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슌ts] 쓸모없는 것

2019. 6. 29. 22:05 from 02

 

사내의 손이 여자의 날개를 어루만졌다. 손길은 조심스럽지만 구석까지 훑는 시선은 탐욕스럽다. 여자가 쓸모없는 조직이라고 말하는 날개를 사내는 언제나 사랑했다. 조직 전체를 감싼 검은 깃털은 물론, 뒤틀린 형태에, 초라한 크기까지도. 잔뜩 일그러진 날개는 평생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다. 여자의 등에 뿌리내린 채, 그녀가 묻힐 때까지 한 번도 펼쳐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필 그런 것에 사내는 집착하고 있었다. 볼품없는 날개를 예술품처럼 감상하며 찬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조잡한 취향이네. 여자는 사내의 시선에 깃든 욕망을 감지할 때면 나른하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기에 사내도 슬며시 웃는다. 망가지고 뒤틀린 것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지 않는다.

사내는 어릴 적 이종족을 다룬 책에서 천사처럼 그려진 종족을 본 기억이 있다. 인간을 닮은 외형에 거의 제 몸을 감쌀 정도로 큰 날개가 인상적이었다. 엑시즈. 삽화 아래 적힌 이름은 오래도록 그의 머리에 새겨졌다. 이제는 거의 멸족한, 그녀의 종족이었다. 종족의 가장 큰 특징이 아름다운 날개였으므로, 그녀가 평범한 운명을 타고났다면 날지도 못할 날개를 안고 살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삶을 지배한 불행이 종족의 유산마저 망가뜨린 것 같다.

너무 많은 불행을 거친 여자에게는 일그러진 날개 따위 불행의 축에도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종족의 생존자가 몇 되지 않는 지금은 외투로 간단히 숨길 수 있는 날개가 그녀의 삶을 연장시키고 있을 수도 있다. 동족은 눈에 띄는 날개 때문에 쉽게 붙잡힌다고 한다. 그녀가 종족 내에서 겉돌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제 와선 생존에 유리한 특성이 된 셈이다. 삶이란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최근에는 엑시즈의 날개가 제법 거래된대.”

감상에 젖은 사내를 깨운 것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동족의 불운을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린다. 이종족 탄압 정책으로 그녀의 종족은 학살당했다. 살아남은 이들도 사냥이란 이름으로 포착되는 족족 살해당하는 것으로 안다. 그녀의 종족을 거의 멸족까지 몰아간 정책은, 사내의 아비가 내세운 것. 이종족이 쌓은 것을 빼앗고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겠다는 속셈이 선량하게 살아가던 종족을 고사시켰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 먼 타지인 이곳에까지 온 것도, 사내의 사람이 된 것도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고향은 폐허가 되고 미래는 가로막혔다. 세상에 섞여들려고 해도 상부에서 악의적으로 퍼트린 소문으로 종족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된 지 오래. 출신을 숨기고 틀어박혔다가 눈에 띄면 붙잡혀 죽는 것이 종족의 운명이었다. 사방이 적인 여자가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종족에 호의적인 사내가 전부. 사내의 그늘에서 지내기에 여자는 지금껏 안전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평온 속에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바깥에선 여전히 음울한 소식이 흘러들어온다. 사내가 사냥을 막으려 애쓰는 중에도 그녀의 동족은 계속 죽어가고 있다.

엑시즈의 목숨은 싼데 날개는 예술품처럼 팔려.”

우습지 않아? 여자의 목소리엔 동요가 없었지만 사내는 그 얼굴에 무엇이 걸려있을지 생각하기 두려웠다. 아비에 맞서는 입장이기에 사내는 그녀 같은 생존자 앞에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복잡한 감정으로 날개에서 손을 떼자 여자가 불쑥 돌아보았다. 단정한 얼굴에 걸린 것은 기묘한 웃음.

그러니까, 갖고 싶으면 하나 구해봐. 값을 잘 쳐주면 괜찮은 것을 하나 건질 수 있을지도 몰라.”

너도 참 무서운 말을 하는군. 내가 왜 너를 데려왔는지 알면서.”

하도 관심을 보여서 하는 말이야.”

굳이 따지자면 나는 네 날개에 관심이 있다만.”

그래? 그럼 잘라줄까?”

속 모를 말을 꺼내며 여자가 깔깔댔다.

나에겐 평생 필요 없을 테니까.”

은근한 말에서 속마음을 읽기란 어렵다. 조악한 날개에 대한 체념인지 사내의 얄팍한 집착을 비웃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진심으로 꺼낸 말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사내는 한순간 여자의 앙상한 등에서 오래도록 그녀를 괴롭혀왔을 것을 떼어내는 상상을 한다. 인간이 만든 모조품보다도 조잡한 날개. 그것만 잘라내면 모두 그녀를 인간으로 인식할 것이다. 적응력이 좋은 그녀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섞여든다면 조용히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종족의 특성을 버리려고?”

거창한 해석이네.”

쓸모없다고 말하면서도 지금까지 날개를 달고 살아온 건, 엑시즈로서의 정체성 때문 아닌가?”

그럼에도 사내는 여자가 그 뒤틀린 유산에 의미를 두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여자의 날개가 조잡한 것이나마 종족의 흔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루하루 동족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동족과의 연결고리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가치를 가진다 사내의 해석을 비웃듯 여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 소속감도 제대로 없다고. 어차피 쓸모없는 날개인데 그쪽에겐 장식품 정도라도 된다면 나쁠 건 없지.”

너에게서 그것까지 빼앗아갈 생각은 없어, 쿠로사키.”

이상한 데서 순진하다니까.”

그러는 너는 섬뜩한 농담을 하고.”

진심이 아예 없진 않은데.”

여자가 저를 똑바로 응시하자 사내는 숨을 삼켰다. 그녀의 금빛 눈은 묘하게 현실감이 없어서, 들여다볼수록 홀려버릴 것만 같다.

쿠로사키, 나는 네가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사는 걸 바라지 않아. 네게 남은 것을 버리지 않아도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그래, 꿈은 크게 갖는 게 좋아.”

건성으로 답한 여자는 그대로 사내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사내가 진심으로 나올 때마다 그런 식이었다. 표정을 감추고 말을 돌려 제 마음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속마음을 캐물을 수는 없다. 그녀의 모호한 태도를 희망적으로 해석하며 적당히 어울려줄 수밖에.

나를 한 번 구해보라고.”

답을 하기도 전에 여자의 혀가 말을 막았다. 머리가 마비될 것 같은 열기에 젖어, 사내는 여자와 맞물렸다.

 

*

 

이종족의 특성을 숨길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사내는 탄압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해, 이종족을 최대한 인간에 가깝게 보이게 하는 기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종족 특성을 가리는 리미터는 실제로 어느 정도의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외적인 특성을 가리는 것만으로, 이종족을 혐오하는 자들에게 포착당할 위협을 낮출 수 있었으므로. 다만 아직까지는 한계도 뚜렷했다. ‘위장의 지속시간은 짧았고, 이종족의 출입을 아예 금하는 지역에서는 여러 탐지도구를 동원해 이종족을 잡아냈기에 리미터만으로 안전할 수 없었다.

그렇다 해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 연구를 지속하면 완전한 안전장치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내는 한계에 실망하기보다 작은 성공에 희망을 걸었다. 자신이 거둔 이종족 여자에게도 리미터를 건네준 것은 물론이었으나 그녀는 처음부터 큰 관심이 없었다. 이런 건 아카데미아 앞에선 의미 없는 것 알지? 받아든 때 처음으로 한 말이 그것이었다. 보름쯤 지나 리미터에 대해 물었더니 잃어버렸다며 사과할 뿐이었다.

[새로 만들어줘?]

[그렇게 수고할 필요 없어. 레오 코퍼레이션 내에서는 안전하니, 얌전히 지내야지.]

여기는 썩 괜찮은 새장이거든. 여자가 덧붙인 말은 그녀의 처지와 맞물려 처량했다. 얼마든지 저를 공격할 수 있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앗아간 자의 아들에 기대 겨우 생존하고 있다. 바깥으로 발을 떼는 것조차 안전하지 않다. 세상에 뿌리내린 혐오가 걷히지 않는 한, 사내의 곁에 있는 것이 그나마 가장 평화로울 것이다.

[리미터보다 확실한 방법이야 있지만 실행하긴 힘들 거고.]

[확실한 방법?]

그때 그녀가 어떻게 답했더라. 사내는 기억을 더듬는다. 언제나 그렇듯 냉소인지 체념인지 모를 말이었던 것 같은데. 여자를 눈에 담으며 한참 생각에 빠져있었더니 시선을 느낀 여자가 장난스레 물어왔다.

아직도 관심이 있어?”

갖고 싶다면 잘라줄까? 목적어가 잘려있었지만 여자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야 뻔했다. 제 볼품없는 날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물음이었다. 여자는 이전 한 번 말을 꺼낸 후로, 그런 식으로 사내를 떠보는 것에 재미가 들린 것 같았다. 사내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진심이었다면 벌써 떼어냈겠지.”

네가 그래달라고만 하면 자를 수 있다니까.”

나를 놀리는 게 재미있는 모양이야.”

아카바 레이지가 잠깐이나마 당황하는 걸 보는 게 즐거워. 정말 진귀한 표정이거든.”

너에게 날개는 어떤 의미가 있지?”

기습적인 질문에 이번에는 여자의 눈이 둥그레졌다.

의미라고 해도…….”

종족의 특성이란 것에 특별히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어디에 의미를 두는 거냐고 묻는 거다.”

여자와 말을 섞는 사이 사내는 떠올려냈다. 이전, 자신의 질문에 돌려받은 그녀의 답변을. 확실한 방법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여자는 적이 탐지할 수 있는 모든 특성을 없애는 것이라고 답했다. 숨기는 게 아니라, 아예 지우는 거야. 인간의 몸에 최대한 맞추는 거지. 여자는 평온한 목소리로,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만큼 잃는 것도 많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날개를 남겨둔다는 건 운이 나쁘면 적에게 포착될 수 있음을 뜻하지. 네 날개가 보통의 것은 아니라 해도 엑시즈의 특성인 건 분명하니까. 숨기고 다니는 것만으로 안전할 수 없다는 것쯤 네가 더 잘 알 텐데.”

무슨 답을 듣고 싶어.”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 쓸모없는날개를 적당히 숨기며 살아온 이유.”

침묵이 흘렀다. 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사내는 여자를 살폈다. 도통 감정을 읽기 힘들었던 얼굴에 여러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의 질문이 그녀가 내내 숨기고 싶었던 것을 찌르고 만 것 같다.

미련이야.”

한참이나 지나 돌아온 것은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평소 같은 장난스러움도 의미심장한 말도 없었다. 어쩌면 사내 앞에서 처음으로 드러낸 진심일지도 모른다.

무엇에 대한?”

……하지만 그런 건 불필요해. 생존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잘라버리는 게 낫지.”

무엇에 대한 미련이지?”

너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

여자는 분명히 선을 긋고 있었다. 그 이상 물어도 말을 빙빙 돌릴 것만 같았다.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거니와 드물게 감상적인 여자가 처연해 보여 사내는 고개만 끄덕였다. 사내 때문에 기묘해진 분위기가 회복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여자는 곧 평소의 속 모를 태도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체, 제 마음을 한 번도 들킨 적 없었던 듯.

일그러진 날개는 그 후로도 한동안 여자의 등에 뿌리내려 있었다. 사내는 여전히 그 조잡한 것을 사랑했고, 여자 앞에서 탐욕을 숨기지 않았으며, 여자는 그런 사내를 전처럼 가볍게 놀렸다. 네 미의식은 정말 끔찍해. 예술품 시장에서도 졸작만 고르겠지. 그렇게 깔깔대다 결정타로 날리는 말도 이전과 같았다. 사내가 헤집은 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처럼. 취향이 바뀌지 않는다면, 언젠가 잘라줄까?

달라진 게 없다면 사내도 안심이었다. 그녀의 심리를 헤아릴 필요 없이, 보이는 것만 받아들이고 적당히 해석하면 그만이었다. 처음부터 깊은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껄끄러운 일을 계속 의식할 이유도 없다. 여자가 두르던 모호한 말과 장난스러운 모습이 얼마나 편리한 것이었는지 사내는 빠르게 깨달았다.

그렇게 그들이 유지하던 평화가 깨진 것은, 사내의 계획이 한창 잘 풀리고 있을 때였다. 수년 전, 그는 아비가 세상에 뿌린 여러 해악을 없애고 죄 없는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정예병을 결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자를 거두기 전부터 구상해온 계획은 점점 구체화되어 그 즈음에는 거의 실현을 앞두고 있었다. 한때 학살자에 맞섰던 여자가 전사 선별을 돕고, 스스로 정예병의 일원이 되겠노라 약속한 것도 큰 힘이 되었다.

사내의 전사가 되어 학살자를 막고 동족을 구한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여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투쟁이었다. 오랜 불행에 지쳤던 그녀는 사내가 이야기하는 미래에 조금씩 희망을 품는 것 같았다. 방패처럼 두르던 냉소를 내려놓고 다시 싸우려 무장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비극은 그렇게 쉽게 걷히지 않았다. 빛이 보일 때면 더한 어둠을 드리우는 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여자가 전사 선별을 목적으로 한 대회에 참가한 때, 사건이 터졌다. 여자가 대회 첫 승을 거둔 날 밤, 사내는 수하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그동안 이 도시에서 발견된 적 없던 엑시즈가 포착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감시카메라 영상에 잡힌 이종족은 여자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으며, 날개를 드러내지 않아 언뜻 평범한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눈에 띄는 특성을 어떻게 숨겼는가 하는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소년의 왼쪽 손목에 눈에 익은 것이 채워져 있었다. 사내가 개발한 리미터.

리미터를 지급받은 자들은 사내가 따로 관리하는 소수의 이종족뿐이다. 엉뚱한 곳에 흘러갔다면 출처는 뻔하다. 사내의 시선은 먼저 관제실에 도착해 영상을 살피던 여자에게로 향했다. 긴장한 얼굴이, 꽉 쥔 주먹이, 떨리는 입술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리미터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아마도 저와 함께 이 도시로 숨어들어왔을 소년에게 몰래 넘겨준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 누구에게도 포착되지 않고 안전하게 지내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여자는 소년을 지켜줄 수 없었다. 초기 단계에 불과한 리미터로는 완전한 위장 같은 것은 애초에 무리였으므로. 낯선 이의 공격이 날아들자 소년은 체념한 듯 리미터를 풀었다. 커다란 날개가 화면에 담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소년은 날고 있었다. 여자에게는 평생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 그에겐 너무도 쉬웠다. 소년은 빠르게 비행하는 것으로 묵직한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다만 피하기만 할 생각은 아니었던 듯 그 역시 무기를 빼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어에 치중하기는 하나 기회만 생기면 적에게 일격을 날릴 모양이었다.

도망쳐, 유토. 여자의 간절한 말을 들을 수 없는 소년은 적의 주변을 뱅뱅 돌면서 빈틈을 노렸다. 이대로 도망치면 돼. 싸우지 않아도 되니까. 화면으로 비치는 소년은 그렇게 밀리지도 않는데, 안쓰러울 정도로 여자는 순간순간을 두려워했다. 마침내 확실한 기회를 잡은 소년이 적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그 전까지 소년을 할퀴지 못한 공격이 처음으로 그를 꿰뚫었다. 급소는 아니었으나 타격을 주기는 충분한 부위였다. 날개가 찢기며 소년은 곤두박질쳤다.

천사의 추락 같았다.

사내는 관제실을 뛰쳐나가려던 여자를 안았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고 자신을 힘껏 때려도 놓아주지 않았다. 울음 같은 비명 사이로 여자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잘라줘. 제발 잘라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내는 슬플 정도로 잘 알았다. 한참이나 지나 기진맥진한 여자를 놓아주었을 때,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날개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잘라줘.”

 

*

 

여자의 등에는 흉터가 남았다. 옷으로 철저히 가려지는 부위에 무엇이 자리하는지, 그녀와 사내 이외에는 알지 못할 것이다. 원래 그 자리에 무엇이 뿌리내렸는지도. 조악한 날개는 쉽게 잘렸다. 그녀가 괴로워했던 시간이 허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여자는 잘라낸 날개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으나 사내는 피가 엉긴 것을 슬그머니 가져왔다. 뜯어내고 보니 정말로 고약한 것이었다. 지독하게 일그러진 형태에 만들어지다 만 듯 볼품없이 작았다.

소년의 사건 이후 여자는 고백했다. 이미 수년 전부터 날개가 말썽이었다고. 기형의 조직이 자꾸 통증을 안겨, 어차피 언젠가는 잘라야 할 것이었다고. 그런 것을, 고작 미련으로 억지로 안고 살아온 것이다. 무엇에 대한 미련이었는지는 답을 듣지 않아도 뻔했다. 사내는 사람을 보내 소년의 흔적을 수습해오게 했으나 여자에게는 내놓지 않았다. 뜯겨나간 날개와 피에 젖은 무기 같은 것은 그대로 묻어버리는 것이 나았다.

소년이 추락한 날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다. 여자의 미련도, 때문에 차마 떼어내지 못했던 날개도, 그 조잡한 것에 대한 사내의 괴상한 집착도. 잘라낸 날개는 기괴할 뿐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다. 이전에 사랑했던 것이 환상이었던 듯. 아마 그가 정말 사랑했던 것은 그녀의 등에 뿌리내렸던 모습이었으리라. 이제 와서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여자가 소년에게 품었던 마음처럼, 끝내 그녀를 고통에 빠트린 미련처럼.

다행히 여자는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했다. 소년의 일을 그대로 삼키고서, 사내가 뽑은 전사들 틈에 자연스레 섞여들었다. 사내가 새로 만들어준 리미터도 별 말 없이 착용하고 다녔다. 날개를 잘라내면서 미련까지 함께 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니 그녀의 등에 남은 흉터도 희미해져, 그녀가 무의미한 감정에 사로잡힌 때가 있었다는 것조차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사내는 쓸모없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했다. 여자와 함께하는 사이 그녀의 미련에 전염이라도 된 것인지. 여자가 한 번도 애정하지 않았던,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기만 했던 날개는 버려지지 않고 사내만 아는 곳에 들어갔다. 꺼내볼 일은 영영 없겠지만 그에 얽힌 감정은 끝까지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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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