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는 자꾸만 추락하는 꿈을 꾸었다. 오랜 시간 지내온 성소에서 추락해 그대로 어둠에 잠기는 꿈을. 깨어나면 마주하는 것은 그와는 반대로, 지나치게 정돈된 공간과 환하게 빛나는 세상이었다. 그 평온한 풍경에 성녀는 도리어 멀미를 느낀다. 성소에서의 삶은 매일매일이 숨이 막혔다. 자신을 성녀로 받드는 사람도, 어린 날부터 강제로 입어온 성녀의 책임도, 성녀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돈한 공간도. 그녀에겐 언제나 도망치고 싶은 현실의 일부. 꿈속에서 하필 어둠에 떨어지는 것도 모든 것이 그대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무의식의 작용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예전엔 띄엄띄엄 꾸던 꿈이 오빠의 처형 이후로 잦아졌다. 그녀를 이곳에 묶어두던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하나뿐인 형제가 간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녀가 상부의 뜻을 어쩔 수 없이 따라온, 거의 유일한 이유. 자신이 저항하면 인질 격인 오빠에게 바로 해가 간다. 성녀인 자신에게는 손을 대지 못해도, 애초에 자신을 옥죄기 위해 잡아둔 형제야 얼마든지 부술 수 있었으니까. 그랬다면, 어차피 자신 때문에 발이 묶인 형제였다면 마지막까지 버텼으면 좋았을 텐데.
처형의 명분은 반역이었고, 반역이란 상부를 거역하고 동생을 탈출시키려 한 것. 처분을 각오하고 한 마지막 발악조차 실패로 돌아갔다. 여전히 성녀는 성소에 갇혀 지내며, 행동이 통제된 그녀를 위해 움직일 사람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얕은 희망이 바닥을 드러냈을 뿐이고, 어쩌면 좀 더 버틸 수 있었을 사람이 꺾였을 뿐. 그 무력한 종말에 성녀는 슬퍼하는 티도 낼 수 없었다. 반역자의 처형을 드러나게 슬퍼할 수 없어서였고, 감정을 소모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아서였다. 오랜 억압은 그녀의 삶을 말려버렸다.
그렇게 말라붙은 삶도 아마 오래 이어가지 못할 것이다. 성녀는 자신의 종말도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의 존재 가치는 자신을 세상에 바치는 것. 그것으로 세상은 모든 모순을 지워내고, 이상적인 세계로 거듭날 수 있다고 했다. 어린 날부터 ‘숭고한 희생’을 자랑스레 설명하던 자들을 성녀는 기억한다. 그러나 오랜 교육을 거쳐 그녀에게 남은 것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던지려는 희생심도 타고난 운명에 대한 체념도 아니었다. 정해진 이야기에 자신을 맞춰 넣으려는 자들에 대한 불쾌와 운명인 체 기다리는 결말에 대한 저항이었다.
결국, 성녀는 자신을 옭아매는 질서를 부수기를 소망했다. 물론, 소망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달라질 수 있다면 성녀는 진즉 이곳에서 빠져나갔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살았을 것이고, 제 행복을 추구했을 것이고, 세상이 어찌 되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성녀는 도망칠 길이 없어서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 했다. 어린 날 그들 남매의 탈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성녀는 겉으로는 결코 상부가 경계할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성녀가 무슨 생각으로 명령을 듣고 있는지. 그녀의 깊은 곳에 남은 감정은 무엇인지. 예정된 결말이 가까워지며 성녀가 무엇을 꾀하려 들지. 무거운 꿈에서 깨어나도 성녀는 그 얼굴에 불편함을 비추는 일이 없다. 자신을 희생시키는 의식을 준비한다는 간부를 앞에 두고도.
“리바이벌 제로를 실행하기 위한 준비를 거의 마쳤다고 합니다.”
“남은 건 동력을 확보하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진행 속도를 생각한다면 아마도 곧.”
“곧, 가동할 수 있다는 뜻이겠죠. 아크파이브를.”
“괜찮으십니까?”
성녀는 진행 상황에 대해 보고하는 간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성녀라는 위치는 간부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오는 사람마다 조심하긴 했으나 이번엔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럽다.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무엇이요?”
“프로페서께선 성녀님의 마음이 편치 못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형제의, 일 때문에.”
“쿠로사키 슌의 처형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성녀는 덤덤한 목소리로 오빠의 이야기를 입에 올린다. 이곳의 처형이란 제법 오싹해서, 사람의 영혼을 종잇조각에 가두는 것이었다. 영혼이 갇힌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껏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과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이 따로 남지 않는다는 것.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는 것으로 위안하기엔 너무 무겁고, 또 기괴한 것이었다. 오빠도 결국은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이곳에서 빠져나간다 해도, ‘살아나서’ 함께하진 못하리라.
“정확히는 죽은 것은 아니지만요. 그렇게 영혼을 짓이기면 돌아올 수 없으니까 죽은 것과 마찬가지일까.”
“그 건에 대해서는 유감이며 이해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로 처분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납득했으니 더 묻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오빠는 마지막 소식에서 참담한 어조로 전하고 있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한 사람의 힘으로는 거대한 질서를 바꿀 수 없었다. 알면서 시도했지만, 반복되는 좌절은 그를 망가뜨렸다. 하지만 타인의 힘을 빌린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이야기는 그것으로 끊겨 있었다. 그 후, 오빠가 무엇을 시도했는지 성녀는 안다. 먼 곳의 저항군과 내통해 동생을 구해주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오빠가 희망을 걸어본 자들은 허망하게 처단당했다. 그가 처형을 각오하고 내부 정보를 넘겨준 보람도 없이, 겨우 한 사람에게. 다소 감정적인 처리였다고 했다. 아마, 저항군을 꺾으려 간 소년의 사적인 감정 때문이었으리라. 오빠는 몇 년을, 소년의 감시역으로 있었다. 감시의 편의를 위해 친우를 연기했더니 아무래도 소년 쪽에서 정을 붙인 모양이었다. 복수심인지 배반감인지 모를 것으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짓밟았다고, 성녀는 전해 들었다.
감정적으로 동요한 사람이 있는 종말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나은 것일까. 아니면 마지막 희망을 짓밟혔다는 점에 더 비참해진 종말일까. 성녀는 알 수 없다. 다만 상부가 소년의 ‘유별스런 행동’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아무리 성녀가 겉으로 잘 따라주고 있었다 해도, 형제의 처형으로 돌아선다면 곤란하니까. 성녀는 냉소를 숨기고 간부의 불안을 끊어내기 위한 말을 던진다.
“세상을 위해 힘쓰라고, 이곳에 온 때부터 쭉 교육받았어요.”
그것은 상부에 억압당하고, 형제를 인질로 잡혀 살아오며 그들 남매가 터득한 것이었다. 자의와 감정이 잘려나간 체 하는 것. 오랜 ‘교육’과 위협에, 상부의 충실한 종이 된 척 하는 것.
“지금의 제겐 그것이 최우선입니다.”
“성녀님의 그런 마음을 듣는다면 프로페서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좋은 일이군요.”
“성녀님만 준비되어 있다면, 아카데미아가 걱정할 일은 없겠지요. 우리는 성녀님께 미래를 빚지는 셈이니까요.”
“미래라.”
성녀는 그 단어를 입에서 굴려보았다.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을 것이자, 이곳의 모두가 한껏 기대하는 것. 그녀를 결정된 종말로 몰아넣으려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켜볼 수 없는 것이 조금 아쉽네요.”
“대신 모두가 성녀님을 기억할 겁니다.”
강요된 희생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의미를 찾았다면 성녀도 자신의 삶이 타의에 얼룩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자신이 제물임을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둔한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희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성녀의 이름으로 꾸며주는 것에 취할 수 있었다면. 아니면 정말로, 요구받은 희생을 기쁘게 실행할 수 있을, 숭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성녀는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감정을 숨기고 감격스러운 체 웃었다. 간부가 물러갈 때까지, 그녀의 모습은 세상을 위해 희생을 각오한 성녀 그 자체였다.
*
중앙에 선 한 무리의 죄인이 차례로 빛에 휩싸였다. 빛이 허물어진 자리에 남는 것은 공포에 눌린 죄인도 생명이 떠난 육신도 아닌 카드. 영혼을 봉인한다는 처형 방식이었으나, 반역자로 지목당한 만큼 봉인만으로 끝내진 않는다. 영혼을 가둔다는 말대로 처형한 죄인의 모습이 새겨진 카드는 미래의 양분으로 쓰인다. 생명 에너지를 긁어내, 신세계를 위해 돌릴 장치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그 과정은 지배자에게 공개되어, 반역자는 최후까지 철저하게 농락당해야 했다. 죄인의 종말을 관람하는 간부들 사이에는 성녀도 있었다.
이곳에서 처형은 흔한 이벤트였다. 상부에 저항한 이들은 수많은 사람 앞에서 전시되어야 했기에. ‘죽음’의 무게는 갈수록 줄어들고 공포는 닳아간다. 나락으로 떨어질 날 없는 이들에게 반역자의 처형 따위는 자극적인 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환호 혹은 야유 속에서 게임처럼 끝나는 종말은 성녀도 자주 감상하는 사건.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보통 굳어있었다. 빛으로 허물어지는 반역자에게서 성녀는 자신의 미래를 본다. 이곳에 갇혀있는 이상 오래지 않아 맞닥뜨릴 종말을.
아마 자신은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빛도 되지 못하고 완전히 흩어져 세계에 흡수될 것이 뻔했다. 세상 곳곳에 그녀의 힘이 뻗칠지는 모르나, 그녀라는 인간은 무엇으로도 남지 못하리라. 그런 불쾌한 종말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그녀를 성녀로 받드는 이들이 성녀의 구원을 외치며 그녀를 제물로 던져 넣을 것이다. 그녀의 종말에 환호하며, 그녀 없는 세상을 그들만 누린다. 성녀의 붉은 눈이 읽어낸 미래란, 그런 것이었다.
성녀의 내부에서 넘실거리는 것을 모르고, 그녀를 둘러싼 이들은 전부 환호했다. 반역자의 처형이 전부 끝나면 새로운 처형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 건은 여느 처형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쫓기던 죄인이 아니라, 정점에서 한순간에 추락하는 자의 처형. 오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는 성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죄인이 끌려나오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군이 덤벼든 것은, 십대에 중책을 맡은 소년. 지금까지 상부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는 간부. 성녀에게는 오빠의 종말에 동요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소년은 상부에서 계획적으로 키워낸 괴물이었다. 반역자를 처리하고 질서를 굳히기에는 그런 악마가 있는 쪽이 편했다. 상부에선 소년을 잘 사용하기 위해 그를 심판자로 추켜세우며, 숭고한 사명을 끝없이 불어넣었으리라. 여태껏 그랬듯이 혼란을 잠재워야 할 때라면 모를까, 모든 게 해결된 세계에 악마가 남아있는 것은 오점. 가치가 소멸한 소년은 자신을 여기까지 올려준 상부를 위해 마지막을 바쳐야 했다. ‘괴물의 처단’으로서. 신세계를 열겠다며 상부에 누구보다도 충성했던 소년은 이제, 신세계의 방해물로 지목되어 제거당한다.
성녀의 의식을 앞두고 ‘악마’를 처리하는 것은 상부가 계획한 일이었으나 소년은 군이 달려들어 자신을 끌어내릴 때야 비로소 자신을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어린 나이에 수장의 총신이 되어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온 자가, 그러한 처분을 납득할 리가 없다. 바로 그 상부의 결정으로 종말을 맞는 것과 동시에 그동안의 삶이 낱낱이 부정당하는 것을 뜻하므로. 과연, 소년은 그대로 당하고 있지 않았다. 반역자를 처형할 때마다 세상에 나왔던 그의 무기가, 흉포한 드래곤이 어느 때보다도 난폭한 모습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무기를 빼앗기 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누구도 대응하지 못했다.
소년이 처음부터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에게 찬사를 받아온 것도 전부 그의 무시무시한 전투력 때문이었다. 무장한 소년은 다수의 병사로도 이기기 어렵다.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무섭게 공격하는 통에, 군이 소년을 제대로 몰아세우지 못하고 거리를 유지한 채 위협하고 있을 때였다. 성녀가 나섰다. 사납게 날뛰던 소년도 행동을 멈추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성녀만을 바라보았다. 성녀는 소년의 눈앞에까지 와서, 나직하게 말했다.
“이건 세계의 선택이에요.”
나와 같은 경우죠. 덧붙인 말은 속삭이듯 작아 아마 소년만이 들었을 것이다. 진심으로 꺼내는 말도 아니거니와, 준비한 답도 아니었다. 다만 이곳에서 성녀의 모든 말은 신성함을 얻는다. 성녀는 분노로 잔뜩 일그러졌던 소년의 얼굴이 서서히 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신의 희생은 분명 세상에 보탬이 될 겁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꺼낸 거짓말은, 그동안 상부를 믿어왔던 소년을 녹였다. 흉포한 울음을 내던 그의 무기가 걷혔다. 소년은 그대로, 비명도 없이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였다. 악마의 처형이 끝나자 성녀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성녀는 그 괴상한 환호가 꺼림칙해 성소로 돌아갔다.
“능숙하구나, 루리. 그 위험한 것을 잠재우다니.”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성녀가 나서 해결한 덕분에 위험인물을 처리했다 ─ 그런 보고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성녀를 칭찬한 이는 이곳의 수장. 그녀를 성녀로 지목해 운명을 고정시킨 자였다. 그를 통해 성녀가 되면서 그녀가 누구인지는 지워지고 말았는데, 우습게도 이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그였다. 성녀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틀어쥔 사람에게 건조한 답을 돌려주었다.
“충성심이 깊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유토는 계속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려 했지. 어차피 버릴 패였는데도.”
“조금, 연민하십니까.”
“아니. 감정은 없어. 놈의 처분은 처음부터 생각했던 일이야. 평화로운 때 괴물이 있으면 안 되지. 놈이 스스로 세상을 위해 죽는다 생각한다는 게 그나마 그것에게 다행스러운 일일까.”
“세상을 위한다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죠. 그의 죽음은 필요한 일이었잖습니까.”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 그렇다면 이곳의 죽음은 전부, 좋게 말하자면 세상을 위한 것이 되겠는데.”
“저처럼, 입니까.”
“너와는 경우가 다르지. 유토의 일은 해약을 제거한 것이고 너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것이니.”
그러나 이용당하다 얌전히 종말을 맞아야 한다는 점에서, 성녀에게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악마의 역할도 성녀의 이름도 상부가 사용하기 좋게 붙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데. 소년과 성녀는 왜 마지막까지 그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끝까지 복종해도 쓰임이 다하면 버림받고, 능력 때문에 귀한 대접을 받아도 쓰일 때가 되면 몸을 던져야 한다. 결국 종말에까지 순응한 소년이 하필 또래여서일까. 성녀의 머릿속엔 소년의 마지막이 계속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좀 더 발악할 수는 없었을까. 세상의 뜻 따위 거부할 수 없었을까. 불합리한 종말은, 너무 쉬운 순응은 성녀에게 다가오는 종말을 상기시킨다. 오빠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한 끝에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면, 소년은 부당한 처사에 성녀가 운명이란 이름을 붙여주자마자 저항을 버렸다. 상부에 맞설, 그게 아니어도 최소한 도망칠 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수장은 어쩐지 말이 없어진 성녀의 어깨를 감싸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놈을 시작으로 삼아 큼직한 위험은 미리 제거해둘 거다. 아카데미아에 문제는 남겨두지 않을 거야.”
그는 스스로, 성녀를 딸처럼 아낀다고 말하곤 했다. 성녀라는 위치로서가 아닌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는 것도 그 연장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뒤집으면, 딸과 같이 생각한다는 존재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셈.
“그러니 너는 곧 있을 리바이벌 제로에만 집중하면 돼.”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기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가요?”
“무슨 의미지?”
“미래를 제게 걸어볼 정도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큰 것인지. 단지 운 좋게 과분한 책임을 맡게 된 것인지. 언젠가부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너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네가 있기에 모든 걸 계획할 수 있었던 거야.”
젊은 날부터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았다는 사내는, 그래서 모든 것을 미래에 맞춘 이곳을 만들어냈다는 수장은 한껏 들떠서 이야기한다. 자신이 성녀에게 걸고 있는 기대를. 성녀를 찾아냈을 때의 감격을. 그리고 성녀만이 가졌다는 능력을. 이야기 속에서 성녀는 대체할 수 없는 희망이었고 중대한 장치였으나, 미래가 창창한 십대의 소녀는 아니었다. 성녀는 성녀이기에 한 인간으로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니 네가 중요할 수밖에.”
자신을 대체할 것이 있었으면 했던 성녀의 소망은 그 대화로 허물어졌다. 그것으로 체념하고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성녀는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빠의 반역이, 소년의 종말이, 그 허망한 실패가 오히려 그녀의 저항심에 불을 붙였다. 최소한, 계획을 좌절시키기라도 하고 싶었다. 정해진 운명에 발악하고 싶었다. 여태껏 바라는 역할대로 움직였다면, 결말을 앞두고는 각본을 거부하고 싶었다. 두 사람이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었다. 성녀는 그 날부터 하나의 가능성에 몰두했다. 어쩌면 모두의 계획을 비틀 수 있는 방법을.
성녀의 바람이야 어떻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그녀는 긴 시간 짊어져온 대로, 성녀를 충실히 연기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 의식을 실행할 날이 되었을 때.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가둬온 성소를 벗어나게 되었다. 신 앞에 바쳐지는 제물처럼 아름답게 치장한 성녀는, 묘하게도 엷은 웃음까지 걸치고 있었다.
*
수많은 반역자의 생명을 삼킨 장치는 섬칫한 빛을 냈다. 성녀는 자신이 뛰어들기로 한 장치를, 불쾌하게도 방주의 이름을 가진 기계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생명 에너지가 저것의 동력이 된다면, 그녀는 저 속에 녹아들어 모든 것을 재구성한다. 문제가 씻겨나가고 부족한 부분이 메워진 세계는, 모두가 바라는 대로 이상적인 세상이 될 것이다. 오랜 시간 수많은 노력과 희생과 생명을 긁어모아 만들어온 결말은 이제 실현만을 앞두고 있었다.
세상의 구원을 극적으로 담아내고 싶었던 것인지, 수장은 성녀가 뛰어들기 전의 순서를 몇 가지 준비해뒀다고 한다. 장치를 가동하는 감격스런 풍경부터 보여주고 이번의 의식이 갖는 의미를, 모두를 기다리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무대 뒤에서 대기하던 성녀는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을 핑계로 시종에게 말했다.
“이곳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싶어요.”
자리를 피하려는 성녀의 술수였으나, 여기까지 온 그녀라면 얌전히 따를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시종은 그녀를 놓아주었고, 성녀는 회장을 빠져나갔다. 걸으면 걸을수록, 성녀는 멀어졌다. 자신의 희생을 바라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짓이길 장치로부터, 자신을 지독하게 옭아매온 성녀의 이름으로부터. 마침내 성녀가 닿은 곳은 바깥이 보이는 성벽이었다. 이곳에 갇힌 이후로 그녀에게 허락된 가장 먼 곳. 다만 이제부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더 먼 곳으로, 도망칠 수 있다.
성녀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할 것이 남아있지 않기에 그랬다. 하나뿐인 형제를 남겨두었으면 그의 안전과 미래를 생각해 최후에는 순종했을까. 그러나 지켜야 할 것이 없는 미래는 얼마나 허망한지. 또한 혐오하는 이들의 미래란 얼마나 무의미한지. 성녀는 이런 미래를 위해 몸을 던질 이유를 찾지 못했다. 만일 운명을 배반한다면. 사랑하지 않는 세상을 버린다면. 그녀에게 가능성을 가르쳐준 말은, 이전에 수장에게 들었던 것이었다. 너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녀만 빠져도 모든 것이 어그러진다. 세상의 미래를 결정하는 건 그녀의 운명을 지배하려는 자가 아니라, 그녀의 의지.
성녀는 성벽 너머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세상을, 자신을 삼켜 완전해지려는 것을 눈에 담는다. 이곳에 갇힌 이래로 성녀는 언제나 저곳을 갈망했다. 지금에야말로, 허공에 발을 내딛어 도망치자. 이 화려한 감옥으로부터. 성녀라는 삶으로부터. 그것으로 모두가 강요한 미래를 영영 미완으로 만들자. 성녀는 꿈에서처럼 추락했다. 이 세상에 구원은 없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슌] 녹아내린 환상 (0) | 2017.12.02 |
---|---|
[사장슌ts] 모조 화석 (0) | 2017.11.19 |
[유야+슌] The last show (0) | 2017.09.19 |
[레이지+슌] 손 안의 먹이 (0) | 2017.09.06 |
[반역조] 질투의 짐승 (0) | 2017.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