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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슌] 광대

현소야 2016. 7. 6. 23:23

 

  무대를 채우는 열기는 질식할 듯 무겁다. 관객의 열망과 기대와 악의가 한데 엉켜 무대에 오를 이를 내리누르는 것이다. 관객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저 열기가 괴물이 되어 아가리를 벌리고 이빨로 갈기갈기 찢을지도 모른다. 무대에 서는 이라면 한 번쯤은 마주하는 두려움이다. 무대 아래의 관객은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만족스러우면 환호했지만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단숨에 그들을 끌어내렸다. 관객은 그런 횡포조차 용납되는 정복자였고 무대에 오르는 이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해야 할 광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족스럽지 않으면 죽인다. 흥미가 사라지면 폐기한다. 그렇게 영영 사라진 자도 벌써 여럿이었다. 날이 갈수록 악랄해지는 관객의 횡포는 순간순간 광대들의 목을 죄여들고 있었다. 잔뜩 얼어붙어 무대에 오르고 한순간도 관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광대를 볼 때마다 관객들은 낄낄거렸다. 정복자의 위치란 그렇게 편리한 것. 목숨을 빌미로 한 인간을 오롯이 지배한다는 것은 그들을 희열로 물들였다.

  그러나 무대에 오르는 광대 중 단 하나만은 관객에게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긴장하는 것은 오히려 관객이었다. 그는 언제나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무대를 펼쳤고 관객은 이미 그의 무대에 단단히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채 스물도 되지 않은 청년은 관객이 광대를 무대에 올린 이래로 가장 오래도록 버텨온 광대였고 그만큼 관객이 열광하는 자이기도 했다. 관객이란 변덕스러워 언제 누구를 버릴지 모를 족속이었으나 청년에게는 관대했다.

  사실 청년은 진즉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정복자에 대항해 끝까지 싸운, 멸망한 국가의 패잔병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복자를 막기 위해 나선 저항군은 끝내 정복자를 이기지 못했다. 전쟁이 끝날 때쯤 살아남은 것은 청년을 포함해도 몇 되지 않았다. 처형은 처음부터 결정된 처분이었지만 정복자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신들에게 대항한 불손한 것들의 죽음은 보다 처참해야 했다.

  정복자가 낸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패잔병을 무대 위에 올리고 그들이 키워낸 전사를 올려 결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결투를. 전장을 누빈 저항군이라 해도 대개 부상으로 몸이 성치 않은 상황. 거기다 급하게 조직되어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어려서부터 훈련받은 전사들을 이길 리 없었다. 결국 그들이 준비한 것은 무늬만 결투였다. 무대 위에서 전사의 손으로 그들을 처형해 죽음조차 한갓 볼거리로 만드는 것이 본심이었다.

  청년도 당연히 그 불행한 희생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역시 먼저 쓰러져간 동지들처럼, 무대 위에서 쓰러졌어야 했다. 뜻밖에도, 최초의 무대에서 그는 살아남았다. 날아든 공격으로 부상을 입긴 했으나 쓰러진 건 그가 아니라 정복자들이 키워낸 전사였다. 충격에 휩싸인 관객을 뒤로 하고 청년은 무대에서 내려갔고, 그날의 승리로 목숨을 며칠 연장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정복자는 그를 다시 무대에 올렸다. 전보다 강력한 전사를 그의 상대로 세우며. 그럼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그는 승자가 되었다. 어느새 그의 무대는 처형을 가장한 것이 아니라, 진짜 결투로 변해있었다.

  명목상으로는 결투를 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복자는 그를 거듭 무대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진득하게 버티는 패잔병이 하루라도 빨리 쓰러지길 바라며. 정복자의 바람도 무색하게 청년은 무대에 오를 때마다 희생자를 쌓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단순히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려서부터 훈련받은 전사를 상대할 수 있을 실력에 끝까지 적을 물어뜯는 투지마저 가졌음이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청년이 무대에 오르면 야유를 퍼붓고 그가 이길 때마다 당혹스러워하던 관객들은 서서히 그의 전투에 매료되었다. 생존을 위한 그의 투쟁에 언젠가부터 관객은 환호하게 되었다.

  물론 관객이 그의 투쟁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환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관객이 그에게 부여한 역할은 처형을 앞둔 죄수도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전사도 아닌, 광대. 누가 보아도 불리한 상황에서 악귀처럼 싸워 적을 쓰러트리는 것은 관객을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자신들을 즐겁게 해주는 패잔병에게 관객은 광대의 이름을 붙이고, 관대하게도 자주 무대에 세워주었다. 무대에 선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이 연장된다는 것. 청년은 정복자가 멸망시킨 나라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청년은 천천히 무대에 올랐다. 시선은 정면에 고정했으나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자신에게 달라붙는 것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열기는 숨이 막히고 시선은 진득하다. 무대 아래 관객의 것이다.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수많은 무대에서 살아남은 청년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기대가 되어 자신을 덮치고 있는지, 기대가 어긋나는 순간 자신이 어떻게 될지도. 관객이란 맹수와 같다. 다만 배부른 맹수일 뿐이다. 식사를 할 필요가 없어 한가로이 먹잇감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흥이 깨지면 심심풀이로 사냥한다. 먹잇감으로서 사냥당하지 않으려면 저들이 끝까지 시선을 뗄 수 없게 할 수밖에.

  전사에서 광대로 바뀐 것에 청년은 별 감흥이 없었다. 자신의 투쟁이 볼거리가 되고 관객을 사로잡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된 처지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살아남아야만 했다. 적 앞에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으로 거둘 것이 있을 때나 의미 있는 일이다. 자신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금 죽어서야, 그 전에 쓰러진 동지들에게 죄를 짓는 일. 어떻게든 살아남아 언젠가 적을 흔들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길이리라. 살아남을 기회를 잡은 것에 오히려 청년은 안도했다.

  무대는 그에게 새로운 전장이었다. 사납게 덤벼드는 적과 사냥감처럼 불리한 위치에 선 자신이 있다. 다른 것이라면 수많은 눈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뿐. 그는 적의 묵직한 공격을 교묘하게 봉쇄하고 자신의 열세를 이용해 상황을 반전시킨다. 그렇게 승기를 잡아 적을 쓰러트리는 것이 그의 방식. 다만 관객이 지루해하지 않게 전개는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관객이 열광하는 극적인 무대를 꾸미던 청년의 시선이 문득 객석에서 멈추었다. 관객의 반응에는 민감해도 평소 굳이 관객과 시선을 맞추진 않던 그였다. 이번에도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다 우연히 시선이 아래로 향한 것뿐이었다. 시선이 머문 것은 찰나였지만 청년은 보았다. 자신이 잊을 리 없는 자의 얼굴을. 그는 팔짱을 낀 채 청년의 무대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것은.

  과거 한 광대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청년의 고향에 나타나 거리 공연을 펼쳤다. 모두가 열광하는 화려한 무대였다. 그가 나타나 사람들을 사로잡고 세상에 섞여든 지 오래지 않아 도시엔 전쟁이 닥쳤다. 전쟁통에도 광대는 몇 번 얼굴을 비추었으나 청년의 누이와 함께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부터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 청년이 알게 된 것은 그가 적이 보낸 첩자였으며 처음부터 자신의 누이를 노리고 접근했다는 것. 화려한 공연도 누이의 호의를 산 모든 것도 전부, 정체를 숨기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청년이 객석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과거의 광대였다. 다만 공연에 어울리는 화려한 복장은 간부의 제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광대의 역할도 끝나버린 모양이었다. 과거의 광대가, 광대로 변한 전사를 보는 셈이었다. 그 아이러니함에 청년은 웃었다. 하필 그의 얼굴에 한순간 떠올랐던 것은 그리움.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광대가, 무대 위의 광대를 보고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것이리라.

  과거 이곳에서 첩자를 필요로 했던 것은 병사를 보내 타국을 복속시키기 전 손에 넣어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국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어 목표물을 입수하기 위해서는 주민이 의심을 사지 않을 존재가 필요했다. 첩자에게 광대의 역할을 맡긴 것은 아마 그래서이리라. 화려한 무대를 펼쳐 호의를 사면, 낯선 이라 해도 쉽게 받아들일 테니까. 덕분에 광대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목표물을 상부로 넘길 수 있었다.

  필요에 의해 맡게 된 역할이었지만, 그는 광대로서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에 무척 만족했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자신도, 관객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도 좋았다. 관객의 함성에 공손하게 인사하며, 가능한 오래 광대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종료되며 상부에선 더 이상 첩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간의 공을 인정받은 그는 합당한 지위를 얻었으나 다시는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전쟁이 두 사람의 처지를 바꿔버린 것이다. 승자는 자신이 사랑하던 광대의 역할을 버리고 무대에서 내려가고 패자는 살아남기 위해 광대가 되는 것으로.

  광대를 알아본 청년은 일부러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둘의 시선이 한순간 엉켰고 청년은 냉소를 던지고 돌아섰다. 사랑하는 누이의 미래를 짓밟은 자에게 비참함을 안겨주겠다 다짐하고서. 청년은 광대가 자신의 역할을 사랑했음을, 아직도 무대를 열망하고 있음을 안다. 그렇다면 그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은 분명했다.

  다음부터 펼쳐진 것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무대였다. 그의 무대에 익숙해진 이들조차 숨을 죽이고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일부러 적에게 약점을 노출해, 결투를 끝내기 직전까지 적에게 아슬아슬하게 쫓겼다. 그러다 결말을 내고 싶어졌을 때 단숨에 판을 뒤집고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적이 승리의 확신을 품고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때였다. 숨겨두었던 함정은 적을 옥죄고 패배는 생각조차 않았던 적은 한순간에 쓰러졌다. 청년은 자신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모를 피를 뒤집어쓰고 승리를 즐겼다.

  환호가 쏟아졌다. 사람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열기는 부풀어 터질 듯하다. 그가 선사한 열기 때문일까. 갑자기 어딘가에서 청년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한 번 흘러나온 이름은 빠르게 전염되어, 어느새 모두가 그 이름을 외쳤다. 관객에게서 자신을 찾는 외침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은 한때 광대였던 자가 즐겼던 것 모두가 홀린 것처럼 자신을 찾자, 청년은 객석으로 시선을 돌려 과거의 광대를 보았다. 그의 푸른 눈에 드리워진 것은 부러움과 체념이 섞인 복잡한 감정.

  청년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단 한 사람만이 알아본 웃음은, 승자의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