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에게는 누구에게도 개방하지 않는 온실이 있었다. 온갖 진귀한 식물을 수집해 기르는 곳이라 소문은 무성했으나 그를 제외하고 누구도 그 내부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주인이 세심하게 가꾼 화려하고 이국적인 광경은 자랑거리가 되기 충분했지만 청년은 문을 닫아걸고 타인의 출입을 거부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빚어낸 그 부자연스러운 풍경에 그가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며, 차마 남에게 보여선 안 될 것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을 마치면 청년은 온실의 문을 열고 녹색 세상으로 들어섰다. 잘 관리된 풍경은 아름다웠으나 지나치게 평온하여 그에게는 지리하게만 느껴졌다. 계절을 모르고 무성하게 잎을 피운 나무를 무신경하게 매만지던 그는 무언가의 기척을 느꼈다. '그것'일 터다. 모습을 숨기는 것에 능한 그것이 어디 숨어있는지 찾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기척을 낸 이상, 곧 나타날 터였다. 경계심이 깊은 그것이 유일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은 그였으므로.
어느 순간 옷자락에 여린 손길이 느껴졌다.
“유리 님.”
꺼질 듯 연약한 목소리였다.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그의 망토를 붙잡고 있었다. 돌아오셨어요. 여전히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커다란 눈, 창백한 얼굴. 희고 가느다란 손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는 타인에게 온실을 개방하지 않는다. 저것 때문이었다.
아이는 온실에서 지냈다. 그보다 어릴 적에는 무균실에 있었다. 태어났을 때는 실험실에 있었다. 실패작으로 폐기될 운명이었던 실험체를 그가 구해내 키웠던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실패작 따위, 처분하는 게 옳았다. 구태여 처리하지 않아도 약하게 태어난 터라 방치하면 오래잖아 죽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이는 그의 손에서 소생했다. 청년은 그때의 자신이 왜 아이를 빼돌렸는지 알지 못한다. 왜 목숨을 부지시켰는지도, 왜 지금까지 키워왔는지도. 그는 굳이 그 이유를 파헤치지 않는다. 한순간의 변덕이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본래 죽었어야 할 것을 살려냈으므로 청년은 비밀스레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혹은 사람들을 허락하지 않는 곳에서. 아이가 위험을 감지하고 스스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청년은 아이를 온실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때부턴 아이가 홀로 살아가도록 그곳을 오롯이 허락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타인의 시선을 피해 살아온 아이는 세상을 알지 못했다. 아이의 세상은 자신을 살린 그가 전부였다. 그는 의지할 사람이 아니었건만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호의를 보였다. 갓 태어난 동물이 처음으로 본 상대를 어미로 인식하듯. 그러나 그는 그것을 수용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과 말라죽지 않을 정도의 관심만을 주었다. 아이를 살린 것에 대한 책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아이는 만들어진 생명이었다. 그 원형은 모두가 탐내는 힘을 가진 여자. 여자의 능력에 관심이 컸던 자들은 그 힘을 손에 넣기 위해 그녀의 클론을 찍어냈다. 많은 표본 중 성공작을 추려낼 즈음 아이는 태어났다. 원형의 힘을 물려받지 못한 실패작으로. 청년도 아이의 원형을 본 적이 있었다. 수많은 가능성을 품은 여자, 그러나 운명에 농락당해 마침내 이른 나이에 죽어버린 여자. 그 불행하고 흥미로운 인간.
아이는 실패작이었지만 원형의 외양만은 그대로 닮아있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능력은 조금도 물려받지 못한 주제에 그 외의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었다. 정상적으로 자라난다면 언젠가는 정말로 원형과 비슷해질지도 모르나 약하게 태어난 아이는 안타깝게도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지나치게 왜소한 체격은 한 번도 제 또래 아이들의 평균적인 신장에 미친 적이 없었다.
아이는 결코 원형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생명의 가치를 필요성과 능력으로 따지는 이곳의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그야말로 무가치한 생명이었다. 따라서 그 나약하고 불행한 생명에게 청년은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 온실 속 식물 중에선 추위를 견디지 못해 온실 밖에서는 자라지 못하는 남국의 식물도 여럿 있었다. 아이도 그와 닮아있었다. 북풍이 닥치면 바로 얼어 죽게 될 연약한 생명.
아이 역시 자신이 가치 없는 생명이며 너무도 연약해 청년에게 기대 자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안다. 다만, 아이는 그의 변덕이 빚어낸 책임이었다. 청년이 아이가 자신의 볕 아래 뿌리내리도록 허락한 것은 그래서일 뿐. 이름조차 받지 못한 아이는 그에 만족하고, 감히 애정을 갈구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주제넘은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아이는 절망하여 주눅 드는 일 없이 그에게 기대서나마 어떻게든 삶을 이어왔다. 기묘하게도, 그 처절한 생존은 청년에게 원형의 삶을 상기시켰다. 운명에 농락당해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운명에 저항했던 처절한 삶. 그 놀라운 투지. 청년은 아이에게서 원형을 연상시키는 모습을 찾을 때마다 보랏빛 눈을 흥미로 빛냈다. 오리지널이 품고 있던 가치는 하나도 이어받지 못한 주제에, 그에서 출발한 생명이긴 한 모양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청년이 하나 베푼 것은 스스로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책을 내준 것이었다. 아이의 보호자 역을 거부한 대신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책을 구해다 준 것이다. 감히 바깥을 꿈꿀 수 없는 아이는 글을 배운 때부터 그 모든 책을 게걸스레 삼켰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어낸 책은 기댈 이 없는 아이에게 인도자가 되어주었다.
“저번에 주신 것들은 전부 읽었어요.”
아이의 녹색 눈에 비치는 것은 아마도 설렘. 탐욕스레 읽어낸 모든 것이 아이의 세상을 키워낼 양분이 되었다. 덕분에 아이의 생각은 자라났고 그만큼 세계도 넓어졌다. 그만큼 소비하는 속도도 빨라서 아이는 이미 얼마 전에 받은 책을 전부 읽어낸 후였다.
“그런데 하나가 이상해서…….”
“이상하다니?”
아이는 답하기에 앞서 잠깐 모습을 감췄다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고풍스러운 양장본. 표지에 금박으로 새겨진 제목이 익숙해, 청년은 그 부분을 조심스레 쓸어보았다.
“처음부터 책의 몇 부분이 찢겨 있었어요. 내용을 파악하는 것엔 무리가 없었지만, 전부 보지 못했다는 게 아쉬워서.”
“새로 구해줬으면 좋겠다?”
아이는 자신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이 자신을 살려내어 지금까지 숨겨준 사람이라 해도 언제나 어딘지 모를 싸늘함이 그 얼굴에 비치는 바람에, 깊은 곳에서는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냉정한 거절이 날아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나, 청년에게서 흘러나온 말은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이제는 구하기 어려운 책이구나.”
청년은 표지에 새겨진 제목을 속으로 읽었다. 세레나. 세상을 위해 생을 바쳐, 죽어서도 성녀에 가까울 정도로 추앙받은 이의 이름이었다. 이 세상의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하였으므로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물품이 만들어지고, 그녀의 생애가 담긴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아이가 내준 책이 바로 그녀의 평전. 그의 흰 손가락이 책의 표지를 넘겼다. 그 너머의 내용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 책의 첫 몇 장은, 페이지수가 아니었다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섬세하게 뜯겨 있었다. 그는 뜯겨버린 페이지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알고 있다. 그녀의 초상화. 그녀의 삶에 영향을 미친 장소의 사진. 주변인의 사진.
그 부분을 뜯어낸 것은 그였기 때문에.
“다음에 멀쩡한 책을 찾게 되면 가져오도록 하지.”
아이의 흰 얼굴에 기대가 스쳤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청년의 내부는 의문으로 끓고 있었다.
저것이, 그녀의 삶을 담은 책이 왜 아이에게 줄 책에 들어갔던 것인가. 실수였나. 아니면 잊고 있었을 뿐 자신이 의도한 일이었던가. 알 길은 없으나 청년은 일순 오싹해졌다. 청년을 비추는 아이의 녹색 눈에 과거 그가 찢어버렸던 페이지에 남은, 그녀의 초상화가 겹쳐진다.
아이의 오리지널은 그녀였으므로.
*
청년이 몸담고 있는 곳, 아카데미아에서 세레나란 존재는 누구에게나 추앙받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아카데미아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칭송받는 자. 그러나 사실 그녀의 삶은 지배자가 바라는 대로 시작되어 바라는 대로 끝났으며, 죽어서까지 지배자의 입맛대로 가공되어 아카데미아의 성녀로 기록되게 되었다. 즉, 그녀는 지배자가 포장한 사람으로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아는 것은 아카데미아의 지배층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청년이었다.
청년에게는 그녀에 대한 모든 기록이 남아있었다. 그녀가 아카데미아에 포착되었을 때부터, 아카데미아에서 성장할 때, 마침내 아카데미아의 질서를 거역하고 반역을 선언했을 때를 비롯한 수많은 이야기. 그녀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부터 조금씩 모아온 기록은 그의 방 한쪽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청년은 진짜 그녀를 아는 자가 자신을 포함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에 언제나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왜 그녀를 그토록 집요하게 파헤쳤던가. 그 물음에 청년은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 본 사람들 중 그녀가 가장 흥미로웠기 때문이라고.
그녀의 삶의 대부분은 아카데미아의 폐쇄된 곳에서였다. 그녀의 능력을 알아본 이가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가두어둔 채 키웠기 때문이다. 바깥을 접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대우만은 극진해, 그녀는 성 속의 공주처럼 자라났다. 그곳에서 얌전히 말라죽고 싶지 않아 굳건한 통제를 뚫고 도망치려는 시도도 여러 번 했으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감시역의 도움으로 그녀는 탈출에 성공했다. 그때 보게 된 바깥은 폐쇄된 방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고 그녀가 믿고 있던 것조차 허상임이 드러났다. 이전까지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충격 속에서 그녀는 이전의 사상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장착하기로 했다.
그날부터, 그녀가 자랑스레 여기던 것은 타도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소속되고 싶었던 집단은 적이 되었다. 그녀는 이전까지 자신이 포함되었던 세계에 반기를 들고 그 질서를 부수려 싸웠다. 처절한 싸움의 끝에, 그녀는 원하던 것을 이루고 명예롭게 쓰러졌다. 그러나 그녀의 명예로운 종말은 결과적으로 아카데미아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녀의 죽음으로 아카데미아의 최후의 목표가 달성되었다. 결국 그녀의 삶은 단 한 번도 아카데미아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치, 아카데미아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운명이었던 것처럼.
그녀의 일생은 아카데미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나 아카데미아의 질서를 부수는 반역으로 흘러갔으나 사후에는 아카데미아를 위해 순교한 성녀로 포장되었다. 그 잔인한 운명이라니! 그래서 청년은 그녀를 파헤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 대한 모든 자료를 탐욕스레 모아 숨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일생은 누군가가 써내려간 비극처럼 흥미로웠으니.
청년은 서랍을 열어 차곡차곡 쌓인 서류 속에서 책의 낱장을 꺼냈다. 그것은 아이가 가지고 있던 책에서 뜯어낸 부분이었다. 그녀의 초상화가 그려진 페이지. 아이가 이것을 보았다면 무엇을 생각했을까. 자신과 닮은 이에게서 무엇을 읽어냈을까. 청년은 그녀가 죽음을 맞은 후, 그녀의 능력을 탐했던 이들이 찍어낸 많은 클론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그녀와 같은 삶을 살 것을 강요당해 타인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이 클론임을 알지도 못하고.
세레나를 잇는 또 다른 세레나. 세레나를 대체하는 세레나. 세레나에게서 무거운 짐을 이어받은 세레나. 그 많은 세레나들. 클론들에게 세레나의 인격을 심자고 건의한 것은 그였다. 세레나로서의 자아를 가진다면 그녀처럼 살아가게 될 거라고. 청년의 다분히 악의적인 제안을 모두가 수용해 그녀들은 모두 세레나로서 움직이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죽음으로도 해방되지 못하고 계속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다수의 클론의 내부에, 망령처럼 남아서.
지금도 아카데미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제단으로 향하면, 자신을 세레나로 인식하는 클론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세레나의 눈을 가지고 세레나의 목소리로 세레나의 사상을 말한다. 오리지널을 아는 청년의 입장에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또 다른 곳으로 향하면 역시나 자신을 세레나로 인식하는 클론을 볼 수 있다. 성공작들은 세레나의 운명을 안고 그렇게 살아갔다. 그렇다면, 실험에서 태어난 단 하나의 실패작은. 세레나의 능력을 이어받지 못한 클론은.
청년은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은 아이를 떠올렸다. 함께 태어난 이들과는 달리 아무런 능력도 갖지 못하고 태어난 실패작. 함께 태어난 자매들보다 한참 왜소한 체격에 언제 부서질지 모를 연약한 몸. 흠결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단 하나 다른 자매들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세레나’라는 자아에 갇히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능력을 갖지 못한 클론에게 세레나에게 기대했던 것을 지게 할 리는 없었으므로.
그렇다면 세레나를 알지 못하는 세레나의 클론은 그녀의 삶에서 무엇을 느끼게 될까. 청년은 이것이 몹시 궁금했다. 완벽한 타인으로 본 오리지널은 어떤 인간일까. 의문은 생각보다 빠르게 풀렸다. 그녀가 자신의 오리지널이란 것조차 알지 못하는 아이가, 먼저 그녀에 대한 흥미를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다시 아이를 찾았을 때 아이는 그녀의 자료를 좀 더 접하고 싶다는 소망을 보였다. 왜 관심을 보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간결했다.
“좀 더 알아보고 싶었으니까요.”
눈을 빛내는 아이에게, 청년은 자신이 내어주었던 책조차 왜곡된 그녀를 담고 있는 것임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아에서 포장한 그녀에 대한 아이의 감상이 궁금했으므로. 아카데미아의 공식적인 자료를 조금씩 아이에게 가져다주며, 청년은 아이의 반응을 기다렸다. 얼마간 지켜본 결과, 청년은 아이가 그녀를 호의적으로 보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것이 오리지널에 대한 본능적인 호감일지, 아니면 모두에게 추앙받게 된 이에 대한 동경인지 청년도 몰랐다.
“세레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좋은 사람이라고 봐요.”
녹색의 풍경 속에서 아이가 말했다. 그 모습에서 청년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
“어떤 점에서?”
“강한 힘을 가지고도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자는 많지 않으니까요.”
“세상을 위해 희생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나?”
청년의 입가에 문득 심술궂은 웃음이 걸렸다. 그녀의 삶을 시작부터 끝까지 꿰고 있는 사람으로서 판단하자면 ‘세상을 위해서’라는 말이야말로 그녀에겐 가장 잔혹한 것이라고 그는 단언할 수 있었다. 그녀가 구하려던 세상과 그녀가 구한 세상은 달랐다. 사실, 그녀는 실패했다. 부숴야 하는 것을 구하고, 그 결과로 본래 구하려던 것이 부서졌다.
“만일 그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따라서 그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아이의 큰 눈이 둥그레졌다.
“자신의 힘을 믿고 어리석게 싸우다, 세상을 구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 한다면?”
그렇다면 이 악의적인 질문에 아이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굳은 얼굴로 잠시 답을 보류한 아이를 보며, 청년은 마지막으로 몰아세웠다.
“세상을 위한 싸움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야. 그것이 엉뚱한 희생자를 낳거나 방향이 어긋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네가 접하는 세레나가 흠 없는 모습인 것은 이곳에서 세레나를 추앙하여 잘못된 모습을 모두 감추었기 때문이다. 실제의 세레나는 오해 때문에 애꿎은 희생자를 만든 적이 있었고 잘못된 판단으로 위기를 자초해 전사해야만 했다. 그녀는 끝까지 경솔했어. 결과적으로 세상을 구했을 뿐 그녀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계속 실패했지.”
“하지만 싸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해요. 혁명의 광풍이 두려워 모순을 방치하면 영원히 모순된 채로 남아있게 되듯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안고 싸워, 결과로나마 세상을 구했다면 그 삶은 가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긴, 세상을 바꾼 것은 언제나 어리석은 이들이었지.”
자신의 종말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하는 이들이, 신념을 갖고 나아가는 이들이 세상을 구해왔다. 신념을 태운 그녀의 투쟁은 세상을 구하기 위한 한 걸음이었고 결과적으로 아카데미아를 구했다. 청년은 이제 아이에게서 자신이 알던 그녀를 본다. 능력을 이어받지 못한 실패작임에도, 아이는 그 어떤 클론보다도 가장 그녀를 닮아있었다.
“제게도 힘이 있었다면 설령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해도 투쟁을 시작했을 거예요.”
“훌륭한 생각이구나.”
그것은 악의 없는 칭찬이었다. 청년은 그렇게 순진하고 올곧은 생각을 가진 아이에게 진정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때문에 청년은 아이에게 경의의 표시로 무언가를 선물하고자 한다.
“네 이름, 지어주지 않았지? 그녀처럼 세레나가 좋겠어.”
가장 오리지널을 닮은 아이에게 오리지널의 것을. 청년은 아이의 얼굴에 감격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세레나.”
그는 노래하듯 그 이름을 읊었다. 그 울림은 투쟁의 끝에 쓰러진 불행한 전사를 생각하게 했다.
“그래, 그게 네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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