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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지] 크로노스

현소야 2015. 7. 21. 03:03

 

  옥좌로 향하는 길은 멀었다. 적막한 회랑을 걸으며, 사내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군주를 떠올려보았다. 한때는 아버지라 불렀던 자. 자신의 신념을 실현시키고자 세상마저 제물로 바친 괴물. 부리던 군사가 차례로 무너지고, 혹은 배신하여 적의 편이 된 것을 모를 리 없음에도 군주는 저 깊은 곳에 틀어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끝까지 군주로서 남으려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까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알 길은 없다. 옛적부터 속을 알 수 없는 자였으니.

  세상을 삼키려는 미친 계획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그를 아버지로 본 적은 없었다. 괴물은 괴물로만 보아야 하는 법이다. 그 판단에 사사로운 감정이나 미련 따위가 개입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하여 사내는 그때부터 아비가 아닌 괴물을 막아서기 위해서 군사를 키우고 세상을 장악해온 것이었다. 사내를 그렇게 행동하게 한 것은, 우습게도 어릴 적 아비가 남긴 말이었다. 너는 많은 것을 안고 태어난 만큼 우리 세계의 주민을 지켜갈 의무가 있다는.

  그것이, ‘우리의 책무라는.

  어린 아들에게마저 그러한 책무를 각인시킨 그가, 어째서 타 세계의 주민들은 무참하게 짓밟았는지 모른다. 왜 가족들이 있는 세계에까지 칼끝을 겨누었는지도. 당신이 지켜야 할 시민은, 당신의 백성은 누구였던가. 제가 던진 질문에 사내는 웃었다. 무의미한 질문이다. 그는 이미 수많은 희생을 불러왔고,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남기며 괴물이 되지 않았던가. 그는 모든 것이 세상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 말했으나, 그가 몰고 온 파멸로 인해 책무는 이미 빛이 바랬다.

  언제까지고 굳건히 군림할 것 같았던 군주는 신념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무너졌다. 그에 맞서 싸워온 사내는 그의 왕국이 붕괴하는 과정을 낱낱이 지켜볼 수 있었다. 그것은 서사시처럼 길고 소설처럼 극적인 이야기였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의 왕국이 무너지게 된 치명적인 변수 중 하나가 그가 짓밟은 곳의 백성이었다는 것이다. 죄는 마침내 돌아와 죄인의 목을 조르니, 그는 한낱 사냥감에게 목을 물린 사냥꾼이 되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결말은 하나뿐.

  옥좌에서 내쫓기고 자신이 범한 죄를 갚아가는 것. 그것이 세상을 주무른 괴물이 맞이할 종말이다.

  이 참혹한 종말 앞에서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발악할까. 좌절할까. 그것도 아니면. 사내는 생각을 멈췄다. 목적지에 당도한 것이다. 상좌에 앉은 이는 미동조차 없이 자신을 끌어내릴 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가운 회색 눈에는 감정이 내비치지 않았다. 기억하던 대로의 모습, 기억하던 대로의 아비였다.

  반전을 꾀한다면 진즉에 도망쳤어야 했다. 그래야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군주는 이곳에 그대로 붙박인 것이다. 모든 것을 계획한 군주로서 모든 결말마저 책임지려는 양. 그 광경에 사내는 냉소한다. 세계의 뒤편에서 군림하며 수많은 이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은 주제에, 그는 끝까지 고고한 체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지한 백성의 손에 순교하는 성자라도 되는 것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아들아.”

  낯선 호칭에 사내는 일순 움찔했다. 그들은 이미 부자라고 하기엔 너무 멀어져 있었다. 도리어 서로를 무너뜨리려 싸우지 않았던가. 따라서 그 호칭은 지극히 고의적인 것. 군주는 팔을 벌려 아들을 맞는 시늉을 했다.

  “드디어 당도했구나.”

  “유감스럽게도. 아버지.”

  비웃음은 비웃음으로 갚는다. 이미 먼 과거에 두고 온 호칭을 꺼내며, 사내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이라면 그 정도의 여유는 부릴 수 있었다. 이제야 당신에게 닿았다. 이제야 당신을 끌어내리게 되었다. 당신의 미친 계획을 저지하고 당신이 뿌린 재앙의 씨앗을 거두게 되었다. 사내는 벅차오르는 감정에 실로 오랜만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만족하나?”

  파멸을 눈앞에 둔 주제에, 군주는 더없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상황을 지배하는 것이 자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이 제 계획의 일부였던 것처럼. 사내는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듯한 아비의 저러한 태도가 몹시 불쾌했다.

  “물론.”

  “그럼 네 뜻대로 하려무나.”

  턱을 괸 채, 군주는 나른하게 말했다.

  “나를 끌어내리고, 내가 바라던 것을 부수고, 내 거점을 궤멸시키고, 너를 따르는 이들 앞에서 선언하거라. 아카바 레이지가 이겼다고. 아카바 레오를 저지했노라고. 마침내 세계를 구했다고. 너는 그걸 바라던 게 아니었나?”

  “하나도 빼놓지 않고 실행하도록 하지.”

  “그 전에 하나 충고하마. 아들아.”

  날아든 목소리는, 충고를 가장한 것치곤 자못 심술궂다.

  “너는 나를 무척이나 닮았어. 그러니 조심하거라.”

  “나는 당신 같은 괴물은 되지 않아.”

  반사적으로 답한 것은 그 뒤에 올 말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어릴 적부터 뇌에 각인될 정도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너는 나를 무척 닮았다. 그런 점에서 나의 후계자로 적합해. 내가 바라던 것을 전부 실현시키게 될 거야. 예전에는 그 말을 들으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예전에는, 그랬다. 그가 괴물이 되기 전의 이야기였다.

  “무슨 근거로 확신하지? 미래는 짐작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괴물이 되고자 괴물이 되진 않았어.”

  이제 사내는 아비에게서 제 모습을 볼 때마다 혐오스러웠다. 그의 유산이 제게 남아있다는 것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은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것. 외모도, 성정도, 냉혹한 계산도, 심지어 보통 사람을 아득히 뛰어넘는 영민함마저도 전부 아비의 유산이었다. 군주는 그 점을 물어뜯었던 것이다.

  “너는 나를 답습해. 나와 같은 것을 보고, 나와 같은 길을 걸으며, 나와 같은 괴물이 될 거다.”

  아아. 이것은 옥좌에서 쫓겨나던 우라노스의 예언이 아닌가. 군주는 자신에 반기를 들고 마침내 자신을 몰아내는 아들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그 악의적인 예언을 감흥 없이 받아쳤다.

  “저주인가?”

  “아니. 선언이다. 네 미래에 대한.”

  “패자의 발악으로 기억해두지.”

  사내는 냉소하며 군주를 끌어내렸다. 그렇게, 괴물의 시대가 저물었다.

 

*

 

  세상을 혼란으로 몰아넣는 악인이 새로이 등장한 것은 사내가 청년 티를 벗고 원숙한 지도자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교묘하게 세상을 갉아먹는 자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을 때 사내는 어릴 적 아비가 각인시킨 책무를 떠올렸다. 혐오하던 자의 것이며, 이미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음에도 사내는 저를 이끌었던 책무를 버린 적이 없었다. 더 나은 자로서 세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그 역시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사내는 이미 어린 나이에 괴물을 상대하여 무너뜨렸고 그 이후로도 세상을 감시하며 드문드문 혼란의 불을 꺼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그는 움직여야 했다. 세상을 침식하는 괴물을 이번에도 제거해야 했다. 사내는 이 사태에 대해 분명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괴물은 영민하여 세상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가면서도 누구에게도 가로막힌 적이 없었으나, 다행히 사내 역시 영민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지금껏 혼란을 해결해온 경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사내는 능숙하게 움직였다. 입수한 정보를 훑어 괴물을 분석하고 진단하여 덫을 놓았다.

  괴물을 붙잡아 혼란을 막기 위해. 이 세상을 제 방식대로 지키기 위해.

  괴물을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실현하며, 괴물의 근거지를 조금씩 잠식해가며 사내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이 청년 티를 벗지 못했을 때의 기억. 미친 신념을 이루려 세상을 절망으로 물들이던 아비와 그를 막아섰던 자신의 모습. 책무에 더욱 몰두하게 된 것은, 바로 아비라는 괴물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의 어린 시절을 뒤흔들고 너무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되게 했다. 어린 나이에 책무를 감당하여, 세상을 위해 싸우게 했다. 타인의 희생을 지켜보며 무력함에 떨게 하기도 했다. 마침내 그를 무찌르긴 했으나, 그 모든 기억이 충격으로 남아 사내는 그와 같은 일을 막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비는 아들에게 책무를 각인시키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 자신의 타락으로. 그 자신의 악행으로. 아들이 직접 자신을 막아서게 하면서 스스로 실행하도록 하여 완벽하게 각인시키고 만 것이다.

  긴 싸움의 끝에, 마침내 괴물은 포위되었다. 한순간의 실패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었던 탓이다. 그 전까지 아슬아슬한 전투를 거듭한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김이 빠질 정도로 쉽게 닥친 기회였다. 사내는 모습을 숨긴 채 군림하고 있던 괴물을 자신이 처단하겠노라 선언하고, 괴물의 본거지로 들어섰다.

  괴물이 숨은 곳으로 향하며 사내는 기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어딘가, 익숙했다. 지금까지의 전개도, 괴물이 사용한 방식도, 심지어 본거지의 구조마저 익숙했다. 이 짙은 기시감은 괴물의 모든 것이 과거 사내가 경험한 무언가와 닮아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리라. 그러나 대체 무엇과. 기억을 헤집던 사내는 깨달았다. 아비와 닮아있었다. 그가 경험한 최초이자 최악의 괴물과 닮아있었다. 모든 것이, 아비와 같았다.

  정말이지 불쾌한 작자로군. 입술을 비틀며 사내는 괴물을 쫓아, 더욱 깊숙한 내부로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상하게도, 더 막아서는 자도 없었다. 의심을 품을 법했으나, 사내는 어떤 상황이든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으로 발걸음만 바삐 했다. 마침내 더 나아갈 수 없는 중심지까지 닿았을 때 사내는 멈췄다.

  옥좌에 앉은 이는 가면을 써 얼굴을 전부 가리고 있었다. 정갈한 제복은 온몸을 감싸고, 흰 장갑이 손을 감싸 괴물은 그 무엇도 드러내지 않은 채 온몸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그 무엇도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침입자가 들어서는 것을 모를 리 없음에도 괴물은 옥좌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흥미로운 양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괴물의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라곤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높낮이 없이 기계적이었다. 어딘가 삐걱대는 소리도 난 듯했다. 그 괴상한 목소리에 사내는 새로운 가능성을 추가한다. 눈앞의 적은, 평범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네가 나를 처단하러 오기를.”

  “괴상한 놈이로군.”

  “너를 맞이하는 이 순간을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왜 이 순간에 집착했지?”

  “그야, 이것이야말로 내가 준비한 극의 하이라이트니까.”

  말을 마친 괴물은 옥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사내에게로 향했다. 사내는 움직이지 않고 적이 가까워지는 것을 기다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군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그럴수록 침입자와 군주 사이의 거리는 좁혀졌다. 저 먼 옥좌에서, 단숨에 처치할 수 있는 거리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로. 마침내 군주는 사내 앞에 섰다.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찾아든 전사 앞에서, 가면 너머의 얼굴은 웃었다.

  “다시 말하지. 기다리고 있었다. 아카바 레이지.”

  그 말과 함께, 군주는 단숨에 가면을 벗었다.

  가면 너머의 얼굴은 지독하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반전을 경험했던 사내조차 놀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드러난 얼굴은 사내와 같은 얼굴이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은 기괴한 광경에 사내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그 남자의 말을 기억해? 너는 나와 같은 괴물이 될 것이다, 라는 말.”

  자신의 삶을 뒤바꾼 최초의 괴물이 남긴 말이라면,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무의미한 저주로 치부하여,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 눈앞의 괴물이 굳이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어쩌면.

  “예언대로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카바 레오는 옳았어. 우리는 그를 닮아있지. 그가 미처 네게 말하지 못한 가능성을 나는 발견했고 그것을 실행했어. 그렇게 나아가던 중에 알아차렸다. 나는 그를 완전히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나의 모든 행보는 그를 모방하는 것이었지.”

  “그래서 그와 같은 괴물이 되었다?”

  사내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깃들어있지 않았다. 괴상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오히려 그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설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물론 아니지. 그저 무의미한 옛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군주는 장갑을 벗어던졌다. 드러난 손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차갑고 딱딱한, 기계로 만들어진 손. 사내는 처음 들었던 군주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인간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계적인 목소리. 어쩌면 그는, 이미.

  “몸을 기계로 대체했나?”

  “그래. 너를 기다리기 위해서. 꽤 오랜 시간이었으니까 말이야.”

  “왜 굳이 나를 기다렸지?”

  “이유가 궁금하다면 말해주지. 첫째로는, 괴물이 된 자신을 마주하는 아카바 레이지의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내 소망을 이뤄줄 수 있는 것이 너뿐이기 때문이고.”

  “소망?”

  사내는 마주한 이의 얼굴이, 과거 아비를 끌어내리던 때의 자신처럼 달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역시, 소망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들떠있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래, 너무 오래 기다렸어. 나를 무너뜨릴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나는 어느 날 내가 괴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잠식한 세상에서, 모두의 추대로 옥좌에 앉았을 때였지. 그때부터 나는 기다렸다. 나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구할 자가 나타날 때까지. 적어도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하고 죽기 위해서.”

  기계로 만들어진 손이 사내의 뺨을 쓸었다. 지나치게 서늘한 손길에, 사내는 움찔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누구도 나를 무너뜨리러 오지 못했다. 세상을 내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해 사람들의 사상을 모두 장악한 후였기에 감히 나를 괴물로 보는 이가 없었던 거지. 모두가 나를 보며 환호했다. 모두가 나를 추앙했다. 전부, 미쳐있었어. 그때 나는 그 남자의 말을 떠올렸다. 너는 우수하여, 다른 사람을 뛰어넘으리라는 말.”

  “설마.”

  “모든 세계의 내가 나와 같은 길을 택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 중 일부는 아카바 레오와 같은 괴물이 되는 것을 거부하겠지. 나와 같은 괴물을 무너뜨리려 노력할 테고, 그럴만한 능력도 있을 거야. 바로 그런 아카바 레이지를 찾기 위해 나는 오랜 시간을 헤맸다. 세월이 흐를수록 몸은 노쇠해졌고, 나는 버티기 위해 몸을 기계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네 앞에 당도한 첫 번째 아카바 레이지인가?”

  “그래. 그래서 네가 나를 쫓는 걸 알았을 때 무척 감격했지. 드디어, 나타난 거야. 내 소망을 이뤄줄 수 있는 사람이.”

  “너의 소망이라면, 너 자신의 처단이겠군.”

  “맞아. 아카바 레이지라면 가능할 테니까.”

  이제 사내는 눈앞의 괴물이 들뜬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오래도록, 몸이 쇠하여 견딜 수 없게 될 정도까지 기다려왔던 것이다. 자신의 종말을 위해서. 자신의 종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아마 그는 사내를 유인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목표물로 삼도록 만들고서, 목표를 이룰 즈음에 쉽게 자신을 찾도록 길을 열어주면서.

  “몸을 전부 기계로 대체한 건 아냐. 거의 모든 것을 대체했지만, 몇몇은 그대로 남아있지. 통각을 느끼고, 반성하고, 죽을 수 있도록 말이야.”

  기계적인 목소리는 감정의 변화를 담아낼 수 없었지만, 사내는 괴물의 목소리가 환희로 떨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괴물의 얼굴이 열기를 띠고 있었으므로. 괴물은 자신의 종말을 위해 지금껏 버텨온 것이다. 죗값을 치르기 위해 목숨을 유지해온 것이다. 그 우스운 모순 앞에서, 사내는 웃었다. 살아오면서 이만큼 극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 어서.”

  기계로 만들어진 손이 사내의 손을 붙들었다. 사내는 저와 닮은 보라색 눈에서 설핏 아비를 본 것 같았다. 자신의 삶에 들이닥친 최초이자 최악의 괴물이었던 자. 신념을 위해 움직였다 하나, 마침내 괴물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자.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그러니 어서, 네 방식대로 나를 처단해.”

  “죗값을 치르게 해달라고? 내 손으로?”

  “그걸 위해 살았으니까.”

  “우리 세계의 사람들이야 그렇다 쳐도, 네가 진정 속죄하고픈 이들은 남아있지 않을 텐데도?”

  “그래.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그들에게 속죄하려면 이곳에서는 불가능하겠지.”

  다른 길을 걸었다 해도 같은 사람이기 때문일까. 사내는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괴물이 바라는 종말이 무엇인가도. 사내는 총을 꺼내, 괴물의 머리를 겨누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었다.”

  괴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너는 괴물이 된 너를 감당할 수 있을까, 라는 것.”

  “그래서 이제 의문은 해결되었나?”

  “물론.”

  괴물이 웃었다. 그 웃음에는 사내가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감정이 뒤엉켜있는 것 같았다.

  사내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것으로 악의 고리는 끊어지고, 괴물은 바라던 종말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