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조] 질투의 짐승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소년을 맞이한 것은 한 통의 편지였다. 봉투에 적힌 것은 소년의 이름과, 그에게는 익숙한 발신자의 이름. 그와 쭉 친분을 유지해온 친우로부터 온 편지였다. 소년은 편지에 적힌 이름을 보자마자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앳된 얼굴에 들뜬 기색이 비친다. 보통은 편지를 주고받기보다 만나서 이야기하는 사이였지만, 소년과는 소속이 다른 친우가 그가 자리를 비운 새 편지를 남겨두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친우에게서 온 편지라는 점이 소년에게는 중요했다.
때문에 소년은 수상한 것을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봉투에 보이는 필체가, 자신의 이름을 적은 문장이 친우의 필체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것을. 찬찬히 생각하면 그건 상관의 필체였다는 것을. 물론 소년이 그걸 알아챘다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친우의 이름이 적힌 편지에 너무 들떠있었기 때문에. 소년은 봉투를 뜯고, 조심스레 손가락을 넣어, 안에 담긴 것을 꺼낸다. 무슨 말을 남기려 했을까?
온갖 상상은 내용물을 꺼내면서 걷혔다. 뜻밖의 것에 회색 눈이 둥그레졌다. 그가 꺼낸 것은 편지가 아니라, 카드. 그가 있는 곳에서 전투용으로 사용하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가둔 것. 그 안에 담긴 것은 사용자의 무기가 되어 싸워주는 몬스터일 수도 있고, 전투를 보조하는 함정일 수도 있고, 혹은. 소년은 마지막 가능성을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드문 경우였고, 친우가 보냈을 가능성이라면 셋 중 가장 낮았으므로.
그러나 소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빠르게 배제한 길이었다. 소년은 뽑았을 때 뒷면이었던 카드를 뒤집었고, 앞면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다음 순간 소년의 손에서 카드가 떨어졌다. 회색 눈이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소년은 카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카드에 인간의 영혼을 봉인하는 것. 그것은 ‘반역자’의 처형법.
카드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친우였다.
*
소년은 자신이 몸담은 곳에서 어린 나이에 요직을 꿰찬,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능력은 따라잡을 이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고 상부에 대한 충심은 한 가닥 의심도 불필요했다. 파격적인 간부 임명, 차근차근 쌓아가는 전공. 거기에 그에게 따라붙은 온갖 화려한 이야기까지. 소년은 그 자체로 눈에 띄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일부는 그를 부러워하고, 몇몇은 동경했으며, 많은 이들은 두려워했다. 우수하기에 모든 것을 쥘 수 있었지만, 너무 앞서가 동등하게 설 수 있는 자는 없다. 소년은 영광을 얻은 만큼 외로워야 했다.
악마 같은 자. 괴물. 소년을 비유하는 이름 또한 인간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과 소년 사이에는 쉽게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자칫 누구에게도 영영 이해받을 수 없었을지도 모를 소년은 다행히 하나, 그런 자신과 함께 설 수 있는 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역시 소년처럼 주목받은 존재인 건 아니었다. 지위 또한 평균 수준이었지 결코 소년만큼 위력적이지 못했다. 그런데도, 소년의 곁에 섰다. 그를 두려워하지도 동경하지도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악마도, 어린 간부도 아닌 친우로 대우했다. 동등하게 교류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났다는 것이, 소년에겐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소년보다 몇 살 위로, 역시나 이곳의 간부인 청년은 소속이 다른데도 소년과의 교류를 꾸준히 이어갔다. 특별히 챙겨주는 것은 아닌데, 잊을만하면 만나주었다. 소년에게 일부러 베푸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소년을 거부하는 일은 없다. ‘보통의 관계’에 목마른 소년에게는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사소한 이야기를 하고, 평범한 일을 함께한다. 평범할 수 없는 소년은 청년을 통해 비로소 평범함을 맛볼 수 있었다.
겉으로는 누가 봐도 뛰어난 소년이 특별할 것 없는 청년에 마음을 둬 함께해주는 것으로 비칠지 모르나, 실은 그 반대였다. 청년은 그곳에서 유일하게, 사람들 사이 섞일 수 없는 소년과 함께해주고 있었다. 소년이 청년에 애착을 품을 수밖에. 언젠가부터 청년은 소년에게 가족처럼 소중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소년의 삶에서 청년은 결코 잘라낼 수 없는 자. 청년의 삶에서 자신이 어떤지는 몰라도, 소년은 그가 언제나 자신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 기뻤다.
그래서 소년은 어떻게든 그를 자신의 영역에 두려고 노력했다. 그가 위험에 처하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방어막을 쳐주고, 그에게 좋지 않은 말이 떨어지면 앞장서 변호하려 했다. 친우에 대해서만은, 소년은 자신의 모든 논리를 떨쳐내도 좋았다. 그리고 친우의 어떤 것이든 용서해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더라도, 그가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고 해도, 자신에게서 돌아선다고 해도.
설령 반역을 꾀한다 해도 그의 편이 되어줄 수 있었는데.
소년은 다시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 속에 봉인된 자는 달라지지 않는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다. 소년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친우가 얌전히 갇혀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영혼이 봉인된 것뿐 죽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곳에선 영혼을 봉인한 자를 되돌리는 일이 없으므로 사실상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그것은 소년 또한 반역자 무리를 쓸어버리면서 수없이 반복한 처리였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반역자가 한 장의 카드로 변해 떨어질 때 소년은 아무것도, 한 가닥 희열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한 명의 ‘처형’은 이렇게나 소년을 흔든다. 그 자가 자신의 친우였다는 이유로.
처음 상황을 확인했을 때 소년의 머리를 가득 채운 것은, ‘왜’라는 하나의 의문이었다. 왜 그는 반역을 저질렀을까가 아니었다. 그런 것 따위 소년에겐 중요하지도 않았고, 사실이야 어떻든 그를 위해 싸워줄 생각이었으므로. 소년을 괴롭힌 것은 간결했다. 왜 내게 이런 모습으로 돌아왔을까. 그저 자신을 배반한 것이면, 안타까워도 용서할 수는 있었다. 반역자의 사상에 물든 것이라면 슬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년이 알기에 청년은 사상 같은 것에 매달릴 인간이 아니었다. 옳음을 추구하는 자도 아니다. 애초에 그는 ‘반역’을 꾀할 인간이 못 되었다. 그렇다면 왜 자신에게 이렇게 처참함을 안겨주는지.
숙청당한 자들이 반역자의 이름을 쓸 때가 있기도 하나, 청년은 이곳에서 성녀의 오빠란 이유로 어떤 교묘한 술수에도 걸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부에 불만을 표하는 일도 없다. 어쨌든 청년은 지금껏 자신이 맡은 일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고, 이곳의 질서를 거부한 적도 없었다. 상부를 위협할 세력을 갖기엔 그의 기반은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역자의 이름을 쓸 일이 없다.
이미 떨어진 처분을 뒤집을 수는 없으나, 최소한 무엇 때문인지는 알고 싶었다. 소년은 그의 반역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기로 결심했다. 그가 저지른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청년의 이름을 써 편지를 보낸 자에게 찾아간 소년이 친우의 반역에 대해 묻자,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성녀를 빼돌리려 했다, 고.
“성녀님을?”
소년은 어린 날부터 성소에서 지냈다는 성녀를 떠올린다. 아름다운 얼굴에 이유 모를 그림자가 드리워진, 제 또래의 소녀. 세상을 구원할 힘을 타고났다는 운명은 그녀의 삶을 묶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지워지고 책무만이 남아, 그녀의 모든 것이 세상을 위해 조정되었다. 그 오빠는, 소년의 친우는 언젠가부터 성녀를 닮은 얼굴에서 표정이 닳기 시작했다. 텅 빈 얼굴엔 피로만이 비쳤다. 아마도 세상을 위한 성녀의 의식이 다가오면서부터.
“그래. 그것도 랜서즈라는 잡병과 내통해서.”
그 의식에는, 성녀가 동원된다. 그녀 자신이 제물이 되어, 구원이란 미래를 온 세상에 안겨주는 것이다. 수장의 총신으로서 소년은 의식의 본질을 어렴풋이나마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자신은 어땠는가. 제 또래인 성녀를 연민했던가? 상부의 처사를 가혹하다 생각했던가? 아니. 소년은 그 숭고한 희생에 전율을 느꼈다. 곧 제 전부를 바칠 성녀에게 감사하기도 했다. 상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이어온 소년에게 상부의 모든 것은 옳았기 때문에.
그러나 청년은 어땠을까. 하나뿐인 동생이, 어린 나이에 자신을 희생하도록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성소에 들어온 후로 몇 년을 바깥도 보지 못한 동생이 그대로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면. 지위가 지위이니만큼 청년은 소년만큼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는 없다. 다만 성녀와의 만남을 통해 무언가 전해 들었을지도 모른다.
“불쌍해할 이유 없어. 놈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중한지 생각해야지.”
상관이 고개를 내저으며 차갑게 말할 때, 소년의 머리에는 친우의 말이 쟁쟁 울리고 있었다. 나 같은 건 성녀님께 방해지. 약점 같은 것일까. 생각해보면 청년은 자신이 성녀의 오빠라는 것을 한 번도 자랑스러워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껄끄러워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성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이 세 번째다. 쿠로사키가 성녀를 탈출시키려 한 것도.”
“처음이 아니었습니까.”
“이미 몇 년 전에 두 번이나 시도했었지.”
실패였지만. 덧붙여진 말엔 냉소가 비치는 듯했다.
“그래도 넘어가준 것은, 첫째론 성녀를 곧 찾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쿠로사키를 살려두는 게 이득이었기 때문이야.”
“슌을 살려두는 것으로 기대하신 효과라도?”
“쿠로사키 남매가 이곳, 아카데미아에 온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그때는 루리, 성녀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형제가 필요했어. 그 후로는 성녀를 묶어두기 위해서 놈이 필요했지. 성녀도 자신의 반항으로 오빠가 죽는 걸 바라진 않을 테니까.”
그제야 소년은 친우의 말을 명확하게 이해한다. 그가 스스로를 누이의 약점이라고 칭한 진짜 이유를. 그가 존재하는 한 성녀는 감히 상부에 대한 저항을 꿈꿀 수 없다. 성녀가 조금만 거슬리는 모습을 보이면 상부는 보복으로 오빠를 말려 죽일 테니까 ─ 성녀의 오빠라는 것은 친우에게, 동생을 구속하는 족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적과 내통했기 때문에 처분이 따랐군요.”
“그리고 이젠 성녀를 묶어둬야만 하는 이유도 많이 옅어졌으니까.”
“슌은 이미 가치를 잃었다는 뜻입니까.”
“그래. 그 남매에겐 안 된 일이지만.”
소년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의 친우를 생각한다. 성소를 찾았던 소년이 성녀에 대해 이야기하자, 창백한 얼굴에 잠깐 빛이 들었던.
“……강합니까?”
“무엇이?”
“랜서즈 말입니다.”
“랜서즈란 건 스탠더드에서 결성한, 아카데미아에 맞서기 위한 정예병. 놈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스탠더드의 수준이 어떠한지는 너도 잘 알겠지.”
하필 친우가 내통했다는 쪽은, 소년이 알기로 가장 세력이 약한 곳 출신의 병사였다. 너는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했을까. 그들이 네게 어떤 희망을 불어넣었던 것일까. 소년은 소리 없이 의문을 던졌다. 어차피 소리 내어 꺼내도 답을 들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과 내통할 수 있었다는 건 그들이 이미 아카데미아에 침투했다는 것이겠지요. 처분은 끝났습니까?”
“왜, 네가 처리할 생각인가?”
소년은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짧은 침묵을 끊고 상관이 답을 돌려주었다.
“더 중한 일이 있기에 아직 남겨두고 있는 것으로 안다. 혹시 하찮은 복수 같은 걸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반역은 누구도 감쌀 수 없는 죄. 사적인 감정으로 앞으로의 일을 그르치진 않을 거라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현명한 판단을 하리라 믿어.”
은근한 압박이 깔린 상관의 말에, 이미 목적은 이룬 소년이 공손히 경례하고 물러가려고 할 때였다. 돌아선 등에 나긋한 목소리가 꽂혔다.
“쿠로사키라는 놈은 어차피 네가 믿을 놈이 못 돼.”
“이젠 의미 없습니다.”
“아니. 빨리 정을 거두라는 뜻에서 말해주는 거다. 놈은 네 친구 같은 게 아냐.”
소년은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그가 알던 모든 것이 단숨에 부정된다.
“처음부터 쿠로사키 슌은 감시역이었어.”
*
생각해보면 청년은 그야말로 선물처럼 소년의 삶에 찾아들었다. 너무 자연스레 만났고, 너무 순조롭게 관계를 이어왔고, 신기할 정도로 소년을 잘 다루었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맞춰진 자가 아니었을까. 그와 만나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소년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청년이 계획적으로 접근했다고 하면 그 놀라운 것들을 전부 납득할 수 있게 되므로.
청년이 자신과 친분을 유지한 목적을 들은 후로, 소년의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상부가 자신을 감시하려 들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소년은 그것을 계속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그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을까? 자신을 감시 대상으로 보았을 뿐, 친우에 가깝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을까? 처형당한 자에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부는 상부대로 청년이 소년과 함께했던 것을 감시라는 임무 수행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취하고서, 상대가 믿고 털어놓은 것까지 낱낱이 모아 상부에 보고했다 ─ 청년이 한 일은 결국 그런 것인데도 원망은 생기지 않았다. 원망을 품기에 소년에게 그는 이미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다. 서로를 보는 시선은 달랐다 해도 소년이 청년과 함께했던 시간 자체가 변질되진 않는다. 게다가, 이제 와서 원망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에겐 어떤 감정도 돌려줄 수 없는데.
상관은 청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소년이 청년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나, 그렇게 되진 않았다. 소년은 줄곧 청년을 붙잡고 있었다.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자신을 이용했을 사람을. 자신에게 변명도 늘어놓을 수 없는 사람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소년이 그를 더 강하게 움켜쥐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변호도 할 수 없는 사람이어서, 돌아올 수 없게 되어서. 설령 자신을 제대로 긁어내기 위해서였다 해도, ‘친우’ 역을 충실히 했으므로.
그 결과 소년은 친우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본래 순수한 애정이었던 것은 친우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밝혀지면서 변질되어, 소년은 유령이나 다름없게 된 친우를 남김없이 틀어쥐려 들었다. 무엇 하나 잃을 수 없었다. 반역자라는 이유로 파기를 앞둔 그에 대한 기록을 온갖 방법으로 손에 넣었다. 그가 주었던 것은 보물처럼 숨겼다. 그의 모든 것은 비극으로 멋대로 해석했다. 당연히, 그의 영혼이 담긴 카드는 늘 지니고 다녔다. 자신을 줄곧 속인 자를 소년은 도리어 게걸스레 삼켰다.
종잇장에 영혼만 압축해 가두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다. 소년은 수많은 반역자를 쓸어버리며 수많은 이들의 영혼을 카드에 구겨 넣었다. 카드에 갇힌 자들의 모습은 둘 중 하나였다. 공포에 질려있거나,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거나. 간부였던 청년은 적과 내통한 일이 발각되면 무슨 처분을 받을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모습에 두려움은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고통은 겪지 않았을까. 친우를 꺼내볼 때마다 소년은 그의 얼굴에 담긴 것을 해석하려 애썼다. 그 얼굴에 깔린 것은 괴로움, 그리고. 그리고.
너는 무엇을 느꼈을까.
순간순간 바뀌는 것도 아니고 사진처럼 정지한 모습인데 청년의 얼굴에선 이상하게 감정을 읽어내기 어렵다. 그의 마지막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래도 홀가분할 텐데. 소년은 친우의 얼굴에 드리워진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아는 온갖 감정을 늘어놓으며 추측하고, 부정하고, 다시 추측해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거듭해도 만족스러운 답은 나오지 않는다.
청년의 처형을 기점으로 성녀의 배알에는 점점 제한이 걸리게 되었다. 성녀를 탈출시키기 위한 간부의 반역이 있었던 것과, 성녀가 몸을 던질 의식이 오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리라. 소년은 많지 않은 기회를 어떻게든 잡으려 했으나 소년이 청년에 감정이 남았을 것을 걱정했는지 번번이 가로막혔다. 다만 소년은 의식 준비로 수장을 만나는 성녀를 먼발치에서 볼 수는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은 처형 직전의 오빠처럼 표정이 거의 닳아있었다.
오빠의 일 때문인지, 운명 때문인지. 알 길은 없으나 소년은 제 또래의 성녀가 비로소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청년 대신 그녀를 운명에서 꺼낼 생각은 없었다. 세상을 위한 희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상부의 처사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청년은 형제이기에 어떻게든 상황을 바꾸려 했을지도 모르나, 타인인 소년에겐 그 모든 것을 뒤집을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 이유는 제법 심술궂은 것이었다.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청년의 소망을 이루어주고 싶지 않다는 것.
그는 왜 자신에게 괴로운 심정을 고백하지 않았을까. 왜 그는 계획을 꺼낸 일이 없을까. 왜 어렴풋이, 상부를 거스를지도 모른다는 암시조차 주지 않았을까. 친우 역은 충실하게 수행해도, 실제론 자신을 감시 대상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소년의 내부에서 솟아나는 것은 잔뜩 꼬인 감정이었다. 그 조악한 감정이 무엇인지 소년은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 아니면 자신이 성녀를 억압하는 상부의 편이어서? 고작 그것으로 처음 보는 잡병에 밀렸단 말인가?
나는 너를 위해서 무엇이든 짊어질 수 있었는데!
그러니 최소한 친우가 선택한 마지막 패는 소년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나은 족속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년은 자신을 지배하는 조악한 감정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감정이 날이 갈수록 덩치를 불렸다. 소년은 보지도 못한 적을 미워하고, 한편으론 질투했다. 혹은 다른 감정을 향했을지도 모른다. 끈적하고 흉측한 감정. 그것은 위험한 것인 만큼 소년의 내부에서 서서히 사멸해야 하는 것이었으나, 결국 말라붙기 전에 외부로 쏟아지고 말았다. 소년이, 친우가 내통했다는 적을 직접 만나게 됨으로써.
의식을 눈앞에 둔 날이었다. 성소에 침투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침입을 시도하는 자들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아 방치하고 있었던 외부의 군사. 최근 처형한 간부와 내통한, 먼 곳에서 온 정예병. 수장은 자신의 계획이 어긋나는 것은 참을 수 없었으므로, 총신을 불러다 그들을 처단하라고 명령했다. 어린 나이에 요직을 맡은 소년은 명령을 받고 친우를 파멸시킨 자들에게로 향했다. 그 등에, 복수를 우려하는 말이 꽂혔지만 소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 순간 소년을 지배한 것은 그들이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고 싶다는 열망이었으므로.
그래도 친우가 희망을 품을 수 있을 자들이었을까. 아니면 대강 짐작한 대로 잡병에 불과할까.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후자였다. 소년은 처음부터 지루했다. 정예병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평범한 자들이 그를 가로막았으므로. 감히 성소를 노린 자들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전사는커녕 급하게 끌어온 학생에 불과해, 평범한 전사에게도 휘둘릴 수준이었다. 상대하면 할수록 짜증이 치밀어, 소년은 마침내 그들에게 외쳤다.
“이 정도의 실력으로 성녀님을 노린 건가? 아니면 성소를 치는 것으로 혼란을 안기는 게 진짜 목적?”
“거기에 갇힌 루리라는 아이를 구하려 온 거다.”
“왜, 히어로 흉내라도 내고 싶어서?”
심술궂은 말에, 상대는 자못 진지하게 답했다.
“쿠로사키와 약속했으니까.”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친우는 처형당한 이후로 오히려 소년을 훨씬 쉽게 흔들고 있었다.
“자신은 아카데미아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하지만 동생은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고. 그러니 우리에게 맡기겠다고. 그렇게 말했어. 그 대가로 우리는 이곳의 정보를 여럿 넘겨받았고, 성소에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지.”
“그쪽은 이미 발각됐어. 반역으로 처형당했지. 너희가 무력하게 있는 사이에.”
“우리와 연락했을 때 쿠로사키는 이미, 처형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각오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자신을 처리하는 것으로 상부가 방심하게 할 수 있으면 나쁘지 않다고, 체념한 것 같았지.”
그때 소년의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영혼이 갇혀버린 친우의 마지막 모습에서 읽어내지 못했던 감정. 괴로움 이외의 무언가. 소년이 아는 감정으론 결국 담아내지 못했던 것. 소년은 겨우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그것은, 분명. 해방감.
그 순간 소년은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왜 그는 그 순간에, 자신의 최후에 해방감을 느꼈던 것인지. 왜 후회도 무엇도 아닌 그렇게 깔끔한 감정이었는지. 저와 함께했던 시간이 있던 삶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는지. 그래서 저항의 시도도 없었던 것인지. 밀려드는 것이 소년의 머리를 가득 메웠다. 생각의 급류는 소년을 하나의 감정에 몰아넣었다.
“너는 틀렸어! 틀렸다고!”
소년은 소리치면서 자신의 무기인 드래곤을 조종했다. 주인의 감정에 전염되었는지, 드래곤은 어느 때보다도 흉포하게 울었다.
“실패였다고. 잘못 판단했단 말이야. 완전히 틀렸어!”
괴로운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해방감을 드러냈던 것일까. 그는 처형당하는 것으로 현실에서 벗어나고, 동생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희망이란 얼마나 무의미한가. 청년이 그 때문에 선택한 것은 겨우 한 명, 소년 한 명에게 짓밟히는 잡병일 뿐인데.
“너는 나를 택해야 했어. 너를 구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는데.”
그런데 밀렸다. 자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자가, 결정적인 순간 그를 버렸다. 겨우 저런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나는 너를 꺼내줄 수 있었어!”
소년은 거의 절규하며 적을 짓밟았다. 처음부터 실력으론 상대도 되지 않았던 이들은 그의 폭주에 무력하게 무너졌다. 쓰러트릴 때마다 소년은 희열을 느꼈다. 아, 내 손으로 꺼트리는 거야. 네가 선택한 자들의 목숨을. 네가 구원받을 수 있을 가능성을. 쓰러진 적을 내려다보는 소년의 눈은 괴상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이미 그 모습은 광인에 가까웠다.
그리고 나를 배반한 네 희망을.
“네 실패는 정해져 있었던 거야.”
겨우 저런 것을 택해서. 마지막 순간 나를 놓아버려서. 소년의 내부에서 끓는 문장은 그러한 것이었다. 자신이 지금 무슨 감정으로 말을 쏟아내는지, 소년은 알지 못한다. 그저 격렬한 감정에 자신을 맡긴 채 그에 따라 움직일 뿐. 쓰러진 자들은 일시에 카드로 바뀌었다. 몇 장의 카드로 나뒹구는 반역자의 모습에 소년은 만족스레 웃었다. ‘처형’이 이렇게나 짜릿할 수 있었던가 ─ 이렇게 깊은 만족은 처음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처분도 당연한 벌이지.”
소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적에게 돌려준 것은 복수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복수라면 오히려 친우에게 한 셈이다. 그의 마지막 희망을 갈기갈기 찢는 것으로. 그가 구원받을 길을 영원히 차단하는 것으로. 그에게 선택받지 못한 자신이 그를 끝내 벌함으로써. 그 전까지 이를 세우던 친우에 대한 괴상한 집착은, 적에 대한 질투는, 그 순간에야 소년을 물어뜯는 것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