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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2.28 [슌 중심] 유물에 관하여 : 프롤로그

* 2021년 2월에 발행한 쿠로사키 슌 중심 회지 <유물에 관하여> 웹공개

* 프롤로그격 스토리/1부/2부/3부로 나누어 업로드

 

  사사야마 사야카 양에게

  이전 장례에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부탁하신 대로 쿠로사키 슌의 유품을 정리하여 보내려다, 그의 장례 때 사야카 양이 「전쟁이 일어난 후론 슌이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 수가 없었던 게 슬펐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랐지요.
  그래서 사야카 양과도 친분이 있는 사카키 유우야 군의 도움을 받아, 쿠로사키 슌에 대한 기록을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쿠로사키 슌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아 그에 대한 증언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 회사에서 그를 지켜보았던 자, 쿠로사키 슌의 레지스탕스 동료였던 사람. 그와 연이 있었던 이들까지. 그들이 이야기하는 쿠로사키 슌을 듣고 재구성하였습니다. 그렇게 만든 이 기록을, 유품과 함께 당신께 보냅니다.
  이것이 쿠로사키 슌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의 삶의 일부를 담아낸 자료로 당신에게 남길 바랍니다.

                                                                                                           아카바 레이지
  [ 차례 ]
  첫 번째 기록 : 레오 코퍼레이션 비서 OOOO
  두 번째 기록 : 전(前) 레지스탕스 카이토
  세 번째 기록 : 구 아카데미아 데니스 맥필드
  네 번째 기록 : 히이라기 유즈

 

 

 

 

 

  너의 장례는 생전 네가 둘렀던 음울함에 걸맞게 비 내리는 날에 치러졌다. 타지에서 맞은 죽음이라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가족과 친우, 가장 가까웠던 이가 없어 더욱 조용한 장례였다. 너의 고향 친구는 몇몇 모습을 드러냈지만 눈물이 말라붙어 울지 못했다. 이곳 사람들은 너를 알지 못해 그들이 아는 불행만 위로했다. 너의 누이를 닮은 소녀와 친우를 닮은 소년만이 소리 없이 울었다.

  침략군이 밀려든 고향을, 희망을 찾겠다며 떠났던 너는 종전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트랜드에는 더 볼 일이 없어. 라는 말의 뜻이 이제 그곳엔 사랑하는 게 남지 않았어임을 모두가 알았다. 전쟁의 끝에 가족과 친우를 잃고 돌아온 너는 더는 폐허를 눈에 담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정착할 곳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제법 날이 잘 드는 무기였던 너는 종전까지의 수개월 사이에 낡아버려서 갈 곳이 마땅찮았다. 무기로선 이가 빠진 칼이고 인간으로선 폐허가 된 너를 받아줄 사람은, 한때 너를 사용했던 사람뿐.

  수년 전의 너는 <사용자>를 따라, 그가 경영하는 회사에 들어섰다. 회사에 발을 디딘 때부터 쏟아진 시선을 너는 빠르게 느꼈으리라. 망가진 물건을 보는 듯 떨떠름한 눈길. 옅은 연민과, 그보다 훨씬 선명한 불안. 평범한 사람들에게 황폐한 소년병이란 시한폭탄과 같다. 잘못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져버릴, 주변까지 휩쓸지도 모를 위험한 자. 너는 사람들에게 무해함을 증명하는 대신 스스로를 가두는 것을 택했다. 안락한 회사는 너에게 거대한 우리가 된 것 같았다.

  인간에게 붙들린 맹수가 그러하듯 너는 끝내 우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기업 본사에 걸맞은 큰 건물에서 너는 제한적인 영역만을 다녔다. ‘사장의 손님에게 제공된 방. 회사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될 최상층. 회사의 식당 등. 네 근처엔 사람들이 앉지 않았고 너를 찾는 사람은 <사용자>가 전부였다. 어느 날 네가 쓰러졌을 때도 너는 회사를 떠나는 대신 회사 산하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의 1인실이 너의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 입원한 후로 내내 창밖을 보던 너에게, 살아서 밖으로 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오래지 않아 너의 짐은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몇 년간 머물렀던 회사에 너는 고작 두 박스 정도의 짐밖에 두지 않았다. 그 단출한 살림에 너의 삶을 짐작할 단서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회사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너는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나마 너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 너의 사용자만이 초라한 유품을 넘겨받으며 물었다. 쿠로사키의 데이터, 자료실에 남아있겠지.

  젊은 사장의 눈에 너는 언제나 책임져야 할 존재로 보였던 것 같다. 시한폭탄이건 폐허가 된 인간이건, 언젠가 폭발하건 재가 되어버리건. 마지막까지 눈에 담고 관리해야 할 대상. 네가 처음 그의 전사가 되었을 때부터 상담을 명목으로 너의 관찰 기록을 남겨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매년 네 모습이 담긴 영상이나 네 심정을 들을 수 있는 녹취 자료가 새로 자료실에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글쎄. 원하는 대로.”

  그러나 그 속에 너를 절망에서 구해낼 답은 없었던 모양이다. 사장은 매년 네 자료를 살폈지만 네가 말라 죽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그래서일까, 사장의 목소리는 감상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을 만큼 건조했다. 보랏빛 눈에도 씁쓸함만 비칠 뿐이다. 그렇다면 네 너절한 기록을 어떻게 처리할지, 알아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파기하겠습니다.”

  회사의 사람도 아닌, 사장이 떠맡았을 뿐인 외부인의 자료라. 사장에게라면 모를까, 회사 입장에선 무가치한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상이 죽었다면 더더욱. 사장실에서 물러나 자료실로 향할 때 머릿속엔 가여운 소년병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네 삶의 마지막 몇 년을 가두었던, 거대한 우리에서.

  자료실에 들어가자마자 K행으로 향했다. 이방인인 너는 이름보다는 <쿠로사키>로 불리곤 했으므로. 예상대로 네 마지막 몇 년의 기록은 그곳에 있었다. 꺼내자마자 파기하려다 이것이 네 마지막 기록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이제 여기에 더 쌓을 것은 없다. 파기하는 순간 유품보다 확실한 흔적이 날아가고 만다. 단절된 사람인 네가 영영 흩어지고 만다 그러니 전부 날려버리기 전 한 번쯤은 들여다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사람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너를.

  영상 자료를 꺼내 재생하자 스크린 가득 네 모습이 담긴다. 사장이 차곡차곡 남긴 기록은 열일곱 살의 너에게서부터 시작한다. 전쟁이 끝나기 전, 네가 막 사장의 전사로 움직이던 시절. 첫 번째 상담에서 열일곱 살의 소년병은 화면을 노려보며 이야기한다. 스스로 고향을 떠나 사장의 품에 들어왔으면서 붙들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린다.

  [나에게서 듣고 싶은 게 뭐야.]

  거친 목소리는 방어적으로 느껴진다. 카메라에 클로즈업되는 얼굴이 잔뜩 경직된 채여서인지. 수년 전엔 사납게만 느껴지던 모습이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처량하다. 그 시기 너의 날카로운 태도가 생존을 위한 위협이었음을 깨닫는다.

  [네 목적이다. 쿠로사키.]

  너는 왜 여기에 왔지? ‘동생을 구하기 위해라는 최우선의 목표를 빼고 설명한다면? 맞은편에 앉은 사장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덤덤하여 되레 긴장감을 높인다. 열일곱의 너는 그의 얼굴 대신 입술을 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그가 앉은 테이블을 엎을 것처럼 날을 세우지만, 실은 그의 다음 말 한마디에 집중해야 하는 처지였다. 적의 정보를 쥔 것도, 너를 침략군으로부터 보호해줄 사람도, 너에게 함께 싸울 동료를 줄 수 있는 자도 사장이었으므로.

  [선택지를 주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아니면 적을 쓸어버리기 위해?]

  사장의 말에 너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겨우 전자라고 답한다. 신중하게 골랐을 답에 사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치고.

  [좋아. 그럼 나에게 협조해줘야겠어.]

  [어떤 식으로?]

  [디스크를 내놓는 거다. 랜서즈로서 움직일 때 필요한 장치를 넣어주기 위해서야.]

  가능하겠지? 사장의 말에 너는 바로 왼팔을 감싼다. 왼팔에 장착된 배틀용 디스크가 열일곱 살의 너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이기 때문이리라. 명백한 협력자 앞에서도 쉽게 무기를 내놓지 못하는 것은 불신과 경계 탓이다. 너는 죽을 때까지 타자를 제대로 믿지 못했다.

  물론 영상에 담긴 것은 과거의 장면이므로, 그 상황에서 네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너는 결국 디스크를 풀어 사장에게 내밀 것이다. 사장은 너를 통제범위에 넣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너는 위험성이 삭제된 무기를 돌려받게 된다. 뻔한 결말을 볼 필요는 없었으므로 영상을 껐다. 열일곱 살의 너는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진다.

  다음으로 열어볼 것은 열여덟 살의 너였다. 종전 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던 네가, 겨우 회사에 몸을 붙였던 시절. 전쟁은 너에게 짧은 미래만을 남기고 끝났다. 구해야 할 것을 전부 잃은 너는 회사의 보호를 받게 되고도 도통 방향을 잡지 못했다. 네 방황의 증거는 목덜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고향에서 침략군에 맞서 싸우던 때, 네가 저항군의 표식으로 목에 매었던 스카프는 열여덟 살 생일이 되기 직전에 겨우 사라졌다. 그마저도 사장의 손에 풀린 것이었다.

  한동안 볕을 보지 못했던 목은 유달리 희었는데, 너는 희디흰 목에 자꾸만 불그죽죽한 상처를 만들곤 했다. 과거의 책무, 저항군의 표식에서 해방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과연 열여덟 살의 너는 신경질적으로 목을 긁고 있다. 상처 난 자리를 또다시 긁어 살짝 피가 맺힌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사장의 얼굴엔 표정이 없지만 안경 너머 보랏빛 눈에는 불쾌가 비친다. 너와 비슷한 나이의 사장은 네 방황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오늘은 네 미래 계획에 대해 들으려 해.]

  그러니 자꾸만 네게 답을 들으려 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삶이라거나, 도전하고 싶은 일이라거나. 네 관심사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을. 사장의 말에 답하는 대신, 너는 작게 중얼거린다. 질리지도 않고 묻는군.

  [LDS 강사 자리를 거절했다니 하는 말이다.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나?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어서 거절한 건가?]

  시선을 맞추지도 않는 너에게 사장은 묻는다. 너는 바닥을 보며 답한다.

  [엑시즈를 가르칠 사람은 많잖아.]

  [‘진짜 엑시즈를 가르칠 사람은 마이아미에서 너뿐인데도?]

  나는 네가 정착할 방법을 찾는 거다. 쿠로사키. 이 길은 네 원래 꿈에서 그렇게 먼 길도 아니고. 사장이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자 너는 겨우 고개를 든다. 금빛 눈은 사장을, 너의 방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를 담고.

  [그런 건 내가 자신이 없어.]

  이제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피곤하고. 너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독기 빠진 모습이 처연하다. 우리 속 짐승처럼 무력한 모습은 모두가 기억하던 소년병이 아니었다.

  방향을 찾지 못하던 너를 지나 다음 해의 너를 만난다. 열아홉 살이 된 해 너는 조용히 쓰러졌다. 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인지, 아니면 매일 말라가는 네가 안쓰러웠던 것인지. 그래도 입원 초에는 면회가 잦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 누이를 닮은 소녀라거나, 너의 친우를 닮은 소년이라거나. 몇몇 사람들이 선물을 안고 너를 찾았다. 너와 함께 사장의 전사로 싸운 이들이 한꺼번에 병문안을 가기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금세, 사람들의 관심은 걷혔다. 너는 병원을 나설 수 없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삶이 바빴으므로. 유일하게 꾸준히 병원을 찾은 이는 사장이었다. 책임으로 무장하고 불안에 눌린 채, 사장은 네 병실에 드나들었다. 네가 말라갈수록 더 집요하게. 너는 면회를 거부하진 않았지만 그를 반갑게 맞아주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심드렁한 반응이었다는 사장의 말대로, 화면 속의 너는 건성으로 답하고 있다.

  괜찮아. 라고.

  무슨 질문에건, 어떤 걱정에건 너는 8할은 괜찮다고만 답한다. 사장의 질문을 자르고서,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그만 돌아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지?]

  사장의 목소리에, 열아홉 살의 너는 화면을 바라본다. 핼쑥한 얼굴과 생기 잃은 눈에서 네가 시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앙상한 모습에 걸맞게 여린 목소리로 너는 답한다. 너희 세계에 망가진 사람은 필요 없어. 여기서 나는, 말하자면 깨진 조각 같은 거지. 잘못 쥐면 다치는 것.

  [나 같은 사람이 끼어들어봤자 평화에 금이 갈 뿐이야.]

  [랜서즈답지 않은 발언이군. 병상에 있다 보니 심리적으로도 약해진 건가?]

  [이제 와서 그 이름을 끌어오는 이유를 모르겠어. 랜서즈도, 그 리더인 너도. 전쟁이 끝난 날부터 제자리로돌아가는 게 맞았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랜서즈로서 세상을 지키는 데 기여한 네가, 그렇게 숨어들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만.]

  [하지만 사람들은 낡은 병기를 싫어하지.]

  [내가 어떻게든 너를 감당한다고 해도?]

  [……알고 있잖아, 리더.]

  낡은 호칭을 입에 올리며 너는 참으로 오랜만에 웃는다. 다만 웃음에 깃든 것은 희망도 기쁨도 아니었다. 아이를 달래는 어른 같은, 미지근한 연민이 비칠 뿐이다.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거지? 잘린 말에 매달리는 사장은 조금 괴로워 보인다. 그가 실패를 알게 된 것은 너와 함께 돌아온 때, 너의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얻은 날부터의 일.

  종전을 기점으로 사장과 너의 삶은 갈렸다. 젊은 사장이 연일 성공을 쌓을 때 그 또래인 너는 빠르게 무너져갔다. 야생의 포식자가 우리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듯. 방치된 무기가 빠르게 녹슬고 낡아가듯. 승리에 익숙한 사장이 그 씁쓸한 실패를 인정하고 싶었을 리 없다. 그는 어떻게든 너를 구해, ‘평화에의 적응을 이뤄내고 싶었을 텐데.

  [승산 없는 싸움이라는 걸.]

  리모컨엔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영상이 꺼졌다. 다시 틀지 않아도 뒷부분이 없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사장은 그 이상 네 이야기를 담지 않기로 한 것이다. 너를 바라보는 것이 처참했기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을 맛보았기에. 너는 스무 살 생일을 열흘 남기고 죽었다. 사장은 그 이른 종말을 들었을 때 결국 그런가라고 반응했을 뿐이었다. 아마 그도 알고 있었으리라. 자신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너에게 어떤 해답도 주지 못했다는 것을.

  네가 스무 살이 되지 못한 탓에, 매년 남겼던 너의 영상은 열아홉 살의 기록에서 멈췄다. 그나마 몇 개 남은 녹취 자료를 재생하려다, 지금까지 본 것과 별반 차이가 없으리란 생각에 손을 대지 않기로 한다. 네 기록을 원래대로 정리하고는 통신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사장에게 자료 처리에 대해 보고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무엇이든 말끔하게 매듭지으려는 사람이었으니.

  「쿠로사키의 기록 말입니다.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장은 바로 반응했다.

  「제대로 있던가?

  「관리를 잘못해서 훼손된 모양입니다. 확인해봤더니 제대로 재생되지도 않는군요.

  「유감이군.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치고는 동요가 없다. 사장도 네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 사장뿐만이 아닐 것이다. 회사의 누구도 그런 기록을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보람 없는 싸움 끝에 급격히 망가져 죽은 소년병이라. 연민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제대로 마주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넘쳐나는 자료 중 열 편도 되지 않는 기록을 누락시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파기했다는 서류를 남겨놓으면 더더욱 쉽다. 관리 장부를 꺼내 <파기 목록> 페이지에 슥슥 휘갈긴다. K, 쿠로사키 슌 상담 자료, 전체 파기. 사유는 자료의 손상과 소장 이유 상실. 두어 문장을 남기는 것으로 너의 기록은 자료실의 관리에서 벗어난다.

  자료실에서 나설 때는 들어갈 때와는 달리, 손에 상자가 들려 있었다. 누군가의 자료를 챙겨 나온 것이었으나, 빼돌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청소하는 것에 가까운 행위였다. 상자에 든 것은 모두를 침울하게 할 자료였으니. 그런 음울한 유물이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다. 이미 수년 전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 이제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회사의 옛 휴게실. 빛이 들지 않는 휴게실에 들어가 상자를 내려놓으며 건조한 소망을 얹는다. 하루라도 빨리 네 기록에 먼지가 앉기를. 그것으로 네 불행한 삶이 조용히 잊히기를.

  물론 너의 안식을 위해 이번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자료도 잊으려 한다. 너절하고 씁쓸한 생애를, 앞으로 다시는 꺼내보지 않을 것이다.

 

 

* Side K: https://hyeonsoyah.tistory.com/150

 
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