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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슌ts] 모조 화석

현소야 2017. 11. 19. 15:31

 

눈앞에서 인간의 형체가 허물어졌다. 조금 전까지 움직였던 게 환각이었던 듯, 단숨에 윤곽이 무너지고 몸이 흐려진다.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는 것으로 사내는 자신이 불러낸 사람을 흩어버린다. 얼룩을 지워내는 것처럼 간단한 과정이었다. 그가 왼팔에 장착한 디스크에는 카드가 한 장. 환상을 가둔 카드를 일시적으로 현실로 만들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환상은 너무도 쉽게 실체를 갖는다. 형체와 감각과 무게까지. 기술을 통해 현실의 사물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조건을 갖추는데, 그럼에도 환상이었다. 지나치게 생생한 재현은 사람을 감탄하게 하는 동시에, 허망함을 안기는 데가 있었다.

사내가 사용한 실체화 시스템이 가장 넓게 뻗친 영역은 게임. 카드 속 몬스터로 겨루는 배틀게임은 실체화 시스템이 정교해지면서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시스템의 뿌리가 되는 기술을 만든 자의 아들로, 게임 회사를 경영하는 사내야말로 현 시점에서 시스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회사에서 새로 개발한 배틀용 디스크가 문제없이 작동하는 걸 확인한 사내는 그동안 사용한 적 없는 카드를 한 장 꺼내들었다. 조금 전에 쓴 것과 같은 종류의, 게임용 카드였다.

게임용 카드에는 원래 이름이 붙어있을뿐더러, 무엇을 가두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그림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환상의 사진을 찍어 넣는 것 같다고, 사내는 생각한다. 때문에 평범한 카드였다면 사내는 진즉, 자신이 쥔 것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경 너머의 눈은 카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단서도 얻어낼 수 없다. 카드의 이름은 모호하고, 본래 그림이 들어가야 했을 자리는 검게 비어있었으므로.

기획부에서 사장에게 시험용으로 올린 카드였다. 보통의 카드와는 기획부터가 다른, 특수한 것이라고 했다. 세상을 위해 움직였던 영웅을 선정해 그들을 모델로 제작한 카드. 게임용 카드의 형태를 빌려왔지만, 게임에선 아무런 기능도 갖지 못하는 기념품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 특이한 것이라면 모델이 된 자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는 것. 카드를 실체화하는 순간, ‘실제의 영웅과 만나는 것 같은 체험을 의도했으리라. 목소리도, 모습도, 담아내는 이미지도. 모든 것이 설정된 것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사내는 영웅을 가둔 카드에 흥미를 품었다.

아마 여기엔, 사내가 아는 사람의 모습이 가공되어 담겼을 것이다. 기획부에서 선정한 영웅들이 어떤 집단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짐작이 갔으니까. 한때 그가 지휘하는 대로 싸웠던 몇 명의 전사. 사내는 카드를 디스크에 장착하고, 환상을 실체로 바꾸었다. 자신의 옛 전사를 만나기 위하여. 카드에 담긴 사람이 형체를 갖추고, 점점 선명해지고, 그리고.

사내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하필, 죽은 사람이 환상으로 돌아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여자는 배틀용 디스크를 찬 모습으로 사내의 눈앞에 서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또래였다. 그로부터 십 년 가량 지났는데, 여자는 그때와 같은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다.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 카드 속 모습은 영웅의 이름을 얻었을 때로 설정되었다고 들었기는 하나, 그렇지 않아도 여자는 저 모습 그대로였을 것이다. 그녀는 사내와 만난 해에 죽었다. 사인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거짓말처럼 죽었다는 것만, 그것도 너무 늦게 전달받았을 뿐이다.

함께 뛰어든 전쟁이 끝나자 여자는 멀리 떨어진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그 후 그녀가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사내는 모른다. 전쟁에 삶이 잠식당했고, 결국 전쟁을 끝내는 게 삶의 목표가 된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끔찍한 일을 겪은 만큼 이전보단 나은 삶을 살길 바랐다. 언제나 흩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사람이라곤 했지만 그렇게 이른 종말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쿠로사키.”

조금 감상에 빠진 탓일까. 저도 모르게 여자의 이름을 흘리고 말았다. 여자는 불완전한 이름을 완성시켜 읊어준다.

쿠로사키, .”

그래. 알고 있어.”

열일곱 살의 여자는 서른 살에 가까워진 사내를 만난다. 함께한 시간이 있었지만 그녀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 비슷한 모습으로 빚어낸 환상에 오리지널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도, 오리지널이 이미 죽어 단절된 사람이라면.

기념 프로젝트의 대상이 되는 건 랜서즈일 거라고 생각했다. 차원전쟁을 끝낸 건 그들이었으니까. 모든 게 바라던 방향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재앙을 몰아냈어.”

랜서즈.”

그래. 익숙한 이름이겠지.”

과거 사내가 이끌었던 전사들을 부르는 말이었고, 여자가 구성원으로 합류했던 정예병의 이름이기도 했다. 이젠 낡은 유물이 된 이름에 사내는 희미하게 웃었다. 자연히 당시의 기억을 더듬게 된 사내를 방해한 것은 여자의 딱딱한 답이었다.

랜서즈는 아카바 레이지가 이끈 정예병. 아카데미아에 맞서 차원전쟁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지. 당시의 MCS 배틀로얄에서 살아남은 8명의 전사가 그 대상이 되었다.”

특정 키워드에 반응하도록 설정한 것인가.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카드임을 생각하면 놀라운 것도 아니다. 그들의 업적에 대한 설명을 심어두고, 관련된 키워드를 사람들이 꺼내면 영웅 본인의 목소리로 그에 대해 해설하도록 한다. 아직은 시험 단계이니만큼 어떤 키워드가 그녀를 움직이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 상품으로 출시될 때는 그에 대한 안내도 들어갈 것이다. 경영자인 사내의 머리는 한 번의 경험만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가공된 인간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안내 메시지처럼 흘러나온 여자의 말엔 크게 놀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여자가 꺼낸 이름은 사내를 흔들었다. 리더라고 꺼낸 이름은 사내의 것. 그녀는 자신이 속했던 집단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눈앞의 사용자가 바로 그때 자신을 이끌었던 사람임을 알지 못한다. 사내가 기억하는 그녀와 세상에서 상품으로 만들어낸 그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뻔히 알면서도 사내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다.

아카바 레이지는 어떤 인간이었지?”

랜서즈의 리더. 레오 코퍼레이션의 사장으로, 회사에서 주관하는 MCS을 통해 차원전쟁에 맞설 전사를 선발했다. 융합, 싱크로, 엑시즈, 펜듈럼의 4가지 소환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상대를 압도하는 듀얼이 특징이었어.”

그게 끝?”

여자는 이미 입을 꼭 닫고 있었다. 설정된 말이 끝났으므로, 더 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듯했다. 외모와 목소리를 그대로 재현하고, 그녀와 관련된 정보를 가공해 넣었다 해도 결국 타인이 파악한 그녀의 모습일 뿐이다. 세상에 남아있는 그녀는 이국에서 와 전쟁을 끝내려 싸운 전사의 이미지가 전부. 실제의 그녀는, 그녀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인간이었는지는 남아있지 않다.

사내가 마주하는 것은 그렇게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세상에서 미처 해석하지 못한 자아도, 그녀만의 영역도, 설정된 것 이상의 모습도 보여줄 수 없는, 껍질뿐인 그녀. 입력된 키워드를 아무리 던져도 그녀는 기록된 사실만을 이야기할 것이다. 감상이란 영역은 처음부터 갖지 못했으니까.

함께 싸웠다고 했지 않나.”

싸웠지.”

그런데 그게 끝?”

여자는 답을 할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인지 회피하려는 것인지 배틀용 디스크에 손을 가져갔다. 곧이어 사내의 눈앞에 여자가 과거 무기로 사용했던 기계 새가 모습을 드러내 파드득 날았다. 저런 기능까지 넣어두었던가. 기억 속의 인간을 그대로 꺼낸 것 같은 정교한 재현은, 조잡한 내면과 대조되어 괴상했다. 사내는 여자의 기계 새가 다시 환상으로 부서질 때서야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너와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지.”

차원전쟁에 대해서, 랜서즈와 레지스탕스에 대해.”

너에 대해서는?”

여자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카데미아는 차원통합을 내세우며 전쟁을 벌였고, 그에 희생된 것이 엑시즈 차원이었다. 나는 엑시즈의 생존자로서 레지스탕스가 되어 싸우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 스탠더드로 넘어갔어.”

그 후 랜서즈의 일원이 되어 차원을 넘나들다 아카데미아를 막아내고 전쟁을 끝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이군.”

나에 대해 듣고 싶은 것 아니었나?”

다 아는 사실에 대해서 들을 필요는 없지.”

그렇다면 그쪽이 정말 듣고 싶은 것이라면?”

랜서즈를 어떻게동료로 인정했는지, 전쟁을 끝냈을 때 무엇을느꼈는지, 네 디스크에서 카드화 기능을 빼지 않았다면 아카데미아에 무슨복수를 하려고 했는지. 그런 것들.”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본래의 그녀에게도 들은 적이 없는, 그래서 영영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버린 것들. 자신조차 들여다보지 못한 내면을 굳이 불완전한 카피에게 물은 건 조금 심술궂은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눈을 깜빡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텅 비어있었다.

그런 건.”

너무 어려운 질문이겠지. 이해해.”

무리한 것을 요구한 건 사실이었으므로, 사내는 달래듯이 말했다.

그런 것까지 상세하게 남아있진 않을 테니까.”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을까. 실재했던 사람의 가공된 이미지임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죽은 전사 본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어서, 사내는 조심스러워진다. 만일 후자라면, 그녀의 믿음에 맞춰주어야 했다. 전자라도 그녀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든, 그가 택해야 할 태도는 하나.

사내는 환상에 불과한 그녀를 실제처럼 대해주기로 한다. 이미 아는 사실을 입력된 대로 읊는 것을, 안내를 받는 것처럼 들어주기로 한다. 그렇게 하면 여자와 자연스럽게 함께할 수 있다.

그래서, 실망?”

아니. 그 정도는 아냐. 그냥 쉬운 이야기로 돌아가지. 전쟁의 이야기 같은 것.”

그럼에도 여자는 오리지널을 제법 흉내 낸 카피였고, 사내는 그녀에게 미처 풀어내지 못한 감정이 있었다. 환상이나마 그녀를 보고 싶었고, 뻔히 아는 사실이라도 그녀의 목소리로는 듣고 싶었다. 사내는 그녀가 답할 수 있는 쪽으로 이야기를 돌리며 그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준다. 그것으로 여자는 역할에 충실히, 설명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내용은 기계의 자동응답에 가까웠을지도 모르나 멀리서 보면 그것도 대화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 날부터 사내는 카드 속의 여자를 자주 불러내게 되었다. 재현의 한계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할 수 있는 대화는 한정적이고 내면은 너무 단조롭다. 그러나 그녀의 손을 잡으면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와 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살갗의 감촉이 있고, 손의 무게가 있다. 대화를 시도하면 기계음이 아닌, 실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기술과 데이터로 구성된 환상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그녀는 생생했다.

어차피 죽은 사람이었다. 완전한 재현 같은 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특정 면이라도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재현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혹은 그녀가 오리지널의 모든 면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편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공한 그녀의 이미지는 사내가 아는 그녀보다 밝아 보였다. 어린 나이에 침략을, 그로 인한 끔찍한 불행과 상실을 겪은 인간이 평범하게 살아가기란 어렵다. 재앙이란 사람에게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니. 사내가 만난 여자는 처음부터 지독하게 황폐한 인간이었다. 전장이란 극한의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불필요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온 것처럼.

그래서 일찍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를 지켜본 사람은 이야기했다. 너무 많은 것을 뜯어내면서까지, 전쟁을 끝내는 것만을 생각해서. 전쟁에 삶을 걸어버려서 전쟁의 종말과 함께 삶까지 끝나버린 것이라고. 사내는 함께하는 내내 단조로운 얼굴을 보여준 여자를 기억한다. 분노, 냉소, 그것도 아니면 무표정. 그녀는 적을 쓰러트리는 것 외에 미래에 대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재앙에서 빠져나오고 싶었을 텐데, 그녀의 삶은 재앙에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그러니, 새로 빚어낸 그녀는 그만큼 황폐한 사람이 아니길 바랐다. 진짜에게서 엿본 괴로운 것들까지 재현하길 바라진 않았다. 차라리 세상에서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대로, ‘세상을 위해 용감하게 싸운 전사의 모습만을 보는 것이 편했다. 실제의 인간을 재창조한 것임을 알기에, 실제를 기대하지 않는다. 실제를 외면하는 것이라도, 보기 편한 모습만을 보려는 안일한 습성이라 해도 사내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가 보여주지 않는 실제를 생각하면, 죽은 사람에 대한 감정이 선명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십여 년의 시간을 살아남아온 감정이란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이 남긴 파편일 뿐. 사내는 그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른다. 결국 평화 속에 살지 못한 사람에 대한 연민? 그녀를 좀 더 살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그것도 아니면 그녀의 불행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고집?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여자를 불러낼 때마다 던지는 말이었다. 답이 돌아오기 전까지 사내는 온갖 생각을 한다. 카드 속 환상에게 기억은 축적될까? 경험이 쌓여 더 깊은 답변을 할 수 있게 될까? 그녀는 그것이 매번 반복되는 질문임을 알까? 알 길은 없으나, 여자가 돌려주는 답변이란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사명. 전사로서의 삶. 그녀의 이야기에는 그녀를 마지막까지 갉아먹은 절망도, 성인이 되기 전에 닥친 죽음도 없다. 사내는 그것이 괴상했고, 다행스러웠고, 한편으론 찜찜하면서도 만족스러웠다.

왜 나에 대해 듣고 싶어?”

반복되던 질문에 언젠가 여자가 반문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지만, 하지 못할 질문도 아니었다.

너에게 듣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니까.”

어린 나이부터 어른의 모습을 덮어쓴 사람답게, 사내는 능숙하게 말을 꾸며낸다.

뭐가 다르지?”

본인에게서 듣느냐 타인에게서 듣느냐, 그런 차이지.”

내가 나를 명확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해?”

타인을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타인의 내면을 읽어낸다는 사람은 자신의 왜곡된 시각으로 타인을 해석하는 것에 불과해.”

그것은 사내가 여자에 대한 여러 기록을 굳이 찾아보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여자는 죽은 사람이기에 더욱 왜곡되기 쉽다. 이국 출신이기에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이미 특정한 이미지로 굳어졌기에, 그 외의 모습은 간과할 가능성도 있다. 지금 자신과 대화하는 그녀 또한 세상이 가공한 이미지로만 존재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는 본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가장 정확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겠지.”

결국, 나를 알고 싶다는 것?”

그래. 너를 알고 싶어.”

과거에 그랬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조금 더 이해하고, 그래서 조금 더 나은 처방을 하고, 조금 더 좋은 결말을 만들어주고, 조금 더. 조금 더. 의미 없는 가정은 자꾸만 뻗어나간다.

과거의 불완전한 모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내는 조금씩 그녀에게 마음을 주게 되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정의하지도 못할 감정 때문인지, 지나치게 생생하게 재현한 외면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녀에게 조금은 진짜를 기대했던 것인지. 어느 쪽이든 어리석었기에 사내는 이유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깊게 들어오긴 했으나, 한계를 인식하고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으면 그만이다. 내면은 정교하게 만들어지지 못했으니 어차피 언젠가는 본질을 똑바로 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사내였지만, 여자는 그의 예측을 너무 벗어난 존재였다.

어느 날 사내는 아무런 기대 없이 여자를 불러냈다. 언제나와 같은 질문을 던질 생각도 없었고, 정교한 재현을 감상할 계획도 없었다. 그녀를 배경처럼 두고서 자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던 일을 계속했을 뿐이다. 습관적으로 불러냈다가, 자신이 과도하게 그녀에 신경을 쓰고 있단 것을 떠올리고 경계하려 한 것이 그런 괴상한 상황을 만들었다.

사용자가 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 것일까. 여자는 사내의 책상에 걸터앉아 그의 서류를 뒤적거렸다. 사내의 주의를 돌리려는 것처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사내는 그녀가 바스락거리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움직이지는 않았다. 상대가 먼저 움직이길 바라는 것처럼 서로를 부르지 않는 시간이 이어지던 중, 사내가 먼저 여자를 의식한 행동을 보였다. 여자의 손이 껄끄러운 서류에 닿았을 때였다. 죽은 여자에 대한 내용을 담았던 것.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제 쪽으로 끌어왔다. 그녀에게 보여준다고 그녀가 그 내용을 해석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방치한다고 그녀가 무언가 영향을 받을 리도 없다. 그런데도, 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보는형태가 꺼림칙해서. 거부의 뜻을 드러냈음에도 서류에 시선을 두는 여자를 사내가 카드로 되돌리려고 할 때.

듀얼 몬스터즈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대.”

여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사내는 디스크에 가져가던 손을 멈췄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만들어진 것에도 자아는 있다는 것?”

아무래도 여자는 자신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흥미로운 사실이었지만, 사내는 그것보다는 여자가 던진 말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입력되었을 리 없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 내용마저 의미심장하다. 카드 속 환상에도, 정말로 자아가 있는 것인가. 만일, 설정된 모습 너머의 자아가 있다면. 자의라는 영역이 눈앞의 여자에게도 있다면.

기본은 이미 잡혀있다고 해도, 자신의 생각이 없는 건 아니거든. 유전자가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가 결국은 다른두 사람인 것처럼.”

흥미롭군.”

그러니까 차원전쟁의 정보 이외의 대화도, 할 수 있는 거야. ‘랜서즈 쿠로사키 슌이 전부는 아니니까.”

그러면서 지금까지 언제나 정해진 영역의 이야기만 했지.”

당신은 그것으로 만족했으니까.”

네가 말하는 너와 내가 기대하는 것은 다를 텐데.”

당신은 그 여자를 연민해?”

기습적인 질문이었다. ‘그 여자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모델이 된 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되살린다. 열일곱 살의 모습으로 고정된 여자에게, 열일곱 살로 죽어버린 사람이 겹쳐졌다. 사내는 답을 생각하지도 않고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나는.”

당신은 나를 볼 때면 비극을 읽는 것 같은 눈을 했어.”

그 여자는 불행했어. 누군가 그 삶으로 지독한 비극을 짜둔 것 같았지.”

불행했겠지만, 후회 같은 건 없었을 거야.”

너는 그 사람이 아니지 않나.”

하지만 나는 그때의 그 사람을 가지고 만들었으니까, 우리는 어느 정도 비슷한 걸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

그때?”

내가 어느 시점의 그 여자를 모델로 한 건지 알고 있잖아.”

여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은 사내를 달래려는 것 같기도 했고, 씁쓸한 사실을 덮으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처음 소환되었을 때 당신이 한 질문이 계속 머리에 남아있었어. 아카바 레이지는 어떤 인간이었냐고 물었지. 왜 그걸 듣고 싶었던 거야, 아카바 레이지?”

내내 품고 있었던 의문이 해소된다. 카드 속 환상에도 기억은 축적된다. 처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모든 경험을 기억할 줄 안다는 것. 사내가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는 것도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물론 여자의 질문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사내가 누구인지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도, 굳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데서 확신할 수 있다. 생각 이상의 모습을 확인하고 사내는 멍해진다.

내게서 무슨 답을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무엇으로 자신을 위안하고 싶었던 것인지.”

나를, 그러니까 자신의 삶에 존재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면.”

데이터는 들어갔으니까, 그건 당연한 거잖아. 인식은 할 줄 알아. ‘개인적으로답할 것이 없었을 뿐.”

하긴, ‘우리는 그 날이 처음이었나.”

나는 아카바 레이지는 알지만 당신은 몰라. 당신은 쿠로사키 슌은 알지만 나를 모르지. 똑같은 처지야.”

여자는 사내를 겪은 적은 없으므로, 데이터로 남은 그의 모습만을 안다. 사내는 과거의 전사는 기억하지만 눈앞의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는 알지 못한다. 둘 다, 반쪽만 알고 있었다. 정확하지 않은 이해를 가지고, 머리에 남은 것과는 다른 사람을 대한다. 휘청거리는 것이 당연했다.

서로를 오해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군.”

정확성을 바란다면 어차피 과거의 이야기밖에 못 해. 우리 머리에 박힌 이야기 말이야.”

그래서 입력된 이야기만 했던 건가. 그것밖에 할 줄 몰라서가 아니고.”

그나마 당신이 요구하는 그 이상은 너무 무리한 것이었잖아. 그건 가 답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당신이 그렇게나 그 여자를 원한다면, 차라리 정확한 모습만 보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사실이란 무엇보다 안전하지.”

그래서, 앞으로는 어쩔 건데? 오늘의 일을 잊어버릴 거야? 내가 당신과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다시 그 여자의 투영으로만 대할 생각?”

여자는 몇 마디의 말로 사내를 흔든다. 사내가 적당히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되살리고 약점을 건드리는 식으로.

바란다면 나도 당신이 알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어. 자신이 누군가의 카피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입력된 말만 하는 기계 같은 존재로. 그러면 당신은 편해지지 않겠어?”

그러지 않는다면?”

글쎄. 이런 애매한 모조품을 어쩔 생각인데?”

텁텁한 말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목소리였다. 죽은 여자는 자신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자신의 비극 따위는 사소한 일상인 것처럼 굴었다. 그것은 비극의 무게를 줄여주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를 더 참혹하게 만들곤 했다. 죽은 사람의 카피를 앞에 두고, 어리석게도 사내는 한순간 너는 이번에도라고 생각했다. 눈앞의 여자에게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확인한 때, 사내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깨달았다.

사내는 답을 얻자마자 카드를 디스크에서 꺼냈다. 장치와의 연결이 끊어지며, 시스템 속에서만 실체를 갖는 여자는 데이터로 허물어진다. 여자가 있던 곳에는 사람이 앉은 흔적이 선명하고, 그녀가 손을 댄 서류는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데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사람만 깔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허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확실한 소멸이 그때만은 사내에게 안도를 안겼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순식간에 흩어진 여자는 보지 못했으리라.

 

*

 

영웅을 재현한 기념 카드는 시험 단계에 회사 전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상품화야 진작 결정된 사안이었지만 기획부에서는 사장의 반응까지 확인하려는 눈치였다. 기능에 대한 평가라면 이미 아래단계에서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특별히 덧댈 것도 없거니와, 시험한다는 핑계로 여자를 불러내며 했던 일이 걸려 깊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내는 자신을 찾아 의견을 묻는 이에게 가벼운 감상 위주로 답했다. 지금껏 힘쓴 사람에게 포상이 될 법한, 적당히 좋은 이야기. 만족스런 답변이었는지, 찾아온 자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대의 영웅을 기억하는 데, 그들을 재현해낸 카드가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자신이 넘치는군.”

단순히 모습만 닮게 만든 게 아니라, 그들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카드에 구현해낸 그들의 특성은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말해줄 겁니다. 우리의 목적은 충분히 이룬 셈이에요.”

거기서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사내는 막 돌아가려는 사람에게 엉뚱한 말을 던졌다.

최근에 머리를 맴도는 말이 있어. 듀얼 몬스터즈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 어떻게 생각하나.”

흥미로운 주장이죠. 감상적이긴 합니다만. 질량을 가진 솔리드 비전의 개발로 몬스터의 재현이 너무 생생해진 시대니까요. 거의 인간처럼 정교하게 움직이니 영혼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런 건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이 적당히 만들어낸 것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 아닐까요. 영혼까지 깃든다면, 그들이 자의로 움직이고 대항할 줄도 알 겁니다. 그 단계까지 가면 게임의 배틀에 내놓는 건 이미 무리죠.”

사내는 자아를 주장하던 환상을 떠올린다. 조잡한 바탕을 가지고도 사용자의 내면을 간단히 해부한 여자가 아른거렸다. 그러면 그 괴상한 존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그녀는 어떻게 자신을 읽어내고, 자신과 무슨 대화를 한 것인지. 죽은 사람을 본뜬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사장에게 상대는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혹시, 그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게 쿠로사키의 카드 때문이었습니까?”

그래. 시험하다 보니 조금 신경이 쓰여서.”

보통의 사람만큼 자연스러운 대화는 무리였을 텐데요.”

그 여자는 너무 비현실적인 인간이었으니 비현실적인 모습이 실제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지.”

그녀에게 남은 감상이라도 있다면.”

없어. 죽은 사람이니, 품은 게 있다 해도 의미가 없고.”

사내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끊어냈다. 그것은 지금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온 감정을 숨기는 것이면서, 바로 여기서 감정을 꺼트리려는 것이기도 했다. 죽은 사람을 향한 것을 털어내는 일은, 여자가 앞으로의 길을 물었던 날 이미 결심한 방향이었다. 단절된 사람에겐 아무것도 품지 않는 것이 좋았다. 돌려줄 수 없는 감정은 쌓이는 것밖에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사내는 그 후로 카드 속의 여자를 다시는 불러내지 않았다. 허상이라도 마주하다 보면 죽은 사람에 대한 감정을 연장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유물을 다루는 방식이어야 했다. 보존하되, 유리장 바깥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생명을 불어넣지 않고, ‘과거의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그의 머릿속 여자는 조금씩 빛이 바랬다. 그녀가 흐려지는 대신, 사내의 현재가 선명해졌다. 새로운 것들이 그녀의 공백을 채워갔다.

다만 사내는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고집했다. 죽은 사람을 본뜬 카드를 자신의 덱에 끼워둔 것이다. 게임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카드를, 카드 한 장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덱에 넣어 다니는 이유를 그는 끝까지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