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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미카+슌] 젓갖

현소야 2020. 1. 30. 17:07

 

흰 목덜미를 흉측한 자국이 덮고 있었다. 칼날이 지나간 흔적을 청년은 무엇으로도 가리지 않는다. 한때 그의 목을 죄었던 스카프도, 간간이 목에 걸쳐지던 목걸이도 없다. 보는 이마다 힐끔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청년은 흉터를 그대로 내보이는 것을 고집한다. 그에겐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청년이 머무는 회사의 사장으로, 과거 청년을 사용했던 사내는 그러한 행동이 일종의 과시임을 안다. 이런 상처를 새기면서까지 사냥감을 처리했다고, 청년은 무언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냥한 먹잇감을 전시하는 포식자의 방식이 아니다. 주인을 지켰음을 자랑스러워하는 개의 모습에 가깝다. 사내가 곁에 두었을 때는 아무리 꼬드겨도 손을 타지 않더니, 새 주인을 찾고는 완전히 달라진 청년이었다. 이제 청년은 주인의 언행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모습도 행동도 주인의 입맛에 맞추어갔다. 청년이 두른 모든 것에서 사내는 누군가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그와도 가까운 사람, 청년의 새 주인. 그의 어머니.

사내는 전시품을 바라보듯 청년을 눈에 담는다. 단정하게 길러 묶은 머리카락, 파충류의 눈을 연상시키는 피어싱부터 맞춤 정장까지. 전부 주인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었다. 청년은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다. 회사 중역인 이사장의 사람으로서, 그녀의 수집품으로서. 아들이 한 번 쥐었던 남자를, 조악한 습성으로 이전부터 회사에서 취급이 좋지 않았던 청년을 왜 어머니가 데려왔는지 사내는 짐작할 수 없다. 그리고 왜 이렇게까지 오래 쥐고 있는지도.

본래라면 어머니의 곁에 딱 붙어있어야 할 청년을 굳이 사장실에 호출한 것은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어떻게 그런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는지. 목줄을 쥐고도 안심할 수 없었던 청년이 어쩌다 그렇게 고분고분해졌는지.

부상은 괜찮나?”

사내가 입에 올린 것은, 청년이 부러 숨기지 않는 상처. 목에 입은 자상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날 청년이 보인 악귀 같은 모습과 함께.

보시다시피.”

형식적인 인사에 청년은 무신경하게 답한다. , 불쾌하기라도? 빈정거림이 따라붙자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께서 꽤 신경을 쓰셔서 말이지.”

그 분이?”

자기 사람에겐 철저한 분이란 걸 알 텐데.”

이런 것쯤은 괜찮아.”

더한 것이라도 할 수 있다. 청년의 말에 숨겨진 뜻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일도, 주인을 구해냈다는 점에서 청년에겐 은근한 자랑이 된다. 사내는 상처가 새겨지던 날의 청년을 선명히 기억한다. 맹금의 이름에 걸맞게 그 날의 청년은 완벽히 포식자의 모습이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위기를 감지하고, 뒤집힌 눈으로 덤벼든 습격자를 힘으로 눌렀다. 습격자가 마지막 발악으로 휘두른 칼이 이사장을 할퀴기 직전, 청년은 제 몸으로 습격자를 막았다. 갈 곳 잃은 칼날이 흰 목을 그었다.

사람들은 바닥을 적시는 피를 보았다. 청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도, 그의 목에서 피가 쏟아지는 것도. 습격자를 내려다보는 청년의 시선은 벌레를 보듯 싸늘했다. 결말이야 정해져 있었다. 청년은 피를 뒤집어쓴 채 위험을 처리했다.

다음번에 그런 위험이 있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할 생각인가?”

물론.”

좋은 마음가짐이군. 쿠로사키 슌이 이렇게나 남을 위할 줄은 몰랐어.”

칭찬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텐데.”

금빛 눈에 경계가 깃들어 있었다. 사내가 무언가 답을 구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청년이 고분고분한 대상은 주인인 이사장뿐이다. 주인 앞에서 발톱을 감출 뿐, 타인에게까지 순한 짐승을 가장할 이유는 없다. 사내는 더 돌아가는 일 없이 본론을 이야기한다.

네게 직접 듣고 싶어. 그 쿠로사키가 어쩌다 이렇게 얌전해졌는지.”

그게 중요한가?”

네가 나를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 건 아카바의 사람이기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아카바 히미카를 그렇게 잘 따르는 걸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디까지나 계약으로 유지되었던 것은, 사내가 청년의 불손함을 못 본 체 했던 것은 그에게 마음의 빚이 있어서였다. 사내의 잘못은 아니나, 청년은 그의 몸에 흐르는 피를 혐오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먼 이국에서 살아가던 청년이 사내의 회사에 들어서야 했던 건, 사내의 전사가 되어야 했던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사내의 아비가 일으킨 전쟁이 그의 고향을 폐허로 만든 것이다. 모든 것을 잃고 한 가닥 희망을 움켜쥐기 위해 청년은 사내의 무기가 되었다. 정예병을 결성해 아비에 맞서겠다는 말을 믿고서.

사내는 제 말을 지켰다. 정예병을 결성했고 아비에 맞섰으며, 전쟁도 끝냈다. 그러나 청년은 그 후 갈피를 잡지 못했다. 평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도통 무장을 풀지 못하는 모습이 신경 쓰여 사내는 여러 길을 권유했으나, 한두 번 참여했다가 그만둬버리는 것의 연속이었다. 청년을 향한 회사 사람들의 시선엔 점점 피로가 얹혔다. 사장의 전사로 싸운 공로를 인정한다 해도 그의 존재가 회사의 평화를 깨트리고 있었으므로.

사내도 청년을 도울 길을 더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청년이 사라졌다. 누군가는 도망친 것이라 했고 몇몇은 드디어 자기 자리로 돌아간 것이라 말했다. 사람을 풀어 찾을 수도 있었으나 누구도 그만한 노력은 들이지 않으려 했다. 사내는 자신의 손이 닿는 도시 내에서 얼마간 청년의 행방을 찾았다. 소득이 없다는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사내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청년은 길을 잃었다. 그의 도움은 청년을 구해내지 못한 것이다. 사라지기 직전까지 청년의 목에는 고향에서부터 지녔던 스카프가 걸쳐져 있었다. 저항군의 표식. 그의 투쟁을 상징하는 것이자 사내가 벗겨낼 수 없었던 것.

청년을 찾으면서도 사내는 체념하고 있었다. 그가 완벽히 망가졌다고 생각하고. 과거의 흔적에 매달리고 평화에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구하지 못할 줄 알았다. 쓰러질 때까지 저항군의 표식으로 목을 죄고 있으리라 믿었는데. 보름쯤 지나 어머니에게 이끌려 나타난 청년은 목에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그를 짓누르던 책무가, 그의 삶에 따라붙던 과거가 거짓말처럼 풀려있었다. 그때 사내는 깨달았다. 누구도 청년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고, 자신이 실패했음을.

너를 어머니께 묶어두는 것이 대체 뭐지?”

불필요한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겠지. 돌아가야겠어.”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는 청년에게 사내는 손을 뻗었다. 무방비한 목에 손을 대는 것은 쉬웠다. 목에 새겨진 상처를 사내는 손가락으로 덧그린다. 섬칫한 감촉이 그대로 손에 전해졌고.

이런 흠집은…….”

청년은 바란 것 이상으로 동요했다. 억센 손길이 빠르게 사내의 손을 떼어냈다. 단정한 얼굴에 서린 것은 불쾌.

보통 흠집은 수집품의 가치를 떨어트리지. 네 경우는 예외겠지만. 흠이 새겨질수록 가치가 올라간다. 아이러니하군.”

수집품?”

어머니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크게 보면 어머니께서 신경 써서고른 수집품이라 할 수 있지. 나쁘게 생각할 것 없어. 어쨌든 선택받았다는 거니까. 만약 그게 불쾌하다면 네가 어머니께 무언가 바라고 있다는 뜻일 거다.”

그것은 도발이었다. 사내는 청년에게서, 특정한 감정을 끌어내려는 것이다. 청년이 끓어 넘치는 감정 탓에 주인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도록. 혹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도록. 감상이 있었는지 청년의 금빛 눈은 깜빡임도 없이 오래도록 사내를 담는다. 청년과의 계약이 끝난 후로 그에게서 이토록 진득한 시선을 느낀 적은 없다 내심 만족한 사내는 목소리를 낮춰, 은근하게 속삭였다.

수집품이 아니라면 너는 어머니의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거지?”

 

*

 

청년은 주인의 전시실에 딱 한 번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끝없이 늘어선 유리 장식장이 방문자를 압도했다. 고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유물, 멸종했다는 생물의 박제. 온갖 진귀한 물품이 무서우리만큼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작은 박물관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차곡차곡 쌓인 역사의 단편, 그것도 엄선된 유물에 시선을 빼앗겨 한참이고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주인이 뒤에서 가만히 어깨를 감쌌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요.]

[이렇게 대단한 전시실이 있을 줄은…….]

[전부 수집품이랍니다.]

웃음 띤 목소리에 청년은 긴장했다. 주인의 재력이나 능력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수준인 줄은 몰랐다. 이 모든 것을 소장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이 필요했을까. 주인의 세계란 평범한 사람으로선 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세계일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면 하나, 줄까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청년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지만 주인은 말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게 사양할 필요는 없어요. 내 사람에게 하나쯤은 줄 수 있는데.

[곁에 두기로 선택한 사람이 어쩌면 여기의 어떤 유물보다 값진 것일지도 몰라요.]

[……사람의 가치를 높게 쳐주시는군요.]

[선택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답니다. 나는 사람만큼은 변덕으로 고르지 않아요. 가장 눈길을 끄는 대상, 가장 빛나 보이는 사람, 그리고 가장 필요해 보이는 자를 골라내죠. 그 사람들이 만들 미래는 내게 최대의 자산이 될 거예요.]

[그럼 저를 데려온 것에도, 이유가 있었습니까?]

[물론이죠. 쿠로사키 군.]

당신에겐 분명한 가치가 있답니다. 그러니 나 이외의 누구의 말에도 휘둘리지 말아요.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한 말을, 청년은 똑똑히 기억한다. 그 날 주인이 전시실을 나설 때 굳이 그의 손에 올려준 작은 유물도.

그렇게, 주인은 분명히 청년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러나 회사 사람 모두가 청년의 존재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주인의 아들이자 한때 청년을 사용했던 자인 사장은 주인의 선택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 들었다. 어머니의 선택이 도통 납득이 가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함께 주인을 지키는 동료들도 걸핏하면 청년을 힐끔거렸다. 끈적한 시선에 호의란 없다. 어떻게든 흠을 찾아내려는 집요함과 엉성한 불쾌감만이 보였을 뿐이다.

모두의 불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청년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주인의 세계엔 너무 이질적인 존재였다는 것. 세계적인 대기업의 경영진인 주인은, 그 위치에 걸맞게 완벽한 것만을 두었다. 그녀의 세계에 흐트러짐은 없다. 물품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성된 것이어야 했고, 사람은 훌륭하게 교육받은 인재여야만 했다. 그야말로 상품으로 채워진 세계에 어느 날 청년이 끼어들었다. 든든한 지원군도 내세울 장기도 없는, 망가진 소년병이.

[수집품이 아니라면 너는 어머니의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거지?]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청년은 사장의 말을 떠올린다. 오해를 살 정도로 냉정함을 두르던 남자가, 드물게 상기된 얼굴로 던진 질문. 아무래도 사장은 청년이 무언가 대단한 환상에 들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청년은 주인에게 분에 넘치는 마음 따위는 품어본 적이 없는데도.

자신이 부족한 존재임은 알고 있다. 원래라면 결코 주인의 세계에 들어설 수 없을 불순물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수집품으로서 거둬주었다면 오히려 기쁨이다. 전시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녀의 삶에 한순간의 흥미로라도 남는다면. 한 방울 얼룩이 될 수 있다면 청년은 만족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청년은 사장의 질문에 웃어버렸다. 그쪽이야말로 무엇을 기대해? 건조한 답과 함께.

그러나 청년은 가능한 주인에게 부끄럽지 않은 수집품이고 싶었다. 주인이 선택한 다른 이들처럼 교양을 쌓기는 무리고, 출신을 고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청년이 주인에게 어울리는 부속품이 될 길은 외양이나마 말끔하게 가꾸는 것. 편리한 대로 기르던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다듬고, 주인의 취향에 맞는 액세서리를 골라 걸쳤다. 소매 한 쪽, 단추 하나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수시로 제 모습을 살피는 것이 그의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청년에게 가능한 것이 있다면. 청년은 거울을 보며 목을 쓸어보았다. 단추를 끝까지 채워도 가려지지 않는 흉터. 한편으로는 청년이 일부러 감추지 않는 흔적. 목에 새겨진 자상은 그의 가치를 증명한다. 어떤 위험에라도 뛰어들 수 있는 무모함. 날것에 가까운 방식이나마 주인을 지킬 수 있는 힘. 주인이 그를 용인하는 가장 큰 이유를 찾자면 그것이리라고 청년은 생각한다. 조악한 족속이라도 무기로선 그럭저럭 쓸모가 있으니까.

쓸모.

주인은 줄 수 있었고 그 아들은 주지 못한 것. 혹은 주인이 찾아주었고 사장은 찾지 못한 것. 청년은 주인에게 이끌려 회사에 돌아왔을 때 사장의 얼굴에 드리워진 묘한 그림자를 보았다. ‘옛 주인의 눈에는 패배감이 비쳤다. 실패에 익숙하지 않은 그 남자는 청년이 새 주인을 찾았다는 사실이 제법 씁쓸했던 모양이었다. 하필 청년을 틀어쥔 것이 어머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래서 사장은 청년에게서 답을 구하는 것일까. 청년이 새 주인에게서 거짓말처럼 안정을 찾게 된 이유를. 구원만큼 극적인 반전의 뿌리를.

만일 설명한다 해도, 사장이 이해할 수 있을지. 청년은 사장에게 답을 주지 않고 돌아 나올 때 기묘한 희열에 사로잡혔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저 남자를 의문에 빠트렸다. 영민하나 인간의 조악함을 모르는 사람에게 실패를 안겨주었다. 청년이 회사를 떠난 것은 실은 도망친 것에 가까웠다. 평화에 섞여들 수 없었고 낡은 병기를 보는 듯한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다. 사장은 자주 그를 불러 평화에 적응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의 삶은 이미 폐허가 되어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아름다운 풍경에 잘못 낀 조각처럼 느껴져서, 청년은 저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바로잡힐 것 같았다. 모두가, 행복해진다. 정예병의 희망이었던 소년이 꿈꿨던 대로, 사장이 이루고 싶었던 대로. 평화로운 세계의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평화를 누리고, 사장은 오점이 사라진 회사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모두에 자신이 끼지 않은 것이야 큰 문제도 아니었다. 어차피 어느 세계에서도 그를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동안 저를 보호해줬던 회사에서 뛰쳐나오자 청년은 갈 곳이 없었다.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가면 잃은 것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저와는 별다른 연도 없는 이곳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다. 때문에 청년은 한참 회사 주변을 맴돌았다. 버려진 짐승처럼.

사장이 군림하는 곳, 이국의 도시에 처음 다다랐을 때처럼 청년은 창고에서 잠을 잤다. 깨어있는 시간은 은신처 근처에서 풍경만 눈에 담거나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구석구석 파고드는 일이 전부였다. 사장과 얽히기 전과 비슷한 나날이었지만, 희망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만 달랐다. 겨울은 싸늘했고 기댈 곳 없는 사람에겐 더욱 혹독했다. 눈이 내리던 날, 거리의 모두가 들떴으나 날짜를 헤아리지도 못한 채 바깥에서 몇 밤을 보낸 청년은 지쳐있었다.

전장에서 몸을 싸맸던 코트에, 낡아서 진즉 버렸어야 할 것에 눈이 흰 점을 그리며 쌓이기 시작했다. 은신처로 돌아갈 힘도, 쌓인 눈을 털어낼 힘도 없어 청년은 벽에 기대어 눈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몸 깊숙이 스미는 한기에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 순간에도 청년은 통신기를 꺼내지 않았다. 사장에게 연락하기만 하면 모른 체 저를 받아줄 것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 눈이 떨어지지 않아 청년은 고개를 들었다. 눈발은 여전히 날리고 있었다. 청년의 머리에 우산이 씌워졌을 뿐.

[당신, 이름이.]

시선이 맞닿자 상대가 말을 걸어왔다. 물빛 눈이 낯이 익었다. 청년은 저에게 말을 건 여자가 사장의 어머니라는 것을 떠올려냈다. 회사에서 간간이 마주치긴 했지만 제대로 말을 섞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쪽은 나 기억 못 할 텐데.]

[. 쿠로사키 슌이었죠. 엑시즈의 사람.]

바로 맞혔으므로 청년은 멈칫했다. 청년이 아들의 무기였다는 걸 알 텐데도 여자는 그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엉뚱한 말을 덧댈 뿐이었다. 길을 잃었나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청년은 사장 앞에서 꺼내지 않을 것이다. 여자에 이끌려 간 곳에서 눈을 피하고, 그녀의 말에 자신이 무엇을 갈망했는지 깨달은 것을. 평범하지만 묵직한 대화 속에서 여자가 끈질기게 그를 붙잡고 있었음을. 어디로든 도망치려던 청년을 데려가주겠다는 여자의 선언과, 그 이유 모를 호의에 청년이 한참이나 입을 떼지 못했던 것을.

[……이런 사람으로 괜찮아요?]

사장은 청년이 긴 침묵 끝에 힘겹게 꺼낸 말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청년이 어떤 심경으로 주인에게 매달렸는지, 왜 간단히 목줄을 넘겨주었는지도. 고작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에 눈물을 흘리고 처음으로 말을 섞은 이에게 안긴 이유를, 그 남자라면 결코 찾아낼 수 없다.

[그런 사람이니까 괜찮은 거예요.]

청년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말도.

그러니 사장은 끝까지 답을 얻지 못하리라. 어디가 자신의 패인이었고 무엇이 주인에겐 해결의 열쇠가 되었는지. 앞으로 청년을 볼 때면 드문 실패를 떠올리고, 어머니의 구원을 못내 질투하게 될 것이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 주인의 곁으로 돌아가며 청년은 슬며시 웃었다. 이것만은 청년이 주인에게 안겨줄 수 있는 확실한 승리였다.

 

*

 

그 남자의 눈에는 버려진 짐승처럼 허기가 비쳤다. 스물도 되지 않은 청년으로서, 삶에서 맛볼 즐거움도 행복도 전부 말라붙은 양. 전쟁으로 시작된 불행은 전쟁이 끝나고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미래를 그려도 희망은 보이지 않고 현실은 여전히 깜깜했다 허기를 해소할 빛도 없이 그림자만 이어지는 나날. 그런 삶은 오래갈 수 없다. 모두가 꽃을 피워낼 시기에 뿌리부터 말라, 거짓말처럼 시들게 되리라. 여자는 아들과 비슷한 연배의 청년과 마주칠 때마다 종말을 생각했다.

불행이 전염되기라도 하는 듯 회사 사람들은 청년을 슬금슬금 피했다. 이따금 그에게 닿는 시선은 엷은 연민과 경계가 섞인 무언가였다. 그는 가여운 존재였으나 함께 서고 싶은 인간은 아니었다. 창살 너머로만 보는 짐승과 같다. 청년도 아마 저를 향한 복잡한 심리를 느꼈으리라. 어느 순간부터 그는 틀어박혀 있기를 고집했다. ‘보호자격인 사장이 억지로 불러내지 않으면 어쩌다 마주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회사에서 청년의 이름이 몇 번이고 불리는 것을 들었다. 사장이 부리는 이들 몇몇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도. 아들인 사장에게 묻자, 그는 굳은 얼굴로 이야기했다. 청년이 사라졌다고.

[어차피 회사에 있을 사람 아니었나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짐작 가는 곳은?]

[지금으로선 없군요.]

[그 남자, 찾고 싶어요?]

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아들에게서 약간의 망설임을 느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얼굴에 침울함이 비쳤다. 자신이 없는 것이다. 청년을 구제하겠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를 모르던 아들은 청년 한 사람으로 갑자기 실패를 쌓고 있었다.

[……돌아올 거라는 기대는 없습니다.]

여자는 아들에게 자기 사람을 찾으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제 발로 돌아오리라는 위로를 안겨주지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체 입을 닫았을 뿐. 다만 청년의 굶주린 눈이, 창백한 얼굴이, 먼 세계로만 향하던 시선이 아른거렸다. 보호받지 않으면, 죽을 텐데. 그런 생각이 머리를 쳤다.

다행히 청년은 죽지 않았다. 여자는 눈이 내린 날 우연히 청년과 마주치면서 그가 무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우습게도 회사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장소였다. 버려진 짐승처럼, 원래 저를 받아주었던 사람의 주변만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에서 제대로 찾아보았으면 진즉 그를 발견해 데려갔을지도 모른다. 이전부터 그를 껄끄러워하던 회사 사람들은 물론, 사장까지도 그만한 의욕이 없었을 뿐.

쏟아지는 눈을 청년은 멀거니 서서 맞고 있었다. 누구도 그의 곁에 서지 않았고, 눈을 막아줄 우산 하나 그의 손에 쥐어져 있지 않았다. 그 쓸쓸한 풍경에서 가장 시선을 끌었던 것은 청년의 눈이었다. 맹금을 연상시키는 금빛 눈에 지독한 허기가 비쳤다. 이런 곳에서까지, 이런 순간까지. 그는 허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 여자는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길을 잃었나요?]

그것은 청년에게 제 존재를 알리기엔 충분한 질문이었다. 청년은 동요했고, 여자의 손에 쉽게 이끌렸다. 그를 잡아끌면서 여자는 썩 괜찮은 전사였던 청년이, 삶을 다 살아버린 듯 굴던 그 남자가 너무도 연약한 인간임을 느꼈다. 그는 저를 찾아줄 사람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이 놓쳐버린 목줄을 계속 목에 맨 짐승처럼. 어쩌면 스스로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고서.

청년을 적당한 장소에 데려가 심리를 캐묻자 답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는 전쟁의 시대에 머문 낡은 병기였다. 평화를 찾으면 자연히 자취를 감췄어야 할, 불행의 흔적. 전쟁의 끝에 빛을 쥐지 못했기에 무장을 풀 줄 몰랐고, 병기의 모습이라 평화에도 섞여들 수 없었다. 나는, 마이아미에서, 방해물이 된 것 같아서. 청년의 말은 느릿했다. 중간중간 속에서 걸려 나오는 것 같았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어.

[좋아요. 그럼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말해요.]

[당신 아들이 나를 어떻게 썼는지 알고 있잖아.]

[그런 방향으론 괜찮단 의미군요.]

[……지금은 안 먹혀.]

[아뇨. ‘사용하기나름이에요.]

여자는 지금의 삶에서 없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영역엔 아직 들인 적이 없기에 하나쯤 수집해도 좋을 것. 완벽한 인간이야 넘쳐났다. 잘 교육받고 다듬어져서 빛나는 보석은 이제 아쉽지 않았다. 그녀가 쥐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결핍된 만큼 강한 동기를 기대할 수 있는 자. 부족한 만큼 완벽한 보석 이외의 가치를 보여줄 존재. 한 번 잘 생각해봐요, 쿠로사키 군. 여자는 나긋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면, 따라줄 건가요?

언제나 굶주려 있던 눈이 오롯이 여자를 담았다. 먹어치우기라도 할 듯, 진득하게. 그 허기의 방향을 살짝 틀어버리기만 한다면 무엇보다 강한 동기를 만들 수 있었다. 여자가 던진 질문은 청년에게는 단순한 제안이 아니었을 것이다. 테이블에 올려둔 손이 떨리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의 머릿속엔 이렇게 울렸으리라. 내가 당신을 구원해준다고 하면, 따를 건가요?

구원이란 상대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방법이었고, 여자는 그것을 잘 활용했다. 청년이 가장 바라던 것을 주면서 그의 구원자가 된 것이다. 쓸모를 주겠다는 말에 청년은 흔들렸고, 곁을 허락하자 감격했다. 이런 사람으로 괜찮아요? 회사로 데려가려던 때 청년이 물었다. 여러 감정이 섞인 말에 여자는 즉답했다. 그런 사람이니까 괜찮은 거예요. 여자가 원하는 것은 청년의 결핍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남루한 행색 때문에 더 처연해 보였던 청년은 옷을 맞춰 입히고 꾸며놓자 썩 말쑥했다. 여자는 청년을 제 곁에 세우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목에서 오래도록 그를 짓누르던 것을 풀어냈다. 붉은 스카프. 고향에서부터 매었던 저항군의 표식. 청년은 저항하지 않았다. 한동안 볕을 보지 못한 목을 쓸어보다 물었을 뿐이다.

[무엇을 원해요?]

[내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요.]

그런 건 잘할 수 있어요. 청년의 목소리엔 약간 울음이 밴 것 같았다.

그 후는 모두가 아는 대로였다. 청년은 여자의 세계에 뛰어들었고 한 자리를 차지했다. 여자가 부리던 사람은 하나같이 청년의 존재를 껄끄러워했고 아들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눈치였으나 여자는 청년을 선택한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만이 이해하고 청년에게만 통하는 것이었으므로. 불편한 시선 속에서도 청년은 시종 당당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자에게 선택받았으니, 그녀에게 어울리는 존재만 되면 충분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여자는 자신에게 목줄을 내준 짐승이 모든 것을 저에게 맞춰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조차도 속으로 감탄할 정도의 노력이었다. 외양을 제 입맛대로 꾸미는 건 물론 행동과 말씨도 처음 거두었던 때서 상당히 발전했다. 회사 사람들이야 그에게서 아직 위태로움을 읽어내고 완벽한 무리속 이질감으로 수군대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이미 멀끔한 수하가 되어있었다. 그러한 노력이 다른 누구 때문도 아닌,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에 여자는 만족한다. 그녀가 요구한 대로 청년은 그녀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녀를 지켰음에 기뻐할 정도로.

지금, 여자의 곁에 석상처럼 선 청년에겐 습격을 막아내느라 생긴 흉터가 있다. 영구적인 후유증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때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끼는 수집품에 상처가 남은 게 아쉬워 여자는 한동안 흉터에 시선을 고정한다.

흠집이라 생각하세요?”

시선을 느낀 청년이 물었다. 장갑을 낀 손으로 슬그머니 목을 가리는 것이, 돌아올 반응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당신의 몸에는 흠이 남은 게 맞지요. 유감스럽게도.”

그러나 무모하게 뛰어든 행위엔 가치가 있었다. 본능적이었을 그 행동이 습격으로부터 그녀를 지킨 것은 틀림없다. 그 전까지 청년을 은근히 무시하던 이들에게 그가 있어야 할 이유를 보여준 것은 물론이었다. 칼날이 지나간 흉터는 복종의 증거였고 필요의 증명이었다. 청년도 그걸 인지했기에 부러 흉터를 가리지 않았으리라. 주인을 구한 것에 기쁨을 느끼고, 계속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렇다면, 청년에게 제안할 것은 하나. 여자는 목소리를 낮춰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말인데, 그 자리에 무언가 새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새긴다면…….”

타투 같은 것이요. 당신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그 자리를 덮으면.”

그러면 보기 좋을까요?”

앞으로 당신의 헌신을 기쁘게 볼 수 있을 거예요.”

하나, 골라주시지요.”

과연 청년은 순순히 따라주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여자는 즐거이 고민한다. 그의 이름에 맞게 날개를 새겨도, 자신의 취향에 맞게 뱀을 그려도 좋다. 어떤 형상이든 넌지시 꺼내기만 한다면 그의 목을 덮게 될 것이다. 한때 청년의 목을 죄었던 저항군의 표식처럼, 여자에 대한 충성의 증표로서.

……상처는 쉽게 나아요.”

흉터의 길이를 가만히 재어보던 여자에게 청년은 말했다.

전장에서나 지금이나 제 역할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위험을 제 선에서 막아내는 것. 그런 식으로 살면 상처는 어쩔 수 없이 따라와요.”

그러니까, 앞으로 또 흠집이 생기더라도. 청년은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흠집이, 생겨도.”

흠 없는 보석은 수없이 가지고 있어요. 내가 흠을 아쉬워하는 건 당신의 몸이 상해서일 뿐이죠. 그러니 긴장하지 말아요. 당신이 하는 일엔 감사하고 있으니까.”

이렇게나 말 잘 듣는 짐승을 버릴 리 없다. 목줄이 끊어지기 전까진 어떻게든 쥐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담아, 여자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노력을 하면 돼요.”

청년의 시선에서 불안이 걷혔다. 절대자에게 용인받기라도 한 것처럼. 한때 위협적인 무기였던 청년은, 이른 나이에 절망에 짓눌려 있던 그는 의외로 순진한 데가 있다. 어둠이 길었기 때문인지 작은 빛에도 감격하는 것이다. 그에게 사소한 구원을 드리워주며, 여자는 저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포식자를 쥘 수 있다. 우리가 만난 건 나쁘지 않은 우연일 거예요. 나는 당신 같은 인간을, 분명히 바랐으니까. 여자는 청년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아마 청년도 그럴 것이다. 그의 눈에는 더는 허기가 비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여자는 공연히 확인하고 싶어진다. 빛도 행복도 아직은 불안한 사람이라, 자신이 가져온 변화를 그의 목소리로 직접 듣기를 바랐다. 어때요, 당신은 행복해요? 많은 의미를 담아 여자는 물었고 청년은 눈을 감으며 답했다. 젖은 목소리로 흘러나온 것은 분명 긍정의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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