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슌] 얼룩
청년은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제 옆자리를 더듬었다. 두 사람이 쓰기에는 좁은 침대의 한쪽은 누군가 뒹굴다 간 것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그러나 헤집어도 잡히는 것은 없다. 그것을 확인하자, 청년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새벽까지만 해도 그의 곁에 누군가 있었다. 시트를 흐트러뜨리고 그와 엉켰던 사람이. 분명 몸을 붙이고 있었는데 깨어나면 온기조차 찾을 수 없다. 처음부터 그런 인간이었다. 제멋대로 얽혔다 용무가 끝나면 사라지는. 짐작했던 일이건만 굳이 흔적을 헤집은 것은 괜한 오기일 뿐이다. 자신처럼 잔뜩 헝클어져, 풀어진 모습으로 곯아떨어진 상대를 확인하고 싶은.
언제 사라진 것인지, 어디로 간 것인지 짚어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손을 떠나면 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혹 마음이 동해 다시 찾아오지 않는 한, 얼마간은 마주칠 일도 없을 것이다. 청년은 옷을 갈아입으려 웃옷을 벗다 갑자기 몸을 찌르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무심결에 손이 닿은 부분이 자꾸만 욱신거렸다. 짐작 가는 것이 있어 그대로 몸을 돌려 거울을 보자, 불그죽죽한 상처가 등 이곳저곳을 덮고 있었다. 짐승이 심술을 부린 듯 거칠게 물어뜯고 긁어낸 자국. 청년은 거울에 비치는 자국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이따금 부주의하게 흘러나오는 신음을 급하게 삼키면서.
물어뜯고 할퀴는 짐승이, 있기는 했다. 청년은 지난밤에 자신과 몸을 붙였던 이를 떠올린다 ─ 맹금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단정한 얼굴과는 정반대로 감정도 욕망도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조악한 인간. 그는 청년의 곁에 누울 때면 꼭 제 이름처럼 굴었다. 먹잇감을 찾은 맹금인 양, 청년의 몸을 철저하게 괴롭히고 헤집는 것이다. 그와 함께한 밤은 그래서 꼭 몸에 상처가 남았다. 청년은 그것이, 그 조악한 맹금이 제 먹잇감을 표시하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여기저기 얼룩처럼 남은 상처를 한참이고 지켜보다가 청년은 겨우 옷을 입었다.
그 얼룩이, 청년은 싫지 않았다. 그에 담긴 것은 하나 ─ 상대가 온전히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청년만이 알았다. 먹잇감에만 관심이 있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쉽게 시선을 주지 않는 자였다. 그런 짐승이 스스로 청년에게 찾아들어, 품에서 날아가지도 않고 도리어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상처가 새겨질 때의 아픔과 보기 흉한 얼룩 따위는 청년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까다로운 맹금이 자신을 먹잇감으로 택해 이다지도 몰두하고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옷을 입으면 가려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흔적이었으나 혹 털어놓을 자가 있다면 청년은 한껏 지껄이고 싶었을 것이다. 내게 이다지도 깊게 흔적을 남기려 하는 맹금이 있다고. 나는 이 조악한 흔적이 몹시 마음에 든다고. 깊은 곳에서 샘솟는 과시욕을, 청년은 그저 누르고 있을 뿐이다.
그 버릇 나쁜 짐승은 너무도 갑자기 청년의 일상에 뛰어들었다. 거의 일상을 찢고 들어왔다 해도 좋을 것이다. 엔터테이너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청년은 수많은 팬을 상대하곤 했다. 때문에 청년은 처음에, 그 자 역시 팬이리라 가볍게 생각했다.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팬과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청년을 붙잡은 자는 가는 몸을 코트로 감싼 남자였다. 전혀 쌀쌀한 날씨가 아닌데도 숨이 막힐 정도로 단단하게 옷을 여민 것이 강박적으로 느껴졌다.
여느 때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인사를 꺼내자 남자는 청년에게 다가서 옷자락을 잡고 자신에게로 홱 끌어왔다. 기습적인 행동에 청년은 그대로 상대의 품에 무너졌다. 벗어나려고 해도 괴물 같은 힘으로 팔을 눌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청년을 자신에게 묶어둔 채 상대는 청년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물었다.
[데니스 맥필드. 하트랜드에 간 적이 있지?]
행동만큼이나 거칠고 투박한 목소리였다. 거기에 묻은 이질적인 억양이, 이곳 사람은 아니리란 걸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청년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타인에게 실수로라도 꺼낸 적 없는 일을, 처음 보는 자가 알고 있다는 게 의문스러웠다. 기억 속에 묻어두려 했던 일을 헤집는 것이 불편해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의 목소리엔 이미 확신이 배어있었다.
[어떻게 아셨는진 모르겠지만.]
상대는 그를 홱 놓아주었다. 반동으로 벽에 부딪힌 청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풀려나기는 했으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싸늘한 시선은 뒷걸음질 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2년 전, 하트랜드 침공 전 너는 가짜 신분으로 엑시즈에 입국했지.]
[꽤 상세하게 아는군요.]
그때 청년은 눈치챘다. 상대의 목소리에 묻은 낯선 억양이, 전쟁으로 짓밟힌 나라의 것과 닮아있다는 것을. 과거 청년이 비밀스레 들어섰던 곳이, 그리고 상대가 지금 입에 올리고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과연, 난민이라는 것인가. 청년은 자신에게 보이는 상대의 조급함과 이질적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제게 듣고 싶은 것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어쨌든 상대를 적당히 만족시켜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청년은 선수를 쳤다.
[엑시즈 출신으로 찾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협조해.]
[글쎄요, 제가 알 거라는 보장이 있나요?]
[들어.]
날아든 목소리는 싸늘했다. 언성을 높이지 않았음에도 긴장하게 하는 목소리였다. 청년은 상대의 차가운 눈이 먹이를 보는 맹금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남자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포식자였다. 언제든 먹잇감을 찢을 수 있는 사냥꾼.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단지, 먹잇감에게서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운 나쁘게 포식자의 시야에 든 자신은 발톱에 채이지 않도록 바라는 대로 따라줄 수밖에.
청년이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상대는 품에서 사진을 꺼냈다. 소중히 다뤄온 것이 분명한 사진 속에는, 청년과 닮은 소녀가 웃고 있었다.
[쿠로사키 루리. 알고 있나? 당시 네가 방문한 하트랜드에 있었다.]
[이런, 유감이네요. 닮은 사람은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은 마이아미에서만 쭉 살았으니.]
청년은 고개를 내저으며 상대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했다.
[정말로?]
[듣고 싶은 답이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없는 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더 들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남자는 그 이상 캐묻지 않고 사진을 다시 품속으로 숨겼다. 의외로 그 단정한 얼굴에 실망은 비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까지 수없이 좌절해, 실패에는 익숙한 것인지도 모른다.
[됐어. 어차피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그러면 이제 용건은 끝인가요? 돌아가야 해서요.]
[오늘은.]
막 상대에게서 등을 돌린 청년이 멈칫했다. 시원한 답을 주지 않고 여지를 두는 것이 수상쩍었다. 혹 남은 게 있을까 얼마간 살폈으나, 남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남자는 집요했다. 청년은 그 후 계속 자신의 일상 속에 침범하는 남자와 마주쳐야만 했다. 어떻게 자신을 찾아오는지는 몰랐다. 다만, 찾아올 때마다 그는 같은 것을 물었다.
청년이 엑시즈에 입국했을 당시 보고 들었던 모든 것.
[사적인 영역까지 그렇게 파헤치려는 이유가 있나요?]
청년은 언젠가 남자에게 물었다. 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루리를 찾을 수 있을 단서라도 캐내고 싶으니까.]
[엑시즈에서의 나를 파헤치다 보면 동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떨쳐내려면 떨쳐낼 수도 있을 사람이었다. 끈덕지게 찾아와 자신을 괴롭히는 자를 계속 상대하는 건 단지 그 미련함이 안쓰러워서였다. 전장에서 생명이란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전장에서 살아남은 자가 모를 리 없는데, 가족에 대한 애정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지.
[내가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요. 그걸 가지고 파악하기엔.]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해. 네놈은 그냥 기억하는 모든 걸 내뱉으면 된다고.]
남자는 으르렁댄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희망은 꿈같은 것이며 세상에는 나쁜 결말이 가득하다는 것을. 그런데도 집착하고 있다.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 버둥거리고 있다.
[내가 더 이상 협조해주지 않겠다면, 쿠로사키 씨?]
[네놈이 더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해야지.]
[꽤 자신이 있군요? 쥐고 있는 것이라도?]
심술궂게 받아쳤다. 눈앞의 맹금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고 싶어서. 뜻밖에도 남자는 웃었다. 언제나 쫓기기라도 하듯 경직되어 있던 그의 얼굴에 웃음이 걸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네가 숨기고 있는 걸 대중에게 내보이면 어떻게 될까?]
날아든 말은, 의미심장하다.
[너를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 네 치부를 내보이며, 데니스 맥필드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폭로하는 건 어떨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못 할 거라고 생각하나?]
다급해진 건 청년이었다. 상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왠지 위험하단 직감이 들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는 자신이 단단히 숨겨온 입국 기록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 이상, 현재 청년이 숨겨야 하는 것까지 이미 알고 있다 해도 놀라울 것은 없었다. 허세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여유로운 태도도 마음에 걸렸다.
[재미있는 사람이네, 당신.]
[드디어 가면을 벗었군.]
청년이 평소의 여유를 벗어던진 것이 남자는 흡족한 모양이었다. 청년은 상대를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부터, 끊어내는 게 나았다. 언제 자신에게 발톱을 드러낼지 모를 위험한 짐승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것이 언제 또 은근한 협박을 던질지 모르지 않는가. 성가신 것에 묶여버렸군. 청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막상 가면을 벗어던지자 남자를 상대하는 것은 한결 쉬워졌다. 청년은 세상이 아는 신사적인 엔터테이너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서 남자를 대했다. 날카롭고 공격적인 짐승은 그렇게 상대하는 것이 차라리 편했다. 남자는 남자대로 청년을 제멋대로 대했다. 아이처럼, 혹은 야생의 짐승처럼. 그들의 관계가 격식 없이 조악한 관계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이어져온 관계였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점점 깊게 얽혔다. 모든 것을 다 벗어던졌으므로 상대에게 기대할 것도 없다. 따라서 어디까지든 솔직해질 수 있고 어디까지든 추잡해져도 좋을 관계를 그들은 썩 편하게 여겼다. 청년은 남자 앞에서 분장을 지웠고, 남자는 청년을 멋대로 다루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관계는 질척해졌다. 그들을 잇는 목적이야 여전했으나 목적이 사라진다 해도 계속 엉킬 수 있을 정도로 깊숙하게 파고든 그들이었다.
몸을 붙이거나 밤을 보낼 정도로 질척해졌지만 서로에게 깊은 감정은 없었다. 특별한 욕망이 샘솟은 것도 아니다. 다만 무엇을 해도 관계없는 상대라는 것이, 그들이 모든 것을 상대에게 쏟아내도록 만들었다. 맹금은 사냥감을 물어뜯고 할퀴고 싶었다. 청년은 그 단정한 남자를 잔뜩 흐트러트리고 싶었다. 결국, 상대를 멋대로 다루고서야 만족한다. 그 조악한 본질은 아이들의 과격한 장난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에 청년은 단단히 중독되어 있었다. 이제 청년은 남자가 오는 것을 기다린다. 열쇠까지 주고서, 문을 열고 들어와도 좋으니 자신과 얽히기를 바라며. 처음 열쇠를 내준 것은 가벼운 마음에서였다. 그저, 바랄 때면 가벼이 들러도 된다는 뜻을 보였던 것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받아 챙기기에 그대로 잊어버렸을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그 열쇠를 훌륭하게 사용했다. 동거인이라도 되는 양 문을 열고 들어와 자연스레 제 집에 머물고 있는 자를, 청년은 종종 만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청년은 깊은 곳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게 좀 더 집착했으면. 좀 더 거칠게 나를 흔들었으면.
청년의 욕망은 그렇게 요약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상대가 남긴 상처를 자랑스러워하고 상처와 함께 남은 얼룩에 만족하는 것은 분명 비틀려있다. 아마, 어느 순간부터 뿌리부터 비틀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도, 상대도. 단단히 비틀리고도 비틀린 것에 만족해 기형적으로 자라나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을 묶는 목적은 전보다 희미해졌다. 남자는 결국 청년에게서 바라던 것을 긁어내고 말았으므로. 그러자 청년은 다른 것에 눈을 돌렸다. 영원히 봉인하려고 했던 것, 과거 자신이 그의 나라에서 조사했던 것 중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단서를 슬며시 던져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남자의 눈은 무섭게 번득였고 한동안 그것에 몰두했다. 청년은 자신이 상대에게 먹이를 주어 바라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 흡족했다.
청년이 공개하지 않은 것은 많았다. 즉, 아직 상대를 뒤흔들 수 있는 것이 많다는 뜻이다. 천천히, 교묘하게, 중요하지 않은 것부터 풀어나갈 작정이었다. 가능한 오래도록 그를 쥘 수 있도록. 정보라는 무기를 쥔 것은 남자뿐만이 아니었다. 청년도 마음만 먹으면 상대에게 영향을 미칠 정보를 품고 있었다. 우연히 습득한 체 풀어내는 것 외에도, 그를 뒤흔들 수 있는 것까지. 사실 청년은 남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의 고향이 왜 침략자의 눈에 들었는지. 침략자가 전쟁을 위해 언제부터 어떻게 준비해왔는지. 그의 고향이 어떠한 방식으로 짓밟혔는지.
그리고 그가 멈칫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것까지도.
청년은 서랍을 열어 서류를 꺼낸다.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고 오래도록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과거 청년이 비밀스레 남자의 고향으로 숨어든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두툼한 서류의 첫 장에는 남자에게도 낯설지 않을 한 소녀의 사진이, 그 이름과 함께 붙어있었다. 쿠로사키 루리. 청년은 그 이름을 노래하듯 읊었다. 루리. 남자가 찾아 헤매는 사람, 하나뿐인 가족의 이름. 한때 청년이 관찰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대상.
만일 이것까지 그에게 내보인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그 제멋대로인 맹금도 단숨에 뒤흔들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은 맹금의 이름에 걸맞은 날카로운 눈이 처음으로 흔들리는 것을 상상한다 ─ 아, 그건 얼마나 진귀한 광경일까. 그러나 청년은 자기가 쥔 최상의 패를 쉽게 소모할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다 가장 효과적일 때 터트리도록 하자. 그래서 그 사나운 것이 철저하게 무너지는 것을 즐거이 지켜보도록 하자. 청년은 언젠가 자신이 보여줄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를 생각하며, 서류를 다시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