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조/슌ts] 세 사람

2016. 3. 10. 04:36 from 02

 

  전쟁에 휩쓸려 사라졌던 소녀가 돌아온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몇 년이 지나서였다. 잔해만이 휑뎅그렁하게 남았던 도시에 희망이 비치고, 잿빛으로 가득했던 세상에 차츰 화사한 색이 덧대어질 무렵. 그녀는 지친 얼굴로, 사람들이 기억하던 것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키는 꽤 자랐고 선은 보다 부드러워졌으며 흘러간 시간에 걸맞게 앳됨도 제법 걷혔다. 몇 년이라는 세월이 그녀에게도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

  소식조차 없었던 그 몇 년의 시간을 대부분 옅은 희망과 미련으로 보내왔던 주변인이었다. 돌아올 수 없으리라고, 깊은 곳에서는 체념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사히 돌아왔다. 고통스러운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기적과 같은 귀환에 모두가 들떴다. 쏟아지는 인사 속에서, 소녀 역시 감격에 휩싸인 목소리로 그동안 만나고 싶었던 이들을 찾았다. 사랑하는 언니와, 절망적인 전쟁에서까지 함께해온 친우.

  그 기쁜 소식에, 누구보다도 그녀의 귀환을 기다렸을 두 사람 중 하나는 급히 달려와 소녀를 찾았다. 소년티를 조금씩 벗어가고 있는, 소녀의 친우였다.

  “루리. 돌아와서 기뻐.”

  소녀의 붉은 눈이 친우에게 향했다. 그에는 반가움과 함께 희미한 의문이 깃들어있는 것 같았다.

  “슌은?”

  소녀는 언니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가, 바로 무거워지는 공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가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으리라곤 생각조차 않았을 소녀였다. 그만큼 그들 자매의 관계는 특별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언제나 함께해온 그들이었다. 서로에 대한 애착은 깊었고 그만큼 서로를 위했다. 전장에서도 목숨을 걸고 어떻게든 동생을 지켜내려 했던 언니가 한동안 찾아 헤매던 동생을 맞이하러 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슌은.”

  친우는 겨우 입을 열었다.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사고로 실종됐어.”

  소녀의 입이 열렸다. 그러나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겨우 돌아온 고향에 자신이 그토록 만나려 했던 이가 남아있지 않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소녀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한동안 친우만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소망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상대가 고통스러운 사실을 부정해주었으면 하는. 그러나 친우는 그대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소녀가 안아야 할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것처럼.

  “공식적으로는 실종이니까, 살아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루리. 우선은 돌아가자.”

  고향에서 끌려간 지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돌아가지 못할 가능성은 수없이 생각했다. 돌아오면서도 사랑하는 이들이 전부 있으리란 확신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이만은 남아있길 바랐다.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길 바랐다. 소년의 품에서 소녀의 등이 떨렸고 소년은 소녀를 토닥였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소녀는 소년의 품에서 벗어났다. 소년의 위로로 한결 나아진 듯했으나 애써 누른 감정은 소녀의 흰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몇 년의 시간은 소년에게도 흔적을 남겨 본래 소녀보다 작았던 키는 이제 소녀를 뛰어넘었다. 소녀는 기억하던 것보다 한참 자라버린 소년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소년의 안내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두 사람을 위한 공간이었다. 함께 전장에서 싸웠던 두 사람은 이곳에서 서로 기대며 살아갔으리라. 소녀는 두 개의 방 중 하나에 들어섰다 언니의 흔적을 발견했다. 옷가지며 물건이며, 사용하던 것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데 주인은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여기서 슌과 함께 지냈어.”

  소년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약간의 슬픔이 묻어있었다. 전장 속에서 함께였던 세 사람은, 소녀가 사라지면서 둘이 되었고, 언니가 사라지면서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소년은 그동안 두 번의 상실을 겪어야 했다.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서, 그 방은 치우지 않았지.”

  그것은 미련의 증거였다. 방의 주인이 실종되었을 때, 돌아오는 것이 기적이라고 모두가 말했다. 그러니 포기하고 잊는 것이 낫다고 말한 이도 여럿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소녀를 지우지 못했듯 그 언니도 지워내지 못했다. 더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과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미련만 남아 그들을 마음에서 내몰 수 없었다. 기다리는 것은 부질없는 희망을 품는 것이라 해도, 소년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슌이 돌아올 때까지는 여기서 지내도 될까?”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도록 보지 못했던 이가 돌아와 자신에게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감이 없어,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도 마음 한편으로는 헛된 기다림이라 생각했던 것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돌아오기를 바랐던 사람이 무사히 돌아왔다.

  “잘 지냈어?”

  한동안 언니의 흔적을 훑던 소녀가 소년에게 물었다. 갑작스레 날아든 질문에 소년은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답했다.

  “잘 지냈어.”

  소녀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소년은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만큼 나아지기까지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모두가 돌아와서 버틸 수 있었어.”

  그것은 시간이 흘러서야 꺼낼 수 있게 된 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은 계속되었으나 다른 이들과 함께했기에 하루하루를 넘길 수 있었고 지금은 그런 나날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다독일 수도 있었다.

  “루리는? 그동안 어떻게…….”

  “여러 일이 있었지만 돌아오는 것만을 생각했어. 그리고 돌아왔지.”

  그동안의 일을 전부 고하기엔 소녀가 짊어져야 했던 것은 너무 무거웠다. 그러므로 소녀는 상세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그저 지금의 행운에 감사하기로 했다. 전쟁이 끝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해도, 소녀의 전쟁은 이곳에 돌아오는 순간에 비로소 종료된 셈이었으므로.

  “유토, 나는.”

  소녀는 희게 웃었다.

  “돌아와서 정말 기뻐.”

 

*

 

  기다리던 이들의 기대와 희망이 사그라질 즈음 돌아온 소녀는 새로운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몇 년을 떠나있었고, 떠나기 전과는 사뭇 달라진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는 상황에서도 친한 이와 함께한다는 것이 그녀의 적응을 도운 모양이었다. 오래잖아 사람들은 소녀가 도시를 산책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곁에 함께하는 것은 한동안 그녀를 기다려왔던 소년. 소녀를 잃고 그 언니마저 사라져 얼굴에 그림자가 걷히는 일이 없던 소년은 소녀와 함께하며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았다. 소녀는 소녀대로 조금씩 평온함을 되찾는 듯했다.

  물론, 그것은 완벽한 풍경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완벽한 풍경이라면 세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둘을 잃어야 했던 소년과 몇 년이나 걸려 고향으로 돌아온 소녀에겐 그 불완전한 풍경이라도 행복한 것 같았다. 한 사람의 부재는 분명 뼈아픈 것이었으나, 현재의 행복에라도 만족할 정도로 그들은 행복에 목말라 있었다.

  그들에게 과거란 너무도 고통스러운 날이었다. 어린 나이에 경험한 전쟁은 그들의 삶을 짓밟고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타인에 대한 불신과 증오만을 쌓게 만들었으므로. 아름다운 세상이 단숨에 붕괴하고 어제까지 대화하던 이들이 쓰러졌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무기를 들고 상대를 겨누어야 했다. 그 끔찍한 날들은 악몽으로 남을 수밖에. 그래서 그들은 떨어져있던 동안의 과거를,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굳이 묻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가 깊은 만큼 타인의 상처도 깊다는 것을 알기에 공연히 상처를 헤집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때로 호기심 많은 이들이 소녀에게 전쟁 중 적에게 끌려갔던 일에 대해 물으면, 소년이 단호하게 끊어냈다.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것을 타인에게 풀어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 소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소년은 소녀의 방패를 자처하고 있었다. 소년이 그렇게 자신을 감쌀 때마다 소녀는 감사를 표하며 소년의 마음의 짐을 덜었다.

  소년이 바라던 평화는 소녀의 귀환으로 일부나마 이루어졌다. 겨우 얻게 된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 소년은 소녀의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였다.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뻤다. 함께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런 소녀에게서 조금씩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소녀가 돌아온 지 몇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소녀는 언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니의 사고에 대한 기사를 찾더니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을 헤아리고 사소한 수집품은 버렸다.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소년이 사소한 것에조차 손을 대지 못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정황으로 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 유력한데도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소년과는 달리 소녀는 뜻밖에 언니의 일에 담담했다.

  “아직까지도 못 찾았다고 했잖아.”

  소녀의 흰 손가락이 무심하게 언니의 흔적을 매만지더니 보지도 않고 상자에 던졌다. 그녀가 사라진 날에 남긴 것이라 소년은 차마 손도 대지 못했던 것이었다. 언니의 부재에 지친 것일까. 그토록 서로를 위하던 자매였음에도 소녀는 타인보다도 냉정하게 언니를 잘라내고 있었다.

  “살아남는 건 기적이라고 했고.”

  “네가 돌아오는 것도 기적이라 했어.”

  “나는 포로였으니 사고에 휘말린 것과는 다르지.”

  “하지만 슌은.”

  “유토, 나는 네가 슌에게까지 죄책감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이곳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면 너는 내내 그 날을 기억하고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미련은 지나치게 깊었고 불필요한 죄책감마저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만일 그 날, 그녀가 혼자 외출하게 두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만일 그 날, 그녀가 돌아오는 것을 체크했다면 어땠을까. 만일 그 날에. 그 수많은 가정이 얼마나 그를 괴롭혔던가. 소녀는 그와 함께 지내며 그가 무엇에 짓눌려 지내는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언니의 흔적을 지워내며 그를 구해내려 했을까.

  “나는 괜찮아, 루리.”

  그러나 소년에게는 그것 또한 아픈 일이었다. 돌아오건 돌아오지 못하건, 그녀의 흔적은 계속 남아있었으면 했다.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 후에도 그녀의 물건은 조금씩 사라졌다. 소녀가 불필요한 것은 상자에 넣어 치워두거나 아예 버렸기 때문이었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그녀의 사소한 물건을 발견할 때, 때문에 그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소년은 씁쓸해졌다. 그녀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는데 기억은 쇠하지 않고 선명히 남아 그를 괴롭히고 있었으므로.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잠깐 소녀의 방으로 향했다가 살짝 열린 문 너머로 소녀를 보게 되었다. 소녀는 자신이 사용하던 카드를 정리하고 있었다. 평온한 웃음이 걸쳐진 소녀의 얼굴이 좋아 그대로 잠깐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카드 뭉치 속에서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비쳤다. 사라진 사람의 것.

  사고 이후, 소년은 사라진 이의 남긴 흔적에 미련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가능한 원상태로 보존하기 위해 한동안 그녀의 방을 공들여 관리했다. 당연히, 그녀의 방에 남은 것들이 무엇인지는 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녀의 카드는, 기억에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때 소녀는 언니의 카드를 한동안 만지작거리더니 서랍에 넣어 감추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돌이켜보면 삐걱거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돌아왔을 때부터 소녀는 목에 검은 초커를 하고 있었다. 그 자체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으나 소년에게 그것이 강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과거 초커에 손이 닿았을 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그때 소녀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 눈에 깃든 것은 불쾌도 혐오도 아니라 공포였다. 전장에서의 악몽을 건드린 것일까. 아니면 감추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 것일까. 소년이 황급히 손을 거두자 소녀는 서서히 진정하는 것 같았다. 공포의 그림자가 차츰 걷히고 있었다.

  “미안해, 루리.”

  어떤 이유에서건 소녀에게 자신이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을 맞닥뜨리게 한 것만은 분명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았을 것이 틀림없는 그녀에게 힘든 것을 되새기게 한 것 같아 소년은 마음이 쓰였다.

  “앞으로는 조심할게.”

  그렇게 지나갔던 일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사라지기 전까지 소녀는 초커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저항군의 표식으로 모두 몸 어딘가에 두르고 다녔던 붉은 천조차 목에는 두르지 않았다. 그것을 목에 매었던 것은 그 언니였다. 전쟁 중 목에 남은 흉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도 그녀는 쉽게 목을 내보이지 않고 목걸이나 스카프 등으로 가리곤 했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콕 집어 잘못되었다 말할 수는 없어도 어딘가 묘하게 어긋난 부분들이 있었다.

  그가 아는 소녀와 지금의 소녀는 몇 년의 시간과 전쟁이라는 사건을 감안하더라도, 분명 차이가 있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삐걱거림으로 치부했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더니 나중에는 의심이 되었다. 소중한 이에게 의심을 품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므로 소년은 의심을 완전히 풀어내고 처음 그녀가 돌아왔을 때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 소년은 친우를 불렀다.

  “루리. 부탁이 있어.”

  “뭔데?”

  “초커, 풀어보게 해줘.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래.”

  “그건 싫은데.”

  웃음과 함께 흘러나온 말이었으나, 소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곤란함이 아니었다. 명백한 거부였다.

  “알고 있잖아. 나는 누군가가 목에 손을 대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러면 멋대로 생각해도 돼?”

  소녀는 답을 피하고 돌아서 몇 걸음 걸었고 마침내 참을 수 없게 된 소년은 단숨에 거리를 좁혀 그녀의 목에 채워진 초커를 풀었다. 그 아래 숨겨져 있던 것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흰 목에 새겨진 흉터.

  “이제 만족해?”

  소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

  잊어야 했던 이름이 공간을 갈랐다.

  “이제 만족해, 유토?”

  책망은 없다. 다만 씁쓸함이 그 말에서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소녀에게 다가서 그녀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흔적을 헤집었을 때, 그녀가 기를 쓰고 꾸며오던 극은 막을 내렸기에. 그녀가 지키려 노력했던 평온을 부순 것은 소년이었다. 어째서. 왜 하필. 그런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자신을 버려가면서까지 돌아오지 않는 이를 연기했던 심정은 어떠했는지. 그러나 소년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입 안 가득 들어찬 말을 차마 목소리로 꺼낼 수 없었다. 너무도 참담한 일이기에 그랬다.

  자매는 무척 닮아있었다. 당시의 소녀를 연기하는 건 무리라 해도 아무도 보지 못한 몇 년 후의 소녀를 연기하는 것은, 언니로서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동생을 모방하면 타인은 쉽게 속일 수 있었으리라. 문제는 였다. 사고에서 겨우 살아남은 그녀가 왜 동생의 모습으로 돌아왔는지.

  “두 사람의 자리가 비었는데 하나는 채울 수 있었어. 그렇다면 어느 쪽을 비우는 것이 나을까. 오래잖아 결론을 내렸지. 쿠로사키 슌이 사라지는 쪽이 더 나을 거라고.”

  “.”

  고통스러운 감정을 누를 수 없어 소년은 소녀를 불렀으나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소녀는 말없이 걸어가더니 사라지기 직전에서야 말했다.

  “우리, 옛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그것뿐이었다. 애써 감정을 누른 말만을 남기고 소녀는 소년을 떠나갔다. 짙은 보랏빛을 띤 머리카락이 소년의 눈앞에서 흩어졌다.

 

*

 

  장례식에 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부를 이도 몇 없는 장례식을, 시신도 없이 치러야겠다고 말한 것은 망자의 동생. 전쟁통에 적에 납치되었다 돌아온 소녀는 돌아올 수 없게 된 언니를 빨리 보내주고 잊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그 뒤에 숨겨진 뜻을 모를 리 없는 소년이었으나 그녀의 의지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말이야 실종이었지만 다들 잠정적으로는 죽었으리라 생각했기에 장례에 대해 모두 납득했다. 몇몇은 아픈 것은 빨리 잊는 것이 나을 거라고 소녀의 어깨를 감싸주기도 했다. 소녀는 슬퍼했으나 울지는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언니를 떠나보낼 준비를 해왔을 뿐이다.

  준비를 도우며 소년은 언제나 소녀와 함께했다. 죽은 자는 소녀의 언니인 동시에 그의 친우이기도 했다.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희망과 미련을 품고 기다려온 그였으나 그때는 이미 그도 마음을 잘라낸 후였다.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사람. 동생이 그렇게 결론지었다면 자신도 그녀를 지워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소년은 장례식을 치르기 전 소녀에게 물었다.

  [괜찮아?]

  생략된 말을 알 수 있는 것은 소녀뿐이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이를 애도하는 말이 이어지고 시신 없는 관이 땅에 드는 것을 망자의 동생은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돌아오지 못한 언니의 마지막을 생생하게 지켜보려는 양. 흙이 관을 덮고 모습을 감추게 되었을 즈음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안녕, .”

  소녀는 죽은 언니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더 짜낼 감정도 남지 않은 듯 건조한 목소리였다.

  “안녕, .”

  곁에 선 소년도 죽은 친우와 작별했다.

  그것으로 죽은 이는 영원히 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세상은 영원히 완성되지 못한 채 두 사람의 풍경으로 굳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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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