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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슌] 조각2

현소야 2015. 10. 30. 01:14

  

  상처 입은 사냥감은 가슴을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생기 잃은 눈이 머잖아 찾아들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숨을 헐떡일 때마다 죽음의 빛이 짙어진다.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 망가진 몸으로 언제까지 움직일 수 있을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성치 않은 몸으로 움직여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대로, 곧 죽음을 맞게 된다. 삶을 지배한 재앙으로부터 도망쳐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나, 결국 사냥감으로서의 무력한 종말을 피할 수 없었다. 사냥꾼에게 쫓기고, 장난삼아 사냥당하다 죽음을 맞는.

  지금까지 동지들이 맞이한 결말은 그러한 것이었다. 겨우 도피해온 운명이 이제 자신에게도 들이닥칠 뿐이다. 사냥감은 사냥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고, 이미 정해진 종말이니까. 그랬다. 결말은 정해져있었다. 그것만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그 결말을 맞는가다. 순응하여 얌전히 무너지는가,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발악하다 종말을 맞는가. 지금껏 참혹한 운명에 저항해온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눈앞의 기둥에 의지해 중심을 잡은 후 겨우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극심한 고통이 몸을 휩쓸었으나 끝까지 움직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멈추지 않았다. 목적지는 적이 있는 곳.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싸운다. 힘이 닿는 데까지 싸우고, 죽음으로 사명에서 해방된다. 그것뿐.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시야는 흐렸다. 그나마 시야에 들어오는 것조차 잔뜩 이지러진 채. 이제 그를 움직이는 것은 머리도, 다리도 아니었다. 싸워야 한다는 본능이었다. 본능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이미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사냥감은 본능의 인도로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사냥꾼이 보인다. 이지러진 세상 속에서도 그 모습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오만하고 잔인한 어린 정복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감의 시선은 정복자에게 꽂혔고, 정복자의 시선은 사냥감에게 꽂혔다. 그들은 서로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사냥감은 정복자를 물어뜯기 위하여, 정복자는 사냥감의 저항을 지켜보기 위하여.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주제에 사냥감은 정복자에게로 걸었다. 정복자는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곧 죽어갈 사냥감 주제에, 저항군의 이름이 헛되진 않았는지 끝까지 저를 노리는 것이다.

  전부터 그랬다. 삶을 지배한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운명을 새로 쓰기라도 하려는 양, 저것은 사납게 덤벼들곤 했다. 정복자가 그를 주시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정해진 결말에 순응하지 않고 부질없는 저항을 반복하는 인간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만큼 흥미로운 유형이기에.

  저것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언제까지 정해진 결말에 저항할 수 있을지 지켜보기로 하자. 그것이 정복자가 사냥감을 지켜본 이유였고, 사냥감이 지금껏 목숨을 이어온 이유였다. 그것에게 흥미를 품지 않았다면 여느 사냥감처럼 단번에 쓰러트리고 말았을 것이다. 결국, 그 가당찮은 저항이 그의 삶을 연장시켜온 것이다. 우습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

  정복자는 사탕을 베어 물며, 제게로 다가서는 사냥감의 움직임을 무미건조하게 훑었다. 저것은 이미 소생할 수 없을 정도까지 망가져버렸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일 것이다.

  “너 말야, 내가 있는 곳까지 올 수는 있겠어?”

  빛을 잃은 금빛 눈이 앳된 목소리에 반응해 깜빡였다. 맹금을 의미하는 이름처럼 날카롭게 번득이던 것이 저렇게 죽어버린 것은 정복자로서도 꽤 유감이었다.

  “그런 몸으로 괜찮겠냐고.”

  입은 열렸으나, 말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이미 소리조차 죽었으리라.

  “, 좋아. 어디 한 번 끝까지 와봐. 기다릴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정복자는 자리에 붙박여 불손한 사냥감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껏 흥미롭게 지켜본 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혹시 모르지. 네가 여기 닿아서 나를 물어뜯는다면.”

  사냥감이 멈칫했다.

  “그렇다면 얌전히 네게 목을 내어줄지도. 그러니까 힘을 내라고,”

  사냥꾼을 물어뜯는 건, 너희들 레지스탕스가 바라던 일이잖아? 정복자는 말을 이으며, 키들거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 그 정도의 보상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 게임은 보상이 따라야 확실히 열기를 띠는 법이다. 더구나, 정복자는 지금껏 처절한 발악으로 자신을 즐겁게 해준 것에게 그 정도의 보상은 따라도 된다고 생각했다.

  자, 그러니 끝까지 움직여봐. 내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어봐.

  어서 내게 발악해봐.

  그 말이 사냥감에게 움직여야 할 이유를 확실히 심어준 모양이었다. 주검처럼 너덜너덜해진 주제에 그것은 한 걸음, 한 걸음 느릿하게 걸었다. 그러나 중간쯤 닿았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려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것은 기었다. 차가운 바닥을 짚고서. 정복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저것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운명에 대한 처절한 저항과 목적에 대한 지독한 집착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제 조금만 더 움직이면 닿는다. 정복자는 사냥감이 자신에게 닿기만 한다면 정말로 목을 내어줄 생각이었다.

  이제 열 걸음. 흰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사냥감은 꿈틀거렸다. 이제 일곱 걸음. 빛을 잃은 금빛 눈이 잠깐 허공을 본 것 같았다. 이제 다섯 걸음. 정복자는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이제 세 걸음.

  겨우 세 걸음.

  바로 거기서, 사냥감은 고꾸라졌다.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연료가 다한 기계처럼.

  정복자는 세 걸음 나아가 사냥감 앞에 섰다. 녹색을 띄는 머리카락을 잡아채, 고개를 들게 했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제게로 얼굴을 돌려보았으나, 텅 빈 금빛 눈은 눈앞의 목표물을 비추지 못했다. 겨우 세 걸음을 남기고 사냥감은 패배했다. 결국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냥꾼을 물어죽이지 못한 채 죽었다. 그 무기력한 결말에 사냥꾼의 입매가 한껏 일그러졌다. 당연한 종말인데, 사냥감에겐 합당한 것인데, 이상하게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저기, 내가 친히 와줬다고. 세 발짝은 봐줄 테니까, 이제 물어뜯어봐.”

  앳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맺지 못한 소망으로도 죽은 이는 깨울 수 없기에, 답이 돌아오지 않는 말은 외로이 사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