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찻잔에 차를 따른다. 공들여 우려낸 차는 두 잔. 하나가 그녀의 몫이라면, 다른 하나는 동거인의 것이다. 그녀가 이곳에 머물도록 한, 정확히는 그녀를 숨겨주고 있는 청년은 그녀에게서 차를 받는 것을 좋아했다. 본래 특별히 차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선물받았다고 가져온 차를 여자가 몇 번 내려준 후로 일과에 티타임을 슬그머니 끼워넣었다. 집에 틀어박힌 채 무기력한 생활을 이어가는 여자가 그나마 차에는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리라.

차를 내릴 때마다 여자는 청년이 잔을 받아드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녀가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들면, 그는 천천히 차향을 음미할 것이다. 씁쓰레한 차는 목을 타고 내려가, 속을 덥히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생기 없는 눈이 드물게 빛났다. 여자는 언젠가부터 차에 미량의 독을 타고 있다. 그것이 정말로 독이 되는지, 독성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확인할 수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언제나 고마워요. 이런 건 내가 해도 되는데.”

인사를 건넨 청년은 여자의 상상대로 그녀가 잔을 들 때까지 기다린다. 그의 푸른 눈에 감정이 엉긴 것을 모른 체 하며 여자는 먼저 차를 마신다. 두 명 분의 차를 내리며 동거인의 차에 따로 독을 탄다는 수고는 하지 않는다. 때문에 여자의 차에도 독이 들어있지만, 그녀는 언제나 태연하다. 애초에 너무 고통스러울 때를 대비해 손에 넣었던 독이었다. 조금씩 쌓이는 독으로 죽을 수 있다면.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않고도 삶을 끝낼 수 있다면. 나쁠 것도 없는 결말이다. 짧은 삶에 너무 짙었던 불행이 그녀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가 주는 독을 삼키는 청년은. 여자는 결국 중독되어 쓰러지는 청년을 자주 생각한다. 이곳에서 청년은 여자에게 언제나 호의를 보이지만 여자는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으면서도 그의 파멸을 쉽게 그린다. 지금 당장 그가 죽고 사인이 그동안 쌓인 독이었다고 밝혀져도 그녀는 한 움큼의 죄책감도 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두 사람이 얽힌 과거를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무슨 생각을 해요?”

얼굴에 무슨 감정이 떠올라 있었는지, 차를 마시던 청년이 묻는다. 친근하게 말을 걸어와도 여자가 선택하는 것은 침묵. 이 집에서 살게 된 때부터 여자는 입을 잘 열지 않는다. 말을 하는 법을 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저 남자와 무슨 대화를 할 것인가. 청년은 여자의 삶을 너절한 비극으로 만들었는데. 그가 망가뜨린 삶은 지금 그가 베푸는 어떤 것으로도 회복할 수 없다. 고향도, 사랑하는 사람도, 꿈도. 청년이 가져온 재앙에 휩쓸려 사라졌다.

, 하트랜드에 한 번쯤 가게 될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청년은 가끔, 이렇게 여자가 잃은 것을 들먹인다. 아마도 관심을 받기 위해서. 잠깐이나마 그녀가 저에게 집중하게 만들 생각으로.

당신의 고향이요.”

?”

글쎄요, 거기까진 잘 모르겠지만. 아마 대단한 일은 아닐 거예요. 사실상 폐쇄한 곳이니까.”

검게 죽어버린 땅이, 거짓말처럼 무너지는 건물이, 귀가 먹먹해지는 비명과 빛으로 허물어지는 사람들이 여자를 짓누른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이제 그런 것밖에 남지 않았다. 그 처참한 파멸을 끝내려 고향을 떠났는데,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무력함을 학습한 것은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삶에 그토록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고향에 밀려든 침략군. 성전을 내세우며 모든 것을 짓밟은 군대는 이제 당당히 정복자를 자처한다. 마지막까지 저들에 맞섰던 정예병마저 쓸어버리고선 더더욱 기세가 올랐다. 누구도 가로막지 못하게 된 침략자는 망국의 유민을 서서히 말려죽이고 있다. 특히나 그녀는 정예병의 유일한 생존자로 정복자 측에도 얼굴이 알려진 자. 그녀가 세상에 나서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었다. 정복자의 편에서 제 위치를 확실히 굳힌 청년이 그녀를 보호하기로 하지 않았다면, 홀로 떠돌다 벌써 숨이 끊어졌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말해주는 이유는?”

원한다면 데려가줄 생각이 있어서요.”

아카데미아 간부가 그래도 되나?”

간부라는 걸 이럴 때 써먹어야죠.”

이상할 정도로 끈질긴 시도가 어쩐지 불길하다. 여자는 자신을 향한 청년의 호의가 비정상적인 것임을 안다. 그에게 기대어 생존하긴 하나 그가 베푸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를 구한 것을 포함해, 청년의 호의에는 대개 불순한 의도가 깔려있다. 함께 지내다 보면 확인할 수밖에 없는 불쾌한 것. 이번에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에, 여자는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면서 상황을 종료할 방법을 생각한다. 답을 돌려주지 않는 중에도 청년은 지치지도 않는지 떠들어댔다. 그렇게 무리한 일도 아니에요. 누가 따로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일이 조금 복잡해져도 되니까.

어때요, 루리?”

불쾌한 의심이 현실이 되어, 여자는 아찔해진다. 청년이 입에 올린 것은 그녀가 애증하는 이름이었다.

 

*

 

그것은 한때 여자가 가장 사랑했던 이름이었다. 지금도 그 이름을 떠올리면 마음 한쪽이 희미하게 욱신거리곤 한다. 그녀가 잃은 것 중 가장 의미가 컸던 존재의 이름. 삶에 닥친 불행으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사람인데 어디에서 흩어졌는지도 어떻게 삶이 끝났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유물이 된 이름을, 여자는 추억으로도 품지 못한다. 타인이 그 이름을 멋대로 쓰기 때문에. 주인은 없는데 이름만 살아있기에.

영원히 혼자 끌어안고 싶었던 이름을 자꾸만 꺼내는 이는 하필 여자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 남자였다. 청년이 부지런히 되살리는 이름에 여자는 자주 숨이 막혔다.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으면서도, 청년이 빼앗아간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다고 청년에게서 그 이름을 지울 수도 없다. 사랑하던 사람의 이름에 점점 너절한 감정이 붙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고향에 함께 가겠냐는 제안에 여자는 끝내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청년이 몇 번 더 물어도 차를 홀짝이며 회피할 뿐이었다. 이미 폐허가 된 땅에 그리움도 슬픔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호의라면 호의일 것에 그렇게 도망쳤던 것은 속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그녀의 불행에 크게 기여하고서는 뒤늦게 피해자를 위하는 체 군다. 정복자의 위세로 베풀 수 있는 것을 쥐고서,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든다. 그러면서 여자의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않는다.

피해자를 연민한 가해자라거나 잘못을 뉘우친 악인이 아니다. 악역을 맡고 싶지 않은 인간이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알량한 호의와 대단찮은 비겁함. 그 정도가 청년의 선의에 깔린 것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청년은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한다.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한 베풂이니 여자도 그에 감사할 이유가 없다. 그를 받아줄 이유를 억지로 찾으면 스스로 비참해질 것이다. 부끄러움은 아는 것인지 아니면 제 감정만 내세울 정도로 뻔뻔한 것인지, 청년 또한 그녀에게 관대한 태도를 요구하진 않는다. 끈덕지게 달라붙어 그녀의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려 들 뿐.

여자는 청년이 눈앞에 내민 것에 눈을 깜빡였다. 간단한 마술의 끝에 그의 손에 올라온 것은 작은 상자. 선물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녀는 손을 뻗지 않는다. 청년이 상자를 열어 안을 보여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그가 준비한 것은 반짝이는 액세서리. 여자가 금세 시선을 거두자 청년은 황급히 말했다.

내가 해 줄게요. 일단 어떤지 봐요.”

여자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제 뜻을 쉽게 꺾지 않으므로, 적당히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서 빨리 만족시키는 쪽이 편하다. 허락을 받아내자 청년은 상기된 얼굴로 자신이 준비한 것을 조심스레 꺼냈다. 여자의 취향에서는 다소 거리가 있는, 화려한 귀걸이. 청년은 이전부터 자주 액세서리를 선물했다. 여자가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청년의 자기만족이었다. 안온한 새장에 틀어박힌 여자를 제 입맛대로 꾸미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좀 더 음습한 의도가 깔려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언제나 경계하는, 불순한 호의의 연장.

청년의 속내가 어떠한지 오래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 인형처럼 몸을 맡기고 머리를 비우면 차라리 편하다. 그가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다 풀어내고 저를 놓아줄 때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여자는 청년이 귀걸이를 끼워주는 동안, 거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분명 제 얼굴인데도 타자를 마주한 듯 낯설다. 거울 속 그녀가 걸친 모든 것이 본래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예쁘게 단장한 흑발도 산뜻한 원피스도 전부 동생의 것. 여자는 제 모습에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동생을 본다.

하필 청년이 선물한 귀걸이조차 동생을 떠올리게 했다. 청년이 그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여자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서 일부러 골라온 것이다. 청년은 여자의 고향에 전쟁을 가져오고는, 동생의 납치를 방조했다. 동생이 어울렸던 마술사의 정체가 적의 첩자였다는 것은 뒤늦게 안 사실. 처음부터 동생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접근해 친분을 쌓았다고 청년은 고백했다. 뻔뻔하게도 청년은 여자에게 자신이 망가뜨린 소녀를 덧씌워 본다. 그녀의 사라진 동생을 기대한다. 그것이 그녀가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

기껏해야 십대의 학생들에 불과했던 정예병은 훈련받은 군사를 넘지 못했다. 전쟁 끝에 홀로 살아남은 여자는 적진을 떠돌다 청년과 마주쳤다. 엔터테이너 행세를 하며 동생에게 접근했던 청년은 큰 공이라도 세웠는지 간부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여기서 끝이구나. 청년과 시선이 얽힌 순간 숨이 턱 막히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길고 긴 불행에 지쳐 차라리 삶이 끝나길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곳에서 돌아다니면 위험한데.]

그러나 여자에게 돌아온 것은 걱정 어린 목소리. 청년은 멍해진 그녀를 잡아끌며 속삭였다.

[일단 나랑 같이 가요.]

루리. 엉뚱한 이름을 듣고서 여자는 깨달았다. 청년은 자신을 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동생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뒤늦게 동생을 구하는 체 할 뿐임을. 그 얄팍한 호의가 여자의 마지막 힘을 말려버렸다. 그녀는 청년의 손을 놓을 기력이 없어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가 차린 음식을 거절할 의지가 없어 먹어치웠다. 그래도 내가 먼저 당신을 발견해서 다행이에요. 당신을 보호할 수 있으니까. 청년이 멋대로 떠들 때 여자는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눈에 담았다. 표정 없는 얼굴이, 전장에 선 동생과 닮아있었다.

[나랑 같이 지내도 되겠죠?]

루리. 또다시 귀를 때리는 동생의 이름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녀의 삶은 청년에게 넘어갔다. 저항할 힘도, 청년의 뜻을 거부해서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기대도 잃었기에 여자는 얌전해졌다. 청년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말에도, 자기만족일 뿐인 선물에도, 그의 고약한 태도에도. 이번에도 손쉽게 목적을 이룬 청년은 흡족한 웃음을 걸쳤다. 인형처럼 손을 모으고 앉은 여자에게 그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당신에겐 날개가 어울린다고 언제나 생각했어요. 당신이 사랑했던 덱처럼.

그래서 하트랜드에서 당신에게 선물했던 게, 날개를 연상시키는 귀걸이였죠. 이번 것처럼.”

여자는 양 귓불에 매달린 것을 본다. 하늘색의 깃털 장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동생은 언젠가부터 깃털 장식의 귀걸이를 하고 다녔다. 꽤 마음에 들어 하기에 출처를 물었더니, 선물받았어. 라고만 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적에 납치된 동생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여자는 지금껏 그것이 누구의 선물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 의문을 풀어준 청년은 행복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듯 감상에 젖은 얼굴이었다.

똑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지만 최대한 비슷한 것을 골랐어요.”

과거에 매달리는 사람이었던가?”

당신이 좋아했잖아요. 매번 하고 다녔고. 좋은 기억을 되살렸으면 해서.”

청년과의 기억이 한때는 동생에게도 좋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동생은 마술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들뜬 얼굴이었으니까. 그러나 동생에게 한 가닥 추억을 안겨주었다고 위안하기엔, 청년이 앗아간 삶이 너무 길었다. 시간이 지나며 여자가 한때 청년에게 향했던 증오는 찌꺼기만이 남았지만 동생에게 일어난 일까지 덮을 수는 없다. 원망? 혐오? 배반감? 동생이 청년의 정체를 알았다면 무엇을 느꼈을지 모르나 적어도 그가 꾸민 일을 용서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때를 재현하기라도 하려고?”

그런 것도 싫나요?”

우리는 그때와 다르지. 이제 나한테 이런 건 안 어울리잖아요?”

삶은 이미 그에게 지배당했다 해도, 그가 스스로를 용서할 기회를 주어선 안 된다. 그런 생각으로 딱딱하게 말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를, 청년의 말이 묶었다.

어울리는데 왜?”

마주하는 시선은 어딘가 탐욕스럽다. 시선만으로 갉아 먹히는 기분이 들어 여자는 몸을 떨었다. 애초에 그들의 관계는 정상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서로를 위하는 것일 수도 없었다. 때문에 여자는 이 괴상한 관계에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았으나 청년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의 말이 단순히 선물에 대한 것이 아님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명확해진다. 여자는 두려워서라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았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더 나아질 수도 있죠.”

어떻게?”

나를 받아주는 거예요.”

무슨 이유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어요.”

꿈을 꾸듯 몽롱한 목소리에 여자의 혀가 굳었다. 청년은 그녀의 삶을 손에 넣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 텅 비어버린 그녀를 동생으로 취급하며, 새장에 묶어두는 것으로 그쳤으면 되었다. 그의 손을 탄 때부터 그녀는 인형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는데. 그녀에게서 바라는 모습만 취하고 나머지는 멋대로 생각하면 그만인데.

눈앞의 남자를, 그가 지껄이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어 여자는 뒷걸음질 쳤다. 그는 다가오지 않았지만 시선으로 계속 그녀를 쫓았다. 바로잡을 기회를 주는 거예요. 모든 것을 다시 쌓으면 되잖아요. 이제 전쟁도 무엇도 없으니까, 좋은 인상으로 새로 시작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말하는 청년의 얼굴엔 괴상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이 광대의 분장 같다고 생각했을 때 여자의 몸이 벽에 닿았다. 이제 더 물러설 곳은 없다.

나를 받아주기만 하면…….”

그럼에도 청년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고집스레, 준비한 말을 마지막까지 토해낸다.

이번에는 쿠로사키 루리를 구할게요.”

여자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쏟아졌다.

 

*

 

청년은 수십 번을 사과했다. 차마 그녀에게 가까워지진 못하고 몇 발짝 밖에서 애원하듯 던진 것이었다. 물론 여자는 한 번도 받아주지 않았다. 눈물이 멎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를 지나쳐갔을 뿐이다. 청년의 간절한 시선을, 겁먹은 얼굴을 외면하고 욕실에 향한 여자는 목구멍에 손을 밀어 넣었다.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고서야 겨우 청년에 대한 구역감을 떨칠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때 찬장에 가득 넣어둔 것이 여자의 시선에 잡혔다. 염색약. 언뜻 검은색으로 보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사실 뿌리부터 조금씩 녹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염색약으로 덮어버린, 본래의 색. 아무리 짙은 색을 덧씌워도 시간이 흐르면 원래의 것이 자라나온다. 조잡한 모방임을 알면서도 머리를 물들인 것은 동생의 불행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방어막이었을 뿐. 결국 그 처량한 위장을 이어갈 의지를 잃은 여자는 염색약을 전부 내버렸다.

그 후로 여자는 청년을 거의 모른 체 했다. 그가 돌아와도 시선을 주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날아드는 동생의 이름에 반응하는 일도 없었다. 이전과 같은 것이라곤 하나. 그의 몫까지 차를 준비한다는 것. 언젠가는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 온다. 어느 쪽이 먼저 죽을지는 모르지만, 한쪽이 죽기만 하면 이 숨 막히는 삶에서 해방될 수 있다. 여자의 머리를 메우는 것은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차를 준비하던 여자는 갑자기 쉬운 답을 깨달았다. 머리를 스치는 해답에 그녀는 미친 듯이 웃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로, 동생이 사라진 후로 그렇게 들떴던 일은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여자는 희망을 느낀 것이다. 막 돌아와 제복을 벗던 청년은 낯선 모습에 조심스레 물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루리?”

답이 돌아오리라는 기대는 없었으리라. 이전, 그의 고백이후로 여자는 그를 제대로 상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여자는 오랜만에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금빛 눈을 빛내며.

있잖아, , 지금까지 차에 독을 탔어요. 죽을 정도는 아니고 조금씩.”

그동안 저지른 일을 고백하면서도 여자는 한 가닥 가책도 없었다. 청년의 반응에 대한 불안도 마찬가지였다. 혹 그가 배반감에 사로잡힌다면, 제 목이라도 졸라줄지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의 자신에겐 모든 것을 끝낼 열쇠가 있다.

당신은 역시 나를…….”

그래도 이해해주겠죠? 당신 나한테 잘못했잖아.”

누구에 대한 잘못을 말하고 있는지는 여자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동생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차피 어느 쪽이건 들어맞는 이야기였다. 청년은 동생의 미래를 닫았고, 그녀를 살아있는 시체처럼 만들었으니까. 과연 청년은 원망의 말 한마디 던지지 못하고 도리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무엇을 원해요?”

나랑 마지막으로 차를 마셔줘.”

마지막으로?”

이제 다 지쳐서 말이야. 이번엔 조금이 아니라 제대로 넣었으니까, 마시면 그대로 끝이겠지. 겁이 나면 거절해도 괜찮아요. 나 당신에게 기대하지 않아.”

청년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짜릿했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그와 함께하는 삶을 지금까지 유지할 필요가 없었는데. 개선될 수 없는 사람을, 뿌리부터 비겁한 인간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 삶의 목적을 잃었다고 그의 영역을 빠져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뻔뻔함을 제대로 확인하고 여자는 차라리 머리가 차가워졌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녀는 이제 명확하게 안다.

좋아요.”

놀랍게도 침묵은 짧았다. 청년은 크게 망설이지도 않고 답을 돌려주었다. 끝까지 피해자를 구하는 데 열심이었던사람을 연기하고 싶었던 것인지. 그 선택 아래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는 일 없이 여자는 찻잔을 그의 눈앞에 내려놓았다. 언제나처럼, 두 잔. 다만 이번에는 한쪽에만 독을 탔다. 삶을 빠르게 끝낼 정도의 양을. 어느 쪽에 독이 들었는지는 그녀만 아는 사실. 그러니 자신이 의도한 대로 선택하게 해야 한다. 여자는 청년이 잔에 손을 뻗는 것을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그쪽이 아냐.”

청년은 여자의 말에 막 집었던 잔을 내려놓았다. 옆의 잔을 드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있을 일이, 여자가 선택한 결말이 두려워지긴 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이건 당신에게도 나쁜 결말이 아니니까.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여자는 과거 동생을 달랠 때처럼 나긋하게 속삭였다.

나를 용서해줄 거예요?”

글쎄.”

같이 마셔주긴 할 거죠?”

.”

그건 조금 위안이 되네요.”

청년은 빈 웃음을 걸친다. 여자도 약속한 대로 남은 잔을 들었다. 청년이 잔을 입에 가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제 끝날 거야, 모든 게 말이야. 당신 말대로 행복해지는 거지.”

여자는 들뜬 목소리로 말하고는 그대로 잔에 담긴 것을 들이켰다. 결말까지는 짧았다. 쓰러지는 그녀에게 청년의 울부짖음이 꽂혔다. 그것이 여자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가 되었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장슌ts] 쓸모없는 것  (0) 2019.06.29
[슌] 인형의 무덤  (0) 2019.05.30
[슌+레이] 오작동  (0) 2019.03.31
[사장슌ts] 가장 필요한 선택  (0) 2018.12.31
[사장슌] 표류  (0) 2018.11.30
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