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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슌 중심] 성역 (D의 경우)

현소야 2018. 6. 30. 22:43

 

청년은 자주 같은 꿈을 꾸었다. 꿈이라기보다는 기억의 재현에 가까운 것이라고 청년은 생각한다. 언젠가의 기억을 새로운 것 하나 없이 반복 재생하는 것뿐이므로. 하필 그 기억인 것은 그것이 청년에게 즐거웠던 때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 후로 청년은 한 번도 즐겁지 못했는데, 점점 흐릿해지는 과거는 이제 꿈으로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 속에 등장하는 것은 전부 단절된 존재이므로 그들과의 기억을 새로 만들 수도 없다. 매번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 중간에 깨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였다. 그렇게라도 청년은 마지막 즐거움을 되풀이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청년은 닳도록 반복해온 기억에 떨어졌다. 꿈의 시작은 언제나 평화로운 도시,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같이 행복한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는 사람들. 언젠가부터 도시에 모습을 드러낸 청년은 화려한 거리 공연으로 주민들의 시선을 끌었다. 처음에는 낯선 엔터테이너를 멀리서 구경하기만 했던 사람들은 공연이 거듭되자 관객이 되어 그와 함께하게 되었다. 몰려온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공연을 마친 청년은 평소보다 길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자신의 공연에 웃어준 이들에 대한 감사이자, 더는 보지 못할 이들에 대한 작별인사이기도 했다. 그는 곧 도시를 떠날 생각이었다.

관객이 하나둘 돌아가 청년이 공연에 쓴 도구를 챙기고 있자니 그간의 공연에서 가장 많이 마주쳤고 가장 열성적으로 환호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온다. 열네댓 살로 보이는 소녀였다. 꿈 밖에서도 살아있다면 이젠 그보다 몇 살은 더 먹었을 텐데, 기억 속의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아 청년에게는 언제나 과거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음 공연은 언제일까요.]

[다음은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이곳을 찾았던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는 원래 있어야 했던 곳으로 돌아갈 뿐이다. 앞으로 이곳에 닥칠 일을 뻔히 알면서도 청년은 웃으며 소녀의 말에 답했다.

[혹시 이번이 마지막인가요? 아쉬운데.]

[이제 다른 곳으로 갈까 해서요. 하트랜드만큼 즐거웠던 곳은 없어서, 언젠가 다시 오고 싶지만.]

[그거 참 반갑네요, 저는 마술사 씨를 앞으로도…….]

소녀의 붉은 눈에서 점점 웃음이 걷힌다. 가면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오싹하다. 기억 속의 소녀가 이랬던가?

[……죽이고 싶으니까.]

가라앉은 목소리에, 섬뜩한 말에 청년은 숨이 막힌다. 소녀에게 누군가가 겹쳐지고 있었다. 하필 꿈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여자가. 청년이 한참 내려다보아야 했던 소녀는 어느새 그와 비슷한 눈높이에 있다. 본래 검은빛이었던 머리카락은 녹색으로 바뀌어 바람에 나부끼고 금빛 눈이 차갑게 그를 비춘다. , 이젠 이것조차 악몽이 되었구나. 그녀가 꿈에까지 끼어드는구나. 청년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다.

꿈에서 도망친 그의 눈이 처음으로 담아낸 것은, 꿈에서와 같은 금빛 눈. 다만 이번에는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청년은 동거인의 눈이 금빛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세상엔 죽은 것으로 알려진 청년을 찾을 사람이라곤, 그를 자신의 집에 들인 그녀밖에 없기도 했다. 단절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소녀와 다르게 여자는 청년의 현실에 존재한다. 매일 새로운 날을 보내며, 조금씩 나이가 드는 보통의 인간. 그렇기에 여자는 청년의 기억을 허물고 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소녀에 대한 기억은 청년의 머릿속에서 점점 쇠하는데 그녀는 하루하루 청년의 삶에 파고들고 있으니까.

자는지 확인하러 들어왔는데, 깼네.”

웬일이야. 평소엔 그냥 나가면서.”

오늘은……라서 상황이 다르니까. 혹시 깨어있다면 그걸 말하려고 했어.”

아직 몸이 덜 깬 것인지 여자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띄엄띄엄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자꾸 일부가 잘린다. 빠진 내용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청년은 알아들은 것처럼 적당히 반응하기로 했다 여자가 옷을 갖춰 입고 가방을 멘 것을 보면 아마 출근할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악몽이 된 기억 때문에 심란해, 청년은 빨리 그녀를 내보내고 혼자 남고 싶었다.

너랑 함께……하면 좋겠지만 어차피 너는 안 움직여줄 거고.”

그녀의 삶에 끼워 넣어진 후로 청년은 줄곧 이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나서기 힘든 사정이기도 했지만 스스로를 가둔 것이기도 했다. 청년은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에 돈 조금 올려뒀어.”

고마워.”

그럼 다녀올게.”

.”

의외네. 내가……할 거라고 하면 간섭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네 일인데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그래. 그럼 내가 올 때까지 죽지 말고.”

함께 산다고 해도 청년이 혼자 틀어박힌 탓에 거의 마주치지도 않는데, 드물게 말을 섞을 때면 여자는 저런 식으로 말을 끝낸다. 인사라기엔 괴상했으나 그들 둘의 관계가 일반적일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청년은 눈을 감고 여자를 지워냈다.

 

*

 

삶의 모든 것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청년은 가끔 생존을 의심했고 감각을 불신하고 제 몸을 낯설어했다.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 삶이 실제인지 확인하려 들기도 했다. 자꾸만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가 한 번 생사의 기로에 선 적이 있어서였다. 거의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청년은 아직까지도 그 기적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길고 긴 꿈에 갇혀 무사히 살아있다는 착각에 빠졌다는 것이 그에겐 더 납득이 갔다.

그가 죽음에 닿기 전에 건져, 생존을 의심해야 하는 삶이나마 이어가게 한 것이 바로 함께 지내는 여자였다. 가사상태에 빠졌던 청년을 이만큼 회복시키느라 꽤 공을 들인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청년은 그녀에게 가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끔찍한 인간이라고 보는 게 맞을까. 청년이 죽음의 위기에 빠지기 전까지, 그녀가 그에게 향한 것은 깊은 증오였고 그가 그녀에게 품었던 것은 해묵은 죄책감이었으므로.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청년이 가능한 여자와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건 그래서였다. 그녀가 자신을 구하고 함께 지내길 허락했다고 해도 그녀가 저를 용서하진 않았음을 안다. 죄를 갚을 길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 구조되었다는 것은 구원보다 벌처럼 느껴졌다. 여자와 마주칠 때마다 청년은 자신이 그녀에게서 앗아간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별달리 책망하지 않는 것은 그래봐야 달라지는 게 없다고 체념했기 때문이리라.

학원 강사로 일하는 동거인이 출근했다 돌아오기까지, 오전부터 저녁이 되기 전까지 하루의 일부에 불과한 시간만 청년은 방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그녀가 퇴근한 때부터는 방에 틀어박혀, 없는 사람처럼 자신을 숨긴다. 그것은 청년이 스스로에게 건 행동 제한이었다. 물론 여자도 그를 억지로 끌어내지 않고 필요할 때만 불러낸다. 그렇게 최소한의 생활만 함께하는 것이 그들이 찾은 공존의 해법이었다.

꿈속의 소녀에 여자가 겹쳐졌던 것은 어쩌면 두 사람이 닮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청년에게 마지막으로 빛났던 기억을 장식하는 소녀는, 여자의 동생. 세 사람은 수년 전 청년의 나라에서 일으킨 전쟁으로 얽혔다. 청년은 소녀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상부에 넘기고 자매의 나라에 전쟁을 가져왔으며, 여자는 전쟁 속에서 동생을 구하려 침략자에 맞섰다. 결국 여자는 자신의 전부를 앗아간 청년을 찾아냈고 전투 끝에 그를 쓰러트리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여자의 복수로 둘의 관계도 깔끔하게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여러 상황이 겹친 탓에 처벌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로 청년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마치지 못한 것을 자신이 대신 집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그래서일까. 전쟁의 막바지에, 청년은 상부에서 지급받은 무기를 자신에게 겨누고 말았다. 동지들이 수많은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갔던 무기로 자신을 끝내려 한 것이다. 자신의 종말로 모든 걸 마감하려 했으나, 그는 실패했다. 생각지 못한 사람에게 구조되면서. 처음 눈이 떠지고 흐린 시야에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을 때 청년은 그것이 죽기 직전 아른거리는 헛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녀라면 절대 이곳에 있을 리 없다고.

차라리 목을 조른다면 어울릴 것이다. 혹은 저주를 퍼붓거나.

그러나 청년에게 돌아온 것은 서늘한 손길이었다. 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는지, 여자가 이마를 쓸었던 것 같다. 몸을 짓누르는 열기가 잠시나마 가라앉자 청년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지금의 것이 삶에서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환상이었어도 나쁘진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 후로 몇 번, 의식이 돌아왔다 다시 끊어질 때도 청년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자였다. 갈수록 여자의 형체가 선명해지고 몸에 닿는 손길이 생생해지는 것에 청년은 어느 순간 그녀가 현실임을 깨달았다. 구원의 가능성에서 가장 멀었던 사람이 그를 구조한 것이다.

청년이 죽음을 시도한 건 수많은 사람의 눈앞에서였다. 전쟁의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며 실행한 일이라 세상에 인상적으로 남았을 것이다. 당연히 누구도 그의 생존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청년이 깨어났을 때 그의 죽음은 기정사실이 되어있었다. 세상으로 돌아갈 길은 사라진 셈인 데다 그 자신도 실패한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그는 죽은 채로살아가는 것을 택했다.

실제로 무기를 자신에게 겨눈 때 이미 한 번은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청년은 생각한다. 목숨만 붙어있을 뿐 이전의 자신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고 지금부터 이어지는 삶은 그저 타의로 연장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왜 다시 삶이 허락된 것인가. 한동안 청년은 그 이유를 찾고 싶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생존은 실수로만 느껴져서, 이유를 찾지 않으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스스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세상에서 의미를 건져낼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구조한 자 정도일까. 그녀라면 자신을 거두며 무언가 생각하지 않았을까. 결국 청년은 어느 날 여자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구해주었냐고.

[그야 눈에 보였으니까. 처음엔 생각하고 움직인 게 아니었어.]

[그럼 그 후로 왜 지금까지 데리고 있어? 아카바 레이지에게 넘기려고?]

[그 자는 네게 별 관심이 없을걸.]

[그럼 복수라도 하려고?]

[아직은 계획이 없는데.]

[그럼 뭔데? 왜 굳이 나를 살려놓고 아예 데리고 있는 건데?]

그녀에게 청년만큼 무가치한 존재는 없을 텐데. 이전까지 청년이 알던 그녀라면 죽어가는 그를 방치했거나 꺼져가는 목숨을 제 손으로 거두려 했을 텐데.

동생의 납치에 관여한 인간을, 갑자기 자비가 샘솟아 구했을 리는 없다. 용서라는 단어도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한순간의 변덕인지, 아니면 생각지 못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 청년이 묵혀두었던 의문을 여자는 한순간의 동요도 없이 풀어주었다.

[루리의 행방을 듣고 싶어서.]

여자가 입에 올린 것은 동생의 이름. 듣고 보니 지극히 간단한 이유였다. 온갖 가능성을 생각했던 청년으로선 힘이 빠질 정도로.

[아카데미아 놈들에게 접근하려고 해도, 내가 뭐라도 저지를 거라 생각하는지 다들 접촉을 막거든. 접촉할 수 있을 정도의 인간들은 잔챙이라 루리에 대해 알지도 못해. 하지만 너는 루리의 행방을 알 정도의 직책은 되었던 것 같으니까.]

[나는 이제 아카데미아가 아닌데.]

동시에 청년에게는 가장 끔찍한 이유이기도 했다. 여자는 결국 그의 죄를 되살리고 있었다. 누구도 벌하지 않았으나, 바로 그 때문에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었던 잘못을.

[기억이 날아가기라도?]

내게서 뭘 기대하는 거야. 목 끝까지 차올랐던 말은 소리가 되기 전에 사그라졌다. 청년은 무력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옛날의 동지를 넘기라거나 대중 앞에서 죄를 고백하라는 것도 아니잖아. 보통 사람이라면 관심도 갖지 않을 정보를 내게 말해주기만 하면 되는데.]

[내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언제는 내가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아무 데나 들쑤시고 다녔나? 우리 같은 사람은 말이야,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한 번은 쥐어보는 거야.]

절박하니까.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내몰린 사람은 보통의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청년은 그것이 처참했다. 그녀 같은 사람은 괴로운 선택도 고통스러운 짐도 거듭된 실패마저도 너무 당연히 여긴다. 혹 붙잡을지 모를 희망과 언젠가 만날 수도 있을 성공만을 생각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견디며 사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청년은 그녀가 자신을 남겨둔 것을 납득할 수밖에 없다. 한때 증오의 대상이었던 자신이라도 이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니까.

그녀에게 정말로 답을 줄 수 있다면 청년도 좋았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에게 행복을 안겨줄 수 있는 것이라면 더욱. 유감스럽게도 그는 여자가 기대하는 것을 주지 못했다. 함께 지내오면서, 그녀가 습관적으로 던지는 질문에 그는 제대로 응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왜 루리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아?]

여자는 가끔 초조해져서 청년에게 매달린다.

[그걸 말해버리면 네 가치가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아? 아니면 내가 루리를 찾아낸 후 너에게 복수하겠다 할까 두려워?]

그럴 때마다 청년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여자의 추측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도, 본인이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도 없다. 여자가 지쳐 포기할 때까지 침묵으로 버틸 뿐이다. 매달릴 때의 여자의 모습은 평소와는 다르게 처연하고 괴로워 보여서 청년은 몇 번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어차피 답이야 달라지지 않는데, 알고 있는 것을 전부 쏟아내고 그녀를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도 내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은 답을 꺼냈을 때의 일이 두려워서였다.

그녀가 무엇으로 버텨왔는지 청년은 너무도 잘 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동생을 위해서였고 전쟁이 끝난 때도 동생을 위해서였다. 그만큼 절대적인 존재이기에, 청년은 그녀 앞에서 소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소녀는 결국 언니의 삶을 뒤흔들 것이고 그녀의 내일을 말려버릴 것이다. 여자에게 가장 잔인한 것은 동생에 대해 함구하는 게 아니라 자취를 감춘 동생을 그녀의 현재에 되살리는 것이라고 청년은 확신한다.

그렇게 동생을 찾으려는 시도가 계속 좌절되는데도 여자는 동생을 포기하는 일이 없다. 청년의 도움이 없으면 없는 대로, 제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포기하면 좋을 텐데. 전장에서 수많은 것을 포기했던 것처럼 돌아오지 못하는 동생도 어느 순간에 놓아버리면 좋을 텐데. 평화에 적응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으면 좋을 텐데. 그런 말을 속으로 삼키며 청년은 여자의 노력을 외면한다. 그녀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 자신이 그녀에게 체념하라고 말할 자격은 없었으니까.

아마 그녀에게 동생이란 일종의 성역일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다치게 할 수 없고, 어떤 지옥 속에서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는, 어쩌면 자신보다도 앞서는 존재. 그렇다면, 만일 그녀의 삶에서 영영 동생이 사라진다면. 여자 앞에서 그런 가정을 꺼냈다간 그럴 리가 없잖아?’ 하는 답변이 돌아올 것만 같다. 낙관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동생이 지워지는 것을 아예 상상하지 못해서.

동생을 찾는 것 외에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그녀에게 직접 물을 자신이 없어, 청년은 방에서 나올 때마다 그녀가 남긴 흔적을 확인한다. 오늘은 테이블 위에 그녀가 미처 치우지 못하고 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강의할 내용에 대한 자료, 이번 달의 요금 명세서, 그리고 그 사이에 아무렇게나 섞인 팸플릿. 팸플릿을 꺼내니, 화려한 글씨로 프로 선수에 대한 홍보 문구가 가득 적혀있었다. 거기서 청년은 자신이 가져온 불행 때문에 그녀가 포기하고 만 꿈을 떠올린다. 그녀가 평범하게 자랐다면, 어쩌면 그녀도 이들과 같은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는데.

부엌으로 향했을 때는 전자레인지 곁에 나뒹구는 약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 계속 기침을 했었던가. 약 봉투를 살피니 처방받은 날짜는 닷새 전인데 그나마도 하나만 뜯고 나머지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전쟁을 겪으며 최저한의 생활에 익숙해진 탓인지, 저보다 동생을 챙기는 게 습관이 된 것인지 그녀는 자신의 괴로움에 대해서 너무 둔감했다. 움직일 수만 있으면 괜찮다고 여기며, 너무 많은 것을 방치하고 사는 것이다.

자신을 최우선으로 두면 좋을 텐데.

피로할수록 그녀가 스스로에게 허술해진다는 것쯤 청년도 알고 있었다. 지켜보며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 더할 것이다. 부엌에서 나온 쓰레기를 보면 아팠던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인스턴트 음식으로 겨우 속만 채운 것 같다. 이대로 두었다간 몸이 더 나빠질 게 뻔했다. 청년은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를 이것저것 꺼낸다. 일단은 자신이라도 그녀 대신 그녀를 위해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

 

죽을 끓이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본인이 아닌 타인을 위해 하는 것은 더더욱. 끓여놓고 나니 청년은 상대에게 어떻게 먹일지가 고민스럽다. 아무 말 없이 냄비에 담아두면 생각 없이 지나칠지도 모른다. 식탁에 같이 앉아서 먹자고 하면 조금이라도 먹을까. 이곳에서 지낸 후로 자의로 그녀와 식사를 함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내키지는 않지만 말을 꺼내야 할 것 같다. 그녀가 오면 짐만 내려놓게 하고 바로 식탁에 앉혀야지. 몇 숟갈이라도 뜨게 해야지. 청년은 그렇게 마음먹고 부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식재료 찌꺼기를 버리고 여자가 쟁여둔 인스턴트 음식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운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거슬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시작한 김에 청년은 영역을 넓혀 집안 곳곳을 정리하고 치웠다. 손이 가는 만큼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게, 그동안 의욕 없는 생활을 이어온 청년에겐 제법 뿌듯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힘든 것도 모르고 정리에 매달려 일을 끝냈을 때는 어느새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시간으로 치기에도 늦은 시간이다. 여자의 평소 퇴근시간으로부터 몇 시간이나 지난 시점.

그런데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자와 함께 지내면서, 청년에게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 밤은 없었다. 그녀는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했고, 바깥에서 즐겨야 할 취미도 없어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퇴근시간이 빠른 편이라, 혹 퇴근 후 일정이 있다고 해도 저녁시간 쯤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은 저녁시간이 다가올 쯤엔 꼭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인데. 그녀가 돌아와 움직이는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숨죽여 지냈는데.

전화를 하려 해도 청년은 동거인의 개인 연락처마저 알지 못한다. 학원에 나가는 시간만 빼면 그녀와 떨어질 일이 없었기 때문에 기억해둘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움직이는 시간은 정반대라고 해도, 거의 말을 섞지 않고 산다 해도, 그녀는 매일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그녀의 주변인을 통해 행방을 추측하기도 어렵다. 전쟁이 끝나자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그녀는 낯선 땅에서 별로 사람을 사귀지 않았다. 사귀었다고 해도 직장 동료일까.

거기서 청년은 길을 찾고, 전화기를 들었다.

[LDS입니다.]

[엑시즈 코스 강사인 쿠로사키 선생님 계신가요?]

전화를 건 곳은 여자가 근무하는 학원. 그녀가 정상적으로 출근했다면 학원에서도 그녀의 행방을 추측할 단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청년이 기대한 것과는 달랐다.

[쿠로사키 선생님은 오늘 출근하지 않았어요.]

[출근할 수 없다고 따로 연락이라도 들어왔나요?]

[아뇨. 오늘은 엑시즈 코스의 휴일이어서, 학생은 물론 강사까지 학원에 올 일이 없었거든요.]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런 가능성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출근은 정상적으로 한 후 퇴근할 때 변수가 생겼거나, 최소한 명확한 사정으로 일을 빠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단서도 건지지 못할 줄은 몰랐는데. 멍해진 청년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드문드문 들리더니 안내하던 직원이 말을 덧붙였다.

[, 지금 들었는데 모처럼의 휴일이라 엑시즈 코스의 강사가 모두 모여서 함께 시간을 보낼까 했지만, 쿠로사키 선생님만 가볼 곳이 있다며 빠졌다고 하네요.]

[혹시 어떤 곳인지는…….]

[죄송합니다. 학원에선 학생과 강사의 개인적인 일에 대해 알리지 않도록 되어있거든요. 위급한 때에 한해 가족에게만 알리도록…….]

더 이상 캐낼 게 없어진 청년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수확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녀가 가려고 할 곳이라면 하나쯤은 생각해낼 수 있었으니까.

보름 전, 퇴근한 여자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를 찾은 일이 있었다. 드물게 들뜬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통에, 잠든 체 하려던 청년도 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사장에게 들었는데, 네 고향에서 곧 아카데미아를 개방한대.]

[무슨 생각으로.]

[몰라. 병사가 빠져나간 빈껍데기쯤 일반인이 봐도 된다 생각한 건지,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세탁하고 싶은 건지.]

여자가 물어온 소식에 청년은 불길한 예감이 치밀었다. 그녀가 제 고향 일에 관심을 가질 이유라면 하나뿐이기에. 기대 섞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어 청년이 슬그머니 눈을 돌린 때.

[그래서 말인데, 개방하면 같이 갈래?]

여자는 결국 그가 피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그녀가 가려고 하는 곳은 과거 침략군의 본거지이자, 그녀의 동생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갇혀있었던 곳. 언젠가는 자신을 안내자 삼아 데리고 나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애초에 들어줄 건이 아니었다. 청년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껄끄러운 모양이지? 아카데미아에 소속되었을 때가 생각나서?]

[껄끄러운 건 나보다 네 쪽 아냐? 아카데미아에 원한이 있는 건 너잖아. 나쁜 기억만 안겨준 곳을 굳이 찾아가서 뭘 하겠단 거야. 이젠 싸워야 할 적도 없는데.]

[그럼 루리가 있었던 곳이라도 말해줘.]

[……설마 거기서 루리 양의 흔적이라도 찾을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그럼 안 돼?]

[가봤자 뭐가 남아있을 줄 알고. 네 짐작대로라면 자기들에게 불리한 건 전부 치우지 않았겠어?]

[소득이 없더라도, 네가 한 번이라도 나서줬으면 했는데.]

뜻밖에도 여자는 그렇게 오래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청년에게 별달리 기대하지도 않은 것인지. 그 말만 던지고 그녀는 바로 일상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버렸고, 청년에게 의사를 다시 묻지도 않았다.

아침의 일을 떠올리면, 여자는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며 청년이 가로막지 않는 것에 뜻밖이라는 눈치였다. 만일 그녀가 꺼낸 말이, 청년이 대충 넘겨버린 부분이 이미 한 번 청년이 거부했던 곳을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면? 그랬기에 순순히 긍정하는 청년에 놀랐던 것이라면? 그곳에 가려는 생각을 포기한 게 아니라, 그저 청년과 함께 가는 것을 포기한 것뿐이었을까. 목표한 싸움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여자를 너무 얕보고 있었다. 그녀라면 얼마든 혼자서도 갈 수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꺼림칙함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만일 여자가 향한 곳이 명확하다면 조금은 안심할 수 있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는 것. 기억하는 곳으로 향해 찾아볼 것인가, 아니면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고민은 짧았고, 청년은 여자가 남겨놓고 간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서 집을 나섰다. 아무 일도 없이 끝나기만 기다리기엔 이젠 마음이 너무 급했다.

청년은 복도를 빠르게 빠져나와, 계단을 뛰어 내려가, 건물의 문을 열었다. 바로 그때 그의 눈이 무언가 감지했다. 건물로 들어오려는 사람의 얼굴이 익숙했다. 바로 달려 나갈 기세였던 청년은 가까워지는 사람을 알아보자마자 멈췄다.

기다리던 사람이 거기 있었다.


*

 

돌아온 여자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옷은 군데군데 찢기고 팔다리엔 흙이 묻어있었으며 긁히고 베인 상처가 몸을 덮고 있었다. 들어올 때 절뚝거리는 것을 보니 다리도 좋지 않은 모양이다. 가지고 나간 가방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상처를 들여다볼 정신도, 엉망이 된 옷을 갈아입을 힘도 없는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몇 걸음 떼지도 않고 문 근처에 주저앉아버린 그녀였다.

무언가,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자에게 구조된 이후로 집 안에서만 머문 청년으로선, 그녀가 휘말렸을 사건이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만큼 불안은 커진다. 찾아간 곳에서 그녀를 껄끄러워하는 자들과 다툼이 있었나? 돌아오는 길에 질 나쁜 사람과 마주친 것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온 것일까. 청년이 온갖 가능성에 떨고 있던 때, 시선을 느낀 여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망가진 모습을 보였다는 것 때문일까. 다음 순간 날아든 것은 잔뜩 날이 선 목소리였다.

,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서 신기해?”

어쩌다 다쳤어.”

네가 알 것 없잖아.”

말해줬으면 좋겠어.”

?”

청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함께 지낸다고 해도 그녀와 자신은 타인일 뿐임을 잊고 있었다. 마음의 빚까지 진 상대에게 멋대로 답을 캐낼 수는 없다.

알면, 뭘 할 건데.”

더 참견하지 않을게. 앞으로 쓸데없는 말로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도 청년은 자꾸만 불안해져서, 더 매달리기로 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음엔 그녀가 완전히 부서지는 것밖에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청년이 물러설 기세가 없자 회피하는 것도 귀찮아졌는지 여자는 한숨을 내쉬곤 느릿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부터 아카데미아에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휴일에 실행했을 뿐이야. 루리가 갇혔던 탑에 가는 것까진 괜찮았어. 루리가 지냈던 흔적 같은 건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지만. 그 다음엔 발길 가는 대로 움직여서, 사카키 유우야가 루리와 싸웠던 곳에까지 갔다가…….”

듣고 있어. 계속 얘기해.”

거기서 빠져나오고 주변을 돌다가 갑자기 어느 방 앞에서 이곳은 꼭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야? 출입금지라고 적혀있었지만 슬쩍 들어갔어. 근데 거기 거대한 장치가 있는 거야. 이미 오래 전에 멈춘 것 같은 장치인데 시선을 뗄 수 없었어. 이상하지, 계속. 방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상하게 자꾸만 뭔지 모를 감각이 나를 움직였던 거라고. 그러다 마지막엔 누가 저 장치 속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속삭이는 것 같더라.”

제대로 된 단서도 없이 막연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청년은 여자가 보았다는 장치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한때 그곳에서 지냈던 사람으로서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있다. 다만 하나 꺼림칙한 것이라면 그것의 정체도 용도도 모를 그녀가 그에 매달렸다는 것. 청년이 짐작하기로 그 장치는, 그녀의 동생이 마지막으로 향했던 곳인데.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들여다보는데, 저 바닥에, 아무것도 없을 바닥에 루리가 어른거리는 거야. 그 다음엔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루리가 보이니까 거기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을 뿐. 정신이 들었을 땐 옷이 엉망이 되고 온몸이 아픈데, 연구자 같은 사람이 달려들어서 나한테 죽을 생각이었냐고 소리쳤어.”

꿈을 꾸는 것처럼 나른한 목소리로 여자는 말을 잇는다.

뛰어내렸을까? ? 하지만 그거, 밑이 깊어서 제대로 떨어졌다간 추락사했을 것 같지만? 어쩌면 뛰어내리다가 바닥까지 닿는 데 실패했을까. 그 사람, 한참 화를 내더니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라. 내가 또 일이라도 저지를까 걱정한 건지, 내가 사는 곳을 확인하고 아예 여기로 보내지 뭐야.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네. 됐어?”

그러니까 결국 아카데미아에서 막아둔 곳까지 들어갔다가 다치고 왔단 거잖아.”

그래. 대단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약속한 대로 이제 신경 꺼.”

아니, 들을 게 남았어.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불분명한 희망을 붙들고 뛰어들어서야 실패만 쌓일 뿐이잖아.”

네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목소리에 살짝 울음이 묻은 것 같다. 청년은 불안을 누르면서 묻는다.

무엇을.”

루리의 행방을!”

여자의 목소리가 공간을 찢었다. 청년이 그토록 외면해온 것이 그의 눈앞에서 터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내가 물을 때 알려주었으면 됐잖아! 물을 때마다 아무 말 없이 넘어가는 게 아니라, 가르쳐주었으면 됐잖아. 내가 헤매는 것은 싫어하면서 왜 내게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아?”

나는 네가…….”

이제 루리를 붙잡고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누구도 루리를 찾으려 하지 않아. 전쟁의 흔적을 덮기 바빠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 같은 건 포기하고 만다고. 내가 하트랜드에서 도망친 건, 거기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장례를 치르며 루리도 그냥 묻으려 해서였는데.”

여자가 쏟아내는 말이 마디마디 어지럽다. 소녀의 행방을 짐작하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은 이런 사태를 경계해서였다. 진실을 말한다면 여자가 이렇게 무너지리란 걸 일찍이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강한 사람이라고, 희망 없는 삶 속에서도 버틸 수 있다고 방심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나날이 지쳐간다는 것을 간과했다.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그녀를 언제까지나 절망으로부터 보호할 순 없었을 텐데.

청년은 소녀가 어떻게 되었을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언니가 홀린 듯 찾아간 곳까지 닿았다 결국 어떤 결말을 맞았을지. 왜 누구도 소녀를 찾지 못하는지, 왜 흔적조차 없는 것인지는 조금이라도 소녀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여자 또한 어느 정도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동생에게 닥쳤을지도 모를 최악의 결말을.

운 좋게 도망쳤다면 모를까, 끝까지 붙들려 있었다면 소녀는 재료로 쓰였을 것이다. 끔찍한 실험에 동원되어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녹아내렸으리라. 지금껏 그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세상 어디서도 소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찾아내지 않으면, 찾으려 노력하지 않으면 루리도 점점 흐려질 것 같아서 무서워.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그랬다고. 하지만 루리는 그래선 안 돼. 지켜주지 못한 사람을 흐려지도록 내버려두면…….”

다음에는 같이 아카데미아로 가자. 내가 안내할게. 루리 양이 있었을 곳을 다 돌아보는 거야.”

내가 참지 못하게 된 때서야 내 말을 들어주는구나.”

네가 이렇게까지 지쳐있을 줄은 몰랐어. 이젠 내가 계속 도울 테니까, 쿠로사키, 제발.”

이대로라면 오래지 않아 그녀가 쓰러질 것만 같다. 전장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무너질 것 같아 청년은 두렵다. 여자가 전장에서 유일하게 건져낸 자신의 미래마저 내버리고,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 묻혀버리면 청년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황폐하게 만든 죄를 떠올리며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삶은 실수였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황급히 그녀를 달래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제발, 포기하지 마.”

나는 루리를 포기 안 해.”

그래야지. 아직 끝난 건 없잖아. 가능성도 희망도 네가 붙잡고만 있으면 계속 살아있는 거야.”

모두가 포기할 때까지 놓치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이라고 버리겠어?”

너는 이제 내가 과거를 청산할 기회를 주는 거야. 내가 비겁한 인간인 걸 알잖아. 네 앞에 무결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너를 도와서……

청년이 그녀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매달린 것은, 동생의 생존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 진실을 알면, 자신의 성역이었던 것이 짓밟혀 부서졌다는 것을 알면. 그녀는 아마 그대로 죽어버릴 것이다. 아니, 삶을 이어가지 않으려 들 것이다. 그러니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그녀 자매에겐 수많은 거짓말을 해왔는데.

청년은 그녀를 가짜 희망에 매달리게 하는 것으로 그녀의 삶을 이을 것이다. 이번에는 자신이 그녀를 구조해, 세상에 묶어둘 것이다. 그녀가 동생을 포기하지 못해 그를 살려둔 것처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소녀가 죽었어야 할 청년을 살리더니 이번에는 언니가 살 수 있도록 하는 셈이다. 청년이나 여자나 전쟁을 거친 끝에 스스로 살아갈 이유를 잃어, 그런 것에 기대야만 버틸 수 있는 인간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하면 너도, 나도 행복해질 수 있어. 끝까지 갈 거지, 쿠로사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핏기 없는 얼굴에 순진한 웃음이 번졌다. 그녀에게는 드문 표정에, 언뜻 기억 속 소녀가 겹쳐진다. 자신을 위해 상대를 속인다는 것은 청년이 소녀에게 친분을 쌓으려 접근했을 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이번의 청년은 어떤 상황이 닥쳐도 여자를 끝까지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혹 그녀가 버티지 못하고 추락하더라도 자신이 함께이도록. 그래서 청년은 이제 스스로마저 속이기로 한다. 자신이 아는 절망적인 현실을 잊고 그녀와 같은 희망을 믿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