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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슌] 미래의 끈

현소야 2017. 1. 31. 16:18

 

포장을 뜯은 약을 왼손에 쏟는다. 청년은 손에 올려진 것을 내려다보는 일도 없이 입 안에 털어넣고 삼켰다. 수 년 먹어온 약은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이제 청년은 물 한 모금 없이 바로 약을 삼킨다. 매일 몸속으로 들어가는 약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떤 효과를 갖는지 청년은 모른다. 설명을 듣긴 했으나 이미 수 년 전이다. 누워만 있던 처지에서 벗어나 그래도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 가깝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단 것에 들떠, 의사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마, 특별히 더 낫게 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 약을 먹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청년의 몸에는 변화가 없으므로. 간신히 현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혹은 효과가 없는 것이어도 관계없었다. 청년에게 약이란 삶에서 뺄 수 없는 것일 뿐이다.

사람이 하루에 몇 번 식사를 하듯, 청년에게 약을 먹는 것은 정해진 생활 중 하나였다. 평생 가져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점도, 일과를 닮았다. 소년기에 지나치게 갉아먹은 탓에 황폐해진 몸은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누구도 그렇게 선고하지 않았으나, 그 망가진 몸을 안고 살아가는 청년은 안다. 복구할 수 있는 시점을 넘겨버렸다. 조금 나아질 수는 있어도 건강해질 수는 없다. 청년은 자신의 몸이 말라붙은 것이 아니라 타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물어 말라붙은 꽃은 다시 피어날 수 있어도, 타다 만 나무가 다시 생명을 얻을 수는 없다. 후유증은 평생 안고 가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이곳에서 청년이 평생 안고 살아야 할 후유증이며 그의 망가졌던 몸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매일 삼키는 약도 대부분 가벼운 영양제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청년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가 한손에 꼽을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지낸 것이야 수 년 되었지만,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을 시기가 그 절반은 넘을 것이다. 애초에 먼 곳에서 온 청년인 데다 한동안 청년에 대한 정보는 협력자 측에서 의도적으로 숨겨, 공개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이 당연했다. 하나 더 사람들이 청년의 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청년을 괴롭히는 것이 내상이라는 것이리라. 외상은 눈에 띄나 내상은 아무리 곪아가도 그 대상이 아니고서는 알 길이 없으므로.

많지 않은 나이에 이미 제 삶을 점령한 내상에 대해 얼마든 타인에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평생 낫지 않을 몸을 안고 평생 약을 먹으며 살아가야 하는 유쾌하지 않은 처지에, 연민하는 사람도 그를 배려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한 번도 건강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어차피 크게 나아질 수도 없는 것. 평생을 짊어져야 할 것이면 자신과 함께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나았다. 예부터 청년은 체념이 빠르고 어디에도 쉽게 적응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청년은 지금의 처지가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나쁜 몸으로 하루하루 버틴 날이 얼마나 길었는가. 일상 같은 건 바라지도 못할 시기였다. 그 시간을 넘어, 이제는 평범한 일상을 흉내 내는 정도에까진 왔다. 결함 있는 몸이어도 청년은 큰 불만 없이 안고 갈 수 있었다.

청년은 오랜 시간 머물렀던 병실을 기억한다. 깨끗하고 넓은 공간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말끔한 상자에 갇힌 것만 같았다. 치료를 위해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는데도 그들에게 정을 붙인 기억은 없다. 그들은 언제나 약과 함께 왔다. 주삿바늘을 통해 약물이 들어오면 오래지 않아 의식은 끊어졌고, 언제인지도 모를 시간에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때는 미래 같은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영영 그 상자 같은 공간에 갇혀 깨어나고 잠들기만 반복해야 할 줄 알았다. 다행히도 어느 정도 회복해 그곳에서 나온 후 가장 기뻤던 것은 무언가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외출을 할 수 있었고, 타인에게 의존했던 일도 서툴게나마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상태가 안정되었을 때부터는 일을 찾았다.

그가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일은, 무엇이든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이제 청년은 매일 회사에 나간다. 자신의 자리에서 무언가 성과를 낼 때, 청년은 타인의 몇 배로 기뻐한다. 그것은 더 이상 무력하게 버티기만 하지 않는다는 증명이기 때문에.

“MCS 시즌이라 회사가 꽤 바쁘군.”

약을 삼킨 후 여느 때처럼 자신의 일에 열중하던 청년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선임이 말을 걸어온 것이다. 그들이 몸담은 곳은 본래도 규모가 커 빠르게 돌아가는 곳이지만, 요즘은 사원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바빠졌다. 회사가 주관하는 대회가 곧 개막하기 때문이었다. 도시 전체가 주목하는 대회인 만큼 회사는 아주 사소한 데까지 신경 쓰고 있었다. 연일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도 마이아미가 활기를 얻어 좋군요.”

벌써부터 관광을 겸해 온 외부인도 꽤 되는 모양이야. 매년 돌아오는 시즌인데도 그때마다 워낙 북적대니 낯설다니까.”

해가 갈수록 참가자도 늘고 그만큼 듀얼리스트도 발전하니 관객이 늘 수밖에요.”

그렇지, 쿠로사키도 예전에 MCS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면서?”

서류를 넘기던 청년의 손이 멎었다. 자신도 기억 한 켠에 밀어두었던 옛 일을 타인이 꺼낼 줄은 몰랐다. 하나의 키워드만으로도 생각은 과거로 끝없이 뻗어나간다. 그에 먹혀버릴까 두려워, 청년은 애써 생각을 끊어내며 답했다.

배틀로얄에서 살아남긴 했지요.”

그리고 랜서즈인가 뭔가로 싸우고 돌아왔고, 대단해! 그런데 왜 프로로는 가지 않은 거야?”

프로의 길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거야 그렇지만 아까워서 말이야. 여기도 듀얼과 거리가 멀진 않아도, 프로로 관객을 맞이하는 것과 연구는 다르지.”

한두 번 들은 말은 아니었다. 청년의 옛 모습에 대해 기억하는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때 그가 보여준 길로 더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청년이 과거 주변으로부터 받은 기대와 지금 그가 하는 일은 달랐다. 아마 대부분은 청년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옛 꿈을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실은 부탁을 받았거든요.”

누구에게서?”

이 회사의 사람입니다. 일해주었으면 한다고 해서 이곳으로 왔지요.”

후회는 없나?”

제 실력을 좋게 봐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청년은 그 다음에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지 안다. 몇 번이나 꺼냈던 답의 반복이다.

저는 이 일에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프로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진 않아요.”

그가 가지 않은 길을 아쉬워하는 이들 중 누구도 왜 그가 그 길을 택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물으려면 물을 수도 있었으련만 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청년에게 거기까지 물어 답을 들었다면 반응이 달라졌을까. 판단을 수정할까. 자신의 말이 성급했다는 생각으로 입을 닫게 될까. 이미 지나버린 길이므로 굳이 헤집지는 않지만, 청년에게도 가지 않은 길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었다. 한때는 꿈꿨던 길이기도 했다. 그런 것을 버리는 데 사정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모두들 그에 신경을 두는 일 없이, 그에게 왜 당연한 길을 가지 않았는지만 물었다.

그것은 정말로 당연한 길이었을까. 과거라면 바로 그렇다고 답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했던 만큼 그 역시 그 길을 쭉 바라왔으니까.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미래임에도 자신이 바라는 방향을 정해두고서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소년이기에 가능했던 확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음껏 꿈꿔도 되는 나이이기에 모든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을지도 모른다. 필연이라는 말만큼 미래에 어울리지 않는 말도 없는 것을.

그렇다면 됐어. 어쨌든 자신의 길은 자신이 결정하는 법이고.”

상대는 더 캐묻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것으로 청년은 선택하지 않은 과거에서 벗어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과거 기대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었으나 이제 자신의 현실이 된 삶으로.

몇 년 전에 기대를 모았다던 그 듀얼을 볼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여기서도 듀얼은 하지 않습니까.”

연구를 위한 실연과 진짜 무대 위의 것을 비교할 순 없지.”

어쩌겠어요. 저는 연구원인데.”

말을 하면서도 청년의 눈은 기록지에 꽂혀있었다. 소망을 이루었다면 프로가 되어 무대 아래 관객을 보았어야 할 눈이 이제 수치를 해석하는 데 익숙해졌다. 과거 관객의 환호를 끌어내던 그의 특기는 그에게 이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프로로 살 일은 없겠지만, 무대에 오르는 거야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죠.”

비공인 대회에라도 출전할 생각이야?”

이제 대회에는 흥미 없습니다.”

그럼 어쩔 생각으로.”

무대에 불러주는 사람이 있거든요. 가끔이지만.”

초청? 이벤트 듀얼인가?”

그런 셈이죠. 듀얼을 버린 것은 아니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무대에 오르는 것도 싫지는 않고.”

그랬다. 버린 길을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오랜 시간 애착을 품었던 만큼 잠시나마 그에 발을 담그는 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때문에 청년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기회를 뿌리쳐본 적은 없었다. 대부분 아직도 과거의 그에게 기대를 거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기회라는 것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나, 청년에겐 그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무대에 오르게 되거든 연락 줘. 보고 싶으니까.”

그러지요.”

어차피 오래지 않아 보여줄 일이 있을 것이다. 굳이 부르지 않아도 이 도시의 사람이라면 보게 될 무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과거에서 벗어나 지금 자신이 맡은 일로 관심이 옮겨간 청년은 건성으로 답하고 자료 확보를 위해 실연실로 향했다. 청년이 떠난 자리에는 그의 현재에서 잘라낼 수 없는 것을 상징하는 약만이 휑하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

 

기계 새가 급강하했다. 날카로운 울음을 토하며 곤두박질친 기계 새는 자신을 불러낸 주인 앞에서 멈췄다. 자신을 찾은 새에, 청년은 기계로 된 몸체 위로 훌쩍 뛰어올라 몸을 실었다. 몸을 지탱하는 것이라곤 무엇도 없이, 청년은 그 딱딱한 기계 몸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하늘을 날았다. 부드럽기는커녕 꽤 난폭한 비행에도 무사히 몸을 싣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청년에겐 비행이 꽤 익숙한 일인 모양이었다. 기계 새 역시 몸에 얹은 주인을 조금이라도 위험으로 내모는 일 없이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서로 한 몸이 된 듯 함께하는 둘은 공중을 돌면서 저 맞은편의 괴물을 노렸다. 청년은 지휘하듯이 가벼이 손가락을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그의 새는 먹잇감을 사납게 찢어놓았다. 딱딱한 발톱이 괴물의 몸체를 찢는가 싶더니, 새롭게 나타난 괴물을 폭격으로 흩어버린다. 자연의 생물을 흉내 낸 외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청년의 기계 새는 병기를 닮은 무시무시한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무엇 하나 남기는 것 없이 갈가리 찢어버리는 그 습성은 냉혹한 포식자를 연상시킨다.

청년이 괴물을 하나씩 해치울 때마다 저 아래에선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맹렬한 싸움을 수많은 이들이 열광하며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은 경기의 일부였다. 실체화된 괴물과 기계 새가 환상으로 빚어냈다기엔 지나치게 생생하고, 괴물을 앞세운 상대를 몰아세우는 청년의 전술이 실제의 전투처럼 빈틈없을 뿐이다.

도시에서 매년 열리는 축제 같은 대회의 개막식, 대회를 주관하는 회사 측에서는 올해의 대회에,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을 추가하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개막식의 이벤트 경기. 프로 선수와 그에 비등한 실력을 가진 자가 맞서는 것으로 관객을 일찍부터 달아오르게 하는 것이 회사의 목표였다. 기계 새를 부리는 청년의 활약으로, 관객은 회사의 바람대로 본격적으로 대회가 시작되기에 앞서 벌써 대회에 대한 기대를 상당히 불린 듯했다.

기계 새에 올라탄 청년은 현역 프로 선수를 무섭게 몰아세우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 자신은 프로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한때 뛰어난 프로 선수가 될 것이라 기대를 모았던 자였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데뷔를 하지 않고 몇 년간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 공백을 깨고 수많은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 청년의 실력은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그를 기억하는 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여전한 실력이었다.

프로의 길로 나아가지 않고 다른 영역에서 일한 지 몇 년. 간간이 비공식 무대에 서는 것 외엔 관객을 맞을 일도 없었던 청년이 이렇게나 큰 무대에서 수많은 관객을 만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아는 이로부터 무대에 서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대회 개막 몇 주 전, 자신이 몸담은 회사의 사장이 호출했던 것을 떠올린다.

[MCS 개막식에 이벤트 듀얼을 넣을 생각이야.]

[나쁘지 않군.]

[그래서 그 무대에 오를 사람이 필요한데.]

[초청해둔 것 아니었나?]

[물론 프로를 하나 초청했지. 남은 하나는, 쿠로사키, 관심이 있나?]

[그러니까, 초청한 프로 듀얼리스트와 싸우라?]

젊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의 제안에 청년은 잠시 말을 잃었다. 사장은 이전부터 자신을 잘 배려하는 편이었다. 몸이 망가져 직업의 선택에도 제한이 있던 청년에게 연구원의 길을 권유한 것이 바로 사장이었다. 연구원으로 들어온 후에도 여러 편의를 봐주어, 청년이 무리하지 않고 몸을 관리해가며 일할 수 있게 했다. 그 외에도 청년을 위해 몇 번 무대를 마련해준 사장이었지만, 자신의 회사가 주관하는 대형 대회에까지 그를 위한 자리를 내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물론 그런 배려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인지, 청년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사장은 그의 삶을 끝까지 책임져야 할 사람이었다. 사장의 세심한 배려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자에 대해 최대한 힘쓰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불편하면 거절해도 좋아. 아직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니 다른 사람을 부를 수도 있고, 회사의 사람을 쓸 수도 있으니, 무리할 건 없단 뜻이다.]

[하겠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몸에 무리가 갈 것 같다면 언제든 그만둔다고 해도 좋아.]

[예전보단 나아졌으니 최대한 휴식을 취하며 관리하면 하루쯤은 괜찮겠지.]

[과신하진 마라.]

[내 몸을 제일 잘 아는 게 누구라고 생각해? 무리가 될 것 같은 일은 맡지도 않아.]

[좋아. MCS의 개막식을 기대하지.]

그런 약속이 있었다. 청년이 몇 년 만에 수많은 관객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개막식의 특별 무대에 서는 두 사람 중 하나가 누구인지야 진즉에 밝혀진 것이었지만 그 상대가 누가 될지는 회사 내부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대회에서야 명확하게 드러났다. 몇 년 전, 같은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자. 그러나 돌연 자취를 감추고 그동안 한 번도 정식으로 대중 앞에 선 적이 없는 자. 그를 기억하는 자는 몇 년 만에 나타난 그에게 기대와 호기심을 동시에 품었고, 처음 보는 자는 별 기대 없이 그를 맞았다. 그리고 무대를 마친 후 모두가 그에게 열광했다.

본래 무대 위에 서는 날을 꿈꿨던 자에게, 환호와 박수는 반갑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것이 자신에게 쏟아질 때, 청년은 문득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의식하진 못했으나 그런 것들이 마음 한쪽에 남아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창백한 얼굴이 상기된 줄도 모르고 청년은 그에 성실히 답했다. 공손히 고개를 숙여 무대를 내려갈 때까지 청년의 신경은 오랜만에 맛본 관객의 열기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무대에서 내려가자마자 청년은 바로 자신을 덮치는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아무리 공들여 관리했다고 해도 결코 평범한 사람 수준이 될 수 없는 몸이었다. 갑작스런 체력 소모를 제대로 버텨줄 리가 없다. 눈앞이 흐려지고 귀가 먹먹해진다. 몸이 뜨거워지며 세상이 흔들린다. 그 불쾌한 증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퍼뜩 깨달은 청년은 급히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대로, 무너진다. 더는 말을 듣지 않는 몸에 청년이 체념할 때, 누군가 그의 팔을 강하게 잡았다.

괜찮으세요?”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감각이 없지만 청년은 최대한 집중해, 자신을 도운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 애썼다. 바로 누구인지 찾을 수 있는,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들은 적 없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쇼크인가. 제 말에 반응할 수 있겠어요?”

그제야 청년은 깨달았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조금 전까지 그와 싸웠고, 그가 쓰러트린 상대였다. 함께 무대에서 내려가던 중 갑자기 청년이 이상을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서 도운 것이리라. 감사의 뜻을 표하려 입을 열었지만, 의식이 끊어지지 않게 버티기도 바빠 단어가 조합되지 않았다.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상태가 심각해 보여서 사람을 불렀어요. 조금 있으면 회사 쪽에서 사람이 올 거예요. 그때까지 조금만…….”

……찮으니까.”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소란, 만들지……않아, .”

쿠로사키 씨. 제 말 들으세요. 괜찮지 않아요.”

그때부터 세상의 모든 말이 점차 끊기기 시작했다. 의식이 흐려지는 것이 분명했다. 몸이 축 늘어지는 것도 느꼈지만, 다행히도 그건 상대가 자신에게 기대게 한 것 때문인 듯했다.

……혹시……건강이……쿠로사키 씨……그동안…….”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도 그 말만은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평소라면 괜찮았을 텐데, 하필 한참 시달린 후에 들어서일까. 자신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그 말이 청년을 쪼아댔다. 변명하듯 무어라 말하려고 해도 말이 터질 리 없었다. 그대로, 달려온 사람들에게 이끌려 병실로 옮겨졌을 뿐이다.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티긴 했지만 병실에 도착해서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오래지 않아 눈이 감겼다.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몇 시간이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잠깐 찾아온 사장은 청년의 상태를 확인하고 약간의 걱정을 보였을 뿐 별달리 책망하지는 않았다. 그의 몸에 대해 아는 몇 안 되는 회사 사람들이나 한두 마디 정도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뿐이다. 모두가 돌아간 후 청년은 병실의 TV에서 그 날의 대회를 요약하는 방송을 보았다. 개막식 부분에서 짧게, 그의 경기도 비쳤다. 무대 위의 그는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아니었고, 많지 않은 나이에 몸이 망가진 불행한 인간도 아니었다. 그저 경기에 집중하는 선수일 뿐이었다. 그것이 위안이 되었다.

업무에 복귀한 것은 이틀 후였다. 원래는 무대에 오른 날만 쉬고 다음날에 바로 돌아갈 작정이었지만, 상부에서 일부러 시간을 더 빼두어 쉬게 했던 것이다. 사흘 만에 자신의 자리에 들어서며 청년은 놀란 기색이라곤 없이 병실을 찾아온 사장을 떠올렸다. 그 정도는 생각해뒀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조심해도 언제든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어쩌면 청년보다 사장이 더 잘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청년은 언제나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자신의 몸에 비참해지진 않았다. 몸이 망가진 후 사고란 흔했다. 이번의 일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몸이 더 나아지지 않는 이상은, 어쩔 수 없이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개막식의 이벤트 경기에서 자신을 보았다며 몰려들어 인사하는 동료들에게도 건강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런 실력을 가지고 프로가 아니라니 아깝다는 등의 말에는 적당한 답을 돌려주었다.

대회에서의 모습 때문에 단숨에 이목을 끈 청년이었지만, 이미 그가 몸담은 세계는 프로의 세계가 아닌 연구의 길. 돌아오자마자 청년은 남겨둔 일에 다시 몰두했다. 자리를 비웠던 시간과, 평소보다 훨씬 더 그에게 선택하지 않은 미래를 들먹이는 사람들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 일에 집중한 동안 연락이 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동료가 불쑥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어서 보니, 누군가로부터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번호만 보고는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지만 메시지에 찍힌 이름을 보고는 모를 수가 없었다. 과거에 함께했던 자의 이름이 청년의 눈앞을 메웠다.

 

*

 

바깥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몸이 망가진 후로는, 외출도 각오와 준비가 필요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청년의 외출에는 보통 사람의 몇 배는 되는 준비시간과 만일을 대비한 물품들이 필요했다. 지금도 주머니에는 약이 들어있다. 조금만 잘못되면 삼켜 상태를 안정시킬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의 가벼운 만남에까지 온갖 나쁜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우스웠으나, 어쩌겠는가. 자신의 몸은 이미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무너지고 말았는데.

대부분의 만남은 청년에겐 어쩔 수 없이 부담이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연락이 닿자마자 별로 생각하는 것도 없이 만나겠다고 한 것은, 상대가 몇 년간 만나지 못한 사람이어서였다. 청년이 무너지기 전에, 망가질 수밖에 없을 몸으로 억지로 버티던 때에 만나 함께 거대한 벽을 넘은 사람이었다.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으나, 위기 앞의 동지였던 만큼 서로가 갖는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그 후 상대는 바람대로 프로가 되어 주목받게 되었으므로 청년도 간간이 그 소식을 듣긴 했으나, 청년이 치료를 받는 동안 연락이 끊겨 이제야 만나게 된 것이다.

약속시간이 되기 조금 전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대는 약속시간을 넘기고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지루함에 턱을 괸 채 기다리고 있을 때, 바깥이 시끄러워져 시선을 돌렸다. 여럿이서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떤 운 나쁜 사람이 발이 잡혔나 싶어 살피니 약속상대가 곤란하단 얼굴로 가운데 서 있었다. 한창 인기인 프로가 나타났다는 것에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 모양이었다. 나가서 구제해줄 법도 했으나 청년은 일부러 간섭하지 않고 기다렸다. 마침내 풀려난 상대가 약속장소로 들어서고, 몇 년 만에 그를 제대로 보게 된 청년은 아. 하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조그마했던 소년이 어엿한 어른이 되어있었다. 제 가슴께까지 오나 싶었던 소년은 이제 자신과 한 뼘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는 전에 비해 탁해졌고, 몸은 제법 단단해졌다. 달라지지 않는 것이라곤 선한 눈매와 수 년 전에도 매고 있었던 펜듈럼 정도일까.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나이에 비해 성숙한 인상의 청년이었고 나이를 생각해도 앳되었던 소년이었다. 말라갔던 시간 동안 청년의 성장은 정체되었는데 소년은 이전까지 지체되었던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는 듯 거침없이 자라난 모양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나이차를 감안해도 거의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미안. 오는 중에 사람들과 마주쳐서.”

팬인가.”

, 무척 반가워하기에 사인도 해주고 잠깐 이야기도 하다 왔어.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

인기가 좋으니 어쩌겠어.”

면전에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아직 익숙지 않은지, 상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곤란하게 만들었나 싶어 조금 미안해진 청년은 바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주었다.

어떻게 연락했지?”

“MCS 개막식에서 네가 보여서. 닮은 사람이라고 하기엔 아무리 봐도 쿠로사키 슌이었으니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라면,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

과연, 그 날의 무대를 지켜본 자들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인 그도 그 덕분에 청년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의 듀얼, 잘 봤어. 쿠로사키는 그대로구나, 하고 안심했지.”

, 나도 즐거웠어.”

전쟁이 끝나고 후유증으로 몸이 안 좋았다고 들었어.”

그랬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레오 코퍼레이션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몸은 정말로 나은 거야?”

전보다야.”

청년은 무심하게 답했다. 최악의 상태를 벗어났지만 어차피 회복엔 한계가 있는 자신의 몸에 대해선 그 정도로 설명하는 것이 편했다.

그러면 지금 일은 언젠가 접고 프로가 되는 거야?”

아니.”

나아졌다면서?”

듀얼을 업으로 삼을 정도는 못 돼.”

청년에게 바깥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매우 한정적이다. 아주 단순하고 힘이 들지 않는 일이 아닌 이상은 아무리 몸에 익은 일이어도 위험하다. 자신의 상태를 감추는 데 능숙한 청년이라, 상대는 그것을 모른다. 그렇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젠 무대에서 움직여도 괜찮지 않느냐고.

액션듀얼이 메이저이긴 하지만 그렇게 격렬하지 않은 듀얼이라면 괜찮지 않아?”

내가 프로가 되길 바라?”

평소라면 적당히 넘겼을 테지만, 청년은 순수한 호의로 자신을 대하고 있는 자에겐 태도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답 대신 불쑥 날아든 질문에 상대의 붉은 눈이 둥그레졌다.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특별히 바란다거나 요구하는 건 아니지만, 쿠로사키에겐 아무래도…….”

아무래도?”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서.”

상대의 말에는 정말 그것 외에 다른 마음은 비치지 않아서 청년은 입을 가리고 가벼이 웃어버렸다. 소년으로 만났던 자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직 타자인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소년 시절 그대로 순진하다.

왜 웃는 거야. 무안해지게. 쿠로사키도 프로 듀얼리스트의 길을 꿈꿨던 것 아냐? 스페이드교에 들어갔던 것도 그래서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꿈꿨었지.”

지금은 다르단 거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지나온 건 돌아보지 않는 쪽이라.”

몸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던 거라면,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활동량이 적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것에서부터, 천천히, 천천히. 프로의 길이라고 나 같은 길만 있는 건 아니잖아.”

역시 청년이 짐작한 대로였다. 상대는 오해하고 있었다. 청년이 아직도 가지 못한 길을 열망하고 있다고. 물론 청년은 그 길을 사랑했고 지금도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카키 유우야.”

?”

나는 프로로 활동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을 텐데.”

상대는 하나 놓치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과거에, 청년이 그를 막 만났을 때에 머물러 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 프로를 꿈꾸던 소년이 프로가 된 것처럼 청년 역시 그때와 같지 않은데. 소망은 변덕스럽고 미래는 결정되지 않은 것. 모두가 짐작한 미래에서 벗어난 청년은, 모두가 결정된 듯 굴었던 미래의 길을 스스로 꺼낸 적이 없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내가 몸 때문에 바라던 꿈이 좌절당하고 차선책으로 연구원이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아니었어?”

그래서 지금도 프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한쪽에는 가지고 있을 거라고.”

아니야?”

아니야.”

붉은 눈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지금껏 당연히 생각하던 것이 부정당했기 때문이리라.

갈 길을 선택할 기회는 내게 있었지. 아무리 몸이 좋지 않아서 선택의 제한이 있었다 해도, 선택은 할 수 있었다고. 지금의 길을 거부할 수도 있었어. 가망 없는 몸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치료를 받으면서 무대에 서려고 노력했을 수도 있어.”

그 중에서 지금의 길을 택한 거구나.”

그래.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어.”

어느 정도는, 상황에 떠밀린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자신을 잠식한 무기력함에 지쳐 그나마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일을 성급하게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얼마든 팽개칠 수 있는 미래에의 끈을 그는 스스로 잡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여기까지 왔다. 그때 보았던 미래가 일상이 된 지금, 청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어디에 만족하는지는 그 자신도 정확히 짚기 어렵다.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일까. 그래도 자신이 꿈꿨던 일과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일까. 아니면 뜻밖에도 적성에 맞다는 것일까. 무엇이라도 좋았다. 만족할 수 있다면, 택하지 않은 길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으니까.

지금은 어때?”

비로소 상대는 그의 현재로 시선을 옮겼다. 상대의 머릿속 청년은 이제야 성인이 된다.

나쁘지 않아.”

몸 때문에 발목 잡히진 않아?”

아무런 문제도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상태가 나빠지면 언제든 쉴 수 있는 환경이라서.”

연구는 재미있어? 솔직히 그런 거,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데.”

내가 맡은 영역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쪽이 아니거든. 할만해.”

다행이네.”

상대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어쩔 수 없이 하는 건 괴롭잖아. 나는 쿠로사키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왔지만, 그게 아니라 정말 재미를 붙인다면 다행인 거고. 나머지에게도 쿠로사키는 괜찮다고 말해둬야겠네.”

나머지?”

랜서즈 멤버들과 연락하고 지내는데 네가 워낙 모습을 안 보여서 다들 궁금해 하더라고.”

. 연락을 했었나.”

연락뿐이겠어? 가끔 만나기도 하는데 너만 빠지는 거지.”

연락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너희 연락이라면 받았을 텐데.”

아카바 레이지가 겁을 줘서 다들 연락할 엄두를 못 냈다고. 상태가 안정될 때까진 연락을 자제하라고 했어. 덕분에 네 몸이 많이 안 좋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너무 오래 연락을 안 했더니 나중엔 잊게 되더라고.”

쓸데없는 짓을 했군, 그 인간.”

, 그 나름의 배려겠지. 예나 지금이나 방식이 그렇게 친절하지 못할 뿐.”

과거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말이 상대에게서 불쑥 튀어나와 청년은 잠깐 멈칫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흘렀던 몇 년의 시간을, 청년도 잠깐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변화가 생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너도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그래?”

여유가 생긴 것 같다고. 예전의 너는 쉽게 움츠러들고 쫓기는 듯 굴었지. 사람의 호의에 과하게 의존하거나 지나치게 의심하는 것이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흘러서인지 예전처럼 뭐든 그리 힘겹게 받아들이질 않는군.”

쿠로사키 슌에 비할 수 있겠어? 레지스탕스 쿠로사키 슌과 레오 코퍼레이션 연구원 쿠로사키 슌의 간극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모르지?”

내게도 시간이 흘렀으니 그렇겠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것이 지나고 많은 것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과거의 일이 과거의 그들을 구성했듯, 지금까지의 일은 그들을 새롭게 만들었다. 괴롭고 힘든 일을 거쳐 어른이 된 그들은, 새로 경험한 일들 덕분에 이제 과거에 비해 덜 짓눌리고 더 성숙한 인간으로 변해있었다.

그렇네.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지금은 이렇게 말해도, 사실 그때는 두려웠어. 그런 일을 겪고도 바라던 미래를 이룰 수 있을까? 영영 그때의 끔찍한 일에 먹혀 살진 않을까?”

청년 또한 그랬다. 그때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처음엔 그저 막 벗어나온 가시덤불을 돌아보며, 한참 멍하니 있었다. 빠져나온 고난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무조건 낙관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결국은 윤곽조차 뚜렷하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살아갔다. 그때그때의 현재를 살아온 끝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꿈이 이루어졌어. 모두가 꿈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두가 힘껏 살아가고 있어.”

동료들이 각자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린 것인지, 상대의 얼굴에 살풋 미소가 걸렸다.

있잖아, 쿠로사키. 나는 안심했어. 너의 미래는 꼭 확인하고 싶었거든. 너 역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보고 싶었어. 너는 정말로 괴로웠으니까.”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겪고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겨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청년이었다. 그 괴롭고 황폐한 삶을, 동료로 함께하며 지켜본 상대가 모를 리 없다. 청년은 한때, 목적에 대한 집착과 투쟁으로 요약되었던 사람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자신을 소모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미래를 가불해 현재의 싸움을 연장하는 사람이라, 목적만 이루면 그대로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주변에서 수군거린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상대는 그의 미래를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목적을 이루는 것에만 몰두했던 청년이, 그 모든 게 끝난 후에도 살아갔으면 해서.

전장에서도 살았어. 평화 속에서 살지 못할 리가 없잖아.”

그렇지. 너는 그런 사람이었지. 그런데 왜 그렇게 불안했던 걸까. 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을까.”

사람은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나은 길을 찾아가도록 만들어졌지. 적응하고, 체념하고, 발전해서. 나쁜 환경에서라도, 고난을 겪은 후라고 해도 살 수는 있어. 다만 너는 그런 일이 익숙지 않아 불안했을 거다.”

버티지 못할까봐, 그대로 무너질까봐, 미래 같은 건 없을까봐.

쉽지는 않았어. 전쟁이 끝난 후엔, 전쟁과는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었지. 그래도, . 너도 나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왔어. 애초에 미래란 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냐. 현재의 다음이고, 내가 만들 시간일 뿐이고, 언젠간 찾아들 것일 뿐이지. 우리는 성공적으로 버틴 거야.”

쿠로사키는 어른이네.”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서 일찍 깨달았을 뿐이야.”

아니, 정말로. 예전엔 억지로 어른의 모습을 쓴 아이 같았는데 이젠 정말 어른이 되었어.”

이번에는 청년의 눈이 둥그레졌다. 맹금을 뜻하는 이름에 걸맞게 언제나 매섭게 빛나던 금빛 눈에 의문이 비치는 것은 꽤 진귀한 풍경이었다.

잘 버텨주었다는 뜻이야. 고마워.”

고맙다는 건 뭐야.”

쓰러졌으면 마음이 많이 아팠을 테니까. 말했잖아. 나는 네 미래를 확인하고 싶었다고.”

그리고 그가 확인한 청년의 미래는 다행히도, 황폐했던 인간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 희망적인 것이었다. 거창한 형태가 아니어도 좋았다. 청년이 만족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인 미래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후로는 쭉, 사소하고 시시한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만나지 못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일상의 이야기.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마다 그들은 이따금 웃고 때로는 장난스러워지고 잠깐씩 침울해졌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인데도, 아니,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여서 소중했다. 그렇게 이야기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청년은 급격히 쏟아지는 피로와 머리를 누르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괜히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바로 의식적으로 표정을 밝게 했으나, 상대는 잠깐 스친 약한 모습을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안, 아직 몸이 완전히 돌아오진 않은 거지? 무리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조금만 쉬면 나아질 거다.”

아니, 그렇게 두는 건 내가 불편해. 앞으로도 기회는 있으니까.”

청년을 빨리 해방시킬 작정인지 먼저 일어난 상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음에도 만날 거지?”

물론.”

그럼 다음에, 꼭 다음에 만나.”

청년은 옛 동료가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는 한 번이면 충분한데도, 떠나는 이는 뭐가 그리 아쉬운지 문을 열고 나설 때까지 계속 청년을 돌아보며 끝까지 손을 흔들었다.

 

*

 

디스크를 팔에 찬 후 작동시키는 것은 경기를 시작하는 신호. 셀 수도 없이 많은 경기에 참여한 청년에겐 보지 않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팔에 채우는 고정 장치의 감각도, 팔에 실리는 디스크의 무게도 원래 짊어지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당연히 전투에서 서로 맞붙을 몬스터와 마주하는 것이겠지만 청년의 관심은 그에 있지 않았다. 애초에 청년의 상대부터가 선수가 아닌 AI에 불과했다. 전투 자체가 목적이 아닌,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투를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디스크에 적용된 기술. 청년과 그 팀이 연구한 끝에 개발한 기술이었다. 개발 과정에서 이미 수없이 사용한 것이었지만, 정식으로 선보이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청년의 시선은 한동안 전투 과정을 비춰주는 화면에 꽂혀있었다. 청년이 심어둔 기술 덕분에, 화면 속에서는 지금까지의 경기에서와는 전혀 다른 것이, 많은 이들이 꿈꾸기만 했을 것이 펼쳐지고 있었다. 청년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금빛 눈에 장면장면을 탐욕스레 담는다. 마침내 전투가 끝난 후 청년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디스크를 풀어내려다 박수 소리에 멈칫했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기술을 확인하고 싶다며 자신을 부른 자가, 사장이 손뼉을 치고 있었다.

훌륭하군.”

만족하셨는지?”

기대 이상이야.”

사장의 목소리에 거짓은 없다. 자신의 사람들이 이뤄낸 것이 퍽 흡족한 모양이었다.

곧 세상에 발표하도록 하지. 레오 코퍼레이션이기에 가능한 새로운 세계를.”

젊은 사장은 자신이 열어갈 세상에 도취되어 있었다. 청년은 감정이 비치는 일이 거의 없는 그의 얼굴에 드물게 기쁨이 떠오르는 것을 읽어냈다.

너에게는 감사하고 있어. 이번 일엔 네 공이 크니까. 오랫동안 듀얼을 해온 너였기에, 지금의 시스템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알았던 거겠지.”

청년은 디스크를 슬쩍 다시 작동시킨다.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신비로웠지만 그 아래 깔린 것이 무엇인지 아는 그는 이미 신성을 해부한 느낌이었다. 만일 자신이 연구원이 아니라 프로로 살아가고 있었다면, 경기 관련 기술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이 회사에 운 좋게 초대받아 지금의 신기술을 미리 체험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지금의 광경은 기적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새삼 청년은 자신이, 과거에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다른 세계에 있음을 느낀다.

이대로 상용화되면 지금 활동하는 프로에게도 뻗치는 건가.”

, 그래. 프로에게만이 아니지. 모두가 뛰어드는, 하나의 흐름이 될 거다.”

모두. 청년은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모두라면, 자신의 동료들도, 꿈꾸던 대로 되었다면 관객으로 맞이했을지도 모를 사람들도 포함할 것이다. 그 수많은 이들이 사용할 것을 만드는 데 자신이 힘을 보탠 것이다. 청년은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열기를 느낀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쿠로사키.”

정말 기대돼.”

세상도 기대하게 될 거다. 난 여기에 미래를 걸 작정이야.”

이것이 그 기대에 보답하리라고 믿나?”

확신해.”

사장은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었다. 확신한다고, 이것이 회사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어떤 불안요소가 기다리고 있어도 언제나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갖고, 기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사람이었다. 그가 확신하기에, 청년도 확신할 수 있다. 자신이 이뤄낸 것은 헛된 것이 아니라고. 정말로 모두에게 스며드는 것이 되리라고.

그러면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사장이 저렇게 기대를 거는 것인 만큼, 연구실에서 팀과 함께 다시 검토해 마지막까지 다듬을 생각이었다. 야심 가득한 젊은 사장이 완벽한 기술을 세상에 내보일 수 있도록. 사장의 열기에 가리긴 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개발에 관여한 청년 역시 이번 건에 꽤 열정을 품고 있었다.

쿠로사키.”

당장이라도 연구실로 달려가려는 듯 바쁘게 자료를 챙기는 청년에게, 사장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청년은 사장에게로 눈을 돌렸다.

레오 코퍼레이션에 와달라는 내 권유에 응한 건, 네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나?”

청년은 사장이 내민 손을 잡아 이곳에 왔다. 이곳에 와서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다. 그 길이 자신을 어떻게 만들었던가. 여기까지 와서, 자신을 새로운 시작점으로 끌어온 자에게 청년이 돌려줄 말은 분명했다.

물론.”

그 손을 잡은 덕분에, 이 세계에서 무언가 이룰 수 있었다. 청년은 가지 않은 것보다 걸어온 것을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발을 들인 세계는 자신이 꿈꿨던 세계와는 다른 의미로 소중하다. 그래서 청년은 지금의 삶을 사랑할 수 있었다. 미래에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나 역시, 네게 손을 내민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청년은 잠시 멈칫했지만 그대로 사장의 집무실을 나섰다. 떠나는 순간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으니, 아마 사장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입가에 걸린 만족스런 웃음을.

그의 삶은 아마, ‘그래서 오래도록 행복했습니다.’ 로 딱 떨어지는 동화는 될 수 없을 것이다. 평생 안고 갈 수밖에 없는 후유증 때문이라도, 현실의 여러 고난 때문이라도 그렇게 되는 것은 어렵다. 그래도 청년은 믿는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살아가게 될 날들을. 삶에 뒤따르는 것이 완전한 행복이 아니어도 좋았다. 자신의 위치에서 후회 없이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으니까.

그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마지막 문장은, ‘그럼에도 그는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