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사키 남매] 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쓰러진 반역자는 손을 뻗어 자신을 쓰러트린 집행인의 발목을 붙들었다. 종말을 앞둔 자의 최후의 발악일 것이다. 제복을 입은 집행인은 반역자를 내려다보더니, 자신을 붙잡지 않은 손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갈라진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리는 것도 잠시, 쓰러진 자는 오래지 않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럼에도 발목을 붙든 손은 풀릴 기미가 없다. 집행인은 몸을 숙여 발목을 휘감은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 반역자의 귓가에 낮게 으르렁대는 집행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지막 저항까지 떨쳐낸 승자는 팔에 장착한 장치를 가동시켰다. 반역자는 남은 힘을 짜내 고개를 들었고, 자신을 처리하는 자를 한순간 올려다볼 수 있었다. 가면을 써 얼굴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지만, 가면 아래 비치는 표정은 벌레를 보듯 싸늘하고 살짝 비치는 금빛 눈은 맹금처럼 매섭다. 그 눈에 먹혀버릴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반역자는 빛에 휩싸였다. 빛이 걷힌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반역자의 종말이란 그토록 허망한 것. 그 광경에 공개처분을 지켜보던 정복자들은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질렀다. 사람의 종말이 한갓 볼거리로 격하되는 끔찍한 순간이었다.
집행인이 반역자의 목숨을 바로 거두지 않은 것조차 어쩌면 계획된 일일지도 모른다. 정복자는 반역자의 부질없는 저항을 지켜볼수록 흥분했기 때문에. 의도된 실수, 공개적으로 펼쳐지는 ‘죽음’, 타인의 종말에 대한 환호. 무엇 하나 오싹하지 않은 것이 없는 풍경에 오싹한 것이 하나 더 끼어들었다. 이번에는 할 일을 마치고 처형대를 떠나려는 집행인에게 야유가 꽂혔다. 수많은 말 중에서 드문드문 집행인의 귀에 꽂히는 것은 ‘죽어버려’ 따위의 저주였다. 그럼에도 가면 아래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사람들의 말에 돌아보는 일도 없다. 이미 너무도 익숙한 것처럼.
집행인은 야유의 근원을 모르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자신이 처형대로 향해 처음 반역자를 처단했을 때부터 따라붙었던 것이기에. 그러나 그 뿌리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저 모른 체 넘길 수밖에 없었다. 야유에 휘말려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정복자가 바라는 것이다. 집행인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얌전히 따라줄 마음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처음부터 들리지 않은 것처럼 자리를 떠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그렇게 집행인이 처형대를 담담하게 걸어 내려갈 때였다. 갑자기 야유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야유하던 자들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려한 예복을 입고 상좌에 앉아 모든 것을 지켜보던 소녀에게로. 소녀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집행인을 바라보며 박수를 보냈다. 세상을 지키는 힘을 가지고 태어나,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성녀가 경멸받던 집행인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끔거리던 사람들은 서서히 야유를 거두었다. 성녀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조용해진 처형장을 집행인은 무사히 빠져나갔다. 그가 빠져나가고 오래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것은 대개, 성녀 때문에 일시적으로 야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집행인에 대한 것이었다. 프로페서의 자비로 살 수 있게 된 것이. 비천한 사냥감 주제에. 뻔뻔하게 우리 앞에 서서. 그들이 물어뜯고 있는 것은 집행인의 불명예스러운 출신이었다. 집행인은 이름도 나이도 출신지도, 어떤 정보도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인간이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선 그가 망국의 패잔병 출신이라는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정복자는 자신이 짓밟아 복속시킨 국가의 모든 것을 경멸했다. 유민이라고 다를 리 없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은 탄압 속에 숨죽여 살게 되었고, 재건을 꾀한 자들은 반역자의 이름으로 끌려와 죽음을 맞았다. 집행인은 정식으로 그들 사회에 들어서 반역자를 처형하는 임무를 맡은 인간이었지만, 그가 망국의 유민이라면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했다. 패전국의 인간은 정복자와 나란히 설 수 없다고 그들은 굳게 믿었으니까.
확실한 증거는 없어도, 이미 정복자들 사이에서 집행인이란 망국의 잔당 주제에 정복자의 세상에 발을 들인 비천한 것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가 처형대를 떠날 때면 야유를 쏟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들의 악의는 번번이 가로막히곤 했다. 하필 성녀가 그를 싸고돌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교묘하게 괴롭혀 스스로 정복자의 세계를 벗어나도록 만들 계획이었는데 성녀가 나서서야 몰아세우는 것조차 어렵다. 왜 성녀가 그러한 치욕스러운 존재를 용인하고 감싸기까지 하는지, 사람들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왜 그를 보호하려고 하냐 하셨습니까.]
언젠가, 집행인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가 성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를 감싸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때 성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흰 웃음을 걸치며 답했다.
[그야, 제가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출신도 모를 사람에, 온갖 소문이 따라붙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으신지요?]
성녀는 아직 소녀라 불릴 나이였으나 그 권위에 걸맞게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힘이 실린 목소리에 상대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는 반역자와 같은 불순물을 처리하기 위해 제가 선택한 사람. 그에 대해 불만을 내비치는 것은 제 선택을 문제 삼는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성녀는 그렇게 모든 의문과 불만을 봉쇄했다. 그 후 사람들이 집행인에 대한 마뜩찮은 기색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 그것만으로 집행인에 대한 흉흉한 손길이 걷혔으면 좋았으련만, 부드러운 위협이 깔린 성녀의 말은 집행인에 대한 드러나지 않은 악의마저 막아주진 못했다. 여전히 그는 정복자의 먹잇감이었으며 언제 그들에게 떠밀려 추락할지 모를 약자에 불과했다. 성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정복자가 어떤 술수를 펼칠지는 누구도 몰랐다.
처형장을 빠져나온 집행인은 자신에게 향하는 경멸 섞인 시선을 외면하며 사람들이 쫓을 수 없는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비웃음이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목적지에 닿았다. 청년은 주위를 둘러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자 숨겨진 길로 슬며시 몸을 넣고,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좁은 통로를 한참이고 걸어 도착한 곳은 화려하게 장식된 성소. 성녀가 지내는 곳이었다. 문을 살짝 두드리고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성녀가 그를 맞이했다.
집행인은 성녀를 만나고서야 겨우 얼굴에 웃음을 걸친다. 성녀도 부드럽게 웃으며 집행인의 가면을 벗겼다. 가면 아래 숨겨져 있던 것은 갓 스물이 되었을까 싶은 앳된 청년이었다. 단정하고 번듯한 얼굴에는 작은 상처 하나 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피부는 병적으로 희고 머리카락은 노인처럼 완전히 하얗게 세어있었다. 거기에 꺾일 듯 가는 몸까지 합쳐져, 청년은 어딘가 병든 인상이었다.
“몸은?”
청년을 앉힌 성녀가 그의 곁에 앉으며 물었다. 붉은 눈에 깃든 것은 반가움. 아무래도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듯했다. 서로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문제없어.”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천천히 말려죽이라고 하기에 처형까지 시간이 좀 걸렸거든. 조금 쉬면 나아질 거야.”
몇 년 전 큰 사고를 당해 몸이 망가졌던 청년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회복하고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쉽게 피로를 느끼고 언제나 쓰러질 듯 위태로운 인상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담담하게 말하긴 해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약한 몸을 가진 그에게는 오늘도 고된 하루였을 것이다. 성녀는 위로하듯 청년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청년의 눈이 서서히 감긴다.
“오늘도 같잖은 말들이 나왔지. 그런 자들 따위 무시해, 슌.”
“신경 쓰지 않아. 어차피 관계없는 사람이고.”
어차피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진 이상 정복자의 독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청년이었다. 드러나지 않는 배척에 대해선 이미 포기한 지 오래. 공개된 곳에서 드러내놓고 자신을 물어뜯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상당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성녀의 보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
“게다가 네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안전하니까.”
“물론 안전해야지.”
성녀는 청년이 좀 더 편히 쉴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며 덧붙였다.
“내 오빠인데.”
*
성녀는 잠든 청년에게 담요를 덮어주며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잠이 들고도 통증에 시달리는지 창백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것이 안타깝다. 깨어있는 동안은 긴장을 풀지 못해 억지로 참아왔던 것이 긴장이 풀리자마자 일시에 밀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본디 청년은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인간이었다. 조금이라도 무리하면 바로 바스러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인간이기에 그랬다. 청년이 안고 있는 모든 고통은 과거의 사고가 남긴 것. 사고라. 성녀는 그 단어를 입에서 굴려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사고였으면 나았을 것이다.
청년은 이미 한 번 죽었던 사람이었다. 전장에서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싸우다 결국 몸이 버티지 못해 쓰러지고 만 것이다. 마지막 싸움에서 청년은, 적에게 붙들린 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 누이를 적에게서 구해내 아군에게 안전하게 넘기려던 순간 청년은 쓰러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연료가 떨어진 기계처럼. 누이의 붉은 눈은 그대로 오빠에게 향했다. 쓰러진 오빠는 표본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멎어버린 것이 거짓말 같아, 누이는 손을 뻗어 오빠의 얼굴을 쓸어보았다. 온기가 남아있어서 더더욱 믿기지 않는 죽음이었다.
청년은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을 직감하고 누이만은 동료에게 부탁하려 했으나, 불행히도 그의 동료들도 함정에 걸려 전멸당하고 말았다. 누이는 오래지 않아, 자신을 가두었던 이들과 맞닥뜨렸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도 공포도 비치지 않았다. 이미 모든 감정을 전부 긁어내고 만 것처럼, 흰 얼굴엔 표정이라곤 없었다. 그녀는 얌전히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며 하나, 딱 하나 적의 수장에게 부탁했다. 오빠를 살려달라고.
[그렇게 해주는 대가로, 너는 무엇을 지불할 생각이지?]
[아카데미아에 협력하는 것으로 충분하겠죠.]
처음부터 그녀가 납치된 것은, 적측에서 탐내는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이상향으로의 길을 여는 힘. 그녀에게만 주어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언젠가 적측에서 그녀를 사용하려 들 것은 뻔한 일. 다만 전쟁을 일으킨 그들에게 적개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그녀였으므로 어떻게 협조하도록 만드는지가 문제였다.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는 있었고 실제로 시도했으나 그만큼 부작용이 컸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하면 그녀가 스스로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아군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는 그걸 알아채고서 먼저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그녀는 오빠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협력하겠다고 한 상대는 전쟁을 일으켜 나라를 뒤흔들고 소중한 사람들을 전부 앗아간 적. 증오를 품는 것이야 당연했지만 그녀가 잡을 수 있는 희망 또한 그들뿐이었다. 나라는 재건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짓밟혔다. 저항군은 죽었다. 마지막까지 침략자에 맞섰던 이들도 함정에 빠져 허망하게 쓰러졌다. 결국 구할 수 있는 것도,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것도 어디에도 없었다.
생명이 사라진 폐허를 원래의 세상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예병마저 전멸당한 판에 다시 세상을 구할 전사를 뽑는 것을 기대해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하나 되돌릴 수 있는 것이라면. 그녀는 자신의 하나뿐인 형제를, 불행히도 쓰러지고 만 오빠를 떠올렸다. 침략자의 힘을 빌려서라도 되살릴 수만 있다면, 희망 없는 세상을 버리고 그들의 협력자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오래도록 적의 소굴에 갇혀있는 동안 무엇을 움켜쥐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그녀가 버려야 할 것은 허울뿐인 명분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적의 편으로 돌아섰고, 오빠를 되살렸다.
그것이 몇 년 전의 이야기였다. 전쟁은 그녀의 예측대로 그녀가 선택한 곳의 승리로 끝났고, 정복자의 편이 된 그녀는 성녀의 이름을 얻고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권위를 갖게 되었다. 물론 청년도 되살아나, 다시 누이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를 되살린 자는 그에게 우선은 굳이 신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위치인 집행인의 자리를 주었다. 남매가 지금 집행인과 성녀라는 상반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성녀로 살아가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데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청년은 몇 달을 누워있다 겨우 움직이게 되었으며, 움직이게 되고도 집행인으로 일할 수 있기까지는 또 몇 달이 걸렸다. 그럼에도 그의 몸은 여전히 언제 무너질지 모를 아슬아슬한 상태. 그가 다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관리하는 것은 그의 누이, 성녀였다.
하나 더 청년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기억이었다. 되살아나며 기억 대부분이 소실된 모양이었다. 그나마 기억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단편적인 기억이 거의 전부. 소실된 기억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웠던 때의 기억임을 어렴풋이 알아챈 것일까. 청년은 기억의 공백을 굳이 파헤치려 들지 않았다. 큰 사고를 당해 기억도 날아갔을 거라는 누이의 말을 그대로 수용할 뿐.
[슌은 기억나는 게 거의 없어서 답답하진 않아?]
언젠가 성녀는 오빠에게 물었다. 일부러 말해주지 않은 부분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그러자 청년은 날아간 기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인지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되지?]
[물론.]
[사라진 건 아무래도 좋아. 루리가 있고 앞으로도 계속 루리와 함께 있을 테니까.]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려는 것인가. 옳은 판단이었다. 성녀도 과거에 집착했던 때가 있었다. 무너진 세상에 슬퍼하고 쓰러진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죽은 세상을 보고 살아갈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과거란 사어처럼 무기력하다. 지나간 날은 지나간 날일 뿐, 그리워하고 붙잡은들 현재는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차라리 현재를 사랑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나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이 살아가는 순간만큼은 빛날 테니까. 지금 눈앞에 놓인 것만은 잃지 않고 계속 안고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남매는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늘을 이야기하고, 내일을 생각했다. 청년이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 불행했던 시절은 성녀의 머릿속 깊은 곳에만 남아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그렇게 몇 년, 남매는 줄곧 행복했다.
세상을 버린 대가로 움켜쥔 오빠였다.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으므로, 성녀는 자신의 삶에 오빠의 공간을 마련해두었다. 성소로 들어오는 비밀통로를 발견한 성녀는 청년에게만 귀띔해 그가 사람들의 시선에 쫓기지 않고도 자신을 만나러 올 수 있도록 했고, 성소 안에도 그가 지낼 공간을 비밀히 만들어두었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청년은 성소에서 비로소 긴장을 풀고 쉴 수 있었고 성녀는 청년의 상태를 점검하고 관리해줄 수 있었다.
이대로 계속 함께할 수 있다면. 성녀는 신음을 흘리는 청년을 지켜보다 시선을 돌렸다. 이젠 두 사람의 공간에서 나가야 할 시간. 그녀는 이 거대한 통합국가의 성녀였고, 그만한 책임을 다해야 했다. 곧 성녀로서 의식을 치러야 할 때. 오빠를 숨겨두고 나가며 성녀는 잠깐 얼굴에 떠올랐던 연민을 지웠다. 당당한 웃음을 걸치고 아름답게 단장한 채, 자신을 신봉하는 신민을 위해 움직여야만 했으므로.
성녀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시녀가 붙어 의식 준비를 도왔다. 성녀라는 위치는 그녀에게 오빠를 지켜낼 힘을 주었으나, 권한이 큰 만큼 짊어져야 하는 것도, 생활에 제한을 받는 일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청년과 계속 함께할 수 있다면 그녀는 성녀라는 이름에 따라붙는 모든 것을 기쁘게 안을 수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의 행복은 깊었고, 성녀는 겨우 손에 넣은 행복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
꿈속의 풍경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지옥이라는 말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참담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으므로. 무너지는 건물, 빛에 휩싸여 사라지는 사람들, 온 세상을 가득 메우는 괴물, 괴물을 부리는 침략자. 그 속에서 청년은 쉬지 않고 달렸다. 누이의 손을 잡고 달리고, 소중한 사람을 재촉하며 달리고.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는 괴물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그저 달렸다. 그러나 결국 약간 뒤처졌던 친구는 빛으로 부서지고 눈앞의 건물이 휘청거리며 누이를 잡은 손도 풀리고 만다. 그 순간 도시는 절망의 색으로 물들고 모든 것이 바스러져 청년만이 남는다. 잔해 속, 무엇도 건지지 못한 채. 혼자서.
눈을 뜨면 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악몽에 짓눌린 결과인 모양이었다. 청년은 축축해진 몸에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정말 불쾌한 것은 땀으로 완전히 젖은 몸이나 꿈에 쫓겨 피로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었다. 꿈의 내용이 실제로 경험한 일처럼 지나치게 생생하다는 점이었다. 이번만이 아니었다. 청년은 도시가 무너지고 침략자에게 쫓기는 꿈을 여러 갈래로 꾸고 있었으며 그 모든 꿈이 지독하게 생생했다.
누이에게 꿈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장소와 내용은 바뀌지만 침략자에게 쫓긴다는 큰 줄기만은 같은 꿈을 걸핏하면 꾸고 있으며, 하나같이 직접 경험한 듯 생생하다고.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전부 알고 있는 누이였으니 꿈에 대해 넌지시 물으면 혹 과거와 연관된 것인지에 대해 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청년은 누이에게 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실은, 누이에게 묻지 않고도 답을 알 것 같았다. 어렴풋이 남은 기억이나 꿈속의 내용을 조합하면 답을 추측하는 것은 쉬웠다. 꿈속의 이야기는 그가 사고를 당하기 전 직접 경험한 일이며, 어떤 이유에선지 청년은 그 지옥에서 빠져나와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다. 다만 그 중간과정에 대해서는 근거가 부족해 추측조차도 불가능하다. 언제든 물을 수 있는 것을 꾹 삼킨 채 뱉는 일이 없는 건 누이에 대한 그의 배려였다. 누이는 그들 남매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사소한 ‘악몽’은 그를 배려해 잘라내, 그가 끔찍한 과거에 눈을 돌리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렇다면 그 역시 평화를 깨지 않도록 누이가 버린 것을 꺼내지 않는 것이 바람직했다.
어차피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닐 것이다. 과거란 지나간 것의 집합일 뿐. 그에 집착한들, 현재의 기쁨이 커지지도 현재의 고통이 줄어들지도 않는다. 흘러간 것은 흘러간 것으로 넘기면 그만이었다. 특히나 껄끄러운 것에 대해서는. 흘러든 과거를 외면하기만 한다면 남매는 계속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청년은 악몽을 홀로 안을 뿐 누이에게 꺼내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에게도 소중한 것이 여럿 있었을 것이다. 그 하나하나를 움켜쥐고 살아가려 애썼을 게 분명하다. 그러다 하나씩 포기하고, 포기하며 남은 것이라도 떨어트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안고 있기로 다짐했으리라. 그래서 마지막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세상인가. 놓쳐버린 동료인가. 아니, 그 모든 것은 이미 버렸다. 청년은 자신이 유일하게 쥐고 있는 것을 들여다본다. 누이. 하나뿐인 형제. 그것이야말로 그 밖의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지켜야만 할,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그들 남매가 마지막까지 움켜쥔 것은 상대였고 그들이 지켜야 할 것도 상대였다.
그런 두 사람이 언제나처럼 상대를 위해, 서로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던 어느 날이었다. 성녀는 청년을 불러다 말했다.
“생각해봤는데, 슌. 언제까지나 집행인으로 있기는 곤란할 것 같아.”
넌지시 던진 말은, 그동안 끌어안고 있었던 그녀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나는 지금도 괜찮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이대로라면 영원히 유령처럼 있을 수밖에 없어서 하는 말이야.”
성녀의 계획은 이러했다. 적당한 신분을 만들어 과거의 그를 지우고, 본국 태생의 인재로 꾸며 적당한 지위를 얻는다.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청년은 양지에서 그녀와 만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 그녀에게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거기에 지위를 제대로 유지하기만 한다면 사람을 사귀어 안정적으로 정복자의 세계에 뿌리내릴 수 있으리라. 함께해야 행복할 수 있는 그들이라면, 지금까지처럼 비밀스럽게 함께하기보다 안전하고 당당하게 함께할 길을 찾는 게 나았다. 청년이 집행인이라는 미지의 존재에서 일반 간부가 되어 세상에 나온다면야 가능했다.
“언제까지나 숨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가능하다고 생각해?”
“불가능할 건 없잖아. 여기에서 슌에 대해 아는 건 나와 프로페서뿐이니까.”
성녀는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오빠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 속 사진은 청년의 것이지만 나머지, 아마도 성녀가 채웠을 내용은 전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미 서류가 책임자에게 들어갔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하던데.”
“빠르구나.”
“그러니 보러 갈 생각이야.”
“함께?”
“함께.”
성녀는 오빠를 잡아끌었다. 이제 그를 양지로 데려갈 때였다. 성녀는 사람들에게 청년을 각인시킬 생각인지 일부러 청년을 뒤에 두고 걸었다. 청년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신에게 시선이 꽂히는 것을 느꼈다. 다만 그것은 집행인의 가면을 쓰고 다닐 때 내리꽂히던 경멸의 시선과는 달랐다. 호기심과 선망, 성녀와 연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이었다. 앞으로는 익숙해져야 해. 성녀는 얼떨떨한 얼굴인 청년에게 속삭였다.
책임자를 만나는 것이야 청년 혼자였지만, 가는 동안 계속 성녀가 앞장섰기에 청년의 존재를 알리려는 목적은 달성되고도 남았다. 청년은 책임자 앞에서 누이가 마련해준 신분으로 누이가 꾸민 사람을 연기했고, 상대의 만족한 얼굴을 보고 나올 수 있었다. 그동안 근처에서 간부들을 만나는 자신의 일정을 소화한 성녀가 다시 청년을 제게 붙이고 돌아가려던 때였다.
근처에서 공개처분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란스러운 처분을 그대로 지나칠 생각이었던 성녀는 청년이 홀린 듯 정지하는 것을 보고 그 곁에 섰다. 죄인은 망국의 유민들로, 본국에 협력하기로 해 거두어 쓴 자들이라고 했다. 그 후 충성을 바치는 체 복속된 제 나라를 재건하려는 음모를 꾀한 것이 드러나 붙잡힌 것이다. 거짓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뒤를 치려 한 자들에 대한 괘씸함으로, 상부는 그들을 종전 직전 가장 악독한 저항군들을 처리한 곳에서 처형하기로 했다.
거대한 장치가 아가리를 벌리고 희생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끌려나온 죄인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곳에 추락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장치에 삼켜지기 직전, 그 몸뚱이가 빛으로 부서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청년은 그 비현실적인 종말을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상황만 따진다면 집행인으로서 반역자를 처형할 때와 다를 바 없는데도, 제삼자가 되어 멀리서 지켜보는 것은 직접 처분하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전자는 꿈속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쩐지 저 깊은 곳에 눌러둔 불쾌한 기억이 스멀스멀 새어나올 것 같았다. 성녀는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오빠를 보고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 슌. 우리는 무사해.”
지금 펼쳐지는 것은 과거 그가 경험했던 것과 닮은 장면. 과거의 기억이 당시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미 생각해둔 것이었다. 아마도 청년은 혼란 속에서 근원 모를 불안에 사로잡혀 있으리라. 우선 안심시키려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사람들을 삼킨 장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옛 기억에 그 이상 물들면 곤란하다. 그래서야, 그들의 평화도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성녀는 보다 나긋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풍경을 외면할 수 있도록 하는 마법의 말을.
“우리는 계속, 행복할 거야.”
그제야 청년은 장치로부터 시선을 뗐다. 누이가 옳았다. 그들은 계속 행복할 것이다. 세상을 버리고 사람들을 버려 얻은 평화 속에서, 과거를 외면해 움켜쥔 행복을 놓지 않은 채 오래도록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보고 싶지 않은 걸 연상시키는 죄인은 어서 떨쳐내, 행복에 한 점 얼룩조차 남기지 못하도록 하자. 청년은 누이의 달콤한 속삭임에 눈을 감고, 처형당한 이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