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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2.28 [슌 중심] 유물에 관하여 : Side Y

 

 

  방에 들어서자마자 발견한 것은 다발째로 화병에 꽂은 프리지아였다. 화사한 색채의 꽃잎이며 은은한 향기가 바로 감각을 자극한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없었던 꽃이, 그것도 잘 포장된 다발이 화병에 꽂혀있는 이유라면 하나. 누군가가 선물한 것이다. 아버지는 꽃을 선물한다는 센스는 없는 사람이다. 가끔 소꿉친구가 꽃을 내밀긴 하나, 프리지아를 고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게 소거하다 보면 꽃을 준비한 사람은 한 명으로 좁혀진다. 화병이 놓인 테이블에 마침 그 사람을 짐작할 단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꽃을 배달할 때 꽃집에서 끼워주는 메시지 카드였다.

 

  『 히이라기 유즈에게.

  대회 수상을 축하하며.

 

  흘려 쓴 글씨의 주인은 뻔했다. 사실 프리지아 꽃다발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며, 다발의 크기며 메시지의 내용까지 매번 거의 비슷비슷했다. 삐뚤빼뚤한 필체도 마찬가지. 그동안 한 번도 보낸 이의 이름이 없었던 것은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리라. 아는 이가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꽃을 보내줄 정도로 섬세한 그 사람, 너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기조차 싫어했으니.

  눈앞에 네 모습이 그려진다. 창백한 얼굴과 표정 없는 얼굴. 낡은 코트를 단단히 여민 채 상대를 냉랭하게 내려다보던 청년. 혹은 전장에서 닳아버린 소년병. 너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왔다. 네 고향에서 일어난 전쟁은 세계를 덮을 뻔했으나, 용감하게 나선 정예병이 결국 싸움을 끝냈다. 살아남기 위해 무장했던 너는 그렇게, 전쟁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지금 네가 평화 속에서 살며, 내킬 때마다 꽃을 보낼 수 있는 것도 그 덕분.

  “, 유즈. 그 꽃 이번에도 배달 왔더라고. 뭐라고 했지? 프리지아?”

  고개를 숙여 꽃향기를 맡을 때, 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또 그 사람이네.”

  “그 사람이 누군데?”

  “비밀.”

  “열렬한 팬이 생긴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다시 방문을 닫았다. 아버지에게 너를 소개하기란 쉽지 않다. 낯선 남자여서가 아니라, 먼 이국에서 온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네가 어떤 인간이며 당신 딸과는 어떤 관계인지 이해시키려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일 복잡한 게 그 아이의 이야기였다. 너의 누이. 아마도 네가, 껄끄러운 여자애에게 자주 꽃을 보내게 만든 이유이기도 한 사람.

  희망을 찾아 고향을 떠나왔다는 너는 전쟁이 끝나고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잠깐 머무를 예정이었던 이 도시에 아직도 남아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누이가 이제는 없기 때문이다. 고향에 가면 분명 너를 따뜻하게 맞아주겠지만, 네 누이의 빈자리 또한 크게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네 누이는 전쟁의 끝에 희생되어서, 종전 후엔 사실상 그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다. 네 앞에서 그 이름을 꺼내는 순간 네가 또다시 절망에 떨어질 게 뻔하니까.

  거울 앞에 서자, 언젠가 네 친우에게서 들은 말이 머리를 울린다. 루리는 내 동료 슌의 여동생이야. 너는 루리를 정말 닮았어. 너는 이국의 여자아이에게서, 사라진 동생을 본다. 그 껄끄러운 타인이 자랄 때마다, 사라진 시점에 멈춘 누이의 성장까지 상상하게 될 것이다. 네가 누이를 닮은 이에게 꽃을 보내면서 정작 그 앞에 직접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누이의 부재가, 동생을 상기시키는 존재가 아직은 너에게 큰 고통을 안기기 때문이다.

  만일 네 누이와 닮지 않았다면, 완전한 타인이었다면. 네가 꾸준히 꽃다발을 준비할 일이 있었을까. 생각할 때마다 속이 텁텁해진다. 메시지 카드를 쓸 때 너는 한두 번쯤은 히이라기 유즈라는 이름 대신, 네게 훨씬 익숙한 이름을 쓰는 것을 상상했을 것이다. 쿠로사키 루리, 네 누이의 이름. 두세 번은 무대에 선 네 동생을 그려보았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상을 흩었을지도 모른다. 네 머릿속에 어떤 상상이 휘몰아쳤건, 마지막에 네가 맞닥뜨린 감정은 언제나 같았으리라.

  씁쓸함. 그리움. 그리고 옅은 절망.

  프로 듀얼리스트 자격을 취득하고부터, 대회에 나설 때마다 너에게 초대권을 보냈다. 시간 나면 한 번쯤 와줬으면 해. 매번 건넨 말에도 너는 한 번도 객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선명한 거절에 조금 슬퍼질 때쯤이면 꼭 프리지아 꽃다발이 배달되었다. 첫 번째 꽃다발과 함께 온 카드에는 바로 그 다음부턴 삭제된 문장이 하나 들어있었다.

  『직접 대회를 보러 가지 못한 것은 미안해.

  그런 말을 쓸 사람은 너밖에 없었으므로, 꽃을 보낸 이가 너라는 걸 그때부터 대강 알아챈 것이다. 그 이후로도 프리지아 꽃다발은, 그때와 같은 필체의 카드와 함께 배달되었다.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네가 객석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마다 하나씩.

  직접 대회를 보러 가지 못한 것은 미안해. 라니. 정말로 미안하다면 모습을 보여주면 되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 관계에 어쩔 수 없이 쌓인 껄끄러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객석에 나타나주었으면. 무대를 보는 순간 동생이 떠올라 괴로울 것 같았다면, 꽃도 보내지 않는 것이 나았으리라. 이렇게 뻔한 행동을 계속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관계는 여전히 어색하고, 너는 동생을 닮은 이를 아직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다.

  서로를 아예 모른 체 하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면, 상황을 바꿔야만 한다. 네 누이는 과거가 되었지만 너는 현재를 살아가기에 타인을 제대로 응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네가 아예 만나주지 않는 것을. 포장도 다 벗기지 않은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네가 어디서 지내는지는 알고 있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너를 부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네가 응해줄 리 없을 뿐.

  너무 많은 것을 잃어 황폐해진 너는 홀로 살아가기 힘들 거라는 주변의 판단으로, 이 도시에서 그나마 너를 잘 아는 사람에게 맡겨져 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이곳에서 정예병을 결성하여 너를 포함한 전사들을 지휘했던 남자. 세계적인 대기업의 사장이기도 한 그 남자는 너를 회사에 두고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네가 가끔 회사의 일을 돕는다고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다.

  회사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너를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시작된 생각에 이내 걱정이 다닥다닥 붙었다. 외부인은 들어가는 것부터 난관이라는데, 가능할까?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서 들어간다고 해도 거의 틀어박혀 있을 너를 찾는 게 가능할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 때였다. 갑자기 통신기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방 안에 놓인 통신기를 집어 들었더니 화면에 메시지가 떠 있었다.

  「유즈, 오늘 오후에 시간 있어?

  예전, 대회에서 대결한 걸 계기로 친구가 된 아이의 메시지였다. 시간 되면 OOO 건물 근처에서 만났으면 해서. 이번에 너랑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눈으로 메시지를 읽었을 뿐인데 그 애의 명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반가운 연락에 답장을 보내려다, 문득 메시지를 보내온 친구에 대한 사소한 사실을 떠올려냈다. 그 애는 네가 머무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학원에 다니고 있다 어쩌면 너와의 연결고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좋아. 오늘 만나. 친구에게 답장을 하면서 너를 떠올렸다. 우선은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메웠다.

  약속장소에 향했더니 친구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거리를 걷고 미리 점찍어둔 가게로 향하는 내내 즐거웠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까지 겹쳐 한참이나 재잘거리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변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눈길을 끈 것은 먹음직스러운 파이와 조각케이크였다. 한참이나 고민하여 몇 개를 골라온 친구는, 수확물을 자랑스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여기, 사와타리가 자주 가던 곳이라던데. 한 번 왔더니 괜찮은 것 같아서 널 데려왔지.”

  큼직하게 자른 케이크를 건네며, 친구는 설명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들뜬 기색이 선명하게 비쳤다.

  “LDS는 커서 그런가, 소문이 잘 퍼진다니  까.”

  “그러고 보면 마스미랑 사와타리 말곤 LDS 소속인 사람들이랑은 한참이나 안 만났네. 다들 잘 지낼까.” 

  “누구 소식이 궁금한데?”

  과연 친구는 바로 반응해주었다. 근황이 궁금한 사람이라곤 하나뿐이다. 언젠가부터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없었던 사람. 사장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이방인. 미리 생각해둔 대로 네 이야기를 슬쩍 꺼내보기로 했다.

  “마스미는 요즘 쿠로사키 만나?”

  “. 가끔 마주치긴 하지. 인사하면 받아주긴 하는데, 그뿐이야.”

  너무 과묵하다니까. 친구는 깔깔 웃으며 파이를 집었다.

  “그런데 쿠로사키는 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았어?”

  “예전에 몸이 안 좋았다고 들은 것 같아서.”

  “이건 LDS에서 떠도는 얘긴데 말이야, 사실 이번에 쿠로사키가 엑시즈 코스 강사가 될 뻔했대. 구체적으로 말이 나왔는데 수락을 안 했다는 것 같더라고. 그 말은 뭐겠어. 잘 지내고 있단 거지.”

  “무엇 때문인진 몰라도 강사는 안 된 거네. 그럼 지금은 무슨 일 해?”

  “글쎄, 듀얼 분석이라던가? 사장을 조금 도와주긴 하나 봐. 실력이 좋으니 프로로 나갈 줄 알았더니 자격만 취득하곤 아예 방향을 틀어버린 것 같아.”

  “듀얼 분석이라면 경기를 많이 보고 다니겠지? 대회 열릴 때면 찾아갈 거고.”

  “그렇지. 저번 주에 스타디움에도 갔던 것 같고, 저번 달엔 또 다른 곳의 대회에 갔다고 들은 것 같아.”

  전부터 짐작하기야 했지만, 친구의 말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너는 지금까지 특별한 사정으로 객석에 나타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상대가 보내오는 초대권을 매번 외면하고서, 일부러 대회를 보러 가지 않은 것이다. 서운함이나 실망보다 역시하는 생각이 앞섰다. 확인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앞으로 너에게 접근할 기회를 찾아 하나씩 풀어가면 된다. 소년병 시절의 너는 불신과 경계가 강해 파고들 틈이 없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여유는 생겼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때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유즈는 대회 자주 출전하잖아? 쿠로사키랑 우연히 마주친 적 없어?”

  “, 마이아미로 돌아오고는 한 번도 쿠로사키랑 만난 적이 없어.”

  네가 부러 만남을 피하고 있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타인에게 설명하기 힘든 것에 대해선 덮어두면 된다. 물론 그에는 너에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다행히 친구는 답하기 전까지의 짧은 침묵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참 보기 힘든 사람이라니까. 나도 가끔은 MCS 이전에 어떻게 쿠로사키랑 친했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해.”

  “그러게. 마스미랑 쿠로사키는 프라이드가 강한 것 외엔 별로 닮은 점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야.”

  “둘 다 LDS에서 엘리트였으니까. 그런 점에서 맞았던 거 아니겠어.”

  자신만만한 말에 웃음이 나왔다. 친구의 이런 당당한 면이 언제나 마음에 들었다.

  너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너에 대해 더 물을 것이 없었기에 자연히 화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 다음부터는 사소한 대화가 쭉 이어졌다. 학교생활 고민이라거나,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선수에 대한 생각이라거나. 몇 년 지기의 변화라거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주고받았다. 날이 어두워진 것 같아 시계를 보니, 약속장소에서 본 지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있지, 유즈. 쿠로사키가 신경 쓰인다면, LDS 견학 올래?”

  다음번에 또 만나기로 하고 가게를 나설 때, 친구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견학?”

  “LDS는 견학생에 친절해. 쿠로사키는 일단 LDS 소속이니까 운 좋으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더라도 음. 적당히 핑계 대서 불러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유즈, 네가 필요하다면 말이야. 친구의 붉은 눈이 반짝였다. 언제나 의욕적인 친구가 마침 남을 도울 일을 찾아 들뜬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일이 커지는 건 아니지?”

  “아니. 사실 나도 쿠로사키를 만나고 싶어서 그래. 분명 친했었는데 이렇게나 서먹해진 건 찜찜하다고.”

  “그렇다면야 나쁠 것 없지.”

  기쁨을 숨기지 않고 답했다. 친구의 말대로만 된다면 자연스레 네 앞에 설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는다 해도 네 삶에 한 번 끼어들 수 있으니 거절할 이유 없는 제안이었다. 너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게 2년 전이었던가, 3년 전이었던가. 기억조차 불분명할 정도로 오랜만에 너를 보게 된다. 그동안 너는 어떻게 자랐을까. 줄곧 피해왔던 사람, 동생과 닮은 껄끄러운 여자애를 만난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와의 만남을 상상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두근거림과 긴장이 마구 뒤섞였다. 그러고 보면 너는, 언제나 양면적인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 * *

 

  친구는 제법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네 이야기가 나온 그 다음날, 학원에 나가자마자 관계자에게 견학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친구가 호언한 대로,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그 소식을 친구가 바로 전해준 것은 물론이었다. 히이라기 유즈가 온다니까 좋아하던데. 이번 주도 괜찮다는데, 넌 어때? 통신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친구의 목소리는 승전이라도 거둔 양 의기양양했다. 이렇게나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는데. 일이 너무 잘 풀려 조금은 겁이 날 정도였다.

  「쿠로사키는, 어떤 것 같아?

  그러니까, 일정 말이야. 조심스레 덧붙였다. 친구라고 너에 대해 모든 걸 알지 못하겠지만, ‘관찰 대상의 근처에 있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쥘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약간의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끓는 기대를 모를 친구는 간결한 답을 돌려주었다.

  「당분간은 회사에 붙어있을 것 같아. 요즘 부쩍 자주 보여.

  「그럼, 다음주에 갈까. 나 이번 주는 일정이 있어서.

  「좋아. 우선 다음주 중이라고 말해놓을게. 그렇게만 하면 아마 학원에서 적당한 날 잡아줄 거야.

  「고마워, 마스미. 다음주는 언제든 괜찮으니까, 답을 들으면 나한테 말해줘.

  통신을 끊자마자 관심은 화병, 정확히는 화병에 꽂힌 프리지아로 옮겨갔다. 벌써 몇 번째로 받은 꽃다발이었더라. 달가운 선물은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다룬 덕에 지금까지 꽃다발이 일찍 시든 적은 없다. 이번 것도 계속 물을 갈아주면서 자주 관심을 두면 한동안 방의 한쪽을 화사하게 장식할 것이다 노란 꽃잎을 들여다보다 문득, 한 번도 품은 적 없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프리지아였을까.

  집 근처의 꽃집만 해도, 장미를 비롯해 온갖 꽃을 팔고 있다. 선물용 꽃다발을 찾는다면 보통은 크고 화려한 꽃을 추천할 것이고, 한 종류의 꽃만 엮기보다는 여러 종을 한데 섞어주는 경우가 대부분. 프리지아, 그것도 노란색 프리지아 한 종류만 엮는 것엔 무언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프리지아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것일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프리지아의 꽃말을 찾아보았지만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순 없었다.

  프리지아. 노란색의 프리지아 다발. 한 번 의식한 때부터 그 의미를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껄끄러운 상대에게 보내는 꽃이라면 더더욱 메시지를 담지 않았을까. 너에게 직접 듣는 이상 모를 것이기에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혼자선 답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아 주변 사람에게도 의미를 묻고 다녔다. 몇몇은 애인이 생긴 거냐며 깔깔거렸고 몇몇은 사실은 무서운 저주일지 모른다며 장난스레 받아쳤다. 온갖 답을 들었지만 그 중 진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유즈, 답은 알아냈어?”

  그렇게 소득 없이 며칠이 지났다. 소꿉친구의 집에 놀러가 함께 간식을 먹고 있을 때 소꿉친구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앞뒤 없이 흘러나온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 애는 바로 덧붙였다.

  “, 요즘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다니는 거 있다며. 프리지아인가 뭔가.”

  “그거, 너희들끼리의 암호 같은 거니?”

  불쑥 들려온 목소리는 귀에 익은 것이었다. 그 애의 어머니가 핫케이크를 가져다주시다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든 것이다. 어른이 듣고 있었다는 사실에, 장난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입을 다물고 시선을 외면하고 있으니, 그 애가 눈치 없이 말을 건넸다.

  “엄마는 알지도 모르니까 한 번 물어봐.”

  입을 떼고 싶지 않았는데, 그대로 모른 척 하고 싶었는데. 아주머니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너무도 상냥해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 프리지아 선물에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나요?”

  “? 누가 프리지아를 선물하기라도?”

  “유즈 벌써 몇 번째 프리지아 꽃다발 받았다던데.”

  “유우야는 끼어들지 마.”

  “선물한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너무 부끄럽겠지? 아줌마가 생각하기엔 그 사람, 유즈를 많이 아끼는 것 같은데? 어떤 꽃이건, 꽃을 선물한단 건 상대를 기쁘게 해주고 싶단 뜻이야.”

  정말로 그럴까. 희망적인 해석에 오히려 자신이 없어진다. 기억 속의 너는 언제나 비극에 지친 소년병의 모습이다. 타인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저를 덮친 불행에 익 사할 것 같은 사람. 그 자리에 버티고 선 것만으로도 힘겨워 보이는 자. 전쟁이 끝난 후, 정예병의 리더였던 사장이 너를 맡기까지. 너는 얼마간 옛 정예병 동료들에게 맡겨졌다고 한다. 지금, 옆자리에 앉은 소꿉친구부터 시작해 몇 명이 순번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너를 돌봤었다. 가만히 두면 언젠가 뚝 기능정지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단 것이 그 이유.

  그러나 그 멤버들이 1번부터 마지막 번호까지, 딱 한 바퀴째 돌았을 때 뭔가 문제가 터졌다고 한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의 사건을 계기로 너는 아예 사장의 관리대상이 되어야 했다. 적어도 그때까지 너는 안정이 되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제법 흐른 일이긴 하나, 네가 그때의 불안정함과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긴 어렵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사라진 동생을 연상시키는 자를 위해 힘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네가 보내온 꽃다발도, 실은 선물이라기보다 의무적으로 보내는 물품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마 아닐 거예요. 그 사람은…….”

  나를 보면서 조금도 행복하지 않을 텐데. 혀끝에 걸린 말을 겨우 삼켰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봤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언제나 친절한 아주머니라 해도 예외는 없다.

  “유즈. 사람의 감정이란 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아주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론 동조할 수 없었다. 복잡한 심리가 얼굴에 드러난 것일까. 아주머니가 동물을 돌보러 가신 때, 소꿉친구가 속삭였다. 아무래도 엄마 답은 성에 안 차는 모양이네. 아니라고 답했지만 그 애는 영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그럼 유즈. 나한테만 슬쩍 말해줘. 꽃 보내준 사람, 누구야?”

  “짚이는 사람은 있는데 확인은 안 해봐서 몰라.”

  “그러지 말고. 혹시 모르잖아. 누군지 알면 내가 그 사람 심리 짚어줄 수 있을지.”

  “유우야한텐 말 안 해.”

  그 애에게 말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개인적인 일을 꺼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고, 둘째는 그 애 역시 너와 묘하게 얽혀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애는 너에게 단순히 옛 동료로 요약되는 사람이 아니다. 전쟁 끝에 돌아올 수 없게 된 네 친우와 쌍둥이처럼 닮은 자이기도 했다.

  예전, 그 애가 너를 얼마간 돌봤던 것은 그 애 나름의 책임감과 너에 대한 부채감 때문일 것이다. 너에게, 친우의 부재를 채워줘야 한다는 생각. 상실감으로 괴로워할 너를 보호해야 한단 마음. 이제 와서 그 애 앞에 네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 애에게 불필요한 무게를 지워주게 된다. 아마, 지금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과 비슷한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다. 쿠로사키의 마음을 좀 더 신경 써줘야 하는데. 같은. 지금껏 자신을 위해서건 너를 위해서건 충분히 노력해온 그 애가 또다시 많은 것을 짊어지길 바라지 않았으므로, 네 이야기는 숨기기로 한다.

  “정말로 말 안 해줄 거야?”

  “확실하지 않은 건 말하는 거 아냐.”

  딱 잘라 거절하자 그 애는 더는 묻지 않았다. 뾰로통한 얼굴을 못 본 체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 것보다, 유우야. 요즘도 하트랜드 사람들이랑 연락해?”

  하트랜드란 네 고향의 이름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폐허였다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그 애를 통해 주민 몇몇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 그 애가 네 고향에 불시착하면서 그곳 사람들을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작년까진 연락을 이어갔다고도 들었다. 굳이 네 고향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곳 사람에게만 들을 수 있는 게 있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네가 머무는 곳이었지 너를 아는 곳은 아니었다. 그나마 너를 아는 사람, 옛 정예병 동료라거나 너를 보호하는 사장까지도 전쟁 전의 너에 대해선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과거의 너, 소년병이 아니라 평범한 청년이었던 너를 아는 사람은 고향 주민들이 유일할 것이다. 그들에게 너에 대해 물으면 어쩌면 조금은 너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너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벽을 허물고, 내면에 파고들 단서를 찾을지도 그런 희망을 안고 꺼낸 질문에 다행히 그 애는 긍정의 답을 돌려주었다.

  “. 꾸준히 연락하고 있지. , 전할 말이라도 있어?”

  “하트랜드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데, 연락처 가르쳐줄래?”

  “. 그러고 보니 전에 알렌한테 빌린 거 아직 안 돌려줬네. 내 디스크로 알렌 연락처 찾아서 먼저 통화할래? , 돌려줄 물건 찾고 있을게.”

  연결되면 내 얘기도 좀 해줘. 그 애는 바로 급하게 방을 나서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처만 알아내 집에서 혼자 연락해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에 바로 그 애의 통신기를 집어 들었다. 다음은 번호부에서 그 애가 알려준 이름을 찾는 것이었다. 제일 위쪽에 뜨는 이름이라 어렵잖게 찾아냈다.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누르자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연락처가 바뀐 것일까 슬슬 걱정이 될 시점에, 명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유우야. 무슨 일이야?

  통신기 화면에 떠오른 것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소년이었다. 몇 년 전 우연히 얼굴을 본 적은 있는 소년이었지만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탓인지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당장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소년은 상황을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떠들었다. 나 지금 바빠서 화상 연결했는데 괜찮겠지? , 뭐야. 유우야가 아냐? 뒤늦게 상대가 누군지 파악한 소년은 눈이 둥그레졌다. 어색한 웃음을 걸치며,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 알렌. 난 히이라기 유즈. 예전에 본 적 있지? 유우야는 잠시 다른 데 갔어. 너한테 빌린 물건 찾아서 돌려줄 생각이래.

  「, 그거. 나도 잊고 있었는데! 알려줘서 고마워. 그거 전해주려 연락한 거야?

  「그것만은 아니고, 물어볼 게 있어서 유우야 디스크 빌렸지.

  「물어볼 거라는 게 뭔데? 내가 아는 거라면 다 답해줄게. 내가 모르는 거면 내 옆의 사야카가 답해줄 거야.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킨다. 역시, 이전에 얼굴만 보았던 소녀가 화면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 애에게서 몇 번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아이이기도 했다. 얼굴만 보았을 뿐 제대로 만난 적 없는 상대에게 두 사람은 친절했다. 네 이야기를 꺼내도 큰 거부감 없이 답해줄 것 같다. 그럼 어느 것부터 시작해야 할까.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뒤엉켰다. 하지만 이 순간 제일 알고 싶은 것을 고르라 하면 간단해진다.

  「있지. 쿠로사키, 그러니까 슌은 프리지아 좋아해?

  결국 가장 먼저 꺼낸 건 내내 신경 쓰였던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네가 메시지 카드와 함께 보내주었던 프리지아 꽃다발. 일단 말을 던지긴 했으나 사실 기대는 없었다. 너를 아는 사람이라고 모든 걸 꿰고 있을 순 없을 테니.

  「슌은 꽃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 아마?

  소년은 자신이 없는 듯 옆에 선 소녀를 돌아보았다. 답은 소녀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 동생인 루리 때문에 자주 사긴 했었지만. 보통은 노란 프리지아를 골랐어. 루리가 노란색을 좋아했었다나.

  루리가 대회에서 우승한 날, 프리지아 꽃다발을 안겨줬던 게 기억나. 그때 루리가 얼마나 예뻤는데. 소녀의 말을 듣는 내내 지금껏 받았던 꽃다발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프리지아. 그것도 꼭 노란색. 카드에는 대회 수상을 축하하며라거나 대회 참가를 기념하여같은 문구가 적혀있었고.

  「그런데 그건 왜?

  소녀가 물어왔지만, 머리가 정지한 것처럼 무슨 말을 돌려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입은 억지로 열었지만 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았고.

  「아니. 그냥, 쿠로, 아니 슌한테 꽃을 선물할까 해서.

  간신히 답했을 때 그 애가 돌아왔다. 왜 그래, 유즈? 표정이 안 좋은데.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어떻게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꿉친구의 집에서 거의 도망치듯 나와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방에 들어가 화병을 보는 순간 설움이 북받쳤다. 보통은 노란 프리지아를 골랐어. 루리가 노란색을 좋아했었다나. 루리가 대회에서 우승한 날, 프리지아 꽃다발을 안겨줬던 게 기억나. 소녀의 말이 머리를 쟁쟁 울렸다. 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동생을 닮은 사람에게, 동생을 위한 선물을 보낸 것이라고.

  네가 얼마나 동생을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는데. 네가 동생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도 자주 생각했는데. 네가 꽃을 보내기 전 동생을 생각하는 것까지도 상상했으면서. 마음 한편에선 최악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네가 어떤 특별한 이유로 꽃을 보내주고 있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대체가 된다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이니까.

  그러나 이제 명확해졌다. 네가 어떤 생각으로 지금까지 카드를 써왔는지. 왜 매번 프리지아 꽃다발을 보냈는지. 뻔한 결론에 숨이 막히면서도, 한편으론 이렇게 미리 알게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런 것을 너에게서 직접 듣게 되었다면 충격이 몇 배는 되었을 것이다. 네 앞에서 울음이 터져 도망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던 때, 테이블에 올려둔 통신기가 진동했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며칠 전 만난 친구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유즈. 저번에 이야기한 견학 말이야. 화요일 괜찮아?

  화요일이라면, 이틀 후. 머릿속에 뒤엉킨 생각을 정리하기엔 충분히 긴 시간이면서, 기다리기에도 그렇게 지루하지 않을 정도였다.

  「괜찮네.

  바로 답장을 보내주면서 화병을 힐끔거렸다. 볕이 드는 자리에 놓인 프리지아는 아직껏 화사했다. ‘선물의 의도를 안 순간부터 바로 치워버리고 싶어진 꽃이었지만, 이틀간만 남겨두기로 마음먹었다. 이틀 후, 너에게서 답을 듣고 오면 깨끗이 치울 것이다. 그동안 받았던 메시지 카드와 함께, 꽃잎 하나 남기지 않고.

 

* * *

 

  이틀은 거짓말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화요일, 학교를 마치자마자 매일 같이 하교하던 소꿉친구를 떼어놓고 네가 머무는 회사 건물로 향했다. 세계적인 대기업이란 명성에 걸맞게 웅장한 건물은 언제 봐도 익숙하지 않다. 살짝 긴장한 채, 회사로 발을 들였다. 입구에서부터 제복을 입은 경비원과 마주쳤지만 미리 준비한 방문증을 제출하자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견학하기로 한 곳은 회사 직속의 학원. 너는 회사에서도 학원 강의실 근처의 방에 머문다고 하니 운이 좋다면 힘들여 찾지 않아도 너와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내원을 따라 학원 건물을 구경하면서도 생각은 자꾸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자꾸만 울리는 통신기라거나, 지난 몇 년간 우연히 스쳐간 적도 없는 너라거나. LDS의 펜듈럼 코스는 가장 늦게 만들어진 코스지만 꽤 인기랍니다. 지난 MCS에서도 펜듈럼 코스의 학생이 우승을 거두었지요. 안내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통신기로 시선을 돌렸다. 통신기가 계속 진동하는 건 친구가 보내온 메시지 때문이었다. 친구는 비밀 프로젝트라도 수행하는 것처럼 들떠서, 메시지로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유즈. 근처에 쿠로사키 있는 것 같아.

  10분 전의 메시지였다.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다시 통신기가 울린다.

  「붙잡아둘게. 나중에 휴게실 쪽으로 와.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마침 너는 회사에 있었고, 친구의 시야에 들어왔으며, 친구에게 곧 붙들릴 것이다. 견학을 명목으로 회사에 찾아온 자가 너를 만나러 갈 때까지. 휴게실 근처에 묶여있는 것이다. 너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오랜만에 만났으니 인사부터 꺼내야 할까. 그게 아니면, 예의상 안부를 묻는 것이 먼저일까. 어차피 목적은 뚜렷한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까. 너를 만날 순간만 기다리며 걸음을 옮겼다.

  “……해서, 원하신다면 사장님을 만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견학이 끝날 즈음 날아든 말에 순간 멈칫했다. 말하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있어, 바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던 탓이다.

  “?”

  “. 히이라기 씨는 프로 듀얼리스트니까요. LDS에서는 수강생을 키워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랍니다. 미래를 열어갈 프로 듀얼리스트도 지원하고 있답니다. 사장님을 찾아간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겁니다.”

  다행히도 그리 중요한 말은 아니었다. 아마 견학생에게 건네는 멘트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음을 들키지 않은 데 만족하고서 적당히 받아치기로 했다.

  “감사한 일이네요. 오늘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아서,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만나야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사장님은 언제나 히이라기 씨 같은 유망한 선수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만 기억해주세요.”

  정중하게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안내원에게 하나, 물을 것이 있었다. 그동안 방문한 적 없어 낯설기만 한 건물에서 꼭 찾아가야 할 장소.

  “휴게실이 어느 쪽이지요?”

  “여기서 왼쪽 방향으로 쭉 가시면 나올 겁니다. 안내가 필요하신가요?”

  “아뇨. 직접 찾도록 할게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견학이 끝났다. 바꿔 말하면 이제 회사고 학원이고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단 뜻. 안내원이 이야기해준 대로 걷다 보니 학생들이 여럿 모여있는 장소가 있었다. 아마도 저곳이 휴게실이리라. 확신을 품게 한 것은 저 앞에 선 친구의 모습이었다. 친구는 저보다 조금 더 큰 남자와 마주본 채 무어라 대화하고 있었다. 친구의 말 군데군데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그렇지, 쿠로사키? 내 기억엔……했는데, 쿠로사키가 생각하기엔 어때? 계속해서 너의 이름이 들리고 있다. 그곳에 네가 있다. 두근거림과 긴장으로 아찔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친구 쪽으로 걸었다.

  이제 네가 선 자리까지 열 걸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제 다섯 걸음.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세 걸음. 남은 걸음이 줄어들수록 친구와 마주 보고 선 남자의 모습도 선명해졌다. 오랜만에 본 너는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너는 코트로 온몸을 감싸던 예전과 달리 가벼운 점퍼를 입고 있었다. 몸이 앙상해진 만큼 자세가 구부정해졌고, 어깨를 살짝 넘던 머리카락은 제법 길러 느슨하게 묶어 내렸으며.

  “유즈, 여기야!”

  과거와 다르게 쉽게 도망쳤다.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자리를 뜨려는 너를,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하나. 너와 거리를 좁혔다. . 뒤에서 네 팔을 잡았다. . 팔을 잡으며 너를 돌려세웠다. 그 과정에 모자가 벗겨지며 네 얼굴이 드러났다. 핏기 없는 피부와 흐리멍덩한 눈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긴 했지만, 얼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힘겹게 붙잡은 사람은, 분명히.

  “찾았다.”

  쿠로사키, . 네 이름을 겨우 토해냈다. 너는 체념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LDS에 있었네.”

  “바쁘신 분이 무슨 용무인지 모르겠어.”

  “묻고 싶은 게 있을 뿐이야. 나는.”

  너를 만나기만 하면 쏟아져나올 줄 알았던 말이 막상 널 붙잡으니 입 안에서 말라붙었다. 무엇 때문일까. 네가 저를 붙잡은 손을 뿌리치지도 않을 정도로 무기력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에게 답을 듣기 두려워서일까. 이 만남이 그동안 이뤄지지 않았던 건 사실 네가 기회를 주지 않아서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양쪽 모두 상대를 들여다보기를 거부하며 돌아섰던 것일지도.

  “나는…….”

  망설이는 것을 느낀 것일까. 너는 손을 풀고 도망치는 대신, 신경질적으로 용건을 묻는 대신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람들 앞에서 얘기할 생각은 없겠지. 안 그래? 손위형제 같은 능숙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최상층으로 가자.”

  도망치지 않을 테니 걱정 마. 머릿속을 읽은 듯한 말이었다. 답 대신 너를 붙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최상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너는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그곳은 사람이 많아. 나 같은 건 알아보지 못해도 프로 듀얼리스트 히이라기 유즈는 알아보겠지. 무슨 얘기든, 거기서 하면 왜곡될 거다. 분명히 청자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 네가 정면만 보고 이야기해서인지 혼잣말처럼 느껴졌다. 문득 과거에도 너와는 몇 번 스쳐갔을 뿐 제대로 대화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제대로 반응해줘야 할 텐데, ‘평범한대화는 이 관계에서 너무나 낯설어서 입을 뗄 수 없었다.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도 너를 붙잡고 있었다. 여기에 있다고, 계속 듣고 있다고. 전하기라도 하려는 양.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너를 따라 내린 때. 왜 네가 이곳을 골랐는지 바로 이해했다.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지금의 방문자 둘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너는 상대가 안전하게 도착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갔다. 얼핏 보기에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곳, 좋아하지?”

  너를 붙잡은 손을 풀고서 물었다. 가장 먼저 꺼낸 질문이 그런 것이었다니. 스스로도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성큼성큼 난간으로 향한 너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진 짐작이 가?”

  “네가 말해주기 전까진 몰라.”

  “프리지아. 네가 보냈지?”

  너는 긍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것은 뻔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기에 특별히 놀랄 것도 없었다. 정말로 듣고 싶었던 것은 지금껏 꽃다발을 보내왔다는 인정이 아니라 왜 그러했는지,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조차 빤했지만 네 입으로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 하필 프리지아였어?”

  어쩌면 마지막까지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네게 다른 뜻이 있었던 거라고.

  “왜 프리지아여야만 했어? 다른 꽃도 많은데 왜 하필? 그리고 왜 노란색 프리지아만 골랐던 거야?”

  그러나 기대는 무참하게 깨지고 만다. 너는 답하기는커녕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하나하나 꺼내도 너의 시선은 저 아래에만 꽂혀있다. 도시의 풍경을 보기 위해서건 외면하기 위해서건 상대를 등진 채, 입도 떼지 않는다. 이것은 대화가 아니다. 같은 자리에서, 독백을 하고 있을 뿐.

  “도망치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건 내 말에 제대로 답해주겠단 거 아니었어?”

  대답해, 쿠로사키.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다섯 걸음이 남았을 때. 너는 침묵하고 있었다. 네 걸음. 너는 살짝 고개를 돌린다. 세 걸음을 남긴 때. 네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두 걸음. 네 입이 열렸고.

  “그건.”

  한 걸음. 너와의 거리가 한 걸음으로 좁혀졌을 때 네 말을 자르며 물었다.

  “루리가 노란 프리지아를 좋아했으니까?”

  그 말을 직접 꺼내는 것은 제법 비참했다. 결국 너에게 누이의 대체로 취급되었다고 스스로 의심하는 셈이니. 네 동생이 먼 이국에서나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다. 너에게 잠깐 그리움을 투영할 대상이 된 것이라고 위안할 수 있었다. 네 동생은 이미 환상처럼 사라진 사람이기에 모든 것이 몇 배로 비참해진다. 너는 존재하지 않는 동생을 살아있는 사람에게 투영하는 것이 되고, 지금 네 앞에 선 자는 망자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동생을 잃은 네가 얼마나 무력해졌는지 알기에 드러나게 원망할 수도 없다.

  “나는.”

  “내 듀얼엔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으면서, 다 끝나고서야 루리에게 챙겨줬듯이 꽃다발을 보냈어. 그것도 루리의 취향에 맞춰서!”

  왜 한 번도 오지 않은 거야? 나를 보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듀얼 분석 때문에 다른 듀얼을 보고 다니기까지 했다면서 왜 내 듀얼은 봐주지 않았어? 네 머릿속의 나는 루리처럼 열네 살에 멈춰있어야 하니까? ‘루리 같은 애가 잘 살아가는 걸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거야? 말을 쏟아내는 내내 네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듣고 싶지 않아서. 편리하게 생각하고 적당히 외면하기 위해 지금까지 만남을 피했다. 서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한참을 보냈다.

  “날 정면으로 봐줘.”

  그러니 지금이라도 상대를 응시하며 서로의 말을 듣고, 삐걱거리는 것들은 서로 맞춰가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된 대화이고 이해이며, 성숙한 인간의 태도임을 이제는 안다.

  “네가 먼저 내 삶에 뛰어들었잖아. 아무것도 모르던 내 삶을 뚫고 들어와서, 전쟁을 말하고 이차원의 존재를 알려주었잖아. 그랬으면 나를 제대로 바라봐야지. 내 삶에 그만큼의 파란을 일으켰으면…….”

  그래야 공평하잖아. 말을 맺었을 땐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는 손을 뻗어 가만히 눈물을 닦아주었다. 보호자였던 시간이 길었던 너는, 힘겨워하는 사람 앞에서는 언제나 어른스러웠다. 너의 메마른 친절 때문인지, 속에 담아둔 것을 전부 쏟아내어서인지, 거칠어진 숨소리도 흘러넘칠 듯한 감정도 차차 잠잠해졌다. 침착하게 기다리던 너는, 눈물이 더 흐르지 않게 되었을 때 입을 뗐다.

  “네가 초대권을 보내주었을 때.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담담하게 이야기할 때 네 시선은 청자에 향해 있었다. 드디어 독백이 아니라, 대화를 하려는 것이다.

  “무엇을?”

  “네 삶에 끼어드는 것 말이야. 무슨 자격으로 네 앞에 서야 하는 걸까? 친구였던 적도 동료였던 적도 없는데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야 하는 걸까? 네가 말한 대로, 난 처음부터 네 삶을 찢고 들어갔다. 그러니 더 조심스러웠어야 했던 거야. 무엇보다…….”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다. 그 다음에 흘러나올 이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지만 네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마구 쏟아지는 말을 네가 끝까지 들어주었던 것처럼. 과연 너는 약간의 침묵 끝에 짐작했던 이름을 토해냈다. 루리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우리는 마냥 깔끔할 수 없는 관계였지. 건조한 목소리에서, 그동안 너를 괴롭혔을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너는 회사에 머무는 동안 많은 것을 홀로 삭혔으리라. 타인 앞에서 실수로라도 쏟지 않을 수 있도록.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보다 그 덤덤함이 더 처참하게 느껴졌으나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잇는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루리를 의식하게 되는 일이 싫었다. 내가 루리 때문에 널 만난다 생각하고서 너 스스로 루리에게 매이게 되는 거 말이야. 그래서 한동안 너를 일부러 피했지. 그래도 너에게, 네 호의를 완전히 거절하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 대회 때마다 꽃을 보내기 시작했고.”

  “네가 보낸 꽃이란 건 바로 알아차렸지만, 네가 보내오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기쁘지 않았어. 무슨 생각이건 속에 담아두기만 하면 상대는 알지 못해. 그러니.”

  말을 해주는 게 좋았단 거지? 너는 조심스레 물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동안 내내 마음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다시 꺼냈다.

  “그럼 프리지아는?”

  “그건 확실히 내 잘못이야. 그냥 습관적으로, 제일 익숙한 꽃을 골랐던 것이거든. 그 전까진 루리에게만 꽃을 안겨줬었으니까, 프리지아가 먼저 눈에 들어왔지.”

  “쉬운, 답이네. 정말로 쉬운 답이었어. 난 사야카에게까지 답을 물었었는데.”

  “내가 한 번만 제대로 이야기했다면, 달랐을까.”

  “물론. 달랐겠지. 애초에 이렇게까지 마음을 썩히며 빙빙 돌아올 필요가 없었어. 네가 꽃을 보낼 때 난 꽃을 잘 몰라서 내 눈에 예쁜 것을 골랐어라고 한마디만 더 적어주었거나. 아니면 카드에 네 이름이라도 제대로 써주었다거나. 가장 쉬운 길은, 한 번이라도 내 경기를 보러 와주는 거였어. 그럼 난 널, 그렇게 의식하진 않았을 거라고.”

  그랬다면 오해도 없었다. 서로의 진심을 바로 받아들일 순 없었더라도 조금씩 상대를 인정하고 가까워질 수 있었으리라. 그동안 상대를 생각한다고 침묵한 것이 오히려 상대에게 마음의 짐과 상처를 남길 뻔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이야기가 나온 게 다행이었다. 너는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상대의 말을 들어주었으며, 다소 늦은 시점이긴 했지만 속마음까지 털어놓았다. 이 관계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그동안 괜한 일로 마음을 쓰게 했군. 미안하게 됐어. 이렇게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직, 안 끝났어.”

  단순히 사과를 듣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어렵게 대화를 시도한 것도, 너에게서 솔직한 답을 들으려 노력한 것도 그 이상을 바라서였다. 일부러 너를 찾아오기 전까지, 너를 떠올리면 언제나 처음 만난 때, 열일곱 살 소년병의 모습으로만 그려졌다. 이미 전쟁에서 벗어난 것도 그때보다 나이가 든 것도 아는데도 머릿속 네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네가 지금의 모습, 스물에 가까운 청년의 모습으로 각인되기 위해서는 계속 마주치고, 부딪치고, 마주 서야 한다.

  “앞으로 내가 참가할 대회는 많아. 언제라도 좋으니 한 번, 보러 와줘.”

  이제 너는 눈앞에 선 사람에게서 동생을 닮은열네 살짜리 소녀가 아니라, 열여섯 살의 프로 듀얼리스트를 보아야 했다. 용기 내어 제안한 것은 그래서였으나, 너는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괜찮겠어? 자신 없는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분명, 너는 편한 상대가 아니다. 네 누이라는 기묘한 연결고리 때문에라도, 너에게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미 결심은 서 있었다. 그게 싫었다면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초대권을 보냈을 것 같아? 살짝 웃어주며 말하자 너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거부감은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뭐가 어려운 거야?”

  “네 문제가 아냐. 얼마 전에 사장과 상담을, 했거든. 최근 몸이 안 좋아져서 듀얼 분석 같은, 체력 소모가 큰 일은 곧 그만두기로 했어. 일부러 모른 체한 처음 두세 번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네 경기를 보지 않은 건 그 때문이기도 했지.”

  혹시라도 객석에서 몸에 문제가 생긴다면, 네 무대를 망칠 게 걱정되어서. 네 목소리는 지나치리만큼 덤덤했다. 문득 회사에 들어가기 직전 네가 얼마간 입원해 있었다던 소꿉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못 보던 새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몸과 나른해진 눈빛도 마음에 걸린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더 나빠진 것일까. 네 상태를 살피지 않은 게 조금 미안해져,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던 때. 네 입술이 먼저 열렸다.

  “그래도 하루. 가능하다면 하루쯤은. 네 무대를 보러 가도록 노력해볼게.”

  너무 늦게 되면 기회를 잃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때, 녹색을 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난간을 등지고 선 네 얼굴에 옅은 웃음이 걸린다. 이전의 너라면 위태로워 보였을 모습이 이번엔 조금도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비로소 머릿속의 네가, 쿠로사키 슌이 열일곱 살의 소년병에서 평범한 청년으로 바뀐다.

  아. 이제 되었다. 이제는 너를 떠올리면서 씁쓸함도 슬픔도, 부채감도 들지 않을 것이다.

  최상층의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안도감이었다.

 

* * *

 

  그 주의 마지막 날에는 두어 달 전부터 잡힌 일정이 있었다. 친분이 있는 선수가 주관하는 자선행사의 이벤트 경기에 나서는 것이었다. 공식전이 아니니만큼 승패에 대한 부담이 적은 데다 상대 또한 잘 아는 사람이라 큰 긴장 없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분명 이벤트 경기라고 설명해두었는데. 객석에 히이라기 유즈란 이름이 붙은 응원 팻말이 몇 개나 보였다. 소꿉친구와 아버지를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이 부러 찾아와준 것이다. 다들 유별이라니까. 가볍게 웃어버리고 경기를 시작하려던 때였다. 스타디움의 문이 닫히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사람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녹색을 띤 머리카락에, 금빛 눈을 가진 남자. 낯익은 사람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만나고 온 사람. 그 전까지 대화를 피하다 겨우 오해를 풀었던 너. 가능하다면 하루쯤은 네 무대를 보러 가도록 노력해볼게. 네 메마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그 날의 약속을 너는 지켰다. 상대가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이번 달 내의 일정 중에서도 가장 먼저 치러지는 경기를 보러 와준 것이다. 너를 발견하자마자 머리를 친 놀라움은 이내 기쁨으로, 다시 감사로 바뀌었다. 어렵게 찾아와준 사람을 위해서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벤트 경기이지만 최선을 다해 대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일까. 승리를 거둔 때 객석에선 열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공손하게 인사하고 무대를 내려올 땐 너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만족으로 들뜬 채였다. 잔뜩 흥분한 아버지에게 안기고, 소꿉친구의 축하를 받은 후. 객석을 몇 번이고 살폈다. 너에게 제대로 인사하고 싶어서였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끝내 너를 찾지 못했다. 승부가 나기 직전까지도 네가 살짝 보였으니 경기를 끝까지 관람하긴 했겠지만 너에게서 직접 축하 인사를 듣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견학을 핑계로 너와 만나게 해준 친구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줄 것이 있으니 중앙공원으로 나와줄래? 몇 번이나 다시 읽어도 별다른 단서가 없어, 호기심을 안은 채 공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는 만나자마자 불쑥,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거. 쿠로사키가 너한테 주고 싶어 했던 거래. 직접 줄 상황이 안 되어서 나한테 대신 전해달라고 한 거야.”

  뜻밖에 네 이름이 나와서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친구가 설명을 보탰다. 쿠로사키는 사장에게 부탁하고, 사장은 내가 너랑 친한 거 아니까 나한테 맡긴 거지. 시들기 전에 주려고 급하게 연락했어. 친구의 말을 듣는 내내 시선을 꽃다발에 두고 있었다. 네가 준비한 것이라고 듣고 보니, 하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점이 있었다.

  “……이번엔 장미네.”

  이번 꽃다발은 지금까지 받은 것과는 달리, 분홍색의 장미가 예쁘게 엮여 있었다는 것.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선택한 꽃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무언가 의미가 있을 터였다. 자세히 살피니 꽃을 묶은 자리에 작은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어쩌면 특별한 메시지를 담았을지도 모를 것.

  “‘이번엔?’”

  “아무것도 아냐. 장미를 받는 건 처음이어서.”

  카드를 살그머니 뽑아 주머니에 숨기며 둘러댔다. 친구는 더 묻는 대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있지, 쿠로사키 말이야, 네 듀얼 보러왔었어.”

  “. 알고 있어.”

  “네 듀얼 끝나자마자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겼대. 지금 입원중이라고 들었어.”

  “쓰러졌다고?”

  “최근 들어 몸이 나빠졌다더라고. 워낙 말이 없는 데다 원래 잘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니 그런 줄은 몰랐지.”

  네 창백한 얼굴이, 선이 가는 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몸이 좋지 않아서 하던 일을 그만두려 한다던 네 말도 머리를 쳤다. 경기를 보러 와주는 것만으로도 약속은 지킨 셈인데. 책임감이 강한 너는 마지막까지 객석을 떠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이다. 몸의 이상신호를 느끼면서도 끝까지 버티다, 승부가 난 후에 무너졌으리라. 객석에 소란이 없었던 걸 보면 너는 승리를 확인하자마자 경기장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승자가 스포트라이트를 오롯이 받을 수 있도록.

  “, 많이 안 좋은 것 같아?”

  “사장은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았어. 안정을 취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만 했지.”

  언제든 문병 가도 된다던데. 어디인지 이야기해줄까? 친구의 말에 네가 입원한 병원과 병실 호수를 받아적었다. 면회가 가능하다면, 그렇게 상태가 나쁜 편은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친구와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방문을 닫아걸고 외투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는 것. 카드를 펼치자마자, 이제는 익숙한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다만 카드 자체가 작아서인지, 전할 말을 최대한 간결하게 쓰는 것이 네 습성인지, 단 두 문장만 적혀있었다.

 

  『 히이라기 유즈에게.

  너에게 가장 어울리는 꽃을.

 

  그동안의 서운함을 풀어내는 데는 그 두 문장으로 충분했다. 카드를 수첩에 끼워두고서, 바싹 마른 프리지아를 화병에서 꺼내 거실 벽에 걸었다. 다음은 기분 좋은 선물을 예쁘게 전시하는 일이었다. 탐스러운 장미 다발을 포장째로 화병에 꽂았다. 큼직한 분홍색 꽃송이가 투명한 화병에 잘 어울렸다. 과연 마지막에 어울리는 화사함이었다. 네 속내를 들여다볼 기회는 없었으나, 이번의 장미 다발이 너에게 받는 마지막 선물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 너는 꽃다발을 준비할 일이 없을 것이다. 상대와 제대로 이야기하는 법을 익힌 것은 물론 그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되었으니, 꽃으로 마음을 전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이번엔 너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는 것이 어떨까. 꽃집에서 한 송이 한 송이 다른 종류의 꽃을 골라 하나로 엮는 것이다. 조화라곤 찾아볼 수 없을 괴상한 꽃다발을 상상하고 웃었다. 그런 것이라면 분명, 병실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낼 너에게도 제법 재미를 줄 것이다.

  다음주에, 가능하다면 소꿉친구와 함께 네 문병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애는 너에게 친절하니 아마 이야기만 꺼내면 같이 가겠다고 나서리라. 꽃다발은 문병 당일에 준비한다 해도, 카드는 미리 써둘 수 있다. 오랜만에 장난을 칠 생각에 키들거리며 카드와 펜을 꺼냈다. 맹금의 이름을 가진 너를 위해 날개 장식이 붙은 카드를 고르고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메시지를 쓴다.

 

  『 쿠로사키 슌에게.

  그동안 속을 썩인 복수로, 눈을 뗄 수 없을 꽃다발을 준비했어.

  빨리 나아서 이걸 안고 퇴원하길 바라.

 

 

 

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