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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슌 중심] 유물에 관하여 : Side D

현소야 2022. 2. 28. 23:32

 

 

  너를 만나기 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 이름은 물론, 생김새와 취미, 생활습관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꿈꾸는지도. 타인이 얻기엔 다소 많은 정보를 일찍부터 꿰고 있었다. 너를 파헤치려 했던 결과는 아니었다. 너는 원래 관심 범위 밖에 있었으며, 상부가 표적으로 삼은 소녀와 우연히친밀한 사이였을 뿐이다. 소녀는 너를 퍽 좋아했는데, 애초에 그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뿐인 가족, 그것도 자신을 키워주다시피 한 손위형제. 그것만으로도 너는 소녀의 애정을 사기 충분했다.

  조금은, 질투가 날 정도로.

  소녀는 걸핏하면 네 이야기를 했다. 오빠는 프로 듀얼리스트가 되는 게 꿈이래요. 꿈으로만 남진 않을 거예요. 듀얼 학원끼리 붙으면 스페이드교 대표로 나선다니까요. 그 카이토의 라이벌로 취급될 정도니까. 제대로 평가받고 있는 거겠죠. 그렇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마다 소녀는 들뜬 얼굴이었다. , 저와 닮았냐고요? 글쎄요, 사람마다 다르게 얘기해서. 전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진 보실래요?

  너를 알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표적>인 소녀와 친해지려면 너에 대해서 들어야만 했다. 소녀가 흘리는 일상의 대부분에 네가 끼어있었으므로. 상부의 명령은 간결했다. 이름만 몇 번 들어본 먼 도시로 향해, 그곳에 침투하여 표적을 찾아낸다. 다음엔 표적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은 후, 꾀어내 납치해라. 그 여자아이를 포획해갈 사람은 따로 준비해두었으니 유인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어렵지 않은 명령에서 그나마 가장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소녀의 마음을 사는 일이었다. 표적에게 친절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믿음을 얻어야만 언젠가 소녀를 꾀어낼 수 있을 테니.

  [마술사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 남매, 닮은 것 같아요? 어느 날 소녀는 사진을 내밀며 물었다. 사진 속 소녀의 곁에는 그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그것이 처음으로 본 너였다. 소녀의 오빠, 표적의 곁을 지키는 성가신 존재. 소녀가 그렇게나 자주 들먹이던 오빠는 상상하던 모습보단 평범했다. 얼굴에 걸린 어색한 웃음이며, 잘 꾸민 소녀와 대조되는 수수한 옷차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렇네요. 찬찬히 들여다보면 제법 닮았어요. 루리 양과는 이미지가 많이 다른 편이긴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리 닮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소녀의 기대에 어울려주고 싶어 적당히 답했다. 과연 소녀는 단정한 얼굴 가득 웃음을 걸쳤다.

  [남매니까요. 가족은 어떻게든 닮게 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많은 가족이 서로를 좋아하는 걸까요? 함께 살아가면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얽히면서 닮아가기 때문에?]

  루리 양은 오빠 얘기를 참 자주 해요, 알고 있나요? 남매간에 정이 깊은 모양이에요. 덧붙인 말에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궁금해지는데, 언젠가 소개해줄래요? 당신의 오빠.]

  그때 소녀는 웃는 낯으로 냉정한 답을 흘렸다. 아니요.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라고.

  너무 명백한 거절이라, 이유조차 물을 수 없었다. 너와 만나는 걸 소녀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바로 그 이유에서, 너는 얼마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소녀가 제법 애정을 품고 있는, 그럼에도 몇 번 만난 이방인에겐 소개하고 싶지 않은 사람. 소녀의 설명을 정리하자면 상냥한 동시에 제멋대로라는 사람. 분명 자랑스러워함에도 타인에게 깊이 알려주지 않으려는 자. 너를 대하는 소녀의 태도도, 너에 대한 설명도 뜯어볼수록 모순적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머리를 치는 의문이었다.

  너를 좀 더 깊이 알아보고 싶었으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첫째론 표적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얼굴을 많이 노출시켜선 안 된다는 상부의 지침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목적이 끝나면 도시를 떠나야 할 처지 때문이었다. 소녀가 살던 도시를 전쟁터로 만들고서, 소녀를 상부에 넘긴다는 목적까지 달성한 후. 소녀 때문에 침투했던 도시를 떠나며 문득 네 생각을 했다. 표적의 오빠, 정보는 많은데도 뚜렷한 이미지가 잡히지 않는 남자. 끝내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존재에 대한 아쉬움보다 쓸쓸한 감상이 앞섰다. 전쟁이 일어났으니 아마, 그 남자도 죽었겠지. 그게 아니라도 곧 죽겠지. 하고.

  뜻밖에도 너는 살아남았다. 이미 지옥이 된 고향을 떠난 덕분이었다. 또 다른 나라에 침투하여 첩자 노릇을 하던 때, 네가 갑자기 시야에 들어왔다. 주위로부터 두려움을 사는 이방인으로. 잔뜩 무장한 청년으로. 사람들은 네가 먼 곳에서 온 저항군이라고만 했다. 출신지라는 곳은 엑시즈, 하트랜드 그 나라 사람들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지명에 가슴이 뛰었다. 그곳은 네 고향의 이름.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 이름도, 외모도. 소녀와 친분을 쌓을 때 알게 된 것과 일치했다.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졌고 금빛 눈엔 경계가 짙게 깔려있었으나, 너는 소녀의 사진 속 오빠가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너의 이야기를 쉽게 흘렸다. 침략군이 고향을 짓밟았다거나, 누이가 적에게 납치되었다거나.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청년이 짊어지기엔 너무 음울한 이야기가, 그 무게만큼의 연민이 네가 가는 곳마다 따라붙었다. 네가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타인을 의식했다면 분명, 연민 이외에 진득한 시선도 느꼈을 테니까. 비극의 주인공에게 어울리지 않는 호기심과 괴상한 관심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잠깐 잊었던 관심은 너를 만난 순간 되살아났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 접근하려 했더니 마침 행운이 찾아왔다. 너를 만난 나라에서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조직한 정예병에 너와 함께 들게 된 것이다. ‘동료로서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너는 어떨까. 네 누이가 흘린 설명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정예병으로 출격하기 직전, 네게 악수를 청했을 때 머리를 메우는 것은 그런 생각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랜서즈 동지니까, 잘 지내보자고. 쿠로사키.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더니, 너는 못마땅한 얼굴로 살짝 손을 내밀었다 곧 거두어갔다.

  [동지란 말은 그렇게 함부로 붙일 게 아냐.]

  냉랭한 말엔 타인에 대한 짙은 불신과 경계가 내비쳤다. 전쟁에 찢긴 네 마음을 얻긴 쉽지 않으리라 생각하기야 했지만 당시엔 네게 의심을 사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네 누이를 완벽히 속였다는 것, 그녀의 삶에 무해한 사람으로 남았단 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네 누이 앞에 선 때나 네 동료가 된 때나, 첩자 역을 수행하고 있단 점도 자신을 키웠다.

  네가 적으로 삼은 침략군, 너의 고향을 짓밟은 군대는 이쪽에겐 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지이자,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진짜 자리이기까지 했다. 애초에 너와 함께 정예병에 소속되려 노력했던 것도 첩자로서 모두를 속이기 위해서였으니. 상부에서 원하는 정보를 전부 캐내면, 첩자 역을 종료할 때가 되면 정예병에서 이탈하게 된다. 극이 끝난 때 배우가 무대에서 내려오듯. 동지인 체 했던 이들과 말끔하게 끊어진다. 정예병에 들어갈 때부터 정해놓은 결말이었다.

  언젠가 네가 이탈자의 정체를 눈치챌지도 모르지만 네 누이와의 일을 알아차릴 리 없다. 상부의 지침에 따라, 네 누이를 제외하곤 네 고향 사람들에게도 인상을 남기지 않았으니. 그럼 너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불공평한 관계가 아닌가. 한쪽은 통성명하기 전부터 상대를 알고 있는 데다 이미 상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다른 쪽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니. 언뜻 동등해 보일지 모르나 정보의 양도 상대에게 입힐 수 있는 타격의 정도도, 네가 몇 배는 불리했다.

  그러니 오만해졌던 것이다. 네가 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위험을 감지하는 데 특화되었다는 뜻인데. 직감으로든 예리한 관찰력으로든, 너는 얼마든 주변 사람마저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도.

  동료로서 네 곁에 서게 되었단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정예병에서 이탈하게 된 탓이었다. 정예병으로 출격하자마자 낯선 이국에서 뿔뿔이 흩어지게 된 바람에 너를 관찰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겨우 전원이 모였을 때도 네가 마음을 닫아걸고 있어 얻어낸 정보가 거의 없었다. 너의 동료였던 짧은 시간 동안, 너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이라곤 전쟁이 남긴 황폐함 정도. 이미 듣고 온 것이 있는데도, 너라는 인간은 함께할수록 선명해지기는커녕 흐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네 누이가 말해주지 않은, 전쟁 이후의 네가 너무 뚜렷했기 때문이리라.

  너에게서 전쟁을 걷어내면 무엇이 남을까. 원래의 너는 어떤 인간이었을까. 답 없는 의문은 언제나 야릇한 감상으로 끝났다. , 네 삶에 너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말았구나. 조금 유감이네. 그 짤막한 감상에 죄책감이 깃들어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있었다 해도 의미는 없었으리라. 네게 드리운 그림자만큼, 이쪽도 똑같이 돌려받았으니까.

  계획보다 빠르게 정예병에서 이탈한 것은 너에게 패해 모든 것을 잃어서였다. 언젠가부터 의심 섞인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던 너는 둘이서 대결할 일이 생기자마자 적의 첩자라는 확신을 안고 덤벼들었다. 훈련받지 못한 저항군 따위 쉽게 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는 끈덕지게 버티는 것만이 아니라 첩자의 위장까지 벗겨버렸다. ‘아군앞에서, 타인의 손에 그동안 숨겨왔던 것이 공개되는 것. 진짜 소속과 속셈까지 단번에 들통나는 것. 첩자로선 최악의 결말이었다.

  용서 없이 몰아치는 너의 공격은 분노를 연료 삼아 점점 거세져만 갔다. 네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명백했다. ‘침략자가 보내온 첩자. 네 고향을 짓밟은 군대와 같은 부류의 인간. 정체를 안 것만으로도 공멸할 각오로 공격하는 너인데, 덮어둔 죄까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네 공격을 막아내다 든 생각이었다.

  누이의 이야기를 꺼내면 너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질지도 모른다. 혹은 상당한 충격으로 흔들릴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너를 추락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 번도 너를 제대로 파악한 적 없는 타인으로서, 완전히 잘못 판단했지만. 경악은 짧았고, 너는 이내 냉정해져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공격 지시를 내리는 네 얼굴에 언뜻, 네 누이가 겹쳐지는 듯했다.

  . 그 애.

  그 순간, 내내 외면하고 있던 것이 머리를 스쳤다. 네 동생의 미래. 상부에 넘겨진 후, 열너댓 살짜리 소녀가 감당해야 할 것들.

  그 애, 프로페서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겠구나.

  네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 바닥을 나뒹굴 때, 머리를 메운 감정은 울분도 분노도 아닌, 씁쓸함이었다. 그리고 너는, 비극을 깨지 못하겠구나. 굳이 상부에 묻지 않아도, 예언을 찾지 않아도 너희 남매의 미래는 뻔했다. 두 명 모두, 반드시 불행해진다. 소녀는 돌아오지 못하고 너는 누이를 되찾지 못할 테니까.

  너의 미래를 본 그 순간부터, 너에겐 도무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네가 주먹을 휘둘러도 복수를 하겠다 덤벼들어도, 막을 길은 없었다. 아니,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다. 네 모든 감정을 받아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처분당해도 좋다는 무력감에 휩쓸린 것이다. 그러나 네가 누이의 일을 알게 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너는 한 번도 제대로 복수한 적이 없다. 그 날은 주위 사람들에게 가로막혔고, 그 다음부터는 번번이 엇갈렸다. 종전 후 겨우 너와 다시 마주쳤을 때. 너는 오래 앓은 사람처럼 망가져 있었다. 음울한 예언이 실행된 탓이다.

  전쟁은 정예병의 승리로 끝났다지만, 그뿐. 네 누이는 전쟁 끝에 흔적도 없이 흩어졌고, 네 나라를 덮쳤던 군대는 별다른 처벌 없이 세상에 섞여들었다. 소중한 사람을 죄 잃고 돌아온 너는 그 씁쓸한 현실에 침묵해야만 했다. 세상 사람들이 전쟁의 흔적을 하루라도 빨리 지우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종전 직후 한두 번 침략군 처벌을 주장했다던 너는, 세상 사람들의 외면과 압박 속에서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세상은 평화로워졌으나, 삶이 비극이 된 너는 조용히 말라갔다. 고향이 아닌 먼 이국에, 정예병 동료들을 만난 도시에 머물며.

  전쟁이 끝났음에도 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건 아마 잃은 것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혹은 너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너는 그곳에서 이방인이었기에, 네 과거를 모르는 이들에겐 그저 낯선 이로 비칠 뿐이었다. 정예병 동료들과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네가 돌봐줄 사람 없이 망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예병 멤버 중 하나, 그곳에서 나고 자란 소년이 어느 날 우연히 너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초췌해진 너를 집에서 억지로 끌어내지 않았다면. 너는 아무도 모르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쿠로사키를 이대로 둘 수 없어.]

  기운을 차려야 한다며 너를 억지로 병원에 입원시킨 소년이, 정예병 멤버들을 모아놓고 꺼낸 말이었다. 쿠로사키는 혼자 두면 자기를 조금도 돌보지 않아. 이대로라면 분명 병이 생기겠지. 그 애의 붉은 눈엔 두려움과 연민이 한데 깃들어 있었다. 최악의 결말을 상상하고, 덜컥 겁이 난 것이리라.

  [그러니 우리, 쿠로사키가 퇴원하면 돌아가면서 맡자. 우리가 데리고 있는 한, 쿠로사키는 안전할 거야.]

  [잠깐. 질문이 있는데, 유우야.]

  손을 들고 명랑하게 말을 건네자 그 애는 바로 반응했다. 뭔데, 데니스?

  [쿠로사키를 맡을 사람에 데니스 맥필드를 넣어도 괜찮겠어? 쿠로사키가 날 감당할 수 있을까?]

  [……어려운 질문인데.]

  그 애는 끝내 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모두의 의견을 듣자며, 둘러앉은 동료들에게 기회를 넘길 뿐이었다. 모두의 얼굴에 껄끄러움이 걸려있었으나 논의는 싱겁게 끝났다. 의견을 낸 사람이 두세 명뿐이었던 탓이다. 나머지는 그들의 의견에 미적지근하게나마 동조했다. 그렇게 나온 결론은 데니스 맥필드 또한 쿠로사키 슌을 돕는 것’. 쿠로사키를 도우면서 용서받을 기회일지도 몰라. 근거인지 핑계일지 모를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네, 하면서.

  용서받을 생각은 없었다. 네가 누이의 일을 용서해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거니와, ‘죄가 씻기는 것따위 희망사항도 아니었다. 다만 용서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하나, 중요한 것을 떠올렸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네가 하지 못했던 것. 누이의 미래를 닫아버린 자에게 네가 돌려주어야 했던 것.

  [그럼, 유우야. 날 마지막 순서로 해줄래?]

  순서를 정할 때, 일부러 마지막 순번을 부탁했다. 동료들에겐 쿠로사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서라 둘러댔지만, 실은 너를 위해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불순한 목적을 숨기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날 모인 모두는 별 생각 없이 부탁을 들어주었다. 마지막 순서를 받고서, 슬쩍 웃음지었다. 1번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멤버가 자기 역할을 마쳐 한 바퀴 돌면 또다시 1번으로 돌아가기로 되어있었으나, 아마 두 바퀴째 도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옛 정예병 동료들이 너를 맡는 건 첫 바퀴에서 끝난다. 그래야만 했다.

  마지막 차례였기 때문에, 너를 맡을 날까지 여유 시간은 충분했다. 그동안 준비할 것은 둘. 첫째로는 너를 데리고 있을, 안락한 공간. 과거 정예병을 지휘했던 동시에, 네가 머무는 도시에서 대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제법 괜찮은 집을 마련해주었다. 다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진짜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재료. 불순한 목적에 걸맞은 물품이기에, 재료를 찾는 일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너는 물론이거니와, 동료들조차 알지 못하도록.

  모든 준비를 마친 때, 마침 앞 순서가 끝났다. 네 동생 또래의 소년 집에서 머물렀던 너는 다음 목적지가 어딘지 알면서도 말없이 짐을 챙겼다고 한다. 체념한 것인지, 아니면 별달리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느 쪽이건 네가 유지하던 평온이, 곧 깨지리란 생각이 들 뿐이었다.

  「괜찮겠어, 데니스?

  바로 전 순서였던 동료가, 너를 보내주기에 앞서 연락해왔다. 통신기로 흘러드는 목소리에 불안이 묻어있었다. 마지막 순서에서 문제가 터질지 모른다 생각한 것이리라. 동료들은 전부, 네가 어느 순간 자제력을 잃고 동생을 앗아간자에게 덤벼들 것을 걱정했다. 지금이야 닳아버리긴 했지만 본디 너는 날이 잘 드는 병기였고, 분노를 연료 삼아 적을 쓰러트리는 자였으니.

  「뭘 걱정하는진 알겠지만, 문제없어. 어차피 쿠로사키, 이제 힘도 없고.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해.

  끝까지 걱정 가득한 말에 건성으로 답하고 통신을 끊었다. 약속대로라면, 너는 이미 근처에 와 있다. 앞으로 10분 내, 약속장소인 중앙공원에 도착하리라. 시간을 확인하면서, 입가에 스멀스멀 번지는 웃음을 지우려 노력해야만 했다. 이렇게나 기대하고 있다는 걸 너에게 들켜선 안 된다. 그래서야 그동안 준비한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시야에 불쑥 들어오는 형체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점퍼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왜 이 자는 소리도 없이 나타났는가. 그리고 왜 앞을 가로막았는가. 의문의 답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내려다보는 금빛 눈이 너무도 익숙하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 오늘 만나야 하는 자. 너라는 걸 알아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포식자를 만난 짐승처럼. . 쿠로사키. 몇 박자나 늦게 반응하자 너는 핼쑥한 얼굴에 빈 웃음을 걸쳤다.

  잘도 정신을 놓고 있었군. 겁도 없이.

  네 입술은 굳게 닫혀있는데 네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악몽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환청이었다.

 

* * *

 

  ‘방문자가 가져온 짐가방은 고작 한 개였다. 연락을 끊고 홀로 지낼 때부터 네 살림이 단출했다지만 거기서 대부분을 긁어왔다는 짐도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도 너는 짐을 전부 풀지도 않았다. 어차피 곧 다음 순서가 될 텐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하며 너는 소파에 기대앉았다. 제대로 닫지도 않은 짐가방을 슬쩍 들여다보자 몇 안 되는 옷가지와, 이제는 의미 없는 물품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정예병으로 움직였을 때 지급받았던 물품이나, 아마도 네가 고향에서 가져왔을 몇 안 되는 유물 등.

  쓸모없는 것을 끌어안는 것이 이미 네 삶에 뿌리내린 습성임은 안다. 이를테면 네 목에 걸쳐진 스카프, 낡아빠진 붉은 천도 그러하다. 고향을 떠나기 전, ‘침략군에 맞서는 저항군이었던 네가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것. 저항군의 표식. 너는 정예병으로 움직일 때조차도 저항군의 표식을 목에 매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지옥에서 싸우는 이들과의 연결고리인 양. 자신이 끝까지 짊어져야 할 책임인 양. 언젠가 네가 그걸 스스로 풀어버리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이야말로 네가 책무를 내려놓고,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갈 날이라 생각했는데.

  너는 아직껏 해방되지 않았다. 과거로부터도, 전쟁이란 재앙으로부터도. 저항군이 해체되면서 가치를 잃은 스카프를 아직도 지니고 다니는 건, 결국 네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너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고 삶은 여전히 폐허이기에 너는 아직도, 저항군 시절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봤자 누구도 너와 함께 싸워주지 않을 텐데도. 씁쓸한 현실을 새삼 확인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너를 맡기로 한 진짜 이유였다. 누구도 모를, 제법 불손한 목적.

  그것만 이루면. 시선은 너의 목에, 정확히는 그 목을 감싼 스카프에 꽂힌다. 제대로 이루기만 하면, 앞으로 너는 저항군의 표식 따위 풀어내게 된다. 더는 과거에 매이지 않고, 현재를 살게 되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 필요한 건 하나. 너를 자극하는 것.

  “쿠로사키는 내가 마지막 순번이니, 조금만 버티면 1번인 유우야로 돌아갈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틀렸나?”

  “유감이지만, 쿠로사키. 다음번은 안 와.”

  “평생 책임져주려고? 대단한 희생정신이야.”

  빈정거리고는 있으나 네 목소리에선 독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말을 건넬 때마다 반사적으로 받아치면서도, 너의 시선은 이쪽으로 향하기는커녕 창밖에 걸쳐져 있고.

  “랜서즈는 네가 날 용서해주길 바라거든. 그게 잘 안 되면 다음번으로 넘어갈 일도 없겠지.”

  “그럼 답 안 나오는 사람과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트랜드로 가지 그래. 거기서 실컷 네 무대나 펼쳐. 네 식대로라면 그게 진정으로 속죄할 길 아닌가?”

  “쿠로사키. 나는 말이야.”

 너에게 다가가, 바로 옆자리를 차지했다. 너의 시선은 그제야 이쪽으로 향한다. 그러나 아직 반응이 미지근하다. 네 눈에 깃든 감정은 고작 불쾌뿐이었으니. 이럴 때, 네 감정에 불을 붙일 수 있는 화제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너를 자극하기 위해선 계속 꺼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루리 양의 일을, 제대로 풀고 싶어. 물론 루리 양은,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오빠인 네가 남아있으니.”

  “……그 이름을 부를 용기가 있는 모양이지.”

  “언제까지나 묻어둘 순 없잖아?”

  이제 과거의 감정은 해결해야지. 심술궂게 덧붙인다. 너는 이 논리를 잘 알고 있다. 너에게 적을 용서하라고 말한 이들이 딱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어차피 전부 끝난 일이라고. 이미 세상이 용서해준 이들에게 울분과 적개심을 품어봤자 타인은 물론 자신마저 상하게 할 것이라고. 그러니 그런 나쁜감정은 털어버리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물론 그들은 네 발언권을 앗아갔을 뿐 한 가닥 위로조차도 건네지 않았다. 네 비극을 해결하려는 도움이 없었던 건 물론이었다.

  “어떻게?”

  “네가 나에게서 합당한 보상을 받는 거야.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누이도, 평범한 삶도. 네가 잃은 것은 되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식으로 감정을 해소할 수밖에. 네 삶을 파괴한 자에게서 그 죗값을 받아내는 게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이다. 마침, 죗값을 치를 자가 바로 네 눈앞에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 지불할 자신이 되어있는 사람이.

  “너라는 인간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네가 나에게 줄 게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 있지. 데니스 맥필드의 미래는 어때?”

  나는 신체 건강한 남자니까,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살 수 있어. 그 삶을 네게 전부 넘긴다면? 나긋하게 덧붙이고서 반응을 기다리기로 한다. 표면적인 의미야 평생 봉사하며 살겠다는 뜻이며, 네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지금부터 바로 실행할 수 있을 일이기도 했다. 물론, ‘무엇이든지불하겠다 각오하고서 꺼낸 제안이 겨우 그 정도의 의미만 품고 있을 리 없다. 뒤집어 본다면, 새롭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넘긴다는 것은, 목숨을 줄 수도 있다는 뜻. 잘 생각해, 쿠로사키. 복수란 말이야.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누르고 너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네가 가장 바라는 걸 줄 생각이라니까?

  기다림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너는 이내 입술을 열었고.

  “멍청한 놈. 그런 것 따위 관심 없다고.”

  약간의 동요도 비치지 않는 얼굴로 답했다.

  “넌 내 삶을 쥘 수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너 말이야. 그런 식으론 평생 날 못 이겨.”

  그렇게 매달릴수록 지고 들어간다니까. 그렇게 덧붙인 너는 지루해 못 견디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방으로 향하는 너의 뒷모습에 네 누이가, 폐허가 된 네 고향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그녀의 모습이 겹쳐진다. 너에게서 그녀를 보고,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너를 본다. 너희 남매는 이제, 하나의 악몽이 되었다. 너에게 목을 졸리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악몽. 견딜 수 없어, 너의 등에 말을 꽂았다.

  “지금껏, 내게 복수를 꿈꾼 적 없어?”

  “이제 네 진짜 속셈을 알겠군.”

  쥐고 있는 패를 전부 공개하는 것은 엔터테이너로서는 미숙한 행동이다. 매달릴수록 상대에게 밀리게 된다는 너의 말 또한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네 덤덤한 태도에 다급해져 먼저 속내를 흘리고 말았다. 네가 첩자의 가면을 벗긴 때부터, 너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솔직하게 말한 건 칭찬해주겠지만. 방에 들어가기 직전, 너는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난 네가 원하는 걸 그렇게 쉽게 줄 생각 없어.”

  “아직은 때가 아니란 거야?”

  “‘아직은?’”

  공허한 웃음소리가 귀를 때리더니,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너는 방으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매정하게 닫힌 문을 열어봐야 네가 다시 말을 들어줄 리 없음은 뻔했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네 짐가방이라도 치우려다 의미 없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두 사람이 머물기에도 넓은 거실에 홀로 남겨지니 패배감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너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네 삶을 망가뜨린 이에게 돌려줄 수 있을, 가장 쓰린 고통을.

  그 전까지 널 맡았던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었던 말은 네가 지독하게 무기력해졌다는 이야기였다. 꿈에 젖은 사람처럼 멍하니 바깥만 바라보는 날이 대부분에, 행동이 둔해져 걸핏하면 손을 다쳤다는 것이다. 너답지 않은 극도의 무력함은 전부, 네가 스스로의 비극을 해결할 기회를 잃은 데서 시작된 문제였다.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적을 처단할 수 없고 그렇다고 울분을 쏟을 수도 없게 되었으니 삶에 의욕이 있을 리 없다. 우리에 갇힌 맹수가 공격성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

  그런 모습은 너를 걱정하는 동료들, 선량한 이들에게는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으리라. 한두 명은 그것이 네가 전쟁 피해자로서의 삶에서 서서히 벗어나,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에게 지은 죄가 있는 사람이라면, 무기력한 네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낳은 결과를 상기시키는 단서가 된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네 누이를 상부에 넘기지 않았다면. 그럼 네가 한창나이에 이토록 닳아버렸을까? 어디인지도 모를 먼 곳만 눈에 담으며, 저도 모를 상처를 몇 개씩이나 몸에 새길 일이 있었을까?

  너는 네 비극에 발언권을 잃은 대신, 자신의 삶을 망친 이들 앞에 망가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너를 발견한 때부터, 그 처참함에 질려 다시는 너를 잊지 못하게 되도록. 가책과 부채감으로 너에게 묶이도록. 조용한 시위였다. 동시에 효과적인 복수이기도 했다. 너와 함께 지내게 된 후로, 너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다칠 것을 걱정해 날카로운 물건을 죄다 치웠다. 그럼에도 피를 뚝뚝 흘리며 앉은 네 손을 몇 번이나 치료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네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온갖 공연을 준비하고, 네가 좋아할 것 같은 것은 무엇이든 찾아와 바쳤다.

  호의인지 애원인지 모를 노력에 너는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무료한 얼굴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신이 공물을 거두어가듯. 이번에 처음으로 얹은 감상도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알고 있어.”

  “정말로?”

  “내 뜻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거든. 데니스 맥필드의 미래를, 남은 삶을 넘겨줄 마음이 있단 거야.”

  “그럼 이걸 답해주지 그래. 그렇게 해서 데니스 맥필드가 얻는 이득은 뭐지?”

  금빛 눈이 오랜만에 이쪽을 담았다. 드디어 제대로 상대해줄 마음이 생긴 양. 제법 날카로운 질문에 바로 답을 꺼내지 못하자 너는 무심하게 자신의 추측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나는 노력했다는 자기위안? 쿠로사키 루리를 향한 속죄? 그게 아니면, 나에게 한마디라도 좋은 말을 듣는 것? 흘리는 추측마다 냉소가 짙게 배어있었으나 그 중 무엇도 확실하게 부정할 수 없었다. 네가 나열한 모든 가능성이, 어느 정도는 그럼직했던 탓이다.

  어쩌면 자기합리화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네 누이에게 공허한 속죄라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데니스 맥필드란 인간을 재평가해주길 바랐다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네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네게 읽히고 있단 생각이 들 뿐이었다.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는 결심조차, 사실은 얕은수에 불과했을지.

  “어때. 내가 맞혔나?”

  온갖 가능성을 늘어놓은 너는 여유롭게 묻는다. 여유로운 표정을 보면 이미 답을 알고서 묻는 것 같았으나, 반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글쎄. 어쩌면?”

  “이제 별로 숨기지도 않는군.”

  “넌 포장하는 걸 싫어하지 않았나?”

  “그럼 내 식대로 판단해도 상관없겠지. 네 욕망을 해석해볼까? 데니스 맥필드는 무결한 인간이 되고 싶은 거다. 누군가에게 가해자로 기억되며 평화를 누리는 것보단 가시관을 쓰고 성자처럼 쓰러지고 싶은 거야.”

  “누구 앞에 무결해지고 싶어 한단 거지? 세상 사람들? 아니면 엑시즈의 모든 주민?”

  “아직 너에게 가시관을 벗어도 된다고 말하지 않은 사람들.”

  누구인지는 듣지 않고도 뻔하다. 네 고향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직후, 일부 침략군을 용서해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죄를 씻은 이들 중에는 네 누이의 미래를 닫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네 누이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하여 신뢰를 쌓고, 결국은 상부에 그녀를 넘겨버린 사람. 네 눈앞에 앉아있는 사람. 너는 그를 용서하지 않은 유이한 인간이다.

  ‘유일한자가 아니라 유이한자인 이유는, 그가 네 누이에게서도 용서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 상냥한 사람이지만, 잘못된 행동에 대해선 누구보다 강하게 목소리를 낼 각오가 되어있었다. 저를 속였다는 건 혹 넘어가주더라도 고향 사람들을 전쟁에 내던진 것만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녀가 이미 단절된 사람이라는 점.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녀에겐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

  “맞아. 나는 너희 남매 앞에서 무결해지고 싶은 거야.”

  테이블에 올려둔 네 양손을 조심스레 끌어오며 말했다. 이전부터, 길쭉하게 뻗은 네 손가락을 볼 때면 병기를 쥐기엔 아까운 손이라 생각했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너는 그 손으로 악기를 쥐었을지도 모른다. 평생 악기를 익히지 않는다 해도 지금처럼 손에 상처가 그득하진 않았으리라. 정예병 시절에 이미 상처로 손이 울퉁불퉁했던 너는 전쟁이 끝나고는 부주의한행동으로 걸핏하면 손을 베여온다. 지금도 군데군데 밴드를 붙인 손가락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너는 이제 이 손으로 무언가 이룰 수 있다. 네가 수없이 꿈꿨을 바람직한결말을.

  “그러니까, 쿠로사키. 우리 쉽게 해결하자. 이 싸움은 네 말대로 내가 질 수밖에 없는 거였어.”

  갑자기 손을 붙들린 너는 손을 빼려 노력했지만, 힘이 부족해 실패했다. 덕분에 별다른 방해 없이 네 손을 목표 지점까지 끌어올 수 있었다. 네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남자. 네 앞에 앉은 사람의 목에. 이제 너는 그 남자의 목을 양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네 의지는 조금도 없었지만, 상황만 따지고 보면 네게 나쁠 것이 없다. 지금 너는 증오하는 대상의 목을 감싸고 있고, 상대는 저항할 의지가 없다. 이대로 힘을 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끝난다.

  데니스 맥필드의 목을 졸라. 용서받지 않을 테니, 너는 복수를 해. 너무도 명백한 메시지에도 너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목을 감싼 손이 떨리는 것은 느낄 수 있었으나,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망설이는 것인지, 아예 거부할 생각인지. 알 길이 없기에 한 번 더 너를 떠밀기로 마음먹었다.

  “쉬운 먹잇감이야. 몇 분만 힘을 주면 돼.”

  그렇게 말할 때 어떤 표정으로 너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네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던 걸 보면 아무래도 웃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꽤 진하게.

  “비겁한 새끼.”

  답은 냉정했다. 다음 순간 목 대신 뺨이 화끈거렸다. 왼뺨을 후려친 너는 주먹을 꽉 쥐더니 자리를 떴다.

  그 날, 잠들기 전까지 수시로 거울을 확인했지만 목덜미엔 손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네가 목을 감싸고 있었던 짧은 시간, 손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탓이다. 거기서 깨달았다. 너는 증오하는 이의 목을 조를 수 있을 상황에서,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을.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얼마간 기다렸던 건 그저 상대의 행동을 살피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벌겋게 달아오른 뺨보다 더욱 쓰렸던 건 이번에도 너를 흔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후로는 거의 자포자기한 채로 지냈던 것 같다. 무엇을 시도해도 널 움직일 수 없다는 체념이 무력감으로 번졌던 탓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매일 너를 돌봤고, 네 몸에 이유 모를 상처가 새겨질 때마다 꼼꼼하게 치료해주었다. 의미 없는 노력을 쏟지 않았을 뿐, 너와의 관계는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평화로웠다. 하루, 이틀, 사흘. 휴전 상태 같은 고요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일주일, 보름. 항상 지퍼를 조금 열어둔 채였던 네 짐가방이, 어느 날 보니 닫혀있었다. 드디어 이곳에 적응한 것일까. 하는 생각은 갑자기 통신기가 울리며 끊겼다.

  「쿠로사키랑은 잘 지내고 있어?

  통신을 연결하자마자 흘러나온 건 명랑한 목소리. 너를 첫 순서로 맡았던 소년의 목소리였다.

  「그럭저럭.

  「다행이네. 사실 좀 걱정했는데, 별일 없었나 봐. 쿠로사키한테 연락하니 이제 자기가 또 짐을 쌀 때가 되었다더라고. 일주일 남았다던가? 다음 순서는 나니까, 나도 집을 깨끗하게 치워둬야지.

  거기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를 맡을 수 있을 기간은 겨우 일주일. 그 기간이 지나면, 너는 또다시 동료들에게 넘어간다. 다음 순서가 돌아오기까지 한참이나 걸리는 데다, 차례가 되어도 과연 네가 순순히 말을 들어줄지 의문이었다. 이곳에서 나가자마자 보호자’ 1번인 소년에게로 향해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털어놓는 네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지는 듯했다. 그 자식. 비겁한 짓을 하더라고. 나한테 용서받겠답시고 자기 목을 조르게 하려 했어. 그런 제정신 아닌 놈에게 날 또 맡길 생각은 없겠지?

  그러면 소년은 당장 겁을 먹고 순번을 조정하리라. 네가 아닌, 너에게 복수를 강요한 이를 걱정하여 다음번엔 영영 너를 보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의 삶에서 완전히 잘려나가는 것이다. 평생 죗값을 치르지 못했단 가책에 시달리면서 네 비극을 곱씹을 수밖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조급해졌다. 다음 순서로 넘어가기 전에, 너를 붙들고 있을 동안에 일을 마쳐야 한다. 너에게서 무기력함이 옮은 탓에 한 번도 꺼내지 않고 있었으나, 애초 너를 맡기 전 미리 준비해둔 비장의 패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될 것. 너를 맡기로 한 진짜 목적을 이뤄줄, 비밀스러운 재료.

  그동안 숨겨둔 재료를, 쓸 때가 되었다. 통신을 끊자마자 방에 들어가 작은 상자를 찾아냈다. 자물쇠로 굳게 잠긴 상자를 열자, 자그마한 약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챙겨 거실로 나온 때, 마침 짐가방에 옷가지를 넣던 너와 마주쳤다.

  “일주일 후에, 넌 유우야에게 갈 거지?”

  “고집 피워봐야 소용없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시선은 여전히 가방에 둔 채, 너는 건성으로 받아쳤다. 본래 비협조적인 사람인 것은 알지만, 이번의 네 모습엔 아예 말을 끊어내려는 냉랭함마저 엿보였다. 네 짐가방을 홱 빼돌리자 그제야 네 얼굴에 불쾌가 서렸다.

  “널 계속 데리고 있겠단 건 아닌데? 난 그냥, 끝나기 전에 우리 일까지 마무리했으면 할 뿐이야.”

  “일주일만 무시하면 되는데, 내가 네 뜻대로 움직여줄 것 같나?”

  “왜 저번에 나더러 비겁하다고 했는지 이제 알겠어.”

  너에게 복수하라고 말하는 주제에 네 손을 더럽히려 했어. 그래서지? 거의 매달리다시피 던진 말에도 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엔, 정말로. 내가 전부 끌어안을게.”

  “무슨 속셈이냐.”

  “이걸 봐줄래?”

  약병을 꺼내어 흔들자 네 시선이 바로 그곳에 꽂혔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흰 가루가, 동료들 몰래 준비한 비장의 패. 이거, 예쁜 가루처럼 보이지만 사실 위험한 거야. 덧붙인 말에 재료의 정체를 알아챈 너는 약병을 빼앗아가려 했지만, 간발의 차로 지켜냈다.

  “안 돼. 이거, 내 차에 탈 거니까.”

  “……독을, 타겠단 건가?”

  “맞아. 효능은 확실해. 그러니까 안심하고, 당장 나가 어떤 사람이든 만나고 와. 네가 나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난 이걸 타 마실 거야.”

  네가 돌아올 때면 난 이미 쓰러져 있을 테고, 너는 알리바이가 입증되겠지. 흥분되어 흘린 말에 너는 나른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어 기억을 더듬으니, 네 누이가 자주 짓던 표정이었다. 그녀에게서 그 표정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바로 네 이야기를 했을 때. 오빠를 소개시켜줄래요? 란 말에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라 답하던 때, 네 누이는 딱 지금 너처럼 웃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의 말이 백번 옳았다. 우연히 만나버린 탓에 너와 질긴 악연으로 얽히게 되었으니. 그럼에도 하나 희망적인 게 있다면, 그 악연도 오늘 끝나리라는 사실.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태도를 보여서일까. 제법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해서일까. 너는 이전과는 다르게, 불쾌를 내비치지 않았다. 잠깐만 앉아서 이야기해달라는 애원에, 순순히 맞은편에 앉아주기까지 했다. 이게 정말 독이라고? 약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냉큼 가져간 네가, 약병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던진 말이었다.

  “굳이 나에게 네 계획을 전부 알려주는 이유는? 독을 먹는 게 목적이었다면 아무 말 없이 혼자 실행해도 되었을 텐데?”

  “아니. 그래선 곤란해.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 이유. 쿠로사키 슌은 데니스 맥필드를 증오한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잖아? 네 알리바이가 확인되지 않을 경우엔 바로 네가 의심받아. 그러니 전부 설명하고 네게 알리바이를 만들어줄 수밖에.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나한테 보여주고 싶은 거지. 데니스 맥필드는, 진심이었다고. 용서해주건 그렇지 않건 진심으로 죄를 갚고 싶었다고.”

  “부정하진 않을게.”

  너에게 처분을 맡기고픈 마음에, 무결해지고 싶은 욕망에 얄팍한 감정이 깃들어 있으리란 건 뻔한 사실이었다. 조잡한 바탕을 애써 외면해왔을 뿐. 그동안 두르던 포장도, 변명도.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해져 절로 얼굴에 웃음이 걸린다. 이제, 남은 것은 결말뿐.

  “기뻐해줄래, 쿠로사키?”

  너에게서 약병을 돌려받고서 물었다. 네 시선이 오롯이 이쪽을 담는 것을 느낀다.

  “……무엇을?”

  “나에게서 해방되는 거 말이야.”

  “너는, 만족하나?”

  “물론.”

  “그럼 내가 보는 앞에서, 준비를 마쳐둬. 바로 실행할 수 있도록. 그래야 네 진심을 믿을 수 있을 것 같거든.”

  “바라는 바야.”

  자리에서 일어나, 다기와 차를 가져왔다. 그 사이 약병을 열어둔 너는 두 개의 잔을 끌어와 한쪽에 가루를 쏟았다. 마실 사람은 한 사람인데 왜 잔을 두 개 챙기느냐 물으려다, 네가 꽤 즐거워 보이기에 마음을 접었다. 오랜만에, 너는 들떠있었다. 창백한 뺨이 상기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독을 탄 차라. 너답지 않게 재미있는 발상인데. 티팟에 차를 우리며 너는 중얼거렸다. 극적이기도 하고 말이야. 마음에 들어.

  “미리 차를 부어둬야겠어. 그래야 확실하니까.”

  “친절하네. 내가 제대로하도록 도와주는 거지? 날 믿지 않는 건 조금 유감이지만.”

  살짝 비꼰 말에도 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두 개의 잔에 차를 부었다. 다음은 티스푼으로, 독을 탄 쪽의 차를 마구 휘젓는 것. 독이 혹 제대로 퍼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 것일까. 평소답지 않은 철저한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아무래도 너는 이번 계획엔 제법 만족한 것 같다. 아무것도 타지 않은 차를 네 쪽으로 밀어두고서 인사를 건넸다.

  “그럼, 쿠로사키. 안녕이야. 마지막 억지를 들어줘서 고마워.”

  “, 그래. 너에겐 마지막 인사인가?”

  “이제 약속한 대로 나가야지. 내가 쓰러지는 모습을 못 보여주는 건 미안하지만, 아까 얘기한 대로 네가 의심받으면 곤란하니까. 이 동네 산책이라도 하고 와.”

  돌아오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야. 주문처럼 흘린 말에 너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때문에 네 입술이 옴죽거리는 걸 빨리 파악하지 못했다.

  “……없을 텐데.”

  독이 담긴 찻잔을 이쪽으로 끌어온 때, 네가 흘린 말이었다.

  “?”

  “, 약속한 적이 없을 텐데.”

  다음 순간, 찻잔은 너에게 넘어가 있었다. 한때 전장을 누비던 전사에 걸맞게,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도 빨랐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너는 독이 든 차를 들이키고 있었다. 네 손에서 떨어진 찻잔이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부서질 때서야 겨우, 네 말 뜻을 이해했다. 돌이켜보면 너에게 계획을 줄줄 늘어놓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너는 그 뜻에 동조하겠다 말한 적이 없었다. 상대가 준비한 판을 멋대로 이용하려 했을 뿐.

  알아챈 시점엔 너무 늦었다. 테이블에 핏방울이 뿌려지는가 싶더니 네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 순간 가장 고통스러웠던 사실은 네게 기습적으로 당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네 얼굴에 걸린 승리의 표정이었다.

  모든 것이 끝나기 직전, 너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 * *

 

  사장은 연락이 닿자마자 달려와주었다. 과거 정예병을 이끌었던 그 남자는 자신의 사람이었던 이들에겐 꽤 강한 책임감을 품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방황했던 너에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너를 급히 병원으로 보낸 사장은,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테이블에 뿌려진 피와 산산이 부서진 잔. 식어빠진 차가 남은 티팟까지. 그 남자의 시선이 훑고 지나갔다. 물론 찾아낼 것은 없었으리라. 네가 어쩌다 쓰러졌는지는 물론, 이곳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까지. 사건의 진실에 대해선 동거인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네가 스스로 독이 든 차를 마셨다고? 그 원인이 네 앞에서 죽어주겠다는 정신 나간 선언이었다고? 패배감과 부끄러움이 한데 엉켜, 입을 뗄 수 없었다. 무엇이라도 털어놓는 순간 그 남자의 시선에 해부될 것만 같았다. 그렇군. 빤한 인간이었어. 그렇게 운을 떼며, 그동안 너밖에 몰랐을 얄팍한 면들을 짚어주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생명엔 지장이 없다고 하더군.”

  복잡한 마음을 누르고 바닥만 보고 있던 때, 사장이 건넨 말이었다. 조금 전까지 통신기로 무어라 연락을 하는 것 같더라니. 널 병원으로 옮긴 수하에게서 보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정말로?”

  “그가 삼켰다는 독극물, 치사량엔 못 미쳤다고 해.”

  그럴 리가 없는데. 튀어나올 뻔한 말을 겨우 삼켰다. 분명히, 충분한 양을 입수했다. 필요한 만큼 덜어 약병으로 옮긴 때 계산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네가 일부러 약간 덜어내고 차에 탄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알 길이 없을뿐더러 알 필요도 없다. 쓰린 실패를 굳이 파헤치고 싶지도 않으므로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중요한 것은 하나. 무엇이 잘못되었건 너는 최악의 사태를 피했다는 것. 아마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무사히 퇴원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이 있다. 쿠로사키 슌이 굳이 네 앞에서 독을 마신 이유는 뭐지? 짐작 가는 게 있나?”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더니 사장이 머릿속을 헤집고 말았다. 물론, 외면할 수는 없다. 이 도시에서 네 신분을 보증해주는 사람으로서, 한때 너를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그도 사건에 대해 알 권리가 있었으므로. 다만 그 질문에 답하기 전, 먼저 풀고 싶은 의문도 있었다.

  “……왜 그 자가 스스로 마셨을 거라 생각해?”

  “너무 넘겨짚었나?”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은 같이 있던 사람을 의심하잖아.”

  “네가 그를 해하려 했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어. 데니스 맥필드는 그럴 사람이 못 되지. 하지만 쿠로사키라면, 충분히.”

  그럴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모호한 말의 의미를 캐묻고 싶었으나, 그러다 사장에게 속내가 들킬까 두려워 마음을 접었다. 상대가 모든 걸 털어놓을 때까지 쥐고 흔드는 것이 너라면, 사장은 몇 안 되는 단서로 상대의 심리를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이유를 물었지? 짐작 가는 건 하나뿐이야. 나를 고통받게 하고 싶어서일걸.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내가 패닉에 빠질 걸 알았을 테니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질문을 몇 개 더 달겠지만 사장이라면 그쯤만 설명해도 대강 이해할 것이다. 과연 사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쿠로사키는 지독한 데가 있지만. 메마른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그 정도의 일도 아닐지 몰라. 넌 그에게 마음의 빚이 있으니 그 자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압박감을 느꼈겠지. 용서를 구하려 들었다거나. 그 자에게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거나.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면.”

  “내가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고?”

  “네게 잘못이 있단 이야기가 아냐. 네가 그에게 매달린 반작용이었을지도 모른단 뜻이지.”

  물론 결과적으론 그 자가 널 괴롭게 만든 게 되었지만. 따라붙은 말에 망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너는 독을 삼킬 때까지도 복수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저 상대의 계획을 틀어버리는 것이 목표였을 수도 있다. 다만 의도치 않았더라도 상대에겐 최고의 복수가 되었으리란 게 아이러니할 뿐이다. 네가 쓰러지는 순간, 그 전까지 느껴본 적 없었던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누이를 잃은 날부터 네 삶에 진득하게 깔렸을 감정을, 누이를 앗아간 이에게 돌려준 것이다. 그것도 상대가 사용하려던 방법 그대로, 네 목숨을 담보로 삼아서.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한 답을 얻은 것 같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사장에게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부탁할 게 있는데.”

  “말해.”

  “쿠로사키를 맡아줘. 아무래도 그 남자, 제대로 관리받아야 할 것 같으니까.”

  “돌보는 게 아니라 관리인가.”

  “쿠로사키에겐 그게 딱 맞아. 랜서즈는, 날 포함해 전부가 어쩔 수 없이 그 자를 감정적으로 대하게 되거든. 쿠로사키에게나 우리에게나 좋지 않은 일이야. 그쪽도 쿠로사키를 눈 닿는 곳에 두는 게 편하지 않아?”

  “쿠로사키가 회복하면 생각해보지. 그의 의견을 들어야 하니까.”

  옛 동료들끼리 너를 맡고 있단 점 때문인지, 사장은 평소보다 훨씬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랜서즈끼리도 논의해봐야 할 거야. 지금까지 다들 쿠로사키를 맡아주었잖아. 그렇게 반응하긴 했으나, 사실 앞으로 네가 누구에게넘겨질지는 뻔히 짐작하고 있었다. 사장이 나선다고만 하면 정예병 동료들은 너를 그에게 넘겨줄 것이다. 너는 분명 연민의 대상이었지만, 그만큼 상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존재였으므로.

  너도 상냥한동료들보단 사장에 기대고 싶어 할 것이다. 사장은 너의 울타리 이상이 되지 않을 사람이고, 너는 연민과 방관 중 고르라면 후자를 택할 인간이었으니. 특히나 지금 널 돌보는 사람들엔 너에게 자꾸만 껄끄러운 일을 들먹이는 자까지 끼어있지 않은가. 정예병 동료들에게 계속 보호받는다면, 너는 언젠가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 것보다야 사장을 따라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사장은 자기 회사로 돌아갈 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나,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너 대신 네 가방을 정리했다. 어차피 곧, 네가 회사에 들고 들어가야 할 짐이었다.

  네 짐을 챙기고, 네가 쓰러지며 엉망이 된 자리까지 정리하고 나니 넓은 집이 새삼 휑하게 느껴졌다. 두 명이 쓰기에도 지나치게 큰 집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텅 비다시피 한 집을 둘러보며 떠오른 감정은 쓸쓸함보다는 패배감이었다. 사장이 마련해준 거처인 이곳은 네 안락한 삶을 위해 준비된 집이었는데. 네 보호자를 자처한 동거인의 목적도 네 복수를 완성시켜 네가 비극에서 벗어나게 돕는 것이었는데. 결국 네가 이곳을 떠나게 된 때까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너에게 죗값을 치르겠다는 결심도, 네 앞에서 무결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도. 너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사장의 호의까지도 전부 의미를 잃었다. 그 무엇도 회복되지 않은 자리에 쓰린 상처만 하나 더 생겼을 뿐이다. 퇴원하더라도 너는 이곳에 돌아올 필요가 없다. 네 짐은 미리 사장에 맡겨둘 것이고, 본래 사장의 소유였던 이 집은 주인에게 돌아갈 테니. 그걸 핑계로 가능한 빨리 집을 비우기로 한다. 사장은 얼마든 머물러도 좋다고 이야기했지만, 더 있어봐야 너의 부재에서 처참한 실패를 떠올리게 될 것이 뻔했다.

  마술 도구, 무대용 의상. ‘너를 위해준비했으나 지나고 보니 제대로 쓰이지도 않은 물품을 챙기며, 패인을 생각한다. 왜 이렇게까지 실패했을까.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기대를 안고 너를 만났다. 너에게 복수의 칼을 쥐여줄 수 있을 것이라거나. 네 비극을 깔끔하게 끊어줄 수 있을 거라거나. 능력 이상의 일을 꿈꾸며 네 구원자라도 될 듯 굴었다. 언젠가 네가 비꼬았듯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결과였다.

  아무래도 너에게 상처를 입힌 만큼, 네 삶을 쥐고 흔들 수 있다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너에게 바람직한 복수를 마련해주겠다는 오만은 복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결말을 맞았다. 패배는 쓰리지만 잃은 것은 없다. 어쩌면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고 보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너는 이전처럼데니스 맥필드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데니스 맥필드는 원래대로네 비극의 원흉으로 남을 뿐.

  너와 함께 지내는 동안, 너를 유일한 관객으로 삼느라 본업에 소홀했다. 엔터테이너로서 무대에 한 번도 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이 집을 떠나면 고향도, 2의 고향 같은 이 도시도 아닌 네 고향으로 향하려 한다. 아직 전쟁의 흔적이 다 걷히지 않은 그곳에서 모두를 위한 무대를 펼칠 것이다. 네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네 삶에 유일하게 기여할 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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