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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사키 남매] 뫼비우스

현소야 2019. 12. 22. 02:44

 

깨어났을 때 바로 눈에 들어온 풍경은 지나치게 정돈된 낯선 공간이었다. 한두 번 내부를 들여다본 적은 있지만 들어와 사용한 적은 없는 곳. 수면실이라 불리는 공간은 그 이름에 걸맞게 꾸며졌지만 청년은 만들어진 편의가 왠지 괴상하게 느껴졌다. 말이야 휴식의 공간이었지만 이곳이 정확히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침대 근처에 놓인 장치의 정체도, 이곳에 들어오는 몇 안 되는 사람의 기준도. 거기다 외딴 곳에 떨어져 있기까지, 제법 수상쩍은 공간이 아닌가. 거기서 청년은 무의미한 생각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청년은 문득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 생각하고서 멈칫했다. 그의 방에선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다. 특별히 찾을 이유도 없거니와, 어떤 상황에서도 제 방과 착각할 만한 위치가 아니다. 들여보낸 사람이 있었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기억이 없다. 누군가 일부러 기억을 짓누른 것처럼, 잠들기 전의 기억만이 지나치게 희미하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텐데도 청년은 순간 기억의 공백이 불쾌했다.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던 과거는 청년이 사소한 삐걱거림마저도 불안하게 여기도록 만들었으므로.

찜찜한 것을 안은 채 원래 있을 곳으로 향하던 청년을 누군가 붙잡았다. 청년에게는 옛 협력자가 되는 사람이자, 청년이 머무는 회사를 쥐고 있는 젊은 사장이었다.

찾고 있었다, 쿠로사키.”

내가 여기 있을 줄 어떻게 알고 왔지.”

그야 네가 수면실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내가 스스로 들어갔다고?”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야. 많이 피로해서인가? 최근 수면장애에 시달린다고 말하기에 거기서 쉬라고 했는데.”

그런 기억은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기억도 없었다. 그 지점에선 이미 더 깊이 생각하는 것도 피로해 청년은 슬쩍 넘기기로 했다. 사장은 그런 청년을 앞뒤 설명 없이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그래서, 나를 찾은 이유는?”

자리에 앉자마자 용건부터 묻는 청년에게, 사장은 차분하게 답한다.

네게 얘기해줄 일이 있어서. 네 동생, 쿠로사키 루리를 되돌렸다.”

되살렸다고?”

동생의 일이야말로 청년의 삶에서 최대의 불행이었다. 십대에 전쟁에 휩쓸려 악귀처럼 싸워 살아남은 청년이지만, 가장 소중한 사람인 동생만은 구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몸뚱이뿐. 흔적조차 없이 세상에서 사라진 동생이 사실상 죽음에 가까운, 아니 죽음 이상으로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괴로운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 청년은 동생을 언급하는 일조차 피했는데, 갑자기 사장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사장의 말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답은 동생의 죽음을 전제하고 있어서 청년은 바로 숨이 막혔다. 한 가닥 희망은 남기자고 마음을 다잡았으면서도 결국 자신도 깊은 곳에선 동생을 포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으므로.

정확하게 말하면 되살린것은 아니지만. 루리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클론을 만들었거든.”

루리의 데이터가 남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기본은 아카바 레오가 루리를 조사한 자료, 외형은 루리와 똑같이 생긴 히이라기 유즈를 참조, 거기에 자아는 너의 기록을 바탕으로 했지. 당연히, 완전하진 않아. 루리에 가까운 존재를 이 세계에 재현해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흩어진 사람을 원래대로 돌릴 순 없을 테니까.”

독단적으로 일을 벌인 것에 대해선 사과하지. 실패의 가능성 때문에, 우선 진행부터 하기로.”

됐어. 그래서 루리는?”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싶어 말을 자르다시피 본론으로 들어간 청년이었지만, 사장은 여전히 뜻 모를 여유를 부린다. 차를 홀짝이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청년을 떠보는 듯하다.

그 전에 묻지. 너는 불완전한 클론을 네 동생으로 여기는 데 어떤 불편도 없나?”

그러면 그 외에 내 동생이라고 볼 게 이 세상에 어디 있는데. 진짜는 네놈의 아비가 이미 갈아버렸는데.”

청년의 손에서 찻잔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넘실거리는 찻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다. 두 사람은 협력자란 이름으로 함께했지만, 본래 편할 수 없는 사이였다. 두 사람이 함께 맞섰던 적이자 청년의 삶을 지배한 전쟁을 일으킨 자가 사장의 아버지. 동생의 처참한 결말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자의 아들을, 아무리 협력자였다 해도 청년이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평소에 누르고 있던 분노와 오래 묵은 증오가 한순간에 치밀어, 청년은 손에 쥔 것을 부수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한참이나 지나 흘러나온 것은 억지로 가라앉힌 목소리였다.

대신 속죄하는 건지 뭔지, 그래도 네가 책임지려고 노력하는 건 알고 있으니까 떠보지 마.”

불편이 없다면, 좋아.”

표정 하나 바뀌는 일 없이 날카로운 행동을 넘긴 사장은 수하에게 간단히 명령을 내렸다. 아마, 클론으로 재현해낸 청년의 동생에 대한 이야기였으리라. 수하가 물러가자마자 사장은 청년에게로 다시 관심을 돌렸다. 안경 너머 보랏빛 눈은 연구자처럼 차갑게 빛난다. 그 눈에 오롯이 청년만을 담으며, 사장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럼, 루리에게 보내기 전에 미리 네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말해두자면.”

루리의 부족한 기억을 메워주고 적응을 돕는 것. 뻔하지.”

놀라운데. 말해주기도 전에 뭐가 필요한지 꿰고 있다니.”

뭐야. 이런 얘기, 전에도.”

전에도 했잖아, 그런 말을 꺼낼 생각이었지만 청년은 도중에 멈췄다. 생각해보면, 동생의 이야기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지 않은가. 이전에 들어보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진작 이런 대화를 했던 것 같은 익숙함이란.

전에도?”

아니. 신경 쓰지 마.”

깨어나기 전 눅진한 꿈의 파편이 지금과 묘하게 비슷했던 것 같다. 지금의 일을 예견하는 꿈이기라도 했을까. 청년은 수상한 기시감을 그 정도의 감상으로 덮기로 했다. 파헤치려고 하면 이상하게 모호한 기억과 더불어 계속 찜찜함에만 시달릴 것 같아서. 다행히 사장은 더 묻지 않고 청년에게 당장 필요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네 동생의 시간은 전쟁 직후로 설정되어 있다. 전쟁이 끝났다는 건 알지만 전쟁에 관련된 기억은 거의 없지. 나쁜 일이기에 잊어버렸다, 정도로 인식해.”

그건 다행이군. 그런 것 따위, 기억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럼 채워줘야 할 기억은?”

나는 너희 남매의 개인적인 일에 대해선 잘 몰라. 그러니까, 과거에 함께했던 추억은 비어있단 말이지.”

루리가 어떤 일을 겪어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등을 내가 채우면 된다는 건가.”

그렇지. 이미 존재하지 않은 사람의 재현이란 한계가 있어. 더구나 나처럼 완전한 남이 했을 경우에는. 그러니 나머지는 가족인 네게 맡기는 거다.”

좋아.”

그럼, 안내해주는 곳으로 가도록. 루리에겐 따로 말해뒀으니.”

어느새 사장이 곁에 두고 쓰는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청년은 그를 따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에 대해서는 복잡한 감정이 일었지만, 동생의 자아를 가진 자가 존재한다면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위안에 불과하더라도, 그녀를 돕는 것이 이제 자신의 일이다. 후회와 가책으로만 남은 동생에게 다음이 생겼다. 이번에라도 그 애에게 안정과 행복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문으로 걸음을 떼는 청년의 등에, 사장이 의미심장한 말을 꽂았다.

쿠로사키. 나는 네가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 모르는 게 아냐. 일단은 관여하지 않을 뿐이다.”

, 그러신가?”

너를 필요로 하는 동생이 돌아왔으니 죽을 생각은 하지 않겠지.”

타이름에 가까운 이야기에 청년은 냉소했다. 끔찍한 실험에 동원된 동생이 흩어지고, 유일한 가족의 흔적 하나 거두지 못하게 된 때 청년은 모든 의지를 잃었다. 식사 메뉴를 고르듯 죽음의 방식을 상상하기도 했다. 언제든 삶을 놓아버릴 수 있을 황폐한 내면을, 사장이 진즉 눈치챘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회사에 머무르는 이상 청년의 모든 행동은 사장에게 보고가 들어가게 되어있으니.

사장에겐 청년의 삶을 끝까지 감당할 의무는 없다. 아비의 죄에 대한 책임으로 청년을 어떻게든 보호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행동이 책임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 청년은 꺼림칙하다. 타고난 선의도 극한의 이타심도 아닌 한갓 책임감을 어디까지 가져갈 생각인지. 타인의 삶을 언제까지 짊어질 생각인지.

내가 정말로 죽을까 걱정이라도 된 모양이지? 이제 와서 루리를 만들어낸 것도, 설마 내가 못 죽게 하려고? 그것 참 대단한 정성인데.”

마음대로 생각해.”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는 게 싫어서 내가 버티길 바라는 주제에.”

본심보다도 잔뜩 꼬여서 나온 말은 사장의 책임감을 휘젓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자신을 보호해온 것에 회의를 안길 작정이었으나, 사장의 단정한 얼굴에는 한 가닥 흔들림도 비치지 않는다. 그것이 쟁그라워, 청년은 바로 자리를 떴다. 문의 너머에는, 몇 년 만에 돌아온 동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

 

동생은 청년의 삶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만들어진 동생에게, 그는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클론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선명한 재현이었다. 사장이 온갖 기술을 쥔 회사의 정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만큼 청년을 놀라게 한 것은 없었다. 동생의 습관을 보이고, 동생이 좋아하던 것을 먹으며, 동생의 방식으로 청년을 대하는 소녀가 그 앞에 있다. 꿈으로도 꾼 적 없는 달콤한 현실에, 청년은 때로 지금의 모든 것이 저만의 환상이었을까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다만, 클론은 이전의 동생이라면 하지 않을 말을 쉽게 흘렸다. 기억이 나지 않아. 타인의 데이터를 토대로 만들어진 클론이니 내면이 완벽할 수는 없다.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야 동생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청년이 할 수 있는 일. 도리어 청년은 자신이 동생을 도울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이제야, 동생의 삶에 보탬이 된다. 동생을 잃으며 함께 사라진 삶의 의미가 비로소 생겨난 것 같았다.

스페이드교에서 즐겁게 지냈던 것 같은데.”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네. 동생이 덧붙이는 말에는 의문과 혼란이 밴 것 같았다. 이미 한 번 지워졌던 사람임을 모르는 클론으로서, 뿌연 기억이 답답할 것이다. 청년은 그런 동생을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예전 일이 다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어쩌면 어떤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행복했던 때의 기억만을 어렴풋이 남기는 것이, 평화 속에서 살게 할 길일 수도 있다. 청년은 동생이 과거를 너무 많이 끌어안기를 바라지 않았다. 지금의 평화에 자연히 녹아들어 미래를 보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는 즐거운 일이 계속 있을 테니 너무 애쓸 필요 없어.”

오빠한테는 어땠어, 그때?”

시시한 듯 평화로운 날이 즐거웠지. 너와 유토가 있었고, 사야카도…….”

사야카?”

그 애는 클로버교에 다녔어. 누가 소개해줬는지, 너는 그 애랑도 제법 잘 어울렸는데.”

옛 사진이라도 보여주려다 청년은 멈칫했다. 전쟁이 덮친 고향에서 건져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동생의 과거는 너무도 궁핍한데 말로 채워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때문에 붉은 눈에는 여전히 의문이 비친다. 명확한 답을 원할 텐데, 돌려줄 수 있는 것은 막연한 말뿐.

천천히 쉬다 보면 조금씩 떠오를 거야. 사야카는 다행히 다치지 않았으니, 하트랜드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고.”

다 채워달라는 게 아냐, 오빠.”

동생은 작은 손으로, 가만히 청년의 양손을 감쌌다. 상대를 돌봐주어야 하는 것은 청년 쪽인데, 어른스레 반응하는 것은 만들어진 지 고작 수개월밖에 되지 않을 클론이었다.

그러면?”

행복했던 때가 있다는 걸,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

그것으로 충분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청년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완전히 안심시켜야 하는데, 어떤 불안도 의심도 없이 평화만을 누리게 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에 괴로워하다, 청년은 그 날 사장에게 달려갔다. 여느 때처럼 침착한 얼굴로 맞아주는 사장 앞에서 청년은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레오 코퍼레이션에는 기억을 조작하는 기술이 있다고 했지?”

, 전쟁의 기억을 지워주길 바라나?”

아니. 내 기억을 열람해서, 루리에게 이식해줘.”

고개를 갸웃하는 사장에게 청년은 호소했다. 그 애가 기억의 공백에 집중하다가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을까 두려워. 조금씩 옛 기억을 되살려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게 하고 싶어. 행복했던 때의 기억이라면 온전한 게 좋잖아. 내가 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쉼 없이 흘러나오는 말에도 사장의 보랏빛 눈에는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에 빠진 듯 침묵하는 사장에게, 청년은 거의 매달리다시피 덧붙였다.

우리 남매는 분명히 나아질 거야.”

그 말이 사장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수하를 불러 청년의 뜻을 전하는 것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사장은 안도한 청년에게 건조하게 경고했다.

기억을 휘젓다 보면 찌꺼기가 생긴다. 루리 이전에 너부터 기억의 혼란이 생길 수 있어. 그래도 괜찮나?”

청년이 돌려줄 답이야 뻔했다. 그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청년은 몇 번, 사장의 도움을 받아 동생에게 자신의 기억을 흘려 넣었다. 전쟁의 기억은 조금도 없이, 행복했던 시절의 것만을.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어렴풋이, 동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그 결과로 동생은 서서히 과거의 공백을 메우게 되었으나, 청년의 삶에는 얼룩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장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듯, 기억이 꼬이게 된 것이다. 청년은 동생과 함께하는 순간순간 기시감을 느꼈다. 이전부터, 이렇게 함께했던 것 같은데. 예전에도 과거를 묻는 동생에게 답해주었던 것 같은데. 때로는 혼란에 사로잡혀 말실수를 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 전에도 했잖아.”

저도 모르게 흘린 말에 동생의 눈이 둥그레졌다.

사야카가 리틀 페어리를 줬다는 건 처음 한 얘긴데?”

피곤해서 착각했다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청년은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의 시선에 걱정이 어린 것도 신경이 쓰였다. 나중에 조용히 사장과 상담했더니, 돌아온 답은 오염이라는 표현이었다.

오염을 막기엔 네 기억에 이미 손이 많이 갔지.”

예견한 일이었기에 사장은 놀란 기색도 없었다.

그걸 감안해도 오염이 빠른 편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한 번 번지면 증상을 뿌리 뽑기 어려워.”

무미건조한 진단에, 청년은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문제를 차근차근 생각했다. 기억의 중첩, 기시감, 거기에 기억이 뒤죽박죽 섞이는 것까지. 갈수록 심해지는 이상증세는 동생이 아닌 그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동생 앞에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치게 빠른 진행을 늦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동생의 평온한 삶에 기여했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동생의 평화에 얼룩이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정 힘들다면 도움을 청해. 꼬인 기억을 제거하는 것으로, 약간은 나아질지도 모르니까.”

돌아가는 청년의 등에 사장이 한 가닥 호의를 던졌다. 해결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므로 청년은 인사 없이 집무실을 떠났다.

그 날 이후 청년은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끼어드는 증상에까지 시달렸다.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적을 본 듯한 기억 때문에 동생 앞에서 무기를 꺼내기도 했다. 전쟁은 끝났잖아. 나는 여기에 있고, 아무도 다치지 않아. 동생의 호소에 정신이 든 때도 여러 번이었다. 광증에 가까운 증상은 걸핏하면 청년을 괴롭혀, 동생이 돌아오면서 안정을 찾은 삶이 다시 흔들리게 했다.

조각조각 꿰맨 듯 엉망으로 섞인 기억에 마침내 청년은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기억이 두려워져 동생에게서 거리를 두려고 하면, 귀신같이 눈치챈 동생이 그를 곁에 붙여두었다. 그렇게 청년이 동생의 삶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날, 결국 문제가 터졌다. 있잖아, 루리.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아는 사람의 경기를 보러 간 날, 청년은 함께 객석에 앉은 동생에게 말했다. 사카키 유우야가 왜 다크 리벨리온을 쓰고 있지? 저건 유토의 카드인데.

유토가 넘겨줬다고 했잖아?”

그렇게 말해? 난 설명을 들은 기억이 없어. 빼앗은 것인지도 몰라.”

저 자식이 유토에게 해를 끼친 거라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거칠게 일어나려던 청년을 동생이 붙잡았다.

그만둬, 오빠. 이미 한참 된 일이잖아. 유토가 쓰러지면서 유우야에게 다크 리벨리온을 넘겨주고, 오빠가 그걸 인정했던 것도.”

유토가…….”

오빠가 내게 다 이야기해줬어! 오빠가 너무 지쳐서 당장 기억이 안 나는 것뿐이야.”

붉은 눈 가득 두려움이 비쳤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청년은 모든 힘을 잃었다. 그는 동생의 삶을 망치고 있었다. 그 미래에 찌꺼기를 남기고 있었다. 홀로 경기장을 빠져나오면서 그는 오랜만에 삶을 중단하는 것을 생각했다. 이미 한 번 지켜주지 못했던 동생을, 또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도망치는 뒷모습에 동생의 외침이 박혔다. 뒤쫓아오는 기척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다.

루리. 네 삶에 이제 나는 필요 없겠지?

동생의 애원에 결국 문을 열어준 청년이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해?”

그야, 나는 불안정하고 결함이 많으니까. 네게 필요한 건 레오 코퍼레이션에서 전부 대줄 거고.”

전쟁을 거치며 황폐해진 인간이 누군가를 제대로 지탱할 수 있을 리 없다. 어쩌면 처음부터, 동생의 삶에 끼어들지 않았어야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동생의 클론이 만들어진 때, 과거의 공백만 채워주고 바로 떠나야 했을 수도 있다. 후원자를 자처한 사장에게 동생을 맡기고 어느 조용한 곳에서 시들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다. 동생의 미래에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이 모든 일을 비튼 것이다.

전부 포기하고 싶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부드러운 말이 청년을 침몰시켰다.

미안해. 이제 지쳤어. 어떤 것도 더 이어가고 싶지 않아.”

숨기고 싶었는데, 약한 마음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고 말았다. 청년은 제멋대로인 자신이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동생은 고통을 안고 세상에서 지워지고, 클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의 그녀가 고통을 모르는 것은 진짜가 모든 고통을 안고 흩어졌기 때문인데. 동생을 구하지 못한 자신이, 동생 앞에 이렇게 무너져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약함은 쏟아낼수록 가벼워졌다. 무리한 삶을 억지로 버텨온 사람이, 고통을 덜어내는 것에 대한 유혹을 이겨내기란 어렵다. 청년은 동생의 몸에 얼굴을 묻고, 실컷 괴로운 감정을 토해냈다. 혼자 묵혀뒀던 것을, 투정처럼, 울음처럼. 어느 순간부터 보드라운 손이 청년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따뜻한 손길은 고통을 쏟아내느라 바쁜 청년을 겨우 안정시켰다. 청년은 말 대신 거친 숨을 토해내다 천천히 입을 닫았다.

힘들었던 건 알아. 내 일로 부담 갖지 마.”

미안해.”

생각지 못한 상냥함에 죄책감이 치밀어 청년은 주문처럼 한참 사과의 말을 반복했다. 자책의 고리를 끊어주려는 듯, 동생은 그의 말 속에 살그머니 위로를 끼웠다.

오빠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괴로웠던 건 오빠 잘못이 아니니까.”

하지만 네게 방해가 되어서…….”

지금까지 나를 위해 힘써줬지. 이젠 오빠의 고통을 덜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할 거야.”

그렇게 말하는 동생의 얼굴엔, 적에 맞서겠다고 선언하던 때의 의지가 비쳐 청년은 겨우 마음을 놓았다. 절망 속에서도 버틴 동생이 지금의 상황을 넘기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동생이 그렇게 마음을 쓴다면, 노력에 따라주는 게 최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청년을, 동생은 한 번 더 안아주고 속삭였다.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거야. 오빠는 다 내려놓고 쉬는 게 필요해. 나긋한 말에 청년의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이 걸렸다.

그럼, 잘 자고 내일 봐.”

어서 쉬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서며, 동생이 장난처럼 손을 흔들었다.

잘 자. 루리.”

청년은 평온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

 

오빠와 헤어지자마자 클론이 향한 곳은 자신의 방이 아닌, 사장의 집무실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던 사장이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뜻밖이라고 할 수 있을 방문이었지만, 사장은 별로 놀라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소녀가 언젠간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미리 잡은 범위보다 조금 더 빨랐을 뿐이다. 질문도 던지지 않고 소녀가 목적을 꺼낼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부탁할 일이 생겨서요.”

오빠에 대한 일이군요.”

. 한계인 것 같아요.”

다음에 소녀가 늘어놓은 이야기는 사장이 예상한 대로였다. 청년이 삶을 지속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애초에 소녀가 그를 찾을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기도 했다. 사장은 그녀에게, 청년이 위험할 때 일러달라고 부탁했으므로. 그렇게나 구하려 했던 동생과 함께하게 되었다면 청년이 더는 방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달콤한 희망이었을 뿐. 이대로라면 청년은 오래지 않아 쓰러질 것이다. 그런 미래는 소녀도 사장도 바라는 길이 아니었다.

왜 오빠는 자꾸 놓아버리려 들까요.”

너무 지쳐버렸는지도 모르죠. 당신에게 해야 할 일만 끝내면 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금도 억지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럴지도 몰라요. 그는 삶이 버겁다고 이야기했으니까. 만일 전쟁의 끝을 삶의 목표로 삼아버렸다면.”

이젠 살아갈 이유는 없다는 것이 되니까요.”

전쟁이 끝난 후, 청년은 종종 자신의 생존 자체에 의문을 보였다. 자신이 왜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다거나, 이런 삶은 실패인 것 같다는 말을 통해서. 전장에선 기를 쓰고 생존했는데 막상 생존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생존의 대가가 너무 커서인지, 그도 아니면 삶을 감당할 기력도 사라진 것인지. 사장으로선 알 수 없다.

그럼, 이번에도 부탁한 대로 실행하겠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다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기억의 혼란이 생기고 있어요. 자꾸 손을 대니까 오염되는 거예요.”

청년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비밀. 청년이 동생의 클론을 만나 시간을 보내고 적응을 도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몇 번을 반복했다는 것을 청년만 모르는 건, 청년의 기억이 훼손되었기 때문. 소녀는 오빠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고백할 때면 사장의 힘을 빌려 오빠의 기억에서 자신을 만난 일을 지웠다. 그러면 사장은 청년에게 다시 소녀를 소개하고, 청년이 동생을 위해서 버티게 유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이었다. 청년은 이미 몇 번 동생을 만났고, 몇 번 너덜너덜해졌고, 몇 번 기억이 지워졌다. 두 사람이 그런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하나. 청년을 이 세상에 붙들어놓기 위해서. 그러나 기억에 손을 대는 것에 아무런 무리가 따르지 않을 리 없다. 언젠가부터 사장은 청년이 기억의 중첩이나 혼란에 시달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엔 청년이 기억 이식을 부탁한 것을 핑계로 오염된 부분을 제거하려 했더니 증상이 더욱 심해지고 말았다.

알고 있지만, 어쩌겠어요.”

괜찮아요?”

손을 대야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잖아요.”

단정한 얼굴에 걸리는 웃음은 아름다워서 섬칫하다. 사장은 그녀의 빛나는 웃음 아래 꼬여버린 감정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소녀가 오빠를 연명시키기로 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길이었으므로.

정말로 망가진 것은 어느 쪽인가. 사랑하는 동생을 되찾고도 전부 놓아버리려는 청년 쪽인가, 아니면 어차피 삶의 의미를 잃은 오빠를 묶어두기 위해 몇 번이고 오빠의 기억을 지우는 소녀 쪽인가. 그것도 아니면, 양쪽 다 비틀린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끊어주지 않는 사장일까 이젠 누구도 알 수 없게 된 이야기였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세 사람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소녀는 오빠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에, 청년은 황폐한 삶을 중단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장은 자신이 책임질 사람을 끝까지 묶어두고 싶다는 욕망에. 전부, 엉망진창인 사람들이었다.

아카바 씨도, 오빠가 살기를 바라는 거죠?”

물론이죠.”

그럼 우리는 동지인 셈이네요.”

다행히도, 그렇군요.”

치료는 하지 못하고, 죽지 않을 정도의 상태만 유지시킨다. 바람직한 길은 아니지만 이제 두 사람에게 남은 길은 그것뿐이다. 어차피, 옳은 길을 찾으려 했다면 진작 모든 게 끝났을 것이다. 청년은 끝없이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므로. 사장은 소녀와 말이 잘 통한다는 것에 안도하며, 청년을 감시하는 자에게 연락한다.

[쿠로사키를 수면실로 옮겨줘. 다시 손을 봐야 할 것 같으니까.]

[이번에도, 입니까?]

[아마 앞으로도 계속이겠지.]

셋 중 어느 하나가 멈출 때까지, 이 징그러운 반복은 끝나지 않는다. 전환의 기회는 세 갈래. 청년이 삶을 감당하게 되건 소녀가 오빠를 포기하건 사장이 진득한 책임감을 버리건, 어느 하나만 하면 된다. 그러나 어느 쪽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두 사람은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소녀는 사장보다도 대담한 발상을 꺼낸다.

기억을 좀 더 지우는 게 어때요? 아예 전쟁의 기억이 없는 쪽이라면 덜 괴로워하지 않을까요?”

후유증이 걱정되어 지금은 전쟁 직후 정도로 타협하고는 있습니다만.”

어차피 약간의 조작에도 위험이 따르지 않았나요.”

그렇죠. 루리 양의 의견도, 최후처방으로 남겨두는 게 좋겠습니다. 언젠가 정말로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서면, 무리가 가더라도 시도해볼 것으로.”

기묘한 대화 끝에 사장은 문득 궁금해진다. 소녀는 어떻게 보람 없는 반복을 계속 선택할 수 있는지. 실제로 그렇게 오래 함께하지도 않은 오빠에게 어떻게 그만큼 집중할 수 있는지.

지치지는 않나요?”

무엇이요?”

오빠를 계속 다시 만나는 것 말입니다.”

글쎄요, 별로 그렇진 않네요. 과거야 어땠건 지금의 와 연결된 사람은 오빠가 전부니까요.”

뿌리가 깊지 않은 사람은 약간의 연결성에도 집착하게 되어있다. 아마 소녀도 그런 것이리라. 스스로 클론임을 인지한 때부터 소녀는 자신이 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에 집중했다. 그렇게 찾은 이유는 오빠의 소망, 그리고 생존. 바탕이 궁핍한 사람으로서, 삶의 시작에 얽힌 오빠를 어떻게든 쥐고 있으려 하는 것도 놀랍지 않다.

게다가, 오빠가 나를 위해 애쓰는 것은 몇 번 겪어도 질리지가 않아서. 자기한텐 삶의 의지가 없기 때문인지, 죄책감에라도 시달리는 건지. 내 미래를 위해선 정말 공을 들인다니까요?”

이제 그는 동생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 유일한 보람일 겁니다.”

청년은 예부터 삶의 보람을 타인과 엮는 습성이 있었다.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의미를 만들고, 자신이 살아도 되는 이유를 설정하는 것이다. 흩어진 동생을 클론으로라도 재현해내면 그가 조금이라도 버티리라 판단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청년의 의존적인 헌신은 그를 고통스러운 삶에 묶어두고, 동생이 그를 움켜쥐게 한다. 해답은 될 수 없어도, 청년은 그에 기대 연명하게 될 것이다.

이번의 반복 속에서도.

서로의 삶을 열어준 남매는 기묘한 방향으로 서로의 미래를 연장시킨다. 자신이 시작한 굴레에 이제 사장은 운명인 듯 동참한다. 사장의 방조 속에 남매의 공존은 완성된다.

정말 그렇다면 앞으로도 얼마든,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을 연기하지요.”

쿠로사키 슌을 구하는 일은, 내게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덧붙인 소녀는 청년과 닮은 얼굴로 천진하게 웃었다.

 

*

 

깨어났을 때 바로 눈에 들어온 풍경은 지나치게 정돈된 낯선 공간이었다. 한두 번 내부를 들여다본 적은 있지만 들어와 사용한 적은 없는 곳. 수면실이라 불리는 공간은 그 이름에 걸맞게 꾸며졌지만 청년은 만들어진 편의가 왠지 괴상하게 느껴졌다. 말이야 휴식의 공간이었지만 이곳이 정확히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침대 근처에 놓인 장치의 정체도, 이곳에 들어오는 몇 안 되는 사람의 기준도. 거기다 외딴 곳에 떨어져 있기까지, 제법 수상쩍은 공간이 아닌가. 거기서 청년은 무의미한 생각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더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머리를 누르는 것은 현실처럼 눅진한 꿈. 그 속에서, 누군가에게 기대 잔뜩 괴로운 감정을 풀었던 것 같은데, 그건 누구였을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청년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무리 파헤쳐도 풀리지 않는 찜찜함을 안고 공간을 나서려는 때, 누군가 그를 붙잡았다. 아직 선명해지지 않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옛 협력자의 수하.

역시 여기에 있었군. 사장님의 호출이다.”

청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상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