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야+슌] The last show

2017. 9. 19. 18:42 from 02

 

도시는 잡동사니처럼 너저분했다. 침략으로 처참하게 무너진 것을 복구하지 못해 잔해더미로 남았기 때문이다. 복구보다 그럭저럭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일 정도였다. 세상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사람은 살아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청년은 뼈대만 남은 건물에 기대, 광장이었던 곳에 엉성하게 마련된 무대를 지켜보았다. 잿빛으로 물든 풍경에서 그나마 화사한 색채를 입은 소년이 막 공연을 시작한 참이었다.

소년은 이곳 사람은 아니다. 바로 몇 달 전까지 이곳의 존재도 알지 못했을 정도로 먼 세계의 사람이, 굳이 이곳을 찾았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다며. 분명, 전쟁은 끝났다. 침략자에게 쫓기는 삶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했던 날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도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에게 화려한 공연이 의미가 있는가. 전쟁에서 겨우 벗어난 청년은 회의적이었지만 특별히 소년을 말리는 일은 없다.

어차피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었다. 엔터테이너를 꿈꾼 사람이었던 만큼 공연에 대한 소년의 열정은 비대했다. 게다가 어쩌면 그가 공연을 택하는 이유는. 청년은 소년이 불러낸 곡예사가 화려한 기예를 펼치는 것을 눈에 담는다. 소년이 사랑하는 곡예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을 해하는 일 없다. 공연에 동원되는 모든 것은 본래 게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상대를 쓰러트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음에도.

과거, 소년이 공연을 위해 사용하는 게임이 전쟁의 수단으로 왜곡된 일이 있었다. 게임을 생생하게 즐기기 위해 도입한 실체화 시스템을 무기로 개조한 결과였다. 침략자는 총칼 대신 실체화한 괴물로 무장하고 이국을 짓밟았다. 그에 희생된 곳이 바로 이곳. 그 악랄한 죄를, 공연으로 모두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던 소년이 납득할 수 있을 리 없다. 왜곡된 것을 바로잡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대로, 공연이 공연의 가치를 갖도록. 공연의 수단에 짓밟혔던 이 도시에서.

혹은 죄책감일까. 의도한 것은 아니나, 소년은 전쟁의 원인과 얽힌 사람이었다. 물론 전쟁의 시작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도리어 전쟁에 휩쓸렸음에도 그는 전쟁의 뿌리를 계속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만일 정말로 죄책감을 안고 있다면, 그래서 전쟁에 그을린 이곳에 공연을 하는 것이라면 말릴 수는 없다. 어느 쪽이건 청년은 소년이 이곳에서 공연을 하는 것을 의무로 여긴다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 이상은, 동조하지 않는 자신이 생각할 영역이 아니었다.

오늘의 공연은 괜찮았을까?”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소년이 청년에게 물었다. 소년과는 좀 떨어진 거리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었던 청년인데 무대에 있을 때 발견한 모양이었다. 소년은 아직 공연의 열기가 남아있는지 상기된 얼굴이었지만, 별다른 관심이 없는 청년이 돌려줄 수 있는 말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나쁘지는 않지.”

그것뿐?”

그 이상 무슨 말을 하길 바라.”

하긴, 쿠로사키는 칭찬에 인색했던가.”

적당히 해석한 소년은 웃었다. 청년은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소년의 명랑함이 때로 불안하다. 언제나 반짝이는 엔터테이너란 소년이 지향하는 모습인 동시에 그의 방어막이다. 지금의 모습 아래 무엇이 곪아가고 있을지 누구도 모른다.

너는 그것으로 괜찮은 건가.”

뭐가?”

전쟁에 휘말린 자들에게 엔터메를 하는 것으로 괜찮으냐고.”

전쟁에 황폐해진 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게 나빠?”

그런 뜻이 아닌 걸 알 텐데.”

분명히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

소년은 카드 뭉치를 꺼내 청년의 눈앞에서 화려하게 펼쳤다. 각각의 카드에 들어있는 것은 소년의 무대에서 주역이 되는 곡예사. 혹은 여러 깜짝 연출. 일부는 무대에서 어울려주는 상대를 공략하는 함정.

데니스에게 배웠어. 아직 능숙하진 못하지만. 능숙해지면 마술이라도 하나 곁들일까?”

융합과 엑시즈를 오가며 듀얼을 하고 있지. 엑시즈야 황폐해진 자들을 돕는 일이라 하고, 융합은 무슨 생각인데.”

쿠로사키, 내가 바라는 건 말이야. ‘바람직한결말이야.”

소년은 펼쳐진 카드 중 하나를 고르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불꽃으로 바꾼다. 카드 속 환상은 현실만큼이나 생생하다.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안전장치가 있음에도 섬뜩하다.

전쟁이 끝난 후에 무엇이 와야 하는지 알잖아.”

속 좋은 말이나 하는군.”

청년은 뻔한 말에 한숨을 쉬며 소년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으므로 감흥은 없다.

그보다, 나를 도와주지 않을래?”

또 그 소린가.”

못 할 것도 없잖아. 왜 매번 거절해?”

흥미 없으니까.”

네게도 즐거운 경험이 될 거야.”

소년의 부탁이란 간단했다. 무대를 함께하는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소년의 공연은 본래 게임에서 출발한 것이고, 게임의 룰도 상대와 겨루는 것이니 함께 서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청년 또한 어려서부터 게임을 익힌 데다, 전쟁이 일어나고는 전투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사람이니 파트너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청년은, 제법 꾸준한 부탁을 매번 끊어내고 있었다.

청년으로선 달가울 이유가 없었다. 청년은 어쨌든 전쟁의 수단으로 쓰인 적 있었던 것을 다시 게임으로 보기 힘들었다. ‘오염된 것을 원래대로 돌린다는 말에 넘어가기에는 전쟁으로 그가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고향은 완전히 붕괴하고, 많은 사람이 돌아오지 못했으며, 가장 소중했던 사람 두 명은 영영 흩어졌다. 전쟁이 끝났다 해도 짓밟힌 것은 짓밟힌 것이다. 청년은 주변에서, 더는 게임을 잡지 못하겠다는 사람을 이미 몇이나 보았다.

두 번째로 거슬리는 것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봉합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폐허에 평화를 가져오겠다고 말하는 자들은 이곳 사람이 아니다. 전쟁을 가져온 침략자나, 전쟁의 불똥이 튀지 않았던 이국의 사람. 소년도 본래는 전쟁이 스미지 않은 곳의 사람이었다. 전쟁을 알게 되자 끝내기 위해 전장에 왔을 뿐. 짓밟히지 않은 사람은 너무 쉽게 이상적인 결말을 생각한다. 완전치유를 믿고 단숨에 평화가 찾아들 수 있을 거라 자신한다. 그리고 그 완전한 결말을 위해, 전쟁의 모든 것을 그저 덮어버리는 것이다. 화해나 미래 운운하며 즐거운 일을 들이미는 것으로.

공연을 하는 것이야 개인의 자유니 말리지는 않지만, 그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다. 청년의 주장이야 분명했다. 그렇게 선을 긋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소년은 청년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에 집착한다. 무슨 이유인지 물어도 네가 가장 적합하니까라는, 의미 모를 답변만 돌아올 뿐.

[계속 나와 함께 다녀주면서 왜 같이 하는 건 안 돼?]

[다른 파트너를 찾아.]

[네가 아니면 안 돼. 그렇게 정해뒀어.]

[나는 네 듀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데.]

[엔터메를 해주길 바라는 게 아냐. 그냥 쿠로사키면 되는 거야.]

[내가 네 듀얼에서 뭐라도 하게 되나?]

[아주 중요한 역할이야.]

그 전에 소년이 이렇게나 상대에 관심을 쏟은 적이 있었던가? 소년과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지만, 그 사이 있었던 공연 중에선 그런 일은 없었다. 어떤 상대와 무대에 오르든 최선을 다해 어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모두를 만족시키는 무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 소년이었다. 심지어 청년에 대해서도 이전까지는 상대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 시점부터 매달린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전쟁이 끝나고 전쟁이 닿은 곳에 공연을 다니게 되었을 때부터. 전쟁의 결말이 소년에게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라 추측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청년으로선 알 수 없다.

그리고 소년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도. 만일 평화의 증거로 전쟁의 피해자인 자신을 무대에 올려 공연을 함께하려 하는 것이라면 청년은 그때부터 소년을 혐오할 수 있었다. 소년이 그만큼 악랄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평화에 대한 소년의 열망은 때로 섬뜩한 데가 있었다.

한 번이면 돼. 쿠로사키.”

한 번?”

. 그 다음엔 나와 어울려주지 않아도 좋아. 그러니까.”

소년의 붉은 눈에 간절함이 보였다. 돌아서는 것으로 외면하려던 순간, 그 얼굴에 언뜻 익숙한 사람이 겹쳐진다. 소년과 빼닮은 사람. 이제는 어디에도 없는 청년의 친우.

마음대로 해.”

어차피 소년은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계속 조를 것이 뻔했다. 적당히 들어줘서 더 시달리지 않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한순간 흔들린 것을 그렇게 합리화하며 청년은 반쯤은 허락하고 말았다.

그럼, 우선 이곳에서의 쇼를 끝내고 아카데미아에 돌아가면 하자.”

의외로 늦게 잡는군.”

아카데미아에도 가기로 약속했으니까. ‘화해공연은 쿠로사키와 하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야.”

마지막 공연으로 하려고?”

쿠로사키와의 듀얼은, 마지막이어야 해.”

단정적인 말이지만 언제나처럼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소년의 공연에 언제나 회의감을 품고 있던 청년이었다.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것으로도 반가웠다. 청년은 별다른 의문 없이 수용하고 이번에야말로 돌아섰다. 앙상한 폐허를 벗어나, 살아남은 사람들 틈에 섞이기 위해서였다.


*

 

청년은 그을린 건물로 들어섰다. 군데군데 낡았지만 심각하게 훼손되진 않아 생존자들에게는 그나마 아늑한 공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생존자들이 머물게 된 곳. 교육시설로 사용했던 건물이라곤 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사용이 끝난 곳이었지만 전쟁이 그 낡아빠진 건물에 생명을 부여했다. 본래부터 다수를 위해 설계된 건물인 것이 행운이었다. 엉켜 지내는 것이야 난민캠프가 형성된 때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청년은 자연스레 사람들 틈에 섞여들었다.

건물에 남아있던 사물함은 개인의 물품을 정리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물론 청년에게도 제 몫의 사물함이 있었지만, 그의 사물함은 거의 언제나 봉인되어 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디스크 두 개. 그러나 사물함에 넣어둔 것 중 어느 쪽도 그가 쓰는 것은 아니다. 예비로 둔 것이지만 사용할 날이 올지도 의문이었다. 본래는 게임을 위해 설계된 것이었으나 게임이 전쟁의 수단으로 변질된 때부터 청년은 디스크를 전투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과거부터 그가 사용해온 디스크도 물론 전투용이었지만, 사물함 속의 저것들은 그와는 급이 다르다.

침략자에게 쫓기기만 할 때는 누구도 무장하지 못했다. 적이 걸어오는 전투에 휘말리면 디스크를 사용해 일단은 상대하거나 죽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한다고 해도 패하면 죽음이었다. 적의 디스크는 실체화 시스템을 악용해 상대에게 주는 데미지까지 실체화하고 말았으니까. 그런, 답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거듭하던 자들은 결국 적을 막아내는 게 아니라 싸워 쓰러트릴 방법을 생각해냈다. 적과 같은 무장을 하는 것이었다.

운 좋게 적에게 승리한 자가 적의 디스크를 손에 넣은 것이 시작이었다. 전쟁의 피해자들은 분석을 거쳐, 적과 같은 기술을 본인들의 디스크에도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부터 쫓기는 이들도 자기방어 이상의 공격을 하는 게 가능해졌다. 훈련받은 전사로 구성된 침략군에 비하면 전투력이 한참 떨어졌지만, 무장한 침략자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과 부족해도 반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청년의 디스크는 전쟁 중 실체화 기능이 삭제된 상태였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이미 삭제된 이상 다시 집어넣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물함에 넣어둔 것들은. 청년은 사용한 적 없는 디스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사물함을 닫았다. 저것들은 달랐다. 전쟁이 끝난 후 손을 대, 과거 무기로 사용했던 디스크처럼 개조한 상태. , 얼마든 타자를 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쿠로사키, 시간 있어?”

귀에 익은 목소리에 청년은 돌아보았다. 짐작한 대로, 소년이 서 있었다.

시간이야 있지만, 무슨 일이지.”

의논을 좀 했으면 해서.”

우리가 의논할 일이 있었던가?”

파트너가 되어주기로 했으니까 의논할 일이 생겼지. 우리 공연에 대한 건데.”

끈질긴 부탁을 들어주자마자 바로 공연 진행 계획에까지 생각이 뛴 모양이었다. 달갑잖은 것을 빨리 해치우기 위해 얽히는 것에 불과한데 이렇게 의욕적으로 달려들어서야 곤란했다. 게다가 그들이 공연을 펼칠 관객은 이곳을 덮쳤던 침략자. 청년으로선 거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카데미아 앞에서의 듀얼에 그렇게 공을 들이고 싶지 않아.”

복수심 같은 건 이번 듀얼에서 끝내자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해소하지도 못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청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목 끝까지 치미는 말을 참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보일 텐데도, 소년은 말을 멈추지 않는다.

화났어? 물론 화날 수도 있다곤 생각해. 하지만 나는 너를 돕고 싶은 거야.”

돕고 싶다면 그런 방식이나 집어치우지 그래.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

보통 이렇게까지 날카롭게 말하지는 않는다. 생각은 잘 맞지 않는다 해도 소년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의 행동에 깔린 것은 기본적으로는 선의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삐걱거리던 것을 참아오던 청년이었으나, 내내 거슬리던 소년의 사상에 마침내 폭발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디스크를 전투용으로 개조한 것은 복수심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났다 해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던 사람이 간단히 침략자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비참하게 죽어도 저주할 수밖에 없는 족속인데, 여러 사정이 겹쳐 아무런 처벌도 없이 일상으로 돌아간 침략자가 청년은 증오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디에도 표출할 수 없는 감정을, 사용하지 않는 무기를 만드는 것으로 겨우 조금 삭이는 청년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고결한 신념을 가진 자라면 침략자가 싸움을 멈춘 순간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청년의 누이는 전장에서도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으므로, 그녀라면 용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청년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해를 입힌 자를 증오하고, 복수를 꿈꾸는 것은 짓밟힌 사람이라면 놀랍지도 않은 모습이다. 그렇게 자연스런 감정에 젖었을 뿐인데. 개조한 무기를 가지고 침략자의 나라에 들어가 적을 쓰러트리지 않는 것은 복수심이 걷혀서가 아니라 단지 세상에 다시 싸움을 가져올 수 없어서인데.

네가 아카데미아에 당한 것은 아무렇지도 않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 아카데미아에서 동료를 잃었던 일? 아니면, 내가 악마로 몰렸던 일?”

소년이 청년 앞에서 이전의 일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 동료가 희생된 일과, 자신이 악마의 이름으로 타도당할 뻔한 일. 하나하나 무거운 일이었지만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가볍다. 소년은 모든 것에 이상할 정도로 관대하다. 마땅히 미워할 법한 것도 너무 쉽게 용서하고 만다. 그것은 분명, 일반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소년의 삶도 청년의 삶만큼이나 처참한 것이었다. 청년의 삶이 모든 것을 잃도록 설계된 삶이었다면 소년의 삶은 무엇을 하든 부정당하는 삶이었다. 오랫동안 부당한 비난에 시달리면서도 소년은 사람들을 설득시키면 된다고 믿었다. 옳은 것을 밀고 나가며 노력하면 언젠가는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비로소 그의 본래 실력이, 신념이 인정받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전쟁을 일으킨 측에서 그를 악마로 몰아세웠다. 과거 세상을 위협한 악마의 환생체라는 이유로.

그것으로 세상에 대한 사랑도, 사람에 대한 믿음도,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는 순수한 뜻도 단숨에 부정당했다. 소년은 그대로 악마로 처단당할 위기에 놓였다. 기적적으로 구원받긴 했지만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소년은 그런 일을 간단히 넘길 수 있는가. 부정당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것인가. 아니면 좋은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다는 욕구가 그의 감정을 누르고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괴상한 길이다.

아카데미아는 죄를 지었지. 전쟁을 일으킨 일과 죄 없는 자들을 희생시킨 것은 잊어선 안 돼. 그러니까 바람직한 결말이 필요한 거고.”

그 바람직한 결말이란 게 뭔데?”

글쎄. 우리가 바라는 것?”

계속 물어도 명확하게 대답해주는 일이 없다. 적당히 피해가려고만 한다.

물론 네게 의견을 들은 적은 없지만, 나와 같을 거라고 생각해.”

어떻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연은 이번으로 끝난다. 소년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도 이것으로 끝낼 것이다. 그동안, 너무 무거운 일을 겪은 소년이 신경이 쓰여 계속 소년과 함께했던 청년이지만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위험한 일은 없을 듯했다. 그렇다면 완전한 타인인 자신이 더 붙어있을 이유는 없다. 그렇게 판단을 마친 청년은 상황을 끝내기로 한다.

하기로 한 일이니까, 빨리 의견을 맞추고 치우자고.”

바라던 답이야.”

소년은 바로 청년을 잡아끌었다. 이런 데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며 사람이 가지 않는 폐허로 청년을 데려가는 소년의 목소리는 분명 들떠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을, 청년은 시간만 나면 찾아오는 소년에게 붙잡혀 있어야만 했다. 마지막 공연이어서일까. 소년의 열정은 보통 때의 몇 배는 되는 듯했다. 이미 전투에 적응한 청년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야기였지만 소년이 의욕적으로 내는 의견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다만 청년이 자주 던지는 의문은 왜 이토록 계획이 상세하냐는 것이었다. 전반적인 방향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소년은 거의 모든 것을 정해놓으려 들었다. 어디에서 어떤 연출을 할 것인지에, 심지어 청년이 어느 시점에 어떤 역할로 등장할지까지.

완벽해야 하니까.”

소년이 내세우는 근거는 간단했다.

마지막이니까, 모든 게 완벽해야 해.”

하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짜둬서야,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렇게 진행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는걸.”

말릴 수 있을 고집이 아니었다. 청년은 자신의 역할까지 소년이 정하는 게 달갑지는 않았으나 자신에겐 맞지도 않는 공연을 억지로 생각하는 것 또한 피곤한 일이었으므로, 어느 순간부턴 조용히 따르게 되었다.

각본을 완성한 지 오래지 않아 그곳에서의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이방인에 정이 든 사람들이 떠나는 소년에게 손을 흔들 때 청년은 얼마 없는 짐을 챙겨 소년에게 따라붙었다.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고향에서 지내는 것은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해, 어디로든 도망칠 생각이었다.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새롭게 시작한다. 그게 미래에 대한 유일한 계획이었다.

그렇게 공연 당일. 무대에 오르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던 청년은 멈칫했다. 디스크가, 없다. 복수심으로 개조했던 디스크가 두 개 다 사라져 있었다. 자신이 처분한 것은 아니고, 타인이 손을 댈 이유도 없는 물건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일반적인 디스크나 다름없지만 본질은 과거 침략자가 전쟁용으로 썼던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손에 잘못 들어간다면, 사용하는 중에 문제가. 만일의 위험을 걱정하며 디스크를 찾는 청년의 등에 소년의 목소리가 꽂혔다.

뭘 그렇게 급하게 찾아?”

듀얼디스크가.”

듀얼디스크라면, 이것?”

반사적으로 돌아본 청년은 순간 말을 잃었다. 자신이 찾던 디스크가 소년에게 있었다. 하나는 왼팔에 차고, 하나는 오른손에 든 소년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오늘 좀 쓸게. , 너도 이걸 쓰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청년에게 던지며, 소년은 가벼이 말했다. 엉겁결에 받아든 청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받아친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그게 뭔지 알기나 해?”

데미지 실체화 기능이 들어간 듀얼디스크지. 오늘의 공연에 필요할 것 같아서.”

무엇을 하려고?”

조금, 생생한 공연이 필요해.”

은근한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열기가 배어있다. 소년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 때문에 흥분해 있는지 청년은 모른다. 꾸역꾸역 솟아오르던 여러 의문은 서서히 불안에 물든다. 청년의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느긋하게 덧붙인다.

어차피 그것으로밖에 못 할 거야. 네 원래 디스크는 숨겨뒀거든. 공연도 얼마 남지 않았고, 따라줄 거지?”

제 할 말만 남기고 빠르게 무대 쪽으로 사라지는 소년에게 더 던질 말도 없었다. 청년은 얼마간 디스크를 내려다보다가, 왼팔에 장착했다. 지금은 어찌할 길이 없다. 소년의 말을 따라주다가 불안한 낌새가 보이면 적당히 대응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렇게 불안을 누르고 소년의 계획대로 무대로 향하는 순간까지 청년은 알지 못했다. 소년이 무엇을 준비했는지. 그리고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소년의 계획대로 무대 뒤편에 몸을 숨긴 채, 청년은 당당하게 무대 중앙으로 나아가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

 

소년은 관객 앞에 공손히 인사했다. 모두를 즐겁게 하는 것이 목표인 엔터테이너로서, 무대가 시작하기 전 관객에게 나름의 예를 갖추는 것은 필수. 박수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소년은 자신에게 고정된 시선만으로도 기뻐하며 무대를 열었다. 그의 무대는 화려한 쇼로 요약할 수 있다. 눈을 뗄 수 없이, 순간순간 기대되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 그래서 마지막 순간 모두가 절로 환호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한 무대를 위해 소년이 준비해두는 것은 서커스를 연상시키는 곡예사들. 가장 먼저 무대에 올라온 곡예사는 놀라운 기예로 관심을 집중시킨다.

물론 소년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계속 새로운 곡예사를 올려 지루해지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스스로 곡예사들 사이에 끼여 아슬아슬한 볼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시선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소년은 여전히 머리로는 조금 더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일방적인 무대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관객과도 섞여야 한다. 관객과 교감하기 위해서, 그들을 무대의 참여자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공연이 중반쯤 되었을 때 소년은 객석으로 곡예사를 보낸다. 손을 잡혀 무대에 올라온 관객은 얼떨떨한 얼굴.

다음 순간 관객의 몸을 불의 고리가 옥죈다. 소년의 공연에 관객이 처음으로 터트린 소리는, 비명. 다소 격한 환호에 자극받은 청년은 관객을 계속 무대로 끌어올렸고, 그들을 하나하나 새로운 볼거리로 바꾸었다. 폭죽처럼 터지는 인간. 끌어올려진 하늘에서 아름답게 추락하는 인간. 거세지는 비명이 소년의 귀를 때린다. 엔터테이너의 얼굴에 번지는 것은 만족. 운 좋게 남은 자들은 도망치려 했으나 이내 가로막힌다. 갑자기 생겨난 벽이 그들을 막아선 탓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 마지막까지, 지켜봐주세요.”

겁에 질린 사람들을 달래듯, 소년의 목소리는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관객을 위해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뻔한데도. 벗어나지 못하게 사람을 가둬놓고 제멋대로 희생시키는 일에 끝까지 공연의 틀을 가져간다. 천진한 웃음만 보면 순진한 것인지 악랄한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지만, 어느 쪽이든 그가 섬뜩한 인간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무대 뒤에선 소년의 이름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 소년이 일러둔 대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파트너일 것이다. 소년은 거듭되는 부름을 일부러 무시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쪽에 시선을 둔다.

사카키, 유우야?”

청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공연에 대해서라면 소년과 수없이 이야기했지만 이런 내용은 없었다. ‘관객을 불러내어 함께한다는 부분이야 있었지만 정말 이런 식이었던가?

왜 그래, 쿠로사키?”

이런 말은 없었잖아.”

그래서 싫어?”

말문이 막힌다. 이런 결말을 바라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처참한 불행을 겪은 청년은 자신에게 가혹했던 세상을 미워했고 침략자가 가장 비참하게 죽길 바랐다. 그런 점에서 소년의 잔학한 공연은 자신의 소망을 대신 실현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청년이 답하지 못하고 멈칫하자 소년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설렘과 기대가 아닌 공포. 언제 자신이 새로운 희생자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어붙은 사람들을 소년은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무작위로 희생자를 고르고, 누구도 생각지 못한 볼거리를 만든다. 그야말로 시선을 뗄 수 없는 공연이 후반부에 다다랐을 때, 무대에 올라간 이들로 인해 객석은 듬성듬성했다.

전쟁이 끝나고 생각했어. 이 세상에 바람직한 결말이란 무엇인가.”

무대를 우아하게 지휘하며 소년은 말했다.

그리고 결론을 얻었지. 세상의 종말이라고. 물론 그건 하나의 공연이어야 해. 가장 아름답고 예술적인.”

그것이 지금의 공연일 것이다. 소년의 마지막 공연. 청년은 지금 무대에 이루어지는 것이 정말로 소년에게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쟁에 휩싸인 자들을 향한 공연의 마지막이 아닌, 엔터테이너로서의 마지막 공연. 소년은 이 공연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으므로.

비로소 청년은 떠올린다. 바람직한 결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고 했던가. 소년은 자신에게 부당했던 세상을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돌려주어야 할 것을 오래도록 고민했을 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를 부정했다면, 그는 자신을 농락한 세상을 뒤집는다. 소년은 틀리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청년이 바라던 결말이다. 세상에 대한 완전한 복수. 공연의 형태를 택하는 것은 지극히 소년다운 방식인 동시에 세상에 대한 냉소다. 종말은 한갓 공연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이런 것을 계획하고 있었으니 소년이 청년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만큼이나 처참하게 세상에 농락당한 것은 청년이니까. 그의 삶 역시 부당하게 설계되어 있었으니까. 처음엔 당혹감이 비쳤던 청년의 얼굴은 점차 열기에 젖는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잔학한 공연이 그를 들뜨게 했다.

쿠로사키. 나는, ‘모두를 위한 공연을 생각하지 않은 적 없어.”

처음부터 소년이 바라보는 것은 세상이었다. 세상의 모두를 관객으로 삼아, 모든 사람을 환호하게 한다. 그것이 어릴 적부터 소년이 가져온 꿈.

지금이야말로, 내 꿈이 이뤄지는 거야. 이제야 모두가 내게 환호해.”

소년 앞에서 비명은 환호로 둔갑하고, 공포 섞인 시선은 애정으로 바뀐다. 소년은 관객을 말 그대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토록 공연에 힘을 쏟아왔음에도, 이 정도로 뜨거운 관심은 처음이다. 그것이 소년에게 최고의 만족을 안겨주었다.

마지막은, 제 파트너와 함께!”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자신을 가리키는 소년에, 청년은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의 역할은 소년이 잘 꾸민 무대를 결말로 이끄는 것. 청년은 가만히 손가락을 움직여, 무대가 시작할 때부터 하늘을 빙빙 돌던 기계 새를 지휘했다. 좀처럼 낮게 나는 일 없던 기계 새는 저 높은 곳에서 아찔하게 급강하했고, 그와 함께 세상에 재앙을 떨어트렸다. 복수를 위해 무기로 개조한 장치는 환상 속 파멸을 실제로 바꾼다.

청년은 얌전히 눈부신 파괴를 눈에 담는다. 세상의 희망이 무참하게 부서지는 순간, 모든 것이 빛에 휩싸이는 모습을. 신벌과도 같은 파멸은 엄숙하기보다 아름답다.

두 번은 볼 수 없을, 최고의 피날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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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