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슌ts] 계약은 신중하게
치솟는 불길이 시야를 메운다. <마녀 처형>이라는 외침과 함께 퍼지기 시작한 불길은, 마녀가 숨어든 숲을 빠르게 태우고 있었다. 마녀를 없애려 지른 불은 마녀를 포함해, 그녀가 택한 종착점마저 잿더미로 만들고 마리라 ─ 마녀의 계약자는 마녀의 은신처까지 태우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냉소를 걸친다. 마녀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으나 인간은 마녀를 감당하지 못한다. 인간일 수 없는 존재를 경멸하고 두려워하여, 세상에서 잘라내려 할 뿐. 마녀가 벌였다고 알려진 대부분의 사건이 인간이 빚어낸 재앙이며, 마녀의 ‘마법’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신비일 뿐임을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마녀가 인간을 꼬드긴 일은 없다. 마녀의 힘을 탐한 소수의 인간이 마녀에게 접근해 계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인간의 욕심이 마녀를 붙들어왔음은, 지금 병사에 포위된 마녀의 계약자도 자신의 경험으로 입증할 수 있다. 마녀가 뛰어들어간 숲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무장한 전사들을 이끄는 청년이 마녀의 계약자. 오래도록 계획해온 적진에의 침투를 앞둔 청년이 잠시 이곳에 멈춰, <처형>을 지켜보는 건 계약자에 대한 마지막 의리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제가 끌어들인 마녀에 대한.
그는 마녀에 이끌렸으리라곤 누구도 상상 못 할, 잘 교육받은 도련님이었다. 명문가의 후계자로 태어났으니 평생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으련만, 세상을 위협하는 악인이 나타나자 ‘도련님’은 악에 맞서기를 택했다. 정예병을 결성하고 지휘관을 자처한 정의로운 청년, 어쩌면 영웅이 될지도 모를 자. 사람들은 그런 반듯한 인간이 마녀에 이끌렸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젊은 지휘관이 공공연하게 마녀를 데리고 다녔음에도. 마녀를 제 전사처럼 사용했음에도.
마녀가 지휘관에게 묶이게 된 것도 그가 마녀에게 계약을 요구해서인데도.
왜 불길하게 마녀를 데리고 다니느냐 물을 때마다 지휘관은 계약을 해버려서, 라고 건조하게 답했는데 사람들은 마녀의 계약자가 정예병의 일원이라 믿는 눈치였다. 지휘관이 마녀를 데려온 시점이 정예병 결성 직전이란 사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왼팔에 수상쩍은 표식이 있다는 것도. 피처럼 붉은 표식이, 마녀가 사용하는 무기마다 새겨진 심볼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도.
지휘관에게 그 표식을 새겨준 계약자는 지금쯤 ‘적’에게 둘러싸였으리라. 마녀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의 외형을 지니고 인간의 육신을 빌린다. 불멸자라고도 볼 수 없다. 마녀가 숨어든 곳으로 향해봤자 지휘관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사람들의 두려움과 증오 탓에 공격당한 후 불길에 갇히는 마녀뿐이다. 지휘관은 눈앞에 그려지는 계약자의 상을 떨쳐내려 애썼다. 마녀가 표정 없는 얼굴로 칼을 맞는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그녀는 인간의 병기로 죽이기 힘들고, 인간의 증오로 망가지지 않으며. 불태워지더라도 마녀의 힘은 유효하고. 마녀의 계약자만이 아는 이야기를 지휘관은 속으로 읊는다. 정예병은 경비를 뚫고 적진에 침투하기 위해 마녀를 인간에게 던져주었다. 그것도 보통의 인간이 아닌, 마녀의 동족을 사냥해온 잔학한 병사에게 내주었으니 사실상 마녀를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지휘관의 선택이었고, 정예병이 택할 수밖에 없는 차악의 길이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경멸받는 패를 버리기.
[이대로라면 아카데미아에 진입하기 어려워. 랜서즈는 고작 8명이다. 정면돌파가 불가능하니 수를 쓸 수밖에. 필요한 건, 미끼. 누군가가 아카데미아의 집중 타깃이 되어야 한다.]
진입작전을 실행하기 전 마녀를 따로 부른 지휘관이 건넨 말이었다. 굳이 말을 덧대지 않아도 마녀와 그 계약자는 누가 미끼가 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길로 지휘관을 떠난 마녀는 무기인 기계 새를 불러냈고, 오래지 않아 적진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쫓기기 시작했다. 침략군이 마녀를 없애려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지휘관과 그 계약자가 마녀를 미끼로 쓰기로 합의한 순간, 마녀는 이런 결말까지 생각했을까? 저를 사냥하려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불길에 휩싸이는 일까지?
그리고 마녀에게 미끼 역을 요구한 지휘관은 이런 것까지 각오했던가?
“리더, 어서 아카데미아로 가야…….”
무의미한 생각을 끊은 것은 동료의 목소리였다. 정예병의 희망인 소년은 지휘관을 붙잡다시피 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바로 머리가 차가워진 지휘관은 감상을 걷고 몸을 돌렸다. 마녀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알고 있다.”
“쿠로사키는 괜찮은 거지?”
마녀의 이름이 흘러나왔지만 지휘관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건 우리가 지금 신경 쓸 게 아냐.”
대신 병사가 마녀를 노리는 한, 지휘관과 그가 이끄는 정예병은 적진에 쉽게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마녀를 향한 병사의 공격이 거셀수록, ‘처형’이 오래 걸릴수록, 정예병은 안전해진다. 지휘관은 타고나길 영민했고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가장 좋은 길을 택할 줄 알았다. 지금 그가 향해야 할 곳은 마녀가 갇힌 숲이 아닌 적진이었다. 수년 전부터 끌어내리기로 마음먹었던 침략군의 수장을, 당장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약자를 영영 잃게 되더라도.
마녀가 마지막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덕에 정예병은 큰 방해 없이 적진에 침투할 수 있었다. 무장한 전사들이 침략군 간부를 처리하던 때 지휘관은 적진의 최중심부로 향했다. 침략군의 기지라지만 내부 구조는 이미 훤하게 알고 있어서였다. 그가 선발해낸 정예병에게는 처음 들어오는 곳이었으나 그에게는 이미 수년 전 곳곳을 누볐던 ‘익숙한 장소’였으니. 침략군의 수장도, 그 끔찍한 남자가 꾀하는 것도 지휘관에게는 너무도 선명했다. 그는 한때 그 남자를 아비라 불렀고, 그 남자의 야심을 아들로서 엿들었으며 ─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는구나.”
지금은 ‘저항군의 리더’ 자격으로 침략군의 수장 앞에 섰다. 오랜만에 보는 아비는 부쩍 늙었고 그만큼 초라해 보였다. 세계를 삼키겠다는 야욕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카바의 죄는 아카바가 끊어야 할 테니까.”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너는 너무 감상적이야. 널 내 곁에 세우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지.”
“그런 걸 바란 적도 없어. 당신과 얽히는 건 수치스럽거든.”
“그래. 3년 전보단 단단해진 모양이야. 마녀를 버리고 왔더구나. 내가 키운 군사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주고서. 계약자와 함께하는 것보다 아비를 끌어내리는 게 더 끌리더냐? 그래서 너답지 않게 마녀를 미끼로 삼은 거냐?”
“아카바 레오를 끌어내리려면 그 정도의 각오는 되어있어야지.”
적진에 들어서기 전이라면 모를까, 일단 침투하기만 하면 그 주변 군사를 빠르게 정리할 수 있을 실력을 가진 이들이 바로 지휘관이 이끌던 전사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소란은 잦아들고, 간부를 인질 삼아 남은 군사를 무장 해제시킬 수 있으리라.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아들은 아비에게 낮게 속삭였다.
“당신이 가르쳐준 대로 자기 사람을 버리고, 영광을 포기하며 여기까지 왔다. 남은 건 아카바 레오를 처리하는 것뿐.”
수년간 꿈꿔왔던 일이 이루어지기 직전. 지휘관의 머리를 스치는 것은 기쁨도 감격도 아닌 해방감이었다. 이제 악몽은 끝이야. 지휘관은 소리 없이 중얼거렸고,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다음 순간, 침략군은 패배를 선언했다.
*
마녀는 사라진 나라에서 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크게 발전한 문명을 자랑했던 나라지만, 침략군이 밀려들면서 그대로 묘지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생명 하나 싹틀 수 없게 된 나라는 지도상에서 지워지고, 역사에서 찢겨나갔다. 마녀는 그 처참한 묘지의 생존자였다. 폐허 어딘가에 내 동료들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생존자로선 유일하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겠지만, 살아남은 마녀는 나뿐이었지. 마녀의 계약자는, 언젠가 마녀가 머리칼을 빗으며 흘린 말을 기억한다.
[왜 네가 최후의 마녀라고 확신하지?]
[그야, 마녀는 ‘만들어지는’ 거니까. 내 주변 사람들은 마녀로 만들어지지 않았어.]
[만들어졌다고?]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과 다를 것 없는데. 재료 몇 개만 있으면 인간도 마녀로 만들 수 있지.]
[그럼 너도 인간이었단 건가?]
거기서 마녀는 입술을 닫았다. 부정도 긍정도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 그 침묵은 긍정의 침묵이었던 것 같다. 전쟁을 끝내고 침략군의 기지에 남은 자료를 챙기던 지휘관은 그녀의 고향에선 단 한 명의 마녀도 없었다는 조사결과를 찾아냈다. 때때로 인간이 마녀로 각성하기도 한다는 전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설에서는 마녀로의 각성이 절망이나 분노 같은 강렬한 감정을 재료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마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면 제법 의미심장한 설정이었다. 마녀는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왔고, 그녀의 고향을 무덤으로 만든 건 침략군이었으며, 그들이 마녀에게서 앗아간 가장 큰 보물은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으니.
먼 이국에 살던 마녀가 지휘관의 영역에 뛰어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침략군에 납치당한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마녀의 고향에 밀려든 침략군이 어느 날 부주의하게 ‘수장의 아들’ 이야기를 흘린 모양이었다. 마녀는 단숨에 국경을 넘어 지휘관이 살던 도시에 왔고, 그가 키우던 학생을 하나하나 습격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지휘관을 유인하기 위한 도발이었다. 그에 응해 <습격범>을 찾아 나섰을 때. 지휘관은 제 나이 또래로 보이는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의 왼쪽 손목엔 사라진 나라의 유물이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여자의 출신지와 목적을 대강 파악했다.
[나를 찾은 목적은?]
그럼에도 확신을 얻기 위해 묻자, 딱딱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프로페서, 아카바 레오에게서 동생을 되찾아오는 거다. 프로페서의 아들을 붙잡아두면 협상이 가능하겠지.]
[단신으로?]
[보통 사람이라면 안 되겠지만, 이쪽은 마녀야. 저주로 묶어두는 것쯤 가능해.]
[마녀라.]
그때까지만 해도 지휘관은, 아니, 정예병 결성을 계획하고 있던 청년은 자신만만했다. 마녀가 망국의 생존자라는 것에 아비의 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한편, 마녀란 신비를 쥐고 싶다는 욕심도 꿈틀거렸다. 청년은 마녀에게 무기를 들고 맞서는 대신, 그녀를 자신의 기지로 끌어들였다. 네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해주지. 아카바 레오를 처리하고, 동생을 구하는 것 말이다.
[굳이 네 뜻을 따라줘야 하는 이유는?]
[네 힘으로도 아카데미아에 침투하는 것까진 가능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네 고향인 엑시즈까지 구하는 건 무리겠지. 나는 완전한 결말을 만들어줄 수 있어. 하트랜드에 남은 아카데미아를 몰아내고, 침략군을 벌하는 것까지 약속하겠단 거야.]
호기롭게 던진 말을 마녀는 의외로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래. 너는 아카바니까.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 건조한 목소리를, 저를 따라오던 마녀의 모습을 청년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마녀가 묵기로 한 객실에 찾아온 그가 마녀에게 손을 붙잡힌 것도. 바로 다음 순간 마녀가 불러낸 기계 새가 그를 포위한 것도.
[그래서, 어떻게 증명할 생각이지? 아카바 레이지의 쓸모를?]
여유롭게 날아든 말에, 청년은 직감했다. 마녀를 단순히 괜찮은 패로 확보해두는 게 아니라, 마녀를 도와주는 체 하는 게 아니라, 그녀와 확실하게 얽혀야 한다는 것을. 그녀가 그를 속박하고 그가 그녀를 속박하지 않는 한, 마녀를 제 곁에 두는 건 불가능하단 것을.
[내가 너를 가장 위협적인 무기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정예병을 결성할 계획이야. 네가 오기 전부터 구상해뒀지. 너와 함께 전사를 선발해 아카데미아에 침투시키는 게 내 목표. 네가 엑시즈의 전장에 있었다면 느꼈겠지만, 전투 상황에서는 단신보다는 동료와 함께인 게 낫고 앞뒤 없이 뛰어드는 것보단 지휘관이 있는 게 낫다.]
[전장에 서지도 않아본 게 아는 체는.]
[그렇지만 너의, 아니, ‘우리의’ 적을 제대로 아는 건 내 쪽이지. 나와 함께하다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나를 어떻게 해도 좋아. 그러니, 나를 네게 묶어둬.]
마녀의 족쇄가 있잖아. 계약 말이지. 언제나 판을 쥐고 있는 양 구는 건 청년의 특기였다. 제 목에 칼날이 들어오는 상황이라 해도. 그 뻔뻔한 여유가 우스웠는지, 마녀는 깔깔댔다. 계약해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한단 말이지?
[좋아. 아카바의 자식을 풀어놓는 건 안심이 되지 않으니, 내게 묶어둬야겠어.]
말이 끝나자마자 마녀는 청년의 왼쪽 소매를 걷고, 드러낸 팔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렸다. 마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움찔했던 청년은 이내 자신의 왼쪽 팔에 ‘흔적’이 남은 것을 알아차렸다. 마녀의 기계 새에 하나같이 찍혀있던 심볼이었다. 그것도 붉은색. 피를 연상시키는 색채. 이게 계약의 증거인가? 물음을 건네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속박의 표식이지. 원래는 먹잇감에 남기는 거야.]
제법 거친 표현이었으나 청년은 여자가 취하는 포식자 같은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청년이 원하는 것은 유순한 수하가 아니라 위협적인 무기였으므로. 인간 이상의 힘을 지닌 존재를 자신을 담보하여 묶어둘 수 있다면 청년으로선 조금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날 청년이 제 팔에 남은 표식을 만족스레 눈에 담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로는 청년의 뜻대로 되었다. 청년은 마녀의 힘을 빌려 우수한 전사를 선발했고, 그렇게 결성한 정예병에 마녀를 끼워 전투에 나섰다. 선별된 전사가 지휘관의 인도대로 ‘인간의 싸움’을 하면, 마녀는 그 뒤에서 괴물의 싸움을 벌였다. 마녀가 긴 손가락을 지휘하듯 움직이면 그녀의 무기인 기계 새가 일제히 움직였고, 이내 적의 모든 것을 무심하게 쓸어버리는 식이었다. 그럴 때 마녀는 신벌을 내리는 초월자 같기도 했고, 재앙을 품은 괴물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 절반쯤은 맞는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녀는 욕망으로 타인을 짓밟는 침략군을 ‘벌하듯’ 쓸어버렸고, 마녀가 적군을 덮치는 방식은 언뜻 재앙을 연상시켰으니. 지휘관의 눈엔 마녀가 전자의 모습으로 각인되었지만 아마 적군이 기억하는 마녀는 완벽히 후자의 모습이었으리라. 그것도 마녀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자에, 그들이 짓밟고 온 나라의 생존자이기까지 했으니. 마녀는 침략군의 시각에선 단순히 <끔찍한 마녀>가 아니라 지옥에서 온 유령처럼 비쳤으리라. 그들이 죽이고 그들이 빚어낸, 악몽 같은 괴물.
그래서일까. 침략군은 각자의 능력으로 무장한 ‘인간의 전사’보다 마법을 두른 마녀에게 훨씬 더 공격적으로 굴었다. 몇몇 어리석은 이들은 사악한 마녀를 없애겠다며 그녀에게 겁 없이 덤벼들기도 했다. 일부는 그녀가 망국 출신임을 두고 ‘헌팅게임의 먹잇감’이라며 경멸을 내비치기도 했는데, 누구도 마녀의 전의를 꺾지 못했다. 마녀는 제 모든 것을 앗아간 침략군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되레 저에게 쏟아지는 경멸과 두려움을 흡수하여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는 듯했다.
그럼에도 지휘관은 때로 마녀를 걱정했는데 그녀가 꼭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싸우기에 그랬다. 마녀의 육신은 생각보다 쉽게 망가졌고 몸에 걸쳐지는 부상은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으며, 마녀는 자신을 미끼로 쓰는 것을 즐겼다. 몸을 조심하라 말해도 통 듣질 않아서, 부상을 안고 돌아온 마녀를 지휘관이 불러다 굳이 상처를 확인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너는 내게 중요한 무기다. 쿠로사키. 그러니 다쳐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마녀의 마른 등에 새겨진 상처를 훑으며 달랬던 기억이 있다.
[무기로서 기능만 하면 상관없잖아?]
[금이 가는 게 싫은 거라면?]
[걱정할 것 없어, 리더.]
금이 가는 건 ‘그릇’이고 마녀 자체는 아무리 내던져져도 흠집이 나질 않거든. 그러니까 눈앞의 실금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말라고. 지휘관의 손길을 떨쳐낸 마녀는 마른 몸을 다시 싸매며 한마디 더 건넸다.
[그릇이 깨져도 마녀를 묶어놓는 안전장치, 알려줄까?]
안전장치만 제대로 남아있다면, 부서지더라도, 불태워지더라도 마녀는 유효해. 시라도 읊듯 말하는 마녀에게 지휘관이 답을 조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의 병기에 당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 그릇은 쉽게 깨질 수밖에 없는 거니까. 안전장치만 있다면 어느 순간에든 마녀는 세상에 뿌리내릴 수 있어. 답을 말해준 마녀는 계약자를 안심시키고 싶은 것인지 안전장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래, 불태워지더라도.
그리고 정말 마녀는 불태워졌다 ─ 마녀를 감당하지 못하는 군사에게 미끼로 던져졌기 때문에. 지휘관은 아비를 끌어내린 후, 마녀가 마지막으로 향했던 숲에 들어갔다. 처참하게 탄 숲에 남은 것은 괴물의 육신이나 파편이 아닌, 마녀를 덮쳤던 병기뿐. 수 세기는 된 유물인 양 하나같이 녹이 슨 병기는, 마녀가 결국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신비였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정작 그 마녀는 불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유품 한 조각 남기지 못했지만.
“주변을 다 수색했는데도 건진 게 없다고 해.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함께 들어온 동료, 정예병의 일원이었던 소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할 때도 지휘관은 무표정했다.
“짐작하고 있었다.”
“쿠로사키를, 보내지 않았다면…….”
“승리도 없었겠지.”
짤막한 답은, 상대의 감상을 끊어내려는 듯한 냉랭함마저 묻어있었다.
“나는 쿠로사키 슌과의 약속을 지켰어. 어떤 식으로든 승리를 가져오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말해도 장본인은 여기에 없는걸.”
“책임은 평생 안고 갈 생각이야. 쿠로사키의 고향, 엑시즈를 복구하는 것으로. 전쟁 피해를 내 선에서 최대한 보상하는 것으로. 그럼 전쟁을 끝낸 후 쿠로사키가 하려던 일까지 전부 맡는 것이 되겠지.”
계약자의 몸을 부순 병기를 짓밟으며, 지휘관은 건조하게 덧붙였다.
“마녀의 삶에 끼어들어 무기로까지 사용했으니, 평생은 바칠 자신이 있거든.”
*
집무실을 찾아온 자는 달갑잖은 소식을 물고 왔다. 어느 고위 관료의 여식과의 혼담이었다. 이제 혼처를 찾을 나이가 되었지요. 아카바 씨를 각별히 아끼는 D 의원님의 이야기인데. 지휘관은, 아니, 이제 더는 전장에 나서지 않는 영웅은 미리 준비한 답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결혼은 생각지 않는다는 답이 바로 그것이었다. 적당한 핑계를 덧붙이며 혼담을 차단했음에도 상대방은 후사를 들먹이며 교제해보라고 떠민다.
전쟁이 끝난 지 벌써 수년.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낸 청년은 모두의 존경을 받으며 살고 있다. 통치자가 되기는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거의 그에 준하는 권력을 쥐고서, 만만찮은 세력을 이끄는 청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명문가의 후계자였고, 세상을 구했다는 명예까지 얻은 그를 제편으로 만들고 싶은 이가 많은 게 당연했다. 걸핏하면 혼담이 들어오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터다. 탐나는 젊은이를 제 가문으로 끌어들이기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혼사였으니.
그러나 영웅은 온갖 곳에서 들어오는 혼담에 한 번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딱 봐도 좋은 조건의 혼담인데도 그러했다. 이제는 소식을 전하는 이조차 조금 난감해할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소극적이신 이유가 있나요? 이제 좋은 가문의 여식과 결합해 더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 싶다거나 후계자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도 해봄 직한데. 우물쭈물 흘러나오는 말에 영웅은 부드러운 웃음을 걸쳤다.
“아카바를 맡아줄 이라면 이미 있지 않습니까. 제 동생도 이제 제법 어른티가 나는 듯한데요.”
“세상이 아카바에게 기대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아카바 레이지의 재능을 후대에까지 물려주는 걸 바란다고요? 그런 말도 많이 듣긴 했지요. 저에겐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요. 세상이 기대를 걸어야 할 건 아카바 레이지가 아니라, 그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줄 원석들입니다. 후사를 남기는 것엔 관심이 없어요.”
능숙한 말엔, 조금의 가능성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철저함이 엿보였다. 또 어느 가문과의 혼담을 물어왔던 상대방은 결국 별 소득 없이 영웅의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매정하네.」
혼담을 전하러 온 이가 자리를 뜨자마자, 나긋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청년은 어느새 제 책상에 걸터앉은 여자를 본다. 녹색을 띤 머리칼과 금빛 눈이 인상적인 여자는 그보다 몇 살쯤 어려 보인다. 한때는 그 또래로 보였던 여자인데, 어느 순간부터 세월의 격차가 생기고야 말았다. 여자의 시간은 그녀가 더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된, 수년 전에 멈춰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환상처럼 나타난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청년은 방문자의 말을 가볍게 받아쳤다.
“마음에도 없는 혼담 따위 넘겨버리는 게 낫지.”
「정말로 마음이 없어?」
“마녀의 계약자가 어떻게 새로운 상대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이상하네, 나는 계약자의 반려에 질투 같은 건 하지 않는데?」
혹시 질투해주길 바라는 건가?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귀를 때렸다. 청년은 소매를 걷어, 그만이 알고 있는 족쇄를 확인한다. 왼팔에 새겨진 표식. 마녀가 새긴 심볼이자, 마녀의 그릇이 깨졌음에도 지워지지 않고 남은 흔적.
물론 마녀는 수년 전에 불태워졌다. 세상에 알려진 대로라면 그의 계약자이자 그가 탐했던 마녀는 바로 그날 영영 흩어졌을 테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다. 계약자끼리만 공유한 비밀. 마녀의 그릇이 붕괴해도 마녀를 이 세상에 묶어둘 수 있는 안전장치의 존재. 마녀의 계약자가 계약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 한, 계약은 지속되고 그 시간만큼 마녀는 계약자의 곁에서 실재할 수 있다. 어떤 타격을 입더라도.
보통 상황이라면 진작 사라졌어야 할 마녀가 청년 앞에서만은 모습을 드러내는 게 그 증거. 본디 붉은색이었던 계약의 증거는 마녀가 ‘죽은’ 때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지워지려던 표식을 계속 남아있게 한 건, 삶에 ‘유령’이 끼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계약을 유지해온 건 그답지 않은 변덕이다.
“마녀의 육신이 깨져도 계약을 유지하기로 한 건 나. 그 선택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
「지휘관님. 예전에 그쪽이 사카키 유우야에게 말한 대로, 아카바 레이지는 계약자로서 약속을 지켰어. 굳이 나에게 더 매여있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리고 계약을 유지한다고 해서 아카바 레이지가 새로운 파트너를 구하지 못할 이유도 없고. 청년만이 볼 수 있는 그의 계약자는 낮게 속삭인다. 우리는 계약자지 반려가 아니잖아?
「질투해서 저주하는 일은 없어. 약속할게. 그러니까.」
“내 쪽이 질투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자에게 바로 설명을 붙여주었다.
“새로운 파트너가 생기는 것 말이야.”
마녀가 반응하기까지는 10초가량의 시간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세상에선 끔찍한 괴물로 취급받았던, 결국 인간의 악의 속에 내던져졌던 마녀는 계약자의 말에 한참이나 깔깔댔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라도 보는 양.
「그래서 나를 놓아주지 않으려 계약을 유지하고 있다고?」
“계약은 속박이기도 하니까. 내게 족쇄를 채우는 것으로 얼마든 상대를 묶어둘 수 있단 말이지.”
「좋아. 한 10년은 버텨봐.」
“그보다 더 걸 자신이 있다면?”
「아, 그래. 아카바의 사람은 독점욕이 강했던가. 계약 상대로 잘못 택했어.」
옅게 한숨을 내쉰 여자는 책상에서 내려오더니 계약자 앞에 선다. 자신의 사용자였고, 지휘관이었으며 파트너이기도 한 청년 앞에. 아직은 호기롭게 말할 수 있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감당하기 힘들 거야. 나는 너를 붙잡아두기 위해 계약을 유지하진 않을 테고.
「질투하지 않겠단 얘기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야. 그러니 놓고 싶을 때 불러. 앞길 창창한 도련님을 놓아줄게.」
청년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마녀는 환상처럼 흩어졌다. 본디 ‘세상에는’ 없는 존재이니 어쩌면 당연한 퇴장일지도 모른다. 홀로 남은 청년은 마녀가 있었던 곳을 바라보다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그런 자유는 바라지 않아. 빠르게 흩어진 소리를, 보이지 않게 된 만큼 언제든 곁에 있게 된 마녀가 들었을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