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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유야] 일그러진 상

현소야 2016. 11. 24. 23:55

 

눈을 떴을 때 소년의 눈이 처음으로 담아낸 것은 유리벽이었다. 작은 방의 양 끝에 유리벽으로 사방이 막힌 좁은 공간이 두 개. 잠금장치로 단단히 막힌 공간 한쪽에 소년은 갇혀있었다. 반대편 공간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갇힌 사람이, 그와 반대로 웃음을 걸친 채 앉아있었다. 자신이 놓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소년은 눈을 뜨기 전까지의 기억을 파헤쳤다. 동료가 갇힌 곳을 향해 복도를 끝없이 달리던 중, 갑자기 발밑이 꺼졌다. 그대로 추락해 나뒹굴다 정신을 잃고, 깨어나자마자 본 것이 지금의 풍경.

함정에 빠진 것인가. 발밑이 꺼지며 떨어진 것, 정체 모를 곳에 갇힌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마 옳을 것이다. 누군가가 친 함정에 빠져 감금당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손발이 자유롭다는 것 정도. 소년이 다시 동료를 찾으러 가기 위해 잠금장치에 손을 뻗은 순간.

안녕. 다시 만났네, 유우야.”

반대편 사람이 인사를 건넸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아군이라 믿었지만 실은 적의 첩자로 그의 편에 숨어들었던 청년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체가 밝혀진 후 바로 적으로 돌아선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소년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적대감은 비치지 않는다. 읽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반가움일까.

다시 볼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그러게. 벌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는데 다행히도 다시 임무를 받았어. 지위를 얻을수록 관대해진다는 말이 정말인 모양이야. 이쯤 되면 반역을 꾀하지만 않는다면 용서받더라고.”

청년은 그때부터 무어라 잔뜩 늘어놓았으나 지나간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엔 소년은 마음이 급했다. 붙잡힌 동료를 찾기 위해 달려가던 참이었다. 적의 손에 떨어진 동료에게 일이 생기기 전에 어서 찾아야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위험은 커지고 동료를 구할 희망은 줄어들 것이다. 어떻게든 문을 열어보려 잠금장치를 살피던 소년이 청년에게 다시 말을 던진 것은 문을 열지 못하고 몇 분이나 지나서였다.

데니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알아?”

글쎄, 어떨 것 같아?”

청년이 한가롭게 말하는 도중에도 소년의 시선은 잠금장치에 쏠려 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빨리 빠져나가, 붙잡힌 사람을 구해야만 한다. 마음은 급한데 아무리 애를 써도 잠금장치를 풀 수 없었다. 좁은 공간 속 문에 달라붙다시피 한 소년에게 청년이 나긋하게 말했다.

그쯤 해둬. 열쇠는 내게 있으니까. 너는 못 열어.”

너를 어떻게 믿지?”

믿어도 돼. 이제는 엔터테이너의 가면을 쓸 이유가 없으니까 솔직해도 되거든.”

가면을 쓰지 않는다는 건 적으로 상대하겠다는 거 아냐?”

지금 우리가 적이란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어차피 내가 받은 임무는 너를 묶어두는 것에 불과해. 수고스럽게 동지 연기를 하면서까지 속일 이유는 없단 말이야.”

묶어둔다고?”

그래. 내게 너를 제거할 힘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과거를 들먹이며 비극적으로 싸울 일도 없고, 나쁘지 않지.”

청년에게는 지금 소년이 놓인 처지가 한 편의 극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초조해진 소년은 문을 몇 번 거칠게 밀었으나 청년은 태평스러운 말을 던질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 이야기나 하자고. 제대로 대화한 지 오래됐잖아?”

지금은 할 시간 없어.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말했지. 내 역할은 너를 묶어두는 거라고. 어차피 여기 묶여있게 될 건데 얘기나 하자. 네 이야기가 만족스러우면 예전에 함께했던 정을 봐서, 빠져나갈 기회를 줄게.”

그러면서 청년은 손에 쥐고 있던 키를 흔들어보였다. 그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소년의 자리에서도 그 위에 작은 버튼 여러 개가 달려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년이 버튼 중 하나를 누르자, 잠겨있던 방문이 열렸다. 청년이 보여준 건 방문을 여는 버튼이었지만 아마 두 사람을 가둔 공간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버튼도 있을 것이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소년은 고개를 끄덕여 동조의 뜻을 보였다. 여전히 믿을 수는 없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것이라면 청년이 전부였으므로. 순순히 제 뜻을 따라준 소년에, 청년은 만족한 듯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있잖아, 네가 믿어온 엔터메는 정말 대단한 것일까?”

무슨 뜻이야.”

별다른 뜻 없어. 그냥 궁금해서.”

싱글거리며 의미 모를 말을 던지는 청년에 소년은 답을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을 택했다. 결국 침묵을 깬 것은 청년이었다.

여기로 돌아오고 흥미로운 것을 알았어. 네가 가끔 보이던 위험한 모습이 네가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 그러니까 엔터테이너의 껍질 속에 괴물이 있었다는 것 말이야.”

그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야.”

소년은 다급하게 부정했다. 청년이 지적한 위험성이란 때로 쇼크처럼 덮쳐오는 이상증세. 한 번 시작되면 괴물에게 지배당하는 것처럼 의지와 관계없이 사람들 앞에 난폭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을 꿈꾸는 소년으로서,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는 증세였다.

네가 인정하는 네가 아닐 뿐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 비난하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날을 세울 필요는 없어.”

청년은 깍지 낀 손에 턱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나는, 그걸 알았을 때 기뻤거든.”

기뻤다니.”

소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그토록 숨기고 싶은, 동시에 숨길 수 없는 결함에 대해 청년은 가벼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그것으로 얼마나 괴로웠는지 지켜보았으면서도.

나는 네가 완전무결한 엔터테이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오히려 태생적인 결함이 있었던 거야. 그게 얼마나 내게 위안이 되던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내가 너를 동경했기 때문이라면 이해하겠어?”

동경이란 단어에서 소년은 이질감을 느꼈다. 설마 그가 그런 말을 꺼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소년이 보기에 청년이야말로 완성된 존재였고, 때문에 동경의 대상이 된다면 모를까 누군가를 동경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과거 자신이 그를 선망했던 것처럼. 혹 동경한다 해도 그 대상은 청년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그의 스승쯤은 되어야 납득할 수 있었다. 청년과 함께할 때까지도 수없이 좌절했던, 서툰 자신이 아니라.

믿기지 않는다는 눈이네.”

그야, 네가 그럴 이유는 없으니까.”

유우야는 예전에 나의 엔터메가 아버지를 연상시킨다 말한 적 있지?”

나에게 엔터메에 대해 듣고 싶다고도 했고. 덧붙인 말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랬다. 그래서 그의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남몰래 선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모든 것이 제 안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인 아버지의 것을 닮아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사카키 유우쇼를 통해 엔터메를 꿈꿨어. 동기라고도 볼 수 있을 서로에게서 그의 흔적을 찾았고. 그래서 나는 너를 동경하고 너는 내게 답을 구하려 했던 것 아니겠어. 결국 둘 다 그의 불완전한 모방일 뿐이었는데. 나는 너의 순수한 열의에 기대를 걸었고, 너는 스승님을 흉내 낸 내 꾸밈에 넘어갔어.”

[유우야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는 빛나지 않아요?]

과거, 청년은 그런 말을 던진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서 배우고 싶다며 눈을 빛내는 소년에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돌려준 말이었다. 한순간이었지만, 소년은 보았다. 청년의 웃음에 걸쳐진 그림자를.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그는 정말로 빛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본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전쟁에 관여한 침략자의 사상, 첩자라는 위치.

그때 소년은 무엇을 느꼈던가. 분노? 경악? 아니, 가장 먼저 소년을 덮친 것은 부정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었다. 다음으로 온 것은 배반감이었다. 소년이 선망한 그의 빛나는 모습은 전부 위장에 불과했으므로. 같은 길을 걷지만 자신보다 한참 더 성장한,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아래에는 잔학하고 추잡한 본질을 감추고 있었다.

너는 순진했고, 나는 뻔뻔했지. 엔터테이너로 무대 위에 서면 그것으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줄 알았어.”

그럼 아냐?”

유우야는 엔터메의 힘을 믿어?”

물론 믿지.”

즉답이라, 꽤 자신이 있네.”

이미 입증했어. 마이아미에서, 시티에서.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환호하고, 모두가 즐거워하고, 톱스와 커먼즈의 갈등도 잦아들었다고.”

우리가 하는 것은 쇼야. 그 자체가 답이나 구원이 되지 않아.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게 전부. 무대 아래서 환호를 보낸 관객 중 일부는 돌아가는 길에 범죄를 저지르고, 무대 위에서 환호를 받은 엔터테이너가 사실 적의 첩자일 수도 있는 거지. 하트랜드의 사람들은 거리 공연을 펼친 내게 박수를 보냈어.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돌려주었지?”

소년은 답을 알고 있었다. 화려한 쇼를 펼친 엔터테이너는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는 자들을 나락으로 인도했다.

헌팅게임의 신호.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은 대부분 사냥당했을 거야.”

그건 네가 엔터메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지. 너의 사례만으론 엔터메의 힘을 깎아내릴 수 없어.”

깎아내려? 그런 적 없어. 네가 너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와 같은 인간은 얼마든 있을뿐더러, 엔터테이너로 위장한 내가 그토록 환호를 받은 건 엔터메가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증명이라고. 그래서 나는 너의 순수한 열의가 빛나 보였던 거야.”

소년이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를 말하지 않았다 해도, 청년은 소년이 스승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소년의 올곧음은 스승의 것과 닮아있었다. 무해한 인간으로 위장한 채 만났던 스승은 얼마나 빛났던가. 사소한 욕망조차 없이 그저 사람을 즐겁게 하려 무대를 꾸미는 것은 엔터테이너를 가장한 첩자를 감명시키기 충분했다. 그렇게 스승을 존경하고, 닮으려 하다 그의 아들과 만났을 때 청년은 소년에게서 스승과 같은 고집스러운 신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동경은 소년에게로 옮아갔다.

사카키 유우야라면 가능할 것이다. 진정한 엔터메를 보여줄 것이다. 그런 기대를 품고 너를 바라보았지. 네가 부러워하던 기교는 사실 쉽게 익힐 수 있는 것. 하지만 엔터메에 대한 순수한 믿음은? 열의는? 그건 너만의 것이었어.”

청년은 무대 위의 배우처럼 과장되게 팔을 벌렸다. 목소리 역시 한껏 열이 올라 있었다. 소년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응원하고, 너에게 자극받아 덩달아 힘을 냈지. 너를 바라보면서, 나도 더 높이 올라가고 싶었어. 더욱 더, 너를 닮아가고 싶었어. 그런데 그때 쿠로사키가 내 가면을 벗긴 거야. 무대에서 추락하면서 내가 무엇을 느꼈을 것 같아?”

후회? 죄책감?”

나에 대한 혐오였지. 엔터테이너로 무대에 오르는 것도, 랜서즈로 네 곁에 있었던 것도 전부 위장이었는데, 그 위장에 빠져 본분을 잊고 있었던 거야.”

본분이라면, 아카데미아로서의? 역시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던 거야?”

글쎄, 새삼 깨달은 거지. 착각에서 벗어난 거고. 나는 진짜 엔터테이너 같은 게 아니고 첩자에 불과했으며 내 무대는 전부 거짓이었다는 걸 확인한 거야. 그때 나는 얼마나 무력해졌는지.”

청년은 비극의 주인공마냥 머리를 감쌌다. 꾸며낸 행동이리란 것을 알면서도 소년은 불쾌해졌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가련한 인간으로 포장한다.

그것뿐?”

의도하진 않았으나 목소리에 불쾌가 묻어나온 모양이었다. 청년은 연기에 가까운 과장된 행동을 걷어내고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래. 기대를 깨서 미안하네. 하지만 어쩌겠어. 나는 처음부터 아카데미아였다고. 이게 당연한 거야.”

엔터메 따위 위장으로 썼을 뿐인 침략자?”

바로 그거야, 유우야. 때문에 엔터메에 대해서 회의가 싹텄지만 여전히 순수한 채로 남은 너에 대한 동경은 깊어졌어.”

성역. 더럽혀지지 않은 숭고한 영역. 어쩌면 청년은 소년을 그렇게 남겨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엔터테이너로서는 뿌리부터 어긋난 자신과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빛나는 것으로. 자신이 갖지 못한 순수성에 대한 집착은 그의 머릿속 소년을 갈수록 아름답게 포장했다. 만일 그가 그대로 소년에 대해 굳이 파헤치려 하지 않았다면, 함께했을 때의 모습만을 간직하려 했다면 소년은 영원히 그의 머릿속에서 그 모습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년은 그 이상 접근했고 다시는 소년을 그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겨둘 수 없게 되었다.

동경이란 사실 괴로운 감정이야. 동경하는 대상이 빛나는 만큼 자기 그림자가 돋보이거든. 나는 여기로 돌아온 후, 너를 동경하면서 내 추한 본모습이 떠올라 괴로워했어. 그런데 네 본성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된 거야! 너 역시 나와 다를 바 없는 처지여서. 나처럼 반쪽짜리여서!”

그제야 소년은 안다. 자신이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끔찍한 본성에 청년이 기뻐했다는 이유를. 엔터테이너의 위장으로 추한 본질을 가릴 수밖에 없었던 청년은, 소년 또한 자랑스럽지 않은 본질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대등해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들 모두, 엔터테이너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순수하게 모두를 웃게 만들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해하는 침략자였고 두려움을 사는 괴물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네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어. 나는 처음부터 알고 시작했고, 너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만 다를 뿐, 피차 어긋났으니까.”

그런 것으로 위안할 정도로, 아카데미아라는 게 괴로웠어?”

괴로웠을 것 같아?”

청년은 반문했다. 비웃음이 깃든 목소리로.

침략자인 것 따위 데니스 맥필드로서는 아무것도 아냐. 하지만 엔터테이너로서는 별로 떳떳하지 못하지. 그래서 사카키 유우쇼의 아들인 너를 동경하고 때로 질투했는데 너마저 나와 같았다니! 정말 짜릿했어. 신을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고.”

청년은 그대로 웃어젖혔다. 커다랗게 뜬 눈엔 언뜻 광기마저 비치는 듯했다.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 때문에 몇 번 콜록거리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기까지 했던 청년은 겨우 진정하고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진 않았다. 속에 담아둔 것을 꺼내고는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에게, 청년은 웃음이 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유우야. 데니스 맥필드라는 실패를 보고도 너의 엔터메는 내가 막연히 기대했던 모습 그대로일까?”

너 역시 반쪽짜리인데. 아마 청년의 질문에는 그런 말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소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무슨 답을 바라?”

네가 생각하는 대로 말하면 돼. ‘너의답을 듣고 싶은 거니까.”

나는 네가 보았던 모습으로부터 달라지지 않았어.”

단호한 말에 청년은 한참 키를 만지작거리더니, 답이 마음에 든 것인지 소년이 가장 목마른 것을 던져주었다.

빠져나갈 기회를 주겠다, 고 했지. 여기까지 고생한 너를 위해 선택지를 줄게. 너는 엔터메의 힘을 믿는다며. 엔터메를 통해 모두를 구원하는 것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둘 중 어느 쪽을 택할 거야?”

청년은 소년을 향해 키를 보여주면서 손가락으로 버튼 두 개를 가리켰다. 아마 소년의 답에 따라 한쪽을 누르게 될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자신을 구할 것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는 소년이 답을 미루자, 청년이 재촉했다. 과거 무대 위에서 모두에게 사랑받았을 때처럼, 엔터테이너로 빛났을 때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 선택해. 한쪽은 내가 나갈 문을 열어줄 거고 나머지 한쪽은 네가 나갈 문을 열어줄 거야. 그리고 한쪽 문이 열리면 반대쪽 문은 열 수 없게 돼. 어서 선택해야지. 구할 사람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어느 쪽이야? 청년은 눈짓으로 묻고 있었다. 지금껏 생각해온 것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타협에 가까운 답을 택할 것인가. 소년의 입은 쉽게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모두를 구원할 거야.”

한참이나 지나 흘러나온 답은 소년의 신념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소년은 타협할 수 없었다. 그가 내놓을 답이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다만 청년이 무슨 계산을 하고 있을지 몰라 바로 꺼내지 못했을 뿐이다. 소년의 선택에 청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유감이네. 나는 힌트를 줬다고 생각했는데.”

가라앉은 목소리가 공간을 울리더니, 청년의 손이 오른쪽 버튼을 눌렀다. 다음 순간 청년이 갇힌 공간이 열렸다.

타협하지 않은 점은 칭찬해줄게. 하지만 틀렸어. 그 책임은 네가 지게 될 거야. 너는 누구도 구하지 못해.”

그렇게는 안 돼.”

소년은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그의 말은 유리벽 안에서 먹먹하게 맴돌 뿐이었다. 청년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쓰임이 사라진 키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말했잖아. 엔터메는 그 자체로 답이나 구원이 되진 않는다고.”

풀려나온 청년은 소년에게로 걸어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소년과 마주 섰다. 붉은 눈은 청년을 담았고 푸른 눈은 소년을 비추었다.

하물며 우리 같은 반쪽짜리가 하는 엔터메라면.”

청년의 장갑 낀 손이 소년의 뺨이 비치는 곳을 쓸었다. 살갗에 닿는 것은 없는데도 소년은 가죽의 질감을 느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것으로 임무는 성공. 잘 있어, 유우야.”

청년은 다시 반대편으로 걸어가더니, 자신을 가두었던 공간을 지나 열린 방문으로 향했다. 청년은 돌아보지 않고 빠져나갔고,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소년의 세상은 어둠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