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여슌] 거미줄

2018. 2. 28. 23:51 from 02

 

오늘은 선생님한테서 엑시즈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소년은 마주앉은 여자에게 말을 던졌다. 관리자라는 이름으로 매일 찾아오는 사람. 소년이 지내는 연구소에서 그와 가장 오래 붙어있는 사람에게. 웬만해선 들을 일 없는 고향의 이름이 소년에게서 튀어나오자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내젓는다. 여기서 그 이름을 되살리는 것은 한 번도 그 땅을 밟아본 적 없는 눈앞의 소년이 거의 유일하다. 정복자 측이, 자기네가 이미 삼켜버린 나라의 이름을 꺼낼 이유는 없을 테니까. 여자의 고향은 이 나라의 군대에 멸망했다.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소년은 자주 그곳을 이야기한다.

이제는 없는 곳이니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고향이잖아?”

기억, 별로 안 남았어.”

물론 거짓말이었다.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꺼내기에 적합하지도 않고, 꺼내고 싶지도 않은 것이기에 잊어버린 척 할 뿐이다. 대부분의 기억은 침략군이 밀려들어온 때의 것이다. 거짓말처럼 무너지는 세상과 흔해빠진 죽음, 귀를 때리는 총성과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체. 그곳을 떠나올 때 여자를 둘러싼 모든 게 죽었다. 본보기였다던가 그냥 잘못 걸렸다던가, 어느 쪽이든 운이 나빴던 그녀의 마을엔 아예 몰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던 것 같다.

살아남은 자가 없지는 않았다. 침략군은 닥치는 대로 죽이다가도 쓸모가 있다고 분류한 사람은 남겨두었으므로. 본국을 위해 봉사하게 하겠다는 이유였던가. 그렇게 필요한 인간으로 분류된 여자는 몇몇 사람과 함께 격리된 채, 살짝 열린 문틈으로 참혹하게 죽어가는 주민들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살아남았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것인지, 그 처참한 비극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마을 주민이 몰살당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눈에 새기고 여자는 침략군에게 붙잡혀 적국의 땅을 밟았다.

여자는 이내 중앙의 연구소로 넘겨졌다. 그곳에서 병기 개발에 관여한다는 설명에 구역감을 누르던 여자는, 뜻밖에도 한 소년의 관리를 맡았다.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도 잠시, 여자는 소년이 병기로 만들어진 실험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기라는 목적에 걸맞게 흉악한 힘과, 무엇이든 짓밟을 수 있는 잔학한 내면. 그야말로 만들어낸 괴물이라 세상에 잘못 풀린다면 재앙이 될 소년이었다. 강력한 만큼 위험성이 큰 표본을 안정시켜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여자에게 날아든 요구였다.

언뜻 보면 위협적이지 않다. 모든 게 인위적으로 강화된 소년은 제법 영악해서, 사람을 불안하게 할 말은 흘리지 않는다. 나긋한 말과 친절한 태도만 살핀다면 소년은 굳이 감시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미 몇 번 고의로 의심되는 사고를 낸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때마다 연구소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실수였던 데다 소년이 워낙 가치가 높은 표본이라 어찌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안정시키면. 모두가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과연 언제쯤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될지 누구도 몰랐다.

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소년이 어쩐지 이국에서 잡아온 연구원에겐 호의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관리 하에선 소년은 아무런 사고도 일으키지 않았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르기까지 했다. 처음엔 관리자의 보조로 들어왔던 연구원은 오래지 않아 완전히 소년을 맡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 여자가 소년을 관리하는 이유였다. 멸망한 나라의 유민에, 쓸모가 있어서 살아남았을 뿐인 여자로선 연구소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선택권이 없는 건 물론이고, 어차피 감시의 시선이 따라붙어 이곳에 해가 되는 일을 할 수도 없었다.

[이곳에서 유일한 엑시즈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너에게 관심을 보였어. 신기했을까.]

소년의 호의에 대해 주변에선 그렇게 설명했지만, 여자는 그것이 자신의 무력한 처지를 알아챈 소년의 영악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병기로 만들어진 인간이어서인지 소년은 힘의 구도를 거의 귀신같이 읽어냈다. 스스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없는 망국의 인간을 자신에게 붙인 것이 분명했다. 과연 소년은 은근하게 여자를 괴롭혔는데, 여자는 그 교묘한 악의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적국에 끌려온 이상 편하게 살아갈 수 없는 건 분명했기에, 표본의 악의 따위는 여자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말로 꺼림칙한 것은 계속 마주하는 소년의 얼굴. 소년을 처음 만났을 때 여자는 바로 아는 이름을 꺼낼 뻔했다. 어려서 만난 친구와 너무도 닮아있어서. 전쟁 중에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 친구는 세상을 사랑하고 희망을 믿었는데, 매일 관리하는 표본은 그와 똑같은 얼굴로 악의를 꺼내고 세상을 부수려 든다. 한순간이라도 괴물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괴물이 겹쳐지는 게 여자는 섬뜩했다.

그래도 선생님, 고향의 친구는 기억하지?”

여자는 표본의 질문에 멈칫한다. 보랏빛 눈은 순진한 체 웃고 있지만 저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 자꾸 기분 나쁜 생각이 든다.

유토, 보고 싶지 않아?”

아예 친구의 이름까지 똑똑히 이야기한다. 역시나, 고의였다. 자신을 비롯한 생존자는 이곳에 닿자마자 기억을 낱낱이 열람당해 세세한 정보까지 전부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영악한 소년이 그 기록에 손을 댔다거나 주변의 연구원에게 캐냈을 가능성이야 충분히 있다. 여자는 소년에게 말려들지 않으려, 답을 하지 않고 표본의 상태만 기록했다.

선생님은 나를 보면 유토가 생각나지?”

유리. 불필요한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선생님이 괴롭지 않았으면 할 뿐이야. 나를 유토처럼 생각해도 좋은데.”

펜이 종이 위에서 삐걱거렸다. 여자의 입술도 떨렸다. 소년은 자신의 말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까?

나는 선생님이 마음에 들거든.”

고맙구나. 하지만 괜찮아.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니까, 포기하고 살 수 있거든.”

여자는 겨우 답했지만 이미 소년의 공격으로 정신이 아득했다.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에게서 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 날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는지 소년은 여자를 더 흔들지 않았지만, 그 후로 간간이 친구 이야기를 꺼내며 여자를 괴롭혔다. 자신이 하필 그녀의 친구를 닮았다는 게 꽤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동요하는 여자의 모습도. 그럴 때마다 여자는, 언젠가 연구소를 빠져나가 소중한 사람을 찾는 것을 생각하면서 소년의 말을 떨치려 애썼다.

여기서 빠져나가면, 이곳의 모든 걸 치워버리면. 혹은, 저것을 죽이면. 여자는 언젠가부터 소년의 목을 볼 때마다 그 목을 조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병기로 만들어진 존재라도 일단은 생물이니,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다. 적국의 희망을, 머잖아 자신의 고향에 그랬듯 죄 없는 주변국을 짓밟을 병기를 미리 없앤다면. 그럴 기회는 아마 찾아오지 않을 텐데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소년의 목숨을 끊는 상상은 제법 짜릿하다.

선생님, 무슨 생각을 해?”

?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어느 날엔 소년을 바라보면서도 그 목숨을 거두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다. 갑자기 말을 걸어온 소년 때문에 상상 속에서나마 시원스러운 살해는 실패했지만. 죽이지 못하자 상상 속 소년은 도리어 여자에게 달려들더니 그대로 여자의 복부에 손을 찔러넣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은 지나치게 선명해서 섬뜩하고.

표정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

괜찮아. 잠깐 속이 안 좋았을 뿐이야.”

다행이네, 나는 선생님이…….”

상상 속 자신의 죽음에 눌려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겨우 상상을 떨쳐낸 여자가 소년에게 무슨 말을 했냐고 물으려고 할 때, 공간이 갑자기 무섭게 흔들렸다. 연구소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살펴보니 연구소의 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연구소의 모든 일이 마비되고 모두가 혼란에 내던져졌다.

혼란 속에서 여자는 우선 소년을 챙기려다 그 얼굴에 걸린 웃음을 보았다.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사고를 일으킨 자가 누구인지. 자신이 오기 전까지 소년이 일으켰다는 몇 건의 사고와, 심증은 충분했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연구원의 말이 떠올랐다. 여자는 입모양으로 물었다. 너지? 소년은 당연한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한 단계 뛰어넘어서 행동의 이유를 말해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안 보이게 해야 했거든. ? 라고 묻기도 전에, 소년은 대담한 말을 던졌다.

선생님, 나 죽여볼래?”

선생님은 아카데미아를 싫어하잖아. 따라붙은 말 따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년의 제안은 달콤했다. 왜 저것은 자신이 수없이 생각했던 것을 간단히 던지는 것일까. 하필 친구를 빼닮은 얼굴로, 꼭 바람을 이루어주려는 것처럼. 그 애를 닮은 만큼 소름 끼치는 악마를, 지금 이 손으로 그녀의 손이 홀린 것처럼 표본의 목으로 향했지만, 결국 목을 감싸지 못하고 떨어졌다.

, 유토를 죽이는 것 같아서?”

웃음소리가 귀를 때렸다.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쉽게 주는 기회가 아니야. 후회할 텐데.”

표본의 말이 달라붙었지만 여자는 소년을 다시 보지 않았다. 친구가 아른거려 견딜 수 없었다. 시스템이 복구되고 혼란이 수습되자마자 여자는 바로 소년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 소년이, 연구소가 혼란에 빠졌을 때 여자가 자신을 보호해줬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소년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자를 칭찬했지만 여자는 거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무슨 의도로 꺼낸 거짓말일까. 여자를 계속 잡아두기 위해? 여자를 쥐고 제멋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연구소에서 자신을 소년과 연결할수록 벗어날 기회는 사라지는데.

후회할 텐데. 생각할수록 그 날의 소년이 비웃는 것 같다. 그때 도망치지 않았으면, 정말로 죽일 수 있었을까? 사고로 가장해 꺼림칙한 소년을 치워버리고 적국의 중요한 병기도 없앨 수 있었을까? 아니면 영악한 소년이 떠본 것에 불과했고, 걸려들었다면 표본에 손을 댄 죄로 자신이 위험해졌을까? 알 수 없지만, 소년의 수상쩍은 제안 이후로 여자는 더욱 연구소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든 침략자에게 협조하는 셈이라는 것이 끔찍했고, 감시 속에서 허락된 행동만 하는 삶도 숨 막혔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년을 견딜 수 없었다. 언젠가는 저것이 나를 완전히 쓰러트리고 말 것이다. 불길한 직감이 예언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여자는 이전처럼 상상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연구소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눈에 띄지 않는 함정을 만들기로 했다. 떼놓고 보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합치면 연구소에 구멍이 될 움직임을 차곡차곡 쌓는 것으로. 의심을 사선 안 되니 소년을 관리하는 일에도 언제나 충실했다. 빠져나가면 다시는 마주치지 않아도 될 테니 지금은 얼마든 공을 들일 수 있다. 꺼림칙한 소년의 나긋한 악의를 참아내며 여자는 매번 그렇게 자신을 달랬다.

그렇게, 여자가 탈출을 위한 준비를 거의 마치고 계획의 실행을 얼마 앞둔 때였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 연구소로 돌아온 여자는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얼어붙었다. 완전히 어지럽혀진 연구소 곳곳에 쓰러진 연구원이 보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렇게 판단한 때, 그녀의 시야에 표본이 들어왔다. 혼란 속에서 정복자처럼 웃는 사람. 도망치려는 연구원을 짓밟으며 표본은 나긋하게 말을 던졌다.

, 선생님 덕분이야. 선생님이 이것저것 손을 써둔 것을 기회로 여길 엎은 거니까.”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인가? 읽혔다는 것이나 이용당했다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을 게임 말처럼 쓸어버리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간단하고 처참한 살해가 계속되었다. 부상자의 움직임이 완전히 사라지자 표본은 여자에게로 다가왔다. 밀려드는 공포에 여자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니까 나도 선생님을 도와줄게.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은 거잖아?”

제대로 도망쳐야 하는데. 생각은 선명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빨리 움직이지 못한 때 결말은 정해졌다. 여자는 오래지 않아 붙잡혔고, 격통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게 끝나있었다. 연구소는 붕괴했고, 자료는 전부 사라졌으며, 온전하게 남은 것이라곤 망국에서 온 연구원 하나뿐. 괴상하게도, 여자가 바란 대로 이루어졌다. 침략자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그녀는 자유를 얻었다. 사고로 연구소의 모든 게 날아갔다고 알려졌을 테니, 자신도 죽은 체 슬그머니 모습을 숨기고 있으면 앞으로도 추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나, 자신이 관리하던 표본. 그 위험한 것까지 세상에 섞여들었을 게 분명하다.

악을 인간으로 빚어낸 것 같은 소년은 끝까지 제대로 안정되지 않았다. 누구도 그것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풀려난 소년은 다시 잡히지 않으려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겠지만, 세상을 위협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교묘하게, 스스로를 숨기고 주변을 파괴시킬지도 모른다. 어떤 악이든 저지를 수 있는 괴물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부터 잘못되었다. 통제할 수 없으면 사용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생각했어야 했는데. 정복자의 오만이 그런 재앙을 만들어냈다.

역시 그때 목을 졸랐어야 했던 건. 헛된 생각을 애써 떨쳐내며 여자는 연구소 근처를 벗어났다. 이미 손을 떠난 괴물에 매이기보다, 내내 생각했던 대로 소중한 사람을 찾아다니는 게 나을 것이다. 침략자가 납치했다는 동생과, 어쩌면 이곳에 숨어들었을지도 모를 친구를. 그로부터 몇 주를 아무런 단서도 없이 찾아다닌 끝에, 여자는 기적적으로 친구를 찾았다. 다만 그녀가 바란 방향으로는 아니었다. 그녀가 빠져나온 연구소와 몇몇 주요기관을 테러한 범인으로 체포된 친구를, 모든 방송에서 다루고 있었다.

그는 엑시즈 유민으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최근 여러 시설에 테러를 가한 자와 얼굴이 일치해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어지러웠다. 함정에 빠진 게 분명하지만, 저항군으로 움직인 것까지 확인되었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절망에 빠져, 친구가 갇힌 곳에 침입하는 것까지 생각하던 여자는 옷자락을 잡아끄는 손길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친구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한순간 치민 기쁨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친구가 여기 있을 리 없다. 그와 착각할 정도로 닮았다면, 그건.

무사했네, 선생님.”

자신과 함께 연구소를 빠져나왔을 병기 뿐. 거기서 문득 여자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여자는 표본을 붙잡고 사람이 오지 않을 곳으로 달렸다. 마침내 둘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여자가 물었다.

테러를 한 건, 너였지? 유토의 죄라는 건 전부 네가.”

침략자의 땅에서 친구의 존재를 알고서, 친구와 똑같은 얼굴로 그를 함정에 빠트릴 사람이라면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여자가 생각한 자라면 테러를 하는 것 따위 어렵지도 않았으리라.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인간이니까.

정답.”

명랑한 목소리에 여자는 소년을 밀어 쓰러트렸다. 소년이 몸을 일으키기 전 그의 몸에 올라탄 여자는 그대로 소년의 목을 감쌌다. 예전엔 왜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까. 뻔히 기회가 있었는데. 저것의 목에 손까지 뻗었는데.

, 이제 와서 죽이려고? 드디어 용기가 생겼어?”

표본이 깔깔댔다. 여자는 손을 떨면서도 시선을 소년의 목에 고정하고 있었다. 비웃는 대로 뒤늦게 용기를 낸 것인지 아직도 두려워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그래봤자 유토는 못 풀려나. 루리도 돌아오지 않아.”

아마 꼼짝없이 처형될 친구와, 납치당한 동생의 이름에 여자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못했다. 표본은 언제나 그녀를 쥐고 흔든다. 그녀의 어떤 발악도 무의미하다는 듯. 분풀이 삼아 목을 졸라도 저것은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무력감을 안겨줄 것이다.

말했잖아, 선생님. 후회할 거라고.”

여자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금빛 눈에 절망이 드리워졌다.

기회를 줄 때 나를 죽였어야지. 그러면 적어도 유토는 잃지 않았을 텐데.”

언제나 불길하게 느껴졌던 표본은, 정말로 그녀의 삶을 덮치는 재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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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