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조] 안개 너머

2016. 2. 27. 23:10 from 02

 

맹금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사냥감을 노리고 날아드는 사냥꾼의 울음. 부드러운 깃털이 아닌 딱딱한 기계로 무장한 새였으나, 그것은 분명 포식자의 야성을 가지고 있었다. 주인이 손짓하는 대로 날아든 새는 그곳에 자리한 괴물을 무참히 찢어 흩었다. 그와 동시에 괴물을 부리던 이가 고통 섞인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맹금의 주인은 차가운 금빛 눈으로 상대를 내려다보다 지루한 듯 눈을 감았다.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그의 얼굴엔 희열이 비치지 않았다.

승부가 결정되자 승자의 새도 빛으로 부서졌다. 치열한 전투가 끝난 곳에 남은 것은 그들이 부리던 것들의 형상이 담긴 카드뿐. 전장을 누비던 맹금도, 괴물도 본디 환상으로 빚어낸 생물을 승부를 위해 잠깐 현실로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카드에 봉인된 사나운 생물은 전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게임을 위한 것. 사람을 해하면 안 되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지금 패자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트는 것은 이곳에서 게임 대신 전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맹금이 괴물을 찢으며 그 주인에게 실제의 상처를 새긴 것이다.

지상에서라면 이런 것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악용해 사람들을 공격한 군대와의 전쟁을 치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전쟁 이후, 게임을 전투로 만드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었으나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이들은 지하에 전장을 빚어냈다. 이곳, 지하의 경기장은 참가자의 목숨을 갉아먹는 진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이었다. 패자가 부상을 안은 채 무대에서 내려가는 위험천만한 전투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매일같이 펼쳐졌다.

무대 위의 승자, 맹금을 부리는 이는 이 지하경기장에서 이미 유명한 자. 지하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청년이었다. 음지에서 활약하는 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청년의 이름도 나이도 출신지도, 그 무엇도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지금껏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이 착실하게 정점에 오른 실력자라는 이야기는 신화처럼 이곳에 퍼져 있었다. 때문에 그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전설을 맞이하는 이들의 박수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그에 화답하듯, 급습하는 맹금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의 새들은 상대가 부리는 것들을 처참하게 찢어놓았다.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주인에 걸맞게 사납기 그지없는 포식자였다.

청년은 쓰러진 자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무대를 내려갔다. 전투에 달아오른 관객의 함성이 그의 등에 내리꽂혔다. 대기실로 향한 청년은 의자에 기대며 자신의 새가 봉인된 카드를 펼쳐보았다. 차가운 기계로 무장한 맹금은 새라기보다는 병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것이 새의 울음을 내며 날아다니는 것은 언제나 기묘한 광경이었다.

팬서비스엔 영 재능이 없는 사람이군.”

전투가 마무리되자마자 무대를 떠난 청년을 보며, 맞은편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사내가 말했다. 그는 이곳의 관리자. 청년을 이곳으로 안내한 자이기도 했다. 무대에 오르는 자라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관객을 흥분시키는 전사가 되었다.

그런 건 필요 없다.”

자넨 여기서 썩을 사람이 아니잖나. 여기서는 무조건 상대를 쓰러트리면 그만이지만 지상에서는.”

지상엔 가지 않아.”

청년은 냉정하게 상대의 말을 잘랐다.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닿는 이들은 대부분 추락한 자들이었다. 추락한 프로. 프로의 문턱에서 좌절한 사람. 어떤 이유로든 양지의 무대에 설 수 없는 자들. 음지로 떠밀려온 자들의 목표는 대개, 이곳에서 인기를 얻어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실력을 썩힐 생각인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이곳의 무대가 나한텐 맞으니까.”

그러나 청년은 달랐다. 청년의 목표는 처음부터 지상이 아니었다. 그는 음지로 떠밀려와 어쩔 수 없이 데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음지를 찾은 사람이었다. 지상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아서, 혹은 지상의 무대에 차마 오를 수 없어서. 지상은 모두를 즐겁게 만들어야 하는 곳이었다. 관객에게 웃음을 안겨주고, 화려한 무대를 선보여 모두를 사로잡아야 했다. 청년에게는 그 모든 것이 거북했다. 차라리 지하의 추잡한 열기와 자극적인 무대가 편했다. 이곳에서라면 상대를 쓰러트리는 것만으로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으니까.

한때는 청년도 모두에게 웃음을 주는 무대를 그렸다. 한때는 무대 위의 영웅이 되어 아이들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예전에는 그랬다. 그때라면 팬서비스라는 단어도, 지상의 화려한 무대도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청년에겐 너무도 무겁고 불편한 것이 되었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청년의 흰 손이 자신의 맹금을 어루만졌다. 기계의 딱딱한 감촉 대신, 카드의 매끈함만이 느껴졌다. 자신이 부리는 새를 전쟁을 위한 무기로 썼을 때부터 모든 것이 그때부터 어긋나고 말았다.

경기는 환상으로 시작해 비현실로 마무리되지만, 전쟁은 현실이었다. 청년의 세상은 침략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러나 침략자가 사용한 무기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총검이 아닌, 침략으로 짓밟힌 이들마저도 흔히 지니는 카드. 모두가 지니고 있던 것이, 놀이의 도구여야 했던 것이 타인을 해하는 무기로 개조되어 모두를 쓰러뜨렸다. 침략자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청년 같은 생존자들은 침략자와 같은 방법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놀이의 도구를 무기로 든 것이다. 그 참담한 현실을 경험한 이로서 예전처럼 즐거이 무대를 꾸려가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하긴 지하의 제왕도 쉽게 얻을 수 있을 자리는 아니긴 하지. 자네만 만족한다면야 여기서 좀 더 싸워줘도 좋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밖에 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일은 더 이상 없다 해도 청년은 아직도 무장을 해제할 수가 없었다. 전쟁 당시 무기로 사용했던 그의 맹금은 놀이의 도구로 돌아오지 못하고, 적을 물어뜯는 병기로 무대를 누볐다. 세상은 전쟁의 아픔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데 청년은 전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여기서 오래 지낸 자들은 지상에 적응하길 어려워하거든.”

양지는, 눈이 부셔.”

전쟁에 찌든 자신에게는 찬란하게 빛나는 곳 따위 어울리지 않으리라. 청년은 이미 그렇게 체념하고 있었다. 싸우는 것밖에 배우지 않은 투견에게는 추잡한 싸움장이 어울리는 것이다.

사람들에겐 다 자기에게 맞는 곳이 있지. 자네는 지하인 모양이군.”

사내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웃었다. 시야를 메우는 뿌연 연기는 전쟁이 끝나고도 풀릴 기미 없는 답답한 현실을 닮아있었다. 그것이 쟁그라워, 청년은 맹금이 담긴 카드 뭉치를 품에 넣고 도망치듯 대기실을 떠났다.

 

*

 

열기로 달아오른 지하경기장을 빠져나와 어둑한 골목을 몇 개나 지나면 낡아빠진 잿빛 건물과 마주하게 된다. 청년이 몸을 누이는 곳은 바로 그 초라한 건물이었다. 계단을 몇 개 올라 초인종 없는 문을 두드리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늦은 시간에야 돌아온 청년을 맞이한 것은 생기 없는 얼굴의 소년이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는 피로가 배어있었고 움직임은 느릿했다. 예전엔 저 얼굴에도 웃음이 걸릴 때가 청년은 막 떠오른 생각을 흩어버리고 내부로 들어섰다.

오늘은 어땠어?”

외투를 벗어던지고 벽에 기댄 청년에게, 소년의 무기력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별다를 건 없었다.”

청년은 짧게 답했다. 소년은 바깥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소년은 이곳에 온 이후로 통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었고 그나마 꾸준히 바깥에 나가 생활에 필요한 것을 구해오는 건 청년의 몫이었다. 불규칙적으로 나가 늦은 밤에서야 피로한 얼굴로 돌아오는 청년의 일상을 캐물을 법도 했으나 소년은 청년이 말하지 않는 것까지 파헤치려 들진 않았다. 언젠가부터 서로의 생활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암묵적인 룰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의 어긋난 부분을 그들은 못 본 체해주었다.

어차피, 피차 자랑할 것 없는 삶이었다. 함께 전쟁을 겪은 전우인 그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비틀리고 말았기 때문에. 청년이 전장을 연상시키는 음지의 무대만을 누빈다면 소년은 세상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전쟁은 그들의 삶을 태워버리고 말았다. 전쟁이 종결되었다고, 전쟁이 안긴 상처가 단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신음하고 앓고 있는 것이다.

청년의 시선이 문득 바닥에 흩어진 카드뭉치에 닿았다. 소년의 것. 전장에서 소년의 무기가 되어 싸워준 것. 처량하게 널브러진 것을 청년은 습관처럼 주워 정리했다. 말끔히 정리한 카드를 소년에게 내밀며, 청년은 말을 던졌다.

나와는 괜찮지? 듀얼.”

소년은 시선을 회피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소년과 오래도록 함께해온 청년은 알았다.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전쟁의 무기로 쓰인 것을 사용한다는 것을. 싸움을 거리끼지 않았던 청년에게까지 꺼림칙한 영역으로 남은 것을, 천성이 상냥하던 소년이 무사히 넘겼을 리 없었다.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과 전쟁의 악몽이 뒤섞여 고통스러우리라. 전쟁이 끝난 후 소년은 카드를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하는 것마저 어려워하고 있었다.

청년은 그것이 안타까웠다. 소년은 본디 모두를 즐겁게 해주려 했던 사람이었으므로. 지금 소년의 손에 들린 것은 전쟁을 위한 무기가 아니라 화려한 무대를 위한 장치가 되었어야 할 것이었다. 누구든 삼키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싸움은 비난할 수 없는 것임에도, 소년은 스스로 죄를 안고 위축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소년은 카드를 꽉 쥔 채 고통스레 말했다. 이제 자신이 없다고. 즐거운 무대를 꾸며내 모두에게 웃음을 주기는커녕 아예 무대에 오르는 것조차 두렵다고.

소년이 게임조차 회피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청년은 수없이 말했다. 전쟁은 끝났어. 이제 누구도 다치지 않아. 그렇게 몇 번을 설득해서야 소년이 카드를 쥐고 천천히 그와 게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청년은 소년의 상대가 되어 대결하는 것으로 소년의 두려움과 거부감을 허물고 싶었다. 자신이야 전장을 연상시키는 싸움에 다시 젖어들고 말았다 해도, 소년은 좀 더 나은 삶을 이어가길 바랐다. 적어도 소망이 두려움이 되어 옭아매는 끔찍한 현실에선 구원해주고 싶었다.

유토.”

청년은 부드럽게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소년의 회색 눈이 친우에게로 향했다.

강요하지는 않아. 하지만 나는 언제든 네 상대가 되어줄 수 있어.”

긴 침묵 끝에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허락하는 유일한 대결상대는 같은 재앙을 겪은 전우.

청년은 친우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꺼리는 부분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천천히 게임을 이끌었다. 몰아세우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전쟁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대결을 좋아했던 소년인지라 다행히도 게임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조금씩 안정을 찾는 듯 했다. 소년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지더니, 어느새 그가 자랑하던 드래곤이 청년의 기계 새 앞에 나타나 포효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드래곤에 청년이 기쁨을 안고 소년의 다음 수를 기다릴 때, 소년의 손짓이 갑자기 멈췄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갑자기 드리워진 것은 청년이 익히 아는 것. 두려움.

다크 리벨리온 엑시즈 드래곤의 오버레이 유닛을 전부 사용하면 내 몬스터의 공격력은 반의 반이 되고 그만큼 다크 리벨리온은 파워업. 간단하잖아?”

청년은 소년의 공격을 유도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소년이 간단히 이길 수 있었다. 소년이 공격을 선언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맹금은 산산이 찢길 것이 분명했다.

유토.”

소년은 유독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것이 한때 타인을 삼키고 전우들을 삼켰기 때문일까. 이제는 누구도 쓰러지지 않는데, 이제는 누구도 고통에 신음하지 않게 되었는데.

어렵다면 하지 않아도 돼.”

그러나 청년은 언제나 그에게 약했다. 같은 재앙을 견뎌낸 사람이기 때문일까. 혹은 그에게 연민을 안고 있는 것일까. 청년은 그의 내부에 응축된 감정을 헤집고 싶지 않았다. 한 단계 나아간다는 명목으로 그것을 함부로 헤집는 것이야말로 소년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것임을 청년은 모르지 않았다. 소년은 아직까지 두려움의 근원을 정면으로 마주할 상태는 못 되었다. 굳어버린 소년의 얼굴을 보고 청년은 자신의 카드를 흩었다. 게임은 그렇게 중단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공격하라곤 안 해?”

네가 직접 하려 하기 전까진 안 해.”

안도인지 감사인지 모를 감정이 소년의 얼굴에 스쳤다. 고통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자는 대개 고통을 겪지 않은 자들이다. 무지한 만큼 쉽게 타인의 고통을 파헤치며 멋대로 치료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짓이겨진 자로서, 청년은 소년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에겐 다가서서는 안 될 영역이 있었다. 아직은 고칠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 자신이 지상의 무대를 감히 꿈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모호한 답을 내줄 수밖에 없는 것은 청년 역시 자신들을 잠식한 전쟁의 그림자가 언제 걷힐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믿었다. 자신의 친우는 상냥하나 나약한 자는 아니라고. 언젠가는 분명, 스스로 나설 수 있으리라고. 느리게나마 자신을 옭아맨 것들을 풀어낼 수 있을 거라고.

슌도 언젠가는.”

위로를 돌려주려는 듯 입을 뗀 소년은 잠깐 망설임이 스쳤는지 입술을 깨물더니 힘주어 말을 이었다.

슌에게 어울리는 무대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이 어디를 누비고 있는지 꿰뚫어보는 듯한 친우의 말에 청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전우이니, 알아채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은 조심해줘.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소년은 결국 상냥한 사람이었다. 전쟁에 찢기고 황폐해져도 천성마저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청년은 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통에 짓이겨진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건, 고통을 함께해온 상대뿐이었다.

 

*

 

금지된 전투가 벌어지는 지하경기장은 언제나 열기로 들떴다. 패자를 그대로 삼켜버리는 무시무시한 경기에 빠진 이들이 그득그득 들어찼기 때문이었다. 치열한 싸움의 끝에 패자는 퇴장하고 승자는 조금씩 먹이사슬의 상부로 올라선다. 자연세계를 연상시키는 냉혹한 싸움은 관객의 흥분을 불렀으며, 승자는 관객의 마음을 얻었다. 그곳에서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자가 있다면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한 청년일 터였다.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승리를 쌓아 지하의 제왕이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 자. 그가 무대에 올라 자신의 무기인 맹금을 꺼낼 때마다 함성이 쏟아졌다.

어느 날 갑자기 데뷔해 실력자들을 전부 처리하고 빠르게 정상을 차지한 청년에 대해 많은 이들의 궁금증이 따랐으나 그 중 무엇도 명쾌하게 해결되는 일이 없었다. 청년의 모든 것은 비밀에 부쳐졌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듯.

저 자는 언제부터 무대에 올랐죠?”

제왕의 무대가 펼쳐질 때, 관객 틈에 있던 한 사내가 청년을 가리키며 관리자에게 물었다. 관리자의 눈이 날카롭게 상대를 훑었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위화감은, 그가 평범한 관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어떠한 목적을 안고 들어온 외부인인 모양이었다.

몇 달쯤 되었지요.”

이름이나 출신지 같은 건 말하던가요?”

아뇨. 아무것도. 이곳엔 그런 놈들이 흔해요. 대부분 그렇게 자랑스러운 처지는 아니니까.”

여전히 쏟아낼 것이 남은 듯한 상대를 내버려두고, 관리자는 걸음을 옮겼다. 일반적인 관객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별달리 위험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곳의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왕을 파헤치려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관리자가 자리를 뜬 후에도 사내는 청년의 맹금이 여느 때처럼 적을 사납게 물어뜯는 모습을 덤덤하게 지켜보았다. 그것은 연구대상을 지켜보는 연구자의 모습 같기도 했다.

쏟아지는 함성에도 인사 하나 없이 냉랭하게 무대를 내려가는 청년을, 무대로 향한 사내가 붙들었다. 청년은 뜻밖의 방해에 돌아보았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낯익은 자였다. 전투에 열중하다 잠깐 시선이 아래로 향했을 때 무대 아래에서 저를 지켜보는 그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것을 그저 넘겨버렸던 것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명백한 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그가 자신을 붙잡는 것인가. 의문을 풀 겨를도 없이 사내는 청년을 잡아끌고 구석으로 향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먼저 말을 던진 것은 청년이었다. 청년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챈 사내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왜 여기 있는지부터 묻고 싶군. 쿠로사키.”

청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흰 얼굴에 비치는 것은 비웃음에 가까웠다.

당신이 관여할 일인가?”

나는 관여하지 않아도 사장님은 관심을 보이시지.”

이번엔 무슨 명목으로?”

빈정대는 기색이 다분한 목소리에 사내는 자신의 젊은 주인을 생각했다. 한때 세상을 덮친 전쟁을 막기 위해 싸웠고 전쟁이 끝난 지금은 전쟁에 휩쓸렸던 이들의 후원에 힘쓰고 있는 사람.

청년은 전쟁의 피해자였다. 세상을 삼키려는 야욕을 품은 자가 일으킨 정복전쟁에 휘말린 것이다. 하루아침에 침략자에게 고향이 짓밟히고 주변인이 쓰러지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청년은 살아남기 위해 무장해 싸웠다. 수많은 동료를 잃고 누이마저 납치당한 절망적인 상황을 반전시키려 청년은 고향을 두고 이곳으로 왔다. 이곳에 군림하는 자는 침략자의 아들이었으나 아비를 적대하여 저항군을 구축하고 있었다. 적에 대한 증오를 안은 청년은 그가 결성한 저항군에 들어서 싸웠다.

청년과 그 동료들의 싸움 끝에 전쟁은 종결되었고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들었다. 청년의 세상은 복구 작업에 들어갔고, 쓰러졌던 동료들도 대부분 돌아왔다. 납치되었던 청년의 누이 또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행복한 결말이었다. 만일 그것이 한 편의 소설이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이 경험한 것은 현실의 전쟁이었다. 사내는 그 행복한 결말 뒤에 숨겨진 현실의 그림자를 알고 있었다.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린 피해자들은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며 전쟁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살아 돌아온 이들 중에서도 신체적인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들도 많았다. 그것을 알기에, 사내의 주인은 힘이 닿는 데까지 피해자를 후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나름의 책임감이리라, 사내는 생각했다. 전쟁을 일으킨 자는 그의 아비였고 그가 삶을 비튼 이들은 세상 곳곳에 있었다. 괴물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세상을 지켜야 할 자로서 그는 책임감을 품고 있는 것이다.

청년을 포함한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후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납치당했던 청년의 누이는 물론이고 청년과 그 동료에게도 그는 치료를 약속했다. 그러나 청년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예 추적을 막으려는 듯 모습을 감추고 한동안 잠적한 채였다. 청년이 막 복구가 시작된 고향이 아닌, 누이가 치료를 받고 있는 이 도시에 머물고 있으리라곤 짐작했으나 하필 이런 추잡한 곳에서 움직이고 있으리라곤 사내는 생각지도 못했다.

사장님께서 네가 치료를 받길 원하신다.”

나도 내가 잘못되었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러면 이제 치료를 받겠다는 뜻인지?”

아니. 내가 병든 것과 치료를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

이해할 수가 없군. 루리 양의 치료는 단박에 받아들이지 않았나?”

루리는 치료가 필요했어. 그 애가 겪은 공포와 충격은 조금이라도 빨리 풀어주어야 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너는? 너와 유토는?”

그들 역시 전쟁에 짓밟히고 찢긴 인간이었다. 고통을 덜어내야 하는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줘.”

침묵을 거쳐 청년이 내뱉은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아직은 치료를 감당할 상태가 못 돼. 나도, 유토도.”

그들은 치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치료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있었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너무도 깊어 지금은 그저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치료를 명목으로 손길이 닿는 것조차, 그들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때문에 아무리 따스한 손길이어도,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비틀린 채로 있도록 조금만 내버려둬. 감당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치료를 받을 테니까.”

언젠가는 절대적인 고통으로부터 헤어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라면, 자신의 병증까지도 확실히 볼 수 있을 때라면 치료라는 호의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그저 어긋난 채로 남아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덜 고통스러운 방책이었다.

청년은 처음부터 극한의 불행에 내몰린 사람이었다. 금방이라도 꺾일 듯 위태로운 사람이, 그저 싸움을 끝내고 누이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으로 연명해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내는 눈앞의 청년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지 느껴져,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청년은 사내에게서 벗어나 경기장을 떠났다. 도망자처럼 다급히 빠져나가는 모습이, 끝까지 사내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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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