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사장슌사장 백합] 칼날을 감싸는 손

현소야 2016. 5. 24. 02:57

  

  여자의 손가락이 지팡이를 휘어잡았다. 손을 타고 금속 특유의 차가움과 매끈함이 전해진다. 정교한 날개 장식이 양쪽에서 몸체를 감싸는 머리 부분부터 매끈한 기둥을 타고 내려와 끝부분까지.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생물을 대하듯 부드럽게 지팡이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에 반응한 것일까. 지휘봉을 연상시키는 지팡이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더니 여자의 어깨에 올라탔다. 어깨를 누르는 것이 무엇인지 손을 뻗어 확인해볼 법도 했으나, 여자는 신경을 쓰지 않을 모양이었다.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를 가로막는 적을 지켜볼 뿐이다.

  자신에게 관심을 돌리지 않는 것에 심통이라도 났는지, 여자의 어깨에 올라탄 것이 여자에게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십대 중반 즈음으로 보이는 소녀였다. 여자의 시야에 소녀의 녹색 머리카락과 짓궂음이 비치는 금빛 눈이 들어온다. 여자에게는 그리 놀랍지도 않은 장난이다. 소녀는 이내 여자의 어깨에서 떨어지더니, 소리 없이 여자의 곁에 선다. 소녀가 선 자리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았다.

  “전부, 죽으면 좋을 텐데.”

  무시무시한 말을 나긋한 목소리로 던지고는, 소녀는 여자의 왼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소녀의 손이 닿은 곳에서 힘이 전해졌다. 마치 소녀가 그녀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처럼. 여자는 그와 동시에 깊은 곳에서 세상에 대한 증오와 환멸이 치미는 것을 느낀다. 급류처럼 몰아치는 감정에 여자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어때? 아카바 레이지. 당신의 손으로 전부 죽이는 건?”

  “사양하지.”

  여자는 지휘하듯 우아하게 지팡이를 움직였고, 이내 거대한 불길이 치솟아 적을 덮쳤다. 상대도 전력으로 싸우고 있었지만, 여자의 압도적인 공격은 반격하기는커녕 방어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과연, 듣던 대로 괴물 같은 전투력을 가진 전사였다. 겨우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처럼 하나하나 무게가 실린 공격을 한다면 쉽게 지치는 것이 당연한데도 여자의 단정한 얼굴에는 한 가닥 피로도 비치지 않는다.

  “쌀쌀맞기도 해라. 내가 이렇게 힘써주는데 언제나 거절이라니.”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도 입가엔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여자가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이 퍽 즐거운 모양이었다. 소녀는 여자의 전투를 사랑했다. 여자는 우수한 전사였으며 그녀의 단정한 얼굴에 투지가 비치는 것은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소녀가 여자가 싸우는 것을 언제나 즐겁게 지켜보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을 지킨다는 사명을 내걸고 싸우는 전사인 여자가, 싸우는 동안에 세상에 대한 증오를 떠안아야 한다는 아이러니 때문이었다.

  이 세계의 전투는 감정을 소모하여 이루어진다. 감정을 전투력으로 변환하여 적을 공격하는 것이다. 어떠한 감정이든 짙고 선명할수록 전투력이 높아졌다. 때문에 전사들은 일부러 자신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몰아가 극한의 전투력을 뽑아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감정을 키울 수 있는 장치가 퍼지는 것은 당연한 일. 언젠가부터 전사들은 감정을 보다 쉽게 전투력으로 변환하고 증폭시킬 수 있는 무기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여자 역시 그러해서, 이미 몇 년 전부터 자신만의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에서 떼지 않는 무기가 바로, 그녀가 쥔 지팡이.

  그러나 그녀의 무기에는 처음부터 꺼림칙한 말이 따라붙고 있었다. ‘저주받은 무기라는 별칭이 그것이었다. 다른 무기를 가볍게 뛰어넘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대신 사용자를 망가뜨리는 것이라 했다. 때문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세상에서 묻혀버린 무기라는 말을, 몇 년 전의 여자는 분명히 들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불길한 것으로 치부하고 넘겨줘도 마다할 것을, 용감하게도 여자는 직접 찾아다녀 손에 넣었다.

  소문대로 강력한 힘을 가진 무기였다. 다만 무기를 쓸 때마다 여자는 한 소녀와 마주해야 했다. 수 세기 전의 복식을 갖춘 유령 같은 존재를. 소녀는 나타나자마자 여자의 목을 뒤에서 끌어안더니 속삭였다. 안녕, 이번엔 어린 주인님이구나. 여자는 자신이 무기를 시험하는 것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슬며시 시선을 돌렸으나 누구도 소녀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래도 소녀는 무기의 사용자에게만 보이는 존재인 모양이었다. 여자는 소녀를 외면하고 무기를 점검하길 계속했다. 여자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동안 소녀는 계속 여자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 후로도 소녀는 계속 나타났다. 여자가 무기를 어루만지기만 하면 모습을 드러내는 소녀는 지치지도 않고 여자에게 따라붙었다.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소녀의 말에 시달리기를 몇 차례, 여자는 소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소녀는 오래 전 무기에 붙은 사념이었다. 아마 그 주인은 수 세기 전에 죽었을 것이다. 한 가닥 남긴 사념만이 유령처럼 무기에 달라붙어 사용자를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사념이었으면 가벼이 넘겼을 것을, 하필 소녀는 인간을 뒤흔드는 존재였다. 사용자를 예외 없이 붕괴시켰다는 저주는 결국 소녀로부터 비롯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소녀가 사용자에게 세상에 대한 증오를 끝없이 속삭이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감정은 전투력으로 변환되므로, 그 어떤 감정이든 강렬하고 짙을수록 전사에겐 좋았다. 극단적인 증오와 극단적인 기쁨은 전투에서 같은 효과를 가진다. 다만 그 감정을 감당해야 할 전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가 다를 뿐이었다. 끝없이 감정을 소모하고 때로 감정을 극한으로 끌어내야 하는 이들은 감정을 소모한 후유증에 시달릴 때가 많았다. 부정적인 감정의 후유증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몇몇 전사들은 감정을 과하게 끌어낸 대가로 자신이 주로 사용한 감정에 젖은 채 평생을 살아가기도 했다. 그런 이들은 전투가 없을 때조차도 극한의 감정에 시달려야만 했다. 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주로 끌어낸 전사는 증오에서 헤어나지 못해 세상에 증오를 쏟아내다 처분당하기도 했다. 감정을 착실하게 사용한 인간일수록 평상시에도 감정에 물들 위험은 높다. 여자는 세상을 위협하는 적을 처리하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전장을 누빈 사람이었고 그만큼 위험도 높아져 있었다.

  그런 그녀가, 세상에 대한 증오를 잔뜩 안겨주는 사념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을 위해 움직이는 그녀라 해도 소녀가 나타나는 순간만은 증오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정제되지 않는 증오가 여자를 덮칠 때면 여자는 그에 동화되며 적을 삼킬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꺼림칙한 전투이리라. 그럼에도 자신을 계속 위험으로 몰아넣는 여자를 어떻게든 뒤흔들 심산으로 소녀는 자주 심술궂게 말했다.

  [있지, 사람들은 압도적인 힘을 두려워해. 그게 자신을 지켜주는 거라고 해도 말이지. 그러니 당신은 두려움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세상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는데 모두가 당신을 향해 수군거려. 가증스럽지?]

  [세상은 당신을 이해해주지 않아. 헐뜯기 바쁘지. 그런 세상을 계속 사랑할 수 있어?]

  [세상을 위해 싸울수록 당신은 닳게 될 거야. 당신을 알아주지도 않는 세상 따위 버리는 게 당신에게 좋지 않아?]

  그런 식으로 날아드는 소녀의 말을 동요 없이 넘겨버리는 여자였다. 세상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투지는 한순간에 흔들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소녀는 더욱 끈덕지게 여자를 괴롭혔다. 그 전까지, 모든 사용자를 그렇게 흔들어 파멸시킨 소녀였다. 누구보다 의지가 강한 여자도 흔들어보려는 것이 당연했다. 소녀에게 여자는 가장 굳건한 인간이기에 오히려 가장 집착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그 굳은 마음을 깨트리는 순간은 분명 소녀에게 가장 짜릿한 순간이 될 것이다.

  “쿠로사키. 다시 힘을 보태줘.”

  이번에도 여자는 강했다. 계속해서 밀려든 증오에도 여자는 흔들리는 일 없이 전투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소녀는 만족스레 웃으면서도 상대를 떠보듯 가벼이 묻는다.

  “견딜 수 있을까?”

  “확실하게 끝내고 싶거든.”

  “원하신다면야.”

  소녀는 여자의 목을 끌어안았고 날을 벼린 증오를 여자에게 실어주었다. 깊고도 깊은 증오가 지팡이를 거쳐, 폭발적인 힘으로 변했다. 지팡이에서 눈이 멀 듯한 빛이 새어나오더니 적을 에워쌌다. 적은 여자에게서 심판자를 보았다 다음 순간 전투가 끝났다. 여자의 보랏빛 눈이 쓰러진 적을 차갑게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소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아쉬운 듯 여자에게서 손을 뗐고 빠르게 희미해졌다. 밀려드는 피로에 여자가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소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전장을 떠나며 여자는 지팡이의 아랫부분을 가만히 쓸었다. 그곳에 새겨진 이름은.

 

*

 

  여자는 몇 년 전, 무기를 손에 넣었을 때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때의 여자는 소녀라고 불릴 정도로 어렸지만 정의감만은 지금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굳건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을 위해 봉사하도록 교육받은 그녀였다. 그 즈음, 우연히 세상을 위협하는 계획을 접하게 된 그녀가 해야 할 일은 하나. 그 끔찍한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 그러기 위해서 여자는 누구보다도 강해져야 했다. 이미 뛰어난 실력으로 주목받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훈련을 거듭하고, 온 세상을 뒤져 강력한 무기도 찾아다녔다.

  그러다 여자는 수 세기 전 참혹한 전쟁을 겪은 후 누구도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죽음의 땅에 강력한 무기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저주받은 무기라는 꺼림칙한 이름이 붙어있긴 하나, 능력치만은 누구나 탐할 수밖에 없을 정도라 했다. 수많은 주인을 거치며 예외 없이 사용자를 망가뜨렸다는 무기. 여자는 대담하게도 미래의 전투를 위해,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직접 무기가 있는 곳으로 향해 그것을 손에 넣었다.

  악명 높은 무기인 것 치곤 무난한 생김새였다. 대부분의 무기가 위협적인 외양을 가진 것과는 반대로, 그냥 보면 무기라고 생각도 못할 얌전한 모습. 여자는 지휘봉을 닮은 지팡이를 쥔 채 훈련장으로 향했다. 거기서 성능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지켜보는 이들은 몇몇은 겁에 질린 얼굴로, 몇몇은 상기된 얼굴로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여자는 담담한 얼굴로 무기를 사용했고, 처음으로 소녀와 마주했다. 수 세기를 묵은 사념과.

  몇 번 무기를 사용하며, 무기를 사용하는 한 소녀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챈 여자는 소녀를 외면하는 것을 포기하고 인정하기로 했다. 걸핏하면 나타나 잠시도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사념을 완전히 떨치는 것은 어차피 처음부터 무리였다. 차라리 자신에게만 보이는 환상으로 규정하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여자는 문득, 그 전까지 별 생각 없이 넘겨버렸던 것에 새삼 관심이 닿았다. 지팡이 끝부분에 희미하게 새겨진 이름.

  “쿠로사키 슌?”

  여자는 무기에 새겨진 이름을 그대로 읽었다. 여자의 안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손을 뻗던 소녀가 멈칫했다.

  “그렇게 불리는 건 오랜만이네.”

  “그게 네 이름인가?”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돌린 틈에 재빨리 그녀의 안경을 벗겨냈다. 순식간에 안경을 빼앗겨버린 탓에 여자는 소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흐릿한 시야에 안경을 들여다보는 소녀의 형체만이 일렁였을 뿐이다. 여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돌려줘.”

  “쿠로사키.”

  “돌려줘, 쿠로사키.”

  그러자 소녀는 여자에게 안경을 씌워주었다. 시간이 약간 흐르자 세상이 다시 선명해졌다.

  “기뻐. 그 전까지는 다들 나를 망령이나 악귀라고만 불렀는데.”

  “본래 무기에는 최초로 그 무기를 사용하게 된 자의 이름을 새기게 된다고 들었다. 그 말은 곧 네가 이것의 최초 사용자라는 뜻. 왜 아직까지도 무기에 붙어있는 거지?”

  “왜일 것 같아?”

  “미련이 남았나? 이루지 못한 것이라도 있나? 아니면 저주라도 받은 건가?”

  소녀는 팔짱을 낀 채 여자를 지켜볼 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답을 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좋아, 질문을 바꾸지. 왜 세상을 그토록 증오하는지는 답할 수 있나?”

  “내가 살았던 곳은 아주 오래 전에 세상에서 사라졌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무너진 바람에 이름도 사라지고 말았어. 전부, 몇 년간 벌어졌던 전쟁이 낳은 일이야. 눈을 뜨면 사람들이 사라졌고 거리마다 누구인지 모를 시체가 그득했어. 건물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고 들리는 건 비명과 울음뿐이었어.”

  끔찍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 치곤 지나치게 담담한 목소리였다.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여자는 소녀가 최소한 수 세기 전의 인물이리란 걸 새삼 떠올렸다. 소녀에겐 이미 닳을 대로 닳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침략군은 나중엔 몇 명을 죽였는지 따위로 내기를 하더군. 그들에게 우리는 심심풀이로 죽이는 미물에 지나지 않은 거야. 침략의 목적도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결국 세계 정복을 위해 뻗어나가려면 내 고향이 걸리적거린다는 이유였어. 군사들에겐 세계를 통합해 이상향을 만들겠다며 구슬리고선 첫 희생양으로 내 고향을 택한 거지. 나는 주변 사람을 거의 잃고 겨우 타국으로 도망쳤어. 그리고 그곳에서, 다행스럽게도 협력자를 만났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배신당했지.”

  소녀는 웃고 있었으나, 그녀의 말에는 온갖 감정이 응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적국에선 우리들을, 마지막까지 자기들에게 맞서 싸운 레지스탕스를 깔끔하게 해치우고 싶어 했어. 우리가 도망친 나라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고.”

  “결국 너희를 넘겨주었군.”

  “그래. 재미있는 결말이야.”

  소녀는 과장되게 손뼉을 치며 깔깔댔다.

  “살아가며 본 것이 그런 것뿐이라면, 세상에도 인간에게도 배신당했다면 세상에 대한 증오쯤 품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후의 사용자들에게 증오를 안겨준 것도 너의 그런 과거 때문인가?”

  “어머, 그러면 안 돼?”

  “그 오랜 세월 내내 과거를 선명하게 간직하고 전혀 관계없는 타인에게 증오를 향했다는 게 흥미로워서.”

  “어린 주인님, 그 자들은 강한 무기를 바라서 지금 당신이 쥔 그 무기를 택했고, 나는 그 자들이 바라는 대로 힘을 주었을 뿐이야.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이지.”

  소녀가 전쟁을 겪던 시절에도 전사들은 감정을 소모해 싸웠다. 그것이 현재까지도 이어져오는 전투방식이니, 소녀 이후 여자 이전의 사람들이 감정을 증폭시키는 무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 소녀 이후의 사용자들도 여자처럼 강력한 전투력에 끌려 소녀의 무기를 들었고 소녀가 불어넣는 증오로 엄청난 힘을 끌어낼 수 있었으리라. 다만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짙고 질척한 감정이었을 뿐이다. 세상에 찢기고 인간에 배신당한 과거가 낳은 격렬한 증오는 사용자를 끝내 미치게 했음이 틀림없었다. 여자도 정제되지 않은 증오에 휩쓸리지 않으려 언제나 긴장해야 했다.

  “게다가 나는 증오 외에 다른 감정을 전해줄 수 없는 자라서.”

  “무슨 뜻이지?”

  “그 시대를 살았던 쿠로사키 슌은 이 세상에 없어. 그 시절, 세상에 대한 쿠로사키 슌의 극단적인 증오가 사념으로 남아 당신 앞에서 지껄이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인간처럼 그럴듯해진 것에 불과해.”

  “처음부터 증오 덩어리였던 건가.”

  “그래. 그러니 아카바 레이지, 나를 감당하기 싫다면 이 무기를 포기해. 당신은 원래부터 강해서 굳이 이걸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적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어릴 때부터 여자는 눈에 띄는 재능으로 또래 아이들을 압도했다. 십대에 들어선 그 즈음엔 이미 어른들도 쩔쩔맬 정도의 엄청난 실력자가 되어있었다. 때문에 소녀의 말대로, 전투력 하나 때문에 위험부담이 큰 무기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세상에는 그녀가 택한 것 외에도 수많은 무기가 있었으며 그녀의 능력으로는 무기 사이의 약간의 능력치 차이 정도는 쉽게 메울 수 있었으니까.

  “이미 선택한 무기를 포기하고 싶진 않은데.”

  그러나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저주받은 무기라는 악명을 무시하고 택한 것은 자신이었다. 어떤 위험이 따른다 해도,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조금은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신하고 있었다. 지금의 무기를 쥐고 끝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고. 저주는 자신의 대에서 끊을 수 있다고. 모두를 망가뜨린 사념을 자신은 철저히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여자의 당당한 목소리에 소녀는 싱긋 웃었다.

  “당신, 마음에 드네. 그럼 어디 한 번 잘 이용해봐. 내게 질식하지 않고 말이야.”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그동안 여자는 수없이 소녀와 만났고 어느새 사념일 뿐인 소녀도 일상 속 주변인처럼 익숙해졌다. 끝없이 증오를 속삭이는 소녀와 그에 힘입어 수많은 적을 쓰러트리는 여자.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으나, 소녀는 본래 늪과 같은 존재라 조금만 방심하면 자신이 휘말리고 말 것을 여자는 안다. 소녀는 소녀대로, 여자가 자신 없이도 평범한 전사를 가볍게 뛰어넘는 활약을 해줄 수 있음을, 자신이 그녀의 유일한 무기가 아님을 안다. 그럼에도 둘은 연결되어 있었다. 여자는 소녀라는 폭탄을 끌어안기로 결심했고 소녀는 그녀가 자신을 붙잡는 한 그녀의 곁을 맴돌 것이기에.

  여자가 무기를 들고 타깃을 가리키면 약속한 듯 소녀가 나타난다. 세상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사념이, 세상을 사랑해 세상을 위해 싸우는 전사를 감싼다. 여자는 전장을 누비며 소녀의 손을 잡고 한순간 세상을 증오했다, 끝없이 봉사해야 하는 자신의 삶에 가벼이 염증을 느꼈다, 적을 쓰러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인간으로 돌아온다. 소녀의 속삭임은 그녀에게 무기이며 유혹이며 태어난 후 세상을 사랑하는 법만 배운 그녀에게 한순간이나마 증오를 열어주는 문이기도 했다. 한편 소녀는 여자와 함께할 때면 세상을 지키는 무기로 변했다. 자신의 세상을 잃고 세상을 증오하게 된 그녀에겐 묘한 일이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 얽혀 함께 싸웠고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타고난 능력과 소녀의 무서운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 익숙한 여자였으나, 드물게 여자의 힘으로도 버거운 전투가 벌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소녀는 허공에서 여자를 안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여자를 단단히 감싸고서 소녀는 나긋하게 속살거린다.

  자, 함께 떨어지자. 증오의 늪으로.

  여자가 소녀를 믿고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면, 소녀는 자신이 간직한 가장 깊은 증오에 여자와 함께 추락했다. 여자가 눈을 감고 증오에 자신을 맡기는 것과 동시에 신벌 같은 공격이 적을 덮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