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유토] 역작

2015. 8. 2. 13:26 from 02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그려낸다는 찬사를 받는 젊은 화가는 실상 추하고 비틀린 것을 사랑하였다. 고통에 짓눌려 일그러지는 얼굴이나 불구자의 뒤틀린 몸, 병으로 썩어드는 환부 같은 것이야말로 그가 진정 사랑하여 캔버스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 기묘한 취향을, 세인이 알 리 없었다. 그가 주로 그려내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감히 바랄 수도 없는 고귀한 것들이었으므로. 거룩한 성자나 아름다운 이상향을 즐겨 그리는 화가가 그와는 상반되는 세상의 추한 단면에 몰두한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야 아름다운 것만을 보이는 화가였으나, 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솔직해졌다. 그 누구에게도 개방하지 않는 작업실에는 그가 사랑하는 것을 상징하는 인물이 언제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가와 비슷한 연배의 청년이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는 깊은 자상이 흉측하게 새겨져 있었으며, 오른팔은 화상으로 한껏 뭉개져 있었다. 등뼈마저 괴상하게 뒤틀려, 청년은 마치 신벌이라도 받은 것처럼 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추함이야말로 화가가 사랑하는 것. 청년은 화가가 가장 몰두하는 모델이었다.

괴상한 것은, 세인에게 온갖 찬사를 받는 젊은 화가와 추한 모델이 쌍둥이처럼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우연이라기엔 정말 기묘한 일이었으나, 화가는 그 기괴한 사실조차 즐기는 것 같았다. 저와 같은 이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점 때문일까. 화가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모델에게 다가가 억지로 얼굴을 들어 저와 마주보게 했다. 모델의 회색 눈과 화가의 보라색 눈이 일순 서로를 비추었으나, 모델은 이내 고개를 돌려 화가를 외면하고 말았다.

그들이 함께 작업한 것도 몇 년째, 서로에게 익숙해질 법도 했으나 모델은 자주 화가를 외면했다. 더 가까워질 것도 더 멀어질 것도 없이 그저 화가와 모델의 관계만을 유지하려 들었다. 화가는 그러한 경계에 대해 특별히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가 모델에게 바라는 것은 모델로서의 역할일 뿐.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림에 담겨주면 그만이었다. 여느 때처럼 모델에게 가볍게 손짓하자, 모델은 학습된 동물처럼 옷을 벗었다.

청년의 가무잡잡한 피부에는 참혹한 상처가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청년이 지금껏 감내해온 모든 고난을 보여주는 증거이리라. 화가는 그 흉측한 몸을 볼 때마다 새삼 청년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게 된다. 그때 화가는 자신을 만족시킬 작품을 위한 모델을 찾으려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담고자 하는 것은 고통에 잠긴 인간’, 화가는 인간의 가장 참담한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 때문에 그가 향하는 곳은 가장 비천하고 무질서한 곳. 지옥이라는 지옥은 전부 헤매던 화가는 마침내 어느 빈민가에서 제가 원하던 모델을 찾아냈다.

빈민가에 들어선 화가는 뼈대만 남은 건물 입구에 앉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끝이 해진 코트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으나 몸의 비정상적인 뒤틀림마저 가리진 못했다. 슬며시 다가가니, 저와 비슷한 연배의 청년이었다. 비슷한 건 나이만이 아니었다. 얼굴도 빼닮아있었다. 남루한 행색에 몸조차 성치 않은 청년을 보면, 고통에 짓눌린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건 흥미로운데. 화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살아있음에도 망자를 연상시키는 청년이었다. 알맹이가 썩어버려 껍질만 남은 조개처럼. 가무잡잡한 얼굴에는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으며, 회색 눈은 빛을 잃은 지 오래.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었으나 눈에 새겨지는 그 어떤 것에도 반응하는 일이 없었다. 그 지독한 무기력함에 흥미가 일어, 화가는 청년을 관찰하기로 했다. 팔짱을 낀 채 청년의 시선이 닿을 곳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으나, 청년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양 멀거니 제 자리에 붙박여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지켜보던 화가가 슬슬 지루해져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낄낄대며 청년 앞으로 향하더니 하나가 손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 총성을 냈다. 다른 아이는 그에 맞춰 죽은 것처럼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미동조차 없던 청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그 얼굴에 순간 살의가 드리워지는 것을, 화가는 보았다. 그리고 주변의 돌을 집어 들어 아이를 내리치려는 것도.

그 순간 한 사내가 달려들어 청년을 떼어내고 아이들을 쫓아냈다. 청년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사내에게까지 달려들었으나 사내가 우악스레 손목을 잡아 비트는 바람에 바닥에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은 건드리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혀를 끌끌 차며 말하는 사내에게 화가가 물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합니까?”

전장에서 오래 굴렀던 모양인데 용케 목숨은 건졌지만 불구가 된 데다 정신까지 오락가락합디다.”

전쟁의 후유증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전쟁이 막 끝났을 때는 목숨이라도 건지면 다행이라고들 했지만 저래서야…….”

아까 보니 총소리에 반응하는 것 같던데.”

평소에는 유령처럼 멍하니 앉아있다가도 전쟁을 연상시키는 것만 보면 무조건 덤벼들어요. 눈앞의 사람이 적인지 민간인인지 분간을 못해.”

전쟁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이군요.”

전장에서 빠져나왔다고 바로 말짱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벌써 몇 년이나 지났으니 정신을 차릴 때도 됐는데.”

내상은 그렇게 간단히 회복되는 게 아닐 테니까요.”

한때 세상을 완전히 집어삼켰던 전쟁에 대해서는 화가 역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에 휩쓸려 허망하게 졌던가. 그 참혹한 재앙을 간신히 몰아낸 지 몇 년째, 전쟁의 색이 씻긴 곳도 일부 있었으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전쟁의 상흔을 안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전쟁은 아직도 종료되지 않은 불행이며 평생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무거운 짐인 것이다. 청년 역시 그러한 이들 중 하나이리라.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바닥에 나뒹굴던 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살의가 비쳤던 얼굴에는 살의 대신 고통이 드리워져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말린 이를 쏘아보던 청년의 눈이, 설핏 화가와 마주쳤다. 자신과 꼭 닮은 이를 보아서일까. 회색 눈이 일순 둥그레졌으나, 오래잖아 본래의 텅 빈 눈으로 돌아왔다. 화가는 청년을 보며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드디어 자신이 갈망하던 것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헤어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헤매는, 지옥에서 연명하는 사람.

보아하니 여행자 같은데, 이런 곳엔 왜 오셨죠?”

청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화가에게, 사내가 슬며시 물었다.

이런 곳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찾았습니까.”

그런 것 같군요.”

표적을 정했으니, 탐색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화가는 관찰을 위해 유지하던 거리를 서서히 좁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청년의 형체는 더욱 선명해진다. 마침내 화가는 단 한 발짝만을 남겨둔 채 멈췄다.

당신, 나와 같이 갈래?”

몸을 살짝 굽힌 채, 화가는 상냥하게 물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청년을 꿰뚫었다.

그것이 몇 년 전의 일. 빈민가의 청년은 지금 화가의 작업실에 있다.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전쟁의 피해자가 순순히 화가를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작업실에 들어서기 전까지 화가는 청년에게 왜 하필 그를 택했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이 필요해라는 말만 두세 번 반복했을 뿐이다.

태아처럼 웅크려봐.”

무기력한 시선으로 자신을 훑으며 주문을 기다리는 모델에게 화가는 짧게 말했다. 청년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말았다. 이럴 때 청년은 잘 길들여진 개를 연상시킨다. 생각 없이, 아무런 의문도 없이 그저 타인의 주문만을 따른다. 그것은 청년이 지독한 절망 속에서 무기력함을 학습했기 때문이라고 화가는 생각한다.

좋아. 그게 내가 바라는 절망이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가는 캔버스에 상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가 모든 열정과 애정을 쏟는, ‘고통연작의 일부가 되리라.

 

*

 

화가는 고통에 짓눌린 사람을 담아내는 것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이른바 고통연작이었다. 자신의 취향을 아낌없이 담아낸 작품을, 화가는 타인에게 공개한 적 없었다. 작품의 존재에 대해 아는 것은 그와 그의 충실한 모델뿐. 추하고 비틀렸으며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를 굳이 모델로 택한 것은, 그러한 인간이야말로 화가가 생각하는 고통을 담아내기 알맞은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고독하고 비참한 삶을 견뎌내야 하는 인간 그러나 그 참담한 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고통이란 산 사람의 특권이야.”

화가는 모델의 몸에 새겨진 상처를 손으로 쓸며, 나긋하게 말했다.

죽은 자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살아있기에 당연한 것. 생존의 증거라고 할까.”

특권?”

청년의 입매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보기 드문 광경에, 화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그건 경험하지 않는 이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피해자에겐 그렇게 느껴지겠지만 말이야. 몇 발짝 떨어져서 보면 그것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어.”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버둥거리는 꼴이 아름답다는 거냐.”

그렇지.”

화가의 얼굴에 기묘한 열기가 비치는 것을 청년은 보았다. 이럴 때 화가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들뜬 얼굴이었다. 고통을 보는 그의 시선은, 분명 왜곡되어 있다.

처절한 저항과 비참한 체념. 고통을 마주한 인간이 택하는 것은 대개 두 가지.”

화가는 청년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상대를 꿰뚫는 듯 차가운 보라색 눈에, 청년은 사냥감처럼 움찔했다.

전자는 부질없어 아름답고 후자는 비참해서 아름다워. 그렇게 고통에 맞닥뜨린 인간이란, 신 앞의 미물처럼 무력하지.”

우리들 무력한 인간을 굽어보는 신 노릇이라도 할 심산인가.”

, 그것도 나쁘지 않지. 꽤 재미있는 광경이거든. 행복이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고통은 인간의 본질을 보여줘. 가장 깊은 곳을 헤집으니까.”

남의 고통을 가지고 잘도 지껄여대는군.”

청년이 으득거렸다. 언제나 무기력함에 잠긴 채 목숨만 이어가는 그가 유일하게 감정을 표현할 때는 바로, 이렇게 고통에 대해 논할 때뿐이었다. 화가는 그의 삶을 지배한 고통이 얼마나 악독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 고통이 그의 삶을 완벽하게 비틀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이전의 삶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 과거는 현재를 구축하고 현재는 미래를 만드는 것. 과거의 재앙은 청년의 미래까지 비틀고 말았다. 청년이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미 그것이 자신의 삶을 규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빼앗긴 것은 되찾을 수 없다. 비틀려버린 것도 돌이킬 수 없다. 잃은 대로, 비틀린 대로 감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단순한 생채기가 아니었다. 결코 지워낼 수 없는 깊은 화상이었다. 불행히도, 전쟁이 종결되었다고 고통 또한 종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껏 고통은 청년의 삶을 잠식한 채 하루하루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전쟁 이전의 삶이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어도, 이제는 희미하게 떠오르다 흩어질 뿐.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원하던 때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돌아오리라 헛된 기대를 품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가 끝났을 때, 그리고 그 전투에서 마지막으로 의지하던 전우마저 죽었을 때 청년은 직감했다. 자신은 영영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한 번 무너진 삶은 절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세상은 기쁨과 행복으로 달아오르는데 자신은 도무지 그럴 수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총을 떼어놓지 못했다. 지나간 재앙이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고 자신을 뒤쫓는 것 같아서.

전우는 영웅으로 묻혔다. 그가 수많은 전사들과 함께 땅에 들던 날에도 청년은 차마 추모행렬에 끼지 못했다. 홀로 살아남은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살아남은 것조차 죄악감을 느끼게 했다. 죽은 이들의 삶을 갉아먹어 그것을 양분으로 홀로 살아남은 것 같았다. 차라리 그와 함께 죽었으면 떳떳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 때면 청년은 제게는 너무도 큰, 낡아빠진 코트에 몸을 묻었다. 죽은 전우가 제게 물려준 것이었다. 그 속에 파묻혀있으면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따뜻한 손길이 생각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유토. 너는 살아남아 미래를 구하는 거야. 그는 왜 그런 말을 했던가. 왜 그런 말을 하고 목숨을 던져버렸던가.

나는 미래를 짊어질 사람이 아니었는데, 네가 맡긴 것을 지켜낼 수도 없었는데.

청년은 전쟁이 끝나고 그리워하던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났다. 평화를 되찾은 고향 속 전쟁에 찌든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참혹한 재앙 속 누군들 상처받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전부 재앙을 잊고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자신만이 그렇지 못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를 쪼아대는 전장의 기억에선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다. 급습하는 고통에, 청년은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고 발악했다. 그 모습이 광인을 닮아있음을 깨달았을 때,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두려움이 깃든 걸 알아차렸을 때 청년은 자신이 혐오스러워 고향을 떠났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먼 곳으로, 자신 같은 괴물이 숨어들 수 있는 곳으로 헤매다 도착한 곳은 고향으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도시 한구석의 빈민가였다. 그곳에 닿았을 때 청년은 비로소 안도했다. 그러나 새로운 장소가 전쟁의 상흔마저 지워주는 것은 아니어서 청년은 이따금 고통에 짓눌려 신음했다. 마음의 고통이 몸까지 병들게 한 것일까. 어느 날, 청년은 급작스레 쓰러졌다. 며칠을 고열에 시달리고, 한 달을 꼬박 앓은 후 얻은 것은 신체적 장애였다. 뒤틀린 뼈를 만져보고 청년은 웃었다. 그 지독한 불행마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죗값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그 이후로는 무기력한 삶의 연속이었다.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과거에 청년은 차라리 순순히 구속되는 것을 택했다. . 루리. 소중한 이들의 이름을 되뇌며 사라진 이들이 남긴 것에 몰두했다. 기억과 유품 따위의,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것에. 그는 끝없이 과거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진전 없이, 퇴보만이 거듭되는 삶이었다.

너를 무너뜨린 것은 고통이고 너를 이렇게 살아가게 한 것도 고통이지, 그렇지 않아?”

화가는 얄미울 정도로 청년의 깊은 곳을 헤집고 있었다. 먹잇감을 노리고 그 약점을 파헤치는 포식자에게나 어울리는 날카로운 시선. 청년은 그의 냉정한 눈에 자신이 무력하게 해부되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네 참담한 삶은 그 자체로 고통의 증명이야.”

그러나 정말 소름끼치는 것은, 그가 자신을 파헤친다는 것이 아닌,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대한다는 것이었다.

시련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성자 같아.”

신께서 친히 내게 고통을 선사하셨다고?”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만일 신이 있다면 그랬으리라 생각해.”

화가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나긋하다. 이럴 때 그는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다. 타인의 고통을 멋대로 파헤치고 정의내리며, 고통에 허덕이는 이 앞에서 고통을 찬양한다. 청년은 처음에 그가 고통에 찬사를 보냄으로써 바닥으로 떨어진 자신의 삶을 빈정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는 진심으로 고통을 예찬하고 있다는 것을.

미친 인간이었다. 단단히 미쳐있었다.

청년에게 고통이란 숭고한 시련도 신의 뜻을 증명하기 위한 고난도 아닌, 그저 삶을 잠식한 포식자인 것을. 그 때문에 청년의 남은 생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버렸던 것을.

그래서 청년은 자신의 고통이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되는 것이 무척 불쾌했다. 자신을 그렇게 무너뜨린 악독한 것이 감히 그런 수식어로 포장되어선 안 된다 생각했다. 고통이 아름답게 자리한다는 것은 미친 말이었다. 오히려 사람의 가장 비참한 영역까지 파고들어 한계까지 드러내지 않는가. 청년은 고통을 증오하였고, 증오하는 만큼 비참하게 그려지길 바랐다. 때문에 청년은 자신을 모델로 그려낸 화가의 연작을 매서운 눈으로 낱낱이 훑었다. 고통을 예찬하는 그가 혹여 자신의 고통을 포장하여 아름답게 그려냈을까 두려워졌기 때문에.

그리고 화가가 정성들여 그린 그림들을 마지막까지 살폈을 때, 청년은 안도했다. 화가의 그림에는 자신의 추하고 비틀린 모습에 대한 아무런 포장도 없었다. 그의 비참함과 절망을 꾸밈없이 담아낸 것이다. 화가는 멀거니 그림을 지켜보는 모델에게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내 그림이 궁금해?”

너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군.”

너라는 모델에서?”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하지. 고통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 그러니 고통을 상징하는 너에겐 아무런 과장도 꾸밈도 필요 없어. 오히려 그것을 포장하려 하는 순간, 그 아름다움은 빛이 바랜단 말이야.”

고통에 대한 화가의 광적인 집착이 소름끼치긴 하나, 그가 자신을 그대로 담아내었다는 것은 그나마 위안이었다. 덕분에 자신의 삶을 지배한 고통은 그 어떤 순화도 없이 악랄한 모습 그대로 각인된 것이다. 청년은 그림 속의 자신을 쓸어볼 듯 손을 뻗었으나 바로 몇 cm 앞에서 멈췄다. 그림 속, 고통에 잠긴 자신의 모습이 지나치게 실감나 혐오스러웠던 탓이다.

 

*

 

청년은 낡은 군번줄에 입을 맞추고, 새겨진 이름을 손으로 쓸다 그것을 꼭 안은 채 잠들었다. 화가는 웅크린 채 잠든 모델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저 군번줄이 누구의 것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언젠가, 군번줄을 쥔 채 잠든 청년의 손에서 살그머니 그것을 빼내 새겨진 이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쿠로사키 슌. 어쩐지 기시감이 들어 찾아보니, 전쟁의 막바지에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자의 이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희생에 감사한 이들은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며 영웅으로서 잠들게 해주었다.

죽음은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종말이라지만 화가는 죽은 이가 차라리 행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목적을 이뤄 더 많은 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테니까. 전쟁이 남긴 상흔에 그 이상 시달릴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그 전쟁 속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청년은 도리어 살아있기에 고통에 잠식당하지 않았는가. 죄책감에 시달리고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전쟁에 찌든 자신을 원망하면서.

만일 청년에게 함께 고통을 짊어질 사람이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무너지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쿠로사키 슌이 살아 함께했더라면, 혹은 청년이 고통스레 찾는 루리라는 자가 그의 곁에 있어주었다면. 고통을 나눈 이로서, 함께 망가진 이로서 적어도 서로를 이해하고 감쌀 수 있었을 텐데. , 루리. 잠든 청년은 신음처럼 익숙한 이름을 내뱉었다. 그와 함께, 청년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으나, 그는 분명 울고 있었다.

. 루리. 청년이 고통스레 내뱉는 이름. 그가 도피하는 과거 속의 인물들. 쿠로사키 슌은 그를 두고 죽었다. 루리는 행방은 물론이고 생사조차 알 수 없다. 가엾게도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것은 그를 치유해줄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뜻했다. 고통이란 독은 그의 내부에 침투해 모든 조직을 무너뜨리고 있었으나 그 진행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극한의 고통 속에서, 청년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청년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아직껏 삶을 이어가는 것은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체념했기 때문이라고 화가는 생각한다. 그 모든 것에 끝까지 저항하려 했다가는 그는 밀려오는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리라. 그만큼 그의 삶은 절망적이었다.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불행은 이미 그를 지옥으로 떨어트리지 않았던가. 화가는 청년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당신, 나와 같이 갈래?”

어디로?”

작고 여린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화가는 새삼 제 앞에 자리한 자가 무력한 표적임을 깨달았다.

아주 먼 곳으로. 거기서 당신이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거든.”

좋아.”

그것뿐이었다. 청년은 지옥에서 탈출하기라도 하는 양 순순히 화가를 따라 빈민가를 빠져나왔다. 도심에 자리한 화가의 작업실로 향할 때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서. 과거, 재앙은 어디든 공평하게 짓밟았으나 그래도 도심은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빈민가에서 벗어나 중심지로 향할수록 세상을 채운 색채는 차츰 화사해졌다. 그의 시선은 그 화려한 색채에 자꾸만 머물렀다. 처음으로 색을 보는 사람처럼, 눈이 부신 양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며.

처음으로 그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릴 때, 화가는 청년의 왼쪽 손목에 집요하게 새겨진 상흔을 발견했다. 칼로 깊이 벤 흉터. 비슷한 곳에 몇 개씩이나 겹쳐진 것은 결코 우연한 상처로 보이지 않았다. 아마 몇 번이고 자신을 해하려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몇 번의 시도 속에 그는 이미 자신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화가의 눈앞에 선 청년은 숨만 내쉬는 주검인지도 모른다. 화가는 청년의 눈에서 회색의 심연을 보았다.

청년이 무엇으로 연명해왔는지 화가는 알 길이 없다. 그는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삶의 목적조차 참혹한 불행 속에서 이미 잃은 지 오래이리라.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과거의 기억뿐. 그마저도 상실한 것에 대한 기억이기에, 되새길수록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가. 그 기괴한 삶에, 지독하게 비틀린 삶에 화가는 감탄했다. 과연, 자신의 작품에 어울리는 모델이었다. 결국 그의 삶에서 고통을 소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통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그의 삶을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청년은 철저하게 고통을 상징하고 있었다.

화가의 시선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인, ‘고통연작으로 향했다. 타인에게 결코 공개한 적 없는 이 작품들엔 그가 예찬해마지않는 고통이 작품마다 하나씩 담겨있었다. 이렇게 많은 고통을 단 한 사람에게서 찾아냈다는 것이, 화가는 언제나 놀라웠다. 동시에 그림 속 인간의 비참한 모습에서, 고통이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가를 깨닫고 황홀해졌다. 고통은 냉혹한 포식자였다. 표적이 된 이상, 누구도 그 손길에선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에 잠식되는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통과 맞닥뜨린 인간의 처절한 발악이 화가는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하던 모든 고통을 담아내는 때, 이 기괴한 연작에 완전히 만족하게 될 때, 그때 화가는 대중 앞에서 이 모든 것을 화려하게 공개할 작정이었다. 몇 년간 몰두한 덕분에, 연작은 이제 거의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단 하나만 남았다. 고통의 연작은 단 하나만 채워지면 완성될 수 있었다. 그것은 <죽음의 순간>. 인간이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고통, 고통의 종언. 그가 사랑하는 모델이 죽음을 맞을 때, 그 날이야말로 고통의 마지막 조각이 채워지는 날이 되리라.

화가는 고통의 연작이야말로 자신의 역작이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모델이 자연히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천천히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죽음>의 날은 일찍 닥쳤다. 언젠가부터 청년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뿌리부터 썩어버린 고목처럼 하루하루 말라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으나 화가는 외면했다. 우연히 옛 동지를 만난 청년이 루리의 생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찍이, 전쟁 중에 죽었다고 했다. 그것으로 청년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화가는 청년이 삶을 이어갈 중대한 이유가 붕괴한 만큼, 그가 억지로 이어오던 삶도 곧 막을 내리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예언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쯤 지났을 때였다. 전시회 때문에 얼마간 자리를 비웠던 화가는 작업실로 들어서자마자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지나치게 무거운 공기가 지극히 수상했다. 그는 조심스레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섰고, 그곳에서 불안의 근원과 맞닥뜨렸다. 청년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으나, 텅 빈 회색 눈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화가는 청년에게 다가서 가만히 그 뺨을 쓸었다. 딱딱했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얼굴에서 산 자의 온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아아. 화가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종말이구나.

너의 <죽음>만은 영원하게 해주지.”

화가는 조심스레 모델을 안아 올렸다. 그리고 그를 통해, 엄숙하게 <죽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통연작의 마지막이자, 그의 화가로서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다.

 

*

 

한때 세상을 잠식했던 전쟁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 참혹한 재앙 속에서 많은 이들이 스러졌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세상을 지배할 것 같았던 침략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짓밟던 사냥감의 손에 무너지고 말았다. 마침내 세상은 평화를 되찾게 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목숨이 평화와의 교환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평화를 되찾은 이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던 침략자를 죄인으로 전락시켰다. 침략자를 벌한다 한들 그들이 입힌 피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죗값을 치르는 것이 당연한 일. 그때부터 승리자라는 영광스러운 칭호 대신, 전범이라는 오명이 침략자에게 따라붙게 되었다.

하루하루 전범이 끌려나왔다. 적극적으로 침략을 주도한 자, 침략자에게 충성한 자, 동지들을 배반하여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 등. 어제의 승리자는 오늘의 죄인이 되어 추한 몰골로 법정에 섰다. 국민의 분노와 경멸 속에서 그들은 대개 합당한 형을 선고받고 쓸쓸하게 자취를 감췄다. 그 비참한 뒷모습에, 그들에게 짓밟혔던 이들은 간신히 슬픔을 한 꺼풀 벗겨낼 수 있었다. 악독한 침략자와 그 앞잡이가 죗값을 치른다는 것이 전쟁의 희생자들에겐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그려내는 천재 화가가 전범으로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비평가로부터는 물론이고 대중들에게까지 호평을 받고 있던 이가, 그것도 거룩한 성자를 주로 그려내던 이가 전범이었다는 사실은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그는 몰려든 기자들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법정에 서서는 모든 죄를 순순히 인정했다. 증거가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에 변호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적극적으로 침략을 주도하였고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로 화가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죽음의 예고에도, 그의 표정은 지나치게 담담했다.

화가는 전범 중에서도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침략을 지시한 총통의 오른팔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의 정체가 그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수뇌부에서도 두뇌였던 그가 교묘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겼기 때문이었다. 가짜 신분으로 수뇌부에 들어서 전쟁을 이끌었기에, 그는 당시의 비밀기록에조차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잘 짜인 연극처럼 그의 모든 죄가 낱낱이 공개되었다. 익명의 고발자가 그가 숨겨오던 과거를 전부 폭로해버렸던 탓이다. 그렇게 한순간에 천재 화가는 악독한 전범이 되어 역사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화가가 전범으로서 사형당한 후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불러온 충격이 거의 가셨을 무렵, 그의 유작이 공개되었다. 화가의 작업실에 가지런히 정렬된 일련의 그림들은 고통연작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것은 전부 같은 이를 모델로 한 것이었는데 고통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추하고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그림 속 고통에 몸부림치는 청년이 화가 자신을 완전히 빼닮았다는 것이었다. 마치 그 일련의 그림이 자화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로 그 점을 두고 이야기를 꾸미기 좋아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전범이었던 천재 화가는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며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런 자신을 모델로 삼아 추하고 비틀린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희생자들에게 속죄하려 했을 것이라고. 하필 고통을 주제로 삼은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으리라고.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썩 재미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것은 야사처럼 퍼졌다. 일부는 그것을 정설로 믿기도 했으나 뒷받침할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작업실에서 발견된 미발표 작품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고통을 주제로 삼은 기묘한 연작을 발견한 이들은 홀린 듯 작업실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 그려진 시점과 그가 붙들린 시점 사이의 공백이 크다는 것이 의심의 불길을 더욱 키웠다. 집요하게 작업실을 뒤지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멈추었다. 빛이 들지 않는 곳, 작업실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숭고한 성자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거룩한 성상. 그것은 <종말>이라는 이름의, 화가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

 

수십 년 후, 화가의 마지막 작품은 명작의 이름으로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앞두고 있었다. 몸을 웅크린 성상은 과거 그가 그려냈던 그 어떤 성자보다도 아름답고 섬세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그 거룩함에 자연히 고개를 숙이며 빠져들곤 했다. 생전 성화를 즐겨 그리던 화가가 바로 이 마지막 작품으로 제가 그리던 성자를 완성시켰노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만큼 성상은 아름다웠다. 보는 이가 절로 죄악감을 느낄 정도였다. 몇몇 이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한없이 우러러보기도 했다. 성상은 사람들이 그리는 성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 아름다운 작품에 어찌하여 종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던가. 그것에 대해선 많은 말이 오갔으나, 정설로 통하는 것은 그것이 성자의 순교를 담아내고 있다는 해석이었다. 성자는 자는 듯 평온한 얼굴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가시관과 사슬이 그의 몸을 고통스레 옥죄고 있었으나 그 모든 고통도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감내하려는 양, 성자는 홀로 초연했다.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전시 직전에 성상은 사라졌다. 국민의 공분과 불안 속에서 추적은 이어졌고, 마침내 잃어버린 성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만 도난당하는 과정에서 작품이 가볍게 훼손되는 불상사가 있었다. 복구를 위해 전문가가 모여들었다. 훼손 상태를 면밀히 점검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이 하나 발견되었다. 성상 안에 인간의 유해가 있었던 것이다. 성상 속 사체의 모습은, 성상이 취하고 있는 포즈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

죽은 이는 등뼈가 뒤틀린 기괴한 모습이었다. 생전에 경멸받았을 불구의 사내는, 죽은 후 화가의 손에서 성자의 모습으로 화했던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신벌로 고통스러웠다, 죽어 죄를 씻고 구원을 얻은 것처럼.

화가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청년의 죽음은 그것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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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