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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슌] 죽은 말

현소야 2016. 8. 18. 21:49

 

  언젠가부터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귓속을 파고드는 소리는, 비명과 울음소리다. 제대로 터져 나오지도 못한 채, 막에 가로막힌 듯 먹먹하게 막힌 소리.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비롯했는지 청년은 안다. 청년은 손에 쥔 카드를 내려다본다. 겁에 질린 얼굴의 사람이 그려진 카드가, 손 안에만 몇 장이었다. 소리의 출처는 바로 그곳. 패자가 갇혀버린 카드였다. 청년과의 싸움에서 패해 한갓 종잇조각으로 변한 자들이 걸핏하면 카드 속에서 외치는 것이다. 꺼내달라고. 살려달라고. 차가운 세상이 무섭다는 울음 섞인 소리도 있었다.

  갇힌 자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말로 그들이 호소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러나 청년은 한순간 카드를 훑을 뿐 이내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만다. 좀 더 시선을 두었다간 먹히고 말 것이다. 쓰러트린 자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의 증거에. 무력한 종잇조각이 된 자들이 소리를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머리를 치는 울음은 전부 환청일 뿐이다.

  환청이 시작된 건 언제부터였던가. 청년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미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기에 그랬다. 그가 선 곳은 전장이었고 전장에선 수많은 싸움이 일어나며, 그 끝에는 패자가 남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청년의 세상은 무장한 군사 하나 없는 평화로운 세상. 갑자기 밀려든 침략자에 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 지옥에서 청년은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 패자가 된 동료들은 한순간에 종잇조각으로 변해 바닥에 흩어졌다. 비현실적이라 더욱 끔찍한 죽음이었다. 눈앞에서 아는 자들이 카드로 변하는데, 살아남기 위해 두고 도망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비극이었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쓰러진 동료들의 울음이 달라붙었다. 살려줘, . 여기서 꺼내줘. 적에게 쫓겨 도망치는 내내 그 가여운 울음이 발목을 휘감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동료들의 말은 원망이 되었다. 왜 너만 살아남았어? 왜 우리를 구해주지 않았어? 그럴 때면 청년은 돌려줄 말이 없어 입술만 깨물었다. 살아남은 것도 죄스러운 일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홀로 살아남은 것은 비겁한 일이었다며 눈물을 쏟고 스스로 쓰러져야 하는가. 그렇게 동료들의 울음을 잠재울 수 있었다면 마음은 편해지련만 청년은 그럴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서 살아남아야 했다. 되찾을 것이 있어서 끝까지 버텨야만 했다. 그래서 청년은 동료들의 원망을 흘려버렸다. 다만 그들 대신, 끊어져버린 그들의 삶을 짊어지고 살아남으려 했다. 그 결과가 도망치지 않고 적에게 맞서기로 한 결심이었다. 쫓기기만 하던 먹잇감은, 살아남고자 하는 열망으로 무장해 덤벼들었다. 적과 같은 무기를 든 채,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상대했다. 그래서 그저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이었던 청년도 결국 적군을 쓰러트릴 수 있게 되었다.

  적은 패배하는 순간, 청년의 동료가 그러했듯 영혼이 봉인당해 종잇조각으로 나뒹굴었다. 처음 적을 쓰러트려 카드가 된 적을 집어 들었을 때 가증스럽게도 그것이 울었다. 무서워. 살려줘. 꺼내줘. 동료들이 그러했듯이. 그때부터 그를 괴롭히는 것에, 적의 목소리도 추가되었다. 나아가는 이상 싸움은 멈출 수 없으므로 청년은 언제나 패자의 울음에 시달려야 했다. 쓰러진 동료는 그마저 쓰러지길 바랐고 쓰러트린 자들은 공포에 짓눌려 울었다. 들려서는 안 될 소리로 가득한 세상은 언제나 어지러웠다. 구하기도 어려운 식량으로 겨우 배를 채우곤 지독한 환청 때문에 보람도 없이 게워내기도 했다.

  왜 패자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가.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적을 쓰러트리는 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던가. 혹은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남은 것에 대한 가책인가. 청년은 입매를 비튼다. 아니, 가책 같은 것은 오래 전에 버렸다. 그런 것을 안아서야 전장에선 버틸 수 없으므로. 전쟁에서 명분과 정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지배자뿐. 청년 같은 일개 전사는 가책도 윤리도 버리고 그저 눈앞의 싸움에만 매달려야 했다. 그런 삶을 충실하게 이어온 청년이었다. 어쩌면 환청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싸움을 거듭할수록 그가 지쳐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너무 많은 싸움에서 너무 많이 닳았다.

  가책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한들, 싸움 자체가 남기는 타격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수없는 싸움을 거친 인간이 황폐해지지 않을 수는 없다. 그 후유증으로 환청에 시달리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끝까지 안고 갈 수밖에 없으리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혹은 자신이 쓰러져 자신을 괴롭히는 패자들과 같은 종말을 맞을 때까지. 청년은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이번에 쓰러트린 것은 누이 또래의 앳된 소년들이었다. 전장에서 기다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쟁이란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도 모르는 채 교관이 주입시킨 것만 믿고 전장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어린 것이어도 적은 적이었으므로, 청년은 적을 쓰러트린 것에 후회는 남기지 않는다. 다만 잠시도 쉬지 않고 머리를 치는 소리가 견디기 힘들다. 먼저 무기를 들고 덤벼든 주제에, 그 전에 수많은 또래 아이들을 쓰러트렸을 주제에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 것인지. 청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쓰러진 적을 아무렇게나 흩어버리고 걸어갔으나, 아무리 걸어도 쓰러트린 것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걱정 마. 나중에는 나도 그곳에 들 거다.

  청년은 불쑥 중얼거렸다. 물을 머금은 적 없는 모래처럼 지독하게 건조한 목소리로. 돌아보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이 향한 곳은 이미 바람에 휩쓸렸을지도 모를 패자들이었다.

  모든 것을 구하고, 전부 되찾고, 내가 필요 없게 되는 날에는 너희와 같은 길을 택할 테니까.

  그러니, 그때까지만 울음을 그쳐. 청년은 쓰러진 이들을 달래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자신의 종말까지 미리 결정짓고서. 그것이 닿은 것인지, 패자의 목소리가 한순간이나마 잦아들었다. 들려선 안 될 울음이 지나간 곳에 남은 것은 폐허에 어울리는 죽음 같은 고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