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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슌ts] 해부

현소야 2015. 6. 14. 02:16

 

사내는 우수한 사람이었다. 타고나기를 영민했고 완벽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어린 나이에 기업을 짊어지고도 크나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다. 잘 교육받은 덕인지 예의가 몸에 배어있었고 부모의 유산으로 외모 또한 준수했다. 시기하는 이들이 그를 헐뜯으려 해도 뛰어난 자기관리 덕분에 흠결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완벽한 인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매료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진 것도, 이룬 것도 너무 많은 사람이라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선망하면서도 어려워하며 언제나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곤 했다.

그의 곁에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한 사내였으나 곁에 있는 자는 가족이나 오래 전부터 그를 모셔온 수하 정도에 그쳤다. 그의 위치를 고려하면 그에 어울리는 연인이나 파트너가 있을 법도 했으나 그 자리가 공식적으로 채워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타인을 허락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껏 받아들이지 않은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이가 차면 찰수록 사내의 주변에서는 그가 비워둔 자리를 채우려는 시도가 늘어갔다. 사내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사람을 대하는 데 능숙한 사내이니만큼 관계는 빠르게 발전했다. 그러나 순조롭게 흘러가던 관계는 어느 시점에서 꼭 깨지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 문제인지는 몰랐다. 상대는 입을 다물었고 사내는 제 부족함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서나 잠깐 흘렀다가 사그라졌다. 사내는 능숙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실패를 쉽게 덮었기에.

그의 공식적인 파트너 자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비어있었다.

여자는 사내의 손에 이끌려 회사 건물로 들어섰다. 도시의 중심부에 당당하게 치솟은 건물은 회사의 위세를 보여줌과 동시에 보는 이를 압도시키는 위력이 있었다. 이 도시는 그의 영지나 마찬가지. 그의 아버지인 창업주 대부터 도시에 자리 잡은 회사는 빠르게 도시를 잠식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이 화려하고 안온한 도시를 가꿔온 것은 회사였으며 보존하는 것 또한 회사였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사내가 있다 여자는 사내가 이곳의 왕이라고 생각했다. 이 도시에 근거하여 제 백성을 부리며 환호 속에서 군림하는 젊은 왕. 이곳 마이아미는 내게 특별한 곳이죠. 사내가 종종 자랑스레 던지는 말도 결국 이곳이 그가 다스리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이곳 사람들에게 사내가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지는지 여자는 안다. 시장이 있음에도 그들 일가는 마치 왕가처럼 이곳을 알게 모르게 통치하고 있다. 너무도 당연하게, 원래 그래야 하는 양. 도시의 곳곳에는 그들 일가의 손길이 닿아있다. 도시의 발전은 일가의 발전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었다.

새삼스레 여자는 사내가 무엇을 일궈왔는지 느낀다. 아버지 대부터 터를 닦아 그가 완성시킨 그의 국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질서에 젖어든 이곳의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채 서른도 되지 않은 사내가 이룬 것이라니 조금 섬뜩할 지경이었다. 그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언제나 먼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한사람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때로는 그의 지나친 영민함과 천재성이 두려워진다. 그는 너무 높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무슨 생각을 하죠?”

최상층에 당도한 사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강 얼버무린다. 사내의 시선이 닿았다 떨어졌다. 사내의 눈은 때로 상대를 해부하는 것 같아서 여자는 소름이 끼쳤다. 그와 마주하고 있으면 실험실의 표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를 닮았다. 그 날카로운 시선은 단숨에 약점을 꿰뚫어보고 상대를 바로 낚아채는 것이다.

당신에게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화사한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의 일가가 공들여 가꿔온 이곳에서는 곳곳에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이 도시는 그 자체로 그들 일가의 거대한 왕궁과도 같았다. 여자는 사내가 이곳을 애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온 터전으로서, 그리고 자신이 다스려왔고 앞으로도 다스릴 영지로서.

아름답군요.”

내가 왜 당신에게 이곳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이 좋아하는 장소이기 때문인가요?”

틀린 건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죠.”

사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함께 커튼이 창을 가렸다. 그의 아름다운 영지는 여자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죠. 힌트가 될까요?”

마이아미가 당신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되리라는 뜻인가요?”

바로 맞혔어요.”

내가 당신을 이해하길 바라나요?”

그래야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요.”

그들이 만난 것은 그렇게 오래지 않았다. 사내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익히 들은 여자였으나 그들 사이의 거리는 멀고도 멀었다. 처음에는 먼발치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서히 현실로 다가왔고 지금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죠?”

내가 시작된 곳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군요. 내가 지키고 투쟁한 곳.”

투쟁. 이 단정하고 침착한 사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 단어에서 여자는 해묵은 기억을 꺼낸다. 몇 년 전, 사내가 아직 소년이라고 불릴 적의 이야기. 침략군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겠노라 호언하며 떠났던 그와 그를 따르는 전사들. 그리고 그는 결국 승리하여 제 말을 지켰다.

여자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그렇듯 단편적인 정보일 뿐이다. 그녀에게 사내는 언제나 저 먼 곳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어요. 그가 자주 반복하는 말은 분명 거리감을 해소하려는 노력이리라. 그러나 여자는 때로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러한 행동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관계란 서로에 대해 아는 만큼 돈독해지는 법. 거기에 연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의 관계라면 더더욱 그런 노력이 필요하리라.

그럼에도 여자는 회의감에 사로잡힌다. 그러한 행동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혹은 그보다 더욱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다. 이 관계가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고. 계속 이어지는 사내의 말을 들으며 여자는 이번에도 같은 의문을 던진다.

집중하지 않고 있군요.”

느닷없이 날아든 말에 여자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생각에 빠져 그의 말을 일부 놓친 모양이었다. 중간에 답을 했던 기억은 있지만 대화의 내용을 떠올려보라 하면 아무것도 건져낼 수 없었다. 영민한 그가 그런 기색을 놓칠 리 없다. 여자는 사내에게 약점을 잡힌 기분에 어쩐지 겁이 났다.

,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아직도 내가 불편한가요?”

사내의 말은 좀 더 깊은 곳을,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은 분명 자신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오히려 여자가 따져 물을 것이 있었다. 사내와 함께한 이후로 언제나 느낀 것에 대해. 여자는 또렷한 목소리로 즉답했다.

그럴 수밖에요.”

무슨 뜻이죠?”

당신은 언제나 나를 보고 있지 않잖아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화려한 최상층이 일순 침묵에 휩싸였다.

 

*

 

여자는 사내의 시선이 언제나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선이 닿는 곳은 자신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연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주제에 사내는 언제나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차라리 그것이 제 주위의 다른 곳이었으면 나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에 대해 따져 물으면 그만이었다. 하다못해 질투할 수라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먼 곳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처럼.

그렇기에 여자는 사내와 가까워질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보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가까워지란 말인가. 관계를 더 이어가야 할 이유가 있는지조차 의문스러웠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보고 있지 않잖아요?”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날카로운 공격을, 사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받아쳤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당신은, 당신은 분명…….”

말문이 막힌 것은 여자 쪽이었다. 사내가 뻔뻔하리만큼 태연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사내를 더 공격할 수 없는 것은 여자의 판단이 순전히 그녀의 직감에 근거하고 있었던 탓이다.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저 사내를, 고작 직감 따위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여자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분했다. 사내는 분명히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 소홀했던 것으로 보인다면 미안합니다.”

공손한 어투, 흠결 없는 말. 여자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상대의 공격을 덤덤하게 받아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잘못을 쉬이 인정함으로써 상대가 더 공격할 여지를 없애버린다. 여자는 사내가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마저 완벽하다는 점이 때로 소름끼쳤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해두고 싶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 앞에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합니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

그것은 진심이었다. 사내는 오랜 경험으로,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의 교육으로 매순간 제 앞에 놓인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대할 때도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그녀 자체가 그에게 최우선이 아닐 수 있었지만 그녀와 함께할 때만큼은 그녀를 대하는 데 노력을 쏟는다. 그렇기에 아직껏 불신이 그득한 그녀의 눈이 자못 불쾌했다.

더 공격해온다 해도 방어할 방도는 있었으나, 여자는 지나치게 차분한 그의 태도에 오히려 질려버린 모양이었다. 사내는 여자가 제게서 벗어나 아무 말 없이 건물을 나서는 것을 그저 바라보았다. 떠나는 사람을 잡을 이유는 없었기에. 그의 차가운 눈에 여자의 앙상한 어깨가, 창백한 피부가, 부러질 듯 가는 몸이 비쳤다. 그 생기 없는 형상에 사내는 일순 움찔했다. 기묘한 기시감이 그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을 되짚어보면 언제나 한 유형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비쩍 마른, 생기 없는 여자. 의식하고 만난 것은 아니었으나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랬다. 사내는 제 일관적인 선택에 때로 소름이 끼쳤다. 사실, 만나는 것은 취향과 정반대의 사람들이었다. 그는 비쩍 마른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보다 건강해 보이고 활기 있는 쪽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사람을 만나는 건 어째서인가. 그녀들의 공통점은 그 이외엔 없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궁금해진다. 왜 하필 그녀들을 만나서 그녀들과 대화하고 가까워지게 되는가. 그리고 왜 언제나 같은 종말을 맞게 되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길이 없어 사내는 차라리 여자들을 해부하고 싶어진다. 메스로 조심스레 배를 갈라, 그녀들의 가장 깊은 곳까지 탐욕스레 훑어서, 노력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해소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날것인 그녀들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모든 의문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녀들에게 반복했던 가까워지고 싶다는 말은 그러한 충동을 잘 포장하여 세련되게 내민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의 머리를 열어보고 싶어진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여 그녀들과 함께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천재적인 판단력과 갈고 닦은 이성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세상에는 있었다. 사내는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그런 문제에 맞닥뜨린 것이다. 해소하고 싶다. 답을 찾고 싶다. 그렇기에 사내는 메스를 들고 여자를 해부하려 한다.

사내는 사람을 잘 판단하고 사소한 것으로도 쉽게 파헤치는 편이었으나 때로 흥미가 가는 사람들은 보다 면밀히 관찰하기 위하여 해부하곤 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때로는 그 주변인마저 마구 파헤쳐가며 연구대상에 대한 최종판단을 내리는 것. 해부라는 괴상한 단어로 요약되는 그 과정이야말로 그가 선택한 연구대상에 대한 가장 세밀한 관찰인 셈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기에 해부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껏 그가 해부한 자들은 겨우 둘.

하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소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내는 두 번째 연구대상에서 생각을 접었다. 그 자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도,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꺼리는 유형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실상 그 자를 해부한 것도 그답지 않게 격렬한 증오를 품었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두 번째 연구대상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자신이 해부할 세 번째 연구대상에 집중하기로 했다.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고 있는 여자. 그 생기 없는 여자에 대하여.

사내는 연구대상에 지독하게 몰입하는 사람이었다. 그 이후 그가 여자에게 몰두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자는 이전의 일로 여전히 거리감을 느끼는 모양이었으나 사내의 몰입에 서서히 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사내대로 여자에게 보다 집중하면서 조금씩 그녀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영민하고 당당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주장이 뚜렷한 유형이었다. 저와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까. 사내는 여자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힐 수 있었다. 알면 알수록 가까워진다. 오해는 옅어지고 이해는 깊어진다. 마침내 그들은 연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까워졌다.

여자는 몇 달 만에 같은 곳을 찾았다. 사내가 군림하는 건물의 최상층. 도시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던 곳에서, 싸늘하게 떠났던 곳에서 여자는 다시 사내를 만났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사내의 감정은 짐작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녀는 사내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어떤가요, 이곳은.”

여전히 아름다워요.”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얼굴은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예전과 같은 경계심은 비치지 않는다.

내가 왜 이 장소를 골랐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이 사랑하는 곳이 보이기 때문이겠죠.”

맞아요. 그러니 이곳에서라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여느 때처럼 덤덤하게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 열기가 그의 몸을 덮치고 있었던 탓이다. 그를 휩싼 근원 모를 열기는 그 순간 피어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말을 걸기 전, 아니, 그녀를 데려오기 전부터 저 깊은 곳에서 불길이 타오른 것이다. 처음 느껴보는 것에 사내는 아찔했다.

무엇이요?”

여자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순간 사내는 언제나 완벽하던 이성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 순간을 꿈꿔왔어요.”

열에 들뜬 얼굴로 사내는 여자에게 다가선다. 천천히, 그들은 가까워진다. 여자는 사내를 휩싼 열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다. 사내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가도. 그렇기에 그녀는 그 자리에 붙박여 사내를 기다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조급한 마음과는 달리 느릿하게 좁혀지는 거리.

마침내 사내는 여자 앞에 섰다. 안경 너머 그의 눈동자엔 여자의 모습만이 가득 비치고 있었다. 여자는 그에게서 지금껏 본 적 없는 짙은 열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도, 분명히.

기다리고 있었어. 지금까지, 내내.”

사내는 여자를 안고 키스했다. 그의 열기에 전염된 듯 여자는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사내는 집요하게 여자를 탐하며 그 속으로 무너졌다. 알싸한 향내, 질식할 것 같은 열기 속에서 사내는 입을 뗐다.

< >

그 순간 여자의 세상이 부서졌다.

 

*

 

당신은 최악이에요.

여자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냉랭한 말. 그것은 여자의 마음이 사내에게서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걸 알기에, 그는 자신을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한 마디도 던지지 못했다. 또 한 번의 실패. 원인을 파헤치려고 해도 파헤칠 근거가 없었다. 그때의 기억이 이상하게도 불분명했던 탓이다.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 꼭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워낸 것처럼, 그 부분만이 불완전하다.

관계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유가 궁금했다. 무엇이 그녀를 한순간에 바꿔놓았는가. 그에게서 돌아서기 전 여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녀를 덮친 것이 공포인지 혐오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의 어떤 행동에서 출발했는지 그는 짐작할 수 없었다. 잘 닦은 이성도 뛰어난 판단력도 그 상황에서는 무력했다.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로 고민하던 사내는 감시카메라를 떠올렸다. 사내가 군림하는 회사의 모든 곳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모든 사람의 행동을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기억은 이상하게도 불완전하지만 감시카메라마저 그때의 상황을 놓쳤을 리가 없었다. 사내는 수하를 통해 그 날의 감시카메라 영상을 손에 넣었다. 당시의 상황을 담은 영상을 재생하기 직전까지도 사내는 모든 가능성을 셈하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 여자와 함께 최상층에 당도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기억하고 있는 대화가 이어지고, 제 달뜬 얼굴이 비치고, 여자에게로 다가서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키스하는 모습도. 기억이 지워진 것은 바로 그 다음 장면이었다.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여자에게 던진 말.

[]

화면 속의 여자가 얼어붙었다. 화면 밖의 사내도 얼어붙었다.

그것은 그가 머릿속에서 지워낸 두 번째 연구대상의 이름이었다. 너무도 증오하여 낱낱이 해부하였고 그 이후로도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과거의 인물. 그녀를 해부했을 때 마주한 것은 목적밖에는 없었다. 내부의 모든 것을 들어낸 박제라도 된 것처럼 목적 외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것이 과연 사람인가. 사내는 그녀를 망령이라 칭했다.

몇 년이나 지난 지금, 그 망령이 자신에게 다시 찾아들었을 줄이야!

비로소 지금까지의 의문이 전부 해소된다. 첫째로 여자가 그에게 던졌던 말.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날카로운 공격. 둘째로 여자가 그에게 질려 떠난 이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유형으로 요약되는, 그가 만났던 여자들. 그 모든 것이 한낱 망령에서 비롯하였으니. 사내는 지금껏 만난 여자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그녀들의 공통점을 찾아 거슬러 오르면 그녀들의 원형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연구대상. 그 망령 같은 여자. 사내는 기억 속의 망령과 마주한다. 비쩍 마른 여자가 생기 없는 얼굴로 돌아보며 제 텅 빈 속을 사내에게 보이고 있었다.

결국 그가 만난 모든 여자는 모두 그녀의 대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사내는 그녀들을 보지 않고 그녀들의 원형을 보고 있었고 그녀들의 이름 대신 원형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진즉에 지워버렸다고 생각한 망령이 아직껏 살아 머릿속에서 활개치고 있었던 것인가. 우스운 현실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사내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증오하던 망령이 아직도 살아 숨쉬며, 더 나아가 제 삶마저 규정해버렸음을. 그 조악함을 경멸하면서도 결국 그녀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그것이 명백한 결론임에도 사내는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 따위에게서 자신이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메스를 쥐고 다시금 망령을 해부한다. 제 머릿속에서 활개치는 망령을 쫓아내고 그녀의 무력함을 증명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