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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슌] 주인을 입력해주세요

현소야 2017. 6. 28. 21:21

  

청년은 빗속에서 정지해 있었다. 오른손에 우산을 들고도 펴는 일 없이, 맞기로 작정한 듯 꼼짝도 않고 빗줄기를 그대로 견디고 있을 뿐. 젖은 머리카락은 뺨에 찰싹 달라붙고, 코와 입술을 타고 빗물은 끝없이 떨어진다. 입은 옷은 계절에 맞지 않게 얇은 데다, 그마저도 오래도록 쏟아진 비로 전부 젖어있었다. 공간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도통 움직이지 않는 청년에게 지나가던 이들은 잠깐 시선을 주기도 했으나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우산을 보고는 그냥 지나쳤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몇 시간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정지한 청년에게 말을 건 것은 우연히 그를 발견한 사내. 한 명이었다. 차창 너머로 언뜻 비친 얼굴이 낯익었기 때문에, 잠깐 차를 세우고 다가갔을 뿐이었다. 자신이 짐작한 사람이 맞을 거라는 기대는 특별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자,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중충한 날에 비를 쫄딱 맞고 있는 것은 신경이 쓰여, 사내는 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군. 쿠로사키.”

청년은 과거에 잠깐, 사내와 일을 함께했던 사람이었다. 사내도 청년도 관계에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 상대의 힘이 필요해 함께했고, 일이 끝나서 헤어졌을 뿐. 공연히 감정을 덧붙이고 의미를 씌울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별다른 인사도 없이 헤어진 지 몇 달이었다. 먼 곳에서 온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사내는 그의 소식을 굳이 찾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연락이 끊겼는데, 지금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이름까지 부르며 말을 걸었는데도 청년은 답은 하지 않는다. 다만 아무것도 비추지 않던 금빛 눈을 사내에게로 돌려,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사내는 불쾌할 정도로 뜨거운 시선을 부러 무시하고, 자신의 우산을 씌우며 청년을 잡아끌었다. 만난 이상 이대로 돌려보내는 건 마음에 걸린다.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 빗속에서 그를 꺼내고, 몸이라도 녹이고 가도록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본래는 제법 힘이 센 청년인데, 이번엔 사내의 손에 싱거울 정도로 쉽게 끌려온다. 청년을 차까지 데려가는 과정은 순조로웠다.

찾아야 할 게 있다.”

청년이 입을 연 것은 먼저 차에 들어간 사내가 그에게 손짓했을 때였다. 목표가 종료돼 떠났던 먼 곳에 청년이 돌아온 이유는, 지금 그가 언급한 찾아야 할 것인 듯 했다.

이곳에 있나?”

여기, 스탠더드에서 감지할 수 있었어.”

좋아. 그럼 일단 회사에 함께 가지. 이대로 계속 비를 맞는 건 곤란하니까.”

그렇게 말한 사내가 기사를 재촉해 출발하려고 할 때까지도 청년은 차문 바로 앞에 멀거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사내의 말은 그에게 만족스러운 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깥의 청년에게 달래듯 덧붙였다.

찾도록 도와줄 테니, 먼저 회사에 가자고. 그럼 되겠지.”

청년은 그제야 사내의 곁에 앉았다. 펴지도 않고 젖어버린 우산이 청년의 손에서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핏기 없는 청년의 얼굴은 죽어가는 사람 같다. 오늘의 청년은 사내에겐 낯설다. 타인의 손이 살짝 닿기만 해도 날을 세우고, 판단이 빨라 어떤 상황에서도 신속하게 반응하는 청년답지가 않다. 오래 비를 맞아서 지친 것인가. 그게 아니면. 사내는 청년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 그를 덮친 끔찍한 불행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 헤어지기 직전에 청년은 완전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의 하나뿐인 동생은 오랜 싸움의 끝에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사실상 죽음에 가까운, 아니, 죽음 이상으로 비참한 결말이었다. 육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자아인지 사념인지 모를 것은 타인에게 깃들었다고 했다. 그 비현실적인 결말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전쟁 속에서 악귀처럼 싸워 살아남은 청년이라도, 어떤 절망도 버텨낸 청년이라도 거기까지 수용하긴 어려울 것이다. 적에게 납치당한 동생을 구해내기 위해 그가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

그런데도 결국 청년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는 죽은 것도 죽지 않은 것도 아닌 동생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회피하다, 혼자 고향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몇 달이었다. 충격적인 불행에 대한 회복을 기대하기에는 길지 않은 시간이다. 몇 달은커녕 몇 년, 어쩌면 평생을 들이더라도 그 불행이 낳은 상처는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사내의 곁에 있는 청년은 처참한 불행에 지배당해,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위협적인 전사도 사내의 무기도 아닌 청년은 차창 너머로 휙휙 바뀌는 풍경에 시선을 두며 물었다.

레오 코퍼레이션에는 왜 가줘야 하지? 얻어 타는 주제니 네 목적지까진 잠깐 들러야 한다고?”

옷을 갈아입고, 몸도 말리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듯하니 휴식도 취하고. 그 외에도 필요한 게 있다면 제공할 생각이다. 내 회사니까, 편의를 봐줄 수 있어.”

그런 건 필요 없는데.”

내 쪽이 필요해.”

마음의 빚을 남겨두고 싶지 않다. 그런 건가?”

마음대로 생각해.”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사내는 가벼이 받아친다. 청년의 시선이 잠깐 그에게 꽂히는가 했지만, 더 파헤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듯 청년은 대화를 대강 종료하려 들었다.

됐어. 나중에 찾는 걸 도와주기만 하면 돼. 네놈의 정보력을 이용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까.”

서로를 귀찮게 한다는 점에선 공평한 셈이지. 청년은 덧붙였다. 사내의 경험상, 청년이 주변의 성가신 요구를 들어줄 때는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그에게 꼭 필요할 때였다. , 그가 사내에게 어울려주면서까지 찾으려 하는 것은 그에게 무척 중요한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고향에 돌아간 후 이곳 사람들과 연락도 않았던 청년이 갑자기 이 먼 곳까지 움직였다는 것까지 겹쳐, 사내는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네가 찾는다는 건?”

루리.”

하필 청년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이제 찾을 수 없게 된 동생의 이름이었다. 잠깐 얼어붙었던 사내는 자신이 들은 것을 재확인하고서야 겨우 입을 뗐다.

쿠로사키. 네 동생은.”

루리의 기척을 따라 스탠더드에 왔어. 제대로 추적하려 했을 때 신호가 끊어졌지만, 마지막으로 감지한 곳은 기억하고 있으니 그 주변을 돌면서 찾아볼 생각이다.”

그러나 청년의 말은 제법 희망적이다. 그것이 사내를 괴롭게 했다. 어쩌면 청년은 최악의 절망을 부정하기 위해 동생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꾸며내고 홀로 그것을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에게 늘어놓는 말은 그런 노력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절망을 인정하는 것보다야 엉성한 꿈에 갇혀있는 게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삶에 한 가닥 희망을 넣고 그걸 계속 쫓는 게 그나마 그가 버틸 수 있게 해줄 길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사내는 청년의 말을 끊어내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깨질 희망이라면 그가 거기 묶이기 전에 깨는 것이 후유증이 덜할 테니.

쿠로사키 루리는 돌아올 수 없다. 그건 네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냉정한 선고에도 청년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사내의 짐작대로 아직 자신이 만들어낸 꿈에 취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동요하지 않기로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여느 때처럼 긁어낸 듯한 목소리로 물을 뿐.

없어? 세상에 없어? 없어서 내가 루리의 기척을 더 느낄 수 없게 된 건가?”

이번에 히이라기 유즈에게 듣기로는, 그녀 안에 남아있던 루리의 자아가 소멸한 것 같다고. 유감이지만 네 동생은 이미 세상에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 네가 정말로 동생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다면 아직 루리가 남아있을 때 이곳으로 왔다가 루리가 소멸해 방향을 잃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 같군.”

.”

청년은 눈을 내리깔았다. 청년의 두 눈에 언뜻 슬픔이 떠오른 것 같았다.

쿠로사키.”

위험하다. 그렇게 판단한 사내는 청년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그에게 다시 현실을 들이민 것이 자신이었으니, 그가 혹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도록, 지금의 상황을 잘 넘어갈 수 있도록 제대로 대처해야 했다. 좋지 않은 사태까지도 각오한 사내였지만 돌아온 말은 꿈결처럼 몽롱했다.

루리가 없구나. 그래서 머리가 비었구나. 갑자기 모든 게 정지한 것 같더니 루리의 신호가 끊겼어. 정말 끝이었군.”

거기서 사내는 생각을 수정했다. 어쩌면 청년은 모든 걸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동생의 기척을 감지할 수 없게 된 때부터, 동생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직감했을 수도 있다고. 그런데도 추적하려 들었던 것은 그만큼 동생이 그에게 절대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리라. 사내가 기억하는 청년은 언제나 모든 행동의 근거가 동생에 있는 사람이었다. 처절하게 싸워 살아남은 것도, 사내가 사는 먼 곳까지 온 것도, 사내와 함께 적에 맞선 것도. 따져보면 전부 동생을 위해서였다. 그런 인간이, 행동의 근거가 소멸했다는 사실이 확실시된다면 무엇을 느낄 것인가.

사내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신호에 막혀 차가 정지했다. 회사에 도착하기 전까지 청년과의 대화를 대강 마무리하려 했던 사내의 계획은 그 틈을 타 차문을 열고 빠져나가려 하는 청년 때문에 꼬여버렸다. 다행히 사내는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본능적으로 청년의 손목을 잡아채, 문에서 떼어낼 수 있었다. 시도가 가로막히자 청년은 이전과는 달리 날카롭게 반응했다.

내려줘. 너와 함께 갈 이유는 없어졌으니까.”

날이 선 목소리는 상대를 긴장하게 하는 데가 있었지만 몇 달 전까지 그런 그를 다뤄왔던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니, 아직은 안 돼. 설명이 필요하다.”

설명? 무슨 설명? 네게 해줄 설명이 뭐가 있다고.”

내리면 무얼 할 생각이지? 기척을 감지하기까지 했다는 동생이 소멸했다는 것을 확인한 지금 무얼 할 생각이냐고.”

사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청년의 손목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평소의 청년이라면 이런 것쯤 풀어버릴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의 청년은 너무 약했다. 몇 번 뿌리치려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사내에게 행동이 봉쇄되어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신호가 바뀌어 차가 출발할 때까지도 사내는 청년을 놓아주는 일이 없다. 놓아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덮친 탓이다.

말해봐. 무엇을 할 계획인지. 왜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는지.”

없어. 루리가 없다면 내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니까. 루리가 존재하지 않으면 알아서 죽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니 내가 직접 죽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까.”

무기력한 말에, 흩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목소리였다. 극한의 절망이 전장에서도 살아남은 청년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만 것 같다. 그것이 사내를 미치게 했다.

동생이 살아있지 않다면 죽음을 택할 거라고? 그것으로 동생과 함께하겠다고?”

사내의 목소리에 평소답지 않게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가 이토록 흥분을 감추지 않는 건 드문 일이었다.

루리가 없는 삶을 감당할 수 없어서 네 미래를 포기하겠다는 건가?”

물론 루리를 생각하면 앞으로 살아가는 게 더 끔찍할 지경이지만, 그에 앞선 게 있지.”

청년은 창백한 얼굴에 텅 빈 웃음을 걸치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어.”

 

*

 

사내는 팔짱을 낀 채 샤워실에서 새어나오는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겨우 회사에 데려온 청년을, 사내는 바로 샤워실에 밀어 넣었다. 그가 나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청년의 말은 곱씹을수록 괴상했다. 사내는 지금껏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저렇게 명확하게 이야기한 자를 거의 본 적 없거니와, 그 이유가 타인에 있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때문에 그저 동생의 결말에 대한 절망으로 삶의 의지를 포기한 것이라 생각했으나 청년은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나를 존재하게 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내 존재는 타인의 필요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그럼, 누군가 너를 필요로 한다면?]

[이제 그런 사람은 없어.]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

내내 담담하던 청년이 동요했다. 거기에 희망을 품고 사내는 다시 물었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있어줄 생각인가?]

청년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다만 그때부터는 얌전해져,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사내를 괴롭히는 일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차에서 뛰어내릴 것 같아 급히 댄 말에 불과했지만 효과는 있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회사에 들어설 때까지도 자신을 떨쳐내지 않는 청년을 보며 겨우 안도했다.

생각해보면 청년은 무엇이든 평균 이상은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떤 환경에 던져놔도 금세 적응했고, 생소한 것을 내밀어도 거짓말처럼 익혀, 곧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 정도로 학습능력이 좋았다. 덕분에 사내는 청년을 어떤 상황에서든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그에게는, 바라는 것을 명확히 설명하고 적당한 자극만 더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청년은 알아서 사내의 바람을 채워주었다.

타인에게 자신을 맞춰 생존해온 사람이라면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무엇이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존재에 맞게 적응하도록 설계되었을 테니까. 사내가 만난 청년은 처음부터, 자신을 필요로 했던 동생에 완벽하게 맞춰진 존재였을 것이다. 사고구조도, 성향도. 전부, 동생이 바라는 모습대로였으리라. 이것을 바라면 이것이 되고, 저것을 바라면 저것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대상이 사라진다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풀려나가야 할 것인가. 사내는 답할 수 없다.

다음은?”

사내는 날아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막 샤워실에서 나온 청년이 그가 준비해준 옷을 입고 얌전히 서 있었다. 사내의 옷은 체격차 때문인지 청년에게 조금 헐렁했지만,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음?”

무엇이 필요하냐고.”

그냥 앉아서 이야기하지.”

사내는 청년에게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청년은 입력하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얌전히 그의 말을 따랐다. 사내는 한참 말을 고르다가, 결국 근본적인 의문부터 꺼냈다.

너는 왜 타인을 필요로 하는 거지?”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청년의 답은 간결했다. 다만 사내의 얼굴에 여전히 의문이 떠오른 것을 알아챘는지, 이내 설명을 덧붙였다.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살도록 만들어졌어. 태어나서 누군가를 돕게 된 게 아니라, 돕기 위해 태어난 거라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대상에 대한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봉사.”

네가 봉사해야 한다는 대상이, 루리였나?”

그렇지. 나를 움직이게 만들고, 내 사상을 지배하는. 내 삶에 절대적인 존재.”

하지만 너는 루리의 오빠. 대상의 형제였지. 섬기는 자도 아니고, 대등한 관계인 형제에 그토록 헌신한다고?”

형제인 게 이상해? 나는 루리를 위해 만들어진 인데. 오빠라는 위치는 루리에게 신뢰를 얻고 언제나 루리의 곁에서 그 애를 도울 수 있도록 설정된 거야.”

형제이기에 봉사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봉사하기 위해 형제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마 청년의 말 뒤에 생략된 것은 그러한 이야기이리라. 사내는 여태껏 이토록 괴상한 설계를 본 적이 없었다. 성격이나 능력뿐만이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까지도 얼마든지 조정될 수 있다. 청년이 동생을 닮은 외모를 가진 것도, 사실은 동생이 그에게 기대하는 역할, ‘형제역을 제대로 충족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불쾌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꾸며낸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청년의 눈빛이며 목소리 등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청년의 본질이 그러한 것이라면, 이전에 보여준 동생에 대한 절대적인 애정이나 동생의 구출을 위해 발동한 비현실적인 힘도 그럼직해진다. 기척을 감지한다는 것도, 대상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타고난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전부 사실이라면, 청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저렇듯 비합리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사내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다.

내 삶은 나를 위한 게 아니니까, 나의 것이랄 게 없이 무엇이든 내가 위해야 할 대상을 위해 맞춰진다고.”

너는 그것으로 괜찮은지.”

괜찮고 말고는 내가 생각할 영역이 아냐. 어차피 그렇게 돌아가게 되어있는데.”

만일 대상이 사라진다면, 그에 맞춘 것들은.”

의미가 없게 되는 거지. 무엇 하나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너는 루리를 위해 설정한 모든 것을 전부 끝내버릴 생각이었나?”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삶엔 그가 없다. 그를 구성하는 것은 타인이 그에게 향한 기대뿐이다. 그 아이러니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은 청년이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었다. 기억을 파헤쳐보면, 그는 도통 자신에 대한 정보를 꺼내는 일이 없었다. 대신 자신이 덮어쓴 이름을 통해 자신을 이야기했다. 누군가의 오빠로, 누군가의 친우로, 누군가의 동료로. 어딘가의 주민으로. 청년만을 대표하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가 필요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내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

사내가 생각한 대로였다. 그는 명백히 타인의 요구에 기대서 존재해온 인간이었다. 바꿔 말하면, 그와 연결된 타인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는 자신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루리의 오빠, 유토의 친우. 레지스탕스. 랜서즈의 일원. 그런 이름들이 있어야 해. 하지만 내겐 아무것도 없지. 루리는 완전히 사라졌고 유토는 응답하지 않아. 레지스탕스도 랜서즈도 해체되었다. 이제 나는 무엇도 될 수 없어.”

새로운 것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있어줄 거냐는 질문에 부정하지 않았지.”

정말로 나를 필요로 해?”

청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에는 무언가 깊은 감정이 깃든 듯 했지만, 사내로서는 무엇인지 해석할 수 없었다. 사내는 자신만을 비추고 있는 청년의 눈을 한참이고 들여다보다 답했다.

그래. 네가 필요해.”

그렇게 답하지 않으면, 청년이라는 인간을 세상에 묶어둘 수 없다. 타인에 기대 채운 그의 내부는 오래지 않아 텅 비어버릴 것이고, 존재의 이유를 잃은 청년은 결국 세상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사내는 그런 결말은 바라지 않았다. 그의 삶은 그렇게 허망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되면 돼? 친구? 수하? 지지자? 아니면 다른 것?”

역시나 청년은 타인으로 정의된 인간이었다. 자신의 역할을 타인을 통해서 설정해온 인간이라는 것이, 그의 질문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그렇기에 사내는 이번만은 특정한 요구 없이, 그가 선택할 여지를 주기로 했다.

무엇이든. 네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모호한 답이었지만 청년은 만족한 듯했다. 그는 더 묻는 일 없이 수용하고, 사내가 내어준 방으로 돌아갔다.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자를 잃은 그는, 이곳에서 새롭게 필요를 얻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사내는 청년을 겪었던 회사 사람들에게 그의 복귀를 알리고, 그의 자리를 회사 내에 적당히 만들어두었다.

그가 정말로 무엇이든 될 수 있도록.

 

*

 

깨어났을 때 사내는 자신의 공간이 마음에 들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년의 솜씨였다. 사내가 중대한 선택을 해야 했을 때는 청년이 곁에서 그가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끝까지 의견을 들어주었다. 식사 시간에는 가벼운 이야기를 하며 사내가 즐겁게 식사를 마치게 했다. 회사에 온 후로 청년은 사내의 시선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튀어나왔고, 사내를 위해 무엇이든 했다. 그런 청년에게 고마움을 느끼긴 했지만, 한동안 그의 도움을 받은 사내는 문득 자신이 받는 것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너는 무엇이 되기로 한 거지.”

청년에게 질문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무슨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 사내의 무엇이 되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청년은 온갖 영역에서 사내의 필요를 채워주었으므로.

무엇이든 되라고 하지 않았나?”

그야 그랬지만.”

그래서 무엇이든되기로 했는데.”

청년은 명랑하게 답했다. 사내는 그의 말을 머릿속에서 다시 굴려보고서야 이해했다. 무엇이든 되어달라고 했기에, 가능한 모든 것이 되었다는 것을. 무엇을 선택해도 좋다는 말을 그렇게 해석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특정한 이름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년이 어떤 역할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사내는 그의 미래를 지켜보고 싶었다. 타인을 위해서만 살아온 그가 이른 나이에 침몰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사내는, 청년이 자신의 삶에 모든 방식으로 침투하는 게 다행스러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청년은 사내의 삶을 잠식했다. 사내는 청년의 도움을 받았고 청년의 위로를 들었고 청년의 협력을 얻었고 청년의 조언을 신뢰했다. 청년은 그에게 친구였고 수하였고 지지자였다. 혹은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청년은 사내에게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으니. 다만 사내 역시 청년의 삶을 잠식하게 되었다. 청년의 행동은 모두 한 사람, 자신을 필요로 하는 대상인 사내에게 근거하고 있었으므로. 따라서 청년은 과거 동생에게 그랬듯 사내에게 헌신했고 그에게 절대적인 애정을 보여주었다. 사내와는 한때 계약만으로 함께한 냉랭한 사이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새 세상에서도 청년은 사내의 사람이 되어있었다. 사내를 만나는 이들은 그의 뒤에 따라붙은 청년을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청년의 놀라운 헌신을 깨달으면 칭찬을 건넸다. 그러면 사내는 은근한 기쁨을 안으며 동조했다.

. 물론, 그는 제게 최고의 파트너죠.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이니까. 자신의 바람이 그를 그렇게 적응시켰으니까. 사내는 자신만이 아는 사실을 숨기고, 자신에게 모든 관계로 다가오는 청년을 세상에 화려하게 소개했다. 청년은 그럴 때마다 사내의 곁에서, 사내를 가장 빛낼 방식으로 행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