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ts슌] 죽음의 신부

2015. 8. 17. 23:59 from 02

 

  검은 베일을 드리운 신부는 혼인식을 앞두고 시중드는 이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존귀한 이의 배필이 될 운명을 타고나, 어려서부터 범속한 이들로부터 분리되어 아름다운 것만을 허락받으며 자라온 소녀였다. 그 운명에 걸맞게 신부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걸음은 가볍고 몸은 가늘었으며 행동거지는 우아하고 피부는 자기처럼 희었다. 베일 너머로 살포시 비치는 얼굴까지 여신처럼 아름답다. 지금껏 그녀가 살아온 시간은 어느 하나 헛된 날이 없었다. 그 모든 날들이 신부를 한 송이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게 했던 것이다.

  삶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맞을 때, 그녀의 화사함이 막 봉오리를 터트렸을 때, 그때야말로 신붓감이 저를 키워온 둥지에서 빠져나와 정혼자에게로 향할 때였다. 그녀의 정혼자가 십 년을 넘게 기다린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점찍은 조그마한 소녀가 성숙한 아가씨가 될 때까지, 그녀의 아름다움이 절정을 맞을 때까지 오늘로 긴 기다림은 끝을 맺는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신부를 안게 되리라.

  신부는 오래도록 기다려온 혼인식을 위해 아름답게 단장한 채였다. 곱게 화장한 얼굴에, 여신의 예복마냥 정교하고 고풍스러운 드레스와, 희고 가는 몸 곳곳에 걸친 화려한 보석. 다만 그녀가 걸친 것은, 보석의 반짝임을 제외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검은색이었다. 우아한 검은색이 유독 흰 피부와 대조되어 신부를 돋보이게 했으나, 기쁜 날엔 어울리지 않는 불길함마저 더하고 있었다. 온몸을 검은 것으로 감싼 그녀가 마치 상복을 입고 죽은 이를 애도하는 유족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 인형처럼 표정 없는 그녀의 얼굴도 그러한 음울한 인상을 남기는 것에 일조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녀의 배필을 생각하면 오히려 합당한 것. 그녀를 신부로 맞을 이는 죽음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앗아가고 세상에 절망을 드리우는 죽음. 그가 세상에 선사하는 절망의 색을 그대로 따와, 사람들은 신부에게 검은색을 씌웠다. 그것이야말로 죽음의 신부에게 가장 어울리는 색이 아니겠는가. 그녀 역시 죽음의 품에서 단숨에 사그라질 테니. 제 죽음으로써 세상에 절망을 한 겹 덧씌울 테니.

  신부라는 이름 뒤에는 숨겨진 이름이 하나 있었다. 제물. 평화를 위한 제물. 죽음에게 가장 아름답게 치장한 제물을 바침으로써 자비를 베풀게 하려는 다수의 갈망이 그녀를 죽음의 신부로 만들었다. 본디 제물이란 흠결 없이 완벽한 모습이어야 하는 법. 거기에 신부라는 미명을 앞세우기까지 한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제물이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신부 역시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영민한 소녀는 제 운명을 들었던 어린 날, 이미 자신의 종말을 알았다.

  신부로 간택된 후로 모든 것을 누리게 되겠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혼인식이 치러질 때까지. 신부로서 죽음에게 안기는 순간 제 삶은 끝나버리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아름다운 제물로 가꿔지는 것이니.

  그러나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천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순순히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소중한 이들과 이별하고 신당으로 들어섰다. 신부로서 교육받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십 년이 넘게 흘렀다. 아름다움의 절정을 맞은 소녀는 곱게 치장한 채 혼인식을 올릴 제단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다만 혼자 걷지 못하는 것은 눈이 가려져있기 때문이었다. 혼인할 이의 얼굴을 아직 보아선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신부는 그것이 죽음을 맞을 제물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했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모두의 연민을 안은 채 신부는 제단에 올랐다. 예부터 죽음을 달래기 위해 기도를 올리던 곳이라고 했다. 식을 위해 한껏 단장한 것은 신부만이 아니었다. 신부는 알 길이 없지만, 제단 역시 경사에 걸맞게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고운 천을 깐 길을 신부는 조심스레 걸어 올랐다. 제단 아래에서 기다리던 수많은 이들이 신부를 맞아주었다. 철없는 아이들은 아름다운 신부를 보며 환호했지만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기 괴로워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치장하고 축복한들, 결국 죄 없는 아이를 제물로 내몬 사실만은 사라지지 않기에.

  [모두를 위해서란다.]

  신부는 저를 돌봐주던 여인이 식을 앞두고 했던 말을 문득 떠올렸다.

  [이건 모두를 위해서야. 모두가 네게 빚지고 있단다.]

  여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으나 신부는 말없이 그녀를 지나쳤다. 혼인의 의미 같은 건 신붓감으로 간택되었을 때부터 알았으므로, 지금껏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고 저주한 적은 없었다. 신부는 처음 신당에 들어서던 순간 삶을 버렸다.

  혼인식은 지극히 화려했으나 정작 꼭 필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바로 혼인의 당사자인 신랑이었다. 구색을 맞추느라 자리는 마련해두었으나 애초에 올 수 없는 이였다. 신부는 오롯이 혼자였으나 십 년도 넘게 이 날을 위한 교육을 받아온 덕에 긴장한 기색 없이 모두가 원하는 대로 능숙하게 절차를 밟아갔다. 엄숙하고 복잡한 절차가 모두 끝나고, 마침내 부부로서의 맹세만이 남았다. 이제 죽음의 아내가 되기를 약속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사제가 엄숙하게 물었다.

  “앞으로 계속 그와 함께하길 맹세합니까?”

  신부는 건조하게 답했다.

  “맹세합니다.”

  십 년도 넘게 이어져온 기다림은 끝났다. 죽음의 신부는 죽음의 아내가 되었다.

  식이 끝난 후, 화려한 혼인식에 어울리는 잔치가 이어졌다. 모여든 이들이 배부르게 먹으며 각자의 이야기로 실컷 떠들어댈 동안 신부는 멀찍이 떨어진 조용한 곳에서 다소곳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사람들 틈에 섞여들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의무는 명목뿐인 혼인을 맹세하는 것으로 종료되었으니. 그녀의 앞에도 온갖 진미가 그득했으나 그녀에게 허락된 음식은 단 하나뿐. 여전히 눈이 가려진 그녀를 위해 시중을 드는 이가 조심스레 입으로 음식을 가져갔다.

  잘 익은 사과 하나.

  신부는 그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았지만 캐묻는 일 없이 삼켰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을 까맣게 잊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떠나 신방으로 향했다. 죽음이 기다리는 곳이라고 했다. 그녀가 자라난 신당의 가장 깊숙한 곳, 이전까지 몇 번이고 죽음을 위한 제물이 죽어갔던 방. 신부로 꾸며진 제물은 사뿐거리며 신방에 들어서 정중앙에 준비된 화려한 관에 누웠다. 그녀가 관에 들자마자 관이 잠기고, 그 전까지 신부의 시중을 들던 이들은 그녀에게 작별을 고하고 방을 나섰다.

  저 멀리서, 방이 단단히 봉쇄되는 소리가 들렸다. 떠나는 이들의 발걸음소리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제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녀가 죽음을 만날 때까지, 죽음의 품에 안겨 사그라질 때까지, 그녀와 같은 불행한 제물이 다시 뽑힐 때까지. 망자처럼 관에 누운 신부는 죽음이 제게 깃들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로 명이 다할 때까지 긴긴 시간을 살아 숨 쉬느니 차라리 단숨에 죽음의 손길에 바스러지는 것이 나았다.

  죽음의 신부를 키운 이들은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어, 그녀가 죽음의 품에 빨리 안기도록 해주었다. 불행한 운명을 바삐 끝내고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인형처럼 표정 없던 얼굴에 서서히 고통이 번진다. 독이 그녀의 몸 곳곳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식장에서 그녀에게 허락되었던 단 하나의 음식, 그 안에는 독이 담겨있었다. 운명을 재촉하는 장치. 종말을 앞당기는 자비. 그것을 직감했기에 신부는 순순히 그 선물을 삼켰던 것이다.

  독은 빠르게 신부를 침식하여 죽음이 깃들 틈을 넓힌다. 아름다운 신부는 밀려오는 죽음 앞에 가련하게 순종했다. 가쁘게 내쉬는 숨과 본래의 빛을 잃어가는 입술이, 머잖아 그녀에게 찾아들 배필에게 더없이 어울렸다. 신부의 아름다움이 절정을 맞았을 때, 쇠하는 일 없이 가장 풍요로울 때 바로 그 순간 죽음의 기다림은 끝을 맞고 혼인이 이루어지는 것. 죽음이 택한 시점은 다분히 악의적이다. 생명이 가장 맹렬하게 타오를 때 제 손길로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것이 아닌가. 생기도 체온도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도 미래에 대한 자신도 전부 제 손으로 태우고, 상대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신부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색은 차츰 짙어지고 있었다. 의식도 빠르게 희미해진다. 힘겹게 숨을 내쉬며 신부는 작별인사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을 떠올렸다. 제 운명을 결정지은 사람들을, 지금껏 자신을 아름다운 제물로 가꿔왔던 이들을, 어린 날 신당으로 들어서며 이별한 사랑하는 이들을. 아아. 종말을 직감한 신부는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전부, 안녕히.

  안녕히. 원망하고 사랑하는 이들이여.

  모두에게 작별을 고한 순간, 관이 열리고 무언가 서늘한 것이 신부의 뺨을 쓸었다. 여태껏 그녀의 눈을 가렸던 천도 거짓말처럼 벗겨졌다. 온종일 세상을 보지 못했던 금빛 눈이 깜빡였다. 신부의 눈은 그녀의 몸을 좀먹은 독 때문에 빛을 잃은 지 오래였으나, 다행히도 제 앞에 아른거리는 것을 감지할 기력만은 남아있었다. 신부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보려 필사적으로 버둥거릴 때, 바로 그 순간

  “안녕, 아이야.”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신부를 잠식하던 죽음이 사라졌다. 한순간에 고통이 녹으며 시야가 맑게 갰다. 생기를 찾은 신부의 눈앞에는 검은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

 

  “기다리고 있었어요.”

  관에서 몸을 일으킨 신부는 눈을 내리깔며 인사에 응했다. 신방에 들어온 이는 조심스레 그녀의 베일을 벗겨냈다. 아름답게 단장한 녹색의 머리카락과 또렷한 금빛 눈이, 드디어 선명하게 비쳤다.

  “놀라지 않는구나.”

  “여기는 신방이잖아요. 당신이 오시는 게 당연하죠.”

  당신이야말로, 죽음. 신부는 제 운명을 결정지은 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씁쓸하고 우아한 울림은 냉혹한 통치자에게 합당했다. 사납고 무자비한 절대자. 세상에 절망을 흩뿌리는 무시무시한 존재.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를 두려워하여 생이 끝날 때까지 그의 손길을 피해 도망치려 한다. 삶이 시작된 이상 언젠가 그의 품에 안겨야 한다는 것을 잊고서.

  “두렵지는 않나?”

  “두려울 리가요.”

  신부는 흰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걸치며 말을 이었다.

  “내 삶에서 당신이 아니 계신 적이 없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신부는 죽음의 손길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죽음이 집요하게 그녀에게 따라붙고 있었으므로. 세상을 절망으로 물들이며 모든 것을 게걸스레 삼키는 죽음은 어린 소녀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녀가 향하는 곳마다 죽음이 뒤따랐으며 그녀가 지난 자리는 어김없이 황폐해졌다. 죽음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앗아가니 검게 말라붙은 세상 속에서 오직 소녀만이 생생했다.

  그러나 소녀는 한동안 자신을 뒤따르는 검은 그림자가, 끊어낼 수 없는 불길한 것이 죽음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타고난 저주라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행을 전염시키는 지독한 저주. 사랑하는 이들은 대개 죽었다. 그렇지 않으면 시름시름 앓으며 말라가거나 연기처럼 사라졌다. 함께하던 이들은 그렇게 하루하루 줄어가기만 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죽음의 손길에 말라붙는다는 걸 알아챈 날, 소녀는 그 전부터 제게 따라붙던 것이 죽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네 삶에서 나는 어떤 존재였지?”

  죽음의 목소리는 너무도 나긋하여 무자비한 절대자라기보다는 상냥한 신사를 연상시켰다.

  “나를 규정해버린 자.”

  “규정했다?”

  “당신께선 내 모든 것을 앗아가고 나를 당신께 인도했죠. 내 삶의 방향을 당신이 규정해버린 거예요.”

  “내가 없었다면 보다 행복했겠군.”

  “글쎄요. 그건 알 수 없지만.”

  결이 고운 녹색 머리카락이 죽음의 눈앞에서 흩어졌다. 신부는 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당신께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리라 생각했어요. 약속된 종말이 아니라도.”

  “어째서지?”

  “당신께선 나를 선택하셨잖아요?”

  이번에야말로 죽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선택이라는 표현이 그는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세상엔 전쟁이란 광풍이 불었죠. 당신의 심술이었어요.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재앙처럼 뻗치는 당신의 손길을 막기 위해 당신을 달랠 제물을 준비해야만 했죠. ‘죽음의 신부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사람들은 너를 뽑았고.”

  “틀렸어요. 사람들이 뽑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를 택한 거죠.”

  죽음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은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온 낡은 관습이었다. 죽음이 세상에서 활개치며 생명이란 생명은 모조리 삼킬 때, 세상을 제 색으로 물들이며 절망을 흩뿌릴 때. 그럴 때 사람들은 죽음을 달래기 위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제물을 바치곤 했던 것이다. ,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재앙이 닥쳤을 때의 이야기였으므로, 그리 잦은 일은 아니었다. 그마저도 세상이 발전하며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빠르게 빛을 잃은 관습이었다.

  나날이 퇴색되던 그 낡은 관습이 거의 잊힐 무렵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닥쳤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재앙이었다. 죄 없는 땅을 짓밟은 침략자들은 죽음의 부취에 홀린 양 대지에 피를 뿌렸다. 수많은 이들이 죽음의 먹이가 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절망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무력하게 짓밟힐 때였다. 누군가 낡은 관습을 떠올렸다. 죽음이 세상을 잠식할 때 죽음의 횡포를 잠재웠다던 오래된 관습을.

  죽음의 제물 이야기였다.

  근거 없는 미친 말이라 하여도 믿어볼 만큼 그때의 사람들은 절박했다. 하나를 바쳐 세상을 잠식한 죽음을 걷어낼 수 있다면 누구라도 바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죽음이 불러온 지독한 불행이 그만큼 사람을 갉아먹었던 탓이다. 모두가 낡은 관습에 동의했다. 모두가 희생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은 죽음에게 신부라 이름한 제물을 바치기로 약속했다.

  살아남은 여자아이들은 전부 그 후보가 되었다. 불행을 불러오는 소녀 역시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간택장으로 향했다. 소녀가 그곳에 당도한 순간 죽음이 일었다. 그 전까지 즐겁게 노래하던 새가 소녀가 들어선 때 죽어버린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소녀에게로 내리꽂혔다. 죽음을 불러온 소녀는 죽음의 신부로 간택되었다.

  그 날로 소녀는 모든 것에 이별을 고하고 신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오래잖아 세상을 뒤덮던 재앙이 걷혔다.

  “똑똑하구나, 아이야.”

  “왜 하필 나를 택하셨죠?”

  “네가 모순 그 자체였기 때문이지. 너는 살아있음에도 나와 꼭 같은 부취를 풍겼어.”

  “당신이야말로 모순이시지요. 내게 상실과 절망을 선물하고는 풍요를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모든 것을 앗아가는 이의 신부로 자라나기에 오히려 모든 것을 누리도록 하셨지요. 혹여 당신의 심기를 거스를까 모두 두려워했으니까.”

  죽음의 눈이 신부를 해부하듯 꿰뚫었다. 창백한 손이 신부의 턱을 들어 시선을 제게로 향하게 했다. 그의 손을 타고 스미는 한기에, 신부는 차가운 숨을 토해냈다.

  “나는 네가 어떻게 자라날 수 있을지 궁금했단다.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자처럼, 나와 같은 부취를 두른 아이가.”

  “그래서 보시기에 어떠한지요?”

  “아름답구나. 심히 마음에 드는구나.”

  경탄 섞인 말에 신부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죽음은 신부를 놓아주었고, 그녀는 죽음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금빛 눈에 설핏 원망을 닮은 감정이 떠오른 것 같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풍요를 누렸음에도 너의 부취는 걷히기는커녕 더욱 짙어졌구나.”

  “당신에게 어울리는 신부가 된 것뿐이죠.”

  신부는 차게 웃었다. 빈정대는 기색이 다분한 말이었다. 실상 그녀는 죽음을 증오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나 삶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 자체가 죽음 때문에 완전히 비틀렸던 탓이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삶을 잠식하고 주변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는 삶의 방향마저 비튼 것을 어떻게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음은 명백하게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그는 집요하게 그녀에게 따라붙어, 그녀의 삶을 지배하며 평범한 이들이 평생 경험하기도 어려울 상실을 열 살도 되기 전에 전부 경험하도록 했다. 그것은 제 존재를 각인시키는 그만의 방법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녀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상실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인간을 갉아먹는 법. 그녀는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너무 깊은 절망을 경험하여 뼛속까지 절망의 색으로 물들어버렸다.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불행이, 끝없이 상실을 부르는 저주가 죽음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신부는 깨달았다. 죽음은 제가 떨쳐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기에 죽음의 연쇄는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죽음의 저주는 삶이 끝나는 때까지 지속되리라는 것을. 자신이 살아있는 한, 제 주위의 그 무엇도 그의 마수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당신은 교묘한 폭군이었지요.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앗아가면서도 나만은 남겨두었으니까. 내게 상실과 절망을 가르치면서도 결코 당신의 품에 안기진 못하게 하셨어요. 그러나 그 수많은 상실과 절망이 나를 얼마나 좀먹었던지.”

  “아이야, 그것은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란다.”

  “사랑이라고요? 그리하여 내 모든 것을 짓밟으셨나요?”

  “사랑의 방식이 언제나 아름답고 따스한 것은 아니지. 상실과 절망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이런 방식도 있는 거야. 나는 앗아가는 것밖에 하지 못해.”

  “나를 사랑하신다 하셨죠? 그렇다면 날 안으세요. 당신의 신부는 이 날만을 위해 살아온 것 아닌가요?”

  “그럴 수는 없지. 네게서까지 생명을 앗아갈 생각은 없어.”

  “아까는 나를 살리지 않으셨나요?”

  “살린 것이 아니라, 네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를 거둬갔을 뿐이지.”

  “그렇다면 거둔 것을 다시 베풀어주세요.”

  신부의 말은 달콤한 애원을 가장하고 있는 주제에 다분히 악의적이었다. 죽음은 신부의 말에 감춰진 본뜻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저를 사랑하여 놓아준 적 없는 죽음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성자도, 천하를 호령하는 왕도, 전부 당신의 신민. 그런데 기껏 한 여자를 안지 못할 리 없지요.”

  “아이야, 내가 무언가를 사랑함은 그것을 내 품에 안는 것이 아니란다. 그래선 허망하게 부서지고 말지. 나와 같은 색으로 물들여, 나와 같은 것을 느끼게 하고, 나와 같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야.”

  그래서 죽음은 그녀를 사랑함에도 그녀를 안은 적이 없었다. 안기는커녕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세상을 삼킬 재앙을 풀어놓아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물어뜯기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녀에겐 결코 손길을 뻗치지 못하게 했다. 그녀가 참담한 재앙 속에서도 지금껏 생존해온 것은 칠 할은 그의 덕이었다.

  “그렇다면 사랑은 이미 충분히 베푸셨군요. 당신은 나를 잠식하여, 당신과 같은 색을 띠게 하시고, 당신처럼 절망을 품고 이렇게 연명하게 하셨으니까.”

  신부는 관에서 나와 죽음에게로 다가섰다. 치렁치렁한 옷자락을 바닥에 끌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을 두른 신부가 검은 그림자로 나타난 죽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모든 생명을 쇠하게 만드는 존재인지라, 죽음은 훼손되기 쉬운 물건을 만지듯 조심스레 신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머리카락 몇 올이 그의 손에서 검게 바스러졌다.

  “나를 사랑하신 분, 당신의 사랑은 증오를 쌓았으니 나는 당신을 거역할 거예요. 당신이 내 모든 것을 앗아가면서도 나를 살게 하셨다면 나는 당신의 품에서 사그라질 거예요. 지금껏 당신이 폭군처럼 내 사람들에게 종말을 내렸으니 내 종말은 내가 선택해보이지요.”

  죽음은 비로소 신부가 제게 건넨 첫 마디의 뜻을 알아차렸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신부는 지금껏 그를, 그가 베풀 수 있는 종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이 사랑하여 차마 생명을 거두지 못한 신부가, 죽음을 열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니 기쁘게 안아주세요. 나의 죽음이 당신에 대한 투쟁이니까.”

  죽음은 호소하듯 신부를 바라보았으나 신부의 얼굴엔 차가운 증오 이외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결국 죽음은 신부의 소망대로, 그녀를 깊이 끌어안고 고개 숙여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가장 아름다운 신부는 그렇게 그의 품에서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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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