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슌] 사멸
청년은 제 손에 흩뿌려진 피가 붉은 꽃잎 같다고 생각했다. 지기 직전의 꽃이 힘을 다해 붉게 피워낸 꽃잎. 흰 손에 점점이 얼룩진 피를 닦아내며 청년은 제 삶도 머잖아 지게 되리라 예감했다. 언젠가부터 청년에게는 죽음이 드리워지고 있었으므로. 빠르게 세를 키워가는 죽음의 그림자는 청년을 삼킬 듯 아가리를 벌리고 혀를 날름거렸다. 그에 잠식될수록 청년은 생명이 저물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피를 토한 것도, 벌써 여러 날이었다.
시시각각 닥치는 죽음에도 청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죽음의 침략에 원망하고 눈물을 쏟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살아남으려는 버둥거림조차 없었다. 청년이 그렇듯 죽음에 덤덤한 것은 그것이 예정된 결말이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본디 죽어야 할 사람이었다. 단지 그 시점이 생각보다 빠르게 닥쳤을 뿐이다.
청년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사람이었다. 인간으로서 꼭 필요한 무언가가 결핍되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하나여야 했던 존재가 둘로 나뉘어 태어났던 탓이다. 하나로 온전한 것을 쪼개면 어느 쪽도 온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청년도, 그의 누이도 그런 점에서 태어날 때부터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그토록 상대를 아꼈을지도 모른다. 불완전한 조각들이나마 함께하는 것이 보다 안전했을 테니까.
그들은 둘로 나뉜 존재였으나 그 힘이 동등하진 않았다. 한쪽이 월등히 위력이 강했으며, 나머지는 다른 쪽의 파편에 가까울 정도로 약했다. 게다가 약한 개체는 혼자로는 불안정해 온전히 생존하려면 강한 쪽을 필요로 했다. 다행히도, 누이는 그 중 위력이 강한 쪽이었다. 즉, 누이 쪽이 본체에 가깝고 그는 기생체나 다름없는 불안정한 개체라 볼 수 있었다. 지금껏 그가 버텨온 것은 아마 본체인 누이와 오래도록 함께했기 때문이리라.
처음부터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삶이 언제 끝나게 될지, 청년은 몰랐다. 그러나 그 태생적 한계가 그들 모두의 발목을 잡게 되리란 것은 알았다. 온전히 하나인 이들보다는 어떻게든 불리할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면, 그 한계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청년은 금빛 눈을 내리깔며 침대에 앉았다. 완전해져야만 했다.
둘로 쪼개져 불완전한 것이 완전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했다. 둘이 하나가 되거나, 한쪽이 다른 쪽을 흡수하는 것이다. 이미 분리된 채 다른 개체로 살아온 지 오래인 그들 남매가 이제 와서 하나가 되는 것은 무리였다. 남은 것은, 하나가 다른 쪽을 흡수하는 것뿐. 청년이 죽어가기 시작한 건 그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누이는 위험에 처했고, 그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으려 약한 쪽의 힘을 흡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파편에 가까운 청년을 사멸시킴으로써.
누이를 원망해본 적은 없었다. 태생적인 한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 하나뿐이었으며, 청년은 자신을 말려 죽이는 것이 누이의 생존을 위한 최선의 계책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게다가 그는 지금까지 누이에게 삶을 빚져온 게 아닌가. 이제 누이의 삶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게 된다 해도 고통스러울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으로 누이가 완전해진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길일 것이라 생각했다. 청년은 자신의 태생에 대해 알았던 날 이미 삶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그러나, 불완전해도 행복한 삶이었다. 동화 속 세상처럼 아름다운 도시에서 평화가 평화인 줄도 모른 채 살아가던 날이 있었다. 누이의 웃음에 마주 웃었던 날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화사한 색채로 빛나던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이, 분명 있었다. 청년은 그때 굳이 행복을 생각하지 않았다. 불행하지 않아,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날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게 된 건 그 모든 것이 허망하게 무너졌을 때였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침략자의 손에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둘 짓밟혀 사라져갔다. 전쟁이었다.
전쟁은 청년에게서 웃음을 앗아가고 동료를 앗아가더니, 결국 사랑하던 누이마저 빼앗고 말았다. 참혹한 전쟁 속 누이까지 적에게 빼앗겼던 때, 참담한 전장 속에서도 굳건하게 싸워왔던 청년조차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극도의 절망 속에서도 계속 저항군으로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누이가 살아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기생체나 다름없는 자신이 살아있다면, 누이도 어딘가에 분명히 살아있으리라고.
다만 누이가 사라진 때부터 청년은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볕을 받지 못한 식물이 조금씩 말라가는 것처럼. 연료가 부족한 기계가 차츰 느려지는 것처럼. 그것은 청년이 불완전한 파편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함께하는 것으로 자신을 지탱해주던 누이의 부재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청년은 나날이 몸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피부는 창백해졌고 가는 몸은 더 가늘어졌다. 이따금 숨이 막혀 가슴을 움켜쥔 채 멈춰야 할 때도 있었다. 청년은 명백히 부서지고 있었다.
하루하루 제 몸을 점검하며 청년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누이가 사라진 이상 붕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둘째, 그러나 붕괴의 속도는 느린 편이다. 청년은 첫 번째 결론에 절망하기보다 두 번째 결론에 감사했다. 그래도 이대로라면 자신이 완전히 부서지기 전에 누이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만으로 청년은 녹슬어가는 몸을 이끌고 전력으로 싸웠다. 적을 쓰러트리고, 한 발짝 나아가고, 적을 쓰러트리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런 싸움이 이어지던 때였다. 함께 싸워오던 동료가 사라졌다. 말이야 실종이었으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전장에서 싸워온 청년이 가장 잘 알았다. 쓰러진 것이다. 돌아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초조함과 불안에 동료에게 수없이 연락을 반복하길 몇 시간. 청년은 쇼크처럼 닥친 통증에 가슴을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힘없이 떨어진 통신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쳤다. 뼈를 찌르는 듯 고통스러운 기침에 쿨럭거리기를 몇 분. 청년은 제 흰 손에 흩뿌려진 피를 보았다.
첫 각혈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본격적으로 드리워지기 시작함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그 날 이후로 청년은 하루하루 죽음이 자신을 잠식함을 알게 되었다. 동료의 실종이 그의 붕괴에 가속을 붙인 것처럼. 시시각각 들이닥치는 죽음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죽음의 침략은 너무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제 청년은 자신이 무너지기 전에 누이를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이대로 싸우게 된다면 과연 누이가 갇힌 곳까지 무사히 닿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때문에 청년은 매일 죽음을 생각하고, 매일 죽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피를 토하고, 힘이 풀려 쓰러지고, 숨이 막혀 무너지기를 몇 번.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진통제를 삼키고 주저앉은 날, 청년은 문득 자신의 태생적인 한계에 생각이 닿았다. 그리고 납득했다. 자신이 빠르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누이가 위험해진 것이다.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 쓰게 된 것이다. 불필요한 기생체를 사멸시킨다면, 누이가 완전해진다면 누이는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누이 덕분에 이어올 수 있었던 삶이었다. 누이의 삶을 위해 목숨이 거두어진다면 짧지만 합당한 종말일 것이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직 누이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 죽는 것이야 각오했지만 누이를 구하지 못하고 죽는 것은 두려웠다. 같은 목적을 위해 움직이게 된 협력자가 있었으나, 전부 신용할 수는 없었다. 만일의 상황까지 가정해 그에게 누이를 맡기기보다는, 가장 절박하게 누이를 구하려 하는 자신이 누이를 구해야만 했다.
그때부터 청년은 조급해졌다. 초조함에 사로잡혔다. 절박함이 그를 지배해 언제나 그를 쫓기게 만들었다. 시간에 쫓겼고 적에게 쫓겼다. 스스로 벼랑에 내몰린 탓에 청년은 휘청거렸다. 쓰러지기도 했다. 결국 적의 공격에 쓰러지기 직전에 겨우 빠져나왔고 싸움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초조함에 사로잡힐수록 무너지기 쉽다는 것을 알면서도 초연해지기는 쉽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라 누이를 보고 있어서였다. 나날이 소모되는 몸으로 언제나 누이에게 닿는 일만을 생각해야 했다.
결국 청년의 싸움은 적에 대한 싸움인 동시에 시간에 대한 싸움이었다. 적을 쓰러트려 누이를 구해야 했고, 자신의 시간이 다하기 전 누이를 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은. 청년은 손을 뻗어 자신의 무기를 손에 쥐었다.
죽기 전에, 싸움을 완전히 끝내야 했다.
*
청년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걸음을 옮겼다가, 세 걸음 걸었을 때 무너졌다. 쓰러지지 않으려 했으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지면에 몸이 닿기 전에야 겨우 타인의 부축을 받아 일어설 수 있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몸은 이제 짧은 시간 서 있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당연히 전투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청년이 부득부득 싸우겠노라며 나서는 바람에 그것마저 막지는 못했다. 전투를 무사히 끝마친 건 다행이었지만 승리를 거두자마자 바로 청년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마도 전투 중에는 오기로 버틴 모양이었다.
“걸을 수 있어.”
청년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자신의 무력함을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청년의 양팔을 붙든 이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놓아버리는 순간, 이번에야말로 그가 쓰러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투는 끝냈으니 이제 쉬도록 하지, 쿠로사키.”
자신에게 날아든 건조한 목소리에 청년의 금빛 눈이 바로 소리가 들린 쪽을 쏘아보았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안경을 쓴 사내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이상은, 내가 허락하지 않아.”
보랏빛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사내의 목소리에는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뜻을 따르지 않으려는 듯 입술을 달싹인 청년이었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내 앞에서 사라졌다. 은신처로 강제로 이동된 것이다. 청년은 뛰어난 전사였으나 오래 버틸 수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사내는 청년의 행동을 끊어줄 필요가 있었다.
사내가 처음 청년을 자신의 전사로 끌어들일 때만 해도, 청년은 그렇게 위태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나날이 죽어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약해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까지 잠복하고 있던 병이 그때서야 발병한 것인가? 혹은 심적인 부담으로 몸에 무리가 가기 시작한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증상이 너무도 다양하고, 중했으며,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사내는 청년이 어떤 날을 기점으로 그렇게 급작스레 무너지기 시작했는지 헤아려보았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도 오래지 않은 과거. 청년과 함께해온 동료가 쓰러졌던 때. 그 날이 청년의 삶을 틀어버린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것은 사내의 뛰어난 분석력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동료의 상실이라는 절망적인 사건이 그에게 심한 타격을 준 것인지, 그저 우연의 결과일 뿐인지. 그것조차 사내는 알 수 없었다.
은신처로 들어서자, 몸을 웅크린 청년이 보였다. 앙상하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여윈 몸이 안쓰러웠다. 날이 갈수록 그가 죽어간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훌륭한 전사이자 아까운 패인 그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사내는 그의 행동을 조정하게 되었다. 중요한 전투가 아닌 이상 그를 제외시키고, 전투 이외의 시간은 최대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배려에 가까운 사내의 처사를 제약으로 받아들이고 반대하는 것은 청년뿐이었다.
나는 싸워야 한다.
사내가 그를 전투에서 제외시키려 할 때마다 청년이 다급하게 외치는 말이었다. 물론 사내는 청년의 절박함을 안다. 수많은 동료들을 잃고 혼자 남은 그는 그나마 살아남은 누이를 구한다는 목표에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을 터. 게다가 날이 갈수록 빠르게 몸이 부서져가니 초조해할 만도 했다. 그러나 청년이 바라는 대로 전투를 거듭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간 청년은 적의 본거지에 돌입하기도 전에, 누이를 만나기도 전에 쓰러질 테니.
“몸은 좀 어떻지?”
“여전하다.”
친절하게 건넨 말에도 답은 무뚝뚝하게 돌아왔다. 상대를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던진 말이었다. 사내는 청년의 발치에 굴러다니는 약병을 보았다. 진통제. 어떤 치료로도 그의 병을 낫게 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곤, 통증이라도 잠시 잊게 해줄 진통제뿐.
“쿠로사키. 우리는 아카데미아와 싸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청년은 여전히 웅크린 채 사내를 보지 않았다.
“아카데미아와의 진짜 싸움에서 실력을 발휘해야 할 네게 불필요한 움직임은 낭비야.”
“그래서 얌전히 처박혀있으란 말인가?”
“전략상의 후퇴라고 해두지.”
그제야 청년이 고개를 들어 사내를 보았다. 눈에 띄게 핼쑥해진 그의 얼굴에, 사내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소용없어.”
청년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무슨 뜻이지?”
“날이 갈수록 죽어가고 있다. 싸우지 않는다고 그 속도가 늦춰지는 것이 아니야.”
그 무엇도 청년을 죽음에서 구원해줄 수는 없었다. 청년의 죽음이란 예정된 결말이었고, 그는 그 결말을 향해 착실하게 달려가는 것에 불과했다. 어떻게 저항하더라도 죽음의 침략을 피할 수 없으며 그것을 늦추기 위한 그 어떤 조치도 배려도 무의미했다. 그는 순조롭게 죽어가고 있었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피하든 죽음은 공평하게 들이닥친다. 그렇다면 차라리 싸우는 게 낫지 않겠어?”
청년의 병적으로 흰 얼굴에 텅 빈 웃음이 걸렸다.
“더 망가지기 전에 말이야.”
“거기서 더 무너질 수도 있나?”
“아직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어.”
“최악의 상황이라면, 아예 싸울 수도 없게 되는 것을 말하는 건가?”
청년은 굳이 답하지 않았으나 사내는 청년의 눈에서 긍정의 답을 읽어냈다. 세상을 덮친 전쟁에서 처절하게 싸워 살아남은 생존자에게, 앞으로도 싸워 누이를 되찾아야만 하는 전사에게 최악의 상황은 싸울 수 없게 되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 순간 그는 전사로서의 이름조차 잃고 무력한 인간이 되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잔혹한 일이었으나, 청년이 빠르게 죽어가는 이상 언젠가는 그런 날이 닥치게 되리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사내는 옳았다. 다만 그 날은 사내의 생각보다는 일찍 찾아들었다.
처음에는 감각이 조금 닳은 것뿐이었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자극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정도의 가벼운 문제였다. 그러나 감각의 이상은 빠르게 청년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청각이 무너지며 청년은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청년의 세상이 소리를 잃어가던 어느 날, 마침내 청년은 끊어지지 않을 침묵에 휩싸였다. 그래도 청년은 싸웠다. 그것만으로는 청년의 투지를 꺾을 수 없었다.
물론 하루하루 청년을 잠식해가는 죽음이 그 정도에서 제 심술을 거둘 리가 없었다. 청년은 점차 다른 감각도 잃어갔다. 나날이 무너지는 감각 속에서 청년의 세상은 축소되고 뒤엉키고 청년에게 버거워졌다. 그럴수록 청년은 악에 받친 듯 더 맹렬하게 싸웠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으로, 마치 자신을 짓누르는 죽음에게 발악하는 것처럼. 그 모든 것도 부질없이, 청년은 말을 잃게 되었다. 성대가 망가지고 혀가 쥐어뜯긴 것처럼, 어떤 소리도 그에게서 흘러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 즈음엔 시각까지도 거의 무너진 청년이었다. 청년의 몸 자체가 이미 무너진 그의 고향처럼 무엇도 피어날 수 없는 폐허가 된 것 같았다. 감각조차 하나씩 꺼져가는 몸을 이끌고도 고집스레 싸워오던 청년이었지만, 시각이 말라붙은 순간 싸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저 살아가는 것은 몰라도 싸우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했기에.
그 날은 청년이 전사로서의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었다.
*
싸울 수 없게 된 청년은 급속도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시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무력한 인간이 된 것이다. 숨이 붙어있기는 하나, 그뿐. 초점 잃은 금빛 눈은 멍하니 허공만을 훑었다. 맹금을 의미하는 이름도, 적의 숨통을 끊는 무시무시한 실력도 그가 죽음에 그만큼 잠식된 이상 의미를 잃었다. 사내는 자신의 전사가 말라가는 모습을 덤덤하게 지켜보았다. 언제라도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용케 목숨은 부지하고 있었다.
청년이 감각을 잃어가는 중에도 힘을 다해 싸운 덕분에 사내와 그의 전사들은 적의 본거지로 돌입할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수뇌부를 처리하고 적의 계획을 마비시키는 것뿐. 계획한 것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마침내 긴 전쟁을 끝낸 전사들은 적진 깊숙한 곳에 숨겨진 청년의 누이를 구해낼 수 있었다. 오래도록 속박되어있던 방에서 벗어난 그녀는 천천히, 천천히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흰 얼굴에 비로소 안도가 비쳤다.
청년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전쟁이 끝났음을 알고 어떻게든 누이를 찾으려 나선 모양이었다. 이제 더 이상 누이를 찾아낼 수단조차 없는 청년이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처절하게 옮겼다. 청년을 발견한 동료들이 급히 그를 부축했고 누이에게로 걸음을 옮기게 해주었다. 청년이 다가설 때마다 누이도 다가섰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선명하게 비치는 청년의 모습은 너무도 초췌해서 그녀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걸렸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왜 그는 그렇게 망가졌는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누이 앞에 닿은 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루리.]
물론 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의 말은 이미 한참 전에 죽어버렸으므로. 다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입모양이 분명히 동생의 이름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끝났어. 바라던 대로, 여기까지 왔어.
청년의 얼굴에 감격이 번졌다. 그는 적에게 이기고 시간에게 이겼다. 적과 싸워 전쟁을 끝냈고 시간이 다하기 전 누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청년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며 몇 번이고 생각해온 것. 청년은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청년의 떨리는 손이 제 품속을 더듬더니, 단검을 꺼냈다. 시체처럼 앙상한 손에 들린 단검의 날이 불길하게 번득였다.
자, 이것으로 너는.
청년은 자신의 가슴을 단검으로 찔렀다. 그와 함께 겨우 지면에 서 있던 그의 몸이 허망하게 허물어지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흘러나온 피가 땅을 적시는가 싶더니 이내 청년은 빛에 둘러싸인 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한참이 지나 빛이 걷힌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라는 인간이 한낱 환상에 불과했던 것처럼.
너는 이것으로 완전해지는 거야.
하나로 쪼개졌던 둘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청년이 사멸함으로써 누이는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