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낭비. 방으로 들어서며 청년은 자신이 던진 단어를 곱씹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것을 낭비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청년은 사정이 달랐다. 청년에게 힘을 끌어내는 것은 생명력을 깎는 일. 싸움을 위해 무기를 사용하면 수명이 줄어든다. 힘을 완전히 끌어내면 큰 타격을 입는 것이 당연했다. 실제 전투라면 모를까, 모의전에서 무리하게 힘을 쓰는 건 명백히 낭비였다.
몸이 갉아먹힌다는 것은 그만큼 싸울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 청년은 자신이 앞으로 싸울 날을 생각해 힘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청년은 최소한의 힘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상대는 문제없이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만큼 재능 있는 전사였고, 그만큼 노련한 자였기에. 우수한 학생들이 기를 쓰고 덤벼들어도 그를 쓰러트리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엘리트로서 이론부터 교육받아 모의전에서 적용하는 학생들과는 다르게, 그는 어린 나이에 바로 실전에 던져졌으므로. 심지어 그것은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는 모의전이 아니라 실제 전쟁이었다.
전쟁. 그의 삶에서 그 단어를 빼면 무엇이 남는가. 청년은 전쟁을 뺀 삶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의 삶을 규정한 것은 전쟁이었고, 방향을 결정지은 것 또한 전쟁이었으므로. 전쟁은 그가 소년이라 불릴 나이에 닥쳤다. 그 후로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밀려들어온 침략자에 세상은 매일 부서졌고 눈을 뜨면 아는 사람이 사라져 있었다. 이유도 모르고 쫓기며 붙들리지 않기만을 바랐고, 총성과 포음은 삶의 일부가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으나 그들 또한 언제 쓰러질지 모를 자들이었다. 오늘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며 눈을 붙이고 내일을 맞이할 수 있기만을 바라야 했다.
그 지옥 같은 세상에서 하루라도 벌기 위해서는 숨죽이고 숨어들거나, 무기를 들고 침략자에게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숨는 것엔 한계가 있었고 침략자는 생존자를 발견하는 족족 자비 없이 짓밟았다. 물러설 곳도 없을 정도로 몰리자 결국 사람들은 무기를 들었다. 그 중에는 물론, 당시 소년에 불과했던 청년도 있었다. 포위당한 먹잇감은 최후의 발악으로 포식자를 물기 마련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침략자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결국 살아남았다. 전쟁의 끝에 살아남아, 지옥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가 살던 곳이 지옥에서 평범한 세상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것은 더 이상 짓밟을 것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것은 찾아볼 수도 없게 된 고향을, 청년은 스스로 떠났다.
지금 청년이 있는 곳은 침략자가 닿지 않는 평화로운 도시. 그런데도 굳이 전사양성학교의 강사직을 맡은 것은, 청년의 편의를 봐주고 있는 사내의 요청 때문이었다. 침략자의 목표는 세상을 손에 넣는 것. 언젠가는 이곳에까지 마수를 뻗칠지도 모른다는 판단으로 사내는 전사를 키우려 했다. 지독한 전쟁 속 살아남은 청년은, 전사가 될 학생들을 키울 자로 마땅했다. 바란 적은 없으나 쌓을 수밖에 없었던 실전 경험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학생들이 그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은 전장의 참혹한 날들이 청년을 살아있는 병기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버려야 할 것이 많았다. 인간에 대한 믿음은 침략자의 무자비함을 본 때 버렸다. 무기를 들어 타인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가책은 침략자를 막기 위해 버렸다. 모든 것을 앗아간 자들에게 맞서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 치곤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으면 싸울 수 없을 것이고, 싸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고, 살아남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구할 수 없을 테니.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만을 남기고 단단히 무장한 청년은 이미 병기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렇게 처절하게 싸웠는데도, 청년이 전장에서 건진 것은 자신의 목숨뿐이었다. 황폐해진 고향은 침략자의 손에 들어가고, 아끼던 사람은 대개 죽었다. 하나뿐인 누이도 적에게 납치당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슬프게도 청년은 싸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싸워서, 누이를 구해야 했다. 적을 무너뜨려야 했다. 그것이 그를 움직이는 목표였다.
그걸 위해서 그가 선택한 것은.
청년의 시선이 자신의 손등으로 향했다. 흰 손에 붉은색으로 새겨진 각인은, 그의 무기를 상징하는 표식. 동시에 그의 수명이 줄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식이기도 했다. 무기를 사용할수록 청년의 몸은 망가졌으며 각인도 희미해졌다. 본래는 핏빛처럼 짙었던 것이 이제는 빛을 많이 잃었다. 저것이 완전히 빛을 잃는 날엔 그의 생명도 완전히 꺼질지도 모른다. 청년은 각인을 통해 자신의 남은 수명을 짐작하곤 했다.
시시각각 목숨을 갉아먹는 무기를 쥔 것은 싸움을 어서 끝내기 위해서였다. 강력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은 저주받은 물건에 흔히 따라붙는 이야기. 청년의 무기 역시 그러해서, 위험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대가로 사용자를 갉아먹는 특성이 있었다. 무기를 처음 손에 넣은 순간부터 몇 년 사이 청년의 몸은 착실하게 망가져, 젊은 나이에 이미 죽음을 생각해야 할 정도로 황폐해져 있었다. 빠르게 드리워지는 죽음의 그림자에도, 청년은 절망하지 않는다. 싸우기 위해 위험한 수단을 택한 것은 자신이었고, 그 덕분에 일궈낸 것에 대해서는 만족하고 있었다.
다만,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싸움을 끝내고 누이를 구한다는 목표를 이루기만 한다면 자신의 미래는 어찌되어도 좋았다. 문제는 목표를 이룰 때까지의 일. 아무리 제어를 통해 늦추고 있다 한들 수명이 빠르게 깎이고 있는 것은 사실. 몸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싸움을 마치기 전에 그가 먼저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사를 키워낸다면 그들이 언젠가 세상을 구할 것이다. 강사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인 것도 그래서였다. 이곳에서 그가 할 일은 미래를 구할 전사를 가르치는 것. 죽음에 잠식당하고 있는 청년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희망이었다.
*
펜촉이 종이 위에서 바삐 움직였다. 고풍스러운 글씨로 담아내는 것은 관찰대상의 하루에 대한 기록. 감정이나 평가를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담아낸 관찰기였다. 사내가 대상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그것을 통해 대상을 진단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관찰대상은 매일 상태를 확인하고 점검해야 할 정도로 까다로운 존재였으므로. 잘 벼린 이성을 자랑하는 사내로서는, 매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증상을 분석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다만 하나 유감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의 관찰대상은 그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사내는 자신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의 이상에 대해 그만큼 잘 아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관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이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며 자신을 들여다보지도 않으면, 그는 자신의 붕괴를 방관하다 사태를 악화시킬 것이 분명했다. 매일 붕괴하는 자신의 모습을 꼼꼼히 기록하는 것은 참담한 일이었으나, 외면하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보단 나았다.
[아카바 레이지는 미쳐가고 있다.]
첫 기록이었다. 자신의 이상을 알아차린 날 처음으로 쓴 문장. 사내는 명백히 미쳐가고 있었다. 이성은 조금도 쇠하지 않았으나 그라는 인간 자체가 날이 갈수록 붕괴하고 있었다. 원인은 명백하지만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타인에게 광증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에서 비롯한 체념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당장 짊어진 것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걸 마무리하기 전까지는 공연히 타인의 걱정을 사 지금의 위치에서 이탈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의 상태를 분석할 이성이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병이 깊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해도 끊임없이 자신의 이상을 되새기며 행동을 조심할 수 있었고 속도를 늦출 장치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의 양 귓불에 단단히 박힌 피어싱이 병의 진행속도를 늦추는 리미터였다.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병에 완전히 먹혀 진즉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으리라. 거기에 하나, 그를 조정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면.
기록을 마친 사내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청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내가 운영하는 전사양성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자였다. 많지 않은 나이에 상당한 경험을 쌓은 전사를 신뢰하는 것은 당연했으나, 사내가 그를 자신의 곁에 두는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는 자신의 이상을 아는 유일한 타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방향은 다르지만 본질은 비슷한 병을 안고 있는 자로서, 두 사람은 서로의 이상을 알아채고 이해해줄 수 있었다.
“쿠로사키, 오늘의 상태는?”
담담하게 흘러나온 사내의 목소리에, 마찬가지로 건조한 답이 돌아왔다.
“평소와 다를 바 없다.”
“악화된 것은?”
“글쎄, 잘 모르겠군.”
청년의 목소리에는 그 이상의 물음을 끊어내려는 냉랭함이 깃들어 있었다. 사내도 이해할 수 있는 태도였다. 나날이 망가지는 자신의 상태를 낱낱이 파헤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청년은 사내의 질문에 답하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붉은 스카프로 가리고 있는 목엔 초커가 채워져 있다. 초커의 역할은 사내가 하고 있는 피어싱과 비슷했다. 병의 진행속도를 늦추는 것. 늦추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건 의료기술의 한계 때문이 아니었다. 청년의 병 역시 사내의 것처럼, 누구도 고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병은 싸움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두 사람은 침략자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침략자에 맞서길 택했고 보다 나은 싸움을 위해서 강력한 무기를 쥐었다. 강한 힘에는 대개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 그들이 선택한 무기는 힘의 대가로 사용자를 갉아먹는 저주가 서려 있었다. 때문에 청년은 생명을 나날이 깎이고 사내는 날이 갈수록 정신이 망가지고 있었다. 싸우는 이상 무기는 버릴 수 없었고, 무기를 사용하는 이상 타격은 피할 수 없다. 어차피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지금처럼 진행속도라도 늦춰 조금이나마 더 버티는 것이 최선이리라.
“처방받은 약은 제대로 복용하고 있겠지?”
“물론.”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아도 증세를 완화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고 하니 꾸준히 복용하는 것이 좋을 거다.”
“타인을 신경 쓰기 전에 너부터 신경 쓰는 게 어때.”
불쑥 튀어나온 말에 사내는 침묵했다. 청년의 눈이 날카롭게 그를 훑고 있었다.
“내 몸이야 LDS의 강사들이라면 전부 아는 일이고 이곳에서 관리해주고 있지. 하지만 너는? 누가 너를 관리하지?”
“걱정해주는 건가. 나쁘지 않군.”
“가볍게 듣지 마. 내가 네 상태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하나?”
청년은 알고 있었다. 무기에 서린 저주가 얼마나 악랄한지. 그것이 사용자를 어떻게 갉아먹는지. 몸이 망가지는 것은 오래 전에 체념했다. 전장에서 이미 수년 전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처지로 용케 살아남지 않았던가. 싸움을 마칠 때까지만 버텨줘도 감사한 일이고, 그 전에 쓰러진다 해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달랐다. 사내는 자신과는 달리 싸움이 끝나고도 살아갈 날이 길었다. 싸움이 끝나 무기를 내려놓게 되더라도 무기 때문에 망가진 정신이 돌아올 리 없는데, 단단히 미친 채로 긴 세월을 버티는 것은 너무도 끔찍하지 않은가.
그것도 자신의 광증을 분석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단련된 이성을 가진 사람이.
“치료를 권유하고 싶은 것인지?”
사내의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졌다. 같은 저주를 안은 사람이기 때문인가. 자신도 망가지고 있으면서 청년은 사내의 문제에까지 시선을 뻗치고 있었다.
“몸의 이상은 숨기려 해도 보인다. 하지만 정신의 이상은 감지하기 쉽지 않아. 나는 이미 미쳐있지만 누구도 이상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어. 드러나는 증세가 없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지. 내가 아무리 내 병에 대해 설명한들 너 이외에 누가 그걸 믿을 수 있지?”
[너는 나를 믿어야 한다.]
과거 청년이 던진 말이었다. 정신이 황폐해진 사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나만은 믿어도 돼. 나는 너와 같은 족속이니까.]
침식되는 이들끼리는 서로의 쇠퇴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인가. 그 전까지 말을 꺼낸 적도 없는 사내의 병에 대해 청년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가 겪는 것이 대강 어떠한 것인지도,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으로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청년은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사내의 세상에 자신이 있음을 알렸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그와 같은 저주를 안고, 그를 이해해줄 수 있을 사람을. 그래서 사내는 청년을 붙잡고 버텼다. 세상을 사랑하는 한편, 광증 때문에 세상에 대한 의심과 환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그를 아슬아슬하게 매어두는 것은 청년이었다.
아마 청년도 그럴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상대뿐이고 함께해줄 수 있는 것도 상대뿐이기에. 그들은 뿌리부터 동지였다. 목적도 같고, 적대하는 이도 같고, 감당해야 하는 것도 같아 함께할 수 있는.
“그래도 내가 미쳤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나 하나만이 아니라는 건 다행이라 생각해.”
“그것으로 충분하나?”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차분한 목소리에 처연함은 비치지 않는다. 청년이 미래에 대해 체념하고 있듯, 사내도 자신의 상태에 대해선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그들만이 공유하는 지점에 대한 이야기는 대개 그런 식의 체념이나 서로간의 위안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엑시즈 코스의 학생들의 대전 성적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개인차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향상되었더군.”
“이론부터 제대로 배운 녀석들이다. 조금만 자극을 주면 잘 따라와.”
“네가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는 덕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곳 학생들에게 너 정도의 전사와 싸울 일은 많지 않거든. 지금처럼 학생들의 대련상대가 되어 경험을 쌓게 해준다면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다.”
확실히 청년이 강사로 투입된 이후 학생들은 상당한 발전을 보였다. 청년이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꽤 애정을 갖고 공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미래의 전사를 키워낸다는 목적이 그를 사로잡은 모양이었다. 사내는 그 모습에 흡족해하는 한편 걱정도 안고 있었다. 자신에게 수없이 도전해오는 학생을 떠올리던 청년에게 사내의 말이 다시 날아들었다.
“다만, 무리하진 마라.”
“네가 할 말인가.”
“학생들도 학생들이지만, 너 자신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리미터는 해제하지 않고 있어. 최소한의 힘으로 상대하니까, 괜한 걱정은 말라고.”
“그래야지. 미래를 위해 싸우게 될 사람은 그들뿐만이 아니니까. 너도 선봉에 설 것 아닌가.”
미래는 청년에게 아득하고 달콤한 무언가였다. 가능한 붙잡고 싶지만,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는. 그런데도 사내는 언제나 청년에게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에게도 미래가 허락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청년도 사내의 말에는 동조하곤 했다.
“그래, 아카데미아에 맞서서.”
실은, 그랬으면 했다.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몸이 버텨주기만 한다면 끝까지 살아남아 제 손으로 싸움을 끝내고 싶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 빠르게 그에게 드리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는 버텨주는 거다. 우리의 싸움은 그때 본격적으로 시작될 테니.”
세상을 위한 싸움에서 그들은 적을 쓰러트리기 위한 무기나 다름없다. 그들 자체에 다소 결함이 생기더라도 전장에서 제대로 기능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싸우기 위해 붕괴를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아무리 붕괴한들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때까지 버틸 수만 있다면 그들은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스스로 쇠퇴하기를 택한 자들의 바람이란 그렇게 소박한 것이었다.
*
언젠가부터 세상은 사내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괴물이 되어 그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혀를 날름거리며 그를 삼키려 했고, 사람들의 말에는 하나같이 수작이 숨겨져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세상 모든 것이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았다. 세상이 그에게만 악의를 세우는 것 같았다. 때문에 사내는 언제나 단단히 날을 세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사내의 잘 닦인 이성은 그의 경계와는 대비되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환상이라고. 광증에서 비롯한 망상에 불과하다고.
보통 사람을 아득히 뛰어넘는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내였다.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의 결과를 출력해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판단력은 그 이외의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는 것. 그런 사람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괴상한 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몇 년째 앓아오고 있는 광증 탓이다.
광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의심으로 출발했던 것이 이제는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그림자가 되었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완전히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이성으로 광증을 정당화하고 의심으로 타인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날이 찾아들지도 모른다. 끔찍한 가정이었지만 가정으로만 남아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고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병은 악화되기만 할 테니까. 최악의 결말까지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내의 처지였다.
광기에 나날이 먹히면서도 사내는 겉으로는 이상이 없었다. 이 세상에서 그의 병에 대해 아는 것은 그를 포함해 둘뿐. 광증이 깊어지는 동안에도 타고난 이성은 조금도 상하지 않아, 자신의 일을 문제없이 해결해온 탓이다. 오래 전부터 그를 모셔온 측근들조차 주인의 병은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비극일지도 모른다.
“피곤하십니까?”
조심스레 날아든 목소리에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수하가 걱정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아. 약간 잠을 설쳤을 뿐이야.”
시야에 담기는 세상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말은 왜곡되고 걱정은 음모로 변한다. 한순간에, 주인을 걱정하는 행동은 주인에게 칼을 꽂기 위해 경계를 늦추는 행동으로 뒤바뀐다. 고통스럽게도 그 순간조차 광증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병은 때를 가리지 않고 깨어난다. 아무리 이성이 그의 증세를 광증으로 인한 망상이라 결론지어도, 쉴 새 없이 그를 덮치는 광증을 넘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사내의 정신은 매일 닳아가고 있었다.
“쿠로사키는?”
수하에게서 넘겨받은 학교 운영에 대한 자료를 훑으며, 사내는 가벼이 물었다.
“자주 찾으시는군요. 그 자를 신뢰하십니까?”
“그의 능력을 믿고 있다. LDS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지.”
“실력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나이를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고요.”
“지금 만날 수 있나?”
“아마도 강의중일 겁니다. 무슨 일이라도?”
“정기적인 점검이다.”
“몸 때문입니까?”
원인 모를 병을 앓고 있는 젊은 강사의 이야기는 이미 강사들 사이에선 쫙 퍼져 있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동안 이야기는 상당히 부풀려져, 청년은 완전히 비극의 주인공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그걸 두고 청년은 동정심 많은 사람 틈에서 과분한 취급을 받고 있다며 웃곤 했지만, 그가 감내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내로서는 청년이 받는 취급이 그리 과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물론 그게 주된 이유긴 하지만 그 밖에도 신경 써줘야 할 것이 있어서.”
그와는 비밀히 논의할 것이 있었다. 청년을 비롯한 여러 강사들이 공들여 키워낸 전사 중 우수한 자들을 골라 정예병을 구축하려는 사내의 계획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구성한 정예병은 머잖아 침략자에 맞서 세상을 구할 영웅이 되리라. 실제 전투에 내보낼 자들을 추리는 것이라, 전장을 오래도록 누볐던 청년의 판단이 도움이 될 터였다. 다만 계획은 아직 초기단계였고 미리 파란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으므로, 본격적으로 계획을 실행하게 되기 전까지는 비밀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관리하기 까다롭군요.”
“그만한 가치는 있지.”
“지금 부를까요?”
“아니. 강의를 끝내면 이곳으로 오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수하는 짧게 인사하고 사내의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그는 사내가 자주 찾는 청년에 대해 생각했다.
청년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학교의 젊은 운영자가 특별히 먼 곳에서 데려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청년의 목소리엔 낯선 억양이 묻어나왔고 청년이 사용하는 것은 대개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 역시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뗀 것이라 연고자라고는 사내가 전부. 기댈 곳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본디 그런 성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초기엔 워낙 경계가 심해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서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그의 표정은 단단히 굳어있었고 날카로운 눈은 무섭게 상대를 탐색했다. 누군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기만 하면 당장에 날을 세우고 달려들 것 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청년은 엑시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내가 그를 데려온 것도 이곳에 엑시즈를 퍼트리기 위함이었다. 제대로 습득한 자가 거의 없다는 이질적인 기술을 어떻게 완벽하게 익혔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우선은 엑시즈를 가르칠 자가 급했다. 청년이 뿌리내리는 데는 자잘한 삐걱거림이 있긴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청년도 사람들도 서로에게 적응하게 되었다. 이제 청년은 붙들린 짐승처럼 극도로 타인을 경계하는 일은 없다. 최근에는 학생들과도 그럭저럭 어울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청년은 여전히 미지의 존재였다. 이곳에 오기 전 살았던 고향에 대한 이야기는 기를 쓰고 피했으며, 자신에 대해서는 가벼운 것도 잘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처음 청년을 데려온 사내 역시 타인이 그를 필요 이상으로 파헤치지 못하도록 보호해주고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배려해야겠지. 라 말하며. 청년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것은 청년을 데려오고 자주 곁에 두는 사내뿐이리라.
사내는 유독 청년을 아꼈다. 본디 자신의 사람을 아끼는 자이긴 했지만, 사내가 청년을 대하는 방식은 단순히 자신의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자나 동지를 대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가. 몇 발짝 물러나 볼 수밖에 없는 타인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들끼리만 공유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기댈 곳도 없는 자가 먼 곳에서 단신으로 찾아오게 한 무언가가. 그리고 한 사람을 세밀하게 관리하고 모든 것을 지원해주면서까지 곁에 둘 무언가가.
사내는 어린 나이부터 너무 무거운 짐을 감당해온 사람이었다. 세상을 삼키려는 침략자에 맞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세상을 지키려 움직인 것이 벌써 몇 년째. 그가 관리하고 있는 이 학교 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타고나길 뛰어난 인간이었던 덕분에 남들이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일까지 순조롭게 해결해온 사내였으나 그가 걷는 길은 지독하게 고독한 길이었다. 너무 높은 곳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기에 타인에게 제대로 이해받을 수 없다. 택한 길이 가시밭길이기에 함께 걸어줄 자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그런 사내를 이해하고 함께해줄 사람이 있다면, 혹은 사내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패가 있다면 어릴 때부터 그를 지켜봐온 자로서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내가 직접 데려와 사용하고 있는 청년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알 길은 없으나, 사람에 대해 신중하게 판단하는 사내가 청년을 높이 평가하고 중히 다루는 것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사내가 청년을 찾는 만큼 청년도 사내의 말만은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사내의 말을 전하기 위해 몇 번이고 연락을 시도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청년은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대련이라도 하는 것인가. 학생들을 실전에 던져 경험을 쌓게 하는 청년의 방식이 옳은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렸으나, 그것이 학생들의 실력을 키우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청년이 학생들을 직접 상대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청년이 혹여 학생들을 다치게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학생들에 맞춰 힘을 조절하고 있다고 해도 청년은 학생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했다.
게다가 청년 자신도. 청년은 사내의 세심한 관리를 거쳐서야 문제없이 움직일 정도로 언제나 아슬아슬한 인간이었다. 학생들을 위해 직접 움직여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 그 과정에 그가 타격을 입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사내는 강사들에게 그의 상태를 자주 확인하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청년이 있는 강의실로 향한 것은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답에 지쳤을 때였다. 처음엔 그저 창을 통해 상황을 확인하고 조용히 불러낼 작정이었으나 가득 몰려든 학생들이 시야를 메워 청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강의실에 들어섰다. 예상한 대로 모의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만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뜨거운 열기가 수상쩍다. 무언가 위험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불길한 예감은 빗겨가지 않아, 몇 걸음 떼지도 않았을 때 학생들의 비명이 귀를 때렸다. 학생들이 모여든 곳으로 달려가, 그가 발견한 것은.
사내는 요란하게 울려대는 통신기를 집어 들었다. 발신인은 조금 전 그의 방을 나선 수하.
[무슨 일이지?]
돌아온 답은 끔찍했다.
[쿠로사키가 쓰러졌습니다.]
*
연락을 받고 향한 곳은 보건실이었다. 사내는 청년의 침대 곁에 앉아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학생과의 대련 중 갑자기 쓰러졌다고 했다. 사내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가 과로해 몸을 상하는 일 없도록 일정까지 면밀하게 관리하는 사내였다. 얼마 전의 검진에서도 특별한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연료가 떨어진 기계처럼 멎어버렸다는 것이다. 본디 흰 피부가 핏기를 잃어, 청년의 얼굴은 병적으로 희었다. 미동조차 없이 조용히 잠든 모습은 죽은 사람 같다. 옅게나마 호흡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겨우 사내를 안도하게 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를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가능한 쓰러지지 않았으면 하지만, 만일 쓰러질 수밖에 없다면 나중의 일이어야 했다. 그들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그들이 뽑은 전사가 침략자에 대등하게 맞서 그가 퇴장하더라도 무리가 없을 때여야 했다.
“특이한 일은 없었나?”
지금 사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상황을 파악하고 그가 깨어날 때까지 지켜보는 것뿐. 사내는 평소 청년을 잘 따르던 학생에게 물었다. 눈앞에서 강사가 쓰러지는 것을 지켜본 학생은 한참이고 머리를 굴리다 겨우 답했다.
“글쎄요, 처음으로 무기를 완전개방하신 것 외엔.”
“완전개방이라고?”
사내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매일 무기의 힘에 먹히고 있는 청년이었다. 침식을 늦추기 위해 리미터를 차고 최소한의 전투력만을 사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약속한 일. 미래를 위해서 몸을 최대한 아껴야 할 자가, 약속마저 어기고 무리하게 힘을 썼다는 것인가.
“혹시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사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은 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힘을 개방하는 걸 꺼리셔서 우리들 사이에선 무언가 위험한 것이 숨겨진 것 아니냐는 말이 돌았거든요. 이를테면 저주를 받았다거나.”
“그에게 지병이 있다는 건 알고 있나?”
“아뇨. 전혀.”
“치료가 어려운 병을 앓은 지 몇 년이다. 무리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 대련에선 적당히 힘을 조절하고 있었을 거야.”
“전투력을 끌어내는 것만으로도 몸에 무리가 가나요?”
“건강한 사람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그것도 무리가 가지.”
학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동안 청년에게 전투력을 더 끌어내달라고 조르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적당히 겁을 줘, 그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사내는 청년의 병세를 과장해 말하고, 학생에게 그가 무리하지 않도록 감시하라고 당부했다. 몇 번이고 그러겠노라 약속한 학생은 겁에 질린 얼굴로 사내를 떠났다.
다행히 청년의 상태는 시간이 지나며 제법 안정되었다. 곧 깨어날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을 들은 사내는 불안을 내려놓기로 했다. 어차피 벌어진 일, 어서 회복하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왜?’라는 의문이 사내의 머리를 계속 짓누르고 있었다.
왜 그는 자신을 그렇게 혹사시켰는가. 자신에게 돌아올 타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런 일을 벌였던가. 그렇게 흘러가던 생각은 청년이 몸을 아끼게 된 계기를 떠올리는 데서 멈췄다.
처음 만났을 때의 청년은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처럼 사나웠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적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깊어, 적으로 보이는 자라면 무섭게 달려들어 물어뜯는 사람이었다. 힘을 개방할수록 몸이 상하는 주제에 언제든 적을 쓸어버릴 수 있도록 무기를 개방하고 다니기까지 했다. 그래서야 언제나 최대출력을 내는 기계와 다를 바 없었다. 맹렬하게 작동하는 만큼 닳는 속도도 빠른. 어쩌면 그는 자포자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을 쓰러트릴 수 있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기적적으로 구해낸 목숨을 소진해서라도 복수를 끝낼 것이라고. 그런 사람에게 사내는 말했다. 더 큰 복수를 하려면 목숨을 아껴두라고.
[목숨을 다 깎아낸다면 네 누이를 납치한 자 정도는 쓰러트릴 수 있겠지.]
그때 청년은 금방이라도 사내를 삼킬 듯, 자신의 무기로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그를 맹렬하게 공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가?]
경계 가득한 금빛 눈이 사냥감을 포착한 맹금처럼 날카롭게 사내를 꿰뚫었다. 적의가 가득한 얼굴이었으나 사내의 말에 멈칫해 공격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카데미아의 일부만 쓰러트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나? 아카데미아를 무너뜨리고 그들이 죗값을 받게 하는 것은? 개인적인 복수만 끝내면 아카데미아가 존속되든 말든 관계없다는 쪽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개인적인 복수만으로 만족한다면 관계없어. 하지만 그 이상을 이루고 싶다면 지금처럼 수명을 있는 대로 끌어 쓰는 일은 그만둬. 단신으로는 아카데미아를 돌파할 수 없지만 너와 같은 자들이 여럿 있다면 상대해볼 수 있겠지. 어때? 아카데미아를 쓰러트릴 저항군의 일원이 되는 건.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너를 제멋대로 써선 안 되겠지.]
[몸을 아껴두라고?]
[그래. 더 큰 목표를 위해서. 아카데미아를 무너뜨린다는 목표는 너의 개인적인 복수까지도 포함하는 일이니 너로서도 손해는 아닐 거다.]
청년은 한동안 사내를 노려보더니 무기를 거두었다. 사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 후 사내는 청년을 거두어 그의 협조를 구하는 한편, 그의 상태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침략자에 맞서 싸우게 될 뛰어난 전사가 망가지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사내는 청년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자신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리미터를 차고 전투력도 조절해가며 최대한 오래 버티겠다고. 사내가 요구하는 것의 목적이 무엇인지 청년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적에 대한 증오가 깊은 만큼, 적을 쓰러트린다는 목적을 되새길수록 머리가 차가워지는 청년이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충동적으로 약속을 깼을 리가 없다. 무언가 중대한 일이 있었으리라. 그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게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사내는 청년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헐거워진 초커를 다시 채워주고, 그가 풀어버린 스카프를 목에 매어주고서 사내는 한참 그를 지켜보았다.
청년이 깨어난 것은 학생이 물러가고도 몇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침대의 촉감과 소독약 냄새에 청년은 눈을 뜨기도 전에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이곳에 온 이후 몸이 불편할 때마다 휴식을 위해 찾은 곳. 다만 이번에는 스스로 온 기억이 없으니, 누군가가 옮긴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려 청년은 희미한 기억을 들쑤셨다. 기억의 마지막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쓰러졌었나?”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에게 청년은 물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게 됐다.”
“무엇이?”
“약속을 어긴 것.”
청년은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까지의 기억을 되살린다. 그때 청년은 적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를 대련상대로 택한 자는 침략자의 기술을 쓰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완벽하게 구사하는 자는 과거 그의 세상을 짓밟은 침략자밖에는 없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평화로운 세상에서 지내며 일시적으로 눌러두었던 증오와 분노가 치솟았다. 어떻게든 적을 쓰러트려야 했다.
맹금을 불러낸 청년의 손이 목을 싸매는 스카프로 향했다. 숨기고 있는 것 때문에 오래도록 풀지 않았던 것이었으나 지금은 풀어낼 수밖에 없었다. 스카프에 이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는 초커를 우악스럽게 풀어내자, 아찔했다. 그동안 억누르던 힘이 급속도로 풀려나온 탓이다. 리미터를 풀어 전투력을 해방하는 것으로, 최소한의 힘으로만 움직이던 맹금이 비로소 족쇄를 풀게 되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언제나 환상처럼 희미했던 맹금이 선명해졌다. 얼마 만에 보는 최종형태인가. 청년은 감격마저 느끼고 있었다. 풀려난 맹금으로 해야 할 일이란 뻔했다. 그대로 상대를 찢는다. 철저하게 찢어발긴다. 극한의 고통을 안고 쓰러지도록. 오래도록 억눌렀던 힘은 한껏 날뛰며 그의 몸을 덮쳤다. 가슴을 찌르는 통증에 청년은 가슴을 감싼 채 쿨럭거렸다. 목을 타고 비릿한 피가 쏟아졌다.
[쿠로사키 선생님?]
학생들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 같았다. 퍼뜩 정신이 든 청년은 학생들을 등져 제 모습을 가리려 노력했다. 몸의 이상을 학생들에게까지 들켜서야 곤란했다. 애써 모습을 감추기는 했으나 이미 늦었다. 세상은 빙글빙글 돌고 판단력은 망가지고 있었다. 뿌예진 시야에 쓰러지는 적의 모습이 일렁였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적을 짓밟은 맹금은 기세 좋게 울며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기계로 만들어진 차가운 몸을 부딪쳐오는 것이, 오랜만의 제대로 된 사냥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희미해지는 정신을 집중하며 손을 뻗어 쓰다듬으려 할 때 맹금은 갑자기 흐려지더니 빛으로 흩어졌다. 그의 몸도 정신도 그때까지였다. 청년은 이내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졌다.
“무슨 일이 있었지?”
“아카데미아를 상대했다.”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군.”
“아카데미아가, LDS에 숨어들어 있었다. 놈들을 계속 상대했던 나라면 알아. 녀석은 분명히 아카데미아의 기술을 썼어.”
“그래서 그를 잡기 위해 힘을 해방시켰다?”
날아든 목소리는 딱딱했다. 사내 앞에 떳떳할 수 없는 처지임을 알았으므로, 청년은 침묵했다. 청년의 가는 팔목으로 쏟아지는 약물을 보며 사내는 눈앞에 있는 자가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인지 새삼 느꼈다.
“너는 좀 더, 너를 아껴야 한다.”
침묵을 깬 쪽은 사내였다. 조금 전의 말과는 달리 아이를 달래듯 나긋한 목소리였다.
“너는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
“어디에?”
“내게, 세상에, 그리고 우리가 구축할 랜서즈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진 마.”
“아니, 전혀 과하지 않아. 그러니 네 가치를 갉아먹지 말란 뜻이다.”
청년은 쓰게 웃었다. 전쟁에 휩쓸린 때부터 그는 계속해서 무거운 이름을 짊어지고 있었다. 레지스탕스의 일원,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자, 세상을 위해 싸우는 전사 등. 아마 그가 전장이란 지옥에서 살아남은 것도 그 무거운 것들 때문일 것이다. 짊어진 것이 있는 자는 죽는 것조차 어려운 법이다. 짊어진 것을 훌훌 털어내지 않는 이상은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으니까. 전장에서 홀로 살아남으며, 그 전까지 그가 짊어졌던 이름은 전부 무의미해졌다. 죽지 않아야 할 이유 없이 떠돌던 청년을 세상에 다시 묶어둔 것은 바로 사내가 그에게 지운 이름들이었다.
영민한 사내가 청년이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모를 리 없었다. 사내는 청년이 조금이라도 휘청거리는 것 같으면 자신이 안겨준 이름들을 들먹이며 청년에게 살아야만 할 이유를 되새겨주곤 했다. 지금의 타이름도 결국 뿌리는 그와 같았다.
“실망하진 않았나.”
“별로. 네가 쓰러트린 자가 정말 아카데미아 출신이라면 첩자에게 정보가 넘어갈 위험을 차단하게 된 셈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네 공격을 정면으로 받은 탓에 그쪽도 타격이 큰데, 회복하면 조사하도록 하지.”
“아카데미아에 대한 정보를 캐볼 생각인가.”
“가능하다면. 거의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주입된 충성심을 뚫는 것이 어렵겠지만.”
사내는 몸을 숙여 청년과 시선을 맞추었다.
“실망하지는 않았지만 걱정했다. 솔직히 말해, 다시 겪고 싶은 일은 아니었어.”
“그러다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아서?”
차가운 웃음이 스쳤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웃음. 사내는 청년이 이따금 걸치는 그런 표정을 싫어했다. 입가에 부서지는 웃음처럼, 그도 미련 없이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함부로 죽음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쿠로사키.”
“내 삶의 종말에 대해 나만큼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자가 있나?”
“멋대로 각오하지 말란 뜻이다. 너에게는 아직 미래가.”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건 내가 아냐.”
청년은 사내의 말을 매정하게 끊어냈다. 그는 오래 전, 사내가 자신을 거둔 날부터 그의 눈에서 쇠퇴를 읽어내고 있었다. 몇 년간 쉬지 않고 이어져온 쇠퇴로 사내의 미래는 이미 황폐해져 있었다.
“아카데미아를 무너뜨리면? 아카바 레오를 쓰러트리면? 그래서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면? 그 다음의 너는 무엇으로 살아갈 생각이지? 생각해보기는 했나?”
청년은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베푸는 치료가 연명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진즉에 끊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삶을 억지로 연장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사내는 그가 겨우 붙들고 있는 삶마저 포기할까봐 그 사실에 대해 숨기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당사자인 청년이 모를 리 없었다. 그의 삶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죽음의 무게를 넘어섰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면, 오래지 않아 끝난다 해도 원망할 수 없는 삶이다. 그러나 사내는.
만일 청년이 죽는다면, 그래서 이 세상에 그의 광증을 이해할 수 있는 자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면. 그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의 쇠퇴에 대해선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미 황폐해진 미래를 그는 어떻게 감당할 작정인가. 청년에게는 그것이 언제나 마음 속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었다.
“생각한 적 없다. 가장 시급한 목표만을 생각하고 달려왔으니까.”
“그 목표가 끝나면, 새로운 목표를 잡고 살 생각?”
“아마도.”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면? 너의 병이 미래를 흔든다면?”
청년은 사내가 매일 남기는 관찰기록을 몰래 본 적이 있었다. 낱낱이 적힌 그의 증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처참했다. 그걸 직접 경험하고 기록하는 사내의 심정이 어떨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나마 사내이기에 그동안 버텨왔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견디다 못해 진즉에 쓰러졌다 해도 놀랍지 않을 끔찍한 저주. 그가 안고 있는 병은 지금의 그만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미래까지 말려 죽이려 들 것이다.
“글쎄, 그렇다 해도 그건 그때의 일이다. 지금 생각할 이유는 없어.”
사내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차분했으나 거기서 희망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보다는 체념의 그림자가 강했다. 몇 년 전부터 사내의 삶이란 미래를 긁어내 미래를 구하는 것이었다. 다만 제물로 바치는 것은 자신의 미래였고 구하는 것은 세상의 미래였다. 청년을 삶에 묶어두는 이름들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듯 사내도 타인을 위해 부서지고 있었다. 청년은 그것이 씁쓸했다.
세상은 그의 결단을 알지 못한다. 그가 세상을 구하려 어디까지 감수하고 있는지 아는 이도 없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가져올 평화는 모두가 누리게 되리라. 그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청년뿐이다. 하필 언제 죽을지 모를, 망가질 대로 망가진 존재.
“그러니 너도 삶의 목표를 전쟁에만 두지 마라. 미래는 가능성의 집합이다. 네가 행복해질 수 있을 가능성도 있어.”
“좋아. 가능한 오래 살아남도록 노력하지.”
“드디어 삶에 대한 집착이 생겼나? 아니면 희망이라도?”
“살아갈 이유를 하나 더 만들었거든.”
“다행이군. 사람의 삶은 마음대로 되진 않지만, 혹시 모르지. 너는 지금까지도 잘 버텨왔으니까.”
“나를 위해서는 아냐. 그래도 필요가 있다면 살아야지.”
“누구를 위해서든 관계없어. 그냥, 쉽게 삶을 놓지 마라.”
그것은 사내의 소망이었다. 전쟁이 청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만큼 자신이 구해낸 미래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했다. 어쩌면 그의 소망은 살아갈 힘도 남지 않은 자를 세상에 묶어두고 싶다는 욕심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짊어진 일을 말끔하게 해결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살았으면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과 함께 삶까지 끝내지 않았으면 했다.
“그럴 테니, 너도 끝까지 버텨줘.”
이번에는 청년이 요구했다. 우습게도, 살아남을 이유가 된 사람이 그에게 살아달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청년은 살아남을 것이다. 싸움을 끝내고 소중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도 살아남으려 노력할 것이다. 사내를 지탱할 수 있을 때까지 지탱하기 위해서. 그가 홀로 광증을 감당하다 질식하지 않도록, 제 손으로 구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누릴 수 있도록 가능한 오래 살아남아 그의 동지로 있어주는 것이 청년의 목표. 연명해야 할 이유를, 청년은 이번에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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