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슌ts] 하얀 집행자
눈앞에서 인간의 사지가 찢겨나갔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참혹한 살해에 남은 이들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희생자의 피와 살점이 자신에게까지 튀었음에도, 무자비한 살해자는 덤덤했다. 흰 베일 너머 희미하게 비치는 그녀의 얼굴엔 표정이라곤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인간이었다.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는 불손한 반역자들을 도륙하도록 만들어진 인간. 타인의 처참한 죽음에 한순간의 감정조차 피어오르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 반역자들의 몸이 또다시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저항할 수 없는 결말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신벌과 닮아있었다. 어떤 각오로 덤빈다 한들, 운명처럼 죽음은 닥치게 되어있다. 반역자들은 포착된 순간 죽음을 선고받는다. 그녀는 그것을 집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와 같은 이들이 집행자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그래서였다. 반역자들에게 죽음이란 종말을 내리는 자.
집행자가 등장한 것은 반역자가 나타난 때부터였다. 반역자가 나타난 것은 정복전쟁을 통해 세계가 통합된 이후. 정복전쟁에 휩쓸려 본국에 흡수된 이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통합된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는 자와 사라진 모국의 재건을 위해 반역을 꾀하는 자. 전자야 본국의 백성으로 품는 것이 당연했으나 후자는 용납해서는 안 될 자들이었다. 수많은 희생을 통해 일궈낸 통합이었다. 그것에 균열을 불러오는 이들은 처단하는 것이 옳았다.
때문에 우수한 전사들은 집행자로 임명받아, 반역을 꾀하는 자들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받고 온 나라를 샅샅이 뒤져 불손한 세력을 찾아냈다. 그리고 죄를 묻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처단했다. 그로부터 몇 년. 반역의 싹이 틀 때마다 짓밟은 덕에 그 세력은 극도로 약해졌으나 뿌리는 끈질기게 남아 아직껏 연명하고 있었다. 집행자가 여전히 움직이는 것은 그래서였다. 물론 그렇다 한들 불손한 반역자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되리라. 세상의 거대한 질서 앞에서 그에 대항하는 소수 따위야 신 앞의 미물처럼 무력하므로.
현실의 폭력 앞에서 신념은 무력해지며, 어떤 숭고한 신념도 죽음 앞에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반역자를 만들고 움직이는 것은 신념이었으나 그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위험한 신념에 집착하는가. 왜 스스로 불길로 걸어드는가. 여자는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입력된 대로 그들을 처단할 뿐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질서도, 변해버린 세상도, 집행자라는 현실의 공포조차도 그들을 평범한 백성으로 만들지 못했으므로.
집행자란 뿌리부터 포식자여서, 그녀는 사냥감에 불과한 반역자를 하나하나 삼켰다. 그녀는 단신이었고 그들은 다수였으나, 저항도 부질없이 결국 전부 그녀의 손에 목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죽음이 내려앉은 곳에 비로소 고요가 찾아들었다. 살아남은 자라곤 지옥을 펼쳐낸 집행자 하나뿐. 피와 주검이 엉긴 처참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좁은 공간에 새어드는 빛을 받은 집행자는 성녀처럼 숭고하게 빛났다.
새하얀 옷과 베일은 피로 더럽혀진 지 오래. 피를 뒤집어쓰다시피 한 집행자는 붉게 얼룩진 베일을 벗었다. 표정 없는 흰 얼굴과 날카로운 금빛 눈이 드러났다. 갓 스물쯤 되었을까.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얼굴. 거기에 선이 가는 몸까지 언제나 꺾일 듯 위태로운 인상을 주었으나 그에는 무시무시한 포식자가 깃들어 있음을 모두가 알았다.
그녀는 사냥꾼으로 길러진 사람이었다. 집행자의 이름을 받고 반역자를 쫓아 나서기 전부터 그랬다. 그래서인지, 우수한 전사들로 구성된 집행자들 중에서도 그녀는 단연 뛰어났다. 그녀의 ‘처리’는 간결하고 적확하여 누구에게나 높게 평가받았다. 이번에 반역자들의 기지를 급습해 완파하는 중대한 임무를 받은 것도 능력을 인정받아서이리라. 여자는 자신이 빚어낸 처참한 풍경에 잠깐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이내 기지를 빠져나왔다.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처리했으니, 복귀할 때였다.
본부로 돌아가면서 여자는 반역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부질없는 저항을 거듭하는 유민들. 언젠가 그들을 두고 불빛에 몸을 던지는 날벌레로 비유한 자가 있었다. 그들의 투쟁이 헛된 일임을 지적하는 것이리라. 그들의 세상은 흡수되었다. 원형조차 남지 않은 것을 새로 빚어내려 하는 꼴이었다. 집행자에 대항하기 위한 그들의 방식은 날이 갈수록 교묘해졌으나, 그들을 처단하는 집행자들 또한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머잖아 집행자의 임무도 끝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자신의 필요성도 소멸하는가. 여자는 때로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집행자의 존재 이유가 반역자를 처단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사라진 세상에서 자신과 같은 집행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은 언제나 꺼림칙하게 그녀의 내부에 남아있었다.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여자는 습관처럼 베일을 썼다. 처음 그녀에게 그것을 씌워준 이는 그녀를 집행자로 키워낸 자였다. 반역자의 피로 금세 더러워지곤 하는 흰 옷도, 얼굴을 가리는 베일도 그가 내준 것. 당신에겐 이것이 어울려요. 뜻 모를 말과 함께였다. 임무가 끝날 때마다 새로 지급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도 그 옷차림을 고수하는 것은 순전히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 검은 단복을 입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곤 하는 다른 집행자들 사이에서 그녀만이 홀로 그랬다. 그녀에게 하얀 집행자라는 이명이 따라붙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피를 뒤집어쓴 탓인지, 그녀에게는 복도를 걷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여자는 그마저도 익숙한 듯, 어디에도 시선을 주는 일 없이 목적지로 향했다. 그녀의 걸음이 멈춘 것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돌아왔군요. 셰이.”
귀에 익은 목소리에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선 것은 낯익은 자였다. 집행자의 관리인. 그녀와 같은 집행자들을 통제, 관리하며 임무를 내주는 사람이었다. 이번의 임무 역시 그에게서 떨어진 것. 겉으로는 언제나 온화한 얼굴의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나, 사실 그는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레지스탕스 기지는 완벽하게 처리했겠죠?”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의 얼굴에 흡족함이 스쳤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우수하니까요.”
여자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내의 기대를 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기대라고 하기엔 다소 과한 것이었다. 사내는 명백히 여자를 총애하고 있었다. 집행자로서 선택받았을 때부터 그의 시선은 언제나 그녀에게 꽂혀 있었으며 심지어 그녀가 집행자 후보로 뽑힌 것조차 그의 추천 덕분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왕이 총신을 대하듯 여자를 감쌌으므로, 그 과분한 은혜에 여자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었다.
그 은혜의 근원을 여자는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그녀의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출신조차 불분명한 외부인인 그녀를 공들여 키워내 집행자로 만든 것은 쉬이 납득할 수 없는 일. 여자가 그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마다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결코 이야기해주는 법이 없었다.
“기뻐하도록 해요. 셰이. 당신이 수행한 임무가 위대한 질서를 지키는 한 걸음이 되었을 테니까요.”
사내는 여자의 베일을 벗기며 말했다. 익숙한 손길이었으므로, 여자는 인형처럼 그저 받아들였다. 사락거리며 떨어지는 베일과, 그 아래 감춰졌던 그녀의 얼굴. 사내는 바로 이 순간을 좋아했다. 자신이 고집스레 숨겨두었던 그녀와 마주할 때. 그의 시야를 여자의 녹색 머리카락이 가득 메웠다.
반역자를 도륙하고 그 피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집행자에게 하필 흰 옷을 입힌 것은 순전히 그의 취향 때문이었다. 그는 여자가 흰 옷을 온통 피로 물들이며 싸우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것은 분명 신화 속 성녀처럼 아름다운 풍경일 테니. 불손한 자들의 피는 그녀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녀를 더욱 빛낼 것이다. 괴물을 무찌르는 영웅이 그 피를 뒤집어쓸수록 영광된 이름을 얻는 것처럼.
“피가 얼굴에까지 묻었군요.”
“아.”
사내의 손가락이 여자의 뺨을 스쳤다. 서늘한 감촉에 여자가 움찔했다.
“좋은 구경거리가 있는데, 볼 생각이 있나요?”
“구경거리라면, 무엇을.”
“저번에 동부에서 모반을 꾀한 자들이 있다는 건 들은 적이 있죠? 거의 실현 단계까지 갔던.”
“네. 하지만 밀고로 끝났다고……”
“그 주역들을 모셨어요. 오늘의 주인공으로 말이죠. 대부분 처형했지만 일부는 생포하도록 했습니다.”
“생포라니, 특별한 목적이라도?”
“목적이라.”
사내는 눈을 내리깔며 묘한 웃음을 걸쳤다. 여자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반역자는 포착된 즉시 처형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그러나 이번에는 일부나마 살려두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본보기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공개처형할 작정입니다.”
공개처형이라는 무거운 단어에 여자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관대했어요. 혹여 본국으로 흡수된 선량한 유민들마저 동요할까 반역자들을 조용히 처단하는 것을 택했더니 이렇게 불손하기 짝이 없는 짓을 꾀한단 말이에요. 말을 듣지 않는 짐승에게는 처벌이 필요하죠. 그래야 남은 것들에게도 공포를 주어 복종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들을 처형함으로써 앞으로 감히 그런 일을 꾀할 수 없도록 만드실 작정이군요.”
“맞아요. 그래서 어때요, 셰이? 보러 올 생각이 있나요?”
그의 말은 표면적으로 그녀의 의사를 묻고 있었으나 여자는 그것이 권유가 아닌 요구임을 알았다. 사내는 예부터 여자가 자신의 바람을 거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여자는 훈련받은 짐승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무대가 준비되면 호출하죠. 이제 그만 쉬어요.”
사내는 바라던 답을 얻고서야 여자를 놓아주었다. 여자는 경례하고 물러났다. 사내는 여자가 자신을 떠나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
사내는 집행자에 대한 서류를 뒤적이다 익숙한 이름에서 멈췄다. 셰이. 그가 총애하는 수하의 이름이었다. 집행자는 반역자를 처단하는 임무를 받으며 상부로부터 새로이 이름을 받게 된다. 그것은 그들에게 따라붙는 칭호와도 같았다. 그녀의 칭호는 셰이. 그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집행자로서 활동하는 동안은 그 칭호가 그들의 이름을 대체한다. 즉, 본래의 이름은 일시적으로 소거되고 칭호만이 남는 것이다. 그녀의 본명도 셰이라는 칭호 뒤에 가려져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여자는 특이하게도 집행자가 되기 전의 기록에서도 셰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것은 여자의 과거가 말소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이유로 그녀는 과거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출신이 불분명한 그녀의 과거에 대해 아는 이는 없었다. 그녀 역시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셰이란 그렇게 텅 비어버린 그녀를 발견한 사내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이름을 받고 교육을 받고 책무를 받아 마침내 집행자가 되었다. 즉, 그녀는 모든 것을 그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 라.
사내의 생각은 거기서 멎었다. 이곳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으나 그에는 감춰진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조차 알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사내는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지옥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 정복전쟁이 끝난 후, 끝까지 본국의 군대 아카데미아에 맞섰던 저항군, 레지스탕스는 붙들린 즉시 지옥으로 떨어졌다. 끝까지 저항한 것에 대해 죄를 물은 것이었다. 그들은 대개 지독한 심문과 고문, 실험 속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몇몇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사내는 그들을 연구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그들로부터 만족할만한 연구 결과를 냈을 땐 이미 살아남은 이는 하나뿐이었다.
유일한 생존자.
절망과 고통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가상하긴 하나 연구가 끝난 시점에서는 불필요한 인간이었다. 사내도 그렇게 판단하고서 간단히 치우려고 했던 것이다. 처분을 위해 끌려온 것은 십대 중후반의 여자였다. 문자 그대로 너덜너덜해진 모습이, 방치하면 오래잖아 숨이 끊어질 듯했다. 사내는 살아남은 잔당에게 다가서 그 턱을 들어 올려 고개를 들게 했다. 다음 순간, 그는 핼쑥한 얼굴에서 형형히 빛나는 금빛 눈과 마주했다.
그때서야 사내는 여자가 최후까지 살아남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자는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살아있는 주검처럼 너덜너덜해진 주제에 여전히 그 눈은 투쟁심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지옥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 적에 대한 증오와 꺼지지 않은 투쟁심을 안고서.
그러나 여자는 절반만 살아남았다. 그녀의 자아는 이미 찢기고 부서져 흔적만이 남았을 뿐. 그녀라는 인간을 구성하던 거의 모든 것이 그 지옥 속에서 죽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살아남기 위한 제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으며 남은 것이라곤 하잘것없는 본능과 자신의 역할에 대한 어렴풋한 자각뿐. 누군가를 적대하고 있었음은 알고 있다. 자신이 무언가를 위해 싸웠음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뿐. 자신이 왜, 정확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적대하며 싸웠는지는 사그라진 지 오래. 자아의 공백은 너무도 커, 여자는 텅 빈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사내의 시선이 여자의 목에 걸린 낡은 스카프에 닿았다. 저항군, 레지스탕스의 표식. 무의미한 투쟁의 증거. 마지막까지 그들을 지배한 책무.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그녀에겐 무의미한 것이었으므로 사내는 그녀를 그로부터 해방시켜주기로 했다. 사내의 손이 스카프에 닿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을 그녀의 목에서 풀어냈다. 그때 여자가 최초로 의지를 가지고 반응했다. 사내의 손에 들린 스카프를 제게로 빼앗아온 것이다. 그 손길엔 근원 모를 고집이 묻어있었다.
레지스탕스로서의 삶 따위 기억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마도 본능처럼 새겨진 책무 때문에.
바로 그때 사내는 여자에게 흥미를 품은 것이다. 사내는 그 처절한 생존자를 그대로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비극의 주연으로 무대에 세우기 위하여. 그걸 위해 사내는 그녀에게 본능처럼 남은 책무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녀에게 새겨진 책무를 교묘하게 조작해 그녀가 아카데미아의 일원인 것으로 믿도록 했다. 그리고 적대할 대상으로는 레지스탕스를 두었다. 그랬다. 그는 레지스탕스로서 싸웠던 그녀가 레지스탕스를 멸하게 만든 것이다.
동료를 지키려 사용했던 힘을 동료를 치우려 사용한다는 아이러니. 그야말로 비극의 주연에게 어울리는 운명이었다.
사내는 이 불행한 여자를 위해 새로운 삶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내는 여자에 대한 기록을 고의로 누락시키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녀를 치료하게 했다. 긴 치료 속에서 여자가 서서히 회복되자, 그녀의 구원자 행세를 하며 접근해 그녀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그에게 빚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제 뜻대로 채워버렸으므로.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죠. 이름은 사람을 규정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이름을 지으며 염원을 담기도 합니다. 나 역시 당신의 이름을 지으며 소망을 담았어요. 셰이.]
[소망이요?]
[당신이 위대한 질서를 지키는 사람이 되길 바랐어요.]
그녀가 막 집행자가 되었을 무렵의 기억이었다. 사내는 집행자가 되어 칭호를 부여받은 그녀를 보고 심술이 일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그녀의 금빛 눈을 보면서 그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아니,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절반은 사실이었다. 사내는 여자에게 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소망을 담았으므로. 절반의 거짓은 소망의 내용이었다. 그가 담은 소망은 여자가 자아를 완벽하게 잃게 되는 것이었으니.
이제 그녀의 본명을 기억하는 자는 세상에 단 하나, 사내뿐이었다. 쿠로사키 슌. 불러주는 이 없는 이름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했다. 맹금을 의미하는 그녀의 이름은 이미 흩어졌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그는 혹시라도 그녀의 자아가 희미해진 이름을 통해 깨어나는 일이 없도록 틀어막기로 했다. 셰이라는 이름은 그것을 위한 장치.
쿠로사키 슌으로서의 자아는 셰이라는 이름이 덧씌워지며 사라졌을 것이다. 쿠로사키 슌으로서의 자아가 레지스탕스로서의 삶으로 쌓아온 것이라면 셰이라는 자아는 오로지 그가 만들어낸 그의 작품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삶은 그 없이 성립할 수 없는 것. 사내는 여자의 삶에서 자신을 빼는 순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아, 가여운 셰이. 사내는 키들거렸다.
본디 레지스탕스는 그녀의 출신국인 엑시즈의 저항군만을 이르는 말이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그 의미가 바뀌었다. 정복전쟁의 타깃이 된 모든 국가의 저항세력을 통칭하는 단어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엑시즈 출신의 레지스탕스를 그녀의 먹잇감으로 던져주었다.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몇 남지 않은 자신의 동지들을 제 손으로 도륙하고 있는 것이다. 아, 이렇게 비극적인 이야기가 또 있을까. 그녀는 하루하루 죄를 쌓고 있으니.
갑자기 통신기가 울려, 사내는 서류를 덮었다. 통신기 너머의 목소리는 그가 준비한 무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겠지.]
여자에게 향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싸늘한 목소리에 상대는 긴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광장에는 이미 사람이 한참 몰려들었고요.]
[좋아. 곧 가겠다.]
통신은 이내 끊어졌다. 사내는 흡족함을 얼굴에 가득 내비치며 여자를 호출했다. 언제나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머잖아 있을 이벤트에 대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셰이. 무대가 마련되었어요.]
*
여자는 쏟아지는 물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서 있었다. 맹렬하게 쏟아지는 차가운 물은 그녀의 몸에 묻은 모든 것을 씻어주었다. 그녀의 흰 몸에 드문드문 튀었던 반역자의 피 또한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여자는 반역자의 피를 뒤집어쓰고 돌아오면 언제나 오랜 시간을 들여 씻었다. 그들을 처단하는 것 자체가 제 임무였으므로 별달리 가책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타인의 피가 제 몸을 뒤덮는 것이 불쾌했을 뿐이었다.
집행자로 움직인 지 몇 년. 불손한 세력들을 처단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가 되었다. 거기에 자비 없이 죽음을 내리며 깔끔하게 처리하는 그녀의 방식은 상부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이상하게도 그 순조로운 생활이 어딘가 꺼림칙했다. 해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 괴상한 불쾌감의 근원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풀어낼 수 없는 것이 몇 있었다. 이를테면 반역자를 처단하고 돌아올 때의 꺼림칙함. 관리인으로부터 받는 총애의 이유. 혹은 집행자가 되기 전부터 학습된 양 익숙했던, 타인을 해하는 법 등. 그녀의 삶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아는 관리인조차도 그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 온화한 얼굴에 곤란함이 비칠 때면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이유가 있음이 분명한데, 아무것도 파헤칠 수 없었다. 풀어내지 못한 것은 날이 갈수록 엉켜가기만 했다.
[글쎄요, 셰이. 나는 당신이 조금 편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자신의 구원자이기도 한 관리인에게 그에 대해 말했을 때 돌아온 답이었다.
[세상에는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나 역시 당신을 발견하기 전의 일은 알지 못해요.]
부드러운 말에는 그녀의 의문을 끊어내려는 뜻이 은근히 비쳤다. 그 이상의 이야기는 그에게도 곤란한 모양이었다. 여자는 결국 하릴없이 제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제 삶에 공백이 있음을 여자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도 채우지 못하리라는 것도. 그것은 영영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자는 그것이 몹시 불쾌했으나 아무리 파헤쳐보아도 그것을 채울 것은 찾을 수 없었다. 공백이 건재했으므로 제 삶의 여러 의문을 해결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셰이. 나는 이전의 당신에 대해 알지 못해요. 그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르죠. 그러나 이미 잃어버린 것보다는 앞으로의 당신이 중요한 게 아닐까요?]
수건으로 몸을 닦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며 여자는 머릿속에 생생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사내는 옳았다. 틀린 것이 없는 말임을 알기에, 그때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멸한 과거는 무력하다. 그것이 현재의 의문을 낳았다 한들 이제 여자는 그에 기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결국 현재뿐이었다.
사소한 꺼림칙함은 접어두고 여자는 습관처럼 약을 삼켰다. 관리인이 내어준 약이었다. 심한 부상을 입은 채 그에게 발견된 후 오랜 치료를 통해 몸은 거의 회복되었지만, 아직도 잠재된 문제가 있어 약물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굵직한 것부터 매우 사소한 것까지 그는 그녀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자신의 구원자이자 모든 것을 통제하는 이를 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순종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삶이 그 없인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름도, 치료도, 교육도, 책무도 전부 그가 선물한 것. 자신을 구해준 그의 은혜에 대해서는 언제나 감사했지만 삶에서 그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은 때로 오싹했다. 만일 어떠한 일이 생겨 그에게서 떨어진다면, 혹은 그가 자신에게 선사한 모든 것이 부정당한다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언제나 어딜 가든 걸음을 뗄 때마다 그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약기운이 퍼지며 여자는 몸을 짓누르는 노곤함에 눈을 감았다. 이름도 효능도 모를 약은 삼킬 때마다 노곤해져 여자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강제로 몸의 스위치를 내리는 기분이었다. 더 큰 문제는 깨어나서도 한동안 몽롱하다는 것이었다. 명백히 약에 휘둘리는 것이다. 여자는 그것이 못마땅했으나 그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거부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그녀는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구원자의 뜻을 웬만하면 거스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지배하길 바랐고, 그에 동반되는 은근한 압력에 그녀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갖 압력으로 그녀가 결국 순종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경험이 쌓이며, 그녀는 그의 뜻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번의 일도 그랬다. 그는 자신이 마련한 ‘구경거리’에 그녀를 초대하겠다는 결론을 이미 세워놓고서 의견을 묻는 시늉만 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지배한 사내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던 여자는 통신기가 울린 탓에 힘겹게 눈을 떴다. 자신의 통신기가 울릴 일이라곤 관리인이 자신을 부를 때밖에 없었다. 그녀의 삶에 개입하는 사람이라곤 그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통신기를 확인하자, 예상대로 그의 호출이었다.
[셰이. 무대가 마련되었어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나긋한 목소리였으나 그에는 흥분이 배어있었다.
[광장으로 와요. 그곳에서 보죠.]
여자는 가볍게 응답하고 통신을 끊었다. 과연, 광장이라면 훌륭한 무대가 될 것이다. 광장에 몰려든 수많은 군중 앞에서 펼쳐지는 죄인의 죽음. 한낱 구경거리로 전락한 비참한 죽음은 한동안 군중의 머릿속에 공포를 심어둘 터. 여자는 만족스레 군중을 지배할 사내를 생각하며, 그가 준비한 무대로 향했다.
*
거리를 낯선 열기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본부를 나서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여자는 점차 거세지는 열기를 느꼈다. 타인의 죽음에 대한 비틀린 열기가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그에 구역감을 느끼면서도 바삐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광장 중심부로 들어서자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곳 너머로 살아있는 주검처럼 너덜너덜한 자들이 결박된 것이 보였다. 이미 몇 번의 고문을 거쳤는지 참담할 정도로 망가져, 겨우 목숨만 붙어있는 꼴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 이미 마련된 자리에 앉은 채 차갑게 희생자들을 내려다보는 낯익은 자. 이 무대를 계획한 이.
여자는 사람들을 헤치고 그에게로 향했다. 정부소속임을 증명하는 표식을 가슴에 달고 있었기에 인파를 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침내 여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서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셰이. 이곳으로.”
사내가 내준 자리는 바로 그의 옆자리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와 같은 집행자들도 몇몇 보였다. 반역자를 처단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 그들을 굳이 그곳에 배치한 것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일 것이다.
불손한 음모를 꾀하면, 그들에게 바로 처단되리라는.
“가까이서 보도록 하죠. 반역자의 최후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소 흥분된 채였다. 자신이 마련한 무대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여자가 얌전히 그의 곁에 앉자, 사내의 무대가 막을 올리고 그 주역들이 끌려나왔다. 하나같이 처참한 모습의 죄수들에게 군중의 야유가 쏟아졌다. 날아드는 말에는 드문드문 욕설과 저주도 섞여 있었다. 그 수많은 군중 중에 사라진 나라를 재건하려던 몇몇 유민들의 계획에 동조하는 이는 없었다. 붙들린 죄수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선 투사일지 몰라도 이 거대한 나라에서는 반역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반역자를 처형할 집행인의 등장에 환호가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쏟아지는 함성 속에서, 반역자들은 가련하게 비틀거렸다. 도축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사내는 집행인에게 손짓했고, 다음 순간 죄수의 주검이 처참한 모습으로 쓰레기처럼 나뒹굴었다. 사방으로 튄 피가 참혹한 살해를 그대로 비춰주었으나 몰려든 이들은 그에 흥분했는지 오히려 함성이 거세질 뿐이었다.
다음 죄수의 몸이 찢겼다. 관중 사이에서 한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그뿐. 대개는 자극적인 풍경에 몰두하고 있었다. 여자는 사람들의 얼굴이 빠르게 달아오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사내에게 향했으나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웃음이 걸려있을 뿐. 다음번도, 그 다음번도, 점차 잔인해지는 처형에 여자의 얼굴이 굳어갔다. 이것은 위험했다. 모두 지나치게 달아올라 있었다. 군중은 어느새 홀린 듯 반역자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잔뜩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 죄수가 죽음을 맞았다. 치솟은 피가 사내에게까지 튀었으나. 사내는 무심하게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다음 순간,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내리꽂혔다.
“오늘 처형된 자들은 나라의 은혜를 입은 유민들이다. 그러나 감히 반역을 꾀해 나라를 전복시키려 했다. 이런 무도한 행위를 앞으로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반역자는 즉시 처형하며 그와 협력한 자들도 발각될 경우 동일하게 취급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와 같은 무도한 무리를 뿌리 뽑을 것이다.”
사내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더니 잠잠해진 군중 앞에서 외쳤다.
“모든 것은 이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은 위대한 질서를 위해!”
사내의 외침에 모두가 화답했다.
“모든 것은 위대한 질서를 위해!”
모두가 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 모두가 사내를 따라 외치고 있었다. 주문처럼. 저주에 휩쓸린 것처럼. 광장을 가득 채우는 외침은 끊어질 기미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여자는 그 기괴한 풍경에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광증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열기를 그녀는 감당할 수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여자는 직감했다. 그러나 이곳은 사내가 지배하는 공간. 그의 허락 없이 벗어날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그대로 붙박여 지켜볼 수밖에.
사내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풍경을 무료하게 지켜보다 문득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모두가 사내와 뜻을 함께하고 있었으나 단 한 사람, 그가 총애하는 이만 그러지 못했다. 사내는 여자에게 다가서 시선을 맞추며 상냥하게 속삭였다.
“셰이, 당신도 예외는 아니에요. 아니, 당신은 오히려 더하죠.”
이 나라의 질서를 위해 움직이겠다고 내게 맹세했잖아요?
귓가에 파고드는 목소리에, 순간 아찔했다. 약기운이 퍼진 탓인지 사내의 모습은 연기처럼 일렁였으나 그의 목소리만은 뚜렷하게 메아리쳤다. 그것은 이미 명령이었으며 그녀는 그의 뜻을 거스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여자는 사내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입을 열었지만 혀가 굳어버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구원하듯 사내는 천천히 광장에 퍼진 말을 반복했다.
“모든 것은.”
“모든……것은.”
“위대한 질서를 위해.”
“위대한 질서를…….”
광기 서린 분위기에 압도된 채, 여자는 풀린 눈으로 더듬거렸다. 사내는 관대하게 웃어보였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그러나 밀려오는 공포에 여자는 겨우 정신을 집중해 문장을 완성시켰다.
“모든 것은……위대한 질서를 위해.”
“잘했어요. 셰이.”
여자는 사내의 얼굴에 비로소 흡족함이 스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여자가 겨우 붙잡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졌다. 여자는 그의 품으로 힘없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