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슌] Pain

2016. 7. 1. 23:15 from 02

 

사내는 자신의 손목을 칼날로 그었다. 날이 파고들며 금속 특유의 서늘함을 남기는가 싶더니 오래지 않아 피가 쏟아졌다. 살을 후비는 날카로운 통증에 표정이 일그러질 만도 했으나 사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제 팔을 타고 흐르는 피를, 그 붉은빛을 눈에 가득 담았을 뿐이다. 살갗이 벌어지며 상처가 생겼음에도, 무서운 속도로 피가 쏟아짐에도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통각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던 탓이다.

생물이란 몸의 이상이 생기면 통증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것을 통해 몸을 돌아보고 자신이 맞닥뜨린 위험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각이란 생물을 괴롭히는 것인 동시에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경고음이다. 사내 역시 통각의 기능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았다. 다만 통증이란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것이었고 앞으로도 영영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랬다.

자신이 평범한 사람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때는 어린 날, 유리조각이 손에 박혔을 때였다. 지켜보던 이들은 놀라 그에게 다가갔으나 그는 울기는커녕 쏟아지는 피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유리조각을 뺄 때까지 그가 느낀 것은 희미한 이물감뿐. 아플 텐데도 울지 않고 잘 버텼다며 어른들이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 그는 비로소 평범한 사람은 다쳤을 때 아픔이란 것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울게 할 정도로 괴로운 것이라는 것도.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그가 결코 짐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통증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이며 얼마나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 궁금해 일부러 상처를 낸 적도 있으나 그럴 때마다 실패를 맛볼 뿐이었다. 자라면서 세상에는 드물게 통각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고서야 사내는 자신이 통증을 느낄 수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평범한 이들에겐 당연한 것이 그에게는 영원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간간이 사내에게 영향을 미쳤다. 과거 그는 몸이 약해져 가벼운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평범한 이라면 통증을 통해 자신의 몸을 점검했을 테지만 그는 진단을 받기 전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몸의 이상을 느끼지 않았냐며 질책하는 의사에겐 몸에 무신경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답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본디 통각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부러 숨기고서. 사내는 평범한 인간을 연기하고 있었다. 다치면 아픔을 느끼고, 병을 앞두고선 몸이 정상적으로 경고음을 보내는 인간을. 통증이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막연히 짐작한 것으로.

그에게는 어렵지도 않은 연기였다. 자신의 비밀을 입 밖에 내지 않으면, 사람들은 사내 역시 자신들과 같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병의 징조 역시 통증을 수반한 증세 외에 그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면밀하게 점검했으므로, 병에 쉽게 걸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살아오며 통증이란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도 사그라졌다. 물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생물이 뭍의 생활을 궁금해 하는 것이 무의미하듯, 통증을 느낄 수 없는 자로서 통증을 연구하는 것도 무의미했으므로.

그러나 그는 지금, 통증을 탐구하기 위해서 몇 년 만에 스스로 상처를 새긴다. 이전까지의 자해는 별 소득이 없다는 것을 판단한 순간 그만두었으므로, 몸에 큰 해를 끼치지 않았다. 자해의 흔적 역시 쉽게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얕았으며 오래지 않아 아물어 자취를 감추었다. 어쩌면 그 전까지 통증을 느끼지 못한 것은 바로 그렇게, 자신이 해온 것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일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낸다면.

그렇다면 몸도 경고음을 낼지도 모른다. 최초로 통증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만으로 위험한 일을 스스로 벌인 사내였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라 포기했던 것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새삼 탐구하려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통각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내와는 정반대로, 숨 쉬듯 통증을 느끼는 자였다.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가 왜 그토록 통증에 시달리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타고난 체질인지, 알려지지 않은 병이라도 있는 것인지, 혹은 지독한 불행 속 홀로 살아남은 대가인지. 다만 통증은 한순간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매일 약을 삼키지 않으면 가볍게 움직이는 것조차 어렵다고 했다. 이미 산산이 부서진 몸을 약을 통해 일시적으로 붙여 가동시키는 것처럼. 불행히도, 걸핏하면 날을 세우는 통증은 약으로 완전히 누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스멀스멀 새어나오던 통증이 극에 달할 때면 그는 그대로 무너져 가슴을 움켜쥐고 힘겹게 숨만 토해냈다. 그 순간 가련한 신음조차 낼 수 없는 것은 고통에 질식했기 때문이다.

사내는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었다. 통증에 잠식당해 매순간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그 처절한 삶을. 그 전까지 통증에 대해 막연히 짐작하던 것만으로는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진통제를 보면서 사내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통증을 연구하고 싶다. 그것을 통해 저 자의 삶도 하나하나 파헤치고 싶다. 열망이 극에 달했을 때, 결국 사내는 스스로 상처를 냈다.

칼날은 손목을 파고든 것으로 모자라 벌어진 상처까지 몇 번 들쑤셨다. 소득이 없는 것에 사내가 초조해졌던 탓이다. 아무리 피가 쏟아져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사내이기에 표정은 조금도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는 휘청거렸다. 눈앞의 세상은 안개처럼 뿌예지고 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감각도 조금씩 무뎌지는 것 같다. 통증을 모르는 사내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위험신호다.

죽음이 다가오는구나. 그런데 이 순간조차 통각은 작동하지 않구나. 사내는 웃었고 그대로 무너졌다. 쓰러진 자리에 피가 빠르게 번졌다.

 

*

 

언젠가부터 통증이 삶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통증은 불행과 함께 찾아들어 불행이 깊어질수록 사나워졌다. 때문에 청년은 자신의 삶을 지배한 통증을 자신을 덮친 불행과 절망의 증표로 여겼다. 몸이 불행을 견디지 못해 신음하는 것이다. 스물도 되지 않은 삶에 불행은 착실하게도 찾아왔다. 사는 동안 찾아든 불행을 모으면 비극만 몇 편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청년은 지독하게 불행한 인간이었다.

불행의 시작은 전쟁이었다. 행복이 너무도 당연해 행복하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던 날, 침략자가 들이닥쳐 온 나라를 짓밟았다. 세상은 허망하게 무너졌고 자고 일어나면 수많은 이들이 자취를 감췄다.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전장에서 청년은 처절한 투쟁 끝에 살아남았으나 그뿐. 황폐해진 세상에 희망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한 명도 지키지 못했다. 청년은 폐허가 된 고향에서 목숨만을 건진 것에 불과했다.

청년을 비롯해 몇 되지 않은 생존자는 이후의 싸움을 어떻게 할지 선택해야만 했다. 전장에 남아 마지막까지 악귀처럼 적을 물어뜯는가. 혹은 싸움을 일시적으로 미루고 희망을 찾아 전장을 떠나야 하는가. 그때 적은 압도적인 병력과 힘으로 그들 저항군을 마지막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평화 속에서 살아온 탓에 제대로 무장하지도 못한 저항군이 맞게 될 결말이란, 뻔했다. 몇몇은 그래도 전장에서 끝까지 싸우길 택했으나, 청년은 전장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폐허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너절한 것들뿐이다. 희망을 찾으려면 폐허를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향해야 했다. 전장이라는 폐허에서 벗어나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싸우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고향에 남기로 한 동료들에게 그런 생각으로 작별을 고한 청년이 향한 곳은 과거 그가 자라난 나라처럼 평화가 당연한 세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무기를 들 필요도, 내일을 걱정하며 잠들 이유도 없는 곳. 청년은 언젠가 다시 시작할 싸움을 위해 신분을 숨기고 이국에 파고들었다. 그곳에서 희망을 찾아,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다짐하고서.

연고자도 없이 무턱대고 이국을 찾은 청년을 받아준 자가 있었다. 청년의 세상을 짓밟은 침략자를 적으로 둔 사내. 침략자의 폭주를 막기 위해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조용히 싸움을 준비하는 자였다. 같은 적을 둔 데다 이미 전장에서 오래도록 굴러 전쟁에 대해 잘 아는 청년은 그에게 유용한 패가 될 수 있었다. 사내는 청년을 언젠가 전장에 세울 생각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기댈 곳 없는 이방인인 청년이 이국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게 된 것은 그 덕분이었다.

그것으로 안전은 확보했다. 언젠가는 사내의 지원으로 적에 맞서게 될 테니 미래에 대한 희망도 얻은 셈이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될 무렵부터 그를 괴롭히던 통증은 조금도 사그라질 기미가 없다. 매일같이 날을 세우는 통증은 그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으나 검진을 거쳐도 드러나는 병은 없다. 당연히 별다른 해결책이 있을 리 없다. 청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진통제를 통해 일시적으로 통증을 누르는 것뿐.

살아가면서 청년이 겪은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을 거쳐도 경험하기 어려울, 지독한 상실이었다. 이른 나이에 찾아든 절대적인 상실에 질식해 쓰러진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청년은 그것을 버텨냈다. 다만 그것에 극복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는 상실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저 쓰러지지 않고 버텼을 뿐이니. 전장에서 벗어나면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어졌으나 그라는 인간은 이미 황폐해진 후였다.

아마 통증은 거기에서부터 비롯했을 것이다. 불행에 짓눌리고 상실에 찢기는 과정에서. 고향에 남은 동지들에게 희망을 약속했기에 무너질 수는 없었다. 싸움이 남아있기에 무장을 거두고 쉴 수도 없었다. 그렇게 버텨내고 억누르는 동안 풀어내지 못했던 것들이 후유증으로 남아 청년을 잠식하는 것이리라.

삶은 언제나 그에게 악의적이었다. 소년기에 닥친 전쟁은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으며 그의 삶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다. 행복했던 날들도 이후의 불행을 더 깊게 만들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피폐해진 그였다. 그나마 목숨은 건졌고 절망에 완전히 먹히지는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처지였기에, 청년은 통증을 참아낼 수 있었다. 언젠가 다시 시작될 싸움에서 장애물이 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청년이 통증에 체념한다 해서 통각이 얌전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통증에 익숙해졌다 해도 온몸을 날카롭게 찌르는 통증은 숨이 막혔다. 통증이 극에 달할 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진통제를 삼키는 것은 그것이라도 없으면 일상을 이어가는 것도 어려워서였다. 여느 날처럼 진통제를 삼킨 청년은 통증이 한결 가신 덕분에 자신을 거둔 사내에게 무언가 고할 것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대로 사내의 방으로 향해 노크했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참지 못한 청년은 결국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곳에서 보게 된 것은.

죽고 싶기라도 했나, 도련님?”

사내는 힘겹게 눈을 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이 흐려진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무사히 깨어난 것을 보면 누군가 자신을 구해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저런 불손한 말투라면, 자신을 구하고 깨어날 때까지 지켜봐준 자는 아마도.

쿠로사키인가.”

청년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발견한 것은 피웅덩이 속에 쓰러진 사내. 근처에는 피가 묻은 칼날이 떨어져 있었다. 청년은 황급히 사람을 불렀고 다행히 최악의 사태만은 막을 수 있었다. 사내의 상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청년은 비로소 그가 쓰러진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왜 그는 자해를 택했는가. 부족함 없는 삶에 짊어진 것도 있는 자가 죽음의 위기까지 갈 정도로 부주의하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에 대해 본인에게 직접 물을 생각으로 청년은 사내가 깨어날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할 정도로 멀쩡해졌으면 말씀해보시지, 도련님.”

신분을 숨기고 사내가 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청년은 공식적으로는 사용인 신분으로 사내에게 들어섰다. 도련님이란 호칭은 거기서 비롯한 것이지만, 사적인 자리에선 꺼낼 이유가 없는 호칭을 꺼낸 것은 꽤 짓궂었다. 사내는 손목에 흉측하게 남은 상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통증을 탐구하고 싶었다.”

엉뚱한 말에 청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고작 그걸 위해 죽기 직전까지 몸을 몰아붙였다고? 생각보다 무모한 인간이군.”

살면서 통증이란 걸 느껴본 적이 없어. 죽음의 위기까지 간다면 어쩌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

타고나길 영민했던 사내는 파헤치고 싶은 것은 만족할 때까지 연구해 의문을 해결해왔다. 잘 벼린 이성과 천재적인 두뇌로도 파헤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단 하나, 통증이었다. 감각의 영역은 그도 어찌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통증을 느끼고 싶었던 이유는?”

너를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나를?”

너의 삶은 명백히 통증에 지배당하고 있으니까.”

사내는 몇 번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가 느끼는 통증은 어떤 것이냐고. 끔찍한 통증을 살아가는 한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짐 정도로 체념하고 있었던 그는 그때마다 건성으로 답을 돌려줄 뿐. 어쩌면 사내는 진정 그의 통증을 연구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통증을 파헤치고, 그것을 통해 통증에 얼룩진 그의 삶을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미지의 영역을 간접적으로 헤맴으로써.

통증을 아예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통각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럼 몸을 몰아세워봤자 몸을 학대하는 것에 불과할 텐데.”

통각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청년은 잠깐 상상해보았으나 이내 생각을 흩었다. 통증을 느낀 적 없는 사내가 죽음에 가까워져도 통증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통증에 지배되어 살아온 자신은 통증을 잘라낸 삶이 그저 낯설었다.

직접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니 공허한 말에 불과하겠다만 정 궁금하다면 어떤 것인지는 말해주지. 내게 통증이란 절망 같은 것이었다.”

절망이라.”

나에게 달라붙어 조금도 나를 놓아주지 않으며, 기력을 꺾고 숨을 멎게 하는.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조금이라도 그것을 잊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는. 실패를 겪어본 적 없을 네가 절망을 이해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만.”

청년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사내에게 물었다.

답이 되었나?”

조금은.”

그렇게까지 파헤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인간을 망가뜨리기 때문인가?”

그래. 철저하게. 하지만 그만큼 인간을 돕기도 하지.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경고음이라는 점에서.”

통증이 시작되면서 청년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언제 발작적인 통증이 찾아들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수없이 몸을 점검하고 관리해, 열악한 환경에서조차 몸 상태가 크게 악화되지 않은 건 순전히 통증이 사납게 날뛰기 때문이었다.

너는 살면서 영영 통증을 느낄 일이 없겠지. 통증으로 괴로울 리 없다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만큼 조심하라고. 몸이 브레이크를 걸어주지 않는다면 자신을 과신하거나 혹사시키기 쉬우니까.”

내 몸은 내가 관리하고 있어.”

물론 그러시겠지. 하지만 통증만큼 직관적인 위험신호는 없거든. 그러니 조심해두는 건 나쁘지 않아. 게다가.”

청년은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했다. 자신과 크게 차이도 나지 않는 나이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었다. 세상을 삼키려는 미친 정복자에게서 세상을 지키기 위해 전사를 모으고 전쟁을 준비하는 것. 그리고 멀지 않은 미래에 저항군을 지휘해 적을 쓰러트리는 것. 세상의 운명이 걸린 중한 일이 전부 그 젊은 사내에게 달려 있었다.

게다가 너는 무리하기 쉬운 위치에 있으니.”

정 걱정된다면 네가 조절해주면 되지 않나?”

돌아온 것은 웃음 섞인 말이었다. 안경 너머의 보랏빛 눈도 뜻밖에 웃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되어달라고?”

그래.”

청년을 한동안 지켜본 결과 사내는 결론지었다. 그는 자신을 맡겨도 좋을,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그라면 자신이 맡은 위중한 임무를 도울 수 있을 거라고. 그가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운이 좋아서일 뿐만은 아니었다. 어떤 고통에도 꺾이지 않고 버티는 굳건한 인간이기에 그랬다. 앞으로 자신이 갈 길은 고통스럽고 위험한 길이나, 그라면 무리 없이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에겐 단 한 번도 허락된 적 없는 통각까지 파헤치면서라도.

성가신 일을.”

얼굴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목소리는 그리 퉁명스럽지 않았다.

불편하다면 하지 않아도 좋지만.”

아니, 됐어. 네가 망가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쪽이 내게도 좋겠지. 일단은 아군이니까.”

아군이라. 네게서 들으니 그만큼 든든한 말이 없군.”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그렇게 부를 수밖에.”

문득 방문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주인의 사고를 전해들은 사용인들이 하나둘 모여든 모양이었다. 그 소란스러움에, 사내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무사함은 확인했다. 앞으로 회복하고 본래의 생활로 돌아오는 일만 남았으니 굳이 그의 곁을 지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에게도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후에 자신과 함께 싸우게 될 저항군 후보를 추리는 일.

그럼 빨리 회복하시길, 도련님.”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청년은 불손한 협력자의 모습을 지우고 충직한 사용인을 연기했다. 두 사람이 준비하는 미래에 대해 모르는 이들 앞에선, 그래야만 했다.

언제나 몸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당신은 중요한 일을 맡았으니.”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고, 청년은 안심한 듯 희미한 웃음을 걸치고 돌아섰다. 문이 열리고 청년이 사라지자 사내의 시선은 손목에 남은 흉터로 향했다. 깊숙한 흉터는 시간이 흘러도 희미해질 뿐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파헤치려 했던 어리석음의 증표로. 사내는 조금 전까지 제 곁을 지켰던 이를 떠올렸다. 어리석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소득이 영 없지는 않았다. 그것으로 그는 흉터를 끝까지 안고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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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