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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조] 닫힌 행복

2020. 8. 14. 23:28 from 02

 

서랍을 열어 그 속의 물건을 거칠게 꺼낸다. 다음은 잡히는 대로 짐 상자에 던져넣는 것. 지긋지긋한 이사 준비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짐을 싸는 게 몇 번째인지, 청년은 이제 헤아리지도 않는다. 주변 환경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도망치듯 떠나고, 또 새로운 거처를 찾기를 반복해왔던 탓이다. 소년기의 대부분을 전쟁에 짓눌려 보냈던 청년으로선 어디에라도 정착하고 싶었으나, 불안이 자꾸만 그의 숨통을 막았다. 쫓기고, 있어. 청년은 수개월, 혹은 몇 주에 한 번은 꼭 그런 말을 흘렸다. 늦은 밤에 깨어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디에?]

어디에 쫓기는 거야? 누이가 물으면, 청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말을 해야 알지, 오빠. 누이가 그를 안아 진정시켜도 끝내 답을 돌려주는 일은 없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몸을 씻고 다시 잠자리에 들 뿐이었다. 공포를 누르고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그러나 청년은 한 번 공포에 휩싸이면 보름을 버티지 못했다. 짧으면 며칠 만에, 청년은 짐을 싸야만 했다. 누이와 친우, 그리고 자신까지. 세 사람이 쥔 모든 것을 챙겨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지금처럼 청년이 미리 짐을 싸놓으면, 동거인 둘은 그의 뜻대로 따라주었다. 불만을 흘리기는 해도 그의 강박적인 태도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청년이 불안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이리라. 이사까지는 할 이유가 없다고 청년의 뜻을 꺾으면 그는 며칠을 꼬박 잠을 들이지 못했다. 울타리를 치겠답시고 집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거나, 창문에 나무판자를 덧대는 등의 괴상한 행동만 반복하면서. 쫓기고, 있어. 여기에 있다간 분명히 잡힐 거라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뇌는 말은 그의 공포를 요약하는 문장이었다.

[쫓아오는 사람 같은 건 없어, . 전쟁 때문에 너무 지친 거겠지. 치료를 받으면…….]

친우가 달래면,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말해주지도 않으면서. 친우의 불만이 머리를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때로 청년은 충동에 휩싸였다. 불안의 근원을 고백하고, 둘에게 위로를 받고 싶다는 마음. 누이도 친우도, 근본이 상냥한 사람이니 이해해줄 것이다. 그를 끌어안고 이젠 괜찮다고 말해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청년이 홀로 불안을 삼킨 것은 두 사람에게 고통을 안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전쟁이 끝난 후, 지금의 평화를 누리기까지 두 사람은 알지 못하는 여러 사건이 있었다. 둘과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청년이 감수해야 할 일이었으나 보통 사람들은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들. 청년이 그렇게까지해야 했던 데는 두 사람에게는 너무 가혹한 진실이 깔려있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은 때, 그들이 그동안 몰랐던 진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까? 청년이 불안을 떨쳐낸 대신 그들이 고통에 서서히 짓눌리는 것은 아닐까? 어린 나이에 너무 무거운 비극을 겪은 두 사람은 이제 행복만을 생각해야 한다. 청년은 둘의 삶에 어떤 얼룩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홀로 삼켜야 했다. 둘에게 영영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두 사람이 온갖 불길한 의심을 저에게 얹더라도.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짐을 싸면서, 청년은 마음을 다잡았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두 사람이 그를 설득하려 들기 전 모든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누이가 깨어나면 떠나자고 이야기하고, 친우의 힘을 빌려 집을 정리하면 된다. 다음은 셋이서 가능한 멀리 떠나는 것. 누구도 그들을 모를 곳으로, 그의 삶에 끼어들지 못할 곳에

갑자기 강렬한 빛이 눈을 찔렀다. 거실에 있는 건 분명히 청년뿐이었는데, 누군가 깨어나 불을 켠 모양이었다. 눈이 겨우 빛에 적응했을 때 청년은 팔짱을 끼고 저를 내려다보는 두 사람을 보았다. 걱정을 숨기지 못하는 누이와, 잔뜩 굳어진 얼굴의 친우. 두 쌍의 눈동자와 마주한 때 청년은 깨달았다. 급습하듯 모든 준비를 마치자고 생각했지만, 실은 두 사람의 예상 범위 내에서 움직였을 뿐임을.

또 혼자 챙기고 있지.”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목소리는 누이의 것이다. 혀가 굳어버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아, 청년은 짐가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두 사람이 이제야나선 이유를, 청년은 듣지 않고도 안다. 청년이 불안에서 헤어나기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지도 모른다. 곁에서 감싸주면 알아서 제 궤도로 돌아오리라. 그러한 희망은 청년이 또다시 버티지 못하면서 깨졌다. 망가진 기계처럼, 청년은 똑같은 문제만을 되풀이했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청년이 겨우 입을 뗐을 때, 누이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감정을 눌러 참는 듯했다.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별 소용이 없었나 봐. 역시 안정을 못 찾은 거지? 오빠는.”

너희가 부족했던 게 아니라.”

그럼 말해줘, .”

친우가 끼어들었다. 앳된 얼굴에 비장함마저 서려 있다.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친우는 오래도록 묵혀왔을 말을 흘린다. 범죄라도 저지른 거야? 다소 암울한 이야기였으나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을 가능성이었다. 청년은 한 번도 두 사람에게 불안의 근원을 털어놓은 적 없고, ‘쫓긴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도망쳐왔으므로. 청년은 부정의 답을 주는 대신 미지근한 웃음을 걸쳤다. 어쩌면 그렇게 오해받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서.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지, 유토.”

들어줄게. 그러니까 이번엔 우리한테 솔직하게 이야기해줘.”

내가 뭘 숨기고 있을 줄 알고.”

뭐든 상관없어.”

너희는 감당 못 해.”

그렇게 말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던 청년은 누이에게 붙들렸다. 그의 손에 자라난 누이는 제법 단호하게 오빠를 막아섰고.

이제 그렇게 피하게 두지 않아.”

청년이 빠져나갈 곳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이런 삶을 바란 게 아니잖아. 행복해지고 싶었던 건데. 따라붙는 말이 서글프다. 시야가 밝아진 바람에, 급히 챙기다 바닥에 흘린 것들이 청년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보자마자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빤한소지품. 세 사람이 쥔, 몇 되지 않는 것들. 청년이 자꾸 도망치는 바람에 그들은 언제나 최소한의 물건과 가구만을 품고 살았다. 그마저도 급할 때면 일부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었다. 거주지를 자주 옮기는 처지에 편한 집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적에게 납치당했던 동생과 영영 돌아오지 못할 뻔했던 친우는 어떻게든 안정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세상에서 부유하는 것은 청년뿐. 누이의 말이 옳았다. 청년이 두 사람을 되찾은 날 생각했던 미래는, 확실히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줄곧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겠다는 마음으로 움직였으나, 정작 두 사람의 일상은 지켜주지 못했다. 이제 청년은 자신이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안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

얼버무리거나 고집을 부리는 대신, 청년은 두 사람의 정공에 제대로 반응하기로 했다. 몇 발짝 밖에 서 있던 친우는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았다.

사흘 줄게, .”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야. 털어놓길 기다릴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엔 여느 때와는 다른 엄격함이 배어있었다. 친우가 제시한 기간이 마지막으로 그를 기다려줄시간임을, 청년은 직감했다.

내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이해받고 싶잖아. 오빠도.”

그럼에도 떠보려 던진 말에, 누이는 속을 읽은 듯한 답을 돌려주었다. 분명, 청년은 그런 것을 바라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안겨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화로웠던 때로 돌아가는 것. ‘예전처럼지내는 것을. 사흘이 지나면, 어떻게든 결론은 난다. 솔직하게 이야기할 용기는 당장은 나지 않지만, 두 사람이 충격을 받을 가능성도 여전히 두렵지만, 청년에겐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그럴듯한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고, 진실을 한참 축소하여 둘을 안심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아직, 바로잡을 수 있다. 그동안의 삐걱거림을 전부 잊고, 진짜 평화를 누릴 기회가 있다. 숨통을 막았던 불안도, 기습하듯 저지른 일도 덮어버리겠다는 듯 청년은 슬그머니 짐을 푼다. 옷가지가, 전장에서 겨우 건져온 추억의 물건들이 하나둘 짐가방에서 빠져나온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던 때, 누이가 속삭였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만 하면, 우리도 오빠의 뜻대로 움직여줄 거야.”

그러니까 짐은 남겨둬도 돼. 라고.

청년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그가 짐에서 손을 떼자마자 친우와 누이가 가방을 들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옮겨주었다. 이제 자러 가자.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두 사람은 말했고, 청년은 그들을 안아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동거인이 잠자리에 드는 것을 확인한 후, 청년은 괜한 감상에 젖어 얼마간 집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다.

부엌을 겸하는 거실에서, 균열이 보이는 벽, 최소한의 짐을 놓기에도 빠듯한 좁은 공간으로. 청년의 시선은 차례로 옮겨갔다. 현재의 모습만 보면 정착지로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다. 떠난다면 미련 없이 떠나고, 떠나지 않으려면 둘에게 편한 곳으로 바꿔놓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전등을 끄려던 때. 테이블에 올려둔 액자에,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에 우연히 시선이 닿았다. 그리워하기에 더 씁쓸한 시절을 마주하고 청년은 빈 웃음을 걸친다. 사진에 담긴 것은 청년이 마지막으로 행복을 쥐었던 때. 그들이 마지막으로 평범한 인간으로서함께했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

 

전쟁이 끝난 때 청년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침략군은 떠났으나 고향은 폐허가 되었고, 무기를 내려놓았지만 달리 쥘 것이 없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 세상을 구하기 위한 제물이 되어 흔적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뒤늦게 들은 진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해온 사람이, 삶에서 당연했던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것도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쉬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그들이 과연 희생에 동조했을까? 세상이 그들을 삼키고서 적당한 이유를 붙인 건 아닐까? 청년의 의문에 누구도 제대로 답해주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전쟁이 끝난 후 한동안, 청년은 누이가 살려달라고 울먹이는 환청에 시달렸다. 친우의 몸이 녹아내리는 꿈을 반복해서 꾸기도 했다. 환상 속에서라도 처참한 결말을 바꾸고 싶었는데, 청년은 한 번도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누이의 목소리에 집중하면 환청에마저 노이즈가 꼈고, 꿈에서 친우에게 손을 뻗으면 제 손이 썩어 떨어졌다. 날이 갈수록 무력감만 짙어졌다. 그는 이런 미래를 생각하고 싸워온 것이 아니었다.

청년이 바랐던 미래는 어떻게든 둘과 함께 사는 것.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닌데 영영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 되었다. 홀로 살아남은 그를 몇몇은 연민했고 몇몇은 그에게 도움을 약속했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삶을 되찾도록 만들겠다. 등등의 친절한 말. 각각 다른 사람이 흘린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청년은 같이 싸웠던 정예병 동료의 집에 머물다, 주변인의 소개로 병원 치료를 받다, 결국은 감당하기 힘든 것이 되어 이리저리 넘겨졌다. 결국 청년이 사실상 방치당하다 쓰러진 후로, 한때 청년의 지휘관이었던 남자가 그의 보호자가 되기로 했다.

그 남자는 그렇게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투는 딱딱했고 청년을 담는 시선은 실험대상을 보듯 건조했다. 대기업 사장이란 지위 때문에 청년을 곁에 두고 보살피는 것도 무리였다. 청년에게 회사 내부의 공간을 내주고, 사람을 붙여 생활을 돕게 하고는, 가끔 청년을 불러들여 심신을 점검하는 것이, 전부. 돌봄이라기보다는 관리에 가까운 도움이 청년은 그리 싫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불행은 친절로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침략자의 아들이기도 한 사장과 오래 마주치는 것도 껄끄러웠다. 필요한 것을 전부 받으며 회사의 <손님>으로 남아있는 게 편했다.

사장 덕분에 청년은 회사의 곳곳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는데, 그 중 청년이 가장 좋아했던 장소는 자료실이었다. 소수에게만 허락된 곳이라 사람들과 마주할 일이 거의 없다는 게 편했다. 청년은 자주 자료실을 찾아 공개된 자료를 잡히는 대로 꺼냈다. 회사의 역사나 성과에 대한 자료가 대부분이었으나 방해받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게 목적이었던 청년은 가리지 않고 읽었다.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 그에겐 얼마나 평온했는지. 회사 사람들과 마주할 때면 연민과 경계, 불쾌가 따라붙곤 했다. 평화 속에서도 전쟁의 고통을 떨치지 못한 청년을, 세상은 불행의 보균자처럼 취급했으므로.

그렇게 청년이 자료실에서 홀로 지내는 데 익숙해졌을 무렵. 여느 때처럼 자료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청년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회사가 꾸준히 연구해온 것을 기록한 자료에, 클론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것도 처음 적힌 날짜로부터 마지막 날짜까지 공백이 긴 것을 보니 제법 오래도록 연구해온 듯했다. 회사의 주력 분야와는 거리가 있는 영역을 집요하게 파고든 것이 희한했다. 무언가 비밀히 꾸미는 일이라도 있었을까. 의문에 사로잡힌 청년이 관련된 자료를 더 찾아보려던 때. 자료실의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입구를 돌아보니 사장이 서 있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

나카지마가 이야기해줘서 말이야. 요즘 이곳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고. 청년이 입을 뗄 틈도 주지 않고 줄줄이 말을 늘어놓은 사장은, 그의 옆자리에 자연스레 앉았다. 처음부터 그를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용건이라도?]

[네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는데.]

[그럼 먼저 묻지. 이런 게 정말로 가능한가?]

청년은 자신이 들여다보던 자료를 사장에게 보이며 물었다. 사장은 청년에게 자료를 받아들고는 한참이고 그 내용을 읽었다. 단정한 얼굴에 묘한 감정을 걸치며.

[클론 연구라, 정말 오랜만에 보는데. 한때 레오 코퍼레이션에서 의욕적으로 매달렸지.]

침묵 끝에 흘러나온 답은 불완전해, 청년은 다시 답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궁금해하는 건 실현 가능성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래. 가능해. 거의 실현 단계까지 가서 그만두었을 뿐이야. 성공할 경우 세상에 일어날 수 있을 혼란을 우려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큰 혼란을 만드셨지만 말이야.]

네 아비는 아카데미아에 이곳의 기술을 가져갔었지? 침략군의 수장을 아비로 둔 사장이 아비의 그림자에서 헤어날 수 없음을 겨냥한 말이었다. 드러나게 빈정거리자 사장은 쓰게 웃었다. 뻔한 과오를 부정하는 대신,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니 더더욱 위험한기술은 봉인해야지.]

[이대로 덮어두겠다?]

[회사 차원에서 더 연구할 것은 없어. 쿠로사키.]

클론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그러니 그때 청년의 얼굴에 떠오른 것을 사장은 아마 보지 못했으리라. 사장의 설명을 들었을 때 청년은 종전 후 처음으로 들뜬 채였다. 흥분과 희열이 발끝에서부터 기어올랐다. 사장이 꺼낸 가능성 때문에.

전쟁이 끝났을 때. 청년은 살아남은 것도 기뻐하지 못했다. 잃은 것이 너무도 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탓이다. 잘못 생존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걸핏하면 머리를 덮쳤다. 차라리 두 사람을 구하는 것으로 삶을 끝냈다면 행복하게 죽을 수 있었을 텐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흩어진 누이, 유품 하나 남기지 못한 친우에게 미래를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장에게서 클론 연구에 대해 들은 때, 청년은 오랜 죄책감과 무력감에 겨우 균열을 낼 듯했다.

어쩌면 그는, 뒤늦게나마 두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회사의 기술에 기대는 것으로.

청년이 흥분을 누르며 온갖 계획을 짜는 줄도 모르고, 사장은 화제를 바꾸어 청년을 찾은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카키 유우야와 히이라기 유즈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단 것은 너도 알고 있을 거다. 만일을 대비해 그 두 사람의 자료를 남겨두려고 해. 일종의 백업본이지. 혹시 두 사람이 폭주할 경우 원래대로복구시키기 위해서. 사장의 차분한 목소리는 꼭 기계의 이상을 점검하는 기술자 같았다.

[……해서, 쿠로사키. 네게 부탁하려는 것은 유토, 루리에 대해 가능한 상세하게 증언해주는 것.]

갑자기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와 청년은 움찔했다. 청년 앞에선 거의 금기어가 된 이름들을 사장이 먼저 꺼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증언?]

[이번에 레오 코퍼레이션에서 백업하려는 건 사카키 유우야, 히이라기 유즈 두 사람만이 아냐. 그들에게 흡수된 이들의 자료도 남겨두는 게 내 계획이다. 유토와 루리를 포함해서 말이지.]

[의도를 모르겠군.]

[너에게도 손해는 아니라 생각하는데. 소중한 사람의 자료가, 기록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이 싫진 않겠지.]

무언가 의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청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사장에게 신뢰를 얻어두는 쪽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그 날 이후 사장의 요구대로, 사라진 이들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했다. 추억은 기록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이들은 생생한 자료로 남았다. 기억하는 것을 털어놓을 때마다 청년은 그리움과 후회, 죄책감이 섞인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으나 그것이 곧 흩어질 감정임을 알았다. 청년은 두 사람을 되돌릴 생각이었으니까. 기록으로만 남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사람으로 만들 테니까.

증언을 마치고 상담실을 나올 때마다 청년은 자신의 방이 아닌 자료실로 향했다. 청년이 그곳에 틀어박혀 캐냈던 것이 무엇인지, 사장은 청년이 도망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방심했던 것이리라. 전쟁이 끝난 후 무력해진 청년이 무언가 꾸밀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거나, 청년의 협조적인 태도에 경계를 누그러뜨렸을 것이 뻔하다. 청년은 얼마든 상식선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청년이 회사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사장이 원하던 자료가 거의 완성된 시점이었다. 동시에 청년이 회사의 기술을 훔쳐낸 시점이기도 했다. 청년은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장이 더는 꺼내보지 않는 연구 자료를 머리에 넣고 클론의 표본을 챙긴 채로. 하나 더 훔친 것은 두 사람에 대한 증언이 담긴 자료였다. 그는 두 사람의 흔적이 회사에 전시되는 것을 바라진 않았다. 그들은 단절된 과거로 고정되는 게 아니라, 그와 미래를 함께해야 했다.

멀리, 가능한 멀리. 청년은 누구도 저를 찾을 수 없을 곳으로 도망쳤다. 그에게도 낯선 땅으로 향해, 전쟁 피해자 지원금으로 세 사람이살 집을 구했다. 다음은 낱낱이 익힌 기술을 이용해 누이와 친우의 클론을 만드는 것. 청년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외형은 그들과 똑같이 생긴 이들을 참조하여 만들고, 생생한 기록을 이용해 두 사람의 자아를 빚어냈다. 두 사람이, 아니, 청년이 만들어낸 두 사람이 깨어난 때 청년은 실로 오랜만에 행복을 느꼈다. 소중한 사람의 모습을 한 자가, 그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그 사람이 할 법한 행동을 한다. 청년이 그토록 소망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소중한 이들과 함께했기에 청년은 평화에 감사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홀로 살아남았다는 괴로움으로 일상을 견디지 못했던 그가, 하루하루를 즐거이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누구도 그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도 두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다. 무기를 쥐지 않고도 살 수 있었고, 몇 시간이고 사소한 이야기를 할 여유도 있었다. 분명히, 그는 행복했다. 자신들이 이미 한 번 흩어졌다는 것은 모르는 채, 전쟁이 끝났다는 것만 들은 두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러나 하나, 문제가 있다면.

마음은 정했어, ?”

생각을 흩어버린 것은 기대 섞인 물음이었다. 친우의 목소리에 청년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흘을 주겠다고 선언한 후 친우는 걸핏하면 답을 들으려 했다. 그럴 때마다 앳된 얼굴에 근원 모를 자신이 내비치는 게 희한했다. 아무래도 친우는 자신하고 있는 것 같다. 청년의 답을 미리 짐작하고서, ‘당연히제 뜻과 같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아직은 약속한 시간이 다 안 되었지.”

머리가 복잡해서 그래.”

무엇 때문에? 결정할 건 하나뿐이잖아. 털어놓느냐 그대로 삼키느냐.”

전부 이야기하면, 너희의 평화가 깨질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고 말을 끊으려는데, 친우가 끈덕지게 파고든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줘야 한다니까. 너는 뭐든지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전장에서도 언제나 우리 앞에 나서서 다 해결하려기에 루리와 난 네가 우리를 믿지 못하는 줄 알았어.”

믿음의 문제가 아냐.”

혼자 비밀을 끌어안고 버티다간 황폐해질 뿐이야. 우리가 널 못 받아줄 거라고 생각해?”

어떻게든 청년을 설득하려는 모습이, 달래는 말이, 친절해서 슬펐다. 청년은 소중한 사람들을 클론으로 되돌린 것에 한 가닥 후회도 없었다. 그들을 친우와 누이로 대하는 데 의심도 껄끄러움도 없는 건 물론이었다. 문제는, 청년이 얼마간 지냈던 회사가 세계적인 대기업이라는 점. 사장이 사람을 써 철저하게 추적하기 시작하면 청년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도 않다. 회사의 기술을 훔쳐내고 자료를 가져간 이를 가만둘 리 없다. 청년 본인이 붙들리는 것이야 감당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이 포착되었을 때 어떻게 될지가 마냥 두려웠다.

청년이 멋대로 만들어낸 클론을 회사에서 폐기할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둘을 붙잡아두고 이러저러한 일을 시도할 수도 있다. 청년은 둘을 지켜야만 했다. 두 사람의 미래를 또다시 닫아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기에 청년은 자주 불안에 시달렸다. 사람들과 얼굴을 익힐 때쯤이면 어김없이 공포가 올라왔다. 언젠가는 그 선량한 타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회사에 증언할 것만 같았다. 그 남자라면 몇 살 아래로 보이는 애들을 데리고 살고 있어요. 여동생이랑 친구라는 것 같은데. . 그 남자를 찾으신다고요? 저기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악의 없이, 친절하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청년을 쫓아온 이들이 청년의 삶을 헤집으리라. 청년을 끌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청년이 겨우 이 세상에 되돌린 두 사람을 앗아가는 것이다. 그 순간 세 사람의 행복은 깨어지고 그들은 영영 지금처럼 함께할 수 없게 된다.

나는 말이지, 유토.”

친우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할 수 없어, 청년은 결국 변명한다.

너희를 구하기 위해서 잘못을 저질렀어. 그래서…….”

쫓기는 거지?”

타인의 시선에 오래 잡혀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거듭 이사를 택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쫓긴다는 것은 청년의 불안일 뿐. 아직 회사 사람들과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 번 포착되면, 한 번이라도 어긋나면 지금 세 사람이 누리는 모든 것이 끝난다. 정말로 쫓기게 되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기에, 청년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좋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 친우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청년의 어깨를 감쌌다. 아이를 위로하듯, 상냥하게.

슌은 걱정할 것 없어. 루리와 내가 알아서 할게.”

은근한 말이 순간 불길했다. 청년은 누이와 친우가, 때로 자신만큼이나 괴상한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무엇을?”

네가 다 말해주지 않으니 우리도 비밀로 남겨둘 거야.”

……나를 위해서, 뭔가 하려고?”

당연히 너를 위해서지.”

슌은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싸워줬으니까, 우리가 슌을 위해 싸워줘야 하지 않겠어. 친우의 발상이 위험한 곳으로 튈 수 있음을 아는데도, 내리깐 목소리는 유혹적이다. 청년은 언제나 그들의 애정에 약했고, 그들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기쁨을 느꼈으므로. 말릴 거야? 따라붙은 말에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답을 기다릴게, .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다면, 옳은 선택을 하리라 믿어.”

교묘한 압박이 밴 말에 청년이 돌려줄 답은 뻔했다.

물론. 너희를 위한 선택을 하지.”

약속된 시간은 아직 남았으나 청년의 마음은 이미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사흘이 되는 시점에 이야기할 것이다. 그의 현재를 지키고 두 사람을 기쁘게 할 답을. 친우가 누이와 외출한 사이, 청년은 홀로 앉아 세 사람의 행복한 미래를 그려보았다. 상상만으로도 깊은 만족이 피어, 그는 구원이라도 마주한 양 웃었다.

 

*

 

약속한 사흘이 지나, 청년이 어떻게든 답을 주기로 한 날엔 이상하리만큼 날씨가 나빴다. 두 사람을 두고 일터에 나온 청년은 우중충한 하늘과 쏟아지는 비에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은 일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과 바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날씨가 이래서야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긴 무리였다. 날이 개는 것만을 기다리며 일하다 잠깐 쉴 때. 청년의 통신기가 갑자기 울렸다. 회사에서 도망친 후로 청년은 원래의 통신기를 부수고 가명으로 등록한 새 통신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사를 할 때마다 통신기를 바꾸고 이름도 갈아치우는 청년에게 연락할 사람이라면 뻔하다.

누이일까, 친우일까. 청년은 별 생각 없이 통신기를 집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청년은 잠시 불안을 잊고 있었다. 일상이 파괴될 수 있다는 오랜 공포를,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주겠다 말한 것만으로 잠깐 내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도망자 신세였는데도.

[꽤 오래 도망쳤어. 쿠로사키.]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가 현실을 일깨웠다. 파헤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세상을 떠돌며 없는 사람처럼 살아온 청년에게 메시지를 보내온 자는, 분명 회사의 사람이었다. 사장이 나섰을 것 같지는 않다. 상황에 직접 개입하기보단 관망하는 타입이었으므로. 아마도 사장의 충직한 수하가 그를 직접 찾아 나섰으리라. 사장의 연구 자료를 훔치고 그 계획을 망친 청년을 괘씸히 여겨서.

청년의 행방을 알아냈다면, 그를 잡으러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 이대로라면 모든 게 무너진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보다 누이와 친우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청년은 메시지를 모른 체 넘기는 대신, 낯선 연락처로 통신을 시도했다.

[바로 연락해올 줄은 몰랐는데.]

통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귀에 익은 것이다. 회사에서 몇 번 마주친 사람이 청년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언제나 그를 괴물처럼 바라보던 자. 시선에서 느껴지던 싸늘함이 목소리에도 배어있었다. 청년은 상대에게 눌리지 않으려 애쓰며 가능한 덤덤하게 받아쳤다.

[무엇을 원해?]

[착각하지 마. 넌 거래를 시도할 입장이 아냐.]

[내 위치를 알자마자 움직인 것도 아니고, 굳이 메시지까지 남기고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한참이고 울렸다. 청년의 도발을 비웃듯이. 웃음을 그치자마자 상대는 아이를 꾸짖듯 그의 죄를 읊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너를 끝까지 믿었다. 그 신뢰를 배반하고 연구 자료까지 훔친 건 너야. 그 탓에 사장님이 진행하던 연구는 전부 꼬여버렸지. 회사에서 너를 이해해줘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나?]

[회사가 아닌 그쪽의 입장 아닌가?]

[아무래도 좋아. 네가 훔쳐낸 것을 전부 돌려받을 테니.]

[……전부?]

자신만만한 어투가 불길했다. 상대가 생각하는 전부가 어디까지인지, 청년은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담아온 기술을 회사에서 돌려받을 수는 없다. 온전히 회사의 유산이 아닌 기록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그가 챙겨 나온 것이라면 클론의 표본 정도. 누이와 친우의 클론을 만드느라 소모한 표본을 회수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상대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그에게서 어디까지 앗아가려는 생각인가. 청년이 잔뜩 긴장한 때.

[동거인이 있더군, 쿠로사키.]

가장 잃고 싶지 않은 것을, 상대는 쥐고 흔든다.

[회사가 만들어준 게 아냐. 레오 코퍼레이션도 아카바 레이지도, 내게 그 둘을 돌려주진 않았다고.]

[하지만 회사의유산을 사용해서 만들었고.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게 당연해. 네가 유토와 루리를 제대로 만들어냈다면 연구 자료로선 가치가 있겠지.]

유감이야. 네 행복을 깨게 되어서. 덧붙여진 말에 세상이 흔들렸다. 청년은 그대로 근무지를 뛰쳐나왔다. 상대가 저렇게까지 이야기한다면 이미 그의 집에 사람이 가 있을 확률이 높다. 그가 만들어낸 행복을 짓밟고 누이와 친우를 회수하기위하여. , 하필. 숨이 차도록 달리는 내내 그 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왜 하필 지금이었던가. 이제 두 사람에게 불안의 근원을 고백하고 일상을 찾을 생각이었는데. 하루만 늦었어도 안전한 곳에 피신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의 행복은 쉽게 무너져내리는지.

날씨는 여전히 엉망이었고 빗줄기는 자꾸만 거칠어졌다. 우산 하나 없이 뛰쳐나온 바람에 누이가 사준 코트가 잔뜩 젖었다. 달리던 사이 친우가 선물한 팔찌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런데도 청년은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그가 쌓아온 것이 신기루가 된다. 다른 건 견딜 수 있어도 두 사람을 잃는 것만은 안 된다. 누이와 친우를 <표본>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억지로 끌어내다 다치게 만드는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택시를 타자마자 최대한 빨리 달리라고 재촉한 바람에 청년은 평소보다 몇 배는 일찍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세 사람이 살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집이 보인다. 다른 날도 아닌 오늘, 둘을 데리고 떠나려 했던 곳. 무리하게 달린 탓인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끌고 청년은 문을 열어젖혔다. 몇 명이나 와 있을까. 침입자는 어디까지 파헤쳤을까. 숨이 터질 것 같은 불안을 안고 집에 들어섰을 때.

, 오빠. 일찍 왔네?”

누이가 웃는 낯으로 그를 맞았다. 머리칼은 평소의 누이답지 않게 잔뜩 흐트러져 있었지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

사람, 안 왔어?”

한두 명 오긴 했는데.”

누이는 청년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미 기력을 거의 소진한 청년은 쉽게 이끌렸다. 집 안 구석구석을 살펴야 하는데, 침입자를 처리해야 하는데. 누이는 그의 팔을 놓아주기는커녕 단단히 붙잡고서, 안심시키려는 듯 속삭였다.

조금 곤란한 일이 있었지만 다 해결됐어.”

해결?”

갑자기 집에 들이닥쳐서 나가달라고 했더니 말을 듣지 않더라고. 유토와 말을 맞춰 적당히 돌려보내려 했는데…….”

누이의 붉은 눈이 웃었다. 있지, 오빠는 신경 쓸 필요 없어. 그 사람들은 이제 귀찮게 굴지 않으니까.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리고서 지나치게 침착한 모습이 수상쩍다. 자꾸 청년을 안심시키려 하는 것도, 의문을 봉쇄하고 사건을 덮어두려는 것 같다. 그러나 위험이 아직 남아있을 것이 걱정된 청년은 누이를 떼어놓고서 안으로 들어섰고.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잖아. 오빠.”

등 뒤에서 울린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하실로 향하는 길에서 청년은 두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정확하게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시신이었다. 친우는, 언제나 청년에게 상냥했던 친우는 시신을 파묻으려는 듯 삽을 들고 있었다. 청년의 기척에 돌아본 얼굴엔, 한 점 그림자도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바보 같은 질문임을 알면서도 청년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무엇이라도 설명이 필요했으니. 그러자 두 사람의 말이 차례로 귀에 꽂혔다.

아무것도 아냐. .”

오늘 날씨가 나쁘잖아. 저 사람들, 빠르게 나가려다 미끄러지더라고. 운 나쁘게 머리를 부딪혔지 뭐야.”

둘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평온했으나 그에 담긴 내용은 납득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렇게 우연히 침입자가 제거될 리 없다. 세 사람의 행복을 깨려는 방해자가, 건장한 성인 남성들이 짜맞춘 듯이 죽어준다고? 거기에 그 과정을 목격한 두 사람이 이렇게나 평온하게 뒤처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년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을 얹는다 한들, 시신이 되살아나진 않는다. 청년이 돌아오기 전까지 있었던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청년이 그토록 지키려 들었던 두 사람도, 그들과의 행복도 잃지 않았다.

갑자기 힘이 풀려 청년은 그 자리에 무너졌다. ‘진실을 짐작하고 충격을 받아서도, 여기까지 돌아오는 데 지쳐서도 아니라 안도감이 찾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그를 사랑하고, 그는 두 사람을 사랑했다.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들 모두 셋이서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야 청년은 둘에게 답을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토해내는 것이 어떤 진실이건 두 사람은 받아들여줄 테니까.

루리. 유토.”

소중한 이들의 이름을 부르자 두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청년을 담았다.

답을 돌려줄 시간이지. 이대로, 도망치자.”

청년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너희에게 전부 이야기할 테니까. 덧붙인 말에, 누이는 바로 사흘 전 챙긴 짐가방을 집어 들었다. 친우는 삽을 내려놓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세 사람은 너무도 행복했다.

Posted by 현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