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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 Phantom Knight

현소야 2015. 5. 16. 22:43

 

0. 예언

 

세상을 구한다는 신념을 내건 저항군은 그 고결한 명분과는 대조적으로 사실 그렇게 대단한 것이 못 되었다. 애초에 그들이 나타났다는 것부터가 이미 많은 것을 박탈당했음을 뜻하기에. 제대로 된 무기도, 자원도, 군사도 없다. 앞선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남은 이들도 차례로 사라져갔다.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선 훈련받지 않은 아이들조차 저항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장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전쟁이란 그러한 비상식조차 현실로 만드는 무서운 괴물이었다.

소녀는 제 오빠가 제 친구인 소년과 함께 기지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오빠라 해도 아직은 소년. 원래라면 싸우기는커녕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였다. 원래라면. 당연히 펼쳐졌어야 할 미래를 그런 말로 가정해야 하는 게 슬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 남매와 동지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생존자들은 현재의 안전에 만족했다.

남매가 지내는 좁고 불편한 기지는 일시적인 피난처밖에 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이들은 이곳에서 서로 엉켜 지냈다. 어른들이 거의 사라진 지금, 남은 것은 그들 같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소년은 그 중에서도 유독 앳된 얼굴이었다. 몸은 의외로 탄탄했지만 키가 작아 왜소해 보였다. 가늘긴 해도 키가 커서 제법 어른스러운 축에 드는 소녀의 오빠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순식간에 적을 무찌르는 강력한 전사였다. 이 위험한 세상에서 어린 나이로 살아남아온 것도 그 덕분일 터다. 다만 언제나 깊은 고뇌가 그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싸우고 싶지 않아.

소년은 언젠가 소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전쟁 상황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으나, 천성이 상냥한 소년에게는 당연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싸워야 해.

싸우지 않기 위해 싸운다. 그 슬픈 모순을 소녀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위험천만한 전장에 뛰어드는 소년을 걱정하면서도 그저 그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는 삶이었지만 다음날이 되면 소년은 다시 적과 싸우리라. 어두운 기지의 벽에 기대 잠든 소년에게, 소녀는 낡아빠진 담요를 덮어주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싸우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한때 놀이의 수단이었던 덱마저 싸우기 위한 도구로 변모했다. 매순간 싸워야 하는 전사들에겐 덱은 함께 싸우는 동지와도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덱은 사용자를 닮는다고 한다. 혹은 사용자가 제가 사용하는 덱을 닮아간다고 한다. 소년의 덱이 나타내는 것은 환영기사단. 쓰러져도 일어나 적을 섬멸하는 유령기사. 그 정점은 반역을 상징하는 드래곤. 그 모든 것이, 절망 속에서도 끈질기게 일어나 적을 무너뜨리는 소년과 닮아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단순히 소년과 그의 덱을 겹쳐보는 것을 넘어서, 그를 상징하는 덱에서 그의 운명마저 짐작해버린 것이다.

언젠가 소년이 영영 쓰러져, 자신의 덱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1. 기사

 

오랜 잠에 들었던 것 같다.

깨어났을 때는 감각이 사라져 있었다. 몸을 꿰뚫려도 격통은커녕 미세한 감각조차 느끼지 못했다. 피를 쏟지도, 부서지지도, 죽지도 않는 기괴한 몸. 생명을 가진 그 무엇도 그렇지 않으니, 그는 시체나 유령 같은 존재일 터다. 기사는 자신을 파헤치기 위해 기억을 헤집으려 했으나 이형의 몸을 얻은 대가인지 자신에 대해 추리할 그 어떤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누가 심어주었는지 모를 의무만이 뚜렷했다.

적을 쓰러뜨려라.

의무가 그를 움직였고 증오가 그를 인도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그런 것이 거의 전부였다.

기억이 사라진 곳을 채우는 것은 대개 본능적인 증오였다. 격렬한 증오가, 상대를 쓰러뜨리고자 하는 충동이 7할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해석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죽을 수 없는 기사는 유령처럼 걸음을 옮기며 적을 찾아 헤맸다.

 

 

2. 소년

 

소년은 이 화려하고 평온한 도시에 섞여들 수 없는 지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다른 곳에서 잘못 끼어든 퍼즐조각처럼. 그것은 그가 다른 세계에서 찾아든 이방인이기 때문이리라. 이곳의 질서에 젖어 살아가기는커녕, 알지 못하는 이세계에 대해 경계하고 탐색하기에 열중하기 때문이리라. 살아가던 세계가 무너진 후 소년은 가능성을 찾아 이 세상으로 왔다. 너무 많은 것을 잃어 상황을 뒤집을 한 가닥 가능성을 찾아 헤매게 된 소년에게는 평온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초조. 경직. 불안. 굳은 얼굴은 그가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불행을 감당해왔음을 짐작케 했다.

고층건물의 옥상에서 소년은 아래를 내려다본다. 밤에도 잠들지 않는 도시에 소년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형형색색의 불빛은 소년의 남루한 차림도 그대로 비추었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지내며 어둠에 익숙해진 탓일까. 소년은 제게로 닿는 인공적인 불빛에 금빛 눈을 찡그리고 만다. 탐색이 소득 없이 끝났으므로 아지트로 돌아가 쉬어야 할 터였다.

아지트라고 해도 낡아빠진 창고일 뿐. 시선을 피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철저한 이방인인 소년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먼지 냄새가 풍기는 휑뎅그렁한 창고에 들어선 소년은 차가운 벽에 기댄 채 겨우 숨을 쉬었다. 그때 문득 바람이 일었다. 그러나 그뿐,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건만 소년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대로의 인물이 스르륵 창고로 들어섰다. 익숙한 타인.

언젠가부터 기척 없는 존재가 그를 찾았다. 기사의 모습을 한 자는 그의 아지트가 제 소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드나들곤 했다. 그것은 본능적인 행동적인 행동이리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주인과 떨어진 짐승이 기억과 냄새를 따라 본래의 집 근처를 맴도는 것처럼.

 

*

 

기사는 말이 없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인지, 소년은 알 길이 없었다. 기사가 자신의 아지트에 파고든 것도 몇 번째. 처음에는 경계하며 정체를 캐물었으나 어떤 질문에도 반응이 없는 괴상한 존재에게 소년은 답을 듣기를 포기했다. 애초에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유령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 형체는 묘하게 이질적이었으며 윤곽조차 희미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를 소년은 굳이 파헤치려 들지 않는다. 의식하지도 않는다. 기사는 소년에게 풍경의 일부분처럼 자연스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가 나타났다 사라질 때까지 소년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기사 역시 미동조차 없이 벽에 몸을 기대고 있을 뿐이다. 둘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그저 함께했다.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소년은 입을 열었다. 그가 하려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였고 이미 사라진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떤 소년이 있었다.”

처음부터 청자를 두고 꺼내는 말은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그와 기사뿐이었으며 그는 기사에게 청자의 역할을 기대한 적이 없었다. 결국 그것은 답이 돌아올 리 없는 혼잣말일 뿐이었다.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나 싸우며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었지.”

그럼에도 소년은 말을 계속 이어간다. 메마른 독백이 공허하게 공간을 울렸다.

함께 싸우던 동료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소중한 사람을 빼앗겨도 소년은 계속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그것이야말로 동료들을 위한 길이었음을 알기에. 살아남기 위해 싸우면서도 타인을 해하는 것을 망설이고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 그만큼 본성이 착했다.”

사라진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후회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말에도, 기사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투구로 가려진 기사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을지 소년은 모른다.

소년은 빨리 싸움을 끝내고 모두가 웃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건 실현되지 못했다.”

가까운 사람이었는지?”

처음으로 기사가 입을 열었다. 높낮이 없는 기계적인 목소리였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분명히 보여주는 음성.

, 그래. 지금은 없는 동료다.”

소년은 눈을 내리깔았다. 금빛 눈에 처연한 기색이 깃들었다. 쓰러져도 계속 싸워온 이로서, 기사는 소년이 말하는 없다의 의미를 묻지 않고도 알 것 같았다.

돌아오지 않았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기사는 저 깊은 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돌아올 거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소년을 위로하기 위함일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말에는 확신이 배어있어, 위로보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분명, 돌아올 거다.”

.”

돌아와서 자신이 바라던 세상을 만들 거다. 그러니까.”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그러니까.”

기다려야지.”

기사가 맺지 못한 말을 이으며 소년이 쓰게 웃었다.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연약한 웃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 애는 너를 닮아있었다.”

그 이후로는,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3. 소녀

 

기사를 이끄는 것은 7할이 증오였지만 나머지 3할은 전혀 해석할 수 없는 괴상한 감정이었다. 증오만큼이나 강렬하여, 단순한 감정이라기보다는 본능이라고 보는 게 더 옳을 법한 감정들. 그것이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기사는 알 길이 없다. 말소된 기억은 그저 공백으로 남아있었으므로. 그의 과거는, 색채 없이 하얗게 덮인 거대한 세계. 그를 만든 사건들은 죄다 그 너머에 숨겨진 것이다. 이따금 꿈을 꿀 때면 과거의 특정 장면이 떠오르는 듯했으나 깨어나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헤집어도 아무것도 움켜쥘 수 없다.

근거를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만일 그러한 감정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와 관련된 것이리라 그는 생각한다. 그 이외에는 짚을만한 것이 없었다. 한순간의 변덕이라기엔 그것은 너무도 순수하고 짙었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해석할 수 없는 감정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자각 없이 움직이면 언제나 닿는 곳이 있었다. 언제나 마주하는 이가 있었다. 증오가 그를 적에게로 인도하듯, 그 기괴한 감정은 그를 그 대상에게로 자꾸만 이끄는 것이다.

첫 대상은 한 소년. 도시에 섞여들지 못하고 도시의 모든 곳을 경계서린 눈으로 파고들던, 어린 전사. 어둠 속에서 소년을 처음 발견한 이후 기사는 본능적으로 그를 쫓았고 그의 아지트에 파고들어 조금씩 함께하게 되었다. 그에게 느꼈던 감정은 <함께하고 싶다>는 것.

다음 대상은 소년과는 대조적인 소녀였다. 소년이 밤에 몸을 숨기는 이방인이라면 소녀는 화사한 햇살에 더욱 빛나는 사람이었다. 소녀가 시야에 들어온 후 기사는 자꾸만 그녀를 쫓게 되었다. 소녀의 주변을 맴돌며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지켜보는 일이 반복되었다. 다가서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지켜보기만 하고 개입하지 않으려 했던 기사였지만 결국은 소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소녀가 위험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에 휘말렸는지 소녀는 쫓기고 있었고 그녀를 노리는 자들은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홀로 쫓기는 소녀는 곧 붙들리게 되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기사는 훌쩍 뛰어들었다. 소녀를 덮치려는 이들을 으로 간주하고서.

그는 유령처럼 나타나 소녀를 가로막았다. 적이 소녀를 붙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망토가 펄럭이고 시야에 검은색이 들어차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적이 튕겨나갔다. 서서히 시야가 개이자 소녀의 눈앞에 기사를 연상시키는 형체가 보였다. 온몸을 투구와 갑주로 가린 기사라. 평화로운 세계에는 환상처럼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감각은 뚜렷했고 조금 전까지의 위기도 분명 현실이었다. 헐떡이는 숨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을 때, 소녀는 기사에게 손목을 붙들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소녀가 입을 뗐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그 이질적인 존재에게서 현실의 감각이 느껴졌던 탓이다.

 

*

 

해석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기사는 천천히 입을 뗀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이질적인 목소리에 소녀가 일순 움찔했다.

소녀를 구한 후 그는 소녀를 데리고 도망쳤다. 적이 찾아들기 어려운 곳으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소녀에게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소년의 아지트 근처, 사람이 닿지 않는 곳에 그들은 잠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를테면, 함께하고 싶다거나 지켜주고 싶다거나 하는.”

전자는 외로이 싸우는 소년에게 느낀 것이고 후자는 소녀에게 느낀 것이다. 적으로 간주되는 인물에게라면 누구든 끓어오르는 증오와는 달리, 그 특정한 감정은 지금껏 그들 이외 누구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적은 증오로, 그들은 그 감정으로 기사에게 각인된다. 그 외의 사람들은 그저 무의미한 타인일 뿐.

그들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 것일까. 혹은 어떤 의미였던 것일까.

뼛속까지 새겨진 의무와 증오에도 품지 않았던 의문을,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맞닥뜨린 후 수없이 되풀이해왔다. 싸워나가는 것 이외에 목적이라곤 없는 자신에게는 불필요하고 납득할 수도 없는 감정이었는데.

만약 누군가에게 그런 것을 느낀다면, 그건 분명 그 사람이 그럴만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겠지?”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로 와 닿는 상냥한 시선에 기사는 순간 아득했다.

네가 그랬다.”

소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너를 보았을 때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

알 수 없어. 그러니까 해석할 수 없는 감정인 거지.”

소녀는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조차 해명할 수 없는 감정을, 그 대상이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일 터다.

내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그 이유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

아무리 파헤쳐도 근거를 찾아낼 수는 없다. 바닥을 드러낸 호수에서 물을 퍼내려는 것과 같은 꼴이다. 그러므로 그는 굳이 근거에 집중하지 않기로 했다. 본능처럼 자리한 감정에 그저 순응할 뿐이다.

이 세상에는 네가 모르는 위험이 많아.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선 싸움이 일어난다. 만일 그에 휘말리게 되면 너도 무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오늘 같은 일이 또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래. 그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고.”

소녀는 기사가 처한 상황을, 그의 의무를, 그리고 이 세상에서 활개치는 적의 존재를 모른다. 이 평온한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위험과 그라는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 설명한대도 납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경고해주는 거야?”

그런 셈이지.”

친절하구나.”

소녀가 희게 웃었다. 소녀가 알지 못하는 자신의 싸움을 떠올린 기사는 투구 너머에서 쓰게 웃었다.

그러니 조심해.”

, 그럴 테니까.”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순간 소녀가 얼어붙었다. 기사 역시 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이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 한들 무의미하다. 파고들 수도 없는 과거를 그는 부러 헤집지 않는다. 그러나 소녀에게는 달랐던 모양이다. 필사적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소녀의 모습이 그의 눈에 새겨졌다.

어쩌면 너는…….”

소녀가 겨우 말을 토해냈을 때였다. 갑자기 세찬 바람이 일었다. 해진 망토가 펄럭이더니 기사의 형체가 희미해졌다. 머리를 치는 불안에 소녀가 기사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바람이 걷히고 난 후엔, 기사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허공을 훑던 소녀의 손이 힘없이 내려왔다. 분명 곁에 있었는데, 환상처럼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