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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슌ts] 통증

현소야 2015. 12. 21. 22:58

 

  사내는 내부를 찌르는 통증에 신음을 뱉어냈다. 기다란 창이 그의 배를 관통하고 있었다. 격렬한 통증과 함께 쏟아진 피가 그의 옷을 빠르게 적셨다. 죽음처럼 무거운 고통에, 언제나 단정한 얼굴에까지 한 가닥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나 그는 몇 번이고 반복해온 경험으로 알았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을 모방한, 현실만큼 짙은 환상일 뿐. 사내는 고개를 들어 제게 창을 찔러 넣은 이를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책상 끝에 걸터앉은 여자의 얼굴엔 표정이라곤 없었다.

  고통스레 숨을 토하며 사내는 여자를 응시했다. 녹색을 띠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사락거렸다. 희고 앙상한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창을 여자는 천천히 그의 내부로 꽂아 넣었다. 그가 극한의 고통을 서서히 누리길 바라는 것처럼. 격통의 끝에 사내는 숨을 헐떡이며 유언처럼 여자의 이름을 토해냈다.

  쿠로사키.

  순간 창이 사라졌다. 사내는 분명 꿰뚫렸을 제 복부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옷이 찢긴 흔적도 없다. 피가 번진 흔적조차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이 그의 꿈이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통증만이 그의 몸에, 그리고 머릿속에 선명할 뿐. 여자는 여전히 그의 책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머리카락을 손으로 훑었다. 눈앞을 여자의 녹색 머리카락이 가득 채웠다.

  악독한 장난이군.

  사내는 여전히 생생한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언제나 저렇게 굴었다. 그의 눈앞에 예고 없이 나타나서는, 어떻게든 그의 몸에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사내는 이미 수십 번 몸을 꿰뚫렸다. 그 수단 또한 다양해서, 사내는 여자의 가느다란 팔이 꼬챙이처럼 제 뱃속을 통과하는 것을 경험한 적도 있었다. 그때 사내는 고통에 신음할 수조차 없었다. 여자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것이 그의 숨을 그대로 얼려버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내는 여자가 환상임을 안다. 아무리 고통을 안겨준들, 그녀는 실제로는 한낱 생채기조차 그의 몸에 남기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임을 안다. 실상 그녀가 남기는 것은 덧없는 통증일 뿐이다. 실재하지도 않는 상처에서 비롯한, 느껴서는 안 될 통증. 그런 환상을 사내가 매번 감당해야 하는 것은 사내가 끝내 버리지 못한 별 볼일 없는 감정 탓이었다. 환상임을 안다면 떨치면 그만일 것을, 사내는 바로 그 보잘것없는 감정 때문에 미련하게 통증을 끌어안고 있었다.

  여자는 존재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의 아비가 낳은 전투 속에서 그의 뜻에 따라 싸우다 죽었기 때문이었다. 싸움에 찢기고 절망에 남루해진 인간이라, 살아남았다 해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으리라 예상했음에도 사내는 그녀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목숨을 던져서라도 싸움을 끝내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해도. 그녀의 마지막 말은 원망이 아니었다 해도. 그녀라는 전사를 부린 지휘관으로서 그는 그녀의 죽음을 감당해야 했다.

  그것은 분명 죄책감은 아니다. 그저 책임감일 뿐이었다. 사내는 자신이 지휘한 싸움 속에 희생당한 이들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가져온 평화 속에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적어도 자신은 그래야 했다. 그래서 사내는 여자의 죽음마저도 끌어안기로 했던 것이다. 사내의 노력 속에 전쟁이 수습되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세상이 상흔을 안고도 잠잠해질 무렵이었다. 갑자기 여자가 나타났다. 그가 포기해야 했던 것, 그가 잃었던 것을 대표하는 인간으로서.

  죽은 이의 환상과 마주하는 것에 대해 사내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이미 땅에 든 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굳이 감상이 있다면 왜 하필 그녀였냐는 의문쯤일까. 전쟁 속에 스러진 이들이라면 그녀 외에도 있었다. 그의 계획에 의도치 않게 휘말리며 죄 없이 죽어가야 했던 이도 여럿이었다. 그러나 그녀만이 나타났다. 그녀만이 그를 찾아들어 그의 몸에 수없이 통증을 새겼다. 이제 와서 원망을 던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와서 그가 그녀에게 베풀 수 있는 것도 없다. 따라서 사내는 꾸준하게 찾아드는 여자의 환상에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그녀에게 베푸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 그녀를 떨쳐내지 않는 것이었다. 사내는 그녀의 존재를 인정했을뿐더러, 그녀가 자신에게 안겨주는 통증조차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환상이라 인식했으면 통증을 느낄 이유도 없을 터인데 사내는 고집스레 통증을 안았다. 사내는 그것조차 자신이 끌어안을 업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가 새기는 통증을 실제의 것처럼 짊어지는 것이다. 그녀를 부정하지 않는 것도 그녀를 막아서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련한 사람이구나.

  사내는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에 쓰게 웃었다. 언젠가 여자가 그에게 던졌던 말. 사내는 언제나 최선을 택하는 사람이었으며 일견 비정한 선택을 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쏟아지는 비난을 피하지 않고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끌어안으려 했던 사내에게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나긋하게 웃어보였다. 그랬다. 사내는 예부터 그런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전부 감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녀가 상처 입은 몸으로도 끝내 후퇴하지 않았듯이.

  여자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남길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을 잃고 제 몸과 사명만을 안고서 싸워왔던 사람이었으므로. 여자가 지키려 했던 이들은 여자의 죽음으로 돌아왔으며, 여자가 바라던 평화는 그녀의 사후에서야 빛났다. 남긴 것도 움켜쥔 것도 없이 죽은 여자는 평화가 찾아드는 것과 동시에 타인의 머릿속에서도 사라졌다.

  다만 사내의 머릿속에서 여자가 활개치고 있음은, 그가 어리석을 정도로 모든 것을 끌어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이기에, 사내는 더더욱 그녀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사내는 여자가 자신에게 안기는 통증을 부정하는 순간 이 세상에 그녀와 연결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제 모든 것을 태우다 죽은 여자가 제게 안기는 통증쯤은 사내는 감당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자기위안에 불과하다고 해도.

  여자의 흰 손가락이 그의 목에 닿았다. 서늘한 감촉에 사내의 생각이 멎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또다시 통증을 새길 생각일까. 혹은, 자신의 흔적을 남길 심산일까. 그렇다 한들 전부 감내할 작정이었으나, 건조한 노크와 함께 타인이 들어서자 그녀는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환상은 현실처럼 찾아들어 비현실로 사라졌다.

  사내는 여자에게 꿰뚫렸던 곳에 손을 얹었다. 상흔조차 없는 곳에 통증만이 선명했다. 죽어 망령이 된 여자는 실재하지 않는 통증으로 자신의 존재를 거듭 새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