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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슌ts] 일곱 번째

현소야 2016. 9. 14. 23:14

 

그녀는 일곱 번째였다. 그것은 그녀가 사내의 일곱 번째 파트너이자 지금껏 그와 함께한 쿠로사키중 일곱 번째임을 뜻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의 파트너는 언제나 쿠로사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다. 파트너가 여섯 번 바뀌어 일곱 번째까지 올 때까지 예외 없이 유지된 법칙. 게다가 그 모든 이들은 틀에 찍어낸 듯 외형과 성정마저 같았다. 그의 파트너라면 마땅히 그런 인간이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쿠로사키라는 이름에, 녹색 머리칼과 금빛 눈을 가지고, 목적을 꼭 이루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품은 여자. 그것이 그가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파트너였다.

물론 그녀는 평범한 인간과는 달랐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살아가다 죽는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져 자신의 책임을 다하면 소멸하는 존재였으므로. 세상에 문제가 닥칠 때마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존재가 그녀였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강한 힘과 목표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에 인간의 사고와 외형을 씌운다. 중요한 것은 쿠로사키라는 인간이 아니라 그녀 내부에 심은 것들이었으므로 그 외의 모든 것은 언제나 똑같이 찍어낸다 해도 놀라울 것은 없다. 쿠로사키라는 이름은 그녀를 식별하기 위한 이름이었고 그녀의 성정은 그저 인간으로 기능하도록 적당히 넣어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는 인간이었다. 그녀와 다르게, 사람을 통해 태어나 성장하고 자연히 죽는 존재. 평범한 인간의 눈에 비친 그녀란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인지. 목적을 위해 태어나 목적을 이루면 소멸하고, 시간이 흘러 필요가 생기면 새로이 만들어진다. 새로 만들어진 그녀는 이전에 소멸한 그녀와 무엇 하나 다르지 않으며, 현재의 그녀가 소멸한 후 다시 만들어질 그녀 또한 그러할 것이다. 짧은 생을 살다 재활용하듯 다시 만들어질 자신의 운명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그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필요만을 다하고 사라졌다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사내는 인간이므로 조금씩 나이가 들고, 노련해지고, 모습이 변해갔다. 그녀는 만들어지고 소멸하길 반복하는 존재이므로, 사내가 나이가 드는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첫 번째 그녀를 만났을 때 십대였던 사내는 이제 중년에 접어들었는데 일곱 번째 그녀는 최초의 그녀처럼 십대의 모습이었다. 언제나 기억 속 모습으로 자신을 찾는 그녀를 볼 때마다 사내는 그녀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존재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간이었고 그녀는 인간의 모습을 쓴 장치였다.

그녀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라면, 사내는 그녀의 파트너로서 세상을 지키도록 선택받은 인간이었다. 그녀가 새로 만들어질 때마다 사내를 찾는 것은 그래서였다. 어떤 위기 때문에 만나게 되건 그녀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으므로, 소멸할 때가 되면 다음번에 찾아들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자신이 남긴 흔적을 전부 지워야 했다. 그녀는 이후에도 자신과 만나게 될 사내의 머릿속에만 자신을 남겨두었다.

결국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그녀와 사내 둘 뿐이었으나 그녀는 그가 만났을 선대의 쿠로사키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사내는 그와 달리, 그녀 이전의 그녀들을 각자 다른 식으로 기억했다. 어쩌면 그것은 사내가 인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보통 자신을 스쳐간 사람을 기억하고 해석하려 하는 존재이므로.

사내는 이따금 지나간 파트너들을 떠올리면서도, 바로 눈앞의 파트너에게 선대의 이야기를 꺼내진 않는다. 꺼낸다 한들 의미가 있을까. 소멸하는 순간 자신과 함께 쌓은 것들도 전부 흩어졌을 텐데. 새롭게 만들어진 그녀에게 심긴 것은 몇 번이고 재활용한 자아와 목적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전부일 것이다. 그녀가 찾아올 때마다, 그는 이전과 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을 새로이 만나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파트너일 뿐이므로 함께했던기억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함께 움직여야 할 때 만나, 협력하고,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과거를 펼쳐볼 이유가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래도, 사내를 스쳐간 여섯 명의 쿠로사키는 사내가 특별한 파트너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했다. 사내는 이제 그녀가 비현실적인 존재이며 인간과는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그녀의 사고방식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그녀에 대한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왜 그런 운명을 짊어져야 했던가. 왜 언제나 소멸했다 돌아오는가. 그리고 그녀는 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가. 의문이 풀리지 않아, 사내는 세 번째의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왜 당신은 목적을 다하면 사라지지? 사명을 이어간다면, 더 살아남아 계속 봉사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아무리 그녀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 해도,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세상이 그녀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 그것이 사내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결말을 알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소멸한 두 명의 쿠로사키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만들어낸 목적이 사라지면 삶의 가치도 소멸하기 때문이지.]

[인간은 목적 없이도 살아가. 그들에게 삶의 가치를 요구하진 않아.]

[그건 그들이 본능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야. 나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존재니 다르지 않겠어? 의도를 가지고 만든 존재는 삶의 가치까지 결정된 채로 세상에 나오게 되는 거야.]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또 언제 필요해질지는 예측할 수 없잖아. 언제 일어날지 모를 위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이전에 만들어낸 것을 계속 관리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는 모양이지.]

다섯 번째의 그녀에게 물었을 때도 같은 대답을 했다. 그들의 사상은 소멸을 거듭해도 달라지는 일이 없었다. 사내는 그것이 오싹했다. 아무리 새로 만들어져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가 본능적으로 자신을 위할 수밖에 없는 생물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했기 때문에. 아마 지금의 그녀에게 물어도 같은 답이 돌아오리라. 그녀는, 쿠로사키는, 그렇게 설계된 존재일 것이다.

명백하게 불합리한 설계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본능처럼 주입한 사상을 일개 인간인 그가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령 관여할 수 있다 한들 그것이 그녀를 위한 길인가. 정해진 결말을 거부하다가 끝내 그에 꺾이는 것이, 예정된 것을 얌전히 받아들이는 것보다 나은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누구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을 인식한 때부터 사내는 그저 파트너로서 그녀가 만족스레 임무를 끝내고 사라질 수 있도록 움직일 뿐이었다. 세상에서 그에게 기대하는 역할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그렇게 사내는 여섯 명 쿠로사키의 파트너로서 세상을 지켰고 그녀들의 종말까지 지켜보았다. 여섯 명을 거쳐, 세상이 다시 만들어낸 쿠로사키는 지금 그의 집무실에 있다. 사내가 열여섯 살로 최초의 그녀를 만났던 곳에서, 일곱 번째의 그녀는 사내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사내에게 향한 눈은 날카롭게 그를 파헤치고 있었다. 그 금빛 눈을 볼 때마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금이 떠올라, 사내는 그녀의 신분을 만들 때 쿠로사키에다 를 뜻하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아카바 레이지.”

소년 시절부터 들었던 목소리가 또렷하게 집무실을 울렸다.

무슨 일이지, 쿠로사키.”

돌려준 것은 과거에 비해 낮고 거칠어진 목소리였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년의 목소리는 어른의 것으로 가라앉았다. 이곳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그녀뿐이다.

여기, 잘못되었어.”

가느다란 손가락이 짚고 있는 것은 사내가 작성한 자료의 한 부분이었다.

당신답지 않게 조급했네. 나쁘지 않은 계산이지만 위험요소를 간과했어.”

세상을 뒤흔드는 힘을 가진 사내를, 그렇게 어린아이 다루듯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그녀 하나뿐일 것이다. 사내는 인간으로서 뛰어난 존재였고 여자는 처음부터 우수한 장치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사내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해도 그녀에겐 인간으로서는 따라잡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정밀하나 이따금 사소한 오류를 동반하는 그의 판단과는 달리 그녀의 연산엔 결코 오류가 없다. 나이가 들수록 오류는 줄어들고 계산이 철저해졌음에도 사내는 아직 그녀의 연산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사내는 솔직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고 여자는 차를 홀짝이며 그의 계획을 수정했다.

그녀의 잔에 담긴 것은 세 번째의 쿠로사키에게 선물한 적 있는 차였다. 그때 이후로 사내는 그 차를 곁에 두고 마셔 이제는 일상적으로 입에 대게 되었다. 이십여 년 전의 것을, 만들어진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그녀가 알 리 없다. 이제는 익숙해진 씁쓸함을 사내는 입에 머금었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군.”

장치에는 무엇이든 넣을 수 있으니까. 세상에 대한 사랑도 주입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럴 수 없는 인간의 시각에선 놀라워.”

그렇게 따지면 나도 당신이 신기한데.”

어떤 점에서?”

자신의 욕망도 목적도 삶도 있는 사람이 세상을 위해 움직인다는 고된 책임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게.”

나는 그렇게 교육받은 인간이니까.”

어려서부터 뛰어난 인간이었던 사내는 타고난 능력과 지위를 세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그 결과로 사내는 아득히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에 삶을 바치게 되었다. 아마 그가 그녀의 파트너로 선택받은 것도 어릴 때부터 그의 머릿속에 단단히 박힌 그 사상 때문이리라.

당신의 협력이야 고맙지만, 세상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는 건 인간에겐 족쇄이지 않아?”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족쇄가 될 이유는 없지.”

특이한 인간이네.”

여자는 깔깔대더니 수정한 계획을 사내에게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남은 시간은 2주 즈음.”

계획의 성공은 세상에 닥친 위기가 해결된다는 것을 뜻하고, 그녀가 오래지 않아 소멸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내는 여자가 자신의 남은 날을 헤아리는 게 어쩐지 오싹했다.

이번에는 마지막 임무까지 일 년도 걸리지 않았네. 경험이 쌓이다 보니 능숙해진 모양이야, 아카바 레이지.”

이런 일만을 위해 만들어진 쿠로사키를 일곱 번 겪었으니까.”

십대의 소년이 중년의 사내가 되기까지, 세계에 여섯 번의 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의 곁에는 세상에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낸 우수한 파트너가 있었다. 그 모든 위기를 해결하며 그 역시 발전할 수밖에.

그렇네. 함께할수록 당신도 더 발전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여덟 번째는 만들어지지 않으면 좋겠어.”

?”

만들어진다는 건 다시 세상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잖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건 쿠로사키는 영영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

사라지면 어때. 처음부터 사라지는 기능까지 내장된 채 만들어진 장치인데.”

그녀는 최초의 쿠로사키의 얼굴로 세 번째의 쿠로사키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여섯 번째 쿠로사키처럼 웃었다. 사내는 자신이 그녀들에 대한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렇게 증오스러울 수 없었다. 자신도 그녀의 소멸과 함께 그녀를 잊는 존재였다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 텐데.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당신도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괴상한 책임으로부터.”

나는.”

사내는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을 부정하고 싶어서. 책임에 묶인 탓에 괴로웠던 적도 많고 고뇌한 적도 많았으나, 책임을 저버리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고. 그 모든 말은 한 문장으로 압축되었다.

나는, 다음번의 당신을 만나도 좋아.”

결과적으로, 그들의 계획은 성공했다. 일곱 번의 위기 중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단기간 만에 거둔 성공이었다. 사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친 파트너를 본다. 세상에 다시 평화를 가져왔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으나, 그녀에게는 어떤가. 세상에 더 이상 위기가 없다는 것은 그녀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뒤처리가 끝나는 대로, 그녀는 다시 그를 떠나게 될 것이다. 그 후 언제 다시 그녀가 찾아올지, 아니, 과연 찾아올 기회가 다시 생길지는 알 수 없다.

여섯 번이나 경험한 것인데도, 사내에게 이별을 준비하는 것은 그리 편치 않았다. 담담한 것은 오히려 그녀였다. 곧 일 년도 되지 않은 삶을 마감하고 세상에 있었던 흔적도 지워지게 되는데, 세상이 빨리 안정을 찾도록 뒤처리에 몰두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가끔, 파트너에게 짓궂은 말을 던지곤 했다. 여덟 번째의 나는 어떨까. 여덟 번째는 나보다 나은 쿠로사키가 될 수 있을까. 그때의 당신은 몇 살일까. 그때는 내가 당신의 오류를 고쳐줄 이유가 없게 될까? 그런 말을 대강 넘겨버리던 사내였으나, 뒤처리가 거의 끝났을 무렵에는 어쩐지 거북해져 결국 받아치고 말았다.

벌써부터 다음을 이야기하는 건가?”

하긴. 다음이 없을 수도 있겠네. 세상이 오래도록 평화롭다면 내가 만들어질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 뜻이 아냐.”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치로 만들어진 존재는 인간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했다.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쿠로사키만을 생각하고 싶어.”

그녀의 눈이 둥그레졌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던 걸까. 완벽한 연산 장치도 인간에 한해서는 모든 답을 예측해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나에 대한 배려야?”

그것을 배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내는 자신이 없어 차마 답하지 못했다.

그렇게까지 친절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인간으로 대우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당신은 자주 착각하는 것 같지만. 여자는 덧붙였다. 물론 사내는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평범한 인간일 수 없는 존재임을 안다. 목적으로 만들어져 목적으로 움직이고 목적이 사라지면 소멸하는 운명을 당연히 여기는 장치임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사내는 그녀를 온전히 장치로 대하지는 못했다. 인간의 모습을 쓰고 있어서인지, 일곱 번이나 같은 모습으로 찾아온 탓에 이미 익숙해진 존재여서인지 알 수 없다. 긴 시간을 함께했다면 상대를 정확하게 볼 수 있을 텐데도, 사내는 이상하게 그 부분에서만은 어리석었다.

그리고 끝까지, 사내는 어리석었다. 모든 것이 끝나 그녀와 헤어져야 할 때였다. 사라질 때를 직감한 여자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이뤄낸 것을 보고 싶다며 그를 잡아끌어,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최초의 그녀와 만났을 때 사내는 그녀를 잡아끌고 이곳으로 데려온 적이 있었다. 열여섯의 소년은 자신이 군림하던 도시를 가리키며 파트너에게 말했다. 내가 지키고 싶은 곳이다.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사내는 정말로 세상을 구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여섯 번의 만남이 더 있었다. 일곱 번째의 파트너는 일곱 번 지켜낸 도시의 야경을 눈에 가득 담았다. 이제 곧 그녀는 이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평화를 지켜낸 이는 둘이지만, 사람들은 한 사람, 사내에게만 감사하리라. 그것이 안타까워, 사내는 소멸을 앞둔 여자에게 굳이 인사를 건네려 입을 열었다. 그녀가 구해낸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그녀는 세상을 위해 모든 걸 바친 인간이 아니라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장치임을 알면서도.

나의 세계를 지킬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마워. 쿠로사키.”

참 변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당신다운 말이야.”

가벼이 던진 말이었으나 사내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에 깔린 것이 수상쩍었기 때문이다.

꼭 오래 지켜본 사람처럼 말하는군.”

지켜본 건 아니지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쭉 확인했는데?”

여자의 금빛 눈엔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우리들의 기억은 축적돼. 더 나은 판단을 위한 참고자료로서. 사전을 펼치듯 기억 속 사례를 펼쳐보고 그에 따라 판단을 내리도록 설계된 거야.”

사내가 나이가 들수록 발전하듯, 그녀 또한 이전의 개체보다는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했다. 새로 만들어질 때마다 더 노련해지고 똑똑해져야만 했다. 그래서 선대의 기억을 후대가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일곱 번째로 만들어진 쿠로사키는 만들어진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으나 여섯 명의 쿠로사키가 쌓은 오랜 기억을 안고 있었다. 물론 선대가 느낀 그대로 볼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관찰자로서 그들의 기억을 열람할 뿐이다. 그렇다 해도 오랜 파트너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파트너의 눈이 드물게 흔들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 기억은 아니지만 우리들이 공유하는 기억들. 그 속엔 언제나 당신이 있었어. 우리들은 만들어진 이상 당신과 함께할 수밖에 없으니까.”

파트너로서 사내와 의견을 조정할 때, 그녀는 기억의 박물관으로 들어선다. 선대들의 기억이 담긴 전시실에서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확인한다. 여섯 개의 전시실을 오가며 과거의 그를 만나고, 현재의 그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계산을 마쳤다. 그래서 그녀는 그토록 능숙하게 파트너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만난 당신은 지금보다 감정에 솔직했어. 세 번째로 만난 당신은 나를 가여워했지. 다섯 번째로 만난 당신은 노련했고 여섯 번째로 만난 당신은 존경받고 있었어. 내가 만난 당신은 이제 내 연산과 거의 비슷한 판단을 내릴 정도로 뛰어난 인간이 되었고.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당신의 큰 줄기는 변하지 않았어. 긴 시간 동안 나이가 들고 성숙해져도.”

세상을 사랑하고 자신의 책임을 어떻게든 끌어안는다. 얻기 위해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비정한 인간이라 오해받기도 하나, 버린 만큼 괴로워한다. 감정을 절제하는 데 능해 잘 드러나진 않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다. 그것이 선대의 기억을 열람하고 실제로 그와 함께하면서 알게 된 그의 특징. 사내는 인간이었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변화했으나 그러한 점은 일관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두고 말할 수 있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람이라고.

선대로부터 모든 기억을 이어받은 파트너 앞에서 사내는 다시 열여섯의 소년이 된다. 막 그녀를 만났을 때의, 너무 빨리 어른이 된 소년으로. 그러다가 이십대 중반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 되고, 서른을 넘긴 사내가 되고, 여섯 번째까지 그녀와 함께한 중년의 사내로 돌아온다. 일곱 번째 파트너와의 이별을 앞둔 사내는, 비로소 묻는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사라지기 전에 해.”

당신에게 나는, 좋은 파트너였나?”

모든 기억을 안고 있다면 감히 묻고 싶었다. 그녀들의 짧은 생을 언제나 함께했던 자신은,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었느냐고. 혹 짐이 되지는 않았느냐고. 목적을 위해 만들어져 소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적어도 살아가는 동안은 고통도 고뇌도 없길 바랐으니까. 그녀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 반문했다.

당신에게 나는 어땠는데?”

고마운 사람이었지.”

다행이네. 기뻐.”

일곱 번째의 그녀가 웃었다.

답을 돌려줘야겠지. 내게 당신이 어떤 파트너였는지.”

그녀는 몇 걸음 걸어 그 앞에 섰고, 발을 들어 그의 귓속에 무어라 속삭였다. 사내가 그 말을 되새기기도 전에 그녀는 빛에 휩싸였고 그의 뺨에 잠깐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눈을 찌르는 빛이 흩어졌을 때 그녀는 이미 없었다. 일곱 번째의 이별이었다. 사내는 여자가 있었던 곳을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분명 그에게 만족스러운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