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정복자에게는 제 전리품을 감상하는 취미가 있었다. 얼핏 보면 고상한 취미였으나, 이상하게도 수하들은 정복자가 그 뜻을 표현할 때마다 하얗게 질려버리곤 했다. 상좌에 앉은 소년이 수하들에게 전리품을 가져오라 명하면 공간은 일순 싸하게 얼어붙었다. 그 싸늘한 분위기에 심기가 불편해진 소년이 입에 문 사탕을 깨트리며 표정을 일그러뜨리면 그제서야 수하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들은 수많은 전리품 중 가장 생생하고 좋은 것을 정복자 앞에 대령하였다.
그것은 호사스러운 보물도 아니고 가치를 따지기 어려운 옛 유물도 아니었다. 오히려 전리품이라고 하기는 조잡한 것이었다. 소년이 요구하는 전리품은 단단히 결박된 포로, 그 중에서도 가장 건강하고 결함이 없는 것. 포로는 본능적으로 상좌에 앉은 소년이 제 목숨을 틀어쥔 군주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제게 무엇이 닥칠지도.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은 포로를 면밀하게 살폈다. 눈에 띄는 부상은 없는 건장한 젊은 사내라 ─ 나쁘지 않네. 소년이 천진하게 웃었다. 정복자의 군대가 자비 없이 적을 짓밟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붙들려온 자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물론 그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 저 천진한 정복자에게 붙들려온 이상,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자. 이건 얼마나 버틸까, 응?”
소년은 들뜬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맞은편에 앉은 청년에게 물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팔걸이에 올려진 청년의 손이 소년의 환한 얼굴에 바르르 떨릴 뿐. 청년이 앉은 의자는 소년의 것처럼 크고 화려했으나 그의 행색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정복자의 화사한 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이질적인 존재였다. 마치, 잘못 끼운 퍼즐조각처럼.
“역시 해봐야 알겠지?”
소년의 얼굴에 정복자의 잔학한 웃음이 번지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정복자의 유희가 시작되었다. 제 전리품을 극도의 고통으로 몰아넣어 고통에 질식해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지켜보는 것이다. 눈앞에서 피와 살점이 튀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방에 어울리지 않는 재앙이 피었다. 참혹한 풍경 속에 소년의 얼굴은 조금씩 달아오르고 있었다.
고문은 집요했다.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폭력은 결박된 이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찢어질 듯한 비명과 가련하게 발작하는 몸이, 그에게 쏟아지는 고통이 얼마나 악랄한지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폭력이 이어지던 중, 어느 순간부터 비명이 멎었다. 쉰 목소리로 터져 나오던 신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폭력이 가해질 때마다 격렬하게 튀던 몸도 차츰 둔해졌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듯, 고문의 강도를 점점 높여갈 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포로의 모든 행동이 멈췄다. 그 완벽한 정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소년은 알고 있었다.
죽어버린 것일까. 소년은 결박된 이를 툭툭 쳐보았지만 그의 몸은 소년이 손대는 대로 힘없이 흔들릴 뿐. 소년의 앳된 얼굴이 금시에 지루함으로 물든다. 대부분의 포로들은 소년이 원하는 만큼 오래 버텨주지 못했다. 고문 속에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망가지다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포로를 고문하는 것에 특별한 명분은 없다. 정복자로서 제가 붙잡은 것들을 짓밟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상이 죄 없는 사람일 뿐, 행동의 본질은 아이들이 제 손에 들어온 생물의 다리를 쥐어뜯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어린 정복자는 포로들에게 잔학한 충동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수하들은 사람을 극도의 고통으로 몰아넣고 농락하는 악랄한 행동을 낱낱이 지켜보았으나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입을 떼는 순간 소년의 잔학성이 제게로 향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순수하게 악의적이고 목표물을 정하면 방식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공격하니 누군들 그 희생자가 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소년의 수하들은 그 위험성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악랄한 행위를 방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몇몇은 참혹한 풍경에 하얗게 질렸고 몇몇은 아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불편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자는 단 하나.
소년의 시선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청년에게로 향했다. 그 얼굴에 드문드문 경멸이 떠오르는 것을, 소년은 포로를 고문하는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유감이야. 나도 이런 건 원치 않았거든.”
소년은 청년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으나 청년의 입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죽어버릴 줄은 몰랐어.”
겉으로 보기엔 그저 천진한 악마의 변명일 뿐이었으나, 사실 이것은 청년에 대한 도발이었다. 소년은 청년의 얼굴을 물들이는 것이 분노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죽은 이는 청년의 동지였던 것이다. 청년의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질 때, 소년은 희열을 느끼곤 한다. 더구나 그 원인이 바로 자신일 때는.
“약한 게 잘못이야. 자연의 법칙도 그렇잖아. 약한 건 잡아먹히고 도태되지. 사람이라고 다를 것 같아?”
정복자의 논리는 이렇듯 간단하고 비정하다. 모든 책임은 나약한 먹잇감에게 있다고. 정복자만이 펼칠 수 있는 논리이고 그들만이 동의하는 이야기였다. 청년은 입술을 짓씹으며 부정의 뜻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있지. 사람은 누구나 조금은 가학성을 가지고 있대.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서 즐거워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란 뜻이야. 우리들이 너희 열등한 인간들을 짓밟는 것도 그렇기 때문 아니겠어?”
소년은 명랑하게 말했다. 끔찍한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그 얼굴에는 천진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어린 나이에 전장을 누비며 적을 도륙한 우수한 전사라고 했다. 그 전공을 인정받아 이례적인 특진을 거듭해 지금은 나이에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의 직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순진한 공격성과 악랄한 사상은 수하들에게까지 두려움을 사고 있었다.
“그런 걸 미친 소리라고 하는 거다.”
맞은편에 앉은 청년이 받아쳤다. 날카로운 금빛 눈이 소년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청년 역시 소년이 잡아온 포로. 미친 말을 말로 받아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의자에 결박된 채이기 때문이다. 아니. 결박되지 않았다 해도 과연 덤벼들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거듭된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탓이다.
포로의 말에 소년의 녹색 눈이 커졌다. 커다란 사탕을 핥으며 소년은 이 흥미로운 상황을 감상한다. 소년에게 청년은 일종의 장난감이었다. 전장에서 소년의 임무는 열등한 인간들을 사냥하는 것. 사냥감은 대개 죽였으나 미처 죽이지 못한 몇몇은 포로로 잡아와 가지고 노는 것이다. 포로들은 소년에게 살아있는 장난감이었으나, 보통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장난을 가장한 폭력을 버티지 못하거나 흥미가 떨어진 소년의 손에 죽은 탓이다. 그러나 청년은 제법 오래 전에 잡혀왔음에도 아직도 버티고 있다. 지독한 폭력 속에서도 버텨내고, 언제나 소년을 즐겁게 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소년은 청년에게 온갖 말을 했다. 전장에서 일어난 일. 그 날 죽인 포로. 수하들의 멍청한 짓거리 등. 그건 아이가 인형에게 하루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늘어놓는 것과 꼭 같은 것이었다. 소년에게 청년은 그 정도의 위치였던 것이다. 청년은 소년의 말을 들으면서도 금빛 눈으로 소년을 응시할 뿐 언제나 침묵했다. 그 어떤 말에도, 그 어떤 장난에도 청년이 입을 열지 않았기에 소년은 그것이 벙어리일 것이라 생각해왔다.
“뭐야, 말도 하잖아?”
소년은 앳된 얼굴 가득 들뜬 기색을 얹으며 청년에게 다가섰다.
“나, 네가 벙어리인 줄 알았다고. 주제에 건방진 소리도 하는구나?”
“그래서 이제 혀라도 자를 생각이냐?”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실행하지는 않을게. 나는 말하는 장난감 쪽이 더 좋거든.”
작은 손가락이 청년의 이마를 톡톡 쳤다. 포로 주제에 저와 같은 위치에 있는 양 건방진 말이 흥미롭다. 역시 그때 살려두길 잘했어. 소년은 청년을 잡아왔던 전투를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언젠가부터 적은 저항군을 구축해 맞서기 시작했다. 무력하게 사냥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도리어 사냥꾼을 물어뜯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약해빠진 먹잇감 따위가 어찌 사냥꾼을 무너뜨리겠는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않은 오합지졸 패잔병 따위 힘없이 무너질 뿐.
청년 또한 저항군의 일원이었다. 다만, 동지들과는 달리 꽤 오래도록 버텨 제법 거슬리는 축에 들었다. 빠르고 철저하게 적을 짓밟는 우수한 전사인 소년조차도 얼마간 애를 먹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생존자들로 꾸린 소수부대. 대군의 집요하고 맹렬한 공격에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폭격 속에서 대부분이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것은 극소수. 전투를 끝낸 소년은 정복자로서 생포된 저항군 앞에 섰다. 살아남았다 해도 거의 중상을 입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빛을 잃은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래서야 포로라기보다 송장에 가깝지 않은가.
짜증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소년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과 마주했다. 맹금을 닮은 금빛 눈이 저를 쏘아보고 있었다. 살아있는 송장들 속에서 유일하게 깨어있는 자. 부상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긴 했으나, 신음 하나 내는 일 없다. 지금껏 아군을 괴롭혀온 부대를 이끌었다는 청년은 그 활약에 걸맞게 아직껏 당당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흥미로워 두어 번 거칠게 발길질을 했으나 청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다시 소년을 쏘아보는 것이다.
지루함에 찌푸려졌던 소년의 얼굴이 차츰 개였다. 저것은 살려둘 가치가 있다. 소년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실망시키지 않으리라고, 제법 재미있는 장난감이 되어줄 거라고. 청년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이송되었던 것도 소년의 그런 직감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표본을 보존하듯, 청년을 포획하여 본대로 복귀하는 동안 소년은 청년이 죽지 않도록 유심히 살폈던 것이다. 목숨만 건질 정도나마 응급처치까지 베풀면서.
소년의 직감은 적중했다. 청년은 지금껏 포획한 포로 중, 지금껏 소년이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중 가장 흥미로웠으니. 청년의 건방진 말을 자비롭게 넘어가는 것은 언제까지나 그가 패배자이기 때문이었다. 무력한 포로로서, 아무런 무기도 없이 소년의 손 안에 놓인 한낱 장난감이기 때문이었다. 미천한 것들의 가소로운 행동도 때로 용납하는 것이 승자로서의 여유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다만 ─ 소년이 고문용 지팡이를 집어 들자 수하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만 상하관계를 확실히 인식시킬 필요는 있었다. 소년은 의자 팔걸이에 결박된 청년의 손등에 지팡이를 내리꽂았다.
“그런데 너 말이야. 가끔은 네 주제를 생각했으면 좋겠어.”
가벼운 말은 매서운 뜻을 담고 있었다. 청년의 흰 손등이 날카롭게 벼린 끝부분에 꿰뚫려 피가 흘렀지만 청년은 신음조차 삼키고 소년을 노려보았다. 바로 저것이었다. 소년을 들뜨게 하는 것은.
“지금 네가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너에게는 내가 특별대우를 해주는 거니까.”
“특별대우?”
“내가 왜 너를 살려두고 있다고 생각해?”
“높으신 분들의 생각 따위 모른다.”
빈정대는 기색이 다분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소년은 명랑하게 답을 내린다.
“그건 네가 투쟁하고 있기 때문이야.”
어린 나이부터 전장에 나서면서 소년은 수많은 적과 맞닥뜨렸다. 그 중엔 무력하게 쓰러지는 이들도 있었고 악귀처럼 달려드는 이도 있었다. 정복자인 소년에게 전자야 돌아볼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후자는 명이 짧았다. 제 모든 것을 태워 상대와 함께 불타거나, 헛되이 목숨을 버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들의 싸움이란 하루살이의 생처럼 허망했다.
무력하게 굴복하거나, 쉽게 목숨을 던지거나.
시작은 달라도 도달하는 결말은 같다. 의미조차 찾을 수 없는 패배나 죽음. 얼마나 허망하고 무력한 종말인가. 소년은 그런 무기력한 결말에는 진절머리가 났다. 정복당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구차하게라도 살아남기를 바랐다. 날개를 쥐어뜯기고도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곤충처럼, 처절한 발악이라도 하길 바랐다.
그런 점에서 청년은 특별했다. 청년이 지독한 폭력과 절망 속에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그에게 생존에 대한 의지가, 혹은 목적이 쟁그라울 정도로 짙게 자리하기 때문이리라고 소년은 판단한다. 그렇기에 그는 매순간 투쟁하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이 참혹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하여.
청년은 투쟁하여 살아남고 소년은 그 투쟁을 보며 즐거워한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특별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청년의 투쟁이란 소년에게 최고의 쇼였고 질리지 않는 유희였기에.
“네가 버둥거리는 건 언제나 볼만하거든.”
“그것 참 고약한 취향이네.”
“그런 취향인 것에 감사해. 네가 살아있는 건 전부 그 때문이니까.”
“은혜가 망극하군.”
청년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패자 주제에, 먹잇감 주제에 꺾이지 않는 저 불손한 태도가 얼마나 소년을 즐겁게 하는지. 역시나 청년은 최고의 장난감이었고 가장 흥미로운 표본이었다. 그렇기에 잔학한 정복자는 오늘도 불손한 것의 죽음을 유보한다. 저것은 더 오래 살아남아서, 계속 발악하여 저를 즐겁게 해야 하므로.
*
세상을 뒤흔든 전쟁은 우습게도 한 사람의 신념으로부터 출발하였다. 혼란기의 나라를 평정한 통치자는 민중 앞에 고했다. 이제부터 자신은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겠노라고. 우리 우수한 인간들만을 위한 세상에 타인은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들만의 이상세계가 펼쳐질 거라고. 비틀린 신념은 쉽게 사람들을 전염시켜, 어느새 그것은 당연한 진리로 각인되었다. 세를 넓혀가던 신념은 광증을 낳고 광증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전쟁을 낳아 세상에 혼란을 불러온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던 이와 타인을 해하기 위해 훈련받은 이들 중 승자가 누구인가는 뻔한 일이다. 침략자들은 빠르게 타국을 삼키고 군데군데 제 표식을 남기며 적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살아남은 사람은 남김없이 끌려왔다. 죄 없는 타인을 짓밟는 것이 침략자들에게는 우수한 행보였으므로, 잔학한 전사들은 쉽게 영웅으로 포장되었다.
침략자들의 행보는 민중에게 ‘정복’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정복자들이 의기양양하게 귀환하는 것을 민중은 환호하며 맞았다. 그들에게 타국의 희생자들이 맞은 참혹한 결말 따위, 저와 다른 열등한 족속에 대한 당연한 처사일 뿐이었다. 통치자로부터 출발한 악랄한 사상은 재앙처럼 번져 온 세상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정복자에 의해 움직이고 정복자를 위해 움직이게 되었다. 앞으로도 언제까지고 그들의 시대가 이어지리라고, 정복자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까, 사냥인 거야. 포식자가 먹잇감을 물어뜯는 건 당연하잖아?”
어린 정복자는 그런 말로 침략을 정당화하곤 했다. 어릴 적부터 주입받은 악랄한 사상은 소년을 천진한 괴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소년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전사들이 그랬다. 그들은 피해자를 돌아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가책은 의도적으로 제거되었다. 도륙해야 할 상대가 ‘열등한 족속’이라는 상부의 세뇌는 그들의 최소한의 도덕성마저 흩트려놓았다.
“왜 우리가 먹잇감이지?”
청년은 사냥감으로서 투쟁하여 살아남았다. 그에게 침략은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폭력이며 재앙이었다. 때문에 저를 도발하는 어린 정복자가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소년이 상부로부터 전사로 만들어진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그야, 너희가 약하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반대로 너희가 약했다면 너희가 사냥당했겠군.”
“우리는 너희처럼 약하지 않아. 어릴 때부터 훈련받거든. 사냥을 준비하는 거야. 당연히 너희가 당해낼 리 없지.”
“그게 자랑스럽나?”
“물론.”
정복자는 여유롭게 피정복민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의 모든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승자에게나 허락되는 것. 승자로서 길러진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리가.
“너희는 전사가 아니라 괴물을 키워낸 거다.”
“패자의 구차한 비난 따위 관심 없어.”
수하에게 손짓하여 죄수를 대령시키며 소년은 감흥 없이 받아쳤다. 사냥꾼인 자신에게 으르렁거리는 먹잇감도 물론 흥미로웠지만, 지금은 죄인에 대한 처분이 먼저였다.
“정 분하다면 스스로 대항해보는 게 어때? 물론 너희한텐 절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소년의 이죽거림에서 청년은 무언가 불길한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많은 경우 소년의 빈정거림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년의 머릿속에 며칠 전 감옥에서 있었던 큰 소란이 떠올랐다. 소년의 집요한 관심과 집착 때문에 독방에 격리되어 있었던 청년은 그 잔향만을 겨우 느꼈을 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무언가, 있었다. 잔학한 정복자가 저렇게 여유를 부릴만한 것이.
“앞으로 내가 뭘 할지 궁금해?”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 거 아냐. 그냥 반역자 처분 정도 될까.”
“반역자?”
“몰랐어? 겨우 살아남은 네 동지들이 무엇을 꾀하고 있었는지.”
청년의 얼굴이 처음으로 하얗게 질렸다. 언제나 날카롭게 번득이는 그의 금빛 눈이 흔들리는 것은 꽤 진귀한 광경이다.
“엑시즈인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너희가 영영 패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서 나오잖아? 상대를 노린다면 적어도 철저해야지. 절대 들키지 않고 무엇이든 물어뜯을 각오로 덤벼들어야지. 안 그래?”
“어쩔 생각이냐.”
“그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
소년은 커다란 초콜릿을 베어 물며 웃었다. 그 웃음 뒤에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 청년은 직감한다. 최악의 결말.
“나는 별로 자비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만은 자비를 베풀어볼게. 단, 네가 내 뜻대로 움직인다면.”
“무슨 뜻이냐.”
청년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같은 여유를 찾아볼 수 없다. 답지 않게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청년의 모습이 흥미로워 소년은 부러 여유를 부리며 그의 불안을 자극한다. 침묵 속에서, 와작, 입 안에서 초콜릿이 부서지며 입 안에 단맛이 가득 퍼졌다. 자. 어쩔 참이야? 소년은 눈짓으로 물었다. 제 앞에 무릎 꿇은 죄수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뭘 원하지?”
청년은 결국 재차 물었다. 일부러 답을 보류하며 소년은 상좌에서 일어서 죄인들 앞에 선다. 바로 이 순간 소년은 가련한 희생자들 앞에서 명계의 왕이 되는 것이다. 목숨을 틀어쥐고 한 가닥 희망을 내보이며 농락하는 절대자. 소년의 등 뒤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아마 청년이 버둥거리는 소리일 터다. 여느 때처럼 의자에 단단히 결박된 그가 최악의 결말 앞에서 저항하는 것이다. 아아. 저렇게 부질없는 발악을.
소년의 손이 내려갔다. 그와 함께 고문이 시작되었다. 비명이 홀을 때리는가 싶더니 살이 타는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앞의 광경은 하나하나 청년의 눈에 새겨지고 있으리라. 동지들의 고통을,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니. 소년의 녹색 눈이 웃었다. 최고의 비극이네.
“시운인 소라!”
참지 못한 청년이 소리쳤다. 아니, 절규했다. 속에서부터 긁어낸 듯한 거친 울음에 소년이 돌아섰다.
“뭐야. 내 이름, 알고 있었잖아?”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할 마음이 생겼나보네. 그래도 동지들은 중요하단 거야?”
“어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나 말해!”
“복종해.”
처음부터 불손한 반역자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열등한 피정복민의 처분 따위 간단했으니까. 여기서 그들의 목숨 따위 한낱 미물보다 못했다. 살아봐야 바닥을 길 것이고 죽는다면 무의미한 삶을 일찍 끝맺는 것뿐. 그럼에도 그들을 굳이 고문하며 처분을 미룬 것은 그들만이 청년의 약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네 동지들을 한동안 살려뒀는지 알아?”
고문을 중단한 소년이 물었다. 청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부 네 약점을 잡기 위해서였어. 원래 타인은 약점이거든. 동지가 생기는 순간. 그들에 대한 책임이 생기지. 그 전처럼 내가 마구 고문해서 죽였다면, 그래서 너 혼자 남았다면 이런 일이 생길 리가 없잖아?”
그제야 청년은 알아차린다. 저를 돌아보는 정복자가 얼마나 소름끼치는 인간인지. 얼마나 치밀하고 간교한 족속인지. 소년은 지금까지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비를 가장하여 그를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걸려들 줄은 몰랐네. 다 네 동지들 덕분이야. 일이 훨씬 간단해졌어.”
“그래서 겨우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기다렸다고?”
“나에겐 아주 중대한 문제니까. 자,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까?”
청년은 언제나 악독하게 투쟁하며 살아남았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소년에게 굴복한 적은 없었다. 맹금을 의미하는 이름처럼 꺾이지 않고 버텨낸 것이다. 그 고고함은 소년을 흥분시키는 동시에 안달하게 했다. 패자 주제에, 먹잇감 주제에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투쟁하는 저것을 짓밟고 싶다. 저 얼굴에 수치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싶다. 결국 무릎을 꿇고 굴복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한 욕망이 얼마나 자주 소년을 덮쳤던가. 그래서 지금껏 소년은 기다려온 것이다.
겨우 포로 하나를 복종시키기 위해서.
“말했잖아? 너한테는 특별대우를 해주고 있다고. 너 하나만을 위해 준비한 극이야.”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하이라이트를 장식해줘. 소년은 단검으로 청년을 결박하고 있던 밧줄을 끊었다. 청년은 그렇게 해방된다. 풀려난 청년이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소년은 다시 재촉한다.
“모두를 살리고 싶다면 내게 복종해봐, 쿠로사키. 네 방식대로.”
어린 나이라고는 하나 역시 소년은 정복자여서 저렇듯 당당하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연스러움에 청년은 결국 자신이 먹잇감임을 깨닫는다. 그 순간 청년의 몸이 무너졌다. 차가운 바닥에 무너진 청년은 천천히 소년에게로 향한다. 신민이라도 되는 양, 기어서. 고개를 숙인 것은 굴욕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수치를 삼키기 위해서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굴복한 적 없었던 이에게 처음으로 복종하고 있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흘러, 사냥감은 겨우 사냥꾼에게 닿는다. 소년이 어떤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터져 나올 듯한 격렬한 감정을 억누르며 청년은 정복자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복종의 뜻이었다.
“이게 최선이야? 뭐, 좋아. 시시하긴 하지만 정성을 생각해서 받아줄게.”
청년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소년은 바닥에 놓인 청년의 손이 발작하듯 떨리는 것을 여유롭게 감상했다. 그의 단정한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졌을까. 어떤 빛으로 물들었을까. 소년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청년의 턱을 들어올렸다. 정복자와 피정복민의 눈이 마주쳤다.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사나운 얼굴.
“분해?”
청년은 말이 없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목까지 치미는 말을 눌러 삼킬 뿐이었다.
“어쩌겠어. 전부, 너희가 약해빠졌기 때문인데.”
소년의 발이 청년의 손을 짓밟았다. 청년은 언제나처럼, 비명은커녕 신음조차 토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의 표현이리라. 그 비참한 모습에 정복자의 웃음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약해빠져서 당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러니, 분하면 힘을 키워봐. 우리처럼.”
너희한테는 평생 불가능하겠지만. 정복자는 여느 때처럼 오만하게 예언하며 걸음을 옮겼다. 자박자박. 익숙한 발걸음소리가 사라진 후에야 청년은 고개를 들었다. 정복자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저와 같은 불운한 사냥감뿐이었다.
*
어린 정복자는 자신이 겨우 포로 하나 따위에게 집요한 집착을 품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질척하고 악랄한 감정의 근원을 이해하기에는 소년이 아직 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 집착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알았다. 극도의 가학심. 집착의 목적지는 가학심이었다. 청년을 짓밟고 투쟁을 비웃으며 그의 삶을 연장시키는 것은, 그러면서 그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전부 가학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위험한 충동이 되어 소년을 덮쳤다. 정복자인 소년에게는 그 악독한 충동을 참아낼 이유가 없었으며, 충동대로 나아갈 힘도 있었다.
그렇기에 청년은 지금껏 소년의 집요한 괴롭힘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동지들의 참혹한 결말을 지켜보고, 동족에 대한 모욕을 참으며, 동지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굴종까지 감수하며 버텨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청년이 그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감당해온 것은 그에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복자에 대한 항거. 전쟁의 종말. 그리고 빼앗긴 세상의 복구.
그것이야말로 청년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는 희망이었다. 그것을 실현시키기 전까지 청년은 절대 무너질 수 없었다.
그렇기에 청년은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동지들까지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처절한 투쟁을 거듭하는 것이다. 언젠가 저 목적을 이루는 날이 올 거라, 기약 없는 예언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그렇게 그 어떤 고난에도 흔들림 없이 나아가던 청년을 완전히 뒤흔든 것은 결국 그에 집착하던 악랄한 정복자였다.
정복자는 제가 가장 아끼는 장난감이 갇힌 방으로 향했다. 그것이 옥중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지금까지 얌전히 처박혀있던 게 무슨 생각일까.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소년은 익숙한 곳에서 멈췄다. 웅크리고 있던 청년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바로 철창으로 달려들었다.
“네놈은 또 무슨 생각으로……!”
청년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는 달리 대단히 격앙되어 있었다. 짐승의 울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나를 농락하려 온 건가?”
“농락이라니, 무슨 소리야.”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도 입은 웃고 있다. 청년의 말에서 생략된 것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처음부터 농락하기 위해 청년을 찾은 것이었다. 그 얼굴이 자신 때문에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싶어서.
“내 동지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저기. 말을 똑바로 해. 뭘 주워듣고 이러는지는 몰라도…….”
“전부 끌려나가는 걸 봤다. 차례로, 하나씩, 완전히 결박된 채.”
순간 소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찰흙으로 빚어낸 안면을 마구 뒤튼 것처럼 기괴한 풍경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얼굴에 웃음이 걸려있다는 것에 청년은 소름이 끼쳤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게 뭐였는지 잘 생각해보지 그래?”
“살려준다고 했잖아!”
“그래. ‘살려주겠다’고만 했었지.”
소년이 깔깔댔다. 좁고 암담한 독방을 소년의 웃음소리가 가득 채웠다.
“목숨을 붙여줬으니 그 이후 어떻게 하는가는 내 자유 아니야? 설마, 내가 그 이후까지 책임져줄 줄 알았어? 지금까지 네가 본 내가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이었나? 아닐 텐데?”
어차피 심한 고문으로 몸이 망가져 살아있는 송장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오래 버티겠는가. 그럼에도 청년을 도발하기 위해, 그에게서 격렬한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굳이 그들을 이용한 것이다.
“어디로 보냈어?”
“글쎄. 그게 중요해?”
“어디로 보냈어? 어서 말해.”
“여기서 나가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는 너도 잘 알지 않아?”
‘쓰레기’들이 닿는 곳. 한 가닥 희망조차 없는 음울한 곳. 철저한 고문으로 몸이 망가진 이들을 그곳에 보낸다는 건 ─
“네 손을 더럽히지 않고 죽이겠다는 거군.”
“왜 그래. 나는 약속을 지켰다니까? 어쨌든 살려줬잖아?”
“하지만 결국 타인의 손으로 죽이게 되겠지. 악랄한 새끼.”
거친 말과는 다르게 청년의 눈빛은 놀랍도록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절망에 젖은 눈을 기대한 소년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격렬한 반응을 원했는데 이래서야.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다. 더 자극적인 전개를 위해 청년을 도발하려던 소년에게 청년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걸로 네 뜻은 아주 잘 알았다. 이제 됐어.”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의 의미다.”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으로 의문이 풀릴 리 없는 소년이 아이처럼 떼를 써도 결코 입을 여는 법이 없다. 그때 소년은 직감했다. 그가, 무언가 중대한 판단을 내렸다고. 그리고 그것은 아마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리라고. 그러나 소년은 끝까지 오만했다. 정복자로서, 그가 무엇을 하건 통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청년을 그냥 떠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소년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매캐한 연기에 콜록거리며 소년은 달렸다. 소년이 군림하던 호사스러운 방이 빠르게 불타고 있었다. 급작스러운 불길은 결코 우연히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걸 소년은 바로 알아차렸다. 누군가가 혼란을 일으키려 불을 지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누가? 불만을 품고 있었던 수하가? 아니면 지배받던 이들이? 무슨 원한으로? 겨우 방을 빠져나온 소년의 등 뒤에서 바로 불붙은 기둥이 무너졌다. 숨을 헐떡이며 소년은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피한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그래야 이 모든 일을 벌인 불손한 것을 찾아 벌할 수 있다. 이를 악물며 달리는 것은 전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소년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려고 해도, 길이 완전히 막혔기 때문이다. 이 또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 분명했다. 턱 끝까지 올라오는 욕설을 삼키며 소년은 또 다른 길을 찾아 헤맸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 이래서야, 전장에서 힘없이 죽어가던 그 열등한 족속들과 다를 바 없는 결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어떻게든 길을 만들기라도 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
“다급해 보이는군.”
익숙한 목소리에 소년은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가장 아끼던 장난감이, 악독하게 짓밟던 청년이 그곳에 있었다.
“뭐야. 너도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나? 지금 네 꼴이 얼마나 웃긴지 보여줄 수 없어서 유감인데.”
“네가 한 짓이야?”
“물론.”
언제나 제게 짓밟히던 먹잇감의 얼굴에, 정복자처럼 여유로운 웃음이 번지는 것을 소년은 보았다.
“이제 와서 복수라도 하려고? 참 눈물겹네. 모든 걸 잃고서야 복수를 꾀했는데, 너까지 죽게 생겼으니.”
“복수?”
다시 올려다본 청년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냉정했다. 백지처럼 텅 빈 얼굴에, 소년의 발악이 가소롭다는 양 실소만을 머금은 채였다. 이것은 뭔가 잘못되었다. 불길한 직감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복수 따위 안 해. 네겐 그럴 가치도 없다.”
“그럼 뭐야. 마지막 발악?”
“네가 말했지. 타인은 약점이라고. 동지가 생기는 순간 책임이 생긴다고. 그런데 감사하게도 네가 내 약점을 전부 없애줬잖아? 그것으로, 네 뜻대로 움직여줄 이유도 사라진 거다. 나 혼자라면 걸릴 게 없으니까.”
“너, 설마…….”
“반란을 꾀한 자들은 내 옛 동료의 분대였지. 전부 알던 사람이었다. 그들을 그대로 뒀다면 나는 그들을 잃기 싫어 끝까지 네 뜻대로 움직였을 거야. 필요하다면 너를 만족시키기 위해 수치스러운 행동까지 해가면서.”
청년이 희게 웃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제야 소년은 깨닫는다. 그를 지탱하던 것은 이미 소멸했다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이 도려내고 말았다고. 그렇기에 그는 남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고.
증오하는 정복자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폭약이 있었던가?”
본능적인 공포로 소년은 뒷걸음질 쳤다. 정복자로서의 권력도, 전장을 화려하게 누비던 실력도, 이 극한의 상황에서는 전부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정복자는 순식간에 평범한 인간으로 격하된다. 고작 한 사람, 그것도 제가 지배하던 이가 준비한 결말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한낱 소년으로.
“함께 가지, 지옥으로.”
비천한 사냥감은 결국 사냥꾼을 저와 같은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이제 그들에게 닥칠 결말은 단 하나.
폭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0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역조] 재앙의 굴레 (0) | 2015.07.15 |
---|---|
[사장슌] Painkiller (0) | 2015.07.08 |
[반역조/슌ts] 절망을 끝내는 자 (0) | 2015.06.30 |
[슌] 죽음의 잇자국 (0) | 2015.06.29 |
[사장슌] 포식자와 사냥꾼 (0) | 2015.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