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세상은 절망에 뒤덮이게 되었다. 세상의 색채는 잿빛에 먹히고, 희망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사람들은 하나같이 낯빛이 어두워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굴속으로 몸을 숨겼고 밖으로 나선 이들조차 의욕 없는 얼굴로 떠도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치 온 세상에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도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희망과 의욕을 양분 삼은 병균이 몸에 파고들어 사람을 절망으로 떨어트리는 병. 절망은 그만큼 무섭게 세상을 잠식하고 있었다.
무기력에 질식한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생생했다. 홀로 절망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 같았다. 움츠러들기는커녕 제왕처럼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소년의 흰 얼굴에는 절망 대신 나른한 웃음마저 비치는 듯했다. 소년은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거리를 다니며 세상 구석구석을 훑었다.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곳곳에 머물렀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중, 소년은 자신 이외의 사람을 발견하고 멈췄다.
기척을 느끼고 돌아본 사내는 소년만큼은 아니었지만 절망의 영향을 덜 받은 듯 비교적 멀쩡한 상태였다. 고목처럼 무기력한 이들을 생각하면 제법 생생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물게 찾아낸 인간에 흥미가 생긴 것인지 소년은 사내에게로 다가섰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사내는 뒷걸음질 쳤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소년은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사내를 압박했다. 마침내 사내에게 닿은 소년은 웃었다.
“오랜만의 먹잇감이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도 전에, 소년의 송곳니가 사내의 목을 파고들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내는 소년에게 물리고 말았다. 모든 양분을 갈취당하는 듯한 고통을 사내에게 한동안 선사하고서야 소년은 사내를 놓아주었다. 겨우 풀려난 사내는 힘없이 쓰러졌다. 그나마 내비쳤던 생기조차 소년에게 빼앗긴 듯, 사내의 검은 눈에는 빛이 사라진 후였다. 빼앗을 것을 전부 빼앗은 소년은 흥미를 잃고 사내를 떠났다. 붉은 망토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 후로도 소년은 세상을 낱낱이 뒤지며 먹잇감을 찾아 헤맸다. 그의 먹잇감은 절망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생기를 내비치는 자. 그런 이를 발견하면 소년은 어김없이 그 자를 덮쳤다. 목을 물어뜯거나, 키스하거나. 어느 쪽이든 먹잇감을 휘어잡고 무섭게 파고들어, 희생자로부터 무언가를 빨아들여 삼켰다. 바라던 것을 전부 삼키면 소년은 희생자를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았다. 그에게 공격당한 희생자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생기도 의욕도 잃고 절망에 완전히 잠식되고 말았다.
소년은 희생자를 찾아 그나마 남은 생기를 전부 빼앗는 것을 ‘사냥’이라고 칭했다. 소년에게 인간이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말라갈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사냥을 거듭하며 그가 탐욕스레 삼키는 것은 인간의 행복이었다. 인간이 품은 모든 행복을 긁어내 삼키면 어렴풋이 달콤한 맛이 났다. 사냥의 목적은 바로 그 달콤함이었다. 소년에게 행복의 달콤함이란 갈취하지 않고선 얻어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절망이었다. 소년에게 붙들린 희생자들이 절망에 잠식되는 것도 그래서였다. 애초에 절망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은 소년이 사냥을 시작한 때부터였다. 소년의 사냥이 세상에 절망을 퍼트려 온 세상을 야금야금 삼키고 있었다. 그러나 왜 절망이 행복을 알게 되었는가. 어떻게 행복을 접해 그것을 탐하게 되었던가. 그 답은, 소년의 과거에 있었다.
세상에 소년이라는 절망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기쁨이 있었다. 사람을 질식시키는 절망과는 달리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살아갈 수 있도록 위안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모두가 기쁨을 사랑했고 그만큼 절망을 미워했다. 언제나 경멸받던 절망은 기쁨을 상좌에서 끌어내려 저와 같은 지옥으로 떨어트리고 싶었다. 그래서 절망은 기쁨에게 닿아 오염시키기로 했다.
절망이 처음으로 행복을 학습한 것은, 기쁨에게서 행복을 앗은 때였다. 절망은 기쁨의 내부를 휘저어 그 일부를 쥐어뜯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게걸스레 삼켰다. 그 대신 절망은 제 일부를 떼어내 기쁨의 입으로 밀어 넣었다. 이것으로 공평해졌어. 라며. 억지로 삼킨 절망은 기쁨의 내부에 닿아, 화사한 곳을 제 음울한 색으로 물들였다. 무채색이 뒤덮은 내부는 다시는 본래의 색을 찾을 수 없었다. 기쁨은 절망을 삼켜 오염되었고, 기쁨의 이름을 잃고 분노가 되었다.
그렇게 세상에선 기쁨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기쁨을 끌어내린 절망이 대신 세상을 채웠다. 그때부터였다. 절망이 행복을 탐하게 된 것은. 그것은 기쁨이 절망에게 맛보여준 행복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달콤했기 때문이었다. 기쁨에 물든 인간이 세상에 여럿 있다는 것을 깨달은 절망은 그들을 사냥해 행복을 빼앗기로 했다. 그러나 괴상하게도 사냥하면 사냥할수록 행복에 대한 갈증은 바닷물을 마신 것처럼 오히려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절망은 알았다. 그것은 그가 최초로 삼킨 행복 때문이었다. 최초의 행복은 너무도 달콤하여 절망에게 다시없을 만족을 안겨주었다. 다른 무엇도 그때의 달콤함을 줄 수는 없었다. 그와 같은 정도는커녕 그보다 조금 못 미치는 것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 최상의 만족이 절망을 미치게 만들었다. 절망은 이제 다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부지런히 사냥해 탐욕스레 행복을 삼키더라도, 그것은 절망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세상을 지배한 절망이, 오래 전에 추락한 기쁨 때문에 휘청거리고 있었다. 절망에게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기쁨은, 절망의 손에 추락한 기쁨은 어떻게 되었는가.
한때 자신이 채웠던 세상이 절망에게 오염되는 것을 보며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몇 번째인지 모를 사냥감을 내던진 소년의 입가에 문득 웃음이 번졌다. 그를 찾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년에게 오염된 이후로 기쁨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에 숨어들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던 과거를 생각하면 비참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우습게도, 기쁨을 가둔 것은 사람들도, 그를 끌어내린 절망도 아니었다. 분노로 변질된 자신이 혹여 모두에게 재앙이 될까 두려워한 기쁨 본인이었다.
세상이 기쁨을 사랑했듯 기쁨도 세상을 사랑했다. 만일 절망이 그를 끌어내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언제까지고 찬란한 자리에 앉아 인간을 굽어보며 희망을 안겨주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무기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지금 같은 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완벽한 풍경을 부순 것은 절망이었고 기쁨의 본질마저 흐려버린 것도 절망이었다. 분노가 된 기쁨은 그 무엇도 감쌀 수 없었다. 분노를 안은 이들은 대개 붕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염되었다 한들 여전히 기쁨은 세상을 사랑했다. 세상이 그를 받아들일 수 없음에도. 그것이야말로 불행이 아닌지. 기쁨, 아니, 분노가 머무르는 곳에 닿은 절망은 굳게 잠긴 문을 가볍게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둑하고 좁은 내부는 수행자의 처소를 연상시켰다.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차마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의 은신처다웠다. 발소리가 내부를 울려도 주인은 침입자를 확인하는 일이 없다. 아니, 이미 누가 들이닥쳤는지 짐작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가 이곳에 숨어든 후 그를 찾는 자라곤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절망은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서서야 멈췄다. 그리고 그 너저분한 공간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는 이와 마주쳤다. 거울을 보는 듯 똑같은 얼굴이었으나, 얼굴에 비치는 표정 따위의 세세한 것이 미묘하게 달랐다. 침입자는 정복자처럼 여유로웠고 주인은 패자처럼 위축되어 있었다. 한때는 저 위축된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기도 했다. 누구보다 환한 얼굴로 희망을 드리울 때도 있었다. 과거에는, 그랬다. 절망은 저와 닮은 얼굴을 가볍게 쓸어보았다. 상대는 움찔했다.
그들이 같은 얼굴을 가진 것은, 감정이란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쪽은 그 중 기쁨을 맡았고 다른 쪽은 절망을 맡았을 뿐. 감정을 상징하는 다른 이들도 뿌리가 같았으므로 같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 모두 형제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리라. 다른 ‘형제’들도 각기 자신이 맡은 역할이 있었으며, 어느 하나도 다른 것의 우위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한쪽은 기쁨이라 모두에게 사랑받고 하나는 절망이라 모두에게 경멸받는다면 불공평하지 않은가. 무엇을 맡게 되느냐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나긋한 목소리에 분노는 대답 대신 몸을 떨었다. 언젠가부터 절망은 형제들을 차근차근 짓밟기 시작했다. 가볍게는 힘을 빼앗았고 심할 경우 가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장 악의적이었던 것은 바로 그, 기쁨에게 저지른 일이었다. 기쁨을 오염시켜 분노로 만든 탓에 세상에는 그 어떤 희망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희망이 사라진 세상에서 절망은 공포로 군림했다.
“네가 도통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지루해서 말이야.”
그런 상황에서 분노마저 세상에 날뛰면, 절망과 분노가 뒤엉켜 재앙이 닥칠 것이다. 분노는 자신이 사랑하던 세상을 해하고 싶지 않아 자신을 가두는 것을 택했다.
“네가 없는 세상은 재미가 없어. 이제 짓밟을 것도 별로 없고.”
“이제 세상에 관여하는 것은 그만둬. 더 이상의 피해를 입혀선 안 돼.”
“간섭하는 거야?”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절망의 보랏빛 눈이 분노를 꿰뚫었다. 그것은 포식자의 시선이었다.
“그럼 네가 스스로 나를 막아보지 그래?”
이럴 때 절망은 악의적이었다. 분노가 저를 결코 막아낼 수 없음을 알고 빈정대는 것이다.
절망이 최초로 물어뜯은 형제가 바로 기쁨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이에게, 빛의 영역에 있던 이에게 자신의 어둠을 덧씌워 저 아래로 끌어내린 것이다. 아마 그때 절망은 자신이 모두의 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챘으리라. 그때부터 절망은 모든 형제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악의를 가지고 상대를 물어뜯은 일 없었던 형제들은, 약했다. 그들은 전부 절망의 공격에 허망하게 무너지곤 무대 뒤편으로 쫓겨날 뿐이었다.
텅 빈 무대를 차지한 것은 절망 하나뿐이었다. 그 후 누구도 그의 독주를 막을 수 없었다. 이미 그가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차지한 탓이다. 본래의 힘을 잃은 분노라면, 상대도 되지 않았다. 언젠가 분노가 그를 막으려 달려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분노의 체내에 흐르는 것은 절망이 심은 그의 일부. 분노가 절망을 노릴수록, 절망의 힘이 더욱 증폭될 뿐. 한때 세상에 희망을 그렸던 이도 절망 앞에서는 무력했다.
“분하거든 너 자신을 원망해. 모든 것의 시작점은 너였으니까.”
“무슨 뜻이지?”
뜻 모를 말에 분노가 반문하자, 절망은 답하는 일 없이 그의 목을 물어뜯었다. 짓궂은 짐승이 주인을 물어뜯듯 가볍게 물어뜯었음에도 행복의 달콤함이 희미하게 배어나왔다. 기쁨이란 이름은 잃었음에도 본질은 완전히 변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이전만큼 달콤하지 않아 아쉬웠으나 그것은 분노가 제 것을 삼켰기 때문이므로, 절망으로선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염되어 본래의 이름을 잃었다면 마땅히 자신을 지옥으로 끌어내린 자를 증오해 물어뜯어야 할 텐데, 기쁨이라 불렸던 것은 끝내 그렇지 못했다. 회색 눈으로 절망을 쏘아보며 으르렁거릴 뿐. 그의 태생적인 상냥함은 오염되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분노에게서 아직도 행복의 달콤함이 배어나오는 것도 아마 그래서이리라.
그렇기에 절망은 더더욱 분노가 마음에 들었다. 본래의 성정을 채 벗지 못한 모습이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분노를 놓아준 절망은 그의 의문을 풀어주기로 했다.
“네가 그토록 빛나지 않았다면 끌어내릴 이유도 없었어.”
과거 언제나 웃음이 내걸리던 그의 얼굴에, 절망은 가학심이 일었다.
“형제를 끌어내릴 수 있다는 걸 몰랐다면 나머지 형제를 공격하지도 않았겠지.”
분노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새로이 짊어진 이름에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너를 통해 행복을 맛보지 않았다면 사냥을 거듭하지도 않았을 거야.”
“사냥?”
무시무시한 단어에, 분노는 의문을 드러냈다. 절망이 세상을 활보하며 온 세상을 잠식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사냥이라고 불릴 법한 것까지 저지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네게 했던 것과 같아. 인간을 물어뜯어 행복을 빨아들이는 거야.”
절망의 보랏빛 눈이 천진하게 빛났다. 그의 악의 없는 잔학함에 분노는 오싹해졌다.
“한 번 사냥한 인간은 내게 물들어 다시는 행복을 찾을 수 없게 돼. 그러니 희생자를 찾아 계속 돌아다닐 수밖에 없고. 성가신 일이지. 게다가 그 누구도 너보다 못해. 효율적이지 않다고.”
“그렇다면 그만둬.”
“그건 곤란해. 내 즐거움을 빼앗을 셈이야?”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받아치는 절망은 무자비한 포식자가 아니라 흥밋거리를 빼앗긴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절망은 본디 그런 자였다. 누구보다 잔학하면서, 제 흥미가 닿는 곳에 한해서만 한없이 관대하고 순진한.
“정 인간들이 불쌍하다면 네가 그들을 위해 희생해.”
“네게 목을 내주란 건가?”
“못할 것도 없잖아? 사실상 네가 사랑하는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일 텐데?”
분노는 자신이 말려들었음을 깨달았다. 절망은 포식식물과 닮아있었다. 먹잇감을 유혹해 천천히 제게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향에 이끌려 가까이 가는 순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미 절망은 그에게 덩굴을 뻗어 그의 온몸을 휘감은 채였다. 절망은 어떻게든 분노를 물어뜯을 것이다. 먹잇감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분노는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증을 가르쳐주었다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그렇지?”
절망의 말이 공간을 울리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송곳니가 분노의 목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행복이 그의 체내로 흘러들어감과 동시에 분노의 내부를 그의 어둠이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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