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적군은 거칠게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는 권총이 떨어져 있었다. 후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살을 시도한 것일까. 총탄에 짓뭉개진 얼굴이 처참했다. 그러나 그는 피를 쏟으면서도,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죽지는 못했다. 총탄이 급소를 빗겨간 탓이다. 차라리 단번에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단 몇 cm의 실수 혹은 한순간의 망설임이 고통스러운 삶의 유예를 불러왔다.
청년이 적군에게 걸어간 것은 그가 힘겹게 권총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청년의 금빛 눈은 먹잇감을 보듯 번득였다. 적 앞에 냉정하기 짝이 없는 청년이 죽음마저 실패한 이를 대신 죽이리라고, 지켜보던 이들은 전부 생각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청년은 신중하게 걸어가 권총 앞에 섰다. 쓰러진 자와 냉혹한 사신의 시선이 엉켰다. 다음 순간, 청년은 권총을 걷어찼다. 고통 없는 죽음이란 소망은 그렇게 허망하게 깨지고 말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청년은 적군이 숨을 헐떡이며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는 것을, 끝까지 차갑게 지켜보고 있었다.
길고도 긴 죽음, 길고도 긴 형벌.
적군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막사로 돌아온 청년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하다못해 알량한 희열이나 조소마저 없었다. 지독한 인간이군. 사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청년이 지배의 쾌감이라도 비추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저렇듯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청년의 감정이 담아낼 수도 없을 정도로 극단적이라는 것을 뜻했다. 그는 이미 젊은 나이에, 자신이 안은 감정만큼 극단적으로 비틀린 인간이었다.
물론, 사내는 그의 비틀림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안다. 아카데미아라는 이름의 침략자가 그의 고향을 잿더미로 만든 때가 시작이었다.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청년은 상실을 배웠고 죽음의 무게를 짊어지다가 스스로 총을 들었다. 그의 첫 살해는 아마도 자기방어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저항군의 이름으로 싸운 지 몇 년. 그는 악귀처럼 싸워 최후의 생존자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만큼 많은 이를 죽여야 했다.
모든 것을 앗아간 침략자에 대한 증오는 당연한 감정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살해 또한 전부 비난할 수는 없었다. 생존자라는 이름을 내걸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다소 지나쳤다. 사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오른팔로 싸워주는 청년이 언젠가는 그 극단적인 감정과 사나운 행보에 먹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쿠로사키.”
이름을 부르자 청년은 멋대로 사내의 맞은편에 앉는다. 저항군의 마지막 생존자인 그는 스스로 사내의 품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내일을 도모하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라고, 청년은 말했다. 결과적으로 청년은 옳았다. 사내를 도와 싸우며, 그는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으니.
“지휘관께서 내게 무슨 용무신지?”
불손하기 짝이 없는 청년의 어투를 용납하는 것은 그가 본디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사내 앞에서는 대등한 위치로 있길 고집했다. 사내는 그를 ‘사용하는’ 대신 그러한 무례를 묵인해주기로 했다.
“경과를 이야기해주려 했을 뿐이다. 이대로라면 곧 하트랜드에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트랜드 진입이라.”
“감상을 듣고 싶군.”
침략자의 손에 떨어진 고향의 이름에, 자신의 상실을 대표하는 이름에 청년의 입매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무엇을 바라지?”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해.”
“……별로 반갑지 않다.”
청년은 오른손으로 제 양 눈을 감쌌다. 지친 사람처럼. 사내의 보랏빛 눈은 그의 말에 흥미로 빛났다. 적군에게 짓밟혀 폐허가 된 고향을 청년은 살아남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수년, 청년은 떠나온 곳에 발을 딛지도 못했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보다 불편함을 먼저 내비친다는 것이 사내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뜻밖인데.”
“괴뢰국가를 세웠다고 들었다. 아카데미아의 앞잡이가 그곳에서 왕 노릇을 하며 멋대로 조종하겠지.”
“이미 그곳은 네 고향이 아니라는 건가?”
청년은 입술을 짓씹었다. 사내는 그에서 청년의 고뇌와 고통을 읽어냈다.
“하트랜드는 내가 떠날 때 이미 죽었다. 나는 지금까지 죽은 것을 품고 살아왔어.”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거지?”
눈을 가리던 청년의 손이 떨어졌다. 청년은 금빛 눈에 담긴 날카로운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말을 이은 건 결국 사내 쪽이었다.
“이미 죽어버렸다 한다면, 너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이냐고 물었다.”
“끝내기 위함이지. 전부 끝내고, 그 잔해로 돌아가서 묻히려고.”
“아무래도 너는 희망 같은 건 품지 못하는 모양이군.”
“희망?”
청년이 반문했다. 유령처럼 텅 빈 웃음을 걸치고.
“잔해에서 무엇이 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사내는 자신이 끝내 청년을 이해할 수 없음을 새삼 느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너무도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받아야만 했다. 그의 세상은 필연적으로 좁아졌고 그가 맞닥뜨리는 것은 대개는 잔해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너는 하트랜드의 복구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다.”
“복구라. 틀린 말은 아냐.”
청년은 턱을 괴며 잠깐 침묵을 지켰다. 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저 잔해를 전부 들어내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땅에서 처음부터 쌓아가야지. 다만.”
“다만?”
“그러려면 쓸어버려야 한단 말이야. 저 잔해 위에 놈들이 멋대로 세운 것들을.”
청년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아마도 그의 불편함은 거기서 비롯하였으리라. 원형조차 희미할 정도로 무너진 자신의 세상에, 침략자들이 제멋대로 자신의 것들을 쌓아올렸다는 것에서. 그 아래에는 그가 사랑하던 것들이 있다. 이제는 퇴색된 그의 기억 속 세상이 있다. 청년은 쌓기 위해 쌓은 것을 무너뜨려야 했다.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해도,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침략자의 흔적을 걷어낸다는 목표만으로 움직이며, 어쩌면 더한 폐허를 만날 각오를 해야 했다. 사내는 청년에게 무의미한 위로를 얹는 대신, 확신 없는 성공을 약속하는 대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로 한다. 지휘관. 청년을 전장에 세우고 그의 싸움을 끝내줄 사람.
“하트랜드에 진입하면 일이 까다로워질 거다. 너는 특히 할 일이 많을 테니 세세한 것에는 관여하지 않도록 하지. 단, 개인적인 복수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이 네게 했던 것을 똑같이 돌려주려고 하진 마라.”
그러니 사내가 해야 할 말은 안내와 지시여야 할 것이다. 지휘관다운 말에 청년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별 걱정을 다 하시는군. 내가 그 정도로 머리가 안 돌아간다고 생각해?”
“형식적인 주의일 뿐이다. 말은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전부터 너는 꽤 과격하게 움직였으니 말이지.”
“그런 뜻이 아니었다만.”
“그러면?”
“돌려주고 싶어도 돌려줄 수가 없다는 뜻이다.”
청년의 목소리는 침중했다.
“네가 무엇을 상상하건, 우리가 경험한 것은 그 이상일 거다.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냐. 돌려주려면, 그보다 더한 괴물이 되어야 하는데 그건 놈들을 아무리 증오해도 불가능한 일이지.”
“쿠로사키.”
“복수가 무의미하다는 흔해빠진 말 이전에, 완전한 복수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음울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청년의 얼굴엔 표정이라곤 없었다. 사내는 그것이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온 청년 특유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감정은 언제나 차갑게 타올랐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복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음에는 그런 것 따위 우리가 할 수 없는 영역임을 깨달았다. 내가 놈들을 짓밟는 건 증오를 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기 때문이야.”
“필연적인 싸움이라는 건가.”
“게다가 돌려준다 한들, 그것은 이미 동등한 것이 아니지. 그들이 이유 없이 무차별적으로 행한 것을, 우리는 잃은 것을 위해 돌려줘야 한다는 거니까.”
청년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모든 불행이 시작된 날을. 화사한 세상이 한순간에 채도를 잃고 무채색의 절망에 잠겼던 날을. 침략자는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균열을 눈치채지 못한 세상에 침략자가 처음으로 퍼부은 것은, 총격. 무차별적인 총격이었다. 타인을 해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있을 리 없었다. 사람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졌다.
주검이 메운 거리를 지나 침략자는 중심부로 들어섰다. 포격에 건물이 무너졌다. 그 전까지 누구도 전쟁을 생각하지 않았고, 누구도 포격을 짐작하지 않았다. 따라서 누구도 붕괴를 막아낼 수 없었다. 누구도 저항하지 않는 세상.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세상. 물어뜯는 법도, 성벽을 쌓아올리는 법도 몰랐던 이들에게 주어진 결말이란 죽음밖에는 없었다. 침략자들은 의기양양하게 전진했다. 평화에 익숙해진 세상을 잠식하는 것은 그렇게나 쉬운 일이었다.
“옛날 생각이라도?”
“아. 그래.”
청년은 짧게 답하고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닫히면 다시 과거의 풍경이 펼쳐진다. 잃은 것들은 언젠가부터 잔상이 되어 그의 눈에 새겨졌다.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인 주제에 걸핏하면 아른거렸다. 그 중 일부는 이미 잔해가 되었고, 일부는 침략자의 손에 들어갔으며, 일부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옛날, 생각일 뿐이지.”
언젠가부터 그는 상실을 헤아리지 않게 되었다. 하루하루 수십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잃은 것은 평화였고 다음으로 잃은 것은 추억의 장소였으며 그 후로 잃은 것들은 사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탄에 쓰러졌고 포탄에 찢겼으며 살아남은 이들도 걸핏하면 사라지곤 했다. 누구라도 그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법은 없었다. 눈을 뜨면 누군가가 죽고 다시 눈을 뜨면 누군가가 사라졌다. 가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주검 더미가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상실은 하루하루 그의 목을 죄어드는데 침략자의 만행은 심해지기만 했다. 세상은 그들의 손에 떨어졌으므로 그들은 침략자라는 이름 대신 정복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정복자는 침략한 곳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에, 저들이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에 도취되어 감히 신 노릇을 하게 되었다. 난폭한 신이 그러하듯 수많은 이들을 장난삼아 죽이게 된 것이다. 청년은 살해가 한낱 유희가 되던 날을 기억했다. 그렇게 잃은 이들의 죽음은 더욱 허망하고 쓰렸다.
가슴을 찌르는 상실과 처참한 모습으로 전시된 주검들. 죽음과 유희. 귀를 찢는 비명과 그럴수록 높아지는 웃음소리.
악몽처럼 남은 기억에 청년은 눈을 떴다. 과거의 상은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렸으나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사내의 눈에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청년은 잔상을 몰아내며 천천히 입을 뗐다.
“아까 죽음의 자비를 기다리던 놈 말이야.”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기다리는 적군에 대한 청년의 행동은 놀라웠다. 적에 대한 청년의 깊은 증오가 그런 식으로 표출되리라곤 사내도 예상치 못했다. 그때라면 개인적인 복수도 가능했을 터.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죽이거나 최후의 순간까지 농락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의 ‘분풀이’라면 사내도 묵과해줄 생각이 있었다.
“죽일 수 있었어. 아카데미아가 그랬듯 바로 머리를 날릴 수도 있었지. 분풀이를 위해서 놈의 죽음을 전시할 수도 있었고 죽음을 가지고 농락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했다.”
“그렇다면?”
“나는, 놈에게 우리와 같은 절망을 안겨주고 싶었어. 죽음이 유예되어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유예. 그것은 몹시 괴상한 단어였다. 사내는 청년이 자신의 상태를 유예라는 단어로 표현할 줄은 몰랐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의 삶은 죽음을 유예해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삶을 연장해온 이유는 아마도.
“죽기 싫어 살아남은 것만은 아니었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날을, 죽음을 생각했다.”
“그럼에도 죽지 않은 것은 레지스탕스로서의 책무 때문인가?”
저항군으로서의 책임. 사내는 그것이 청년을 지금까지 지탱해온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무시할 수는 없지.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었어.”
청년의 얼굴에 자조의 빛이 떠올랐다.
“그건 우리 생존자들의 어깨를 언제나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었지. 누구도 그것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고 손을 뻗으면 총이 있는데도 차마 목숨을 끊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가 죽었어. 자살이었다. 총구를 입에 넣고는 방아쇠를 당긴 거야. 깨끗한 죽음이지. 녀석은 개중 꽤 어린 축에 들었는데 모두 어린애의 철없는 선택이라 혀를 차면서도 부러워했다.”
“죽음을 실행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래.”
하루하루 상실을 거듭하고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해할 수밖에 없는 삶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살아남은 이들에겐 도리어 죽음의 유혹이 강렬했다. 불행의 늪은 깊고, 삶은 너무도 무겁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도피가 그들에게는 가장 쉬운 처방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이유로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을 뿐이다.
“녀석은 우리를 옭아매던 족쇄로부터 자유로웠던 거다. 그러니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겠지.”
“족쇄라면.”
“망령이야. 망령의 속삭임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그것이 언제부터 따라붙었는지, 청년은 모른다. 언젠가부터 당연하다는 듯 저에게 붙게 되었다는 것만 알았다. 침략자에게 잃은 자들이, 가족이, 이웃이, 동지들이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붙었다.
“우리는 죽음이 유예된 인간이라고 했지. 그건 우리가 죽은 자들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대신 살아남았으니 그들에게 우리의 삶의 일부를 내어준 거다. 그러니 그들이 끝맺지 못한 것들, 그들이 소망한 것들을 우리가 대신 이루기 전까지는 멈춰서는 안 돼. 그때까지는 죽음을 미루고 삶을 연장해야 한다는 거야.”
청년의 삶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죽은 이들마저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혼자만의 삶이었다면 돌아볼 것이 없으므로 진즉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망령은 그의 삶을 잠식하였다. 짊어진 자가 있으므로, 그는 헛되이 날을 보낼 수가 없었다. 목숨을 버릴 수도 없었다. 그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저항군 대부분이 그러했다. 각기 망령을 짊어지고, 그 때문에 죽음을 미루었다.
“그건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의 발현인가.”
“모를 일이지.”
“피곤한 생존법이군.”
“그럴지도.”
“그렇다면 유예가 끝나는 건 언제지?”
“우선은 이 전쟁이 끝난 후가 될 거다.”
“전쟁이 끝나 그 망령에게서 벗어나게 되면, 최우선의 목표를 이룬다면 너는 죽을 생각인가?”
날아든 질문은 차가웠다. 사내의 얼굴에는 해석할 수 없는 감정이 비치고 있었다. 청년은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뗐으나 말을 하는 것은 미루었다. 생각을 차마 꺼낼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답을 고민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건 지금 생각할 일이 아냐.”
침묵 끝에 꺼낸 답은 미완이었다. 긍정은 아니지만 부정도 아니다. 미진한 답에, 사내는 한순간 속에서 일었던 감정을 꺼트렸다. 그것은 이미 불필요한 감정이 되었으므로.
“나는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람이다. 아카바 레이지.”
청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과거였고, 그의 투쟁은 현재의 것이었다. 오늘의 싸움으로도 바쁜 그에게, 미래란 애초에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그러니 그 날이 닥칠 때까지는 싸울 수밖에 없겠지. 선택은, 그 다음의 문제다.”
“좋아.”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가 예상 외로 길어진 탓에 시간이 꽤 지나간 것이다. ‘휴식’은 지금까지 보낸 시간만으로 족하다. 이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것은 전쟁이 만든 그의 삶이었다.
“그럼, 앞으로도 힘을 빌리도록 하지, 쿠로사키.”
사내는 청년의 등에 대고 말했다. 청년은 답하는 일 없이 돌아갔다. 홀로 남은 사내는 청년이 남긴 말을 되짚어보았다. 망령이 지배하는 삶. 죽음이 유예된 삶.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지도 모를 삶을 연장할 수밖에 없는 인간.
정말이지 지독한 인간이군. 혼자만의 공간에서 사내는 중얼거렸다. 어쩐지 깊은 곳이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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