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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ts슌] 어떤 미래

현소야 2016. 6. 4. 19:32

 

여자는 가슴을 움켜쥔 채 몇 번 쿨럭거렸다. 그럴 때마다 처참하게도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커다랗게 뜬 눈과 일그러진 얼굴이, 그녀가 극한의 고통에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서서히 퍼지는 독은 그녀를 고통으로 농락하며 말려죽일 테니까. 청년은 유리벽 너머로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녀가 죽음으로 걸어가는 과정이 그에게 낱낱이 비쳤으나, 그녀는 고통에 지쳐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정복자는 아랫것의 죽음을 한 편의 극처럼 감상할 수 있으나 아랫것은 버둥거릴 뿐 마지막까지 눈을 치뜨고 정복자를 노려보지도 못한다. 끝까지 불공평한 위치였다.

그나마 여자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인간으로도 취급받지 못하는 피지배자의 위치에서 끝없이 항거한 결과였다. 그 처절한 투지로 정복자를 쓰러트리고 억압의 고리를 끊었으면 좋았으련만, 한 사람의 저항만으로는 굳건한 질서를 바꿀 수 없었다. 함께하던 동료는 전부 죽었다. 사랑하던 이도 빼앗겼다. 외로운 싸움은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끝났다. 그녀는 결국 정복자 앞에 끌려와 반역자의 이름으로 죽어야 했다.

누군가는 그녀의 놀라운 투지에 경탄하고, 누군가는 그 부질없는 저항에 냉소한다. 정복자는 그렇듯 비천한 것들을 마음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한 행동까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청년은 여자의 움직임이 서서히 둔해지는 것을 느낀다. 고통에 반응할 힘도 이젠 거의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청년의 곁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지루한 듯 자리를 뜨기도 하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더 발악하라며 소리치기도 했다. 마지막 반역자의 처형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죽음까지 정복자 앞에 보여야 했다.

끝까지 투지를 꺾지 않았던 그녀에게 그것은 치욕스러운 일일까. 아니면 혐오스러운 일일까. 이제 와선 무의미한 생각이었다. 패한 순간, 그녀가 품고 달려온 신념도, 그녀가 거두었던 승리도, 강렬한 투지도 전부 빛이 바랬으므로. 청년은 여자가 바닥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슬쩍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곧 죽을 여자였다. 그 이상 지켜볼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여자에 대해서는 전부터 약간의 껄끄러움이 다 지우지 못한 얼룩처럼 거뭇거뭇하게 남아있었다.

그녀는 그가 정복자로서 짓밟은 것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의 개입으로 그녀는 사랑하던 동생이 납치당했고, 그가 보낸 신호가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간 전쟁을 불러왔기에. 그래서인지 그녀는 한 번, 그를 쓰러트렸을 때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맹금을 뜻하는 이름에 걸맞은 금빛 눈이 거의 광기에 휩싸인 채 자신을 노려보았던 것을, 청년은 선명히 기억했다. 그때 그녀가 바람대로 그를 죽였다면 복수가 이루어지고 그는 정복자의 위치에서 추락해야 했을 것이다. 얄궂게도 모든 일이 꼬이면서 그는 살아남았고 그녀는 분을 푸는 일도 없이 허망하게 쓰러져야 했다.

만일 그녀의 삶에 자신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동생을 잃지 않았을까. 조금 더 오래 행복할 수 있었을까. 의미 없는 가정을 때로 던지는 것은 바로 그때, 그녀가 보였던 격렬한 증오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삼킬 듯한 불길은, 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것이 적이 아닌 자신을 태우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수많은 사람에게 망가진 인간이라 불렸다. 그런 것을 그를 향해 벼리고 있었다. 제 모든 것이 그을리더라도 그를 태워야 직성이 풀릴 것처럼.

끔찍한 인간이었고 오싹한 여자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그녀를 망가뜨린 씨앗을 심은 것이 자신이라는 것이 청년은 꺼림칙했다. 과거의 여자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과거, 그녀의 동생이 남긴 말은 기억하고 있었다. 상냥한 사람이라고. 좋은 언니라고. 부드럽게 웃으며 했던 말. 이제 와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평이었다.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었다. 행복했던 시절엔 그녀 또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만난 여자는 처음부터 지독하게 비틀린 인간이었고, 그에게 쏟아내는 말엔 저주가 가득했다.

그런 인간을 낳은 것이 자신이란 말인가. 치미는 불쾌감에 청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삶을 짓밟게 된 사건들은 상부의 명령대로 따른 것이니 후회도 죄책감도 없다. 그저 껄끄러울 뿐이었다. 자신이 불러온 폭풍에 용케 휩쓸리지 않고 살아남은 인간이 끝없이 자신의 죄를 꺼냈다는 것이. 순간순간 자신을 증오하고 끌어내리려 했다는 것이. 자신의 위장마저 벗기고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괴물로 만들었다는 것이.

그것도, 끝이다. 여자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 그녀의 복수는 미완으로 남고 그는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위치를 굳힐 수 있을 것이다. 처절한 싸움의 끝이 결국 패배라는 것은 가여웠으나 그녀 같은 인간을 살려두는 것은 위험한 일. 반역자의 이름으로 처형하는 게 맞았다. 마지막까지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던 전사까지 처형당하니 이제 세상은 평화를 찾을 것이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행복한 결말이다. 청년은 그에 만족하고 여자를 지워낼 작정이었다. 서서히,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더 이상 여자에게 쫓기지 않으므로 그녀에 대한 기억을 꺼낼 일도 없으리라.

처형장을 빠져나온 청년은 거리를 걸으며, 드디어 그녀를 떨쳐내게 된 것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것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에게 독기를 품고 달려드는 이를 다시는 볼 일이 없으리라는 것에 대한 만족감과 그녀의 종말에 대한 정복자로서의 가벼운 연민, 그리고 근원 모를 꺼림칙함까지. 한참이고 걷던 청년은 멈췄다. 주변의 풍경이 낯설다. 머리가 복잡해 길을 잘못 든 모양이었다. 가벼이 한숨을 내쉬고 길을 찾으려 할 때였다. 그의 눈에 흥미로운 것이 들어왔다. 화려한 입간판에 적힌 글씨.

[당신의 생각을 지워드립니다.]

푸른 눈이 둥그레졌다. 평소라면 그냥 넘겨버릴 말이었겠지만 여자에 대한 감상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청년은 그 믿기 어려운 말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간판을 세워둔 곳은 서커스 천막을 어설프게 흉내 낸 가게였다. 청년은 가게로 들어섰다. 중년 남자가 싱글거리며 청년을 안으로 안내했다.

어디, 꺼림칙한 것이라도 있는 모양이지요?”

주인의 말에 청년은 자신이 짓밟은 것을 상징하는 여자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은 멋대로 흘러가는 것.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떠오르는 것들이 있죠. 여기서는 손님이 현재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희망할 경우 그에 대한 생각의 뿌리를 뽑아버립니다.”

지금의 복잡한 감상을 떨쳐내는 것을 넘어, 그녀에 대한 생각을 바로 지워낼 수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믿기 어려운 이야기임에도 청년은 가게에서 준비한 것이 속임수가 아니길 바라며 주인을 따라 걸었다. 마침내 청년이 닿은 곳은 침대가 있는 좁은 방이었다. 주인은 침대에 청년을 누인 후 안대를 내주었다.

지금 손님이 지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의 형식으로 확인하도록 하지요. 손님은 안대를 쓰고 편히 쉬시면 됩니다.”

안대를 써 세상이 암흑에 잠긴 후 몇 분쯤 지났을까. 청년의 눈앞에 어둠이 내리깔린 세상 대신, 화사한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몸도 노곤하여 정말로 꿈속에 온 것 같았다. 긴장을 놓고 기다리자 여자의 녹색 머리카락이 아른거렸다.

꿈속에서 만난 것은, 짐작한 대로 그녀였다. 자신이 짓밟은 것을 상징하는 여자, 단 한 번도 자신을 용서한 적 없는 여자. 여자는 전쟁을 겪지 않은 고향에 서 있었다. 사라진 지 오래인 동생과 함께. 여자는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희미하게, 웃음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 두 사람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별 것 없는 대화인데도 두 사람은 마냥 행복한 듯했다.

청년에게는 낯설기만 한 풍경이다. 여자가 웃음을 띠며 말하는 일 따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가 만난 여자는 처음부터 지독하게 망가져 있었고 단정한 얼굴을 자주 분노와 증오로 굳혔으며 웃는 것은 너무도 드물었으니까. 그런 여자가 평화로운 한때를 즐겁게 보내고 있다. 그녀에겐 당연했던 일일지도 모르나 청년은 그것이 잘못 끼운 퍼즐조각처럼 어색했다.

그래서일까, 청년은 여자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자매에게로 다가섰다. 여자는 여전히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기에 어떤 모습인지 확인할 수 없었으나 그녀의 동생은 어쩐지 기억하던 것보다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자세히 보니 자매가 있는 곳도 그가 기억하던 것보다 좀 더 화려하게 변해있었다. 그제야 청년은 깨달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전쟁 이전의 평화로웠던 자매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들이 누렸을지도 모를, 미래의 모습이었다.

미래라는 단어는 여자에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 생각했다. 이미 청년에게 미래를 짓밟힌 그녀였고, 미래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싸움은 실패했으며, 그녀 역시 끝내 죽게 되었으므로. 게다가 그녀 같이 황폐한 인간을 기다리는 미래가 과연 있을지조차 청년은 의문이었다. 죽은 과거에 집착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차 미래 같은 건 과분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꿈속에서 그런 여자의 미래를 보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녀의 허망한 종말 때문에 괜한 감상에 빠져 그녀가 누렸을 수도 있을 미래를 생각하는 것인가. 알 수 없다.

그러나 청년은 그것이 불쾌하기보다는 흥미로웠다. 저런 미래가 그녀를 기다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 황폐하지 않은 그녀는 신선했다. 어쩌면 행복했을 수도 있을 여자는 어쩌면 누렸을지도 모를 미래를, 자신의 모든 것을 뒤튼 청년에게 보이고 있었다. 청년은 여자가 보여주는 가상의 미래를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 청년은 자매와 예부터 함께했던 소년이 여자와 대결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부쩍 자라난 소년은 이제 소녀의 키를 뛰어넘어 여자와도 키가 비슷했다. 몇 년이 지나면 큰 편에 속하는 여자의 키도 뛰어넘을 수 있을지 모른다. 시간의 흐름은 그렇게 선명한데, 여자는 그가 기억하던 모습대로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 키는 멈췄다 해도 얼굴에는 성숙함이 배었을 듯한데, 여자는 여전히 그에게 등을 보여 청년은 여자가 어떤 모습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제법 발전한 전술로 싸우는 소년도, 언니를 응원하는 그녀의 동생도 그에게 얼굴을 보이는데 여자만이 자꾸만 돌아서 있었다. 마치, 그를 보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장면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에 청년은 거리의 화면마다 여자의 이름이 내걸리는 것을 본다. 아마 그녀가 과거의 바람대로 프로로 데뷔해 대중에게 주목받게 된 모양이었다. 어딜 가도 여자에 대한 찬사가 가득했고 여자를 선망하는 아이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청년은 화면 속에서 화려하게 대중을 맞이하는 여자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흐릿한 탓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다만 화면 속에서 여자의 이름과 함께 적힌 글씨를 읽어낼 수 있었다.

[쿠로사키 슌의 팬미팅.]

그녀는 뛰어난 사람이었으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프로로 데뷔해 인기를 끌었을 수도 있다. 전쟁으로 짓이겨진 후의 그녀의 전술에조차 매료된 사람이 여럿이었다. 청년은 자신이 짓밟은 것에 여자의 꿈도 덧붙인다. 전쟁으로 모든 게 무너진 세상에선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이 바빠 그녀의 빼어난 실력을 싸움에만 사용해야 했을 터. 관객은 사라지고 관객에게 최상의 무대를 선물하고 싶었던 엔터테이너는 전사로 모습을 바꿨다. 때문에 그가 기억하는 여자의 모습은 꿈 많은 소녀도 엔터테이너도 아니라 이미 닳고 닳은 전사였다.

전쟁을 겪지 않고 자라나, 혹은 전쟁에서 살아남아 꿈을 이루게 된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청년은 몹시 궁금해졌다. 그녀가 얼마나 빛나게 되었는지, 황폐한 그녀만을 만난 자신이 확인해보도록 하자. 청년은 여자가 대중을 만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가 있는 곳에 가까워질수록 거리는 붐볐고 들뜬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역시, 그녀는 사랑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껏 빛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청년은 여자에게 닿았다. 그의 기억에 남은 남루한 모습이 아닌 화사하게 차려입은 그녀가 자신의 팬을 맞이하고 있었다. 청년은 밀려드는 사람들 틈에 섞여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가까워진다. 조금만 더 가면 그녀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멀리서 아른거렸던 그녀가 점차 선명해진다. 환상에서 현실이 된다. 청년은 자신의 얼굴이 조금씩 기쁨에 물들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자신을 찾는 팬에 기뻤던 것일까. 여자는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동시에 그녀에게 말을 걸 기회가 청년에게 떨어졌다. 청년은 눈앞에 피어난 여자가 환상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구에게든 나긋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청년이었는데, 미래의 여자 앞에선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결국 저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서툴게 지껄인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청년의 말이 날아들 때마다 웃었다. 화사하게, 그늘 없이 행복한 사람이 그러하듯이.

그것이 너무도 눈이 부셔 청년은 말을 더듬었다. 이렇게 빛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이렇게나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그가 아는 그녀와 그가 마주한 그녀의 간극은 너무도 컸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그녀가 어쩌면 이랬을지. 청년은 새삼 자신이 그녀에게 안긴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이었는지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주어진 시간이 끝나갈 때, 청년은 다급하게 말했다. 여자는 웃으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행복하나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여자는 잠깐 침묵했다. 청년은 답이 날아들기도 전에 재차 물었다.

행복했나요? 지금 행복한가요? 앞으로도 행복할 것 같나요?”

그것만은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불러온 불행에 짓눌리지 않은 그녀는 정말 행복했을지.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살 수 있을지. 자신이 빚어낸 환상에게라도 그 답을 듣고 싶었다. 여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고, 기억하던 것보다 조금 나이가 든 목소리로 그에게 답을 돌려주었다.

물론, 저는.”

그때 소리가 지직거렸다. 낡아빠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지금까지 계속.”

자꾸만 끊기는 목소리에 청년은 애가 탔다. 이대로라면 그녀에게 답을 듣지 못할 것 같았다.

어서 답해줘. 쿠로사키. 어서.”

다급함에 과거의 호칭이 흘러나왔으나 여자는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 듯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아니, 그에 위화감을 느끼기엔 그들을 둘러싼 세상이 훨씬 이상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화사한 도시가 조금씩 무채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열기로 가득했던 곳이 싸늘해졌으며 황량한 세상 속 어느새 둘만 남아있었다. 청년에게도 익숙한 날의 풍경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날의 풍경. 그 끔찍한 풍경 속에서 여자는 천천히 마지막 답을 들려주었으나 그것은 근처의 폭음에 묻혀 그에게 닿기도 전에 흩어졌다. 다만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다.

잠시만, 다시 말해줘.”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는 여자를 불렀으나 여자는 멈추지 않았다.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 할 때

세상이 다시 암흑에 잠겼다. 청년은 눈을 깜빡였고 꿈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안대를 벗으니 사라진 지 오래인 그녀의 세상 대신 가게의 좁은 방이 보였다. 몸을 일으키고도 꿈의 여운에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던 청년은 자신을 찾은 주인의 모습에 비로소 꿈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금 엿보았습니다만, 손님이 계속 생각하던 여자는 누구였죠? 연인? 가까운 친구? 그것도 아니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전에 잠깐 만났던.”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그에게 그 정도의 의미만을 가져야 했다. 그녀에게 허락되었을지도 모를 미래에 정신이 팔려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완전한 타인이며 돌아볼 이유 없는 사람임을.

정말로 그것뿐인가요?”

.”

주인은 한동안 청년을 의심 섞인 눈으로 바라보더니 청년을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한참이나 걸어 처음 그들이 만난 곳에 와서야 주인은 멈췄다. 근처의 다른 방으로 사라졌던 그가 오래지 않아 가져온 것은 필름 뭉치였다.

별 의미 없는 사람이라면 다행입니다. 중요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면 나중에 불편할 테니까요.”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감상에 잠길 일이 있었을 뿐이에요.”

그럼 그녀에 대한 생각을 확실히 파기할 생각이십니까?”

주인은 청년의 눈앞에서 필름을 흔들며 물었다.

이것만 파기하면 모든 게 끝나요. 이제 더는 그 사람을 생각지 않게 되겠죠.”

모든 것이 끝난다. 여자로부터 해방된다. 이제 더는 돌아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그의 눈앞에서 필름이 폐기되었다. 그 광경을 청년은 표정 없는 얼굴로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에는 자신이 그녀에 대해 생각하던 것이 전부 담겨있으리라. 그 모든 것이 뜯기고 흩어지면, 그녀는 완벽하게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 그녀에게 허락되었을지도 모를 미래를 보며, 청년은 오히려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쿠로사키 슌은 화석 같은 존재로 남으면 그만이었다. 그녀에겐 그 정도의 위치가 어울렸다.

너에게는 그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너 역시 행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없었다면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청년은 꿈속에서 빛나는 여자를 보며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무력한 가정인가. 미래란 여린 바람으로도 바뀔 수 있는 것이며, 그녀는 청년이 불러온 광풍의 수많은 희생자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을. 청년은 여자의 입모양으로 읽어낸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행복했다고 말한다면 후회하려고?]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생각한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한다 해도 그로 인한 미래가 달라진다고 보장할 수 없다. 여자는 그가 짓밟은 것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으나, 그가 개입하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며, 그녀가 전쟁 속에서 무사했으리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설령 청년이 개입하지 않은 덕분에 운 좋게 그녀가 행복할 수 있었다 해도, 청년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이유가 없다.

그녀에게 허락되었을 수도 있을 미래는 그저 가정일 뿐이다. 그녀는 그가 아닌 다른 어떤 변수로도 불행해질 수 있는 인간이고, 그가 본 미래조차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했다. 결국 그는 쿠로사키 슌을 돌아볼 이유도, 연민할 필요도, 자신의 행동을 곱씹을 의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미 죽었을 사람이다. 마지막 순간은 보지 않았으나 지금쯤이면 숨이 끊어졌으리라. 지켜보던 이들은 흥미를 잃고 자리를 뜨고 남겨진 주검은 이후 아무렇게나 묻힐 것이다. 정복자의 세계에서 피지배자란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청년은 가게를 나서며 여자에 대해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필름에 갇힌 채 흩어졌을 사람에 대해선 생각이 뻗어갈 수 없었다. 남은 것이라곤 여자의 이름과 희미하게 남은 그녀의 모습,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쏟아냈던 수많은 저주의 말뿐. 오래지 않아 여자는 청년의 기억 한 구석에서만 겨우 숨 쉬는 과거의 유물이 될 것이다. 유리벽 너머로 전시되는 화석이 될 것이다. 청년은 이제 다시는 자신을 뒤흔들 수 없게 된 무력한 여자에게 그 정도의 자리는 허락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