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슌] 뜰 안의 괴물

2019. 8. 24. 23:08 from 02

 

젊은 장교는 승리의 여신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언제나 상부에 흡족한 결과를 만드는 그는 일찍이 상당한 공적을 쌓아 시선을 끌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파격적인 지위를 얻어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한 번의 어긋남도 실패도 없이 이름을 알려온 그 사내는 이번에 자신의 저택에서 연회를 열어 그간 저를 지원해준 이들을 초대했다. 다만 연회의 주인공은 모두가 웃고 즐기는 곳에 바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회를 핑계로 불러들인 간부들과 비밀히 논의할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내가 온갖 수를 동원해 공적을 쌓고 제 가치를 높여온 것은 특별한 비밀도 아니었다. 배경이 든든해서인지 자신이 넘쳐서인지, 사내는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위로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필요한 인간은 누구든 제 편으로 만들고 방해되는 자는 거짓 소문으로라도 밀어냈다. 재물과 사람을 쓰는 것도 결코 아까워하지 않았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전부 갈아 넣고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전부 끌어온다. 오로지 위로, 위로. 사내의 시선은 언제나 정점에 향한 것 같았다.

그런 이들이야 어느 시대나 몇은 등장할 테지만, 사내만큼 단기간에 성공을 거둔 자는 찾기 힘들 것이다. 논의를 위해 저택을 찾은 간부는 안내를 받아 조용한 방으로 들어서며, 사내에게 따라붙는 이름을 떠올렸다. 화려한 이름도 여럿이었으나 사내가 달고 있는 이름 중 가장 묵직한 것은 총통의 아들이었다. 어딘가에 다른 자식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총통의 자식은 아들 하나. 핏줄 하나로, 사내는 일찍부터 기회를 얻었다. 적어도 사내가 중앙으로 들어온 것만은 아비의 후광 덕이었다.

서른이 되지 않은 나이에 저만큼의 성과를 거둔 젊은 장교에게 말이 붙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누구도 함부로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드러내는 즉시 통치자를 욕보이는 셈이 되어서였다. 말쑥한 외양과 몸에 밴 예의는 사내를 꾸며주었으나 간부의 눈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일 뿐. 총통이 아들을 마뜩찮게 여기거나 그 명예에 흠집을 낼 실수만 저지른다면 바로 퇴장하게 될 것이다.

언제쯤 저것의 밑천이 드러날까. 언제쯤이면 저 애송이를 치울 수 있을까. 조잡한 심리를 누르던 간부의 시야에 뜻밖의 형체가 잡혔다. 괴물이라고 불리는 청년이었다. 먼 이국에서 왔다던가. 이종족이라고는 하는데 정확히 어떤 종족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것이 괴물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족속이라는 것만이 확실했다. 언뜻 인간처럼 비치긴 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뜩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흰자위가 검은 눈에,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을 띤다. 언제나 몸을 강박적으로 싸매는 것도 몸에 비늘이 돋아서라는 말이 있었다.

사내는 그것을 제법 아꼈다. 웬만해선 데리고 다니며 그것을 저에게 딱 붙여놓았다. 그러면 괴물은 사내의 일정이 끝날 때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지부터 의심되는 이종족이니 사내의 일에 도움이 되길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방해도 되지 않는다. 사내가 가는 곳에서 배경이 될 뿐. 어차피 다 알아듣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괴물의 앞에서 비밀스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그런 괴물이 제 존재를 각인시킬 때가 있다면 전투에 투입될 때였다. 훈련받은 군사처럼 정교하지는 못하지만 무기로서는 도움이 되는 모양이었다. 사내가 참전한 모든 전투에 그것도 따라가, 약간의 공을 세웠다고 들은 적이 있다. 차라리 그냥 무기로만 쓰면 편리할 것을, 키우는 짐승처럼 여기저기 내놓고 다니는 것이 간부로선 우습다.

저것도 두고 논의하시게요?”

간부는 이번에도 사내의 근처에 서 있던 괴물을 가리켰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는 괴물이 저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껄끄러웠다. 생각도 행동도 읽을 수 없는 미지의 존재라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던 탓이다.

거슬리십니까?”

아끼는 것인 줄은 압니다만…….”

바깥에 대기하게 하지요.”

사내는 선뜻 받아들이고는 괴물에게 손짓했다. 괴물이 훈련된 개처럼 바짝 다가오자, 사내는 낮게 속삭인다. 나가 있어. 괴물은 더 묻는 일 없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녹색을 띤 머리카락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풀어두어도 됩니까?”

곁에 앉은 이가 사내에게 물었다. 괴물이라는 이름이나, 그에 어울리는 이질적인 면이 섬뜩했던 모양이었다. 사내는 웃으며 답했다.

여기는 자기 집이라 생각하니 괜찮겠죠.”

사람은 알아보지요?”

아마도요.”

말을 따르느냐는 다른 문제지만요. 사내는 농담처럼 덧붙였다. 정체불명의 이종족을 다루는 것은 이 나라에서 사내뿐이다. 괴물은 평소엔 사내의 그림자처럼 얌전히 있다가도 타인이 저에게 손을 대려 하면 날카롭게 반응했다. 누군가 사내에게 약간이라도 수상쩍은 행동을 한다 싶으면 소리를 내기도 했다. 인간의 말은 아니지만 경고에 가까운 신호라는 것임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사내는 그렇게 길들여진모습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맹수를 다루면서 그 모습을 과시하는 이들처럼.

괴물이 자리를 뜨자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미리 생각해둔 말을 늘어놓으며 뜻대로 상황을 끌어보려던 간부는 어느 순간부터 의심에 사로잡혔다. 처음부터 이것은 논의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 나쁜 생각. 오가는 의견 중 힘을 얻는 것은 사내의 주장뿐이었고 나머지는 적당히 동조하는 게 전부였다. 판을 쥔 사내가 정해진 결말을 공언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다들 사내의 의견에 동조할 준비가 되어있었을까. 사내는 언제부터 주변을 설득하기 시작했을까. 무엇으로 꼬드겼을까. 피어나던 의문은 마침내 가장 부정적인 것에서 멈췄다. 왜 자신만 사내의 구상에서 빠져있었는지. 무엇을 주장할 것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설득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을까. 어느 쪽이건 불쾌하다는 것은 같았다. 간부가 속으로 감정을 삼킬 때 논의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처음부터 방향이 뚜렷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야기를 주도하던 사내는 어서 끝을 내자는 듯 제 주장의 우세를 재확인했다.

의견이 모인 것 같군요.”

방향도 거의 일치하고요.”

그럼 일치하지 않는 쪽의 의견을 들어야겠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대로도 괜찮을까요?”

사내의 시선이 간부에게로 향했다. 안경 너머 보랏빛 눈이 그를 오래도록 담았다. 그에게 어서 이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하는 것만 같다. 간부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들을 것이 있겠습니까? 모두의 의견이 같은데.”

사내는 마지막 말에서 감정을 읽어냈을까? 그 말만 남기고 바쁘게 자리를 뜬 간부는 알 수 없었다. 남은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그에게 꽂히긴 했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사내는 예의로도 붙잡지 않았다.

복도를 걷다, 간부는 괴물과 마주쳤다. 연회에서 가져온 것인지, 괴물은 큼지막하게 자른 케이크를 접시에 두고서 먹어치우고 있었다. 짐승의 것처럼 날카로운 이가 케이크를 짓이기고, 느릿하게 삼키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 태평한 모습에 간부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건방진 어린놈이나, 그 어린놈을 졸졸 따라다니며 인간의 음식이나 탐내는 괴물이나. 그 주인에 그 짐승이란 생각이 머리를 달구었다.

딴에 인간의 음식을 먹는단 말이지.”

말을 걸었으나 괴물은 접시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거칠게 접시를 잡아채자 그제야 잠깐 눈길을 줄 뿐. 얼굴에 특별히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손에 쥔 포크로 테이블을 톡톡 내리치는 것이 그리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신경질적인 행동에도 간부는 물러나지 않는다. 한 번쯤은, 꺾어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저것도, 그 주인도.

네가 어떻게 불리는지 알아?”

간부는 짐짓 심술궂게 속삭인다.

아카바의 개.”

이전부터 간부들 사이에서 퍼지던 멸칭이었다. 공적을 쌓는 만큼 적도 늘어가는 사내가 괴물을 데리고 다니는 건, 저를 지킬 개를 내세우는 것이라는 비웃음에서 시작된 말. 간단한 손짓이라도 괴물은 사내의 것에만 반응한다. 누군가 사내에게 손을 대려는 것 같으면 그 섬뜩한 눈으로 노려보기까지 한다. 사내가 일부러 그렇게 키운 것인지, 아니면 이종족의 본성인지, 괴물은 주인의 곁에서 으르렁대는 개처럼 굴었다.

이종족의 힘이 얼마나 위협적인지는 알지 못한다. 적을 쓸어버리는 모습이 악귀 같다는 말을 듣기야 했지만, 미쳐 날뛰는 것에 지레 겁을 먹은 것뿐이리라. 그래봐야 아마 인간보다 조금 단단한 몸의 괴물일 뿐. 저것의 사나움은 조악한 성정일 뿐이다. 힘으로 얼마든 복종시킬 수 있다 괴상한 열기에 휩싸여 간부는 괴물에게 바짝 다가섰다. 소용돌이 같은 눈이 오롯이 그를 담았다. 섬뜩한 흰자위, 비현실적인 색채의 홍채.

그래, 물 줄은 아나?”

괴물의 눈이 번득였다.


*

 

찢어질 듯한 비명이 공간을 울렸다. 복도에서 들리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조금 전 뛰쳐나가다시피 자리를 뜬 간부와 닮았다. 사내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방을 나서 현장에 닿으니, 저택을 흔든 비명은 예상한 대로 간부의 것. 가까이 다가가니 간부의 한쪽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손등에 선명하게 남은 자국은 짐승의 이빨 자국을 연상시킨다. 사내를 발견하자마자 간부가 다치지 않은 손으로 몇 발짝 밖의 괴물을 가리키는 것이 범인을 짐작케 했다.

바닥에는 케이크 조각과 접시, 포크가 나뒹군다. 사내는 괴물을 바라보았고, 그것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멀뚱멀뚱 눈을 굴릴 뿐이었다. 들으라는 듯 신음을 내뱉던 간부는 괴물의 표정을 보자 바로 사내에게 따지고 들었다. 보면 모르겠습니까? 저 망할 놈이 물어뜯었단 말입니다. 소란을 일으킨 바람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때 사내가 모두의 앞에서 곤란해지길 바라며, 간부는 준비한 말을 꺼냈다.

교육을 어떻게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먹던 것을 빼앗기라도 하셨습니까?”

사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간부는 짜증스레 받아쳤다.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게 겨우 그런 겁니까?”

저 애, 식탐이 꽤 강해서요.”

감정 섞인 목소리를 사내는 무심하게 짓밟는다.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굽히고 나올 줄 알았는데 너무도 덤덤해 간부로서는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방해받았다고 느끼면 평소보다 사나워지죠. 제가 곁에 있었다면 진정시켰을 텐데, 유감이군요.”

아뇨. 그런 일이 아닙니다. 저 놈은 먹을 거 하나로 달려들지 않았어요. 분명히 제 말을 알아듣고 반응한.”

거기까지 말하고서 간부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때, 음습한 곳에서나 통하던 멸칭을 입에 올릴 수는 없다. 그걸 꺼내버리면 자신이 상부의 총애를 받는 젊은 장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들 눈치챌지도 모른다. 간부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 사내의 보랏빛 눈이 그를 훑었다. 어쩐지 속을 읽히는 것 같은 기분에 간부는 침을 삼켰다. 그냥 넘어가길 바랐지만 사내는 틈을 놓치지 않는다.

무어라 말씀하셨죠?”

그건…….”

저 애를 데리고 다니면 뒤에서 말을 많이 듣긴 합니다. 눈에 띄는 모습이어서 그렇겠지요. 저 애도 자기를 공격하는 말 정도는 낌새로 아는 것 같더군요.”

사내가 손짓하자 괴물은 훈련된 짐승처럼 와 섰다. 사내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시선이 따라가는 것이 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조금 전 인간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괴물이 저렇게 나온다면 사람들은 괴물의 공격을 가벼운 사고 정도로 넘길 게 뻔하다. 그러나 간부는 괴물이 저에게 달려들기 직전의 눈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은 분명 맹수의 것이었다.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힘을 조절해가며 물어뜯은 것도 포식자이기에 가능한 장난이었다.

사내는 아마 괴물의 본성을 훤히 알고 있을 것이다. 괴물도 상황을 전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뻔히 알면서,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 저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공격당하지 않도록. 영악한 괴물이었고 뻔뻔한 사내였다. 사내를 망신 줄 기회를 잡기는커녕 판을 유리하게 끌어갈 기회를 저쪽에 내준 셈이 되었다.

……거슬리더라도 조금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손을 타서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으니까요.”

마지막 말에 완전히 놀아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간부는 분함을 드러낼 수 없었다. 애꿎은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간부가 그대로 입을 다무는 바람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고, 사내는 기르던 것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겠다며 그에게 따로 무언가를 건넸다. 그때도 괴물은 사내의 뒤에 바짝 붙어, 그 이질적인 눈으로 간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 사내는 잠깐 돌아볼 것이 있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했다. 사내의 손을 탄 괴물이 슬그머니 그를 따라간 것은 물론이었다. 마침내 괴물이 미끄러져 들어간 곳은 주인의 휴식공간. 사내가 허락한 이 외엔 들어설 수 없기에, 괴물에게는 도리어 어떤 장소보다도 안전한 곳이었다.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서야 사내는 괴물에게 말을 걸었다. 형식적인 주의에, 주인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괴물이 입꼬리를 슬쩍 올린다. 곧이어 그의 입이 열렸고.

교육이라도 하려고?”

다른 사람 앞에서 낸 적 없는 목소리를 거짓말처럼 흘렸다. 낡은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목소리였다.

이번엔 대단한 일은 아니었으니 적당히 넘길 수 있었지만, 틈을 보이면 곤란해.”

지나갔으니 됐잖아. 평소에 네 뒤치다꺼리를 한 대가로 치자고.”

괴물이 흘리는 것은 명확하게 인간의 말이었다. 다만 이곳 사람들은 사내를 제외하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먼 이국의 언어였고, 망국의 유산이었으므로.

이곳에 오기 전까지 괴물이 살았던 나라는 지도상에서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짓밟히고 착취당해 폐허가 된 도시가 그의 고향. 침략당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나라였으나 그가 떠나올 때는 생명을 찾기 힘든 곳이 되어있었다. 재생을 바라기 어려운 데다 살아남은 이들도 뿔뿔이 흩어져, 사실상 지워진나라였다. 아직은 괴물 같은 생존자나 사내처럼 그곳에 관심을 둔 자가 몇몇 남아 옛 자료가 있다고는 하나 시간이 흐르면 그조차 흩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괴물의 나라는 완벽하게 사라진다. 그의 기억 속에서만 생존하는 환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괴물은 사내 앞에서 퇴색된 언어를 고집한다. 이미 반쯤은 사어가 되어버린, 제 나라의 말을. 고향에의 마지막 연결고리이니 사내는 그것까지 고치려 들지는 않는다. 수년 전 스스로 익혀 이제는 그럭저럭 알아듣게 된 이국의 언어에 맞춰줄 뿐이다.

어차피 네가 이종족이니 뭐니 헛소리를 잔뜩 늘어놓아서 내가 뭘 하든 다들 별 생각 없을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지. 너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이곳에서 용인되지 않는 것이니까. 차라리 인간 범위를 벗어난 체 하는 게 나아.”

말은 그럴듯해.”

괴물은 웃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출신을 제대로 밝히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 고향을 짓밟은 침략자는 바로 이 나라의 군대. 성전을 들먹이며 키워낸 소년병은 한 나라를 삼키고 정복자로 돌아왔다.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짓밟은 나라를 끔찍하게 격하한 끝에, 괴물의 고향을 모두가 청소되어야 할 국가로 여기고 있었다. 이곳에 끌려온 동지들이 참혹하게 처형된 것을 괴물은 안다.

어차피 인간 이하로 취급당하며 매일 생존을 걱정해야 한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수년 전 침략자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 그가, 적국에 숨어든 청년이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청년은 제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의문스런 약물을 주입하고 끔찍한 수술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때의 청년에겐 자신을 무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적의 숨통을 끊지 않으면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청년은 병기가 되었다. 불법 신체 개조로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얻게 된 대신 인간의 삶을 잃었다. 사내는 청년을 거두면서 그에게 괴물처럼 행동하기를 요구했다. 그쪽이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훨씬 빠를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아무래도 좋아. 네가 나를 돕기만 한다면.]

청년은 동요 없이 받아들였다. 거울 속의 모습은 이미 괴물에 가까웠으며, 인간의 질서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내 목표는 아카데미아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 그리고 내 뜻대로 아카데미아를 움직여 그간의 죄를 바로잡는다. 내 곁에 있으면 너도 필요한 것을 얻게 되겠지. 엑시즈 침략을 주도한 이들을 없애는 것이라거나.]

사내는 자신이 선택한 괴물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네 동생을 아카데미아에서 꺼내는 것도, 가능할지도.]

[그걸 못 이룬다면 너부터 죽여야지. 아카바 레오의 아들.]

전쟁을 일으켜 청년의 고향을 짓밟은 총통은 혼란 속에서 청년의 누이를 납치하도록 지시했다. 청년이 적의 아들인 사내에게 일부러 접근했던 이유는 동생을 구할 단서를 얻기 위해서였다. 사내에게 별달리 좋은 감정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면 그 목을 물어버릴 것까지 생각하는 것이 청년이었다. 상대에게서 필요한 것만 얻어내려는 생각은 피차 마찬가지인지 사내의 반응도 미지근했다.

[아카바 레오에 대한 복수로? 그 남자는 나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유감이군.]

물론 나는 네 뜻을 이뤄줄 거야. 어떻게든. 기묘한 말을 건넨 사내는 손을 내밀었다. 그 흰 손을 물어뜯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청년은, 아니, 괴물은 건성으로 악수했다. 그것이 둘의 첫 합의였다.

결국 두 사람의 뜻대로 되었다. 사내는 처음에는 아비의 이름을 빌려 중앙에 들어갔고 그 후로는 갖은 수를 써서 위로, 위로 올라갔다. 힘으로 적을 누르고 거래로 제 편을 만들어, 그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촘촘한 권력을 얻어냈다. 단기간에 지위를 굳힌 그를 못마땅해 하는 이도 여럿이었으나 어차피 그를 막을 만큼 위협적인 자는 없었다. 위협이 된다면, 괴물을 풀면 그만이다. 인간의 도덕에 매이지 않는 괴물은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렇게 먹잇감을 던져주는 것이야말로 정복자를 증오하는 괴물이 바라는 일일지도 모른다. 복수의 기회를 얻게 되므로.

괴물의 사냥으로 사내가 권력을 더욱 굳힌다면, 사내가 꿈꾸는 정의에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러나 복수와 정의가 진정 맞닿을 수 있는 것인가. 복수로 쌓은 것을 정의로 인정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해서는 사내도 명확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무슨 말을 듣고 달려들었지?”

아카바의 개라는 말 어떻게 생각해?”

그런 점에서 괴물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목적에 깊이 파고들다 보면 때로 사욕과 정의의 경계가 흐려진다. 괴물이 행하는 일이 사냥개로서의 사냥에 가까운지 정복자에 저항하는 것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양쪽이 혼재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전자가 후자를 덮어가고 있을지도.

바깥에서 괴물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사내는 대강 알고 있었다. 손을 탄 짐승으로 비치게 한 것은 그가 의도한 일이었으나, 괴물에겐 어떨까. 필요에 의해서라지만 적의 아들에게 사육당하는 취급을 받으면서, 사내가 저를 단지 이용할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런 일에는 신뢰가 중요하다. 괴물이 사내의 뜻을 믿고 따라주지 않으면 모든 것이 꼬여버릴 수 있었다. 사내는 조심스레 반응했다.

그 양반이 그렇게 부르던가?”

그래. 어딘가에선 그렇게 퍼진 모양이야.”

글쎄, 이건 내게 물을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어때, 쿠로사키?”

싫나? 사내의 물음에 괴물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감정을 눌러 참는 기색은 없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덧붙이는 말도 여느 때처럼 건조했다.

그럼 왜?”

그런 타입은 겁을 주지 않으면 자꾸 신경을 긁거든.”

나에게 불만이 큰 자라 너를 건드렸을 거다. 어차피 곧 보지 않게 될 사람이지만.”

없애야 해?”

아니. 그럴 것도 없어. 야심에 비해 능력이 모자란 타입이라, 가만히 두면 알아서 추락하지. 상부가 원하는 방향과 반대로 가고 있어서 밀려날 거야. 그때까지 적당히 예의를 차릴 생각이고.”

너는 위협적이지 않은 인간에겐 친절하지.”

괴물이 빈정댔다. 사내는 입가에 웃음을 걸치며 물었다.

위협적인 인간에게는?”

교묘하고, 혹독해.”

잘하고 있군.”

과연 아카바의 인간이야.”

승리할 길을 찾을 뿐이다. 네가 바라는 아카바 레이지는, 그런 인간 아닌가?”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에는 언젠가 사내가 목표를 이룬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들이 그리는 것을 단순히 성공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는 없다. 사내와 괴물은 같은 싸움에 뛰어든 것이다. 정복자를 침몰시키고 그간의 불합리를 끊어내는 전투에. 괴물이 사내의 짐승을 가장하는 것처럼, 사내가 상부의 충실한 수하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전략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피가 튀지 않으나, 실제로는 모든 것이 뒤집히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괴물은 흰자위가 검은 눈에 한동안 사내를 담았다. 그 비현실적인 눈을 볼 때면 사내는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비가 쌓은 죄, 평범하게 살던 청년을 무기로 만든 불행. 사람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는 데 무리가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 괴물의 감각은 과하게 발달하거나 거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두 사람이 얽힌 전투가 끝나더라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주변인이 죽어나가고 동생이 납치당하는 과정에 불신과 냉소가 쌓여 황폐해진 것도 어쩌면 오랜 후유증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괴물이 사내를 물지 않는 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패가 지금으로서는 사내이기 때문. 괴물을 쥐고 있으려면, 사내가 승리해 그의 비극을 끊어주려면 어떤 틈도 보여서는 안 된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내는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나는 네가 바라는 승자가 될 거고, 네게 필요한 승리를 줄 거다. 너를 사용하는 대가는 그래야 하겠지.”

그럼 얼마든지 목줄을 줄 수 있지만.”

괴물은 사내에게 바짝 붙으면서 덧붙였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로, 낮고 조용하게.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아카바 레이지를 믿는 게 아냐. 지금 네가 주장하는 걸 믿는 거다.”

그것으로 충분해.”

그러자 괴물이 낄낄댔다.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듯. 사내는 그 얼굴에 비치는 것이 만족일 거라고 자신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비웃음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내가 안도한 때 괴물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로 사내에게 등을 보였다. 사내는 그 등이 멀어지기 전에 말로 묶었다.

어디 가려고?”

케이크나 더 먹으려고. 그쪽도 줄까?”

괴물이 먹던 것이라면 분명 혀가 마비되도록 단 것이리라. 그는 버거울 정도로 강한 맛이 아니면 거의 느끼지 못하므로. 사내는 가볍게 받아쳤다.

네 미각은 못 믿겠으니 사양하지.”

그럼 연회에 얼굴이나 보여. 그쪽이 없으면 내게 시선이 쏠리니까.”

좋아.”

사내는 순순히 일어나 먼저 방을 나섰다. 이내 저에게 따라붙는 발걸음과 기척을 그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괴물은 익숙하게 그의 그림자가 되었고, 사내는 아직 그것의 목줄을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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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