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슌] 잿빛 낙원

2019. 9. 30. 23:28 from 02

 

창문마다 커튼이 드리워진 집은 어둑했다. 희미한 램프의 불빛이, 방 두 개짜리 집에 들어오는 빛의 전부. 모든 게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청년은 집에 환한 빛을 들이는 일이 없다. 그가 집에서 하는 일이란 함께 지내는 소년을 돌보는 것뿐이고, 소년은 어둠 속에서야 안정을 느끼기에.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청년은 이미 익숙해진 어둠에 들어서, 친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울퉁불퉁 기괴한 형체의 그림자가 거실 바닥에 크게 드리워져 있었다.

돌아왔어, 유토.”

인사를 건네자 웅크리고 있던 소년이 몸을 일으켜 청년을 바로 보았다. 매일 함께 지내는 청년이 아니었다면 누구든 그를 보고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비늘이 소년의 몸 군데군데를 덮고, 등에는 커다란 날개가 달려있었다. 맹수처럼 날카로운 이도 숨기기 어렵다. 기생생물에 감염되어 몸을 빼앗기기라도 한 듯, 그는 인간의 모습에서 너무 멀어져 있었다.

단 하나, 눈동자만이 인간의 것이었다. 청년은 소년의 회색 눈에 자신이 가득 담기는 것을 본다. 청년의 삶에 이제 소년만 남아있다면, 소년의 삶에서도 남은 것은 청년뿐이다. 언젠가는 소년에게도 행복한 삶이 있었으나 변이가 시작되면서 그의 모든 것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하루하루 인간의 외형을 잃으며 그는 세상에 나설 수 없게 되었다. 친구인 청년의 집에 틀어박힌 사이에, 소중한 사람도 그에게 웃어주었던 이웃도 세상을 떴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의 도시에 드리워졌기 때문이었다.

재앙. 소년은 세상에 퍼진 죽음을 그렇게 불렀다. 그 단어를 입에 올릴 때면 소년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곤 했다. 나에게서 시작된 재앙이야. 자조 섞인 말을 청년이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소년의 변이로 세상이 너무도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원인불명의 병을 처음으로 앓은 것은 소년이었다.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긴 했으나 그 대가였는지 소년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진행된 변이는 결국 소년을 괴물로 만들고 말았다.

그 이후의 발병자들은 더욱 운이 나빴다. 병에 걸리면 고열과 환각에 시달리다가 빠르게 죽어갔다. 소년에게서 처음 시작된 병은 소년과 가까운 곳부터 번져나가 사람을 삼키고 또 삼켰다. 처음에는 청년에게 상황을 듣고 전염된 이들을 걱정하던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 소식 듣는 것을 거부했다. 어차피 죽음뿐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저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너도 언젠가는 죽겠지.]

어느 날 소년은 젖은 눈으로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일하게 제 곁에 남은 이, 주변인 중 드물게 병에 걸리지 않은 청년에게.

[그러니까 나를 묻어버리면 안 돼?]

오랜 친구의 애원에도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친구를 버린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으므로. 그 후로도 소년은 간간이 자신을 처리해달라고 매달렸으나 청년은 그 슬픈 소원을 들어주는 척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야말로 소년을 괴롭게 만드는 것임을 짐작하면서도.

그러나 소년을 없애버린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죽음의 병은 이미 소년을 거쳐 세상에 녹아든 것을. 바로잡고 싶었다면 누구도 병의 위험성을 몰랐을 때 소년을 격리했어야 했다. 혹은 바깥의 군대가 감염자를 죽이겠다고 들이닥치지 않았어야 했다. 그것도 할 수 없었다면 치료제를 만들 기회가 있었을 때 일을 망치지 않았어야 했다. 세상이 놓쳐버린 많은 기회는, 소년을 죽인다고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도 별로 달라진 건 없고.”

바깥에 통신하는 건 잘 돼?”

평소라면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구석으로 몸을 숨길 소년이, 드물게 입을 뗐다. 낡은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목소리로. 고향에서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인지한 때부터 청년은 도시 바깥에 지속적으로 연락을 시도하고 있다. 닿는 곳도 있었고 닿지 않는 곳도 있었으나 소년은 거기에 약간의 기대를 걸고 있는 듯했다. 나라가 4개의 구역으로 분리된 후 각 구역이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살아왔기에, ‘다른 곳에는 불행을 멈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상황은 소년이 막연히 상상하는 것만큼 풀려나가진 않지만,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소년이 관심을 보인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청년은 소년이 기다리던 답을 돌려주었다.

이번엔 시티의 톱스 쪽과 잠깐 연결되었는데 곧 끊어졌어. 그 후론 쭉 차단되고 있고.”

얽히기 싫다는 건가.”

감염자가 나타날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여기 엑시즈 이야기는 아카데미아를 통해 전해진 모양이더군.”

감염자가 생기면 아카데미아가 청소를 내세우며 들이닥칠 걸 알겠지.”

아카데미아는 자기들만을 남기는 게 목적이야. 톱스 쪽은 자기들이 잘 사는 게 목적이고. 병든 엑시즈와 함께 가겠다고 하는 건 스탠더드뿐.”

스탠더드의 그 남자는 믿을만해?”

아카데미아 수장의 아들이라던. 소년이 덧붙였다.

몰라. 만나본 적도 없고. 그래도 이쪽을 지원하기로 약속하고 정보를 준다는 게 어디야.”

정보?”

루리가 남긴 자료, 사본을 그쪽에 넘겼어. 거기서도 네 병과 감염자를 연구하고 있다기에. 자체연구 자료와 루리 것을 해석한 결과를 보내준다는 말을 들었고.”

거기는 연구원이 많대. 청년은 이야기를 들려주듯 느릿하게 말을 붙여갔다. 연구소도 있고, 자본도 상당하고. 이전까지 없었던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던데.

나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해?”

루리는 분명히 단서를 남겨두었을 거야. 너를 이전처럼 되돌릴 순 없다고 해도 하트랜드에 병이 더 번지지 않게 할 수만 있어도.”

미완이잖아.”

씁쓰레한 말에 청년의 시선은 소년을 지나, 그가 행복했던 때의 사진을 전시하던 테이블에 닿았다. 올려둔 액자마다 사진 속에서 소년 또래의 소녀가 웃고 있다. 청년의 동생이자 소년이 마음에 품었던 사람인 소녀는 세상에 없다. 청년의 삶에서 가장 괴로운 기억은 동생을 제 손으로 묻던 때. 그 날 청년은 세상을 저주하며 동생의 소지품도 땅속에 던져넣었다. 차마 처리하지 못한 물품은 동생이 소년을 고쳐보겠다고 홀로 연구하던 자료였다.

이제는 더 채울 수도 없는 것.

해석하지도 못할 자료를 끌어안고 살아온 이유는 미련이었다. 동생의 노력을, 믿음을 한순간에 없었던 일로 덮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청년이 동생의 유산에 매달리는 것을 알 텐데도 좌절이 너무 깊은 것인지 소년은 그에 크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청년의 마음을 끊어내려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때 소년의 말이 결국 어디로 향하는지 청년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바깥과 계속 교류할 수 있다면, 잘하면 네가 여기서 나갈 기회도 있을지도 몰라. 슌은 행복해지고 싶지?”

짐작대로, 달래듯 꺼내는 말은 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청년에게 향한 것이었다. 소년은 자주 이런 식이다. 저를 버리고 도망치면 낙원이 있을 것처럼 이야기한다. 죄악감과 절망 속에서 홀로 침몰하길 바라는 모양이지만 청년은 그를 방치할 수 없다. 소년은 그의 마지막 책임이었다.

나한테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아.”

끔찍하게도. 청년은 물기 없는 목소리로 덧붙이고, 웃었다.

 

*

 

동생은 소년의 변이가 시작된 때부터 원인불명의 병을 연구했다. 이전까지 없었던 병이니 어떤 자료도 없는데도, 처음부터 하나씩 쌓아가면 된다며 의욕을 보였다. 의학적인 지식도 전문가의 시각도 기대할 수 없는 청년이 도울 길이라고는 연구에 필요한 재료를 어떻게든 구해오는 것뿐. 동생이 바라보는 세계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청년은 언제나 동생의 가설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앞으로도 유토와 함께할 수 있어. 동생이 주문처럼 외는 말도 신앙처럼 받아들였다. 동생이라면,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가 행복하던 때부터 소년과 청년이 공유해온 믿음이었다.

하루하루 나빠지는 상황에서 희망을 지속하기란 어렵다. 몇 번의 실패를 거쳐오면서 동생이 무엇을 느꼈는지, 청년은 짐작할 수 없다. 그럼에도 동생은 당장 빛이 보이지 않는 연구를 그만두려는 기색이 없었다. 행복했던 시절을 되돌리고 싶다는 열망이 씁쓸한 실패마저 삼킬 수 있게 했는지.

[,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

어느 날 재료를 구해온 청년에게, 동생은 드물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엔 스스로를 설득하듯 조용히 이야기하던 희망이 드디어 선명해진 모양이었다.

[어쩌면 병 자체를 멈출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것이 청년이 들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동생은 이틀 후에 죽었다. 감염자를 청소하겠다며 다른 구역에서 밀려든 군대가 동생의 연구실을 덮쳤다. 그들은 이미 변이가 상당히 진행된 소년의 모습과 동생이 진행해온 연구를 확인하고 공포에 질렸다. 그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청년은 머리에 넣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동생이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진 풍경. 그리고 그 잔해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동생이었다. 그곳에서 청년이 건져온 것은 군대에 짓밟히고도 숨이 붙어있는 소년뿐. 청년은 동생을 묻을 때 희망도 함께 묻었다. 세상도 미래도, 그 날 청년에게선 완전히 가치를 잃었다.

재앙을 몰아내려던 사람이 죽었는데 세상에 더 기대할 것이 있는가. 동생 같은 이도 죽여버리는 세상이라면 정화시킬 이유가 있는가. 청년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동생이 남긴 자료를 끌어안고 있긴 했으나 그는 연구실을 복구하려는 계획은 없었다. 어차피 제 능력으로는 연구를 이어갈 수도 없거니와, 세상에 대한 배반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 희망은 없다. 구원자의 목을 비틀었다면 세상도 그대로 종말을 맞는 것이 당연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 소년만 빼고.

외부의 협력자에게 동생의 자료를 제공하면서도 청년은 별달리 기대는 하지 않는다. 동생의 노력이 전해지길 바랄 뿐, 치료법을 찾아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은 뻔히 알고 있었다. 설령 찾아낸다 한들 청년의 목표는 소년이 더 고통받지 않게 되는 것이지 외부에 병이 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감염자를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도시를 폐허로 만든 군대 따위, 감염되어서 고통스럽게 죽어버려도 좋았다. 이 도시를 외면하는 다른 구역에 병이 번져도 청년에겐 큰일도 아니었다. 다만 소년은 불행에서 해방되었으면 했다. 세상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는 것으로.

외부에 통신을 시도한 것도 원래 소년을 위해서였다. 성과가 없다면 거짓을 말해서라도, 소년이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하고 싶었다. 세상을 사랑했기에 저를 용서할 수 없게 된 소년이 절망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하길 바라지 않았다. 바깥의 세 구역 중 군대를 보낸 구역을 제외한 두 곳에 통신을 시도해, 한쪽은 확실히 잡았다. 통제구역에 고립된 두 사람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제법 큰 성과였다.

[커먼즈 측에서 발병자가 나왔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외부의 협력자는, 이번에도 청년에게 소식을 전했다. 음울한 소식이었으나 절망에 익숙한 청년은 무심하게 답한다.

[결국은 시티까지?]

[그래. 톱스는 발병자를 처리하는 것으로 넘어가려는 것 같지만, 진행 패턴은 너희 엑시즈와 유사해. 치료법을 찾지 못하면 아마 그곳도 곧 통제할 수 없게 될 거다.]

[엑시즈에서 시티로 간 사람은 없어. 감염 경로가 짐작이 가지 않는데.]

[너희 쪽 최초감염자와 시티의 최초감염자가 비슷해. 엑시즈가 문제였던 게 아니라, 단순히 엑시즈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것일지도.]

[비슷하다니?]

청년은 접시에 음식을 담으면서 물었다. 사람이 빠르게 죽어가면서 식량을 구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필요한 것을 찾아 자주 집을 나서긴 하지만 그가 가져오는 것은 대개 이 구역의 음식은 아니다. 생산해낼 사람도 없거니와, 군대에 짓밟히면서 도시 자체가 폐허가 되었으므로. 협력자가 외부에서 몰래 들여주는 것이 둘을 연명시키는 식량의 거의 전부였다.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는 협력자가 사실 군대를 보낸 이의 자식이라는 것은 이제 와선 별로 중요한 사실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두 구역의 최초감염자는 외형, 연령, 습성이 거의 흡사하다. 쌍둥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토에게 형제는 없는데.]

[그쪽의 감염자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만일 두 사람이 유전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이 있고 거기서 문제가 생긴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져. 그와 비슷한 소년이 바깥에 두 명이나 더 있으니까.]

[설마.]

[여기 스탠더드에 하나, 그리고 아카데미아에도 하나. 아카데미아 쪽은 이전에 간부들 틈에서 본 적이 있어. 아카바 레오가 자료까지 남겨둔 위험인물이야. 스탠더드 쪽은 아직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긴 한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

그때 희미한 기척을 느낀 청년은 돌아보았다. 시선을 감지하자마자 후드를 뒤집어쓴 소년이 빠르게 모습을 감춘다. 아마 처음부터 엿듣고 있었으리라. 청년이 소년을 눈으로 쫓는 사이에도 통신기에서는 협력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당장 전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 시티의 자료를 전송하겠다.]

[좋아.]

통신이 끊어지자 집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구석에 틀어박힌 소년 앞에 접시를 내려놓고 돌아서자, 소년의 목소리가 청년의 등에 박혔다.

조금 안심했어.”

뭐가?”

나와 시티 쪽 감염자, 다른 구역의 위험인물만 사라지면 병이 안 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4명을 포기하면 전부 행복해질 것 같아?”

그렇지만 너는 포기하지 않겠지.”

나는 너를 돌봐야 해서 살아있는 거야.”

소년은 거기서 입을 꾹 닫아버렸다. 청년의 건조한 선언을 그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종말로 모두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수호하고 싶은 것처럼.

그러나 소년은 청년의 손목에 새겨진 자해흔을 모른다. 그가 차라리 병에 걸려 죽기를 수없이 바랐음을 상상하지도 못한다. 동생을 잃은 때부터 청년에게 남은 것은 소년뿐인데. 소년의 삶에서 마지막 밧줄이 되어야 했기에, 그가 삶을 아직 끝내지 않은 것인데. 동생의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청년은 이번에야말로 몰래 자료를 살피기로 했다. 소년을 자책으로부터 해방시킬 길을 찾기 위해서. 자신이 삶을 놓아도 될 날을 만들기 위해서.

협력자에게서 받은 자료를 열자마자 청년에겐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 통신기 화면에 펼쳐졌다. 협력자의 말대로 타 구역의 감염자는 언뜻 동일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친구와 닮은 얼굴이었다. 연령도, 병이 진행되는 방향도 동일하다. 정말로 두 사람이 공유하는 오류가 있어 그 부분만 수정하면 병을 잘라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청년을 진정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두 발병자의 공통점이 아니었다. 감염자의 삶에서 제법 큰 영역을 차지하는 이의 기록에서 청년은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느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청년은 조용히 집을 빠져나와, 동생이 죽은 때 그대로 멈춘 연구실로 향했다. 드물게 깨지지 않은 시험관을 꺼낸 청년은 거기에 한 가지 중요한 재료를 넣었다. 시험관 속 찰랑이는 붉은빛이 그를 들뜨게 했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집에 들어선 청년은 시약병을 들고 있었다. 챙겨온 것을 숨기려던 청년은 문에 바짝 붙어 기다리던 소년에게 붙들렸다. 소년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약병을 가리키며 물었다.

약이야?”

아카바가 준 자료를 보고 실험해봤어. 효과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고도 약을 건네지 못하고 망설이던 청년에게서, 무시무시한 발톱이 약병을 낚아채갔다. 뚜껑을 열고 바로 들이키는 소년 앞에서 청년은 답지 않게 긴장한 얼굴이었다.

효과가 나타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소년은 발작했다.

 

*

 

약은 두 사람의 소망 중 어느 쪽도 제대로 이루어주지 않았다. 소년은 죽지 않았고, 그렇다고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도 못했다. 발작을 일으킨 후 몇 시간 몸이 마비되기까지 한 소년에게 청년은 한마디 사과를 건넸다. 루리만큼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해. 그것은 간결한 말이었지만,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인지한 사람처럼 처연한 빛을 띠고 있었다. 소년은 저를 포기하지 못하는 친구에게서 무거운 감정을 보았다.

소년의 반응은 그보다는 훨씬 긍정적이었다. 소년은 그 후 걸핏하면 친구를 졸랐다. 있잖아, 저번의 그 약. 좀 더 강하게 만들 수는 없어? 회색 눈동자에 드리워지는 것은 두려움은커녕 기대여서, 청년은 자주 섬뜩해졌다. 아무래도 소년은 저를 망가뜨릴 게 뻔한 약에서 처음으로 희망을 본 모양이었다.

저라는 독을 깔끔하게 없애줄 수 있는, 구원을 생각하고.

[제대로 만들면, 너도 나도 해방될 수 있어.]

그것을 간원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광기 섞인 말로 해석해야 할지 청년은 알지 못했다.

[만들지 않을 거라면, 재료라도 가르쳐줘. 위험한 것이라면 너보다 내가 구해오기 쉬울 테니까. 나는 괴물이잖아.]

세상을 사랑하는 소년에게, 세상을 망가뜨리는 병은 너무도 잔인한 것이었음을 청년은 새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청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닌누군가가 소년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삶을 꾸역꾸역 이어가는 일뿐. 유감스럽게도 협력자가 보내는 자료는 점점 불쾌해져 갔다. 타 구역의 최초감염자가 마침내 완전히 변이하고 그 구역이 죽음의 땅으로 변해간다는 이야기가 사진으로, 기록으로, 보고서로 자꾸만 들어왔다. ‘외부의 상황을 묻는 소년에게 청년은 침묵으로 회피했지만, 소년은 어차피 다 알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것 봐. 치료법 같은 건 없어. 모든 걸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발병하기 전에 싹을 잘라내는 것뿐이야.]

[그럼 스탠더드와 아카데미아의 위험인물을 없애란 뜻인가?]

[네 명 전부. 변이가 끝났다고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

, 어서 약을 줘. . 소년의 말은 반복적으로 청년의 귀에 꽂혔다. 언젠가부터 그것은 청년의 머리를 울리는 환청이 되었다. 약을 줘, . 소년이 잠들었을 때도, 그가 저 멀리 숨어 어둠의 일부가 될 때도, 입을 꾹 닫고 있을 때도 청년은 소년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느 날 청년은 결국 허공을 보고 답했다. 언젠가는 만들 거야.

소년의 집요한 요구에서 해방되고자 아무렇게나 꺼낸 말은 아니었다. 청년은 약을 만드는 날을 계속 상상하고 있었으므로. 언젠가는, 필요해지는 순간이 온다. 소년이 매달리지 않아도 그가 스스로 약을 내줄 날이 온다. 그때가 되면 청년도 괴로운 삶을 이어갈 이유가 없어진다. 모든 것을 앗아간 이들에게 복수하고 무가치한 세상을 버릴 수 있게 되리라. 바라보는 것은 서로 달랐으나 두 사람의 소망은 언젠가 일치하게 될 것이다.

청년이 약을 제대로만드는 것으로.

스탠더드에서 들어온 정보는 없어?”

어느 날, 동생의 방을 청소하고 나온 청년에게 소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협력자와 통신을 할 때마다 소년에게 정보를 흘리지 않으려 동생의 방에 틀어박히는 청년이기에, 혹 새 소식을 듣고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그대로 침묵을 지킬 청년이었으나,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숨겨야 할 것이 없었으므로.

아카데미아의 첩자를 조사한다고 한 때부터 연락이 끊겼어.”

뭔가 잘못된 거 아냐?”

글쎄.”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통신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었던 협력자 측에서의 통신이었다. 청년은 친구가 끼어들기 전에 빠르게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서야 청년은 안심하고 상대와 연결했다. 오랜만에 듣는 협력자의 목소리는 어쩐지 침울했다. 불길함에 젖어들며, 청년은 인사를 주고받자마자 바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무슨 정보를 입수했는지 묻는 것이었다. 상대는 짧은 침묵을 거쳐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카데미아의 첩자에게서 아카바 레오의 구상을 확인했다. 엑시즈의 네 친구, 시티의 최초감염자, 아카데미아의 위험인물, 그리고 이곳 스탠더드의 소년까지. 네 명은 같은 결함이 있어. 그 부분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병을 일으킨 거다. 엑시즈에서 최초로 발병하자 전염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 생존자까지 거의 괴멸. 다음은 시티에서 발병, 커먼즈의 감염자였기에 외면해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했을 거다. 그 후엔 아카데미아, 그리고 스탠더드로.]

[그렇게 병을 퍼트리는 목적은?]

[선택받은 자만을 남기기 위해서, 인 모양이더군. 재앙에서 살아남는 자만 신세계로 도피하는 거다. 병의 씨앗이 되는 네 명의 소년은 죽지 않는 대신 영원히 병을 품고 있게 된다. 그들이 살아있는 한, 세계엔 죽음이 번질 뿐이야.]

소년의 자책은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이 구역의 병은 소년이 있기에 아직까지도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었으므로. 소년에겐 그 사실을 굳이 알리지 않기로 마음먹고, 청년은 새로이 떠오른 의문을 꺼내기로 했다.

[그럼 생존자는 어떻게 남기고?]

[쿠로사키, 시티의 최초감염자 자료에서 린이라는 소녀를 본 걸 기억하나? 각 구역에는 재앙을 멈출 수 있는 열쇠가 있었어. 그게 바로 린을 비롯해, 각 구역에서 <씨앗>의 주변에서 살아가던 소녀다. 아카데미아에도, 스탠더드에도, 그리고 너희 엑시즈에도 분명히 있어.]

[있었지.]

청년은 부러 과거형으로 말했다. 친구의 병을 멈출 수 있었던 구원자는, 이곳에 분명히 존재했다. 과거형인 것은 세상이 구원자의 목을 졸랐기 때문이었다. 협력자에게서 처음 자료를 받았을 때, 청년은 최초감염자의 친구라는 소녀를 보고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죽은 동생을 마주한 것만 같아서였다. 감염자가 친구와 쌍둥이처럼 닮았다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타 구역의 소녀는 동생과 빼닮은 얼굴이었다.

그 소녀가 구원자라면, 동생도 구원자였을 것이다. 소년의 변이를 멈추고 세상에 죽음이 더 퍼지지 않게 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 살아있었다면 비극을 막았을 동생은, 병을 퍼트리려던 군대에 짓밟혔다. 그 아이러니함이 청년의 머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죽었지만 말이야.]

[그쪽의 열쇠도?]

[나머지는?]

[아카데미아는 네 명의 열쇠를 전부 모아, 미리 격리해둔 엘리트의 치료제를 만드는 것을 계획했던 것 같아. 하지만 계획이 꼬여버렸어. 아카데미아의 세레나는 실험이 잘못되어 사망했다. 시티의 린, 아카데미아가 퍼트린 공포에 마녀로 몰려 죽었고. 스탠더드의 히이라기 유즈. 아카데미아에서 납치했지만 관리실패로 사망했지. 그리고 너희 엑시즈의…….]

[루리. 아카데미아가 죽였어. 유토의 치료법을 연구하는 것을 보고, 괴물을 만들고 있다며. 그래서 네게 넘긴 자료가 미완인 거지. 연구자가 죽었으니까.]

[……쿠로사키 루리, 네 동생이었군.]

답 대신 광인처럼 기괴한 웃음이 공간을 채웠다. 청년은 학살자가 거둔 결말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외부의 모든 것을 부수고, 짓밟고, 죽인 끝에 자기네가 계획한 것까지 전부 망가뜨렸다. 구원자를 없앤 학살자는 앞으로, 짓밟힌 이들과 함께 나락에 떨어지리라. 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결말이다. 삶은 이제야, 그가 바라는 대로 되어간다. 청년은 한참이나 낄낄댄 끝에 소리쳤다.

[그 애들 전부 아카데미아 때문에 죽어버렸단 말이지! 그럼 이제 다 끝이야. 너희 구역의 씨앗도 결국 발병하게 될 거고, 스탠더드에까지 병이 퍼지면 생존자는 없을 거야. 안 그래?]

[현재로선 열쇠를 모두 잃었지만, 나는 아직 희망을 버리진 않고 있어. 쿠로사키, 너는 구원자의 형제다. 씨앗과 함께 지내는데도 발병하지 않은 건 너도 각 구역의 열쇠처럼 병에 면역이 있어서일 거다. 그러니까 어쩌면 너에게서.]

[어지간히 급해진 모양이군.]

[아카데미아를 거쳐 스탠더드에서도 병이 시작되었어. 감염자가 내 통제를 벗어났으니 여기서 막지 않으면.]

청년의 손에서 통신기가 떨어졌다. 동생이 죽은 후로 청년은 이렇게 행복을 느낀 때가 없었다. 스탠더드로 와줬으면 해. 그게 아니면 내가 연구할 수 있을 표본만 남겨주어도 바닥에 떨어진 통신기에선 계속 협력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청년이 답할 것은 아니었다. 환희에 잠긴 채로 청년은 문을 열어젖혔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소년은 저에게로 빠르게 다가오는 친구를 보았다.

약을 만들어달라고 했지, 유토.”

청년의 얼굴에는 괴상한 열기가 떠올라 있었다. 낯선 모습에 소년은 움찔했다. , 무슨 생각으로. 의문 끝에 저도 모르게 흘린 말은 간결했다.

이제 들어주려고?”

그럴 때가 된 것 같아.”

그 남자가 위험인물을 다 없애라고 해?”

아니, 그 인간의 소망은 절대 이뤄지지 않아. 하지만 우리의 소망은 이제 이뤄질 때도 되었지.”

마실 거야? 곧이어 들린 것은 유혹적인 말이었다. 그동안 그 말을 들으려 친구에게 매달려온 소년이 거절할 리 없었다.

답이 돌아오자마자 청년은 부엌으로 향해, 유리병을 꺼냈다. 투명한 유리병은 붉은색의 약을 더욱 빛내줄 것이다. 약의 재료는 청년이 얼마든 구할 수 있는 것. 그렇기에 당장이라도 소년의 입속에 흘려 넣을 수 있는 것. 단 하나의 재료만 있으면 된다. 그것으로 두 사람이 바라온 결말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통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청년에게, 몇 발짝 밖에 선 소년도 기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으로 병은 더 번지지 않게 되는 거야?”

시티는 엑시즈와 거의 비슷해졌어. 아카데미아에도 병이 번지고 있고. 스탠더드에까지 발병했다니, 모두 공평하게 지옥에 떨어지겠지.”

기뻐하는 건 아니지?”

나이프를 집던 청년은 반문했다. 그러면 안 돼?

유토. 나는 세상을 사랑한 적이 없었어.”

그것이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였다. 소년은 괴물이 되었지만 세상에 애정이 남아있었고 청년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을 사랑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구원자를 죽이고, 어쩌면 치료받을 수도 있었을 감염자를 영영 괴물로 만든 세상인데. 인간의 노력을 짓밟고 희망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혹 병이 멎는다 한들 서서히 썩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구하려 매달릴 필요도 없지. 아카데미아가 오염된엑시즈를 쓸어버리겠다고 했던 때, 루리를 죽인 때 지금의 결말은 정해진 거야. 이곳의 병을 없앨 수 있는 건 루리뿐이었는데.”

……구원은 없구나.”

나는 루리의 오빠니까 너를 막을 수는 있겠지만, 알잖아. 루리가 아니니까 너를 구할 순 없어.”

청년은 친구와 닮은 소년, 동생과 똑같은 얼굴의 소녀를 확인한 날 동생의 마지막 메모를 떠올렸다. 수첩에 붙은 메모엔 간결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어쩌면 내가 유토의 답이 될지도 몰라. 처음 발견했을 때는 그것을 마음을 다잡기 위한 말로 생각했으나 다른 구역의 감염자에게도 동생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자 그 문장이 새롭게 다가왔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소년을 구하는 것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뜻으로.

곧바로 연구실에 달려간 청년은 미량의 피를 약물에 탔다. 동생과 유전정보를 공유하는 자신이 소년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제가 그의 긴 불행을 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서. 그렇게 만들어낸 첫 번째 약은 대단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그때의 실험으로 청년은 분명히 알았다. 그의 피는 친구에게 독이라는 걸. 구원자로 태어나지 못했으니 친구를 되돌리는 약은 만들 수 없고, 독으로 친구를 막아설 수는 있다는 걸. 반쪽짜리기에 청년은 희망을 만들 수 없지만, 반쪽짜리기에 소년의 고통을 끊어줄 수는 있다.

영원히 멈추게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거야.”

그러면 내 소망은 완벽하게 이뤄져.”

“‘우리의소망이지.”

소년이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청년은 나이프로 팔을 깊이 그었다. 흘러내린 피가 미리 받쳐둔 유리병에 빠르게 쏟아졌다. 채울 수 있는 만큼 채워야 했다. 생명을 최대한으로 깎아내도록. 자신의 결말을 손에 쥘 수 있도록. 미량으로도 위험했던 독을 청년은 멈추지 않고 담아낸다.

약이 차오를수록 청년의 기쁨은 짙어지고 생명은 희미해진다. 이 끝에 기다리는 것은 종말뿐. 나이프를 들 수도 없게 되었을 때 청년은 남은 힘을 짜내어 소년을 불렀다. 유토. 여기야. 네게 안식을 줄 독이야. 흘러넘친 피를 보고 약의 정체를 알아챈 소년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그가 되돌릴 수 있는 것이란 없었다. 망설이는 소년에게 병을 가리킨 청년은 얼굴에 힘겹게 웃음을 그렸다. , 그대로 삼켜. 그것만 마시면 너는 해방돼. 소년은 떨면서 유리병을 들었다. 손에는 모든 것을 끝낼 약이 있었으나 소년은 차마 마시지 못하고 얼마간 그 무시무시한 붉은빛을 눈에 담았다.

네 삶을 가져가길 바라지 않았는데.”

네가 가져가야만 해. 그게 내 소망의 완성이야.”

작게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친구가 깎아낸 생명을 들이켰다. 총탄에도 죽지 못한 괴물은 피 몇 모금에 저주받은 생을 마쳤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청년의 시야도 검게 물들었다. 몸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꿈에 빠지듯 의식이 끊어졌다. 지독하게 소망한, 종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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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