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는 편이었다. 그를 이끄는 것이 사명이고, 사명을 위해서는 싸움이 필연적이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더구나 자신이 사명을 위해 싸울 거의 유일한 전사라는 사실은 청년을 조급하게 만들어, 그는 다소 과할 정도로 스스로를 몰아세우게 되었다. 협력자로서 청년과 함께하는 사내는 그의 목표점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황폐해진 세계의 복구. ‘복구’라는 단어 앞에는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었다. 전쟁이라는 재앙 이전에 세상을 채웠던, 행복과 웃음. 전쟁에서 사라진 사람들. 그리고 아마,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일 빼앗긴 여동생.
그 모든 것을, 청년은 싸워 되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지금까지 싸울 수 있게, 그리고 생존할 수 있게 한 절대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그러나 사내는 때로 목적에 대한 청년의 집요한 집착에 오싹해진다. 그는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까지 목적을 움켜쥐고, 추잡한 방식을 사용하면서까지 한 걸음 나아가려고 들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청년이 자주 입에 담는 말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단번에 요약하고 있었다.
그만큼 성과를 거둔 청년이었지만,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쉼 없이 나아가는 청년의 방식은 결국 피로를 불러왔다. 자신을 돌보기는커녕 무조건 몰아세우는 사람이 날이 갈수록 지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렇기에 사내는 청년의 몸이 무너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담담했다. 그저 청년을 불러 형식적인 충고만을 던질 뿐.
“너는 스스로를 돌볼 필요가 있다.”
청년은 단정한 얼굴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그건 너처럼 여유로운 자들이나 할 수 있는 소리다. 지금도 루리는…….”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지금 무너지면 나중엔 싸울 기회가 와도 싸울 수 없어.”
“지금은 때가 아니다, 라는 건가?”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분한 양 입술을 깨물기는 했지만 공격적인 눈빛은 누그러트렸다. 그 역시, 전사로서 싸워온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시점을 위해서는 몸을 사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사내는 가끔 이렇게, 지나치게 달아오른 청년을 진정시키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짜 싸워야 할 때는 언제냐.”
“그렇게 조급해할 건 없다. 우리 세계의 전사들만 갖춰지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싸우게 될 테니까.”
안경을 고쳐 쓰며 사내는 단언한다. 청년의 금빛 눈에 깃든 열기가 조금씩 흩어져가는 것을 사내는 안경 너머로 훑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열기가 식으며 긴장이 갑자기 풀린 것일까. 청년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쏠렸다.
“괜찮나?”
“아. 잠깐, 두통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가벼운 말과는 다르게 안색은 좋지 않았다.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에 너무도 익숙하여, 청년은 날이 갈수록 내부에 쌓이는 독을 억지로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악독하게 참아내던 것이 지금 통제를 벗어나 그를 덮쳤을 뿐.
“좀 쉬어둬. 자기관리도 싸움을 위한 준비니까.”
“자기관리라.”
“너 자신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거야. 잊지 마라. 너는 아카데미아에 맞서 싸우기 위한 전사다.”
사내의 말에 숨겨진 것을 청년은 알아챈다. 자신을 포함하여, 앞으로 사내가 선발할 그의 전사들은 전부 그가 원하는 결말을 위한 장기짝이다. 그에게 전사란 일종의 무기와 같다고 청년은 생각한다. 날카롭게 벼려, 적을 베는 것. 그렇기에 그의 전사들은 언제나 최상의 상태여야만 했다. 그래야, 적을 단번에 벨 수 있을 테니까.
“알았다.”
짧게 수긍한 청년은 사내의 집무실을 나와 제 방으로 향했다. 사내 앞에서 터져버린 피로는 사내를 떠나자마자 집요하게 몸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폭발하듯 덮친 것은 통각을 깨우고, 통각은 날을 세우며 청년을 괴롭힌다. 날카로운 칼날이 온몸을 찌르는 듯해 결국 청년은 진통제를 꺼내들었다.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잡히는 대로 움켜쥔 알약을 삼킨 청년은 쓰러지듯 의자에 기댔다.
사내의 말은 옳았다. 어쨌든 자기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명을 위해 나아가겠다는 일념으로 거듭해온 싸움은 그를 계속해서 갉아먹었기에. 타인을 해한 대가인가. 청년은 눈을 내리깔며 지금까지의 싸움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침략자들에게 사냥감으로서 쫓기던 때, 방어에만 급급했던 싸움. 사냥당하지 않으려 발악했던 싸움. 그리고 이 세계에 와서, 먹잇감을 유인해내기 위해 애꿎은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던 비겁한 싸움.
그 모든 것이 청년을 구성하였고 여기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자신이 망가지고 있음을 청년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몸도 정신도 이미 너덜너덜해진 채. 그저, 의무감과 오기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 세계가 청년에게는 낯선 땅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세상에 닥친 재앙 탓에 어린 나이에 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청년은 살아남기 위해 불신과 경계를 학습했다. 타인은 믿을 수 없다. 호의조차 의심해야 했다. 그러한 생각이 뿌리 깊게 박힌 청년이 이 낯선 곳에서 언제나 날을 세우며 타인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 지독한 경계 역시 청년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었다. 청년은 그 극단적인 방어가 자신의 에너지를 빠르게 삼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쌓여온 것이 지금,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이대로 계속 무리한다면 어쩌면 정말로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청년은 저와 같은 길을 걸었던 이들의 종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여울 정도로 자신을 갉아먹던 이들의 결말. 그것은 너무도 쓸쓸하고 비참한 것이었다. 사명만 이룰 수 있다면 그런 종말도 감사히 받아들일 청년이었으나, 그 시점은 좀 더 미루어져야 했다. 사랑하는 것을 전부 되찾고 난 후로.
약기운은 느릿하게 퍼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통각이 조금씩 마비되어 청년은 차츰 안정을 찾는다. 약을 삼키는 것은, 그것으로 통증을 누르는 것은, 고통을 잊음으로써 병증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에게는 그것이 절실했다. 통증은 자주 그를 덮치고, 내부에 쌓인 독은 그를 마비시켰으므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청년의 초조함은 지금껏 그런 것을 허락하지 못했다. 몸이 움직이는 한, 그는 싸워야 했다. 싸우지 않으면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청년을 이만큼 병들게 한 원인이었다.
사실 그는 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은 청년을 단기간에 너무도 많은 싸움으로 내몰았다. 그 모든 싸움이 청년을 갉아먹었음은 당연한 일. 몸도 정신도 피폐해질 때 청년은 약을 삼켰다. 통각이 잠들 때 비로소 청년은 고통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이 아마도 중독의 원인이었을 것이라 청년은 생각한다. 이제, 통각이 날을 세울 때는 약을 삼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통증은 그것으로만 잠재울 수 있기 때문에. 결국 그는 나날이 병들어가고 있었다. 사명이 그를 싸움으로 내몰았고 싸움이 그를 갉아먹었으며 피로는 병증을 부르고 병증은 통각을 깨웠다. 통각을 잠재우는 것은 진통제였기에 그는 거의 강박적으로 진통제를 삼킬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지독한 고리는 언제쯤 깨어질 것인가. 사라지는 통증과 함께 밀려드는 노곤함에 눈을 감으며 청년은 생각한다. 모든 것이 끝날 때. 그래서 사명 또한 종료될 때. 그때서야 청년은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으리라.
*
사내는 언제나 청년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청년의 위험성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분명 성실한 전사로서 사내가 원하는 대로 싸워주었으나, 때로 멋대로 판단하여 무모하게 움직이곤 했다. 전사로서의 본능이, 적에 대한 증오가, 하루라도 빨리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청년을 뒤흔들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잘 벼린 무기라도 통제할 수 없으면 아군을 갉아먹는 날붙이일 뿐이다. 사내는 청년이 위험한 변수가 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사내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주 청년에게로 향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협력을 약속한 후 청년은 사내가 통제할 수 있는 곳으로 스스로 들어왔다. 감시카메라가 구석구석 스민 사내의 왕국으로. 청년의 행동이 빠짐없이 카메라에 기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내는 카메라를 통해 청년의 모든 행동을 낱낱이 살폈다.
카메라가 담아내는 청년은 단 한 번도 편안한 얼굴일 때가 없었다. 단정한 얼굴을 찌푸리며 온 건물을 낱낱이 파헤치며 다니거나, 방에서 홀로 무기를 벼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다가오는 타인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말만을 마지못해 건네며 피하곤 했다. 그렇게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지 않고 벽을 쌓다가 제가 최선이라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는 타인의 의견을 구하는 일도 없이 독단적으로 나서곤 하는 것이다.
참 피곤한 방식이군.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것이 지금까지 청년의 생존방식이었음은 분명하나 동시에 청년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래서야 나중에 사내가 뽑은 전사들과 함께 움직이더라도 문제일 터다. 타인을 막으려 높게 쌓은 벽을 억지로 부수어 세상으로 나오게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사람을 붙여야 할까. 그대로 두면 단독행동마저 감행할 듯한 위태로운 전사에 대해 사내는 자주 생각했다.
청년은 이름처럼 맹금을 닮아, 사람을 다루는 것에 능한 사내조차 완전히 통제하긴 어려웠다. 다른 전사들에까지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잘 길들여야 하련만 ─ 사내의 생각은 거기서 멎었다. 카메라 너머 청년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던 탓이다. 지친 얼굴의 청년이 멍한 얼굴로 무언가 삼키는 것이 보였다. 책상에 어지러이 널브러진 것은, 분명 진통제였다.
지금까지 그를 지켜보지 않았더라면 사내는 그 모습을 무심하게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관찰해온 결과를 토대로 저것이 청년의 습관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너무도 자주 약을 삼킨다. 진통제가 가득 든 병을 방에 두고서는, 손을 넣어 잡히는 대로 삼키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약을 먹는 주기는 짧아지고 있었다. 지독한 경계로, 거듭되는 싸움으로 청년이 차츰 지쳐가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저 정도라면. 사내는 수하에게 통신을 보낸다.
[쿠로사키의 건강 상태를 점검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무래도 몸이 정상이 아닌 것 같더군.]
청년은 사내의 중요한 무기였다. 혹시라도 싸우기 전에 망가지면 곤란했다. 만일 문제가 있다면 지금 어떻게든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 그의 전사는 언제나 최상의 상태로 최상의 결과를 내야 하므로.
[알겠습니다. 검진을 받게 하겠습니다.]
[결과는 우선 나에게 보고하도록.]
[쿠로사키에게는요?]
[일단 미루어둬.]
그렇게 말하고 사내는 통신을 끊었다. 결과를 자신에게 먼저 보고하도록 한 것은 그의 현 상태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어디가 망가졌는지, 얼마나 망가졌는지. 제 약한 곳을 타인에게 내보이려 하지 않는 청년의 성격 때문에 사내는 그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내몰려있는지 짐작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청년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타입이었다.
오래지 않아 사내는 수하를 통해 검진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결과를 세심하게 살핀 사내는 결론을 내렸다. 그에게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그러나 하나, 확인해봐야 할 것이 있었다. 그래야 처방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수하에게 몰래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사소한 주문이었으나, 청년을 치료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것이었다.
사내가 청년을 부른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의 일이었다. 집무실에 불려온 청년은 여느 때처럼 사내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힐끔거렸다. 자신을 부른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한동안 말없이 서류를 뒤적거리다 청년을 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듯 말을 던졌다.
“검진 결과가 나왔다.”
“왜 그따위 짓을 한 거지?”
“네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너는 매일같이 진통제를 먹었어. 그렇지 않나?”
“통증이 잦아서였을 뿐이다.”
“그게 문제라는 거다. 그래서 네 몸에 이상이 있을 것이라 의심하고 검진하게 했지.”
“그래서 결과는?”
“내 생각이 맞았다. 너는 분명 병들어있다.”
그렇게 말하며 사내는 청년을 살핀다. 청년의 금빛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 역시 자신의 병증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사내는 그렇게 판단한다. 그러나 자신이 내린 결론은 청년이 생각하는 것과는 아마 방향이 다를 것이다.
“어제도 진통제가 통증을 잊게 해주던가?”
“진통제가 왜 진통제겠어. 통증을 억누르니까 먹는 거다.”
“그래서 너는 강박적으로 진통제를 먹어왔나?”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안경을 고쳐 쓰며,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효과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무슨 소리지?”
“검진을 끝낸 후 나는 네 상태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기 위해 수하에게 몰래 명령을 내렸지. 네 방의 진통제를 내가 준비한 것으로 바꿔놓으라고.”
“그래서?”
“그건 위약이었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가짜 약이란 말이다.”
순간 공간이 얼어붙었다. 사내는 자신의 말이 청년을 휘감는 것을 흥미롭게 관찰한다. 청년은 한참이 지나서야 힘겹게 입을 열었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죽음과도 닮은 묵직한 침묵을 깬 것은 결국은 사내였다.
“네 검진 결과를 말해주지. 열악한 환경에서 싸워온 것치곤 상당히 양호한 편이야. 몸에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 오히려 너는 제법 건강한 편이었어. 그렇다면 왜 너는 매번 아팠을까. 왜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까?”
여기서 사내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청년을 지켜보며 다시 잇는다.
“그것이 궁금해서 실험해본 거다. 정말로 이상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 하고.”
“그래서 결론은?”
청년의 목소리는 생각 외로 차분했다. 사내는 판단을 수정한다. 어쩌면 그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병증이 어디에서 출발하였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통증이란 건 꼭 몸의 문제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심리적인 요인도 무시할 순 없어. 너의 경우는 아마도…….”
“그렇다면 내 병의 근원은 어디냐.”
“정신적인 결핍이다.”
“결핍?”
“내 가설은 이렇다. 너는 어린 나이에 전장에서 싸우며 증오하는 적들에 가까워지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껴왔다. 그러나 사명을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었어. 그 과정에서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그것이 네게 정신적인 결핍을 불러왔다. 정신적인 이상은 몸의 통증으로 표출되었고 너는 통증을 잊기 위해 진통제를 먹기 시작했다. 진통제로 인해 통증을 잠시 잊게 되자 너는 그것이 일시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겠지.”
자신의 삶과 자신에게 뿌리내린 병증에 대한 타인의 진단에도, 청년은 말이 없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제 삶을 돌아보는 것 같았다. 지독하게 불행하고 황폐하여 자신을 갉아먹어왔던 삶을.
“하지만 병의 근원을 치료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너는 계속 진통제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차츰 중독되어가던 중 네 마지막 자제심마저 부수는 일이 생겼고.”
사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집무실의 커다란 화면에 청년의 영상이 담긴다. 하나뿐인 동료의 행방이 묘연해졌을 때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사내를 찾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였다.
“너를 뒤흔든 사건은 바로 이거다. 네 동료, 유토의 부재. 이때부터 너는 자제력을 잃었어. 전과 비교하면 거의 폭발적일 정도로 진통제를 찾더군. 보지도 않고 약을 쥐고, 움켜쥔 대로 삼키고, 또 견딜 수 없게 되면 삼키고.”
“내상을 극복하기 위해 약에 의지했다는 거군.”
“그래. 하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해. 네 병은 너무도 깊다. 고작 진통제 따위로 달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야. 위안을 얻는 게 고작인데, 그조차 일시적이지. 너는 약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거다.”
“치료?”
청년이 웃었다. 입가에 부서지는 웃음이 너무도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런 건 불가능해.”
“왜 그렇게 단언하지?”
“네가 말하지 않았나? 내 병은 너무도 깊다고.”
“네 병이 정신적인 결핍에서 출발한 거라면, 이제부터 채우면 되는 일이다. 잃은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지금 네게 주어진 걸 봐. 네가 잃은 이들 대신 이 세계의 사람들이 네 상실을 메울 거다. 너는 앞으로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하게 될 거야. 함께 싸우며 친해지고 의지하게 되겠지. 네가 타인에 대한 경계를 무너뜨리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희망은 있어.”
“그래서, 나를 치료해보시겠다?”
청년은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끼며 묻는다. 사내의 얼굴에 오만에 가까운 자신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완벽한 계산으로 성공을 거듭해온 사내는 타인의 병증마저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아니, 치료라는 말은 맞지 않다. 기계를 고치는 정비사처럼, 사내는 타인의 아픔을 고치려 하는 것이다. 내부를 살피지 않고, 분석과 계산만으로.
“병에 걸려보지 않은 자는 병을 모르지. 잃어본 적 없는 이는 상실을 모르고, 다쳐본 적 없는 자는 아픔을 몰라. 너는 이해하지 못해. 결핍이 그렇게 간단히 채워질 수 있다면, 내가 왜 진통제 따위로 지금껏 나를 달랬겠어?”
지금까지 버텨온 것은 기적이었다. 그 모든 불행과 증오와 환멸을 청년은 극복했다기보다 그저 감내해왔다. 그것이 자신을 얼마나 갉아먹는지 알면서도. 참혹한 전쟁 속에서, 대단한 목적이 있어서 살아남은 것도 아니었다. 저 깊은 곳에 자리한 생존의 본능으로,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한다는 사명으로 연명해왔을 뿐이다. 그 대가로 정신은 이미 병들대로 병들었다. 깊은 곳까지 전이된 병은 이제 환부를 도려내는 것만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
“너는 틀렸어. 내게 필요한 건 약이다. 위약이건 진통제건 관계없어. 무엇이든 도피할 수 있는 거라면 충분해.”
현실로부터, 나를 질식시키는 불행으로부터.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인에게 조악한 병증이 낱낱이 파헤쳐지자 차라리 홀가분했다. 자신의 병은 그렇게 보잘것없고 조잡한 것이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청년은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치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일시적인 해결책에라도 매달려야 한다고. 그래야 겨우 버텨낼 수 있다고.
“기다려. 쿠로사키.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의사놀이가 퍽 재미있는 모양이야. 미안하지만 환자 역은 더 못 해주겠어.”
“처방은 분명히 있어. 너를 위해 찾아보도록 하지.”
“내가 치료를 거부한다면?”
청년은 사내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 명백한 거부에 사내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치유할 수 없는 병도 세상에는 있다. 아카바 레이지. 너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청년은 돌아서서, 사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의 집무실을 떠났다.
청년은 앞으로도 계속 약을 삼키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해도, 일시적인 도피에 불과하더라도, 정신적인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약을 찾을 것이다. 이 세계에 청년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병을 잊게 해주는 것만이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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