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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조] 재앙의 굴레

현소야 2015. 7. 15. 01:02

 

  청년은 세상을 덮은 재앙이 모든 것을 빠르게 삼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양분을 고갈시키는 무서운 것. 그 손길은 무엇 하나 놓치는 일 없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따라서 재앙이 지나간 자리엔 모든 것이 검게 말라붙었다. 생명이란 생명은 전부 사그라지고 죽음의 잿빛만이 쟁그랍게 눈앞을 메우는 세상. 재앙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여 무엇이든 제 먹이로 삼으니, 청년은 길지 않은 삶을 이어오는 동안 탄생보다 죽음에 익숙했다.

  재앙이 어디에서, 왜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니, 파헤쳐 무엇하겠는가. 재앙은 이미 수많은 것을 삼켜버린 것을. 재앙이 먹이로 삼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말라죽어 다시는 소생할 수 없는 것을. 이제 와서 근원을 따져봐야, 세상을 잿빛으로 메우는 재앙을 떨쳐낼 수도 없는 것을. 다만, 청년은 재앙의 그림자가 언제부터 이 세상에 드리워졌는지는 안다. 그것은 제가 소년이라 불리던,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 날, 재앙은 예고도 없이 찾아들었다. 총성과 폭발음이 겨우 불행의 시작을 신고했을 뿐이다. 갑작스레 밀려들어온 침략자들은 눈앞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겨누었다. 빠르게 퍼지는 죽음, 힘없이 무너지는 사람들. 순식간에 세상이 지옥으로 변했다. 청년은, 아니, 소년은 그 날 이미 제가 평생 볼 죽음을 전부 보아버렸다. 전쟁이라는 재앙은 그렇게 닥쳤다.

  그 이후 재앙은 세를 키울 뿐, 결코 후퇴하는 일이 없었다.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증오를 쌓으며, 불안과 혐오를 양분 삼아 세상을 덮쳐왔다. 재앙을 몰고 온 침략자들은 의기양양하게 세상을 짓밟고 있었다. 몇 년간 그들의 손아귀에 잡힐 듯 말 듯 도망쳐온 청년은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재앙은 이 세상을 완전히 삼키기 전에는 만족하지 않으리라고. 저와 같이, 재앙으로부터 도망치는 이들조차 결국 언젠가는 그에 전부 먹히고 말 것이라고.

  그러나 붙들리기 직전까지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그것이 살아남은 이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재앙에 먹혔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손아귀에서 말라죽었는가. 청년이 살아남은 것은 그가 우수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 아직껏 청년에게 종말이 닥치지 않았을 뿐. 먼저 붙들린 이들이 청년의 종말을 늦추었을 뿐. 그러니, 청년은 끝까지 도망치면서 운명에 저항해야 했다. 희생당한 이들이 너무 일찍 끝맺은 삶까지 짊어지고, 악독하게 살아남아야 했다. 그것이 청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저항군이 결성된 것은, 바로 청년과 같은 살아남은 이들 덕분이었다. 세상에 들이닥친 재앙에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냥감이나 다름없는 그들이 스스로 싸우게 했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병사들이 무에 그리 강하겠냐마는, 침략자에게 저항한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종말은 조금이나마 늦춰지고 있었다.

  살아남기를 각오하지는 않았다. 저항 없이 몸을 숨기든, 싸우든, 어차피 사냥감이 맞게 될 결말은 같았으니까. 그 종말이 언제 들이닥치는가의 문제일 뿐. 언제 먹힐지 모를 목숨이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를 삶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차라리 용감해졌다.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망적인 상황이 도리어 그들에게 싸울 이유를 준 것이다. 그들은 악귀처럼 덤벼들어 사냥꾼을 물어뜯었다. 숨을 곳이 없기에 가능한 발악이었다.

  재앙이 세상을 덮친 지 몇 년째, 살아남은 이들은 제게 남은 것을 돌아보았다.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겨, 잃은 것보다 남은 것을 헤아리는 것이 더 편했다. 사랑하는 이들마저 거의 죽었다. 그렇지 않으면 빼앗겼다. 그나마 빼앗긴 쪽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생사를 모르기에 한 줄기 희망만은 품고 살 수 있으니까. 죽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저 깊은 곳에 살아 숨 쉴 테니까. 언젠가는 만날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기대로 버틸 수 있으니까.

  청년의 곁에 있던 이들도 대개 죽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누이는 빼앗겼다. 그 참담한 사실에 청년은 때로 머리를 감싼 채 괴로워했으나 결국 스스로를 위안할 수밖에 없었다. 누이는 살아있을 거라고. 어디에서든 분명 살아남아 저항하고 있을 거라고. 이제 자신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 돌아보지 않고 싸울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면, 어쩌면 누이가 있는 세상에까지는 이 끔찍한 재앙이 닿지 않도록 몸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절망에 잠식된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참혹한 현실 속에서 그나마 덜 절망적인 것을 찾게 된다. 어차피 최선이 없는 세상이라면 차악에라도 만족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청년 또한 그러해서 하루하루 최악의 결말을 맞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신을 위안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잃은 것을 헤아리지 않고,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상실을 당연히 여기고 절망에 적응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청년은 때로 절망에 질식할 것 같았고 상실의 무게에 쓰러질 것 같았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 청년은 한순간의 도피를 택한다. 자신이 그려가고픈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절망 따위 없고, 상실에 짓눌리는 일 없이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화사한 세상. 그것은 사실 과거의 투영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며, 한때 당연했던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현재는 평범한 것조차 소망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졌으니까.

  그렇게 미래로 도피한 날이면, 청년은 다시 암담한 현실과 마주하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무기를 벼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절망이 언제쯤 끝날지, 갈망하는 미래를 그릴 날이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제 싸우는 것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현실의 절망 앞에 선 청년은 책무를 되새기기 위해 뼈대만이 남은 사원에 들어섰다. 이 숭고한 곳에도 재앙은 퍼져, 무엇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머리가 날아간 성상 앞에 머리를 조아린 청년이 기도했다.

  「제가 이곳의 모든 것을 감내하게 해주시옵소서. 세상을 버리지 않고……끝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신을 믿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이 참담한 현실이 이어진다는 것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 증거라고 생각했었다. 인간을 사랑하여 굽어살피는 신이라면 결코 이 재앙을 방관해서는 안 되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신에게 기원을 올리게 되었다. 신을 믿고 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절대자 앞에 소망을 되뇌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마음을 다잡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를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사람은 저 천상의 절대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으므로.

  「……부디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살게 하시고, 최소한의 사람과 싸우게 하시고, 가장 추잡한 것은 언제나 제게로 돌리시옵고, 제 죄는 제가 전부 짊어질 테니 제 누이에겐 저로 인한 불행이 없도록 해주시옵소서.

  살아남은 이의 소망이란 이렇게, 슬프게도 소박한 것.

  신께 바치는 기도를 끝낸 청년은 눈을 떴다. 재앙에 쫓기는 세상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

 

  청년은 희끄무레한 빛에 감싸인 사람들의 형체를 보았다. 저 먼 곳에서부터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는 자들. 오래도록 쫓기는 생활을 해온 청년은 반사적으로 총구를 겨누었으나, 이내 총을 내려놓게 되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이들은 적이 아니라, 함께 싸우는 동지들이었으니.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드러나는 남루한 행색이, 분명 그들 저항군의 모습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이들이었다. 무엇이든 제대로 갖출 리가 없었다. 그나마 그들이 가진 것 중 쓸만한 것이라곤 적에게서 빼앗아 쓰게 된 무기 정도일까. 그마저도 모두에게 지급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만큼 궁핍했다.

  이런 싸움이어서야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남는 것이 아닌 하루라도 더 버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세상의 종말을 늦추는 것만으로도 싸우는 의미는 분명히 있었다. 아무리 악독하게 싸워도 결국 재앙을 오롯이 막을 수 없음을, 침략자들의 숨을 끊을 수 없음을,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굳이 그 음울한 것을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이었다.

  동지들이 기지를 빠져나갔다 이제야 돌아온 것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수확은 초라했으나, 그것에라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였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내몰리는 것은 그들 저항군이었다. 아무리 처절하게 저항해도, 본국의 지원을 받으며 사냥감을 짓밟는 침략자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탓이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잃지 않았던가. 청년은 목을 조여드는 비참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분했다.

  “아무래도 오래잖아 이것조차 무리일 것 같아.”

  돌아온 이들 중 하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눅진한 침묵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거기에도 적이……얼마 못 버틸 것 같거든.”

  침묵을 견디지 못해 말을 꺼낸 이가 겨우 말을 잇자, 여기저기서 눌러 삭힌 목소리가 드문드문 새어나왔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이 근방은 전부 점령당했어.”

  “본대로부터의 지원은?”

  “그쪽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지원은 무리일걸.”

  음울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청년은 멀찍이 떨어져 팔짱을 낀 채 동지들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자신에겐 발언권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살아남은 사람이 적고, 저항군이 사람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 해도 청년은 이곳에서 상당히 어린 축에 들었다. 전장이 아니라 가정에서, 전우가 아닌 부모와 함께할 나이였다. 동지들은 청년이 그런 어린 나이에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가능하면 청년을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영역에서 빼려 했다.

  싸움도, 논의도, 중심은 어른들이었다. 청년은 언제나 저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야 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것은 어린 나이의 치기도, 오만도 아니었다. 저항군으로 싸우게 된 것은 청년의 선택이었다. 그 길에 접어들면 자신이 맞이하게 될 종말이 무엇인지는 이미 처음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각오하고 들어선 것이다. 청년은 자신이 좀 더 나설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안전할까?”

  불안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적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세상을 잠식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봐.”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소리가 급작스레 작아졌다. 음울한 이야기를 저들끼리만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아직 어린 그에게 굳이 모든 것을 알리지 않고픈 그들 식의 배려임을, 청년은 경험적으로 알았다. 그들의 배려에 따르고자, 청년은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으며 관심을 돌렸다. 잿빛으로 가라앉은 이야기는 연기처럼 아물거리다 이내 흩어졌다.

  음울한 진단은 틀리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그들이 몸을 숨긴 곳까지 재앙의 잿빛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속도는 그들이 예상하던 것을 뛰어넘었다. 재앙이 탐욕스레 세를 키우리라는 건 알았다. 자신들도 언젠가는 그 제물이 되리라는 것도. 그러나 이것은 너무 빨랐다. 그들이 발 디딘 좁은 땅마저 단숨에 삼키려는 양 재앙은 빠르게 휘몰아쳤다.

  “전투입니까?”

  청년이 물었다. 주먹을 꽉 쥔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전투태세를 갖춘 이들은 말이 없었다. 적이 시시각각 목을 죄여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들은 지금도 들이닥친 재앙을 입에 담지 않는다.

  “싸우게 된다면…….”

  “.”

  동지들 중 하나가 청년의 어깨를 감쌌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엔 타이르는 기색마저 묻어나오고 있었다.

  “긴장 풀어.”

  청년은 할 말이 남은 듯 입을 열었으나, 이내 다시 다물었다. 현실의 재앙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았던 탓이다.

  “너는 후방지원을 맡는다.”

  평소라면 불만이라도 주워섬길 청년이었으나 이번에는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결연했기 때문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청년 역시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 싸움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싸움이 될 터였다.

  누구도 이기자고 말하지 않았다. 살아남자고 말하는 이들도 없었다. 그들 저항군은 적 앞에 자신들이 얼마나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껴왔기 때문이었다. 살아남는다면 다행이었고 그렇지 못한다면 언제 끊어질지 모를 목숨이 그때 다한 것뿐. 그들의 힘으로는 침략자를 완전히 막아설 수 없었다. 다만, 끝까지 저항하여 종말을 늦추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먼저 사라진 이들을 위해. 아직도 살아남아야 할 이들을 위해.

  그들이 저항군인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스스로 미끼가 되어 침략자를 괴롭히는 것이다. 침략자의 시선을 돌리고, 살아남은 이들이 조금 더 도망칠 수 있도록. 이 세상 모든 것을 삼키며 세를 키우는 재앙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도록. 따라서 그들은 감히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지 않는다. 다시 만나자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청년은 선봉으로 나서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수많은 싸움을 거쳤으나, 저렇게 등을 보인 이들이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청년은 굳이 어른들을 배웅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굳이 청년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그 중 두셋이 청년의 머리를 서툴게 쓰다듬거나 등을 세게 치고 떠났을 뿐이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그들은 제 위치로 향했다. 저 먼 곳에서 시작된 폭음이 사냥꾼의 침입을 알렸다. 그때부터 눈앞의 풍경이 이지러졌다.

  언젠가부터 익숙한 냄새가 퍼졌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였다. 피와 쇠의 냄새, 화약 냄새가 뒤섞이고, 날카로운 부취까지 더해진 불길한 냄새. 어린 나이에 이미 평생 볼 죽음을 전부 보아버린 청년은 그 냄새가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어른들이 나선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침략자가 어디까지 파고들었는지도. 아마도 곧, 이곳에까지 죽음의 냄새가 들이닥칠 것이다. 청년의 죽음으로, 혹은 청년 또래의 아이들로 구성된 지원대의 죽음으로.

  죽음의 냄새는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죽음은 그들 저항군을 게걸스럽게 삼키고, 삼키는 만큼 몸집을 불렸을 것이다. 그럴수록 죽음의 체취는 짙어졌을 터. 청년은 죽음이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은 이들을 노리고 조급하게 들이닥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침략자들이 죽음을 몰고 오는지, 죽음이 침략자를 홀려 이곳으로 잡아끄는지, 이제는 그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른들을 삼킨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이제 자신들마저 물어뜯으려 한다는 것만은 알았다. 긴장한 청년이 숨을 크게 삼킨 때, 바로 눈앞에 죽음의 입이 넘실거렸다. 거대한 동굴처럼 깜깜하고 아득한 것이, 이제 그마저 먹어치우려고.

  “!”

  제 이름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마저, 청년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청년은 홀린 듯, 죽음의 아가리를 겨눈 채 총을 쏘았다. 귀를 찢는 총성과 함께 눈앞의 풍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시야가 회복되고서야 청년은 제가 겨눈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다. 적이었다. 아직 앳된 얼굴의, 납치당한 누이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소년병.

  깊은 곳에서 구역질이 일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전부 게워내고 싶었다. 아직 제게는 어울리지 않는 군복을 입은 채 고꾸라진 적국의 소년병이 재앙의 참혹함을 다시 일깨운 탓이다. 총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으나, 그뿐. 청년은 이내 역겨움을 삼키고 자신을 노리는 적을 쏘았다. 혐오보다 본능이 앞섰다. 재앙이 학습시킨 생존방식이었다.

  그러나 어리고 미숙한 지원대로서 밀려드는 침략자를 막아내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어른들이 사라진 이상 침략자의 공격을 막아줄 이들도 없었다. 청년은 눈앞에서 저와 나이가 비슷한 동료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인형처럼 힘없이. 죽음의 체취는 이제 노골적으로 생존자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살아남은 몇몇마저 먹이로 삼키겠노라, 오만하게 선언하는 것 같았다. 죽음의 손길은 얼마나 집요하고 무자비한지. 이제 청년은 죽음의 손길이 제 발목을 휘감고 있음을 안다. 검고 끈적한 손가락으로 움직임을 봉쇄한 채, 혀를 날름거리며

  그 순간 폭음이 전장을 갈랐다. 폭격이었다.

  청년은 하늘에서 죽음의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다. 대지의 모든 것을 단숨에 썩게 할, 죽음의 독이 쏟아진다고.

  폭발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잠든 것처럼. 재앙조차 한낱 꿈이었던 양.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참혹했다. 세상이 고요한 것은 죽음이 포식했기 때문이었다. 재앙이 세상 곳곳을 휩쓸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나뒹구는 것은 검게 그을린 사람의 팔. 몸뚱이는 또 어디 굴러갔을지 모를 일이다. 누구인지도 모를 이들의 찢긴 사지가 곳곳에 흩뿌려지고 시체가 겹겹이 쌓인 풍경은 차라리 지옥이었다.

  죽음이 왜 마지막 순간 저를 놓아주었는지도 모르는 채, 청년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통증으로 비명을 지르는 몸을 억지로 이끌며 지옥에서 저 이외 살아남은 이들을 찾아 헤맸다. 어딘가에는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 했다. 청년은 세상에 내리깔린 고요를 저주하며 시체의 산을 넘어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청년은 익숙한 모습 앞에 멈추었다. 침략자와 저항군의 시체가 뒤엉킨 곳에서, 축 늘어진 동지의 팔이 보였다. 시체에 깔린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에게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음을 알면서도, 청년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그를 짓누르고 있는 시체를 치워냈다. 딱딱하게 굳은 묵직한 시체를 밀어내자, 그 밑에 깔려있던 이가 드러났다.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익숙한 사람. 아직 소년이라는 호칭이 어울릴 앳된 동료.

  유토.

  청년은 동지의 이름을 불렀다. 답은 없다. 숨이 붙어있기는 한 것일까.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불길한 고요 속에서 청년은 바들바들 떨며 구해낸 자의 손목에 손을 얹었다. 맥박이, 가늘게나마 뛰고 있다. 그는 분명 살아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순간 청년은 처음으로 하늘에 감사했다. 한 사람이라도 남겨주었다고. 제 몸도 가누기 어려운 주제에 청년은 정신을 잃은 동료를 업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지옥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

 

  소년에게 세상이란 언제나 잿빛이 내리깔린 음울한 대지였다. 분명, 태어나서 처음 본 풍경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그보다 훨씬 화사하고 다채로운 색깔로 가득한 아름다운 곳이었으리라. ‘아마도라고밖에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때의 기억이 아득히 먼 과거가 되어버린 탓이다. 햇수로는 오래지 않았으나, 소년에게는 이미 헤집을 수도 없는 옛 기억이 되었다. 소년이 기억하는 세상의 색채는, 그 잿빛은 고작 몇 년 전에 시작된 전쟁의 산물이었다. 그때부터 세상은 채도를 잃은 채 잿빛으로 가라앉았는데, 그 몇 년간의 색채가 소년의 눈을 완전히 물들이고 말았다.

  이제, 잿빛이 아닌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본래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혹은, 전쟁이란 재앙이 닥치지 않은 세상이 얼마나 화사한지. 소년은 그에 대해 전혀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만큼, 음울한 잿빛에 익숙해진 탓이다. 그 우중충한 색채에 전염된 탓이다. 소년은 세상을 뒤덮은 잿빛이 자신마저 휘감고 있다고 종종 생각했다.

  그래서 소년은 고향을 떠나 이국의 도시에 숨어든 순간부터, 도시를 가득 채운 화사한 빛에 눈이 멀 것 같았다. 세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색이 가득한데, 이렇게나 빛나고 있는데, 소년의 세상만 지독한 잿빛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재앙이 닥치지 않은 옛 고향도 아마 이렇게 아름다웠을 것이다. 다채로운 색으로 빚어낸 화사한 풍경화였을 것이다. 그 날 소년은 눈부신 색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이미 제 눈을 물들인 잿빛을 몰아내려는 심산으로.

  “여기는 우리에게 희망의 땅이 될 거야.”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소년을 데려온 청년은 그렇게 말했다. 청년의 금빛 눈에 기묘한 열기가 비치는 것을 소년은 볼 수 있었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입에 담은 게 언제였던가. 소년은 그의 말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정말로?”

  “하트랜드보다 더한 지옥은 없어. 그곳에서 벗어난다면, 어디서든 희망은 찾을 수 있지.”

  지옥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어서, 그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너무 적은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이 화려한 도시에도 분명 어둠은 있을 텐데, 청년은 그 전까지 자신을 내리누르던 어둠 때문에 눈앞의 작은 빛에 들뜬 것이다. 언제나 날을 세우던 청년이 조금 느슨해진 것에 안도하면서도 소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펴지 않았다. 그들이 본래의 세상을 떠나 이 도시에 온 이유는 고향을 덮친 재앙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함이었으니.

  “이 평화로운 세상에 온 것으로 전쟁에서 도피하려는 건 아니지? .”

  조금은 냉정하게 물었다. 어린 나이라 해도 그들은 전사였고,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도피라는 선택지 따윈 없어, 유토.”

  “그러면, 이제 어떻게 싸울 생각이야?”

  “힘을 손에 넣어야지.”

  “?”

  “우리의 힘만으론 적을 막아낼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청년은 저 먼 곳, 도시의 중심부에 세워진 웅장한 건물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원군을 얻어서 돌아갈 거야.”

  소년은 어떻게라고 묻지 않았다. 청년의 얼굴에 결연함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소년은 청년이 제 말을 어떻게든 지키리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세상을 덮은 재앙에 쫓기고 종말을 늦추기 위해 싸워오면서 청년은 의도치 않게 강해졌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은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였던 그들조차 단련시켰다.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성장. 청년은 그 중에서도 발전 정도가 상당한 편으로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아왔다. 그는 무엇이든, 불가능한 것은 가능하게 만들어서라도 이루어내는 사람이었다. 기댈 것 하나 없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라면, 무엇이든 달려들어 악독하게 성공시키는 그를 믿을 수밖에.

  그 후 청년은 소년을 위험에 빠트릴 수 없다는 이유로 단독행동에 나섰다. 새벽이면 청년은 몰래 아지트를 빠져나가 느지막해서야 돌아왔다. 그가 그 이른 시간부터 도시를 어떻게 활보하는지, 소년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소 독단적이었고 때로 난폭했기에 혹여 위험에 빠질까 걱정이 되긴 했으나, 그를 말려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소년은 경험적으로 알았다. 목적에 사로잡힌 그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 같아 그 누구도 막아설 수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그리하여 위험한 행보를 스스로 멈출 때까지.

  참혹한 전쟁은 청년을 적과 같은 괴물로 만들었다. 아니, 청년뿐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이들이라면 전부 그랬다. 소년은 고향에서 자신들 저항군이 어떻게 변모했는가를 경험하여 알았고 지켜보아 알았다. 처음에는 그저 발악하는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전투를 최대한 길게 끌어가 종말을 늦추는 것을 목표로 삼아 그저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나 상대를 정직하게 물어뜯는 것만으로, 오래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적은 강했고 그들은 나약한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침략자가 닥치면 오래잖아 부대는 거의 전멸했다. 저항군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힘없이 무너졌다.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저항군은 마침내 전략을 바꾸었다. 그들은 침략자를 닮아가기로 했다. 적이라면 가리지 않고 총구를 겨누고,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적을 함정에 빠트렸으며, 걸려든 이들은 무참하게 죽였다. 적과 다를 바 없는 방식이었다. 적에게 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셈이었다. 그 악랄한 방식을 처음에는 대개 꺼렸으나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괴물이 되어서라도 살아남을지, 선량한 희생자로 죽을지. 세상을 덮친 재앙 앞에서 그들이 택할 선택지는 그 두 가지뿐. 저항군은 전자를 택했다. 그래야 부질없는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었다. 희생자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청년 역시 침략자와 같은 괴물이 된 지 오래였다. 그 중에서도 그는 적극적으로 침략자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어른들이 사라져 청소년들만이 휑뎅그렁하게 남은 저항군에서, 침략자와 같은 괴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게 청년이었다. 더는 잃을 수 없다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종말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적을 처리하고 쓰러져야 한다고.

  이 참혹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청년이 택할 수 있는 방식은 그렇게 악독한 것일 수밖에 없다. 원군을 얻어 돌아가겠다는 청년의 선언에 어떻게라고 묻지 않은 것은 그래서이기도 했다. 소년은 제 전우가 어디까지 꾀할지 두려웠다. 청년은 살아남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버렸다. 그가 무엇이든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 필수적인 무언가마저 버렸기 때문이었다. 가책 없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목을 졸라서라도 목적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청년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소년은 청년을 막을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의 행보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악독한 방식마저 인정하고 있기에. 그렇게라도 희망을 집요하게 찾는다는 것에 안도했기 때문에. 결국 자신 또한 어느 정도는 그와 같은 괴물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이들이라면 그 누구도 청년을 몰아붙일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청년의 방식에 삶을 빚지고 있었으므로.

  그런 상황에서 소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청년의 짐을 덜어주는 것. 청년이 무모하게 이국의 도시를 누비는 동안, 소년은 정보를 모으기로 했다. 두 사람이 이곳에 온 이유는 단순히 전쟁이 닥치지 않은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침략자의 수장이 한때 이곳에 머물렀다는 증거를 입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일 이곳에서 침략군의 비밀세력을 찾아낸다면, 미리 제거해 위험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원군을 청할 사람을 찾아보아야 한다. 청년이 전쟁에 지쳐 더 악독해지지 않도록. 전쟁이란 비극을 하루라도 빨리 끊을 수 있도록.

  정탐을 위해 아지트를 떠났다 돌아온 소년은 청년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는 본디 해가 지고서야 들어오는 사람이었고 지금은 한창 볕이 강할 오후. 보통 때라면 이 시간에 그가 있을 리가 없는데. 의문스러운 시선을 느낀 것일까. 무기를 매만지던 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원군을 구했어.”

  “누구에게?”

  “우리와 같은 적을 둔 사람에게.”

  여기서도 아카데미아를 경계하며 군사를 키우는 자가 있더군. 바로 덧붙이는 청년은 자못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재앙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찾아냈기 때문이리라. 전장에서 그들은 여전히 사냥감이었고, 사냥꾼에게 동등하게 맞서기엔 수적으로 너무도 불리했다. 청년이 원군을 구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청년이 평소보다 일찍 들어와 소년을 기다린 것도 이 다행스런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을까. 모처럼 일이 뜻대로 풀리는 것이 기쁘면서도 쉽게 믿기지는 않는 소년이었다.

  “우리를 위해 자기네 군사를 내주는 거야?”

  “아니. 자기들을 위해서지. 아카데미아가 노리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란 걸 내세웠어. 언젠가는 이곳도 노리게 될 거라고. 그 자는 그걸 막기 위해 군사를 주는 거다.”

  “결국 우리가 먼저 막아내라는 건가.”

  “아무래도 좋잖아. 그쪽이나 우리나 손해 볼 것 없으니.”

  “하트랜드로는 언제 돌아가지?”

  “군사가 준비되는 대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우리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그쪽도 잘 알고 있거든.”

  “그렇다면 우리도 준비해야겠군.”

  “그래, 너는 준비해둬. 유토.”

  “‘너는이라니?”

  청년의 말에서 소년은 위화감을 느꼈다. 살아남은 이가 줄어갈수록 우리에 집착하게 된 저항군이었다. 그런데 그는 우리라는 말을 피하고 도리어 너는이라는 말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부러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양.

  “나는 이곳에 있어야 해.”

  냉정한 목소리가 좁은 아지트를 갈랐다. 소년은 전우의 말이 흩어질 때까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그와 떨어진 적이 없었다. 저항군으로서 함께하게 된 이후, 청년은 그를 구하고 그는 청년을 구하며 살아왔으니.

  “?”

  “거래 조건이지. 처음 보는 이국의 저항군 따위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원군을 내어준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같이 온 동료가 있다고 말했더니 한 명은 여기 남아, 자기 군사들을 도와야 한다더라고. 그래서.”

  그 자를 완전히 믿을 순 없으니, 내가 남겠다고 했어. 설명을 마친 청년은 허리춤에 무기를 챙겼다. 금방이라도 싸우러 갈 것처럼.

  “그래서 널 넘겨주기로 한 거야?”

  “그냥 그쪽의 용병으로 싸워주는 거라고 생각해. 어차피 여기서나 하트랜드에서나, 싸워야 하는 건 같으니.”

  “그쪽에서 널 어떻게 쓸 줄 알고?”

  소년은 자신의 목소리가 차츰 격앙되어가는 것을 느꼈으나,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재앙 속에서 싸워오며 청년의 사고회로가 보통 사람의 것과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세상을 삼키는 재앙을 저지하겠다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괴물로 변모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쉽게 자신마저 담보하고 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명을 위해. 자신마저 전쟁을 끝낼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건 얼마나 허망한 행보인가. 소년은 화가 치밀어 청년의 멱살을 잡았다.

  “원군만 구하면 되는 거잖아. 유토.”

  텅 빈 목소리가 공허하게 귓가에 울렸다. 올려다본 청년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소년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청년을 놓아주며 소년은 헛웃음만 삼켰다. 눈앞의 청년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망가져 있었다. 아니, 미쳐있었다. 반복되는 상실과 끝나지 않는 재앙은 그를 이만큼 미치게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져 있었을까. 누이가 사라졌을 때부터? 동료를 거의 잃고 소년만을 건져온 때부터? 잿빛으로 물든 고향을 떠나, 연고라곤 없는 이곳으로 온 때부터? 알 길이 없다. 재앙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이 언젠가부터 그를 잠식했으리란 것만 짐작할 뿐이다. 그런 청년을 위해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전우로서, 같은 비극을 짊어진 동지로서. 그의 뜻을 따라주는 것.

  “날 하트랜드로 보내고 너도 바로 싸우러 갈 생각이지?”

  돌아올 말을 짐작하면서도 소년은 다시 물었다.

  “그래. 너는 원군과 함께 하트랜드로 먼저 돌아가. 돌아가서 싸워줘. 나는 이곳에서 싸우고 약속한 것이 끝나면 하트랜드로 돌아가 합류하지.”

  ‘먼저라고 말하긴 했지만 청년이 무사히 고향에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그 전에, 먼 타지인 이곳에서 희생될 수 있다. 혹은 원군을 내준 협력자에 계속 묶여 다른 싸움에 동원될지도 모른다.

  “약속해?”

  음울한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기에, 소년은 청년의 결심을 재확인한다.

  “약속해.”

  “내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다고 어떻게 장담해?”

  “지금까지 버텨왔잖아. 이제 원군까지 있으니 더 버티기 쉽겠지.”

  “살아남지 못한다면? 결국 만나지 못하고 싸우다 죽게 된다면?”

  “그럼 지옥에서 만나자.”

  자조 섞인 말을 흘리며, 청년은 웃었다. 흰 얼굴에 번지는 웃음엔 체념이 내비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싸우다가 괴물이 된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도 다시 평범한 소년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리란 것을. 현실은 절망의 연속이었고 희망은 너무도 흐릿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최악의 결말을 상상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리고 그들이 상상해온 종말은.

  “그래,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지옥뿐일 테니까.”

  파멸을 상정하고 있는 청년의 말에, 소년은 가볍게 동조했다. 지금까지 악귀처럼 싸워 버텨왔다지만 생존이란 행운이 계속 이어지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침략자에 맞서기 위해 택했던 방식이, 괴물의 삶이 그들 자체를 망가뜨리고 있단 것도 진즉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재앙의 굴레를 끊으려 노력해야 했다. 힘이 닿을 때까진 악독하게 싸워 다른 이들에게라도 미래를 주어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저항군으로서, 생존자로서 책임을 다할 길.

  그러다 마지막 순간이 찾아들면 괴물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사라지도록 하자. 낙원을 꿈꾸는 대신 지옥에 발을 들이도록 하자.

  아지트를 떠나 각자의 전장으로 향할 때, 그들은 같은 종말을 상상하고 있었다.