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에 꽂힌 꽃은 막 피어오른 듯 생생했다. 화병에 꽂힌 것이 벌써 몇 달이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녀는 무심하게 꽃을 매만지다, 화병 속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래는 물 한 방울 머금지 않은 메마른 바닥이다. 자연의 법칙을 간단히 어긴 꽃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마치 누군가 꽃의 시간을 동결하고 생물로서의 특질을 빼앗아 영원히 세상에 묶어둔 듯했다. 쇠하지 않는다는 점은 조화를 닮았으나 손을 타고 전해지는 감촉은 생화의 것이었다.
꽃을 오래도록 생생하게 보존하려던 이들이 시간의 침범을 막기 위해 약품처리를 거쳐 만들어낸 꽃이라고 했다. 꽃을 가져온 이에게 그 진실을 전해 들었을 때 인간의 손이 닿지 않고서야 저런 기괴한 것이 태어날 리가 없다고 납득한 기억이 있다. 밀려드는 시간에 감히 손을 대려는 것은, 죽음을 막으려 버둥거리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었다. 생명을 가진 것이라면 날이 갈수록 쇠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어리석은 저항을 거듭하는 것이다. 영원을 손에 넣으려던 인간의 노력은 완벽한 성공은 거둘 수 없었으나 저렇게 일부나마 성공을 거두는 일은 종종 있었다.
과거, 누군가가 시드는 것에 슬퍼할 일 없이 오래 볼 수 있다며 그녀에게 안겨주었던 꽃이었다. 소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꽃을 받아들어 화병에 아무렇게나 꽂아두었다. 그로부터 몇 달. 여전히 생생한 꽃을 볼 때마다 소녀는 불쾌해졌다. 시들어야 할 것이 시들지 않는다. 양분을 빨아들여 생존해야 할 것이 그늘진 곳에서 물 한 방울 없이도 생생했다. 내부에 있던 것을 긁어내고 새로 넣어 생전의 모습을 유지하는 박제 같다. 사람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영원이 그녀는 혐오스러웠다.
인간의 조작으로 분에 넘치게 생존하는 꽃을 한동안 살피던 소녀는 거울 앞으로 향했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희어, 병자나 시체를 연상시켰다. 소녀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는 얼굴에 화장으로 생기를 불어넣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연적으로는 생기를 찾을 수 없어 화장을 덧씌워 창백한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자신의 병적으로 흰 피부를 싫어했다. 아무리 봐도 살아있는 인간 같지가 않았다.
물론 소녀는 제 피부가 왜 그러한지를 안다. 죽음이 휩쓸고 간 사람이기에 그랬다. 시체에서 생기를 찾아볼 수 없듯 자신도 죽음에 먹히며 생기를 잃었을 뿐이다. 그나마 본래라면 부패했어야 할 것이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소녀가 죽음을 맞은 그 순간에 그녀의 시간이 동결되었기에 가능한 일. 이미 죽었기에 성장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늙어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동결된 시간이 다시 흘러가지 않는 한, 소녀는 지금의 모습으로 불변하는 것이다. 영원에 묶인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사람들은 예정된 죽음을 두려워하고 쇠하는 것을 꺼려 영원을 갈망하지만, 소녀에게 영원이란 고통스러운 저주였다. 늙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삶을 바란 적은 없었다.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다 평범하게 쇠하고 잠들길 바랐다. 그런 그녀의 시간을 동결하고 영원의 짐을 지운 자는 그녀도, 그녀의 형제도 아닌 완전한 타인이었다. 그런 주제에 제멋대로 그녀를 구한 것이다. 망자의 시간을 동결해 부패를 막고, 숨을 불어넣는 것으로 되살려서. 저주라도 받은 양 지독하게 불행했던 삶은 그 덕분에 끝나지 않았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살아가야 하는 것도 전부 그 탓이었다.
죽었어야 할 사람이 살아 움직이게 되었으므로 소녀는 양지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세상엔 이미 그녀의 죽음이 알려졌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유령으로 움직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소녀는 구원자가 내준 방에서 숨어 지냈다. 소녀의 존재에 대해 아는 자라곤 소녀를 살린 자, 하나뿐이었으며 그녀가 만나는 이도 그가 전부였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상대만 마주하는 삶에 소녀의 세상은 필연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소녀의 두 번째 삶은 결코 살아있는 이들과 같을 수 없는 불완전한 삶이었으나, 그녀의 구원자는 그녀를 구해낸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듯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소녀는 모른다. 생전에 그와 얽힌 적이 있긴 했으나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그는 목적을 위해 소녀에게 접근했고 그녀는 그에 휘말려 삶이 뒤엉켰을 뿐. 자신으로 인해 뒤엉킨 삶이 이른 종말을 맞을 때서야 그는 죄책감을 느낀 것인가. 혹은 동정했나. 그의 푸른 눈에선 무엇도 읽어낼 수 없었다.
본디 자신을 꾸미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 소녀 앞에 보인 모습도 전부 연기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가 자신에게 삶이 뒤틀린 이에 대해 한순간이나마 죄책감이나 동정 따위를 품기나 했을지도 의문이었다. 어쩌면 그녀를 살린 것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에 제 힘을 과시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소녀에 대한 그의 행동은 지극히 친절했으나 그를 보는 소녀의 시선은 따뜻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이 어떠했건, 지금의 새로운 삶이 그녀가 바랐던 것이라면 그저 감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은 바란 적 없는 것이었고 다시 깨어난 세상은 그녀가 사랑할 수 있을 곳이 못 되었다. 사랑하던 이들은 전부 쓰러졌다. 대신 적대하던 이들이 활개치며 세상을 야금야금 삼키고 있었다. 소녀는 매일 세상이 끔찍하게 변해가는 것을 살아서 보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타인 앞에 설 수도 없는 인간으로서 세상의 격변에 저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녀는 무엇에도 관여할 수 없는 무력한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다.
“자. 새로운 삶이에요.”
두 번째 삶을 선물하며, 그는 왜 그런 말을 했던가. 무엇 하나 나아지지 않은, 이어가고 싶지도 않은 삶이었는데. 죽음에서 깨어난 그녀는 눈을 깜빡여 자신에게 숨을 불어넣은 이를 보았다. 하필 자신을 가혹한 운명으로 내몬 청년이었다.
“더 이상 운명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 말이에요.”
구원자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무엇에 들뜬 것일까. 타인을 되살렸다는 것에 대해? 혹은 제 뜻대로 누군가의 삶을 조종했다는 것에? 운명에 휘둘려 불행할 수밖에 없었던 삶은 저물었다. 새롭게 시작된 삶은 그의 말대로 이전의 운명은 따르지 않을 터다. 그러나 이번엔 당신이 내 운명을 지배한 것 아닌가요. 참 끈질기게 내 삶에 관여하는군요. 죽음까지 방해하며. 깊은 곳에서 치미는 말을 소녀는 소리로 꺼내진 않았다. 다만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이제 이 세상에 당신을 이용할 사람은 누구도 없어요.”
“그야, 이미 사용되었으니까요.”
“그러니 앞으로는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겠죠.”
“그래서 나를 살렸나요? 평화롭게 살게 해주려고?”
“기쁘지 않은 것 같네요. 이런 삶을 바랐던 것 아닌가요? 운명 따위에 조종당하지 않는.”
“당신이 선물할 것은 아니었죠.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것도 아니었고요.”
죽어 부패해야 할 사람이 깨어나 자신을 살린 이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으나, 소녀는 조금도 쇠하지 않아 평범한 자들의 대화처럼 보였다. 소녀가 몸을 누인 곳이 관이라는 것만이 그 평온한 풍경 속에서 괴상했다. 청년은 소녀의 말에 맞서는 대신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요. 이건 내가 멋대로 선물한 것에 불과하죠. 하지만 이미 주어진 삶이라면, 우선 이어가는 게 어때요?”
내밀어진 손은 과거, 그들이 처음 만난 날 청년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도 그는 기사처럼 몸을 숙이고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관계의 시작이었다. 그 손을 잡은 순간 소녀는 지독한 운명에 휘말려 이른 종말을 맞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그는 멋대로 소녀의 운명을 결정짓고서 그녀에게 따르길 요구하고 있었다. 지독한 사람이구나. 소녀는 냉소하며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도 확신하지는 못하는군요?”
“나는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지만, 멋대로 안겨준 삶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리라 확신하는 건 너무 뻔뻔한 일이겠지요.”
나긋한 목소리에 악의는 없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고 소녀는 날을 세운 말보다 그의 저러한 말이 더 불쾌했다. 검은 속내도 능숙하게 감출 수 있을 것 같아서. 소녀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의 손을 떨쳐냈다.
“아. 쌀쌀맞기도 해라.”
청년은 싱글거리더니 관을 빠져나와 그를 등지고 걸어가는 그녀에게 말을 던졌다.
“미워해도 괜찮으니 내게로 와요. 당신이 살아났다는 게 들키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돌아보자 청년은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누구도 당신을 손댈 수 없는 곳을 내줄게요.”
그제야 소녀는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가 되었는지 알았다. 세상에 발을 내디딜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보호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이 되지 않았는가. 운명에 휘말려 타인의 손에 놀아나다 죽고는 또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무력한 자신도 호의의 이름으로 자신을 묶어두는 청년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소녀는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그를 따라 그의 공간으로 들어서며 자신이 그의 새장에 갇히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의 새장은 안전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그가 내준 곳이고, 몸을 두는 이상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괜찮은 피신처였다. 급변하는 세상은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을 빠르게 삼켰으나 새장에 묶인 소녀에까지 손길을 뻗치진 못해 소녀는 무사했다.
하루가 끝날 즈음 오늘도 살아남았음에 감사해야 했던 이전의 삶과는 너무도 다른 나날에 소녀는 되레 숨이 막혔다. 그것은 세상에 ‘없는 사람’이기에 누릴 수 있는 평화였다. 살아있는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광풍에 휩쓸려 쓰러졌거나, 운이 좋다면 세상을 제멋대로 바꾸는 이들에게 맞서 싸웠을 것이다. 세상에 그녀의 자리가 없기 때문에, 청년이 그녀를 자신의 새장에 가둬놓기 때문에 소녀는 살아남았다. 결국 평온이야말로 그녀의 무력함을 비춰주는 호수였다.
공들여 화장을 마친 소녀는 다시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병적으로 흰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금세 지워져 본모습을 보이는 불완전한 치장임을 알면서도 화장을 하는 것은 청년이 제 삶에 관여한 흔적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그가 소녀에게 지운 것은 영원. 죽음의 순간에 멎어버려, 소녀는 쇠하지도 생기를 되찾지도 못하는 살아있는 시체가 되었다. 시간이 동결되어 부패할 수 없다면 살아있는 사람을 가장하는 것이다. 죽음이 스쳐간 흔적을 지움으로써.
과거에는 번거로이 화장을 하지 않아도, 뺨이 물들고 생기가 돌았다. 그때의 그녀는 살아 숨 쉬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소녀는 가만히 제 가슴에 손을 얹어보았다. 이미 멈춰버린 심장은 다시 뛰지 않는다. 떨어진 체온도 살아있을 때처럼 올라오는 일은 없다. 몸 구석구석에 죽음의 흔적이 선명한데, 움직이고 세상을 느끼고 있다. 그 모순에 소녀는 웃었다. 자신은 분명, 몇 달이나 시들지 않는 꽃처럼 단단히 잘못된 존재일 것이다.
*
청년에게는 사물의 시간을 동결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것은 전부 그 순간 그대로 얼어붙어 불변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영원히 보존하는 능력이라, 청년은 시간이 흐를수록 퇴색되기 마련인 모든 것을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고정시킬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 통하는지는 청년도 몰랐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능력으로 보존했으나, 근원 모를 꺼림칙함 때문에 생물에게 능력을 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살아 움직이는 것에 손을 대면 어떻게 될까. 혹은 막 죽은 생물에 손을 대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언제나 머리를 때리는 의문이었다.
물론 청년은 한편으로는 짐작하고 있었다. 생물에게도 이전까지의 모든 사물이 그랬듯 제 능력이 통하리라고. 살아 움직이는 것에 손을 대면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갈 것이고 죽은 생물에 손을 대면 그 이상 쇠하지 않고 표본처럼 불변하리라. 언제나 속으로 짐작하고만 있던 것을 실제로 확인하게 된 것은, 그가 죽은 자의 시간을 동결했을 때였다.
모두가 탐할 능력을 타고나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소녀가 있었다. 자신의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소녀를 그 능력에 주목한 상부로 넘기는 것이 청년이 받은 임무. 청년은 자연스레 소녀에게 접근해 그녀와 친분을 쌓다가 결국은 그녀를 운명에 몰아넣었다. 이후 소녀는 납치당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자의 손에 넘어갔고 끝까지 이용당하다 죽음을 맞았다. 이상향을 만들기 위한 신성한 제물로서.
청년은 섬기는 이에게 특별히 청해, 죽음의 순간까지 이용당해야 했던 불행한 소녀의 시신을 손에 넣었다. 필요가 다하고 생명이 꺼진 껍질 따위는 어차피 누구도 주목하지 않으리라 믿고서. 그가 생각한 대로 죽은 소녀를 손에 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막 생명이 꺼진 소녀는 관 속에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죽음과 함께 산 자로서의 온기는 빼앗겼고 핏기도 사라졌으나 그 외엔 생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이 소녀의 시간을 동결한다면. 죽은 소녀를 내려다보던 청년은 가만히 그 뺨을 쓸며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소녀는 영원히 이 모습으로. 한동안 관찰했으나 소녀는 조금도 부패하지 않은 채 그가 막 손에 넣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영원의 능력은 죽은 자에게까지 통했다. 만족한 청년은 거기에 하나를 더하기로 했다. 썩지 않는 시체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쇠하지 않는 몸에 생명을 다시 피우는 것이다. 성공한다면 그녀는 영원히 살게 되리라.
왜 하필 그녀를 되살리려 했는지 청년은 알지 못했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하기에는, 시험할 재료는 수없이 많았다. 혹시 그녀가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로 남은 것일까. 떠오른 의문에 청년은 답하기 어려웠다. 세상에는 소녀와 같은 운명을 지닌 소녀들이 더 있었고, 그 일부와도 만나 함께한 적이 있었다. 그녀들에게도 죽은 소녀에게처럼 친절하게 접근해 아군 행세를 하며 가까워졌는데, 소녀만이 특별하단 말인가. 아니면 죽은 소녀에게 죄책감이라도 품었던 것일까. 자신을 믿고 마음을 열었을 소녀를 가혹한 운명에 던진 것이 혹 마음에 걸렸던 것인가. 청년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소녀는 그가 살아가며 마주한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을 뿐이다. 상부의 뜻에 휩쓸려 불행해진 이는 수없이 많았으니, 자신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이라고 소녀를 특별히 동정할 것도 없었다. 상부의 명령을 따르는 과정에서 그녀의 삶에 본의 아니게 관여했을 뿐. 운명에 놀아난 그녀의 삶은 청년에게 크게 주목할 거리가 못 되었다.
그렇다면 임무가 끝난 후엔 크게 돌아보지도 않았던 목표물의 죽음에 왜 갑자기 관심을 두게 되었는가. 그저 땅에 들게 두면 되었을 것을. 아무리 고민해도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어 청년은 가벼이 생각하기로 했다. 소녀의 종말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라고. 운명에 철저하게 농락당하다 이른 나이에 지긴 했으나, 소녀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세상에 닥친 전쟁에 맞섰고, 붙잡힌 후엔 자신의 능력을 탐하는 이에게 저항해 그가 꾀하는 것을 막으려 애썼다. 그 처절한 투쟁에도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 소녀의 종말은, 허망하여 아름다웠다.
생명이 꺼질 때까지 부질없는 저항을 멈추지 않은 가여운 사람. 아마도 소녀에게 따라붙은 그 수식어가 자신이 그녀에 주목하도록 한 원인이리라. 청년은 그렇게 생각하고서 영원히 썩지 않을 망자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것으로 청년은 자연의 법칙을 두 번이나 어겼다. 처음으로 법칙을 어긴 것은 그녀의 시간을 동결한 것. 다음으로 어긴 것은 생명이 떠난 육신에 다시 생명을 피운 것. 소녀는 그렇게 모순을 품은 채 다시 태어났다.
죽은 소녀가 눈을 뜨고, 붉은 눈에 다시 세상을 담았다. 청년은 관 속에서 깨어난 생명을 아비처럼 내려다보았다. 소녀의 첫 번째 삶이 세상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면 두 번째의 삶은 자신이 부여한 것이었다. 영원히 무엇 하나 변하는 일 없을 그녀의 몸도 자신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소녀의 부활에는 무엇 하나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청년은 그녀의 새로운 삶을 제가 독점했다는 것에 묘한 희열을 느꼈다.
죽은 자가 마법처럼 깨어났다 해도 이미 세상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상 사람들 틈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청년은 자신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을 소녀의 몫으로 내주었다. 그곳에서 소녀가 무사히 살아가도록. 그곳은 누구에게도 쫓기지 않는 안전한 은신처인 동시에 그가 관리하는 새장이었다. 소녀는 청년이 마련한 세상에서 그만을 접하며 숨어 지내는 것이다. 청년은 소녀의 세상마저 지배하고 있었다.
소녀는 새로운 삶도, 그 삶에 하나하나 관여하는 청년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그의 도움을 얻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선 말없이 받아들였다. 사랑하던 것은 모두 빼앗기고 고향은 무엇 하나 자랄 수 없는 폐허로 변했다. 돌아갈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그녀에겐 선택권 따위 없었다. 제게 주어진 호의를 수용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세상은 예부터 그녀에게 유독 악의적이었다. 그녀가 고통에 지쳐 질식하길 바라는 것처럼. 그러나 소녀는 자신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악독하게 버텨왔다. 청년의 호의를 받아들인 것도 그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반가워요. 루리.”
단 두 사람만이 아는 공간에 들어서며 청년은 명랑하게 인사를 던졌다. 그가 소녀를 위해 마련한 새장이었다. 자신에게 날아드는 목소리에 앉아있던 소녀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향했으나 그 얼굴엔 반가움이라곤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잘 지냈나요?”
“덕분에요.”
소녀는 건성으로 답하며 화병의 꽃을 매만지고 있었다. 약품처리를 거쳐, 그녀처럼 시간이 동결된 꽃이었다. 몇 달 전에 선물한 것인데도 금방 피어난 것처럼 생생했다. 영영 쇠하지 않을 이에게 시들지 않은 꽃이라. 제법 짓궂은 선물이었다.
“마음에 드는 건가요?”
“아뇨, 그냥 우스워서요. 인간이 억지로 수명을 연장해 제때 시들지 못하는 것이.”
“꽃은 너무 쉽게 시드니까요.”
“생명은 피어났으면 시들어야죠.”
소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자신을 덧씌워 보는 것인가. 청년은 엷은 웃음을 걸쳤다.
“시들지 않는 생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모순이에요.”
“나는 다르게 생각해요, 루리. 아름다운 순간을 보존하려는 것은 인간에게는 흔한 욕망이죠. 덧없는 것을 알기에 인간은 영원을 소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에겐 이게 아름답나요?”
소녀는 화병에서 꽃을 두어 송이 뽑아 청년에게 내밀며 물었다. 물 한 방울 없는 곳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꽃이 그의 눈에 담겼다.
“아름다운 모습만을 유지하는 꽃이라, 물론이에요.”
“내게는 징그러워요.”
소녀는 남은 꽃을 전부 뽑아내더니, 미련 없이 버렸다. 몇 달이나 피고도 여전히 생기가 도는 꽃이 단숨에 쓰레기 속에 쏟아졌다. 버려진 꽃에서 소녀는 썩지 않는 자신의 몸을 본다.
“다음에는 쉽게 피어나고 죽는 것을 가져오도록 할까요?”
“아뇨. 이곳에 아무런 생물도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은 진심이었다. 어떤 생물이든 소녀는 자신을 비춰보게 되었으므로. 피어나 시드는 보통의 생물에서는 죽어서도 깨어난 자신을 보고,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한 생물에서는 부패하지 않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양쪽 다 그녀에게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는 그녀를 배려해 청년은 여러 생물을 가져왔으나, 소녀는 저러한 이유에서 좀처럼 정을 붙이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 죽이곤 했다. 걸핏하면 시들거나 죽는 생물을 치우는 것도 여러 번. 청년은 소녀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자신이 선물한 영원을 소녀가 혐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 지쳐 그녀가 조금씩 닳아가고 있다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유령으로 연명하느니 마지막까지 운명에 저항하다 죽어 잠든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말한 적은 없으나 청년은 마음만 먹으면 그녀에게서 생명을 거두고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흘러가게 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소녀는 여느 망자처럼 부패하리라. 그런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은 순전히 그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녀가 살아있는 쪽이 좋았다. 그것이 그녀를 미치게 하더라도. 살아있다면, 영원하길 바랐다. 주변의 모두가 늙어가더라도. 그리고 그녀에겐 언제나 자신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본래의 시간을 돌려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소망은 무너지고 그녀는 평범한 주검으로 변해 땅에 들어야 했다.
“아름다운 순간을 보존하려 하는 건 흔한 욕망이라고 했죠. 당신도 그런가요?”
“당신이 그 증거죠. 당신을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멎게 했어요. 모두가 늙고 부패해도 당신만은 이 모습으로 남도록.”
“그게 나에게도 의미가 있나요?”
“의미라. 나는 영원히 아름다운 것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다고 보지만, 당신이 말하는 건 다른 거겠죠.”
소녀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나긋한 목소리로 그녀가 관심을 품을 법한 것을 전했다.
“아크 에리어 프로젝트도 끝을 앞두고 있어요. 진행되는 것을 보니,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 매몰된 도시들을 그곳에 새로 구현하려는 계획도 있는 모양이에요.”
거기서 청년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소녀의 눈에 떠오른 열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깨어난 후 자신의 무력함을 자각하고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눈이 열기를 띤 건 오랜만이었다. 그의 말에 희망의 실마리가 비쳤기 때문이리라.
“하트랜드도 어쩌면 재건될지도 모르죠.”
무너진 고향의 이름에 소녀는 동요했다. 절망에 수없이 짓눌리고도 고향에 대한 희망적인 말에 바로 반응할 정도로 그녀에게 고향이란 중대한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고향에서 영원히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가장 생생한 모습으로, 시드는 일 없이.”
소녀는 기도하듯 손을 모은 채 청년에게서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새롭게 피어날 세상을 그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얼굴에서 드물게 간절함이 비쳐 청년은 슬며시 불쾌해졌다.
“사랑하는 곳에서라면, 영원히 살아가는 것도 좋은가요?”
심술궂게 물은 청년은 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속삭였다.
“지금 그 삶을 사랑해도 좋을 텐데.”
청년은 소녀의 손을 가만히 제게로 가져와 그녀가 낀 장갑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이 무엇을 가리기 위함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백한 의도가 담긴 행동에 소녀는 차게 웃으며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
그러자 청년은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레 그녀의 장갑을 벗기고 그 손등에 키스했다. 입술을 타고 전해지는 것은 한기. 죽음과 함께 온기를 잃은 그녀의 몸은 언제나 차가웠다. 그걸 숨기려 장갑을 끼는 것이다. 그녀가 핏기 없는 얼굴을 가리려 화장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그녀의 차가운 손과 병적으로 흰 피부를 사랑했다. 그것은 자신이 그녀에게 새긴 영원의 흔적이므로.
“당신은 영원히 아름답고 생생할 거예요. 영원의 증거를 힘들게 숨기려 하지 말아요.”
“그걸 바랐다면 이 삶을 사랑하게 해주지 그랬어요.”
“어떻게요? 무너진 엑시즈를 되살려서? 아니면 당신의 죽은 오빠를 살려내서? 엑시즈는 아카데미아에 먹혔고 당신 오빠는 썩어가고 있을 텐데요?”
소녀가 죽은 시점에, 이미 그녀가 돌아갈 세상은 사라진 후였다. 그녀를 찾아 헤매던 하나뿐인 형제도 끝내 죽었다. 따라서 청년은 그녀가 사랑하는 그 무엇도 줄 수 없었다. 그가 선물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삶과 긴긴 세월에도 쇠하지 않도록 그녀를 묶어둘 영원뿐.
“희망이 없어도 살아줘요. 지친 채로도 살아줘요. 괴로운 세상에 다시 당신을 던진 나를 실컷 미워해도 좋으니까.”
청년은 처음으로 간절함을 담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언제나 명랑하게 튀던 그의 목소리가, 낯설게 가라앉았다.
“그러니 영원을 받아들이고 삶을 이어가요.”
“참 이기적인 사람이군요.”
소녀는 그의 손을 떨쳐냈다. 건조한 목소리에선 그의 요구에 대한 동요는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소망이 어떠하든, 영원에 묶인 것은 그녀였고 고통스러운 삶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도 그녀였다. 결국 그는 그녀의 삶에 무언가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타인이 제멋대로 선물한 영원을 혐오하고 두 번째 삶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그녀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뻔뻔하기도 하지.”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에게서 벗어난 소녀는 그를 등진 채 선언했다.
“나는 당신 따위로 움직이지 않아요. 앞으로도, 영원히.”
그것은 매정한 거절이었고, 자신의 삶을 지배하려 드는 자에 대한 저항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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