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광대의 가면 너머에
최상층에서 소모한 것은 통로를 따라 지하로 떨어졌다. 추잡한 찌꺼기는 아랫것들의 세상으로 떨어지니, 고귀한 분들은 제 세상을 더럽힐 필요가 없었다. 꾸역꾸역 쏟아지는 쓰레기를 보며 청년은 깊은 곳에서 불쾌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본능적인 구역감이었다. 추락하는 폐기물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헤집곤 했으므로. 저것을 보고 있자면, 자신 또한 레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가장 낮은 곳으로, 빛도 닿지 않는 곳으로. 청년의 눈앞에 언제나 잿빛으로만 그려졌던 세상이 아른거렸다. 지우고 싶은 지옥이다.
그곳은 부취로 물든 세상이었다. 그곳에 닿는 모든 것은 오래지 않아 썩어 암담한 세상에 부취만을 더했다. 그곳에서는 빛을 잃고 깜빡이는 휑한 눈과 마주할 수 있었고, 오물이 말라붙은 곳에서 꺼져가는 생명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곳은 폐기물을 가장한 무가치한 생명이 닿는 곳이었다. 살아있으나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들은 좁은 통로를 타고 지하로 떨어져야만 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곳이 자신의 종착점이 되리란 걸 모두가 알았다.
지하에는 들어오는 길만 있을 뿐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희생자를 내뱉은 통로는, 새로운 폐기물을 가져오기 전까진 아가리를 다문 채 단단히 닫힌 채였다. 그 외에 다른 통로는 수없이 헤매도 찾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하는 폐기물을 버리는 곳이었지, 무언가를 건져낼 곳이 아니었다. 따라서 떨어진 순간부터 그들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가치한 삶을 얼마간 이어가다가 그대로 말라죽는 것이다. 운명을 직감한 이들은 그때부터 절망에 먹히기 시작했다. 빠져나갈 길 없이 버려졌다는 것에 대한 절망은 쉽게 사람을 삼키고 생명마저 앗아가곤 했다.
물론 그곳에서도 몇몇은 운명에 저항하려 들었다. 무력하게 죽고 싶지 않은 이들의 마지막 발악이리라. 그들은 부산스레 통로를 찾고 광인처럼 땅을 파거나 사람들을 붙들고 빠져나가야 한다고 꾀기도 했다. 그러나 절망에 젖어든 이들은 감히 바깥을 꿈꾸지도 못했다. 텅 빈 눈으로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도 이내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목이 터져라 소리치던 소수는 오래지 않아 스스로 지쳐 무너졌다. 그들이 매달린 한 가닥 희망은, 꺾이는 순간 덩치를 배로 불려 절망으로 변했다. 남은 사람들은 한때 호기롭게 소리쳤던 이들이 자신들보다도 빨리 말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청년도 과거 그곳에 있었다. 상부에서는 그와 같은 아이들 중 우수한 것을 추려내 키우기 위해 생존경쟁을 시키곤 했다. 상대를 물어뜯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서 수많은 아이들은 우수수 패배했다. 당시에는 작은 소년이었던 그도 어느 날 패하고 말았다. 승자는 높은 곳으로 올라설 수 있었으나 패자는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소년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채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바로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아닌지, 어린 마음에 최악의 결말마저 상상했으나 패자들은 그대로 어딘가로 옮겨졌다. 좁은 통로를 줄줄이 걸어, 어둑하고 깊은 곳으로.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마침내 그들이 닿은 곳은 지하였다. 패배한 아이들이 지하로 떠밀리자마자 통로가 폐쇄되었다. 그 순간, 소년은 자신이 완전히 버려졌음을 알았다. 그 전까지의 투쟁은 돌아보지도 않고 상부는 자신을 간단히 잘라낸 것이다. 닫힌 통로를 열려고 한들, 아이들을 놓고 간 자를 소리쳐 부른들 결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이미 무의미한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소년에겐 극한의 공포로 찾아들었다. 가치가 사라졌다면, 자신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소년의 푸른 눈은 황급히 공간을 훑었다. 먼저 닿은 이들을 살피기 위함이었으나, 소년의 눈에 새겨진 것은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의 모습뿐. 저렇게는 되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 된다면 자신은 이곳에서 썩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의 투쟁이 모두 헛된 것이 되었다 해도, 소년은 그대로 힘없이 꺾이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온 건, 생존경쟁에서 기를 쓰고 살아남으려 했던 건.
언제든 꺾일 수 있는 목숨임은 알았다.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아이들이란 상부로서는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패였으니까. 한 무리가 전부 쓸모없다는 판단으로 제거된다 해도 대체할 수 있는 자원은 수없이 많았다. 미래를 쉽게 그릴 수 없는 나날 속, 생에 대한 집착만이 강해져 소년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해왔다. 그것이 단 한 번의 패배로 꺼진다는 것은 너무도 불공평했다. 조금 더, 살아남고 싶었다. 살아남아 무엇을 할지도 생각지 않고서 소년은 탐욕스레 삶을 움켜쥐려 했다.
어떻게든 살아가겠다고 결의를 다졌으나 소년이 놓인 세상은 소년이 각오한 것보다 훨씬 끔찍한 지옥이었다. 그곳에 닿은 이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무가치한 폐기물에 지나지 않았다. 던져지는 음식은 찌꺼기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위생이 좋지 않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공간이라, 그나마 그 보잘것없는 식사가 이어지는 중에 한쪽에선 오물이 쏟아졌다. 축사만도 못한 환경이었다. 지하에 떨어진 것들은 인간으로서의 최저한도 기대할 수 없어 가축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폐기물을 빨리 치우려는 의도가 깔린 상부의 지침이었다.
고상한 이들에게는 무가치한 생명을 손수 죽이는 것도 추잡하게 느껴졌는지, 상부는 그들이 스스로 말라가도록 만들었다. 희망을 꺾은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스스로를 인간으로도 느끼지 못하도록 추락시킴으로써. 존엄성 따위 짓밟힌 지 오래인 끔찍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무력함에 혐오를 품고 체념을 배워 가축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했다. 좁고 더러운 곳에 몸을 누이면서도, 벌레에게 산채로 몸을 뜯기면서도 그것이 제게 당연한 것인 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지옥 속에서 함께 떨어졌던 아이들은 대개 죽었다. 누구도 직접 그들을 살해하진 않았으나, 지옥의 모든 것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시체가 늘어가고 부취가 짙어질수록 소년은 자신조차 지옥에서 쓰러질 수 있다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채 피지 못한 아이들뿐만 아니라, 상부에 저항한 사상범들도 지하에서 죽어나갔다.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에 반기를 들 정도로 굳건했던 사람조차 인간으로서의 무언가가 무너지는 순간 무력하게 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삶에 대한 집착만으로 버티고 있는 자신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가. 소년은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소년은 쓰레기로서의 삶에 익숙해졌다. 죽어간 이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무력함에 젖어들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던져주는 찌꺼기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며 죽어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하루하루를 보냈다. 결국은 상부가 바란 대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희망 없는 삶 속에 단 하나, 삶에 대한 집착만은 본능으로 새겨져 꺾이지 않고 남았다. 소년은 인식하지 못했으나, 그것이야말로 소년을 삶에 묶어두는 밧줄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가던 때였다. 어느 날 통로가 열렸다. 소년의 푸른 눈은 반사적으로 통로로 향했다. 이번에 떨어지는 이들은 얼마나 버틸까. 그런 생각으로 눈을 끔뻑이고 있을 때 누군가 들어섰다. 멀리서 올려다보는 것이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체구는 작았다. 아마도 제 또래의 아이이리라. 이곳에 닿은 자라면 험악하게 끌어내려져야 할 터인데 이상하게도 그 곁에 선 이들은 아이에게 손을 대기는커녕 쩔쩔매며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호기심으로라도 오래 있을 곳은 아닙니다. 잠시 돌아보고 가시지요.”
놀랍게도, 아이를 둘러싼 이들은 아이에게 존대하고 있었다. 동등하게 대해선 안 될 고귀한 존재인 것처럼. 아이는 날아든 말을 무시하고 스스로 아래로 내려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모습은 선명해졌다. 체구로 대강 짐작한 것보다 앳된 얼굴이었다. 소년은 판단을 수정한다. 어쩌면 저보다 조금 어릴지도 모른다고.
“무엇을 하시려고요, 유리 님.”
자꾸만 깊숙이 내부로 파고드는 아이에게 따라든 이들은 애원하듯 매달렸다. 그러나 아이는 시종 태평했다.
“건져낼 것이 있는지 보는 중이야.”
“말씀드렸잖습니까. 여기엔 폐기물밖에 없다고요.”
“모르지. 그 속에 가져가고 싶은 게 있을지도.”
그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소년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미래를 그릴 수 없는 삶을 이어가면서 익힌 생존법이었다. 우선 아이는 이곳에서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존재였고 무언가 흥미로운 것을 찾으려 하는 듯했다. 찾든, 찾지 못하든 본디 지상의 사람이었던 아이는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아이가 다가섰다. 아이의 보랏빛 눈과 소년의 푸른 눈이 서로를 비추었다.
“여기 봐. 살아있는 게 있긴 하잖아.”
아이의 흰 손이, 햇볕을 쐰 적도 없는 듯 깨끗하기만 한 손이 소년을 가리켰다.
“재미가 있을지는 다른 문제지만.”
“자, 잠깐만.”
그때 소년은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더러운 것이 닿았다는 사실이 불쾌했는지 아이는 매정하게 그 손을 떨쳐냈다. 하지만 소년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아이를 붙잡으려 애썼다.
“뭐야?”
정복자를 연상시키는 냉랭한 목소리였다. 내려다보는 시선조차 차가웠다. 그랬기에 소년은 희망을 품고 매달렸다. 눈앞의 아이야말로 자신을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 믿고서.
“지금 찾고 있는 사람, 나라면 가능해요.”
소년은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모처럼 닿은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서.
“내가 무엇을 바라는 줄 알고?”
“무엇이든 바라는 대로, 어떤 사람이든 될 테니까.”
“무엇이든 되어 보이겠다고?”
아이는 깔깔댔다. 제게 매달리는 무력한 것의 발악이 퍽 우스운 모양이었다.
“좋아. 그러면 증명해봐. 네 가치를.”
아이의 흰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아이는 자신을 따라온 이들에게 손짓했고, 소년은 그들의 손에 이끌려 아이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자주 없는 소란에 지옥에 떨어졌던 이들도 잠깐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이내 무기력하게 눈을 감았다. 지옥의 삶에 익숙해진 이들에겐 그 모든 풍경도 의미를 갖지 못했던 모양이다. 다만 소년만은 잔뜩 도취된 채였다. 드디어 지상으로 향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이 지옥에선 벗어날 수 있었다.
영영 오를 일 없을 줄 알았던 길을 오르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빛이 드는 세상으로 향한다. 그 하나하나가 소년에게는 기적처럼 달콤했다. 통로가 다시 열릴 때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이들 몇몇이 빠져나가려 달려들었으나 아이와 함께 온 이들이 매정하게 떨쳐냈다. 지상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은 아이가 허락한 자뿐이었으므로. 마침내 소년은 지상에의 길에 다시 발을 내딛었다. 황홀함에 잠긴 채 마지막으로 돌아본 지하는 잿빛이었고 영영 소년에게 그 색채로 남게 되었다.
그것이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의 소년은 이제 앳된 티를 벗고 청년이라 불릴 정도로 자라났고, 지옥에서의 삶은 과거로 남았다. 청년은 지상으로 올라온 후 자신의 위치를 마련하더니 상부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었다. 자신의 가치를 분명히 보여준 그는 더 이상 추락할 일이 없었다. 그가 뿌리내린 곳은 무가치한 것에 비정한 만큼, 가치 있는 것에 너그러운 세상이었으므로. 그럼에도 지옥을 연상시키는 풍경에 구역감이 치미는 건 지옥에서의 삶이 그의 몸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그것은 걸핏하면 고개를 쳐들곤 그를 괴롭혔다.
이대로 계속 충성스런 수하로 남아있지 않으면 안 된다. 상부의 믿음을 잃는 순간, 기껏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지옥에서의 기억이 고개를 쳐들 때마다 그의 머리를 잠식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각이었다. 그가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자신을 관리하며 버거운 명령에까지 복종하는 것은 전부 그 때문이었다. 버려지는 것이 두려웠다. 가치를 잃는 것이 두려웠다. 결국 청년의 내부에는 아직도 지옥을 헤매는 소년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끔찍한 날들을 연상시키는 쓰레기장에서 시선을 돌리며, 청년은 현재 맡은 것에 집중하려 애썼다. 추락하지 않도록 그를 붙잡아주는 것은, 상부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는 것밖에 없었으므로. 괜한 초조함에 청년은 바삐 움직였다. 불안을 불러온 것을 외면했음에도 이미 치민 구역감은 어찌할 수 없어 그는 한동안 메스꺼움에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청년을 지배하는 것은 상부였지만 보다 깊은 곳에서 그를 다루는 것은 그와 엇비슷한 나이의 소년이었다. 과거 지옥에서 그를 건져낸 아이는 몇 년의 시간을 거쳐 이제 소년이라 불릴 나이가 되었다. 아이의 뒤를 따라 지상으로 나온 순간부터, 그의 삶이 아이에게 매이는 것은 당연한 것. 지옥에서 빠져나온 소년이 긴장한 채 향한 곳은 아이의 공간이었다. 본디 아이가 건져내려 했던 것은 자신의 곁에서 함께해줄 평범한 친구였다고 했다. 상부에서는 빼어난 능력을 타고난 아이를 귀중하게 다루는 동시에 아이를 두려워했고, 또래 아이를 붙여 그 행동을 적절히 통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상부의 뜻을 농락하듯 지하로 향하면서 계획이 어그러졌다. 아이는 자신이 선택한 자의 구원자가 됨으로써 상대가 자신에게 쉽게 관여할 수 없도록 우위를 점했으므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을 골랐을 뿐이다. 구원자의 은근한 억압에 소년은 금세 깨달았다. 저보다 어린 아이라 한들 그 뜻에 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감히 거역하는 순간 자신은 다시 가치를 잃고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다시 올라올 수 없다.
지옥에서의 흔적을 씻어내고 말끔히 단장한 소년은 아이에게로 향했다. 귀하게 자라난 아가씨의 인형이 된 것처럼 모든 것이 어색했다. 자리에 앉은 채 제 일에 열중하던 아이는 쭈뼛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선 소년을 보고 싱긋 웃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했지?”
소년은 움찔했다. 어떻게든 지하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구원자가 되어줄 유일한 사람을 붙들기 위해 나오는 대로 지껄였던 것이었다.
“기대하고 있어.”
그것은 은근한 압력이 되어 소년을 감쌌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소년은 자신이 진정, 타인이 바라는 대로 모습을 바꾸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멋대로 주워섬긴 말에 지나지 않았으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발휘된 것인지 소년은 결국 자신이 선언한 대로 될 수 있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 어떤 이름이든 자유롭게 짊어지고, 다른 모습을 택할 땐 이전의 이름과 모습 따위 단번에 버릴 수 있는 존재로.
그것은 생물이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습과 색을 바꾸어 주변에 녹아드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소년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자주 광풍이 몰아쳤고, 그때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는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위장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광풍이 지나가고 평화가 와도 소년은 안도하지 못한 채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바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수많은 위기는 소년을 교묘하게 피해갔고 소년이 청년이라 불릴 때까지 살아남게 했다.
물론 소년은 ‘구원자’였던 아이에게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훌륭하게 증명해 보였다. 날 때부터 정복자였던 것만 같은 아이는 별달리 자비롭지 않아서, 아이의 공간에 들어선 소년도 바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주변에서도 잔뜩 겁을 주었다.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고. 지금껏 아이가 사람에게 품은 흥미는 오래가지 않았다고. 순간순간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소년이었으나 다행히 아이는 그를 오랫동안 살려두었다. 볼만한 것이 있다는 이유로. 이게 질릴 때가 되면 또 저 모습으로 바뀌거든. 지루할 틈이 없으니 좀 더 지켜봐도 되겠지. 소년을 바로 앞에 두고도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하에게 말했다.
날이 흘러갈수록 소년은 아이의 세상에 자연스레 녹아들었고 언제 버려질지 모를 처지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소년은 아이가 친근하게 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원자는 소년이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변하는 것 없는 지루한 세상 속 유일하게 변하는 인간이기 때문일까. 소년은 아이의 눈에 들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아이는 교묘한 폭군이었고, 방해되는 것에는 무자비하되 제가 아끼는 것만은 틀어쥐고 놓지 않는 아이였다. 흥미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자신은 계속 이곳에 ─ 소년은 아이의 보랏빛 눈을 볼 때마다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단장해야 아이가 가장 만족할지 속으로 헤아리곤 했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익힌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중대한 임무는 이번이 처음이었던가?”
몇 년의 시간이 흘러 그때의 아이는 소년이 되었고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청년은 멈췄다. 맞은편에서 소년이 나른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막 상부로부터 명령을 받아 나온 참이었는데, 마찬가지로 간부를 만나고 온 소년과 우연히 마주친 모양이었다.
어느새 청년은 상부에 편입되어 있었다. 상부에서, 어린 나이에 이미 활약하고 있는 소년의 곁에 두려 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청년의 모든 것이 소년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목숨도 자리도 소년 때문에 구하게 된 것. 그만큼 소년은 그의 삶을 당연하다는 듯 지배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수많은 아이들이 생존경쟁에 밀려 지하로 떨어졌고 또 새로운 자원이 쏟아졌으므로, 상부에서는 지하에 떨어진 것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했다. 한때 최하층에 떨어져 죽을 운명이었던 청년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부에 ‘필요한’ 사람으로서 들어설 수 있었다. 자리를 얻고 임무를 받는 것은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바라마지않던 것이, 타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패자의 삶은 승자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가치 있는 존재였다.
“응, 영광스럽게도.”
“무슨 일인데?”
“엑시즈에 가서 그곳의 상황을 파악해 보고하고 무언가를 찾는 것.”
“침략 전에 움직여줄 첩자가 필요하단 말은 들었는데, 누구를 보낼까 했더니 너였군.”
“유리는…….”
“아직은 비밀.”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간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했거든.”
지금에야 타인에게 그들의 관계가 친우처럼 비치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동등할 수 없는 관계였다. 살아남기 위해 발악해온 자와 어려서부터 당연하다는 듯 최상층에 오른 자가 동등할 수는 없었다. 청년이 아무리 자리를 얻고 조금씩 입지를 굳혀간다 해도 태생부터 지배자인 소년과의 간극을 좁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도 그랬다. 소년은 언제나, 이곳의 수장으로부터 가장 중대한 것만을 맡았다. 자신이 맡은 것을 비밀에 부치는 것은 그만큼 중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곳은 철저하게 능력과 지위로 관계의 우위가 정해지는 곳. 그들의 관계는 친우라는 이름이 어울릴 동등한 것이 못 되었다.
“그래도 첩자라니 나쁘지 않네. 그런 자리엔 위장이 능한 사람이 어울리니까.”
너처럼. 이어진 말에 청년은 살아남기 위해 위장해온 날들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본능에 근거한 발악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상부에서 그 능력을 높이 사 그에게 여러 모습을 연기하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이번엔 어떤 모습을 연기할 생각이야?”
“글쎄. 누구도 경계를 품지 않을 모습이어야 할 텐데.”
“광대는 어때?”
지금까지 맡아온 배역을 훑으며 어느 것이 가장 적당한지 헤아리던 청년에게, 소년은 나긋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광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자가 쉽고 빠르게 사람들에게 다가서기엔 그런 역이 적당하지 않으려나?”
“공연으로 접근하라는 거야?”
“뭐. 그렇지. 평화로운 세상에선 사람들이 그런 걸 즐길 여유가 있을 테니까. 설마 엔터테이너에게 의심을 품을 자도 없을 거고.”
“나쁘지 않네.”
청년은 무대에 선 자신을 상상한다.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기예를 펼치고 박수와 함성에 공손히 인사하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광경이었다. 과거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연명해서인지, 아니면 위장의 과정에서 생긴 타인의 시선을 갈망하는 습성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는 화려한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을 좋아했다. 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빛날 수 있다면.
“네게는 언제나 광대가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
소년은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 청년을 파헤친다. 소년 앞에서 청년은 낱낱이 해부되고 속내마저 드러내야 했다. 청년은 그것이 오싹한 한편 안심이 되었다. 소년만은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알고 있다. 그 어떤 역할을 맡아 위장하더라도 그 앞에서만은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역할은 인간을 규정하는 것.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역할을 둘러온 청년은 이미 수없이 새롭게 규정되었을 것이다. 어디까지가 진짜 자신이고 어디까지가 위장인지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리라. 그 모든 것이 청년이었고 모든 것이 청년이 위장한 모습일 테니. 누구도 그를 정확하게 보지 못했기에 청년은 누구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년이라면 어떨까. 자신을 최초부터 지켜봐온 소년이라면, 그리고 자신을 해부하는 소년이라면. 청년은 소년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모든 것을 잃더라도 소년에게는 기댈 수 있으리라고.
“좋아, 이번에는 엔터테이너로.”
“화려하게 관객을 사로잡으라고.”
소년은 청년에게 웃어주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청년은 오래지 않아 엔터테이너라는 역할을 걸친 채, 정탐할 곳에 닿았다. 그곳에서 청년은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능숙하게 무대를 꾸미고 화려한 기예를 보이더니 빠르게 관객을 사로잡았다. 거리 공연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럴 때마다 청년은 깊숙한 곳에서 희열이 피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역할이었다. 수많은 역할을 거쳐왔음에도 그것만큼 그에게 착 달라붙는 것은 없었다. 임무에 유용한 것은 물론이고 그의 마음에도 들어 청년은 계속 엔터테이너의 역할을 걸친 채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청년은 알았다. 무대 위의 광대로 사람들을 웃게 하는 즐거운 시간도 임무가 끝나는 순간 종료된다는 것을.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청년은 가치가 사라진 땅이 폐허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급작스러운 전쟁에 사람들은 대개 쓰러졌고 살아남은 자조차 살아남기 바빠 거리의 광대에 시선을 줄 수 없게 되었다. 그 풍경에 한 가닥 아쉬움을 품으며 청년은 본래의 세상으로 복귀했다. 앞으로는 다시 그곳에 향할 일은 없을 것이다.
임무는 그 후로도 이어졌고, 이전에 맡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임무에 청년은 이전의 역할을 그대로 가져가기를 고집했다. 엔터테이너의 역할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판단으로 무장하고서. 그곳에서도, 무대를 옮겨 다른 세상으로 향해서도 그는 관객을 사로잡는 엔터테이너였다. 쏟아지는 환호와 사람들의 얼굴에 걸리는 웃음은 언제나 달콤했다. 그 속에서 청년은 지옥을 헤매던 기억 따위 떨쳐내고서, 모두의 사랑을 받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무대 위의 자신은, 언제나 찬란하게 빛났다.
자신의 내부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청년은 모른다. 수많은 역할을 거치는 과정에 너무 많이 변해와 자신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조잡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에 몰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화려하게 치장하려 몸부림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부취를 막고 타인에게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고픈 욕망에서.
맡은 임무가 정탐이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공들여 치장한 화려한 외부가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청년은 언제나 능숙하게 자신을 관리했다.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 들키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임무가 어그러지고 애써 쌓아온 화려한 자신도 무너진다. 날이 갈수록 치장은 두터워지고 거짓말은 능숙해진다. 청년은 자신의 위장을 부수는 이는 없을 거라고 어느 순간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삶이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 청년은 결국 자신이 짓밟은 세계의 유민에게 낱낱이 정체가 밝혀지고 말았다. 공들여 꾸며온 극은 막을 내리고, 그것에 불쾌해진 청년은 상대가 바란 대로 끔찍한 정복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대로 힘으로 억누르면 당연히 그 목을 조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승부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복자는 억압당하던 패자에게 붙들려 추락했다. 참혹한 결말이었다.
내일을 그릴 수 없는 상황에서 청년은 운 좋게 본래의 세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임무가 어그러진 것은 매우 유감스러웠으나 그때까지 그가 파헤친 정보는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문책을 건너뛰고 우선 상처를 치료하러 병실로 옮겨진 청년은 오래지 않아 자신을 찾은 소년과 마주했다.
“실패했다며?”
여느 때처럼 나긋한 목소리였으나, 소년과 오래도록 함께한 청년은 그에 냉랭함이 깃들었음을 알았다.
“유감스럽게도.”
“책임을 물을지 그대로 넘어갈지는 모르겠네.”
“처분에 대한 말은 있어?”
“아직까지는 없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프로페서 앞에 설 수 있을 때까진 내버려두겠지.”
소년의 흰 손이 청년의 상처로 향했다. 붕대를 감은 것이 보이는데도 지그시 누른 것은, 분명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오는데도 소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너를 어디서 건져왔는지 기억하지?”
그러나 청년을 진정 고통에 떨어뜨린 것은 몸의 통증이 아닌 기습적으로 날아든 말이었다. 과거를 헤집는 질문에, 청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곳이 아직 남아있다는 거 알아?”
모든 생각이 정지했다. 공포만이 그를 덮쳤다. 그것은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유리.”
“아카데미아의 방침 중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공포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거야. 봐. 너도 반응하잖아.”
상대를 가장 두려워하는 기억에 던지면서도 소년은 즐겁다는 듯 키들거렸다. 소년은 처음부터 잔인하고 무자비한 폭군이었다.
“너무 굳어있는데. 안심해. 여태까지 공들여 키운 것을 단숨에 그곳에 던질 리가 없잖아?”
청년은 그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자신은 언제든 추락할 수 있는 무력한 존재였고 소년은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는 그저 그를 틀어쥔 채 제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즐기는 인간일 뿐이었다. 수년 전, 그가 지옥에서 빠져나올 때와 모든 것이 같았다. 지위를 얻고 가치를 입증했다 한들 그는 여전히 몇 년 전 한 아이가 재미를 위해 살려둔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은 무엇을. 자신하던 것은 오만이었고, 그조차 소년이 허락하는 선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음을 청년은 확인한다. 그 순간 그는 다시 몇 년 전의 절박한 소년이 된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유리.”
실패와 패자를 혐오하는 소년에게 매인 채라는 것을, 잠깐 잊고 있었다. 자신에게 반쯤 매달리다시피 한 청년에 소년은 희게 웃더니, 자비로운 체 말했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는데. 조심하는 건 나쁘지 않지만.”
다음 순간 소년의 손이 청년의 입가에 닿았다. 서늘한 감촉에 청년은 움찔했다. 아직 앳된 티가 묻어나는 작은 손가락은 그의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자, 웃어야지, 데니스. 지금은 광대잖아?”
그것은 이미 협박이었다. 소년은 청년에게 어떤 상황에서든 완벽하게 연기하길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무력한 인간은 그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소년의 손가락이 떨어지자마자 잔뜩 경직된 채 웃었다.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비칠지도 모르는 채 일그러진 웃음이라도 걸치려 노력했다.
“그래. 이래서 네겐 광대가 잘 어울린다는 거야.”
무력한 복종에 어린 정복자가 만족스레 웃고 공간을 떠날 때까지 청년은 그대로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눈은 텅 빈 주제에 웃음만은 거두지 않는 것이 괴기스러운 광대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